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r sehen uns in Dortmund! 우린 도르트문트의 우릴 본다!
FC 칼 짜이스 예나의 공식 웹사이트 첫 창에, 주장 알렉산더 마울의 사진과 함께 뜨는 문구이다. 바야흐로 2부 분데스리가의 예나는 이번 시즌 DFB포칼에서 파란을 일으키며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4강전을 앞두고 있다. 2부 분데스리가는 15위부터 하위 네 팀이 3부 레기오날리가로 강등되는데, 그들은 17위에 머무르고 있다. 그들이 DFB포칼에서 보여주는 연전연승은 그래서 더욱 놀랍다.
아다시피 칼 짜이스는 'We make it visible'이란 모토 아래, 30개국에서 14,000명을 고용하고 있는 굴지의 다국적 기업이다. 옛 동독의 기간 산업이기도 했던 광학 산업의 심장부는 바로 이 기업이었다. 독일의 허파로 불리는 튀링엔의 숲 속에 자리한 인구 10만도 안되는 예나에서 그렇게 클럽은 비롯되었다.
최고의 렌즈 깎는 마이스터였던 칼 짜이스의 이름은 동명의 회사로 남았으나, 그것은 그의 친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바로 에른스트 아베였다. 친구가 죽으며 이 거대 기업체의 소유주로 아베 혼자만 남았지만, 그는 개인적인 치부를 포기한다.
1889년 친구의 이름을 따 칼 짜이스 재단을 설립하고, 그 재단을 유일한 공장의 소유주로 못을 박은 것이다. 아베는 정당성이란 말을 사랑했던 만큼 자선가라는 말을 싫어했고, 경영법에서의 정당성으로 '공동결정권'을 제창하여 노조의 참여를 주장했다. 젊은 날을 함께 한 친구를 그는 잊지 않았던 것이다.
1903년에 설립될 당시에 예나는 오로지 칼 짜이스에 다니는 종업원들로 비롯된 클럽이다. 당연히 기업에선 클럽 운영의 일체를 제공했고, 그것은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그러하다. 회사가 노동자들의 복지까지 생각했던 것으로, 유럽에서 처음으로 기업 내 클럽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어찌보면 당연하겠지만, 예나의 건축가 하인리히 포슬러가 1922년 설계한 12,000석 규모인 그들의 홈 구장 이름도 에른스트 아베다.
예나는 옛 동독리그에서도 나름 잘 나가는 클럽 가운데 하나였다. 1962/63, 1967/68, 1969/70 세 시즌 밖에 우승하진 못했으나 준우승은 9번이나 했다. 게다가 1980/81 시즌엔 지금은 UEFA컵에 통합된 컵위너스컵에서 FC 발렌시아, 잉글랜드의 뉴포트 카운티, 벤피까를 차례로 누르고 결승에 올랐다. 결국 당시 소련의 그루지야 복병 디나모 트빌리시에게 1:2로 지며 컵을 가져오진 못했으나, 유럽에 그들의 존재를 확실히 알리기도 했었다.
모든 것들을 종합해서, 그들은 현재 독일축구연맹이 집계한 역대 동독 클럽 순위에서 1위다. 그만큼 꾸준한 경기력을 선보였다는 말이기도 하다. 1911년 3월, 클럽 출신의 첫 국가대표였던 빌리 크라우스 이후, 바이어 레버쿠젠의 베른트 슈나이더나 아르미니아 빌레펠트의 외르그 뵈메, 하노버 96의 로베르트 엔케 같은 스타 플레이어들의 산실이기도 하다.
1934/35 시즌부터 모세혈관처럼 온 독일의 축구팀을 아우르는 최고 권위의 대회 DFB포칼은 분데스리가와 그 권위에서 양대 산맥을 이룬다. 또 단판 승부이기에 더욱 약팀들의 투지를 자극하는 대회의 특성상 언제나 이변을 낳는다. DFB포칼 일정이 다가오면 아래처럼, 독일 언론들이 으레 관용어구로 쓰는 제호들이 있을 정도이다.
Im Pokal ist immer alles möglich. 포칼에선 언제나 모든 것이 가능하다.
DFB포칼은 1라운드에 참가하는 64개 팀을 전통적으로 다른 두 개의 단지로 나누어, 각각 한 팀씩 뽑아 대진을 결정한다. 하나의 단지엔 프로 클럽인 1, 2부 분데스리가 32개 클럽들의 이름이 들어가 있고, 하나의 단지엔 아마추어 클럽들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다만 주로 7월 초에 다음 시즌 추첨이 시작될 때, 지난 시즌 강등된 2부 분데스리가의 네 팀은 자동으로 아마추어 클럽 단지에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2만 6천 개의 아마추어 클럽들은 네 개를 뺀 나머지 28장의 출전권을 따기 위해 경쟁하게 된다.
21개의 지역연맹(Fußball-Verband)에 가입하고 있는 클럽들은 각 지역연맹컵(Verbandspokal)에서 우승하면 일단 DFB포칼 64강에 들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된다. 거기에 새롭게 3부 레기오날리가의 북부와 남부 1, 2위 팀이 추가로 진출권을 따게 된다. 이렇게 아마추어 클럽 단지에 들어갈 25장이 추가로 가려지게 된다. 나머지 세 장은 가장 많은 남자팀을 가진 3개 지역연맹에 한 팀씩 배정되는데, 규정상으로는 지역연맹컵 결승에서 진 팀 가운데 뽑게 된다.
그렇게 64강이 가려지면 1라운드를 치르고, 단판 승부의 승자가 2라운드에 진출하게 된다. 여기서 다시 올라온 팀들을 둘로 분류하는데, 인가 취득 클럽과 그렇지 않은 순수 아마추어 클럽으로 구분한다. 다시 두 부류를 다른 단지에 넣고 각각 하나씩 뽑아 대진을 결정한다. 여기까지는 무조건 아마추어 팀의 홈 경기장에서 시합을 치르게 되지만, 16강전부터 준결승까지는 매번 추첨으로 대진과 경기 장소를 결정한다.
2부 분데스리가 팀이었던 예나는 1라운드에서 약체 FC 게라 03를 만났다. 게라는 같은 튀링엔에 있는 예나와 인접한 비슷한 규모의 도시인데, 예나에서 16시즌 동안 310경기를 뛰며 동독 국가대표로 유명했던 콘라트 바이제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번 시즌 게라는 4부 리가 격인 아홉 개 오버리가의 하나인 북동오버리가 남부에 속해 있다.
경기는 물론 게라의 홈 구장인 '슈타디온 데어 프로인트샤프트'에서 치러졌다. 당시 예나의 감독이던 프랑크 노이바르트는 주장이자 중앙 수비수인 마울을 빼고는, 대부분 2진 선수들을 출전시켰다. 예나는 예상대로 아마추어 팀을 상대로 3:0의 가벼운 승리를 거두며, 8월을 산뜻하게 시작했다.
주말에 치러진 알레만니아 아헨과의 원정 경기도 2:2로 비기며, 예나는 2부 분데스리가 개막전도 잘 치러냈다. 하지만 예나는 이후 리가 경기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9월 중순에 치러진 5라운드에서도 결국 TuS 코블렌쯔에게 1:2로 패하며 꼴찌 18위로 주저 앉게 된다. 투톱으로 나왔던 차두리가 82분을 뛰고 교체되었던 그 경기였다.
집행부는 노이바르트 감독을 경질하고, 66년생인 리투아니아의 발다스 이바나우스카스 감독에게 팀을 맡긴다. 1996/97 시즌까지 SV 함부르크에서 공격수로 네 시즌을 뛰었던 그는 지난 시즌까지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하트 오브 미들로시안 FC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데뷔전이던 SV 베헨 비스바덴 원정 경기에서 1:5로 대패하고 만다. 클럽은 총체적인 위기에 빠졌다.
10월 31일에 치러진 DFB포칼 2라운드에서 예나는 디펜딩 챔피언 FC 뉘른베르크와 맞붙게 되었다. 두 팀 모두 각각 2부 리가의 프라이부르크와 1부 리가의 볼프스부르크에게 지고 만났기에, 더욱 이겨야만 하는 경기였다. 이번 시즌 내내, 리가와 UEFA컵에서 아슬아슬하던 뉘른베르크는 이미 지난 시즌의 전력이 아니었다. 예나는 헝가리 대표팀의 산도르 토르겔레의 귀중한 동점골로 경기를 연장으로 몰고 갔다.
연장에서 호주 국가대표팀의 조슈아 케네디에게 다시 실점했지만, 종료 6분 전 결국 수비수 로베르트 뮐러의 극적인 헤딩 동점골로 2:2를 만들며 승부차기에 돌입한다. 그리고 뉘른베르크의 세 번째 키커였던 도미닉 라인하르트는 골대 위로 차는 실축을 범하게 된다. 결국 디펜딩 챔피언을 5:4로 꺾자, 홈구장 '에른스트 아베 슈포르트펠트'는 1만 5천의 만원 관중이 뿜어내는 열기에 흥청거렸다.
2006/07 시즌 2부 분데스리가로 승격된 뒤, 이번 시즌은 예나에게 가장 정신없는 기간이었을 것이다. 전반기 내내 팬들은 DFB포칼의 연전연승과 리그에서의 연패 사이에서 널을 뛰는 클럽의 성적에, 차라리 조울증에 시달려야 했다. 집행부는 다시 겨울 휴식기 동안, 클럽의 미드필더 출신인 헤닝 뷔르거를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했다. 그리고 후반기보다 먼저, DFB포칼 16강전이 다가왔다. 상대는 다시 1부 분데스리가의 빌레펠트였고, 다시 에른스트 아베 슈포르트펠트엔 석달 만에 만원 관중이 들어찼다.
빌레펠트의 폴란드 국가대표 공격수 아르투어 비츠니아렉의 위력은 역시 대단했다. 덴마크 국가대표인 요나스 캄퍼의 깔끔한 도움으로 빌레펠트는 당연히 앞서 나갔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다시 예나의 기적이 시작되었다. 감히 줄기차게 1부 리가 팀을 공격하던 예나가 결국 종료 6분 전에 다시 기적같은 동점골을 넣었던 것이다. 88년생 공격수 닐스 페테르센의 헤딩슛은 마티아스 하인 골키퍼를 뚫고 골망을 흔들었다.
그렇게 들어간 연장전은 피 말리는 총력전이었다. 연장 전반 종료 직전, 예나의 동점골을 도왔던 공격수 자미 알라귀가 빌레펠트의 중앙 수비수 안드레 미야토비치를 팔꿈치로 가격하며 퇴장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4분 뒤, 역시 빌레펠트의 선제골을 도왔던 캄퍼 역시 경고 누적으로 퇴장을 당하게 된다. 연장 후반 예나는 그 빈틈을 줄기차게 파고들었고, 결국 마르첼 쉬트가 페널티킥을 얻어낸다. 얀 시막이 성공시키며 예나가 역전시켰을 때가 경기 종료 4분 전이었다.
더 이상의 골은 없었다. 예나는 다시 기적을 일으키며 8강에 진출했다. 겨울휴식기에 주빌로 이와따에서 이적해 온 수비형 미드필더 나오야 기꾸치는 이 날 120분을 모두 소화하기도 했다. 그리고 예나는 8강에서 지난 시즌 분데스리가 마이스터 VfB 슈투트가르트를 만난다.
지난 달 말, 고틀립-다임러 슈타디온으로 원정을 떠난 예나는 의외로 85년생의 어린 공격수 토비아스 베르너가 선제골을 넣으며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슈투트가르트엔 이번 시즌 각종 대회에서 20골도 넘게 넣고 있는 독일 대표팀의 골잡이 마리오 고메스가 있었다. 그는 동점골을 넣으며 연장으로 끌고 가더니 다시 역전골을 넣어 버리며, 예나를 탈락의 벼랑 끝으로 몰았다.
예나의 눈물겨운 총공세가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즈음, 이미 연장 후반조차 추가 시간에 접어들었다. 시계가 121분을 가리키던 그 때, 다시 뮐러의 천금 같은 골이 터졌다. 88년생 어린 골키퍼 스벤 울라이히의 실책이었고, 몇 분 뒤 경기는 그렇게 끝나 버렸다.
24유로의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려는 팬들로 이미 도르트문트전 원정 티켓은 마감되었다. 언제나처럼 원정 버스는 에른스트 아베 슈포르트펠트 동문의 집결지에서 출발하게 된다. 예나가 DFB포칼 4강에 오른 다음 날, 온 독일에서 그들의 행운을 비는 진심어린 격려의 편지가 클럽 사무실로 홍수처럼 배달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꿈만이 아닌 다른 팬들의 꿈까지도 떠맡고 있는 것이다.
지난 3일의 추첨식에서, 2011 독일여자월드컵 조직위원장인 슈테피 존스와 대표팀 골키퍼 코치 안드레아스 쾨프케는 바이에른 뮌헨과 VfL 볼프스부르크를, 도르트문트와 예나를 짝 지워 놓았다. 바이에른 뮌헨은 지난 시즌 감독이었던 펠릭스 마가트 감독이 이끄는 볼프스부르크를 알리안쯔 아레나로 불러들이게 되었다. 1860 뮌헨과의 더비 경기를 이기고 올라온 바이에른 뮌헨은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이기도 하다.
솔직히 겉으로만 보면 도르트문트에겐, 예나를 꺾는 것은 일도 아니다. 하지만, 뉘른베르크와 빌레펠트, 슈투트가르트도 모두들 그러했지만 오히려 희생양이 되어 버렸다. 지난 11월 새로 부임한 구단주 라이너 찌펠은 그것을 잘 알고 있지만, 4월 19일에 베를린 올림피아슈타디온으로 가는 기회를 놓치고 싶은 맘은 없을 것이다.
"Natürlich sind wir in Dortmund krasser Außenseiter. Aber Wunder gibt es im Fußball immer wieder. Das wissen wir nicht erst seit Stuttgart." 물론 도르트문트에 비한다면 우린 터무니없는 약체이다. 그러나 축구엔 또 계속해서 기적이 있었다. 우린 단지 슈투트가르트전 이후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뷔르거 감독 역시 팀을 독전했다. 마흔의 젊은 감독은 인터뷰에서 마치 도르트문트를 꺾을 수 있는 복안을 감추어 둔 듯 자신에 차 있었다. 잃을 것이 없기에 그들은 모든 것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Dortmund ist ein schönes Los, besonders für unsere Fans." 도르트문트는 특별히 우리 팬들을 위해, 훌륭한 추첨이었다.
도르트문트의 감독 토마스 돌은 아무래도 유럽에서 가장 충성도 높은 팬들을 믿는 분위기다. 마치 개나리꽃이 흐드러진 듯 8만 3천 석의 시그날 이두나 파크를 가득 메운 도르트문트의 팬들이 뿜어내는 광적인 응원은, 시골뜨기에 불과한 예나의 다리에 힘이 빠지게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돌은 든든한 만족감을 감추며 차분히 인터뷰를 이어갔다.
"Ich habe mir vor allem ein Heimspiel gewünscht. Mit unseren Fans im Rücken wollen wir das große Ziel erreichen und ins Endspiel kommen. Aber jeder weiß auch, dass der FC Carl Zeiss Jena schon drei Bundesligisten aus dem Pokal geworfen hat. Wir müssen und werden das Halbfinale genau so konzentriert angehen wie das Viertelfinale gegen Hoffenheim." 나는 무엇보다도 홈경기를 바랐다. 배후의 우리 팬들과 함께, 우린 위대한 목표를 이루고 결승에 가길 바란다. 그러나 또한 누구나, 예나가 포칼에서 이미 분데스리가 세 팀을 팽개친 것을 알고 있다. 우린 호펜하임을 상대하던 8강전처럼, 준결승전에 관심을 집중해야만 하고 또 그럴 것이다.
예나가 그들 유니폼과 같은 푸른색 꿈을 이어갈 수 있을까. 결승에 바이에른 뮌헨이 올라온다는 가정 아래, 그들이 결승에 진출하면 다음 시즌 UEFA컵을 통한 유럽에의 도약이 가능하다. 언제나 약팀을 응원하는 필자는 그래서 더욱 예나가 DFB포칼에서 또 하나의 이변을 일으키길 바라는지 모른다. 3부 리가로의 강등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예나와 잉글랜드 챔피언쉽의 반슬리 FC는 그래서 특별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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