주님 성탄 대축일 낮미사
이사야 52,7-10 히브리 1,1-6 요한 1,1-18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루카 2,13)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이사야 예언서 9,5)라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아기 예수의 탄생은 구원자이신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세상에 오신 특별한 사건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께서 성령의 은총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시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환희의 선물입니까?
해마다 맞는 성탄절은 우리가 내적으로 다시 태어나고 모든 시련과 고통에 맞설 힘을 예수님 안에서 찾게 합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멀리서 온 이방인을 위한 빈자리 하나가 없어 당신 땅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탄생한 아기 예수는
지금 꿈을 잃어버린 이들, 가난하고 고립된 삶에 숨이 막히는 이들을 위해 세상을 바꾸시어 모든 것의 희망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만족을 모르는 소유욕 때문에 베들레헴의 구유를 잊고, 수많은 허영의 구유에 우리 자신을 내던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에서 가난해 보였지만 사랑으로 충만했던 아기 예수가 탄생한 그 구유는 생명의 양식인 하느님의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 그분의 참된 힘과 진정한 자유는 약한 이들과 힘없는 이들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가운데 드러난다는 것을 당신의 가난과 겸손으로 선포하고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성탄의 신비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여기는 모든 상황에서도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환대받지 못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시며 이들을 절대적 사랑으로 품으시는 하느님의 신비,
세상에 자신을 위한 공간이 없다고 느끼지 않게 하고 따뜻한 관계를 체험하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하느님의 신비입니다.
성탄은 불확실함과 두려움의 감정을 새로운 사랑의 힘으로 바꿀 것을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이 사랑의 힘은 긴장과 갈등 속에서도 스스로 환대의 땅이 될 수 있는 용기를 우리에게 선물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십시오, 그리스도께 문을 활짝 여십시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사람이 되시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오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도 변화합시다.
주변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한 무관심을 떨치고, 동참하고 연대하는 신앙인들로 거듭납시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두 팔을 뻗어 아기 예수님을 들어 높이듯이, 병들고 헐벗고 목마르며 갇힌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그들을 기쁜 마음으로 품에 안읍시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작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나태한 무관심에서 깨어나, 고통받는 이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귀를 열어 예수님의 사랑과 정의가 모든 이들 안에서 실현되는 세상을 만들어 나갑시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이사야 예언서 9,1)
하느님 백성 여러분! 예수님의 탄생을 함께 기뻐하며 축하드립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언제나 사랑과 기쁨이, 특별히 우리 안에 오신 큰 빛이 함께하길 기도하겠습니다.
2022년 12월 25일
춘천교구 김주영 시몬 주교
*************
주님 성탄 대축일 낮미사
이사야 52,7-10 히브리 1,1-6 요한 1,1-18
가난의 표징으로 둘러싸인 갓난아기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권력자의 호적조사령으로 요셉은 만삭의 마리아와 함께 길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요즘도 그렇습니다.
권력자들에 의해 전쟁이 터지고 징집이 되고 삶의 터전이 파괴되고 많은 이들은 살 곳을 찾아 떠돕니다.
우크라이나, 미얀마 등이 그렇고 여기저기 폭압자의 어둡고 음습한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무기 공급이나 승전 소식이 희망이 아닙니다. 한 아기의 탄생, 그렇습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희망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세상의 모든 아기의 탄생 역시 위대하고 근본적인 희망이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숨통을 열고 세상에 나와 울음을 터뜨릴 모든 작은 생명에게 축복이 있길 빕니다.
1. 인간을 사랑하신 하느님의 방법
인간이 하느님을 믿은 것이 아니고, 먼저 하느님이 인간을 믿었습니다.
갓난아기가 되어 인간의 손안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긴 경천동지의 사건입니다.
춥고 배고프고 목마른 신체조건을 가지고 시공간에 제약받는 인간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나자렛에서 겸손되이 일상을 익히시고, 세상에 나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다가, 급기야는 십자가의 제물이 되시고,
마지막엔 빵이 되어 먹히는 존재가 되십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랑의 발로로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얼마 전, 아이에게 성탄카드를 받았습니다.
이번 성탄에 태어날 아기 예수님은 아프지 않고 무럭무럭 잘 자라났으면 좋겠다는 내용입니다.
아이는 매년 성탄이 되면 아기 예수님이 한 명씩 태어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매년 성탄을 맞이하지만, 오늘 태어나신 그분, 정작 내 삶 속에 그분의 자리가 없고,
그분이 계시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사랑의 응답이 아닐 것입니다.
2. 구유 안에 담겨있는 신비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마구간’의 가축들이 자신들의 거처를 내어 주었나 봅니다. ‘구유’ 안에 ‘포대기’에 싸여 누워 있는 아기가
구세주 탄생을 알아보는 표시라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이 세상, 그 어떤 이도 예수님의 구원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워 있는 아기’가 아니라 ‘눕혀있는 아기’입니다. 운신할 수 없는 아기, 벌써 두 팔 벌려 백성을 환영하는 모습입니다.
조만간에 십자가에 못 박혀 들어 올려질 것입니다. 아기를 중심으로 내려다보는 커다란 눈망울의 송아지 가족,
요셉 마리아 그리고 목동들을 상상해 봅니다. 아기는 구유(먹이통)에 눕혀있습니다.
모든 이들의 빵이 되시고 가축들의 먹이로까지도 감수하겠다는 의미일까요? 구유 안에 모든 신비가 담겨있습니다.
무릎을 꿇어야 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복음의 기쁨’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가난하게 되실 정도로 하느님의 마음속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특별한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 역사 전체는 가난한 이들의 존재를 특징으로 합니다.”(「복음의 기쁨」 197항)
이제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지 않고 땅에 계십니다. 목동들이 밀고 들어간 문은 하늘의 문이었습니다.
가난한 이의 대표이면서 인류의 대표입니다. 그들이 엎드려 경배드린 것은 가난한 이를 하늘로 들어 올린 행위였습니다.
가난의 표징으로 둘러싸인 갓난아기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지이며, 하느님 자신입니다.
아기 예수는 구유에 눕혀진 채 온몸으로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우리는 우리 신앙과 가난한 이들 사이에는 떼어 놓을 수 없는 유대가 있다는 사실을 주저 없이 밝혀야 합니다.”
(「복음의 기쁨」 48항)
의정부교구 서춘배 아우구스티노 신부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12월 25일
************
주님 성탄 대축일 낮미사
이사야 52,7-10 히브리 1,1-6 요한 1,1-18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신 주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주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주님의 빛 안에 모두가 충만한 기쁨이 넘치는 성탄이 되기를 바라며,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그 은총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이들은 구세주의 탄생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구약의 모든 백성들이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렸듯이,
현재를 사는 우리도 특별히 대림 시기를 지내며 차별, 대립과 갈등이 가득한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으로 오실 구세주의 탄생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 모두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큰 사건입니다.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구세주의 탄생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 모두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성탄입니다.
그래서 성탄 밤 미사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티토서 2,11)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는 이렇게 성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분은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사람이 되시고, 영혼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인간 영혼과 결합 되십니다.”
이처럼 성탄의 의미는 모든 이들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도 “말씀은 이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공동번역성서』 1요한 4,9)”(458항)
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모든 이들을 비추는 참빛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사람이 되어 오신 구세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끝나지 않는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의 어려움은 단순히 코로나19 감염 때문만은 아닙니다. 모든 이들이 코로나19로 인해 야기된 인간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3년 전 코로나19가 시작되면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나만 잘하면, 우리나라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전 세계 모든 이가 형제자매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서로 도와야 함을 깊이 느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까지 생각했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좀 더 넓은 마음으로 모든 이들을 향한 사랑의 연대와
다른 이의 아픔에 대한 공감과 돌봄의 중요함을 깊이 체험하였습니다.
전 인류에게 위협으로 다가온 코로나19 감염병 확산은 공동의 집을 살아가는 우리가 한 형제임을 느끼게 해 주었고,
교황님의 말씀처럼 형제애만이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하지만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코로나19와, 언제 다시 좋아질지 알 수 없는 사회 지표들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어렵게 합니다.
개인주의라는 편안함과, 나누지 않기에 유지되는 풍요로움은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로 하여금 이웃에 대한 무관심을 키워갑니다.
또한 어렵고 고통받는 이들의 소리를 뒤로 하고 자신만의 이익, 자국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형제애가 아닌 무관심이 더욱 점철되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안위나 소수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문화는
서로의 인간관계를 어렵게 하고, 사회적으로는 양극화 현실을 더욱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못하고 있고, 말을 한다 하더라도
그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 모두가 소통 부재로 인한 불만과 화만 가슴에 쌓아두고 살아가는 실정입니다.
그래서인지 점차 우리는 이웃이 외치는 고통의 소리에 귀를 닫으려 하고, 같은 마음으로 함께 슬퍼하지도 못하며,
서로의 의견을 듣지 않는 세상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 예수님께서 빛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 빛은 소수의 몇몇을 비추는 빛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비추는 참빛이십니다.
빛으로 오신 구세주는 우리에게 열린 마음으로 모두와 함께 이 기쁨을 느끼기를 원하십니다.
모두가 함께 그 빛이 주는 희망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모두가 성탄을 통해 주시는 당신의 사랑을 깊이 느끼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인간이 되신 사랑을 깊이 느끼는 이 성탄에 우리 모두 구세주의 사랑을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고립된 이들에게 다가서는 형제애를 나누는 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경제적인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나눔의 손길을 베푸는 시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이들, 자신만이 옳다는 생각에 갇혀있는 이들에게는 만나고 대화하는 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 밖에도 다양한 빛의 자녀다운 행동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 안의 한 형제로서 함께 기쁜 성탄을 보냈으면 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성탄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2022년 12월 25일
천주교 인천교구 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