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0세) 5월 18일(음 4.4)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당시 원촌동) 881번지에서 진성 이씨 이가호(李家鎬, 퇴계 이황의 13대손)와 허형(許 )의 딸인 허길(許吉) 사이에 차남으로 출생, 어릴 때 이름은 원록(源祿), 두 번째 이름이 원삼(源三), 자는 태경(台卿)
1909년(7세) 조부 치헌 이중직(痴軒 李中稙)에게서 소학 배우기 시작
1916년(12세) 조부 별세, 가세가 기울기 시작, 한문학 수학, 이 무렵 보문의숙에서 수학
1919년(15세) 도산공립보통학교(보문의숙을 공립으로 개편) 1회 졸업
1920년(16세) 안동시 녹전면 신평리 듬벌이로 이사, 부모를 비롯한 가족 모두 대구(남산동62번지)로 이사,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에게서 그림을 배움, 동생 원일(源一)은 글씨를 배워 일가를 이룸
1921년(17세) 영천군 화북면 오동(梧洞) 安庸洛의 딸 일양(一陽)과 결혼, 처가에서 가까운 백학학원(1921 설립)에서 수학(보습과 과정 - 1922년까지)
1923년(19세) 백학학원에서 교편 잡음(9개월 동안)
1924년(20세) 4월 학기에 맞추어 일본 유학
경찰기록 - 토교쇼오소쿠(東京正則)예비학교, 니뽄(日本)대학전문부,
검찰신문조서 - 킨죠우(錦城)고등예비학교 1년간 재학
1925년(21세) 1월에 귀국, 대구 조양회관을 중심으로 활동, 이정기·조재만 등과 어울리며 베이징 나들이
1926년(22세) 베이징에서 수학, 광뚱성 광저우 쭝산대학(中山大學)에서 후학기 수학(이활李活 이름 사용)
1927년(23세) 쭝산대학에서 전학기 다니다가 여름에 귀국, '장진홍의거(10월 18일)'에 연루되어 구속됨
1929년(25세) 5월에 석방(12월에 무혐의로 종결). 중외일보 기자
1930년(26세) 1월 3일 첫 시(詩)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이활), 아들 동윤(東胤) 태어나다.(만 2세에 사망) 10월 《별건곤(別乾坤)》에 이활(李活), 대구이육사(大邱二六四) 이름으로 [대구사회단체개관(大邱社會團體槪觀)] 발표
1931년(27세) 1월에 '대구격문사건'으로 구속, 3월 석방, 잦은 만주 나들이. 3개월 머물다 연말에 귀국. 8월 조선일보사로 전근, 대구지국 근무.
1932년(28세) 베이징, 텐진에 머뭄. 상하이에서 뤼신(魯迅) 만남. 베이징에서 난징으로 이동하고, 10월 10일에 난징 근교 탕산에서 문을 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 학원(學員)으로 입교
1933년(29세) 4월 20일 1기생으로 졸업(26명), 졸업식에 연극 공연, 5월에 상하이로 이동, 7월에 서울로 잠입
1934년(30세) 4월에 {대중(大衆)} 창간호에 평문 [자연과학(自然科學)과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 게재, 3월 22일 군사간부학교 출신 드러나 구속됨(동기생이자 처남인 안병철이 자수한 후 졸업생 연이어 검거됨), 6월 기소유예 의견으로 석방(8월 기소유예 확정), 시사평론 다시 집필 시작.
1935년(31세) 정인보 댁에서 신석초 만나 친교, 다산 정약용 서세 99주기 기념 {다산문집(茶山文集)} 간행에 참여, 신조선사(新朝鮮社)의 {신조선(新朝鮮)} 편집에 참여, 본격적으로 시(詩) 발표.
1936년(32세) 7월 동해송도원(포항 소재)에서 휴양
1937년(33세) 서울 명륜동에서 거주, 평문 성격 바뀜(시사에서 문학으로)
1938년(34세) 신석초·최용·이명룡 등과 경주 여행, 가을에 신석초와 부여 관람, 11월 부친 회갑연
1939년(35세) 종암동 이사, [청포도(靑葡萄)] 발표
1940년(36세) 시 [절정], [광인의 태양] 등 발표
1941년(37세) 2월 딸 옥비(沃非) 나다. 폐질환으로 성모병원 입원, 부친상
1942년(38세) 2월 성모병원 퇴원, 모친과 백형 별세하여 원촌 큰집으로 귀향, 7월 신인사지(神印寺址, 옥룡암玉龍庵)에서 요양, 서울 수유리 거주
1943년(39세) 1월 신정에 석초에게 베이징행 밝힘, 한글 사용 규제 받자 한시(漢詩)만 발표. 4월에 베이징으로 감, 충칭과 옌안행 및 국내 무기 반입 계획 세움. 7월 모친과 맏형 소상에 참여하러 귀국, 늦가을에 피검, 베이징으로 압송됨, 베이 징주재 일본총영사관경찰에 구금된 것으로 추정됨
1944년(40세) 1월 16일 새벽, 베이징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여)에 의해 시신 거두어져 장례 치러짐, 원창에게 유골 인계되어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1960년에 고향 원촌 뒷산으로 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