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인
지은이 길리언 헬프갓, 알리사 탄스카야
옮긴이 권국성, 김지향
제 1부 도마지
제 1장 첫만남
"지금 만나는 사람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크리스 레이놀즈 박사는 내 가방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나는 방금 퍼스에 업무차 도착한 참이었다. 장시간에 걸친 비행기 여행과 타는 듯한 11월 더
위 때문에 약간 얼이 빠진 상태였다. 거실에 들어서서 어둠에 적응을 하려니까, 아주 유별난 사
람이 눈앞에서 있었다. 그는 방금 수영장에서 나와 물을 뚝뚝 흘리면서 내 손을 잡고는 놓을 생
각을 하지 않았다. 미소 띤 얼굴로 펄쩍펄쩍 뛰고 이따금씩 젖은 얼굴을 내 얼굴에 대기도 하면
서 말을 쏟아 내 놓았다. "안녕, 길리언 달링, 만나서 반가워요, 길리언 달링. 당신이 온다고 크
리스가 그랬어요. 정말 당신이 왔군요, 길리언 달링? 와서 내가 연주하는 걸 들어 보세요. 리
카도에. 오늘밤에 올거죠, 올거죠? 리카도에 말예요, 길리언 달링?"
이런 낱말과 표현이 정신없이 되풀이되는 가운데, 꼭 안긴 채로 또 얼굴에 온통 입맞춤 세례를
받으면서 나는 라운지 안 야마하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곳으로 휩쓸려 갔다. 왁자지껄한 와중에
어렴풋이 크리스가 하는 말이 들렸다. "길리언, 데이빗 헬프갓입니다."
나는 완전히 얼이 빠졌다. 나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이 사람은 머리를 앞으로 수그린 채 정신
없이 뛰고 수다를 떨면서, 팔이 아래로 하릴없이 축 늘어져 있다가도 내 팔을 가볍게 건드리는가
하면 야마하 피아노를 토닥거렸다. 반쯤 감은 눈으로 이따금씩은 나를 흘끔흘끔 바라보는데, 안
경이 마치 콜라병 밑부분같이 두꺼웠다. 데이빗은 검게 그을려 있었지만 얼굴은 그리 건강한
이 아니었다. 이 사이에 끼여 있는 담배는 입맞춤을 할 때에만 잠시 빼내곤 했다.
그는 다시 한 번 나를 꼭 껴안았다. 좀 우스꽝스러웠다. 입을 벌린채 내 이마에, 볼에, 귀에
가볍게 입맞추며 말했다. "길리언 달링, 오직나를 위해 와 주었다니. 그것도 시드니에서, 오직나
를 위해. 상상해 보세요! 그렇게나 먼데서! 오로지 내가 연주하는 걸 듣자고. 오늘. 와서, 어쨌
든, 어쨌거나. 얼마나 놀라운지! 놀라운 은총, 은총, 감사, 감사, 감사할 수밖에. 좋아요. 아주 좋
아요, 달링. 그래서 오늘 저녁에 리카도에 올 거죠, 길리언 달링? 오는 거죠?" 일방통행식 대화
는 계속되었다. 잠시 숨을 몰아쉴 때에만 중단될 뿐이었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말에서 의미를 풀이하려 애쓰는 동안에도 나는 쉴 틈을 주지 않는 괴
짜이면서 한편으로 그지없이 다정스런 이 사람에게 내가 이끌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피터 팬이 나타나 마법의 세계로 나를 이끌고 가는 것 같았다.
잠시 뒤 크리스는 수술 때문에 병원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가는 길에 데이빗을 하숙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크리스 집에 홀로 남게 되자 나는 한숨을 돌리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길리언
달링, 리카도로 와요" 하는 말이 그 때까지도 내 머리속에서 맴돌았다. 거절할 수 없는 초대였
다.
그 날 저녁 외출 준비를 하면서 나는 기대감에 몹시 흥분하고 있음을 느꼈다. 데이빗이 여성
적인 것을 매우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꽤나 신경을 써서 금색과 흰색 레이스로
차려 입었다. 그렇지만 내가 데이빗의 반응을 바라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낯선 사람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친 것일까?
그 때까지도 약간 얼이 빠진 생태에서 나는 크리스와 함께 차를 몰고 데이빗을 태우러 갔다.
가는 길에 크리스는 데이빗이 리카도의 연주자가 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데이빗은 60년대에
유명한 음악 신동이었고 그래서 퍼스에 있는 음악인들이 그에게 기대를 많이 걸었다. 하지만 데
이빗이 신경쇠약에 걸리는 바람에 전문 연주무대에서 본 지는 십 연도 더 되었다고 했다. 사실
상 잊혀진 상태였다. 60년대의 데이빗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듯이, 얼마 전까지
만 해도 크리스 역시 데이빗이 런던에 유학을 간 이후로 계속 해외에 머무르고 있는 줄로만 알았
다. 그러다가 어느 날 데이빗의 동생이 전화를 걸어, 리카도에 일자리가 있는지를 물은 것이다.
리카도는 포도주를 파는 술집이었다.
몇 주 뒤, 우연히도 리카도에서 연주를 하던 고전음악 피아니스트가 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
다. 몇몇 피아니스트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으나 모두 술집 연주를 거절했다. 결국 크리스는 데
이빗의 전화번호를 돌렸다. 데이빗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좋아요, 크리스. 연
주하고 말고요. 기꺼이 연주하죠." 크리스가 수고료 이야기를 꺼내자 데이빗이 말을 가로막았다.
"공짜로 하죠. 공짜로요." 크리스가 한동안 설득한 끝에 데이빗은 수고료를 받기로 동의했다.
그 날 저녁, 크리스는 줄담배를 피우는 허깨비 같은 사람이 술집 손님들을 헤치며 피아노를 향
해 초조한 걸음을 옮기는 것을 보고 낭패감을 느꼈다. 그 사람은 얼룩 투성이 누더기 같은 크리
스마스 캐롤집과 따라부르기용 악보를 꺼내고는 양손 가운뎃손가락으로 건반 몇 개를 눌러보았
다. 기이하게 생각한 손님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하고, 기가 막힌 크리스가 어떻게 해 볼 생각으로
피아노로 다가가는 순간, 기술적으로 완벽한 음정이 술집 안을 가득 메웠다. 데이빗이(왕벌의 비
행)으로 건반 위를 내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입이 딱 벌어진 손님들은 이내 소리를 죽였다. 그
때부터 데이빗은 리카도의 정규 연주자가 되었다.
우리가 데이빗의 하숙집에 도착하자 데이빗은 서류가방을 겨드랑이에 끼고 나타났다. 여전히
너덜너덜한 악보뭉치가 빠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약간 짧은 바지는 아쉽게도
손질이 안된 상태였지만, 깨끗한 흰 셔츠에다 검은 나비넥타이 차림이었다. 정수리 부분이 벗겨
져 가는 곱슬 금발머리를 물을 발라 뒤로 빗어 넘겼고, 그리고 저 빼놓을 수 없는 담배가 이 사
이에 끼여 있었다. 그는 얼른 가고 싶어 안달이었다.
리카도가 자리잡은 동네는 어느 모로 보아도 유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술집 위층에는 배낭족
들 호스텔이 있었고, 술집 내부는 50년대 스타일이었다. 어두운 벽 색깔에다 철제 의자가 있었
고, 창은 없지만 화분이 아주 많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청중들의 기대감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
다. '안녕', '어서 와요', '잘 있었어요?' 등등 인사를 들을 때마다 데이빗은 씩 웃곤 했다. 여
러
계층, 여러 연령대 남자들이 바에, 벽에 늘어섰고, 의자는 빈 곳이 없었다. 모두가 '천재' 를 기
다
리고 있었다. 상당수는 매주 두세 번씩 찾아오는 손님이었다. 거의 팬클럽이라 할 수 있었다.
광채 띤 데이빗의 얼굴은 마치, "이게 꿈일까 생시일까!"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홀 안 한가운데 작은 무대 위에 피아노가 놓여 있었는데,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달려가듯이
데이빗은 곧장 피아노로 다가갔다. 연주를 시작하지도 않았지만 피아노에 얼마만한 애정을 지니
고 있는지를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가 자리잡고 앉자마자 - 입에는 담배가 매달린 채였다 - 커
피 한 잔이 나오고, 데이빗은 그 커피를 단숨에 꿀꺽 삼켰다. 손님들은 이제 대부분 주의를 기울
이고 있었다. 단골들은 차분히 기다렸고 처음 온 사람들은 호기심이 가득했다.
청중이 데이빗에게 이끌리기 시작한다는 것을 그의 손가락이 건반을 가볍게 건드려 나오는 첫
소리에 바로 알 수 있었다. 데이빗은 달라져 있었다. 평소에는 어색하고 정신없이 시끄러운데다
가 불안해 보이는 사람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자기 재능에 자신감을 갖고 완전히 몰입하는
것이다. 그의 얼굴에는 뭐든지 다 아는 체하는 것 같은 장난기마저 어려 있었고, 그의 엄청난 클
래식 레퍼토리 중 몇 곡인 쇼팽의 (G 단조 발라드)와 리스트의 (헝가리광시곡 2번), 베토벤의 (열
정)을 연주하는 동안 기쁨이 퍼져나오는 듯했다.
연주하는 내내 무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가 새 담배에 불을 붙여 데이빗의 입에 물려주
었다. 커피가 계속 나오고 잔이 금방 비워졌지만 음악은 멈춤 없이 계속되었다. 팬들, 술잔을
꼭 쥔 남자들, 음악 애호가들, 그리고 클래식 라이브를 처음 듣는 사람까지 모두가 그가 펼치는
마법에 매료되었다.
데이빗은 무궁무진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었다. 잠시 쉬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말이 들리자 데
이빗은 "에이, 그냥 계속 치면 안 되나요?" 하면서 연주를 계속했다.
마침내 데이빗이 정말로 잠깐 쉬는 사이에 나는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 무엇인지 물어 보았다.
그는 "라흐 3번. 세르지 라흐 3번." 이라 대답했다. 그런 다음 곧장 피아노로 돌아가더니, 세르
게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 전체를 연주했다. 관현악 합주 부분까지 피아노로 채워
넣으면서 연주했다. 공연활동을 하는 피아니스트들이 피아노 협주곡 가운데서도 가장 어려운 곡
으로 치는 이 불후의 작품이 데이빗의 영혼을 타도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는 음악에 자신
을 내맡기고 있었다. 건반은 그의 연장선처럼 보였고, 사람과 음악과 피아노가 하나가 되는 듯했
다.
나는 넋을 잃었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나는 거장들의 연주회에 가 본 적이 많
았지만, 이번 연주는 유달리 장엄하고 열정적이었다.
연주 마지막에 크리스가 다가와서, 데이빗이 리카도에서 일한 지 3개월 됐지만 그렇게 연주하
는 것을 들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데이빗은 기분 좋은 얼굴로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
다. 그리고는 열띤 어조로 단호하게 대꾸했다. "길리언 때문이지요."
데이빗을 다시 하숙집에 데려다 준 뒤, 크리스는 데이빗이 내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날 크리스는 데이빗에 관해 여러 가지 얘기를 해주었다. 리키도에서 연주
하기 시작하던 무렵 데이빗은 교회에서 운영하는 길더클리프라는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반
쯤은 병원이고 반쯤은 하숙집이었던 그곳은 편안한 가정과는 거리가 멀었고, 기숙사 안의 다른
거주자들과의 대화는 거의 불가능했다.
데이빗에게 일자리를 주고 나자 크리스는 그가 '정상적인' 사회생활로 나아가는 한걸음을 더
내
디딜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데이빗이 하숙집에서 지낼 수 있게 주선해 주었다.
그 곳에서는 낮이건 밤이건 원하는 때에 얼마든지 피아노를 칠 수 있었다. 이런 모든 것을 통해
크리스는 데이빗이 지난 12년간 악몽 같은 결과만 남긴 정신병원 생활방식에서 마침내는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다음날 아침 데이빗은 크리스의 집에 수영하러 왔다. 여느 때나 다름없이 그는 지나치게 말과
동작이 많으면서도 뿌리칠 수 없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나는 수영장 가에서 중얼거리며
서 있는 그를 관찰했다. 그는 어깨를 잔뜩 움츠려 구부정하게 서 있었고, 팔은 축 늘어져 덜렁거
렸으며, 턱이 거의 가슴에 닿아 있었다. 마치 머리를 감추려는 것 같았다. 가슴 깊은 불안감과
초조함이 배어 있었고, 자신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자세였다. 나는 그가 몸을 펴 어깨를 뒤로 당
기고 똑바로 서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데이빗은 담배를 내던지고 물에 뛰어들었다. 헤엄치는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그가 물을 얼마
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수영장을 따라 이리저리 헤엄치며 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부드러운 리듬이 그를 감싸면서 조바심이 녹아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꽤 오랫동안, 같은
박자를 유지하면서 수영했다.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그러나 다시 물에서 나온 순간 그는 곧장
움츠러들어 고개를 떨구고 팔을 늘어뜨렸다. 다시 불안감에 휩싸인 것이다.
우리는 수영장 가에 서서 음악과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전히 토막토막이었지만,
이제는 나도 익숙해져 있었다. 데이빗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손짓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몸
가짐이 변하면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가 내게 팔을 두르고,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
다. "길리언, 나랑 결혼해 주겠소?"
나는 놀랐다. 그리고 이내 "예." 하고 대답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상식에 비추어 그
런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친구가 되자고 대답했다.
그 순간부터 우리 사이에는 절대로 깨어지지 않을 특별한 연결고리가 생겨났다.
꿈 같은 나날이 지나갔다. 데이빗 덕분에 내 집중력과 능률은 간곳 없이 사라졌다. 나는 완전
히 평형을 잃어버렸다.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으며 그다지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퍼스에
온 목적에 집중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나는 점성가 연맹 지부 창립모임을 주최하러 온 것이고,
지부는 성공적으로 출발했다. 그렇지만 그 나머지 시간은 '헬프갓'이라는 안개에 뒤덮여 있었다.
이윽고 시드니로 돌아갈 시간이, 데이빗과 작별할 시간이 되었다. 나는 크리스에게 계속 데이
빗과 연락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크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좋죠. 데이빗은 될 수 있는 대로
친구가 많이 있어야 하거든요." 그리하여 정기적인 편지 교환이 시작됐다. 이따금 나는 전화도
걸었다. 그럴 때면 그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나도 흥분되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데이빗은 말하고 연주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편지를 썼다. 열정적으로, 황홀감에 빠진 듯이
썼다. 편지는 언제나 비슷한 내용으로 시작했다. "자기 편지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고마워요,
당신은 천사예요, 달링!!"
그런 다음에는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뜻을 적었다. "전화해 줘서 고마워요. 뛸 듯이
기뻤어요... 날 보살펴 줘서 고마워요... 차익 테이프 고마워요, 달링 길리언. 어제 들었어요. 영
감이 살아났죠, 달링 길리언. 당신도 나한테 영감을 불어넣어 주죠!... 또 길리언 달링, 세익스피
어 소네트도 고마워요. 오늘 아침에 읽었어요. 영감에 차 있더군요. 당신을 사랑해요, 달링."
데이빗은 편지마다 거의 빠짐없이 우리가 만난 일에 대해 언급했다. "수영장 옆에서 당신을
안고 입맞추던 걸 떠올리고 있어요, 길리언 달링! 당신도 기억해요 달링? 당신은 나를 아주 행
복하고 느긋하게 해 주었죠. 당신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잘 연주할 수 없었을 거예요, 길리언 달
링! 그래서 지금은 연주할 때 당신 생각을 해요. 그러면 연주를 더 잘 하죠."
데이빗은 또 종종 이런 말도 덧붙였다. "크리스도 천사예요, 달링. 그분 만난 건 정말 운이
좋았어요. 그리고 당신을 만난 건 더 운이 좋은 겨죠!... 길리언 달링... 곧 또 만날 수 있기를 빌
어요, 길리언 달링 - 그 때에는 안고 입맞추고 등등을 많이 해야죠!! 야호!!"
데이빗에게 보내는 내 편지는 따뜻하고 사랑이 깃들어 있었지만 조심스러웠다. 데이빗은 꾸밈
없고 끝도 없는 사랑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런 식의 애정은 나로서는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것
이었다. 그렇지만 크리스가 '심한 정신병 환자'라고 표현했고 또 나보다 열 다섯이나 아래인데다
가 재산도 없고 장차 직업에 대해서는 커다란 물음표가 드리워진 사람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
할 길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유대인이었고 나는 이교도였다. 천생연분과는 아예 거리가 멀었
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