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희극 ...... 24
모처럼 서정적인 소설을 읽었다. 친숙한 이웃들의 삶을 모델로 소설 전반에 긍정적인 삶의 모습과 인간미가, 낙천적인 모습이 보였다. 작가는 그의 자전적인 삶을 바탕으로 소설을 그려냈고 감성적인 시정이 좋았다.
작가는 머리글에서 이 이야기는 당신(부친 타쿠히 사로얀)을 위해서 썼다고 했다.
...저는 머지않아 어떤 훌륭한 사람이 이 소설을 당신이 잘 아는 아르메니아어로 번역하기를 바랍니다. 번역을 해놓으면 이 작품은 영어로 되어 있을 때보다 더 훌륭해질지도 모르고, 비록 제가 써놓은 글이기는 하지만 전에도 그러셨듯이 당신은 그 한 부분을 저한테 읽어주셔도 좋을 것입니다. 만일 그러시겠다면 저는 귀를 기울여 듣고, 다른 사람들이 너무나 조금밖에 모르고 있으며, 어느 누구도 당신만큼 그 맛을 음미할 줄 모르는 우리의 언어가 지닌 아름다움에 감탄할 것입니다. 당신은 아르메니아어를 읽고 즐기는 만큼 영어를 읽고 즐기 수가 없으며, 저는 아르메니아어를 전혀 읽고 쓸 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훌륭한 번역가가 있기만 바랄 따름입니다.
이 작품이 만족스럽지 못하리라는 것은 저도 압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그래도 당신에게는 분명히 만족스러울 터이니, 그것은 이 작품을 당신의 아들이 썼으며, 그토록 좋은 의도에서 썼기 때문입니다.
<작품 해설> -안정효-
사로얀의 작품 대부분이 그렇듯이 이것은 선량한 사람들의 맑은 삶과 따스한 슬픔을 투명하게 그려놓은 잔잔한 물결 같은 얘기다.
사로얀은 이 작품에 여러 주인공들을 등장시킨다. 세상과 온갖 신비를 탐행하며 소년의 세계로 들어서는 율리시스, 인간의 추악함을 처음으로 경험하면서 어린 시절을 벗어나는 호머, 어른이 되어 전쟁에 끌려가서 그 전쟁을 미워하며 죽어가는 머커스, 세상에 올바른 인간이 있는지를 확인하려고 권총을 들고 찾아오는 젊은이, 역사를 마음에 품고 인간의 폐허로서 죽어가는 그로간 노인, 이러한 인간 군상이 삶의 모자이크를 짜낸다. 그런 의미에서 사로얀은 글로 그림을 그려내는 작가이다.
이 작품을 아버지에게 바친다는 헌사가 앞에 있듯이, 사로얀은 20세기 초에 터키인들의 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아르메니아인의 아들로 1908년 프레스노에서 출생했다. 이렇듯 미국에서 아르메니아인의 2세로서 성장한 그는 캘리포니아에 있었던 ‘축소판 아르메니아’의 고립되고 가난하지만 소박한 삶을 너무나 잘 알았다.
사로얀은 아버지가 사망한 다음 어린 서절을 고아원에서 지냈고, 그 경험이 이 작품에 등장하는 토비 조지를 통해서 나타난다. 그의 어머니가 식구들을 먹여 살리느라고 고생하던 얘기 역시 이 작품에 잘 드러난다.
<인간 희극>이라고 우리나라에서는 제목이 굳어버린 <인간 극장>은 1943년에 발표되었고, 같은 해에 미키 루니(호머), 봔 존슨(마커스), 제임스 크레이그(톰 스팽글러) 등이 주연해서 클라렌스 브라운이 영화로 만들어 지금까지 고전 영화 가운데 하나로 남아있다.
포도원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그가 두 살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통조림 공장에서 일했다. 월리엄은 여덟 살부터 신문팔이로 돈을 벌어 생활비를 보탰으며, 그후 전보 배달원, 도서관 직원, 포도원 일꾼, 신문기자 등의 직장을 거쳤다.
1934년 <공중그네를 타는 용감한 사나이>라는 단편으로 O.헨리 상을 받은 그는 고생스럽고 다채로왔던 과거를 산뜻하게 작품으로 재생시키는 작가로 미국 문단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의 인상주의적인 작품 세계는 길거리에서 흔히 찾게 되는 ‘피상적인 현실과 자그마한 진실’들을 예리하게 표출시켰다. 초기 작품들은 경제적인 대공황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던 훈훈한 분위기를 그려냄으로써 많은 독자를 얻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초기 낭만주의와는 다리 나중에는 그의 셩격에서 비타협적이고 거친 면도 드러났다. 1940년에 그는 브로드웨이에서 대성공을 거둔 희곡 <삶의 전성기>에 퓰리처상이 수여되었을 때 상업이 예술을 심판할 수는 없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다. 할리우드에서 영화 대본을 쓰던 시절에도 그는 싸움을 잘해서 ‘시끄러운 인물’로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