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파를 왜 이단이라 하는가?
-박옥수의 대한예수교침례회(기쁜소식선교회)를 중심으로-
정 동 섭 전 침신대 교수
현재 전국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이단은 안상홍증인회(하나님의 교회), 무료성경신학원(신천지 교회), 그리고 구원파(대한예수교침례회와 기독교복음침례회)이다. 이단은 지도자와 그의 가르침, 그리고 그 잘못된 가르침을 따르는 추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단은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여 가르침으로 영혼을 멸망시키고 하나님의 교회를 분열시키며, 가정을 파괴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유병언과 이요한, 박옥수라는 세 인물이 이끌고 있는 구원파는 사이비기독교로서 초대교회를 어지럽히던 이단사상 도덕률(율법)폐기론과 영지주의가 2000년만에 새로운 옷을 입고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침례교를 빙자해서 세계 도처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구원파의 세력은 본래 외국에서 들어온 이단이라 할 수 있다. [유병언/권신찬의 기독교복음침례회, 이요한(이복칠)의 대한예수교침례회; 박옥수의 대한예수교침례회 중앙교회파, 서달석의 서울중앙침례교회]는 모두 미국의 헬리콥터 조종사 Dick York과 화란인 독립선교사 Kaas Glas의 사상을 물려받은 자들이다.
현재 구원파는 크게 5계열로 나뉘어서 활동하고 있다. 유병언씨는 서울 삼각지에, 이요한씨는 안양시 인덕원에, 박옥수씨는 대전시 변동에, 서달석씨는 광명시 철산동에, 윤방무는 미국 L.A.에 본부를 두고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 구원파는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이단이 아니라, 정통기독교를 부정하는 미국의 돌팔이 선교사에 의해서 수입된 이단이다.
국내적으로는 유병언과 그의 장인 권신찬이 모두 장로교(통합측) 출신이기 때문에, 장로교회에서 파생된 사이비침례교 또는 사이비기독교라고 할 수 있다.
분파현황
⑴ 권신찬, 유병언 계열(기독교복음침례회)
한국의 구원파(기독교복음침례회)는 1962년 경북 대구에서 고 권신찬과 그의 사위 유병언에 의해 시작되었다. 권신찬은 대구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를 졸업하고 1951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후 10년간 경북지방에서 장로교목사로 목회를 하였으나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1961년 11월 8일 설교준비를 하던 중 로마서 3장 2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의가 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ꡒ십수년간 내 양심을 칭칭 동여 매었던 죄의 사슬이 한꺼번에 풀어졌다ꡓ고 밝히고 있다. 얼마 후 그는 네델란드 선교사 Kas Glaas(길기수)에게 침례를 받음으로 경북노회로부터 제명처분을 받았다.
구원파의 실세인 유병언은 같은 시기에 대구서문교회에 다니다가 1962년 4월 7일 미국인 독립선교사 Dick York의 설교를 듣다가 ꡒ복음을 깨달았다.ꡓ 유병언은 1961년 외국인독립선교사들이 운영하던 대구성경학교에서 박옥수, 이종섭, 유강식, 심남섭, 김성준 등과 함께 공부하다가 그 무리에서 이탈하여 권신찬과 손을 잡고 그들 나름대로 포교활동을 펴기 시작했다.
서울의 극동방송에서 한국어방송을 담당하던 권신찬과 유병언은 1977년 [한국평신도복음선교회]를 결성하여 전국적으로 활동하다가, 그들의 이단성이 탄로나면서 1973년 방송국에서 밀려나 삼우트레이딩을 인수 사업에 전념하게 된다. 이 회사는 후에 (주)세모로 발전하게 되어, 오대양사건으로 일으키는 토양을 마련하게 된다. 1981년 기독교복음침례회라는 교단이름을 사용하여 기존교회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다. 오대양사건 이후 사업에만 주로 전념하고 있는데 그 교세가 현저하게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새길]이라는 정기간행물을 내고 있다. 본부의 소재지는 서울 용산구 한강로 1가 231-23 서울교회로서 통상 삼각지교회로 불린다.
⑵ 이요한(이복칠)계열(대한예수교침례회)
이요한(본명 이복칠)은 목포출신으로 권신찬의 수제자이며, 그에게서 목사안수를 받은 거짓목사이다. 이요한 계열은 유병언이 교회의 헌금을 사업에 전용하는 것을 문제삼아 기업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는 유병언 파를 비난하면서 교회와 기업을 분리해야 한다는 성명을 내고 1983년 분파되었다. 공주에 기도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안양 인덕원과 광주를 중심으로 3만명의 교세를 확보하고 있다. 이들은 현재 ꡒ대한예수교침례회ꡓ라는 간판 아래 활동하고 있으며, 본부는 서울 서초구 방배동 239-1 삼원빌딩 4층 서울교회이다(안양시 인덕원에 교회당을 새로 지어서 이전했다). [생명의 빛]이라는 월간지가 나오고 있다.
이요한 계열은 권신찬, 유병언 계열에서 분파되었기 때문에 신조마저 유병언계의 ꡒ우리는 무엇을 믿는가?ꡓ라는 12개항을 약간 수정하여 ꡒ우리는 이렇게 믿는다ꡓ라는 10개항을 만들 정도로 거의 유사하다. 종말론에 있어서 약간 다른 요소가 있으나 구원관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가 없음으로 이 글에서는 권신찬, 박옥수를 중심으로 구원파의 이단성을 파혜치기로 한다. 이요한 계열은 전국적으로 교회건축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⑶ 박옥수계열(대한예수교침례회)
박옥수는 중학교 3학년 중퇴생으로서 체계적인 신학을 공부한 적이 없고 Dick York과 권신찬의 영향을 받았으며, Dick York에게 개인적으로 목사안수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옥수씨는 경북 낙동강 유역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중학교를 중퇴하고 1962년에 대구에서 죄사함을 ꡒ깨달음ꡓ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대구 계명대학교 앞에서 1983년까지 단독 목회를 하다가, ꡒ서울제일교회ꡓ를 담임하기도 했고, 1984년부터 대전 변동에 한밭중앙교회(기쁜소식선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전국대도시의 체육관을 빌려 성경세미나를 벌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매년 4박5일의 일정으로 경북 김천에 기쁜소식선교회 수양관에서 여름수양회를 주관하고 있다. 기쁜소식선교회의 이름으로 [죄사함, 거듭납의 비밀]을 비롯하여 많은 책을 무료로 배포하며 전도에 열을 올리고 있다. 군부대와 교도소에까지 침투하면서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기쁜 소식]이라는 월간지를 내고 있다.
대한예수교침례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서울 관악구 봉천동 소재 서울제일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현재는 대전 변동에 있는 한밭중앙교회(기쁜소식선교회)를 본거지로 삼고 있다.
부흥회 대신 성경강연회 또는 성경세미나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세 계파의 공통점이다. 성경을 이지적으로 이해하고 깨달아야 할 책으로 보는 것이다. 이들은 5-7일 집회를 통해 기존정통교회를 의심하거나 부정하게 만든 후에 참석자들의 세계관과 교회관을 바꾸어 놓는다.
권신찬(유병언), 이요한, 박옥수는 회개를 부인하는 깨달음에 의한 구원을 주장하는 영지주의적 사상으로 인하여 199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77회 총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구원파 지도자들은 성경을 억지로, 풍유적으로 해석한다. 대부분이 체계적 신학을 공부한 적이 없기 때문에, 즉 성경해석의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들의 구원관을 강조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성경을 자의적으로, 억지로 해석하기를 서슴치 않는다(예: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 누가복음 10장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무화과나무의 비유 등). 성경은 무식한 자들이 성경의 역사, 문화, 문법, 신학을 무시하고 말씀을 억지해석하여 이단을 만든다고 경고하고 있다(벧후 3:16). 성경은 우리의 칭의와 성화 그리고 영화를 위해 죄인들을 변화시킬 목적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구원파는 성경을 지식적으로 깨달아야 할 책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이들은 성경부흥회나 심령부흥회, 사경회라는 표현을 거부하고 성경강연회 또는 성경세미나라는 표현으로 현대인들을 미혹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이단이 있다. 첫째는 성경외의 자기 계시, 즉 자기 성경을 가지고 있는 이단이 있다.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와 같은 이단이 이에 속한다. 둘째는 성경만이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이 있다. 둘째 이단이 첫째 보다 훨씬 더 무섭고 해악이 크다. 드러난 질병 보다 숨은 질병이 더 무섭다. 이단은 그 본성이 미혹하는 자요, 속이는 자요, 노략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 이단성을 효과적으로 숨기려 한다. 구원파는 성경을 믿는다고 강조하기 때문에 그 미혹성이 더 크다고 할 것이다.
신학적으로 구원파의 이단성은 어디에 있는가?
유병언, 이요한, 박옥수 등 구원파의 여러 계파는 다음과 같은 공통된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있다(종합 사이비이단연구보고집, 2001):
① 구원관이 잘못되었다. 회개와 믿음이 빠진 ꡒ깨달음ꡓ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② 회개관이 잘못되었다. 회개를 계속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한다.
③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면 지옥으로 간다고 한다.
④ 정통교회의 제도(장로, 집사)와 예배형식, 주일성수, 십일조, 새벽기도, 철야기도, 축도를 무시한다. 종교와 복음, 기독교인과 그리스도인, 종교생활과 신앙생활을 구분하여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1. 신관이 잘못되었다. 하나님은 인격이 아닌 영이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을 인격적인 존재로 믿지 않고, 이신론적 존재로 격하시키고 있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사실만을 강조하여, 하나님을 주로 인류역사, 특히 중동정세를 주관하는 비인격적이고 추상적인 힘으로 부각시킨다. 구원파에서 전하는 하나님은 기계적으로 그의 계획을 성취하시는 이신론적인 존재일 뿐, 우리를 사랑하셔서 개인적으로 인도하시고 섭리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영성을 강조하고 인격성을 부인하거나 격하시킨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백성의 반응에 따라 뜻을 돌이키시기도 하시는 아버지이심을 보여준다. 구원파의 대부격이 권신찬은 ꡒ영을 자기의 인격적인 활동과 혼돈하여 인격의 일부인 지성이나 감정이나 의지로서 영이신 하나님과 접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ꡓ(양심의 해방, p.9)고 말하고 있다.
구원파는 ꡒ하나님은 영이시다ꡓ(요 4:24)라는 전제하에 복음을 깨달아 구원받는 것, 예배하는 것, 기도하는 것 등 모두를 ꡒ영, 즉 양심의 활동ꡓ으로 제한 시키고 있다. 영의 세 가지 기능, 직관, 영교, 양심 가운데서도 특히 양심의 기능만을 강조하여 죄책감에서의 해방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 기도, 찬양, 예배를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행태가 발달하게 된 것이다.
권신찬은 말한다. ꡒ예배는 형식을 갖춘 의식이 아니라 영의 동작이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데 있어서 어떤 형식을 갖추느냐 하는 문제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예배의 형식은 이교도의 제사의식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짙다ꡓ(세칭 구원파란, p.23).
한편 구원파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인정하지만, 예수님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그의 인성을 무시하거나 극히 경시하는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구원파의 이단성은 역시 그들의 구원관에 있다.
2. 구원관이 잘못되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성육신하였다. 그러므로 구원문제는 기독교의 최초의 문제이면서 최후의 문제이기도 하다. 구원파에서도 죄사함과 구원을 강조하나 이들은 다른 의미의 구원을 전하고 있다. 구원파는 특히 구원론에서 곁길로 빠지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 이단이다. 이런 점에서 구원파는 이단 중의 이단이다. 대개 이단은 구원론, 종말론, 그리고 신비주의를 중심으로 생겨난다.
(1) 구원파의 세 계파는 사람을 ꡒ죄덩어리ꡓ로 규정하여 죄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박씨는 죄(원죄)와 범죄(자범죄: 도둑질, 거짓말, 살인, 간음 등)를 구별한다. 박옥수가 말하는 죄는 아담의 원죄(original sin)를 가리키고, 범죄는 우리의 자범죄(present sins)를 일컫는 것이다. 죄와 죄의 증상을 구분하여 설명하는데, 문제는 그가 죄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단의 특징은 성경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되 자기들의 목적에 맞추어서 그 의미를 바꾸어서 사용하는 것이다.
박씨는 인간을 죄의 종, 사탄의 종으로 표현하면서, ꡒ죄 덩어리로 뭉쳐진 인간,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인간, 더 이상 가능성이 없는 죄악 덩어리, 죄 투성이ꡓ라고 설명한다([내 죄벌이 중하여], 2003, p.160). 원죄란 아담이 범죄한 후 인류의 삶을 옭아매며 인간으로 하여금 계속 범죄하도록 만드는 힘있는 그 무엇이다. 자범죄란 이 힘에 의해 범한 악행을 의미한다.
박옥수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죄에 대한 회개는 한 번 하는 것인데, 기성 교인들이 죄를 회개하거나 고백하지 못하고 계속 범죄만 회개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죄인이냐 의인이냐를 물었을 때 의인이라고 고백하지 못하고 죄인이라고 하면 역시 구원받지 못한 사탄의 자식으로 정죄해 버리는 것이다. 이점을 직접 그의 글 속에서 살펴보자.
"요한 1서 1장 9절의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는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지은 죄를 하나하나 모두 고하면 죄가 씻어진다는 말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달랐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되어 있지요?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살인하고 간음하는 것이 죄입니까? 천만에요.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여러분, 문둥병이 무엇입니까? 손가락이 빠지고 눈썹이 빠지고 코가 일그러지면 문둥병입니까? 아닙니다. 그것들은 문둥병의 증상이고 문둥병의 결과이지, 문둥병 자체는 아닙니다. 여러분, 장티푸스가 무엇입니까? 열이 나고 머리카락이 바지는 것입니까? 그것이 장티푸스가 아닙니다. 그것은 장티푸스 균이 들어 갔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지요. 그것처럼 죄와 범죄도 근복적으로 다릅니다."(박옥수,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기쁜소식사, 1993. p.33)
"성경에는 '죄'와 '범죄'에 대해 명백하게 나뉘어져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이 말씀에서 '내가 도둑질 했습니다'하고 범죄한 것을 자백하라는 것이 아니라 죄를 자백하라는 뜻입니다."(「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1」 p.36)
"시편 51편 5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그렇게 고백하지 않습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자신이 무슨 무슨 죄를 지었다는 것이 아니고 그는 근본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그 자체를 고백한 것입니다. 나는 죄 덩어리로 뭉쳐진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의 결과를 고백하는 것과 죄의 근본을 고백하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1」p.37).
박씨는 심지어 성경에 회개하면 죄가 씻어진다는 말이 없다고까지 말한다.
"여러분, 아무리 유명한 부흥 목사의 이야기라 해도 성경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길이 아닙니다. 회개하면 죄가 씻어진다는 말이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회개해서 죄를 씻는 것도 성경적인 방법이 아닙니다."(「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2」 기쁜소식사, 1993. p.50).
박씨에 의하면 죄를 해결해야 범죄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마치 감기를 고쳐야 열이 내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박옥수 씨에게 묻고 싶은 것은, 예수를 영접하고 회개한 후에는 죄가 해결되어서 죄인이 아닌 의인이 되었으니 그 다음부터는 범죄가 없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시면 더 이상 여러분 자신이 죄와 싸울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여러분이 더 이상 술을 끊으려고, 담배를 끊으려고, 도둑질을 하지 않으려고, 방탕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전혀 없게 됩니다. 여러분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 마음 속에서 그 모든 죄악을 이기게 해 주실 것입니다."(「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1」 p.16)
물론 구원받은 후에 죄를 안 짓느냐고 하면 안 짓는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둘 중에 하나인 것만은 틀림없다. 구원 얻은 자는 죄가 해결되었으니 어떤 죄(범죄)도 안 짓는다고 하든지 아니면 죄를 지어도 죄가 아니라고 해야 될 것이다.
성경적으로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그 증거를 세 군데만 살펴보자.
시편 51편 그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성경이다. 그는 자기 필요에 의해 여러 번 말했건만 스스로 자기 귀를 막고, 하나님의 말씀을 안 받아들이고 있다. 그의 말대로 하면 14절에서,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라고 했는데, 이 '피 흘린 죄'는 '피 흘린 범죄'에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성경이 구별하지 않는 것을 왜 구별 하는가?
사무엘하 24장 10절 다윗이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인구계수를 하여 하나님께 교만의 죄를 범하였다. 그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범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 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했다. 박씨의 말과는 정반대다. 죄가 있어서 인구 계수의 범죄를 했다고 해야 할 터인데,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다"고 하였고, 그 죄를 "큰 범죄를 하였다"고 하지도 않았다. 더욱이 "종의 범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지도 않았다.
마태복음 6장 12절 주기도문의 일부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했다. 박씨 말대로 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었다"는 말이 불가능하다. 또한 박씨의 말을 인정한다면 우리 인간이 인간에게 범죄할 수는 있어도 죄를 지었다는 말이 불가능할 것이다. 더욱이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범죄가 아닌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가?
죄인임을 시인하고 죄를 해결하면 구원을 받게 되며, 그 후부터는 의인이 되었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죄인이라 하며 회개하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는 아담의 죄가 아닌 각자의 죄 때문에 멸망한다(신 24:16; 역대하 25:4; 겔 18:4, 19, 20, 30; 행 3:19; 5:31) 회개무용론은 예수의 보혈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 같지만 결국 죄를 지어도 죄가 아니라는 율법폐기론에 빠지게 한다. 바울은 구원을 받은지 30년이 지난 후에도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하고 있다(딤전 1:15).
(2) 구원파는 구원받았습니까? 라는 질문으로 구원의 확신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킴으로 순진한 성도들을 미혹한다. 구원의 확신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이지 어느 집단이나 깨달음이 아니다.
마치 자신들이 구원여부를 시험할 수 있는 시험관이나 되는 것처럼 행동한다.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아야 구원의 확신이 있는 것이다. ꡒ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ꡓ(고후 13:5). (회개와 신뢰로서의 믿음이 없이) 복음을 깨닫고 시인하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구원파는 18세기에 나타났던 Sandemanianism이 부활된 것으로 피동적인 깨달음에 의한 구원은 거짓된 평안과 안심을 심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이지 죄사함을 깨달는 것이 아니다. 박옥수는 구원받는데 어떤 의지나 결단도 요구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p.15). 총신대 김정우 교수의 지적처럼, 성경은 깨달음을 의지적인 결단이나 순종과 분리시키지 않는다.
유병언과 이요한, 박옥수의 구원관에 빠져있는 것은 의지적인 회개와 결단으로서의 믿음(신뢰)이다. 구원파는 수동적으로 죄사함을 깨닫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것이지만 구원과 용서는 조건적인 것이다. 회개하고 믿는 죄인들만 용서함을 받는다.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하는 회개가 전파되었다(눅 24:47; 행 17:30; 20: 21). 구원에는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필수조건이다(행 20:21). 회개(metanoia)란 무엇인가?: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이켜 그를 섬기기로 작정하는 것이다. 자신과 하나님과 죄에 대하여 생각을 바꾸고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구원파의 구원에는 깨달음 즉, 이해와 지적 동의만이 있을 뿐이다. 성경의 가르침과 비슷하지만 다르다. 사이비기독교이다.
회개의 중요성 : 회개는 생각과 느낌과 의지의 변화를 의미한다. 죄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회개에는 ⑴하나님의 거룩함과 자신의 죄와 죄책을 인식하는 이지적인 측면과 ⑵ 죄를 슬퍼하는 정서적인 측면과 ⑶죄에서 돌이켜 용서를 구하는, 그리고 목적과 동기를 바꾸는 의지적인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신약성경은 회개하라(마 3:2)는 명령으로 시작하여 회개하라(계 3:19)는 명령으로 끝난다. 회개(metanoeo)는 신약의 가장 보편적 개념이다. 그것은 심지어 부활보다 더 자주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부활에 대한 믿음이 기독교 복음의 설교를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특기할 만 하다. 회개는 기독교설교에 하나의 목적을 부여하였다(William Chamberlain, The Meaning of Repentance, Westminster, 1943).
회개를 설교하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의 목적이었다(눅 24:46-47: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전파될 것). 바울의 사역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행 26:17-18; 행 17:30-31; 롬 2:4; 계 3:19 (벧후 3:9)는 계속해서 회개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베드로는 회개하여 각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으라(행 2:38)고 설교하고 있다. 바울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고후 7:10).
회개와 믿음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둘은 중생에 따라 일어나는 것으로 회심의 두 가지 양상이라 할 수 있다. 구원받게 하는 믿음은 회개로 침식되어 있고, 회개는 믿음으로 가득차 있다(John Murray). 죄인이 회개하여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회개하게 해야 회개는 가능한 것이다(행 20:21).
구원파는 단회적 회개(히 6:1)와 성화를 위한 반복적 회개(마 6:12; 요일 1:8-9)를 구별하지 못하며, 죄에 대한 참된 통회와 회개는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모르는 자들이다. 그래서 권신찬은 ꡒ회개는 죄인이 하나님께로 인도되는 것ꡓ이라며, ꡒ죄사함이 회개에 앞선다ꡓ고 해괴한 주장을 하고 있다(중동문화사, [임박한 대환란], p.145).
회개는 생활설계(life design)를 바꾸는 것이다: 전체 생활패턴이 바뀌고, 삶의 목표가 바뀌고, 열망이 달라지는 것이다(Chamberlain).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강권하는 것은 설교자의 엄숙한 의무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주권적으로 회개의 선물을 선사해 그에게 돌아가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다(Hoekema).
마틴 루터의 95개조문의 첫 조문을 다음과 같다. "우리의 주요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신자의 삶 전체가 회개이기를 의도하셨다."
믿음의 중요성 : 믿음의 명사형pistis과 동사형 pisteuein은 신약에 약 240번 나온다. 믿음은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롬 10:9).
믿음은 어떤 진리에 대한 확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모든 것의 창조자가 되시며,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구원하시는 분이며, 그리스도는 우리의 메시야가 되신다고 믿을 수 있다(행 11:24; 롬 3:28; 엡 2:8). 동사로서 pisteuein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 그를 의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울 수 있다. ⑴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증언을 수용하는 것과 ⑵구원을 위해서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것을 의미했다.
영지주의는 단순한 믿음보다 지식을 우월하게 생각하였다. 믿음은 바라고 소망하는 것의 보증이다(Faith is the title-deed of the things hoped for: 히 11:1). 신약에서 믿음은 여러 가지 다른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스도께 오는 것(요 6:37); 그리스도를 먹는 것(요 6:51); 그리스도를 마시는 것(요 4:14);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요 15:5). 믿음은 우리 자신 대신에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분을 신뢰하고 그 안에 쉬는 것이다.
구원하는 믿음에는 지식(knowledge)과 동의(assent)와 신뢰(trust)가 포함되어야 한다. 무엇을 얼마나 알아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가 구속을 필요로 하는 죄인이며,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와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속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우리는 성경이 죄와 그리스도, 구원 그리고 우리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진리로 동의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구속을 신뢰하고 나를 떠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다. 믿음은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엄격하게 말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이시다. 구원파에서는 믿음을 하나님께 매달리는 상태로 보기 보다는 확신하는 마음의 신념으로 본다. 그리고 믿음을 존재론적으로 설명한다. 인격적 신뢰하기 보다는 어떤 진리를 깨닫는 상태로 오인하고 있는 것이다(권호덕, [박옥수 목사의 ꡐ죄사함ꡑ이해에 대한 비판], 2004, p.17).
구원의 확신 : 요한일서 5:13; 로마서 8:16을 보면,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누가복음 17:5; 마가복음 9:24과 같은 말씀을 통해 우리가 확신에서 흔들릴 수도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ꡒ믿음이 적은 자들아, 믿음이 적은 자여ꡓ(눅 12:28; 마 8:26; 14:31)은 우리가 잠시 의심할 수도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믿음의 강함에 좌우되지 않는다. 구원의 근거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사역에 있는 것이다 (Gresham Machen).
(3) 박옥수의 구원파는 구원받은 언제, 어디서 구원을 받았는지 시간과 장소를 묻는다. 성경은 바울이나 삭개오, 간수장과 같이 즉각적인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디모데, 빌리 그래함 목사 사모님, 옥한흠 목사와 같이 회심(回心)한 년월일시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온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박옥수는 점진적 회심을 인정하지 않는다. 어떻게 구원받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누리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회심에는 또한 점진적(gradual)인 회심과 급진적(sudden)이고 위기적(crisis)인 회심이 있다. 바울이나 빌립보 간수는 위기적 회심을 경험하였으나(행 9:1-19; 22:3-14; 26:9-18; 행 16:25-34)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점진적인 회심을 경험한 사람이다(딤후 1:5; 3:15). 우리는 같은 주님을 믿지만, 다양한 모습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ꡒ우리는 예수께서 사람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불렀음을 인정할 수 있다. 우리가 섬길 주님은 오직 한분이나 우리는 다양한 회심의 경험을 통하여 그에게 나아오게 된다ꡓ(Samuel Southard).
어떻게 구원받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로 불리우는 로이드 죤스(Lloyd-Jones)목사님은 구원받은 날자와 장소를 고집하는 이들의 주장에 이렇게 논박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왔느냐 하는 것이아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신이 그 나라에 들어와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당신의 출생 거듭남이 극적이고 흥분된 것이었느냐, 아니면 조용히 거의 알아 차리지 못할 성질의 것이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성경 어느 곳에서도 당신이 정확한 순간을 대고 사용된 성구를 정확하게 인용하고, 설교자의 성명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발견하지 못한다. 이런 것들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 단 한 가지는 당신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그리스도께 회심했다는 것을 그들의 신앙과 생활로 증거하고 있는 크리스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이 구원받은 정확한 시간을 잘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법칙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예외라고 생각된다. 그들이 그 정확한 시간을 기억하든 못하든 그들에게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너 뛴 순간이 있었다 우리는 언제 밤이 변해 낮이 되는지 정확한 시간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낮이 되면 낮이 되었다는 것을 알지 않는가?(빌리 그래함, 불타는 세계, 225).
또한 언제 구원을 받았는지 그 날짜와 시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회개하는 신앙 생활을 하면 구원받지 못한 것으로 단정해 버리는 것은 참으로 비성경적인 행위이다.
저들은 "어떻게 육신의 생일을 알면서 참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영적 생일은 모르느냐."고 묻는다. 의미가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그 말에 속에도 허점이 있다. 육적 생일과 영적 생일은 유사성 내지는 유비성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른 것이다.
예를 들자면 육적 생일을 알 듯이 영적 생일을 알아야 한다면, 영적 생일도 자기 스스로 알 수 없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적으로 태어난 사람 스스로 자기 생일을 감지하거나 아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박옥수 씨에게 너는 네 생일을 스스로 알았느냐 네 부모가 가르쳐 주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박씨가 자기 생일을 스스로 알았다면 몰라도 그러지 않았다면 그런 질문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구원파에 속한 자가 어떤 집사님에게 구원받은 날짜를 모르는 것을 보니 구원받지 못한 것이 아니냐고 다그치니까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한다. "나는 언제부터 구원받았는지는 모르나 분명히 구원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내 속에 성령님이 계시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내가 언제부터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내가 자전거를 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부터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는지 모른다고 나보고 자전거를 못 탄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언제 구원받았는지는 모르나 분명히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 얼마나 통쾌한 대답인가?
박옥수씨는 구원을 확증하는 목적과 방법이 잘못되었다.
성경은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했다고 말하고 있다(롬 9:16). 그러나 또한 구원은 스스로 확증하라고 요구하고도 있다(고후 13:5). 종합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셨을 때 구원을 확증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주권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인간의 확신은 결코 절대적일 수 없다. 더욱이 자신들의 집단에 속한 자들만이 구원받은 것처럼 생각하여 구원을 확증하거나, 자신들의 구원 확증 방법만이 구원을 좌우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하는 것은 비성경적이요, 사탄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박옥수 구원파들은 구원받은 자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방법으로 구원이 확인되지 않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로 정죄해 버린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주권 앞에서 겸손하지 못한 것은 마치 구원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기보다 자기들이 준 것처럼 하는 것이요, 구원이 자기들에 의해 좌우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박씨의 책에 보면 자기 교회에 와서 구원받았다는 말이 많은 것은 정통교회 교인에 대한 미혹자로 활동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박옥수는 마치 하나님이 구원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 집단이 구원을 나누어주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 따라서 구원파에서 죄사함을 깨달았다고 하면 그들은 교만한 자세를 취한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 은혜 앞에 겸손하고 온유해진다. 이것이 참된 구원과 거짓된 구원의 차이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