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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김점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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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어떤 경우 어떤 사람에게는 ‘아는 것이 흠(欠)이다’라는 이상한 폭력이 성립된다.
‘힘’과 ‘흠’ 사이에는 모음 하나의 위치 차이밖에 없는 것 같지만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아는 것이 흠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삶의 방향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달라진다.
지금처럼 교육의 양성 평등이 활짝 펼쳐진 것처럼 ‘보이는’ 열린 지식 사회에서 어떻게 아직도 ‘아는 것이 흠이다’라는 가치관이 잔존할 수 있는 걸까? ‘똑똑한 여자랑 사는 것은 피곤하다’ ‘여자란 그저 알아도 몰라도 곰이 최고다’ ‘암탉이 유식하면 밤낮으로 시끄럽다’ 등 전통 담론의 위력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인지 요즈음 젊은 여성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똑똑하고 지식도 많고 얼마든지 남성과의 경쟁에서 뒤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젊고 똑똑한 여성들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 것은 뜻밖일 뿐더러 많이 서운하다.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고정희, 조혜정 선생의 글을 좋아한다”라든가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호주제 폐지는 찬성한다”라는 등의 이야기에서 페미니즘적 사고를 하고 있으면서도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기를 꺼려하는 젊은 세대의 모순이 감지된다.
얼마 전 어느 출판사의 유능한 젊은 여성 편집자와 이야기를 하는 도중 다시 한번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총기로 반짝이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저…그런데…○○씨는 왜 페미니스트가 아닌데요?”라고 갑자기 묻게 되었다. 방금 전까지 나눈 대화에서 나는 그녀를 충분히 양성평등주의자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미안한 듯 애매하게 웃으면서 “요즈음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왠지 모를 거부감이 주변에서 느껴지고 또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아서…”라고 말을 흐린다. 사실 그녀도 나도 남성중심주의, 가부장제 담론의 괴력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 살고 있기에 공감을 못하는 바는 아니다.
젊은 세대들에게 ‘페미니스트’라는 것의 노출이 자기에게 손해가 오고 부담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일까? 한국의 어린 여학생이 미국의 10개 명문 대학으로부터 입학 허가와 장학금 제의를 받고 있는 이 시점에서? 그녀의 대답은 “요즈음 일터에서의 평등권이나 출산 휴가, 육아 휴가 등 기본적인 것은 대략 갖추어져 있고 매스 미디어 등에서 대중적 기틀을 이미 소화하고 있기에 굳이 여성을 ‘피해자’로 보는 듯한 거친 페미니스트 수사학을 내세울 필요가 없어서…”라는 것이었다.
제도적인 성 평등이 갖추어져 있고 페미니즘이 내면화되어서 굳이 ‘페미니스트’ 목소리를 내세울 필요가 없다면 그것은 이상적인 사회다. 좋다. 옛날보다 좋아진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형 수술과 다이어트에 목숨을 거는 이 시대 왕성한 ‘미(美) 담론’과 돈 많은 집에 시집가는 것이 인생 목표가 된 여주인공들이 홍수를 이루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뜨거운 욕망 앞에서 페미니즘의 내면화는 공허하게 부서진다. 공주와 페미니즘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일까? 공주는 페미니즘이 없어도 불편할 것이 없기 때문인가?
교양 작문을 가르치다 보면 신세대의 재미난 신사고를 접할 때가 있다. 남녀 학생들에게, ‘성 평등과 관련한 나의 불만’이라는 제목의 작문 숙제를 낸 적이 있다. 한 남학생의 글에 “내 여자 친구는 남녀 평등을 주장하는데 데이트할 때는 돈은 남자가 내야 한다고 하면서 식사값, 술값 등을 나에게만 미룬다. 양성 평등을 주장하려면 데이트 비용도 똑같이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데이트 비용을 남자 친구에게만 미루면서 성 평등을 말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것이 있었다. 그 작문을 가지고 토론을 했는데 대부분의 여학생들이 “데이트할 때 비용은 남자가 내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라는 반응을 보여 적잖게 놀란 적이 있었다. 그 당연한 것이 문제다. 그 ‘당연한 것’을 깨자고 하는 것이 바로 페미니즘인데…. 바로 그런 여학생들의 생각은 ‘돈은 남자가 벌고 살림은 여자가 한다’는 성 역할이 고정된 전통적인 사고와 얼마나 다른 것일까? 기생(寄生)적 사고와 성 평등?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위장된 말속에는 ‘페미니즘’ 티를 내면 어딘가 불리해진다는 생각과 괜히 불필요한 오해를 받게 되므로 위험하다는 무의식이 잠재되어 있다. 그리고 그만큼 우리 시대의 공주가 많아진 탓도 있다. ‘아는 것이 흠이고 그래서 모르는 체하며 사는 것이 이익이다’라는 것을 신세대 공주들이 벌써 알아버렸단 말인가?
(김승희 시인·소설가·서강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