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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주시 양촌 2리 마을 입구에 강원의 효자각이 있다. 6형제 중 막내인 원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지극히 모셨다. 어머니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원은 좋다는 약을 다 구해드렸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어느 날 의원의 말대로 자기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어머니의 입에 흘려주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깨어났다고 했다. 그 후 다시 아파 어머니가 잉어를 먹고 싶다고 했다. 낙동강에 가서 얼음판에 구멍을 뚫고 통곡하면서 낚시를 넣었더니 과연 잉어가 잡혔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산소 옆에 잔디로 집을 짓고 3년간 시묘를 하는데 큰 호랑이가 밤마다 찾아와 그를 보호하였다고 한다. 호랑이도 지극한 효성에 감동하였던 모양이다. 그 후 상주 유림들이 이 사실을 나라에 알려 정조 임금이 효자로 포상하고 통훈랑 공조좌랑이라는 벼슬까지 내렸다. 그 자손과 향당에서 비를 세우고 효자각을 세워 그의 효성을 기리고 있다 |
![]() ![]() 홍민헌의 손자 이해가 자기 조부모의 지난 일을 추모하여 조모(유씨 부인)가 기도 드리던 바위 위에 1653년에 정자를 세워 감암정이라 이름하였다. 이 각은 임란을 당하여 국가가 위태롭게 되자 한 선비로서 의분에 못 이겨 의거에 참가,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홍약창과 그의 아들 민현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참전, 적과 싸우다가 역시 전사한 사실과 민현의 처 유씨 부인 유복자를 잉태하고 홍씨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하여 큰 바위 밑에서 지성으로 생남 기도를 드려 득남 후 훌륭히 기른 사실을 기리기 위하여 조성된 각이다. 성균 진사였던 홍약창은 원래 낙동 지방에 살고 있던 선비였다. 왜란이 발발하여 상주성이 실함 된 후 의병장 이 봉을 도와 왜병을 맞아 싸우다가 많은 전공을 세우고 장렬히 전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들 민현은 가족을 안전한 곳에 피하라 이르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전진에 뛰어 들어 수많은 왜병을 죽이고 장렬하게 전사하니 그의 말이 주인의 의관을 물고 피난 중인 가족에게 전하고 말도 기진 하여 쓰러졌다. 함창읍지의 충효록에 의하면 당시 세인들이 <만고의 > 칭찬하였다 한다. 부자 순국 후 미망인으로 시어머니 동래 정씨, 며느리 진주 유씨만이 남았는데 때 마침 며느리 유씨가 유복자를 잉태하였는지라 고부간에 약속하기를 아들을 낳으며 살아서 잘 기르고 딸을 낳으면 3대의 여자 모두 자결키로 하고 그날로 큰 바위 밑에서 생남 기도를 지성으로 드렸더니 영험이 있어 아들을 낳으니 이분이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홍씨들의 중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세인들은 하늘과 땅이 감동하여 생남 하였다 하여 당시 동명 병현리를 감암이라 개칭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 보물 고적 조사 자료에 의하면 "사벌면 화달리(달천)에 석탑이 있는바 탑의 높이 20척 기부 2간사방의 3층석탑이다. 탑의 밑에는 높이 3척 어깨 넓이 1척 2촌의 석불좌상이 있다"라고 소개되어 있다. 사벌면 화달리 둔진산 남쪽에 위치하고 부근의 지형으로 미루어 이곳에 남향사찰이 건립되었던 가람의 자리로 추측된다. 이 탑은 1972년 탑 전체를 해체 복원하였다. 여덟 장의 마석 한 긴 돌로 얽어 짠 지대 돌 위에 석탑을 건립하였는데 기단부는 단층으로서 하층기단면석을 생략한 형식이다. 상층기단면석은 여덟 장의 돌로 조립되고 각 면에 양우석과 중앙 일장주가 정연하다. 상대갑석은 3장의 돌로 조성되고 갑석부연이 마련되고 상면은 경사로 합각이 뚜렷하며 중앙부에는 일단의 높직한 각형 받침이 각출되어 탑신부를 받고 있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 1매식으로 되었는바 각층 옥신에는 양우주가 정연하다. 각 옥신석의 체율감은 통식을 따라 이루어졌다. 초층과 2층의 옥개석은 옥석 받침이 5단이고 추녀에는 낙수면이 음각되지 않았으며 상면에는 일단의 각형받침을 각출하여 그 위층의 옥신을 받고 있는데 3층 옥개석은 받침이 4단이며 상면에는 원호의 몰딩과 1단의 낮은 각형 받침으로 그 위의 노반을 받치게 되어있고 상륜부는 노반석부터 일부재도 남아 있지 않다. 이 탑은 전체적으로 낙수면이 평박하고 사방 합각의 선이 예리하며 직선을 이룬 추녀에 사우전각의 반전이 강경하여 경쾌한 탑신부를 이루고 있다. 탑신부에 있어서 옥개 받침이 각 층이 동일하지 않고 삼층은 사단으로 줄어들었으며 또 옥신 받침과 기단 갑석 상면의 탑신 받침도 1단으로 약화된 점은 8세기에 조영된 정연한 석탑형으로 시대가 하강된 9세기경에 조성된 것이라 추정된다. | |
![]() ![]() 이 불상은 광배와 불신을 한돌에 새긴 석불입상이다. 마멸이 심하여 세부 표현 수법을 알기 어렵다. 육계가 크고 얼굴은 길고 풍만하여 이목구비는 작은 듯 한데 마멸이 심해 확인하기가 어렵다. 왼손은 가슴에, 오른손은 배 앞에서 몸 쪽으로 붙이고 있는데 신체에 비해 양손이 크고 투박한 편이다. 통견으로 몸을 덮고 있는 옷 주름이 무겁고 단조로운 'U'형을 이루면서 연속되었는데 간결한 주름으로 잡혀있고 하체의 주름도 'U'에 가까운 계단식으로 처리되어 있다. 신체 굴곡도 약하지만 처진 어깨나 딱딱한 양손에서 정지된 위축감이 있다. 얼굴과 신체가 아담하고 비교적 볼륨감이 적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신라 말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광배는 주형거신광으로 마멸이 심하여 바깥쪽 가장자리에 돌려진 불꽃무늬만이 희미하게 확인될 뿐이다 |
1.감암정의 전설
주소 : 상주시 이안면 아천리
홍민헌의 손자 이해가 자기 조부모의 지난 일을 추모하여 조모(유씨 부인)가 기도 드리던 바위 위에 1653년에 정자를 세워 감암정이라 이름하였다.
이 각은 임란을 당하여 국가가 위태롭게 되자 한 선비로서 의분에 못 이겨 의거에 참가,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홍약창과 그의 아들 민현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참전, 적과 싸우다가 역시 전사한 사실과 민현의 처 유씨 부인 유복자를 잉태하고 홍씨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하여 큰 바위 밑에서 지성으로 생남 기도를 드려 득남 후 훌륭히 기른 사실을 기리기 위하여 조성된 각이다.
성균 진사였던 홍약창은 원래 낙동 지방에 살고 있던 선비였다. 왜란이 발발하여 상주성이 실함 된 후 의병장 이 봉을 도와 왜병을 맞아 싸우다가 많은 전공을 세우고 장렬히 전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들 민현은 가족을 안전한 곳에 피하라 이르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전진에 뛰어 들어 수많은 왜병을 죽이고 장렬하게 전사하니 그의 말이 주인의 의관을 물고 피난 중인 가족에게 전하고 말도 기진 하여 쓰러졌다.
함창읍지의 충효록에 의하면 당시 세인들이 <만고의 충효지문이라> 칭찬하였다 한다. 부자 순국 후 미망인으로 시어머니 동래 정씨, 며느리 진주 유씨만이 남았는데 때 마침 며느리 유씨가 유복자를 잉태하였는지라 고부간에 약속하기를 아들을 낳으며 살아서 잘 기르고 딸을 낳으면 3대의 여자 모두 자결키로 하고 그날로 큰 바위 밑에서 생남 기도를 지성으로 드렸더니 영험이 있어 아들을 낳으니 이분이 현재 이곳에 살고 있는 홍씨들의 중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세인들은 하늘과 땅이 감동하여 생남 하였다 하여 당시 동명 병현리를 감암이라 개칭 오늘에 이르고 있다.
2.류거인 효자각의 전설
주소 : 상주시 이안면 아천(감바우)
상주시 이안면 아천(감바우)에서 서쪽으로 약 1km쯤 도장골 마을에 효자각이 하나 서 있다.
옛날 이 마을에 류씨가 살고 있었는데 칠순에 가까운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 있었다. 아들은 약을 구해와서 아버지 병을 고치려고 애썼으나 헛일이었다. 어느 날 꿈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 밤 고개에 가서 대추를 따 와 달여 드리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아들은 눈이 하얗게 덮힌 밤고개에 갔다. 추운 겨울에 어찌 대추가 열려 있겠는가? 아들은 눈 위에 꿇어 앉아 하루 종일 대추나무에 대추가 열게 하여 달라고 믿고 빌었다. 해가 질 무렵 정말로 대추나무 가지에 싹이 돋고 대추가 열리기 시작했다.
그 대추를 따서 아버지에게 달여 드렸더니 거짓말처럼 병이 나왔다. 아들의 지극한 정성에 하늘이 감동하였다고 동네 사람들이 칭찬이 자자하였다.
류 효자의 효성을 기려 그의 집 앞에 효자각을 세웠던 것이다.
3.강원의 효자각의 전설
주소 : 상주시 양촌동
상주시 양촌 2리 마을 입구에 강원의 효자각이 있다. 6형제 중 막내인 원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지극히 모셨다. 어머니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원은 좋다는 약을 다 구해드렸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어느 날 의원의 말대로 자기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어머니의 입에 흘려주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깨어났다고 했다. 그 후 다시 아파 어머니가 잉어를 먹고 싶다고 했다. 낙동강에 가서 얼음판에 구멍을 뚫고 통곡하면서 낚시를 넣었더니 과연 잉어가 잡혔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산소 옆에 잔디로 집을 짓고 3년간 시묘를 하는데 큰 호랑이가 밤마다 찾아와 그를 보호하였다고 한다. 호랑이도 지극한 효성에 감동하였던 모양이다.
그 후 상주 유림들이 이 사실을 나라에 알려 정조 임금이 효자로 포상하고 통훈랑 공조좌랑이라는 벼슬까지 내렸다. 그 자손과 향당에서 비를 세우고 효자각을 세워 그의 효성을 기리고 있다.
상주의 전설입니다.
감암정 전설에
홍민헌 손자 이해가 병헌리 마을에 있는 바위를 보고 (유씨(홍민헌 부인이) 민헌이 임진왜란때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여 돌아오지 못하자 후손을 잇게 해달라고 지성으로 생남 기도하던 큰바위 위에 1653년에 조부모를 추모하는 감암정의 정자를 세웠다. 극진히 기도 한 덕분에 유복자를 잉태하여 홍씨 가문을 잇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유씨는 동래정씨인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시어머니가 아들을 낳게 되면 키우고 딸을 낳게 되면 3대가 자결을 하자고 했는데 다행히 아들을 낳게 되어 홍씨의 후손을 잇게 되었다는 것이다. =잠시 감암정의 전설을 정리해 보았다. =김숙자글
무관의 계급
관료조직은 문반과 무반의 양반체제로 이루어졌고, 상하 계급이 엄격하였다. 관료의 등급은 품 또는 유품이라 하여 크게는 9품으로 나누고, 이를 다시 정(正)과 종(從)으로 구별하여 정1품에서 종9품까지 18품으로 구분되었다. 다시 정1품에서 종6품까지는 상·하의 품계(品階, 문산계·무산계 등)가 있어 이하 단일 품계와 더불어 30품계로 구분되었다. 경국대전에 나타난 문산계(文散階)와 무산계(武散階)를 살펴보자.
- 품계 문산계 무산계 비고
정1품 상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현록대부 수록대부 이상 대감
정1품 하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흥록대부 성록대부
종1품 상 숭록대부(崇祿大夫) 소덕대부 광덕대부
종1품 하 숭정대부(崇政大夫) 가덕대부 숭덕대부
정2품 상 정헌대부(正憲大夫) 숭헌대부 봉헌대부
정2품 하 자헌대부(資憲大夫) 승헌대부 통헌대부
종2품 상 가정대부(嘉靖大夫) 중의대부 자의대부 이상 당상관·영감
종2품 하 가선대부(嘉善大夫) 정의대부 순의대부
정3품 상 통정대부(通政大夫) 명선대부 봉순대부 절충장군(折衝將軍)
정3품 하 통훈대부(通訓大夫) 창선대부 정순대부 어모장군(禦侮將軍) 이상 당하관
종3품 상 중직대부(中直大夫) 보신대부 명신대부 건공장군(建功將軍)
종3품 하 중훈대부(中訓大夫) 자신대부 돈신대부 보공장군(保功將軍)
정4품 상 봉정대부(奉正大夫) 선휘대부 진위장군(振威將軍)
정4품 하 봉열대부(奉列大夫) 광휘대부 소위장군(昭威將軍)
종4품 상 조산대부(朝散大夫) 봉성대부 정략장군(定略將軍)
종4품 하 조봉대부(朝奉大夫) 광성대부 선략장군(宣略將軍)
정5품 상 통덕랑(通德郞) 통직랑 과의교위(果毅校尉) 이상 참상관
정5품 하 통선랑(通善郞) 병직랑 충의교위(忠毅校尉)
종5품 상 봉직랑(奉直郞) 근절랑 현신교위(縣信校尉)
종5품 하 봉훈랑(奉訓郞) 신절랑 창신교위(彰信校尉)
정6품 상 승의랑(承議郞) 집순랑 돈용교위(敦勇校尉)
정6품 하 승훈랑(承訓郞) 종순랑 진용교위(進勇校尉)
종6품 상 선교랑(宣敎郞) 여절교위(勵節校尉)
종6품 하 선무랑(宣務郞) 병절교위(秉節校尉)
정7품 무공랑(務功郞) 적순부위(迪順副尉) 이하 참하관
종7품 계공랑(啓功郞) 분순부위(奮順副尉)
정8품 통사랑(通仕郞) 승의부위(承義副尉)
종8품 승사랑(承仕郞) 수의부위(修義副尉)
정9품 종사랑(從仕郞) 효력부위(效力副尉)
종9품 장사랑(將仕郞) 전력부위(展力副尉
첫댓글 다 못읽고 햐~~대단하다 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