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선(鄯善)
누란(樓蘭, Loulan)은 현 중국 신강 위구르 자치구, 타클라마칸 사막의 동쪽 끝, 로프노르(방황하는 호수로 불렸던 내륙호) 주변에 번영했던 고대 왕국이다.
누란은 신강 위구르 자치구 타클라마칸 사막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어 지세가 험하고 모래언덕이 종횡으로 교체한다. 풍식 작용으로 인해 형성된 ‘야르당(Yardang)’이 파도처럼 펼쳐져 있다. 주변에는 식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담황색이요 담회색의 모래바다다. 생명이란 찾아보기 힘든 황량하고 적막한 세계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상인, 참배객, 승려, 도굴꾼, 탐험가들이 그곳에서 길을 잃고 헤맸다. 누란은 그래서 ‘사막의 버뮤다(Bermuda)’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누란 왕국은 실크로드 동부 지역의 요충지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 실크로드의 중국 쪽 출발점인 돈황에서 사막의 모래바람을 이겨 가며 약 16일 정도 가면 로프노르 부근에 있는 누란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실크로드는 여기서부터 천산북로와 천산남로 두 갈래 길로 나누어진다. 여행자들은 두 길 중 어느 쪽으로 가든 누란에서 충분히 준비를 하고 길을 떠나야 했다. 이렇게 누란은 실크로드의 중요한 보급기지로 번영을 누렸던 것이다.( 누란이라는 지역이 차지하는 위치, 특히 실크로드에서 말하는 그 위치는 막중해 타클라마칸사막 실크로드의 반드시 쉬어가야하는 휴게소라 보면 되겠다.)
누란왕국은 기원전 수세기동안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 실크로드를 따라 번성하여 화려한 문명의 꽃을 피웠다는 신비의 오아시스 왕국이다. 하지만 서역 주도권을 차지하려는 한나라와 흉노의 치열한 전쟁은 아주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누란의 정치 또한 그런 상황에 끼여 시달리다가 기원전 77년 한나라 첩자에 의해 왕이 암살당함으로써 멸망한다.이후 선선이란 이름의 중국 위성국가로 명맥유지하다가 6세기쯤 신기루처럼 사막의 모래바람속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누란의 미녀'는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 신장 지역의 여성 미이라다.초기에는 실크로드에 위치한 고대 왕국인 누란의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연대를 분석해 보니 그보다 과거였다고 한다.
키는 155cm 정도로 추정되며 혈액형은 O형이다. 40~48세 사이에 사망했다. 부계 쪽으로는 시베리아 남쪽에 있던 사람들을 거쳐서 켈트족과 같은 계열이었다. 그러나 누란의 미녀 본인은 켈트인은 아니고 토하라인이다.(이 인종 문제는 중국 당국이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으니, 인종학적 분석 결과 공포를 막았다지만, 몰래 외부로 외국으로 유출된 샘플 조사 결과, 1993년 유럽 백인 계열로 드러났다.)
발견 직후 전세계에 화제가 되어 각국의 소설과 시, 노래 등의 모티브가 되었다.(우리나라에서도 미당 서정주 등 문학가들이 시,소설을 썼다.)
온갖 추측을 낳았던 누란의 미이라들은 최근 유전자 분석 기술의 도움으로 서양과 동양 혈통을 한몸에 지닌 혼혈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동·서 문명 교류가 활발했던 타림 분지의 혼혈 인종 존재 시기를 2000년 정도 앞당기며, 한때 이 지역이 미국과 비슷한 '인종의 용광로'였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20세기 제국주의 탐험가들이 찾아낸 일명 ‘누란의 미녀’라는 미라 덕분에 로프노르 호수 인근에 실존했던 도시임이 밝혀진 곳이다.('방황하는 호수' 로프노르호는 1962년 완전 소멸된 것으로 확인됐다.) 기원전 1세기 무렵에는 그래도 꽤 큰 호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로프노르호의 변화는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로서 번영을 누리다가 멸망한 누란(樓蘭) 왕국의 흥망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해진다.
‘누란을 지배하는 자가 서역을 지배한다’는 말이 생겼을 정도로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건만 오히려 그 점이 누란에게는 족쇄가 됐다고 볼 수 있다.
한나라 때 이 땅을 빼앗은 이후, 중국이 얼마나 힘들여 이곳을 지키는 지를 짐작하게 하는 이백(李白)의 시 한편을 소개한다. 지금도 중국 군대의 1/3이 신강위구르자치구에 주둔하고 있다고 한다.
변방의 노래(塞下曲) 이백(李白)
五月天山雪,無花祇有寒.(오월천산설,무화기유한)
오월에도 천산엔 눈이 쌓여 꽃은 없고 추위만 있을 뿐이네.
笛中聞折柳,春色未曾看.(적중문절류,춘색미증간)
절양유 피리소리 들려오지만 봄빛은 아직 볼 수 없구나.
曉戰隨金鼓,宵眠抱玉鞍.(효전수금고,소면포옥안)
새벽에는 종과 북 따라 싸우고 밤이면 말안장 끼고 잠드나니.
願將腰下劒,直爲斬樓蘭.(원장요하검,직위참루란)
허리에 찬 칼 뽑아 곧바로 누란을 베어버리리라.
唐나라 군대가 원정간 곳은 오월에도 살을 에는 天山지역 樓蘭이다.
<折楊柳>는 헤어질 때 버들가지 꺾어주며 부르는 이별의 노래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도시와 연결되는 모래사막인 쿠무타크는 역사적으로 실크로드의 일부로서 동서문화 교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동시에 너무나 특색있고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현재는 사막공원 형식으로 조성되어 세계에서 가장 큰 쌍봉낙타 보호구역이며 날로 심각해지는 사막화 현상이 전세계적 이슈가 되고 있는 오늘날 이곳은 "녹불퇴, 사부진(綠不退,沙不進)"이라는 기이한 사막화 정체현상을 보이고 있다.전설에 의하면 루란왕국이 사막에 휩쓸려 갈때 루란의 공주가 자신이 쿠무타크사막에 영혼을 바칠테니 왕국을 지켜달라고 소원하여 뜻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이번 여행의 일정표에 있는 ‘쿠무타크사막 일출감상(사막짚차)’를 보며 기대감이 컸었다. 사막에서의 일출도 기대되지만, 낮게 들어오는 붉은 빛에 의한 강렬하게 음영대비되는 사구는 또 얼마나 인상 깊을는지.
그러한 큰 기대감을 갖고 어두운 새벽 사막짚차 앞자리에 올랐다.
(쿠무타크 사막투어는 지프, 오토바이, 쌍봉낙타 등을 이용하여 사막언덕을 지나 정상까지 오를 수 있으며 시간이 허락되면 걸어서 갈 수도 있으나 무더위로 대부분 사륜구동 짚차를 타고 사막산에 오른다.)
사막은 평탄하지 않고 의외로 업 다운이 심해 짚차가 뒤집히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스릴이 넘쳤다.(영평아부지는 이번 여행중 최고 란다.)
능선아래 차를 대고 일출을 기다리는데 엄청 드센 사막의 바람이 쉬지않고 온몸을 때린다. 몸을 움츠리고 바람에 등을 돌리고 있으니 일행들 옷 펄럭이는 소리만 들리는중에 한 여성의 모자 하나가 사구아래로 휙 날라간다.모두 어!어! 하는데 재빨리 몸을 날리는 사나이가 있으니...능선따라 였다. 바람따라 이리 휙 저리 휙 날리는 모자따라 100m이상을 뛰어 내려가서야 모자를 잡았다. (일행모두 지켜보다가 박수소리)
하늘은 온통 구름이라 일출감상은 완전 실패.
흐린 날씨에 모래바람이 심해 사막사진도 완전 실패.
날이 밝아오니 사구의 곡선은 더없이 아름다운데 짚차는 바람속에 요동을 치니 사진찍으면 멋지겠다란 생각만 가질뿐....
2. 투르판
중국에서 가장 더운 지역이고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 '불의 도시'를 뜻하는 화주(火州)로 불리어진 투르판(吐鲁番)은 타틀라마칸 사막과 천산산맥 사이에 있는 투르판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동서교역로였던 천산북로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 북쪽 만년설이 쌓여 있는 천산산맥에서 흐르는 풍부한 수량에 의존해 살고 있다.
지리적 요충지여서 유목민과 한족 모두 이곳을 장악하려고 시도했다.
전한(前漢) 이후 차사전국(車師前國)이 교하고성에, 당대에는 고창국(高昌國)이 고창고성에 자리 잡았다.
당나라는 투르판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했다. 803년 위구르인이 투르판을 점령하면서 위구르족이 대량으로 이주해 왔으며 위구르족은 투르판지역을 장악하고 고창고성에 위구르왕국을 세웠다.
원(元), 명(明) 시기 중국과 갈등 관계였으며 1755년 청나라에 속하게 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구르인은 원래 마니교인이었는데 불교로 개종했으며 점차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15세기 이후 이슬람 사회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투르판 분지는 타림 분지의 북쪽 끝에 해당하는데, 해발 고도가 마이너스 400m로, 전세계에서 가장 해발고도가 낮은 도시이고 매우 건조하여 무상일수가 270일에 달하며 연간 일조 시간은 약 3,200시간 이상된다. 여름에는 영상 50도까지 올라가고(지표면 온도는 섭씨 80도까지 올라간다) 겨울에는 영하 28도까지 내려가기도 한다
투르판 명소 중 한곳인 화염산은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져 햇빛을 받으면 마치 불길이 치솟는 모양이다. 소설 서유기에는 손오공이 천상세계에서 화로를 땅으로 던져 투르판 분지가 만들어 졌고, 화로의 열기로 불타오르는 화염산이 생겼으며 파초선으로 불을 껐다고 표현되어 있다. 이곳의 더위는 여행객이나 주민들에게 모두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홍사암으로 되어 있고 중국에서 가장 온도가 높은데, 온도가 높은 것은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분지가 태양을 향해 기울어 있기 때문이다.
카레즈(Karez)라는 관개시스템을 이용하여 포도를 비롯한 과일을 풍부하게 생산하고 있다. 과일 중에 사막 과일이 최고인데 포도는 6월말쯤에 수확하고 말린 건포도는 투르판이 최고의 맛으로 평가되어 전세계로 수출되고 있다.
투르판은 중국에서 가장 낮고, 가장 덥고, 가장 건조한 땅이다. 이런 혹독한 자연 환경을 지녔지만, 투르판은 돌궐어로 '풍요로운 땅'이라고도 불렸다. 그 이유는 척박한 자연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고대 투르판인들이 건설한 인공 지하수로 '카레즈'덕분이다.
카레즈 박물관 관람하면서
우물과 지하수로를 결합한 일종의 인수(引水) 관개시설로 기원전 700년경 이란의 동부 사막지대에서 기원되었는데 조로아스터교의 전파와 더불어 신장지역에 전파되었다. 위구르어로 카레즈(중국어로 카얼정)라고 하며 투루판 사람들은 북쪽 천산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끌어 들여 경작을 하고 있다. 한 갈래의 카레즈에는 수십개의 우물이 있고 천여 갈래의 카레즈 전체 연장 길이는 5,000km에 달한다고 한다.
투루판 분지의 북쪽과 서쪽에 높은 산이 있어서 봄과 여름에 눈 녹은 물과 빗물이 계곡으로 흘러 내려 고비사막의 지하에 흘러 든다. 그리고 투루판 분지는 기후가 건조하고 수증기가 빨리 증발하는 지리 및 기후적 여건을 가진다.
투루판인들은 투루판의 이런 지형적 및 기후적 특징을 따르고 경사도를 이용해 지하수 관개수로 카레즈를 개발했다. 눈 녹은 물이 흘러 내려 지하에 스며드는 곳에서 수원을 찾아 일정한 간격으로 수직으로 우물을 파고 우물과 우물 사이에 지하수로를 파서 우물과 우물을 연결한다.지세에 따라 상이한 깊이로 조성된 지하수로는 농경지 근처에서 지상 수로와 연결되면서 지표면에서 농경지로 흘러 든다. 지세에 따라 지하수의 깊이가 서로 다르고 따라서 수직 우물의 깊이도 다르다.
소공탑(蘇公搭)은 투루판의 교외지역 포도향에 있다. 이 지역은 예전에 투루판 왕국의 수도가 있던 곳으로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전략적 요지였다. 청나라 강희제가 위구르족의 중가르부를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출병시켜 투루판을 점령한 1720년, 위구르족 군인 어민 호자는 자기 부대를 이탈해 청나라 군대에 귀순했다. 그는 자기 부대를 배반한체 청군과 손잡고 함께 작전을 세워 중가르부를 토벌하는데에 전공을 세웠는데 그 곳이 바로 여기다.
위구르족 편에서 볼때는 역적이지만 청나라 쪽에서는 그를 조국 통일의 일등공신으로 추켜 세웠다. 건륭제는 그를 보국공과 진국공으로, 그리고 1760년에는 투루판 군왕으로 책봉했다. 뿐만 아니라 어민 호자의 몇몇 아들들은 중가르부의 분열세력이며 크고 작은 호자들의 반란을 평정하기도 했다. 그래서 건륭제는 어민 호자의 아들 수라이만(蘇來滿)도 공에 봉했는데,그는 건륭제의 성은에 보답하고 아버지 어민 호자의 공로와 83세 생일을 기념하는 한편, 하늘에 있는 알라의 천은에 보답하기 위해 1777년에 자비로 은 7천냥을 내어 기념탑과 이슬람 사원을 건립했다. 그 기념탑은 수라이만 공이 세운 탑이라고하여 소공탑(蘇公塔)라고 불리게 되었다. 어민 호자를 기념하는 탑이기 때문에 어민탑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투루판의 위구르족 사람들은 그냥 투루판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탑의 높이는 37m이고 밑둥의 지름은 10m로 신장성 안에 현존하는 이슬람 사탑 중 가장 높다. 햇볕에 말린 밝은 회색의 흙벽돌을 쌓아서 만든 이 탑은 이슬람 사원의 대형 출입문 한쪽 구석에 지어졌기 때문에 신장의 다른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슬람 사원의 대칭적 전탑과는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