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아시는 바와 같이 유위공덕(有爲功德)을 떠나는 공부입니다. 불교는 그것을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으로 말합니다.
상대적이고 유한적인 것은 유위법이며 상대적인 것을 떠나 무제한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를 무위법이라 합니다.
종교라는 것은, 어느 종교나 다 제한적인 것을 떠나서 무제한적인 것,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는 가르침입니다.
특히 우리 불교는 생사해탈 이라는 거창한 명제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생사해탈 이라고 하는 것은 개념적으로는 불교외에 없습니다.
종교의 본뜻에서 보면 해탈이라는 뜻이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다 들어있다 하더라도, 직설적으로는 바로 생사를 떠나버리는, 즉 죽거나 사는 한계를 뛰어넘어 버리는 가르침은 실로 불교외에는 없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마음을 열지 못하면 생사를 떠나는 커다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무슨 종교든지 마음을 열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그러나 애를 너무 많이 쓰기 때문에 잘못하게 되면 집착을 하게 됩니다. 집착을 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불교는 그렇게 잔혹한 사건을 자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중세 기독교 사회는 숭고한 예수님의 뜻과는 달리 처참하고 암담했습니다. 특히 카톨릭에서 행한 종교재판은 잔인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십육, 십칠세기까지 십년 동안에 이단자로 몰려서 불에 태워져 죽은 사람이 십만명이 됩니다. 십만명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입니까? 일본 불교사를 볼 때도 종파가 나눠지면서 법화경을 신봉하는 종파, 염불을 주로하는 염불종 등, 종파 이기주의의 대립이 첨예했습니다. 염불종과 법화종, 천태종 사이에서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스님들끼리 서로 싸우면서 귀를 베고 코를 베고 했습니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그 독단, 그 도그마, 집착이란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여기 저기 집회에 다니면서 많이 보고 있습니다만,
가령 염불을 한다고 하면 염불한다는 것이 얼마나 쉽습니까? 그야말로 부처를 생각하고 부처님 이름을 부르고 싶을 때 부르고, 부르기 싫으면 속으로 외우고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꼭 자기 식으로 해야 한다고 합니다. 소리도 꼭 자기 식으로 내야 한다고 합니다. 같은 염불종도, 특히 일본 불교에서 있는 것입니다만, 생각은 말고 꼭 소리만 내서 하라는 종파가 있습니다.
진종(眞宗)의 경우에는 꼭 소리내서 하라고 합니다. 염불하는 법으로는 먼저 관상염불(觀象念佛)이 있습니다. 관상염불은 부처님의 원만스런 모습을 관찰하는 염불 방법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이 얼마나 산란스럽고 분별심이 많습니까? 산란하고 분별심이 많아서 그냥 염불만 하면 마음이 통일이 안돼요? 그래서 부처님의 원만덕상을 상상하거나 보면서 하는 염불이 관상염불 이에요.
가령 관음상을 모시고 참배하면서 또 우러르면서 염불을 하면 훨씬 마음이 차분하고 공부가 더 잘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불상은 우리의 마음을, 그 순수한 마음을 지속 시키는데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상을 상상하지 말고 소리만 내야 된다하면 어찌되겠습니까?
다음으로는 실상염불(實相念佛)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진리 자체를 우리가 상상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진리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실상염불은 우리 눈에 보이는 대상이 아닙니다. 보이진 않지만 이 우주는 부처님 생명이란 말입니다. 관무량수경에 훌륭한 말씀이 있습니다.
시방여래(十方如來)는 법계신(法界身)이라 하는, 아주 고도한 진리를 담은 말씀입니다. 즉 모든 부처님은 우주를 몸으로 합니다.
이런 말씀은 방편을 떠나버린, 진리 그대로의 말씀입니다. 우주 자체가 오직 하나의 생명이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우주를 몸으로 한다고 생각할 때는, 산도 부처님, 물도 부처님, 곤충도 부처님, 다 부처님 아님이 없습니다. 중생과 부처의 차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중생은 자꾸만 나누어봅니다. 어째서 그런 것인가? 중생은 겉에 있는 상만 보고 집착합니다. 나라는 상, 너라는 상, 사랑한다는 상, 그런 상만 집착하는 것이 중생입니다.
성자는 모든 존재의 본 바탕을 봅니다. 본 바탕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똑같습니다. 불교에서 많이 인용하는 수파(水波)의 비유가 있습니다. 물과 파도의 비유입니다. 바람에 따라 파도가 일파만파로 갈라져도, 결국엔 똑같은 물입니다. 그것과 똑같이, 부처님은 광대무변한 우주바다의 물에 비유할 수 있고, 중생의 번뇌나 모든 분별심은 파도에 비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파도와 물이 다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파도가 천파만파 부서지더라도, 이 파도는 결국 물입니다. 우리 중생이 인과의 법칙에 따라 산이 되고 하늘의 별이 되고 인간이 되고 금수가 되더라도,
똑같이 모두가 다 우주의 법인 그 부처님 몸에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반야심경을 보나 금강경을 보나, 전부다 그런 도리와 성품과 현상의 관계가 담겨 있지요. 중생은 현상만 보는 것이고, 성자는 그 본 바탕을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상염불은 가장 고도한 염불로써, 우주의 실상, 우주의 본바탕을 관찰하면서 하는 염불입니다. 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더라도, 덮어놓고 부처님은 저 밖에 계시다가도 우리가 염불하면 우리한테 와서 도와주시겠지 하는 것은 타력염불(他力念佛)입니다. 보통 그렇게 많이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애써서 나무아미타불하고 관세음보살하고 외우면, 부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가호를 주시고 복을 주시겠지 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소박한 방편 염불입니다. 염불은 염불이지만 참다운 염불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꼭 권하고 싶은 염불법은 실상염불입니다.
우주의 진리에 따르는 염불이 실상염불입니다. 소승법은 부처님께서 편의에 따라, 중생의 그릇에 따라, 중생 근기에 맞게 하신 말씀이지요. 그러나 진리는 절대 둘이 아닙니다.
소승이나 대승으로 나눈 것도 하나의 방편인 것이지, 하나의 진리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염불을 하든 의단을 품고 화두 공부를 하든, 그 본뜻은 모두가 부처님이 되어가는,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이 되는 데 있습니다. 왜 꼭 부처님이 되어야 하는가?
부처님이 되지 못하면 참다운 행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생은 누구나가 다 한도 끝도 없는 행복을 추구하고, 아는 것에도 기왕이면 세상만사 다 알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면으로나 최선의 것을 추구합니다. 우리 인간이 원래 그런 존재입니다. 즉 우리 인간의 본바탕이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본성이 부처이기 때문에 한도 끝도 없이 다 구하는 것이지요. 부처라는 것은 어느 면으로 보나, 어떤 면으로 보나 완벽한 것이 부처입니다.
따라서 우리 본성이 부처라서 한도 끝도 없이 다 구하는 거예요. 상대 유한적인 것은 다 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한계가 없으나, 물질도 한계가 있고 자원도 한계가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여기에 치열한 경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그러나 종교라는 것은, 이렇게 갈망해 마지 않는 눈에 보이는 존재를 모두 허망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실로 있다고 보지를 않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제법(諸法)이 공(空)이라 합니다. 제법이라고 하는 것은 주위에서 존재하는 모든 현상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현상이 공입니다. 또는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一切有爲法如夢幻泡影) 이라고 합니다.
유위법 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상대적이고 유한적인 것인데, 마치 꿈이요, 도깨비요 그림자요 거품과도 같은 것입니다. 꿈은 형상이 있습니까? 꿈을 꿀때는 실제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꿈을 깨고나면 무엇이 남습니까? 그림자는 빛이 비치고 모양이 있으면 모양에 따르는 그림자가 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보이지만, 또 분명히 없단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우리 중생이 너요 나요 밉다 좋다 하는 것은 그림자 같고 꿈같다는 것입니다. 본래가 꿈이고 허깨비 같은 것을?
우리 중생이 잘못 봐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 없는 것인가 ? 우리가 깨달아서 성자가 되면 허망하게 보일 것인데, 우리 중생은 미운 사람은 꼭 밉게 보이고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스럽게만 보입니다. 그것은 중생의 착각입니다. 그것은 중생이 잘못보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인연 따라서 잠시간 허망상(虛妄像)을 보이고 있습니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라, 모든 존재는 어느 순간도 고유한 존재가 없습니다. 우리 세포도 역시 일초의 몇 천분의 일초 동안도 세포가 그대로 있지 않습니다. 순간 순간 신진대사 하며 변화합니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조금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어느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존재란 것은 다 그러합니다. 다만 중생이 잘못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육안의 참다운 실상을 회복해서 천안통(天眼通)을 통해야 비로소 존재의 본바탕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제 아무리 정밀한 현미경을 놓고 본다 하더라도, 물질이라는 한계 내에서 보는 것이지, 질이 떠나버린 저쪽 세계는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모든 존재가 다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 같다는 이 소식을, 아무리 섭섭해도 꼭 깊이 생각해 두셔야 합니다.
오직 문제는 생사해탈이라, 우리가 꿈을깨서 참다운 진리를 향해가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기왕에 실상염불을 하시려면, 제일 고도의 경지의 마음으로 염불을 하십시오.
실상염불 이라는 것은 그냥 마음으로 소리만 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본 바탕을 그대로 생각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온 우주가 다 부처입니다. 이 사람을 보나 저 사람을 보나 이것을 보나 저것을 보나, 길 가다 독사를 보나 무엇을 보든지, 그 모든 것이 본래가 부처입니다. 모든 것을 부처로 보는 것이 실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불자님들, 우리의 본래 성품은 참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염불을 하시려면 그렇게 바르게 실상염불을 하십시오. 실상염불을 해야 비로소 참다운 공(功)이 있단 말입니다. 실상염불의 공은 어디에 다가 비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을 보나, 좋은 사람을 보나 어떤 것이나 다 부처님으로 생각을 하면, 그때는 서로 상통이 됩니다. 내외가 살 때도 부인이 남편을 부처로 보고 남편이 부인을 부처로 보면, 그보다 더 좋은 관계가 어디 있겠습니까? 친지나 사제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어떤 것을 보더라도 다 부처로 보는 실상염불을 하는 것이, 부처님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염불법입니다.
부르노라고 하는 십육세기에 살았던 분이 있습니다. 도미니꼬 교회의 유명한 수사입니다. 또 니콜라스 콘돌라스라는 신학자가 있어요. 그분은 이른바 범신론자(汎神論者)였습니다. 기독교는 하느님만 믿는 일신론 아닙니까? 우리 불교 또는 힌두교와 같이 천지사물 일체 존재와 우주 자연이 바로 신이라고 하는 것이 범신론입니다. 그래서 자고로 이 범신론과 일신론 사이에서 서로 잦은 다툼이 있어 왔습니다.
신부인 니콜라스라고 하는 분은 추기경을 지낸 분인데, 교황 다음가는 높은 지위에 있던 분인데도, 일신교가 아닌 범신론을 주장하셨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 같은 그리스 철학을 공부해 가지고 거기에서 영향을 받았겠지요. 부르노라는 수사 역시 니콜라스라는 선배를 따라 일신론이 아닌 범신론을 주장했습니다. 그 당시 카톨릭측에서 범신론을 주장하는 사람을 제일의 이단으로 몰았습니다.
그래서 로마 교황청으로 잡혀가서, 그대가 살려면 이 범신론 주장을 포기하라고 강요를 받았습니다. 용기가 없고 신념이 약한 사람이라면, 화형당하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그걸 면하기 위해서 신념을 포기하겠습니다 그러면 될 것을 그 수사는 신조가 굳은 사람이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칠년이나 감금을 당했는데도, 그 분은 칠년동안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칠년후에 화형을 당했지요. 얼마 전에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대한 신문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이 분한테 대해 로마 교황청에서 재판을 한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동설이라는 것을 주장했는데, 그 당시는 지동설과 천동설로 다툼이 많았습니다. 당시 카톨릭 사회에서는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하는 천동설이 지배 했었습니다. 그것이 카톨릭 세계관으로 확립되어 있었으므로,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하면 그 권위가 무너지고 세계관이 흔들리겠지요? 그래서 그 당시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전부 종교재판에 몰아서 화형 시겼습니다. 갈릴레오도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따라 지동설을 주장했기 때문에 감금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 분은 부르노와 달리 신념이 약했던지 지동설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잘못된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현혹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비판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 신념을 꺾었습니다. 그러니까 화형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팔년이나 감금을 당했습니다. 칠십팔세로 집에서 죽을 때까지 집에서 감금당했 습니다.
갈릴레오가 재판을 받고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요. 자기는 지동설을 주장했는데 그 주장을 폐기하라고 해서 표면적으로는 폐기를 했지만 자신의 신념을 부정할 수는 없어서 지구는 돈다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독단주의, 도그마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무섭습니다. 그 독단주의를없애기 위해 어떻게 해야합니까? 이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앞으로 종교를 어떠한 방식으로 믿든지 간에, 절대로 독단적인 사고를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독단주의를 지양해서 정말로 성자의 바른 자세를 종교를 생각할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그 현상적인 문제는 상대적인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아셔야 합니다.
어떤 문제라도 세상의 인연따라 생기는 것은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독단을 부리지 않기 위해서는 모두를 다 그 근본 자리에서 원래의 생긴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그 본래있는 대로 보지를 않습니다.
자기 업대로 보지요. 유명한 일수사견(一水四見) 이란 말이 있습니다. 똑같은 물을 상대 할때도 우리 중생들은 먹는 물로 봅니다.
귀신은 물을 피로 봅니다. 고기는 물을 자기가 사는 집으로 봅니다.
천상 사람들은 물을 영롱한 구슬, 보배로 보고, 부처님은 신묘한 불성으로 봅니다.
중생은 업의 거울로 사물을 보는 것이지, 사실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대로 보는 것은 실상관입니다.
실상관 이란 우주를 부처님이 보시는 대로 보는것입니다. 조금도 가림이 없이 전부를 다 하나의 불성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처님의 견해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둘로 나누고 셋으로 나누어 보는데, 부처님의 참다운 혜안, 부처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모두가 다 하나로 보입니다. 간단 명료합니다. 다만 부처님이 하나로 보는 견해를 중생들 자신이 모르는 것이 문제일뿐입니다. 업장이 무거운 사람들은 정말로 그렇게될 수 있을까 의심하고, 자기가 가진 견해대로, 보고 배운 지식대로 봅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업장이 가벼운 분들입니다. 따라서 업장이 가벼운 사람들은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부처님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如語)하시고, 참다운 진리를 말씀(眞語)하시고, 헛된말씀(不異語)을 하지 않으시고, 우리 중생을 속이는 말씀은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처님 말씀을 정말 온전히 인정하고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이 되지 않겠습니까? 부처님 말씀을 따르려면,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견해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부처님의 소견을 따르는 것은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이라 하는데,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다 쉽습니다.
육조혜능이란 스님은 위대한 도인인데 일자무식입니다. 그분은 전혀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도통하고 보니까 빛이 충분히 비치어 우주가 훤히 드러납니다. 우주가 하나의 생명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분한테 법문을 들으러 수천명이 아주 멀리서 오고 그러니까.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여러분 저같은 사람말을 들으려고 멀리서 자주 오지 마십시오, 부처님 가르침을 꼭 믿어 버리면 두 번 다시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로 믿으십시오 하셨습니다. 제 법문을 들으러 오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꼭 신인(信認) 하시고 바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다시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말씀은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우리 마음으로 부처를 이룬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과 위대한 부처님의 마음을 대비해 보아도 조금도 차이가 없는 생명의 실상입니다.
달마스님께서 이조 혜가스님께 하신 법문도 마음의 실상을 그대로 보이신 것입니다. 이조 혜가스님이 달마스님께 가서 스승이시여,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이 마음을 해결해 주십시오 하니까 달마스님이 그대 불안한 마음을 내 놓아라, 그러면 내가 그 불안한 마음을 가시게 해주마 하셨어요, 그러나 혜가스님이 불안한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아무리 찿아 봐도 안보여요. 아파하는 마음이 어디에 있고, 미워하는 마음이 어디에 있고, 좋아하는 마음이 어디따로 있단 말입니까? 좋아하는 마음도 모양이 없고 미워하는 마음도 모양이 없고 똑똑한 척하는 마음도 모양이 없습니다. 모양이 없으면서 분명히 존재하고, 한도 끝도 없는 것을 구합니다. 김씨나 박씨나 예수나 맹자나 그 마음의 모양은 없습니다.
모양이 없다는 것은 사실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모양이 없다는 것은 마음이 얼마만큼 크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도 끝도 없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입정(入定)후에 삼매에 든다고 생각할 때, 그 때 마음은 사실 허공과 똑같은 것입니다. 허공이 한도 끝도 없지 않습니까. 마음은 한도 끝도없는 것입니다. 성자는 한도 끝도 없는 그 마음, 그 마음 자리를 열어서 온전히 간직한 분인 것이고, 우리 중생은 내 마음, 내 몸뚱이 내 심장이 있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마음을 열어서 마음이 한도 끝도 없이 광대무변한 사람은 몸뚱이도 제 것이 아닙니다. 범부와 성자를 구분한다면, 범부는 꼭 제 몸, 제 집, 제 가정만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회 봉사를 권하고 역설한다 하더라도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을 못 벗어납니다.
남한테 베풀더라도 자기 몫은 남겨두고 남한테 베풀어야 겠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자는 조금도 주저가 없습니다. 주저함이 없으니까, 주린 범한테도 순간 자기 몸을 몽땅바쳐 버립니다. 설산동자(雪山童子)가 진리를 구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나뭇가지에 올라가서 나찰귀신(羅刹鬼神)한테 조금도 주저없이 자기 몸을 던져 버렸습니다.
과거 전생의 석가모니부처님은 십이겁(十二劫)동안을 앞당겨 성불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몸뚱이를 개인적인 존재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연에 따라 잠시간 모양을 나툰 것이지, 어느누구 것이라고 소속이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내 몸이나 자기 남편 몸이나 아내 몸이나, 인연따라 잠시간 모양을 나투었고 금생에 잠시간 만난 것이지 꼭 내생에 다시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영원히 만나는 것은 극락세계에 가서 가능합니다. 극락세계는 영원히 한곳에서 만납니다. 구회일처(俱會一處) 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말씀을 믿고 부처님 믿고 염불많이 하면 일념왕생(一念往生)이에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부처님을 생각할 때는 임종때 그 순식간에 업장을 다 녹여 버립니다. 그때 극락세계에 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절대로 자기 소견 하나로 옳다고 고집하지 말고, 모든 문제를 부처님법에 비추어서, 부처님 법으로 해결 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본체, 본바탕, 주체성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인생관과 세계관을 바르게 세우셔야, 함부로 덤벙거리지 않게 됩니다.
천지우주가 일미평등(一味平等)입니다. 모두가 다 무차별하게 부처뿐이에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부처님의 사상대로 생각 하는것이고, 또 우리의 불안의식을 온전히 없애는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