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三國遺事)번역문
卷 第三 >제3 흥법(興法第三) >보장봉로 보덕이암(寶藏奉老 普德移庵) >찬하여 말하다
찬하여 말하다
찬하여 말한다.
불교는 넓고 넓어 끝없는 바다
백 갈래 하천 같은 유교와 도교 이를 조종(朝宗) 삼는다
가소롭다. 고구려왕은 웅덩이(沮洳)만을 봉하고
와룡(臥龍)이 바다로 옮길 줄을 몰랐구나
주제분류
문화>문학>문학형식>시문
卷 第三 >제3 흥법(興法第三) >동경흥륜사금당십성(東京興輪寺金堂十聖) >흥륜사 금당의 10성
흥륜사 금당의 10성
동경註 146146 동경은 고려시대에는 보통 경주를 지칭하였다. ≪고려사≫ 권11, 지리지2 경상도 동경유수관경주조에 의하면 경주의 연혁을 알 수 있는데 성종 6년(987)에 동경이라는 명칭이 처음 보인다. 그러나 신라말 헌덕왕 5년(813)에 세워진 해동고신행선사비(海東故神行禪師碑)에 “····禪師俗姓金氏 東京御里人也·····”라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진성여왕 7년(893)에 쓰인 심원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深源寺秀澈和尙楞伽寶月塔碑)에는 “····出至東原京景泉寺······”라는 문구가 있어 이 때의 동경과 동원경은 신라시대 5소경 중 김해소경을 칭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藤田亮策, 「新羅九州五京考」 ≪朝鮮學論考≫) 하지만 ≪삼국유사≫에 나오는 ‘東京’의 경우는 고려시대에 불렸던 것으로 모두 경주를 지칭한다(村上四男撰, ≪三國遺事考≫, 1994).닫기 흥륜사註 147147 경북 경주시 사정동에 있었던 것(현재 경주공고 위치)으로 추정하고 있다(국립경주박물관, ≪경주유적지도≫, 1997) 신라 최초의 가람으로 황룡사, 사천왕사와 함께 대사찰이었으나 경덕왕 때 남문과 좌우의 회랑이 불타버렸다. 921년 중수하였으나 조선시대 때 소실된 뒤 폐사되었다.닫기 금당십성註 148148 흥륜사의 금당에 언제 이와 같은 소상을 모셨는지 또는 어떤 기준에 의하였는지 불문명하다. 다만 흥륜사가 신라 최초의 절이므로 불교 전파에 밑거름이 되었던 이들을 모신 듯하다. ≪삼국유사≫의 표훈 관련 기사에서 표훈 이후 신라 땅에 성인이 나지 않았다는 기록을 통해 표훈이 입적한 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모셔진 10성은 신라의 불교에서 대표적인 인물들로, 서민대중적 불교인이 중심을 이루고 있고 사파, 염촉과 같은 속사(俗士)도 포함된 데에서 신라불교의 사상적 특수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김영태, 「신라십성고」, ≪신라불교연구≫, 민족문화사, 1987).닫기(東京興輪寺金堂十聖)
동쪽 벽에 앉아 경방(庚方)을 향한 진흙상은 아도(我道), 염촉(厭髑), 혜숙(惠宿), 안함(安含)註 149149 신라 때 수(隋)에 들어가 십승(十乘)의 비법(秘法) 등을 공부하고 서역(西域)의 승려들과 함께 귀국하였다고 전해진다. 저서에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가 있다.닫기, 의상(義湘)註 150150 속성은 김씨이고 귀족 출신으로 우리나라 화엄종의 개조이자, 원효와 함께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고승이다. 문무왕 원년(660)에 당에 들어가 중국 화엄종 개조인 지엄(智儼)의 문하에서 화엄종을 배우고 문무왕 10년 귀국하여 부석사와 낙산사를 창건하여 신라 화엄교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지방으로의 불교 확산을 주도하여 신라 변방 지역에 많은 사원을 창건하였다(박태원, 「한국 고대불교의 통합사상-원효와 의상을 중심으로」, ≪한국사상사학≫ 14, 한국사상사학회, 2000| 김두진, ≪의상 화엄사상의 사회적 성격≫, ≪한국학논총≫ 17, 1995| 정병삼, ≪의상 전기의 제문제≫, ≪한국학연구≫ 1, 1991 ).닫기이고 서쪽 벽에 앉아 갑방(甲方)을 향한 진흙상은 표훈(表訓)註 151151 생몰년 미상의 신라 경덕왕대 화엄종(화엄종) 고승이다. 의상(義湘)의 10대제자 중 1인으로 불국사(佛國寺)에서 화엄경을 강(講)하였고, 동문인 능인(能仁)·신림(神琳)과 함께 금강산에 표훈사(表訓寺)를 창건하여 초대주지가 되었다. 김대성에게 화엄교학을 강의하기도 하여 불국사와 석굴암 창건에 영향을 미쳤다(김상현, ≪신라화엄사상사연구≫, 민족사, 1991, 56~57쪽).닫기, 사파(蛇巴), 원효(元曉), 혜공(惠空), 자장(慈藏)이다.
註 146
동경은 고려시대에는 보통 경주를 지칭하였다. ≪고려사≫ 권11, 지리지2 경상도 동경유수관경주조에 의하면 경주의 연혁을 알 수 있는데 성종 6년(987)에 동경이라는 명칭이 처음 보인다. 그러나 신라말 헌덕왕 5년(813)에 세워진 해동고신행선사비(海東故神行禪師碑)에 “····禪師俗姓金氏 東京御里人也·····”라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진성여왕 7년(893)에 쓰인 심원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深源寺秀澈和尙楞伽寶月塔碑)에는 “····出至東原京景泉寺······”라는 문구가 있어 이 때의 동경과 동원경은 신라시대 5소경 중 김해소경을 칭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藤田亮策, 「新羅九州五京考」 ≪朝鮮學論考≫) 하지만 ≪삼국유사≫에 나오는 ‘東京’의 경우는 고려시대에 불렸던 것으로 모두 경주를 지칭한다(村上四男撰, ≪三國遺事考≫, 1994).
註 147
경북 경주시 사정동에 있었던 것(현재 경주공고 위치)으로 추정하고 있다(국립경주박물관, ≪경주유적지도≫, 1997) 신라 최초의 가람으로 황룡사, 사천왕사와 함께 대사찰이었으나 경덕왕 때 남문과 좌우의 회랑이 불타버렸다. 921년 중수하였으나 조선시대 때 소실된 뒤 폐사되었다.
註 148
흥륜사의 금당에 언제 이와 같은 소상을 모셨는지 또는 어떤 기준에 의하였는지 불문명하다. 다만 흥륜사가 신라 최초의 절이므로 불교 전파에 밑거름이 되었던 이들을 모신 듯하다. ≪삼국유사≫의 표훈 관련 기사에서 표훈 이후 신라 땅에 성인이 나지 않았다는 기록을 통해 표훈이 입적한 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모셔진 10성은 신라의 불교에서 대표적인 인물들로, 서민대중적 불교인이 중심을 이루고 있고 사파, 염촉과 같은 속사(俗士)도 포함된 데에서 신라불교의 사상적 특수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김영태, 「신라십성고」, ≪신라불교연구≫, 민족문화사, 1987).
註 149
신라 때 수(隋)에 들어가 십승(十乘)의 비법(秘法) 등을 공부하고 서역(西域)의 승려들과 함께 귀국하였다고 전해진다. 저서에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가 있다.
註 150
속성은 김씨이고 귀족 출신으로 우리나라 화엄종의 개조이자, 원효와 함께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고승이다. 문무왕 원년(660)에 당에 들어가 중국 화엄종 개조인 지엄(智儼)의 문하에서 화엄종을 배우고 문무왕 10년 귀국하여 부석사와 낙산사를 창건하여 신라 화엄교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지방으로의 불교 확산을 주도하여 신라 변방 지역에 많은 사원을 창건하였다(박태원, 「한국 고대불교의 통합사상-원효와 의상을 중심으로」, ≪한국사상사학≫ 14, 한국사상사학회, 2000| 김두진, ≪의상 화엄사상의 사회적 성격≫, ≪한국학논총≫ 17, 1995| 정병삼, ≪의상 전기의 제문제≫, ≪한국학연구≫ 1, 1991 ).
註 151
생몰년 미상의 신라 경덕왕대 화엄종(화엄종) 고승이다. 의상(義湘)의 10대제자 중 1인으로 불국사(佛國寺)에서 화엄경을 강(講)하였고, 동문인 능인(能仁)·신림(神琳)과 함께 금강산에 표훈사(表訓寺)를 창건하여 초대주지가 되었다. 김대성에게 화엄교학을 강의하기도 하여 불국사와 석굴암 창건에 영향을 미쳤다(김상현, ≪신라화엄사상사연구≫, 민족사, 1991, 56~57쪽).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법명·법호)
색인어
이름 : 아도,염촉,혜숙,안함,의상,표훈,사파,원효,혜공,자장
지명 : 동경
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 >월성 동쪽에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다(553년 2월 (음))
월성 동쪽에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다 ( 553년 02월(음) )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
≪옥룡집(玉龍集)≫과 「자장전(慈藏傳)」, 그리고 제가(諸家)의 전기에는 모두 이렇게 말한다. “신라의 월성(月城) 동쪽 용궁(龍宮) 남쪽에 가섭불(迦葉佛)註 152152 가섭불은 과거 7불 중의 여섯 번째 부처. 인수(人壽)가 2만세 때 나타나고 한 번의 설법으로 2만 명의 제자를 얻었다고 한다.닫기의 연좌석(宴坐石)註 153153 좌선할 때 사용했던 돌.닫기이 있는데 그 땅은 곧 전불(前佛) 시대의 절터이고, 지금의 황룡사(皇龍寺)註 154154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월성 동쪽에 있었던 사찰로서 신라 선덕왕 14년(645)에 완성하여 신라 호국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 고종 때 몽골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어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강인구 외,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002, 228~229쪽).닫기 땅은 곧 일곱 절의 하나이다.”
국사를 살펴보면, 진흥왕(眞興王)註 155155 신라의 제24대 왕으로 540년에 즉위하여 576년까지 재위하였다. 죽령을 넘어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는 등 강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또 국경 지방을 순수하고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순수비와 탁경비를 세웠다. 그는 화랑도라는 청소년 집단을 공인하여 인재등용의 길로 이용하였고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으며 황룡사 장육존상을 주조하였고 팔관회를 최초로 개최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닫기 즉위 14년 개국(開國)註 156156 신라 진흥왕의 연호로 개국 년간은 551년~567년이다.닫기 3년 계유 2월에 월성 동쪽에 새로 궁을 세우는데 그곳에 황룡(黃龍)註 157157 원문에는 ‘황룡(皇龍)’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유사≫ 권3, 탑상 「황룡사장육(皇龍寺丈六)」조에는 ‘황룡(黃龍)’으로 되어 있어 황룡(黃龍)으로 번역한다.닫기이 나타나 왕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고쳐서 황룡사(皇龍寺)라고 했다. 연좌석은 불전(佛殿)의 뒷쪽에 있었다. 일찍이 한 번 봤는데 돌의 높이는 5, 6척이나 둘레는 겨우 3주(肘)이고 우뚝하게 서 있으며 그 위는 편편하다. 진흥왕이 절을 세운 이후로 두 번이나 화재를 겪어 돌에 갈라진 곳이 있어서 절의 중이 여기에 쇠를 붙여서 보호하였다.
註 152
가섭불은 과거 7불 중의 여섯 번째 부처. 인수(人壽)가 2만세 때 나타나고 한 번의 설법으로 2만 명의 제자를 얻었다고 한다.
註 153
좌선할 때 사용했던 돌.
註 154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월성 동쪽에 있었던 사찰로서 신라 선덕왕 14년(645)에 완성하여 신라 호국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려 고종 때 몽골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어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강인구 외, ≪역주 삼국유사≫ 1, 이회문화사, 2002, 228~229쪽).
註 155
신라의 제24대 왕으로 540년에 즉위하여 576년까지 재위하였다. 죽령을 넘어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는 등 강역을 크게 확장하였다. 또 국경 지방을 순수하고 창녕,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순수비와 탁경비를 세웠다. 그는 화랑도라는 청소년 집단을 공인하여 인재등용의 길로 이용하였고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으며 황룡사 장육존상을 주조하였고 팔관회를 최초로 개최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註 156
신라 진흥왕의 연호로 개국 년간은 551년~567년이다.
註 157
원문에는 ‘황룡(皇龍)’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유사≫ 권3, 탑상 「황룡사장육(皇龍寺丈六)」조에는 ‘황룡(黃龍)’으로 되어 있어 황룡(黃龍)으로 번역한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불보살상·불사리
문화>사상>불교사상>사원·단월
색인어
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 >찬하여 말하다
찬하여 말하다
이에 찬하여 말한다.
불교의 침체함은 얼마인지 기억할 수 없는데
오직 연좌석(宴坐石)만은 의연하게 남아 있구나
상전(桑田)이 변해 몇 번이나 창해(滄海)가 되었는데
애뜻하게도 우뚝한 채 그 자리에 남았구나
이윽고 몽고(蒙古)의 큰 병란 이후에 불전(佛殿)과 탑은 모두 불타버리고 이 돌도 역시 흙에 파묻혀서 겨우 땅과 같이 편편해졌다.
주제분류
문화>문학>문학형식>시문
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 >일연이 천지개벽 연도를 비평하다(1281년 (음))
일연이 천지개벽 연도를 비평하다 ( 1281년 (음) )
≪아함경(阿含經)註 158158 범어 Agama의 음역이다. 아함부(阿含部)에 속하는 소승경(小乘經)의 총칭으로 남전(南傳)과 북전(北傳)으로 나눌 수 있다.닫기≫을 살펴보면, 가섭불은 현겁(賢劫)註 159159 삼겁(三劫)의 하나로서 현재 주겁(住劫)을 이르는 말이다. 많은 부처가 나타나서 현겁(賢劫)이라고 한다.닫기의 세 번째 부처이고 사람의 나이로 2만 세 때에 세상에 나타났다고 한다. 이에 의거하여서 증감법으로 계산하면 매양 성겁(成劫)註 160160 불교에 이르는 가장 긴 시간의 하나. 세계가 성립하여 인류와 축생이 생성하는 시기. 세계는 성겁(成劫), 주겁(住劫), 괴겁(壞劫), 공겁(空劫)이 있으며 이 4겁이 순환하면서 변천해간다.닫기의 처음에는 모두 수명이 무량세(無量歲)였다. 점점 줄어들어 8만 세 때에 이르면 주겁(住劫)註 161161 불교에서 말하는 4겁(劫)의 하나로 인류가 세계에 안주하는 시기이다.닫기의 처음이 된다. 이로부터 또 100년마다 1해씩 줄어들어 수명이 10세 때에 이르면 1감(減)이 되고, 또 늘어나서 사람의 수명이 8만 세가 되면 1증(增)이 된다. 이와 같이 하여 20번 줄이고, 20번 늘이면 한 주겁이 된다. 이 한 주겁 중에 천불(千佛)이 세상에 나타나는데, 지금의 본사(本師)인 석가불(釋迦佛)은 네 번째 부처이다. 네 번째 부처는 모두 제9감(第九減) 중에 나타난다. 석가세존(釋迦世尊)의 100세 때부터 가섭불의 2만 세까지는 이미 200만여 세나 된다. 만약 현겁 처음의 첫째 부처인 구류손불(拘留孫佛)註 162162 과거 7불 중의 하나이다. 사람의 나이로 4만세 되던 해에 이 세상에 나타나 성불했으며, 제2회의 설법에서 4만 명의 비구를 교화시켰다고 한다.닫기 때까지는 또 몇 만 세가 된다. 구류손불 때로부터 위로 겁의 처음 무량세 때까지는 또 얼마나 되겠는가. 석가세존으로부터 아래로 지금의 지원(至元)註 163163 원 세조(世祖)의 연호로 지원 18년은 고려 충렬왕 7년(1218)이다.닫기 18년 신사까지는 이미 2,230년이고, 구류손불로부터 가섭불 때를 지나서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곧 몇만 세이다.
본조(本朝)의 명사(名士) 오세문(吳世文)註 164164 고려시대의 유명한 유학자이다. 무신란 전인 의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형 세공과 함께 현달하였다고 하는데 구체적인 관력은 알 수 없다.닫기이 ≪역대가(歷代歌)≫를 지었는데, 대금(大金)의 정우(貞祐)註 165165 금(金) 선종(宣宗)의 연호이다. 그러나 정우 연호는 4년으로 끝났으므로 정우 7년은 선종의 또 다른 연호인 흥정(興政) 3년에 해당한다.닫기 7년 기묘(219)에서 거슬러 헤아려 4만 9,600여 세에 이르면 바로 반고씨(盤古氏)註 166166 중국에서 천지개벽 때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다고 하는 제왕이다.닫기의 천지개벽한 무인년(戊寅年)이 된다고 했다.
또 연희궁(延禧宮) 녹사(錄事) 김희령(金希寧)이 찬술한 ≪대일역법(大一法)≫에 천지개벽한 상원(上元) 갑자(甲子)로부터 원풍(元豊)註 167167 송 신종(神宗)의 연호로, 원풍 년간은 1078년~1085년이다.닫기 갑자(1084)에 이르기까지 193만 7천 6백 41세라고 하였다.
또한 ≪찬고도(纂古圖)註 168168 중국의 역사책이다.닫기≫에는 천지개벽에서부터 획린(獲麟)註 169169 중국 춘추시대 노(魯)의 애공(哀公)이 14년(기원전 477) 봄에 서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기린(麒麟)을 잡은 일을 말한다.닫기(-0477-99-9L0)까지 276만세라고 하였다.
여러 경전을 살펴보면, 이 돌의 나이는 또한 가섭불 때부터 지금까지가 되니 오히려 겁초(劫初)에 천지개벽 때로 보면 어린애에 불과하다. 삼가(三家)의 말이 오히려 이 어린 돌의 나이에도 미치지 못하니 그 천지개벽의 설에 있어서는 너무 소홀했던 것이다.
註 158
범어 Agama의 음역이다. 아함부(阿含部)에 속하는 소승경(小乘經)의 총칭으로 남전(南傳)과 북전(北傳)으로 나눌 수 있다.
註 159
삼겁(三劫)의 하나로서 현재 주겁(住劫)을 이르는 말이다. 많은 부처가 나타나서 현겁(賢劫)이라고 한다.
註 160
불교에 이르는 가장 긴 시간의 하나. 세계가 성립하여 인류와 축생이 생성하는 시기. 세계는 성겁(成劫), 주겁(住劫), 괴겁(壞劫), 공겁(空劫)이 있으며 이 4겁이 순환하면서 변천해간다.
註 161
불교에서 말하는 4겁(劫)의 하나로 인류가 세계에 안주하는 시기이다.
註 162
과거 7불 중의 하나이다. 사람의 나이로 4만세 되던 해에 이 세상에 나타나 성불했으며, 제2회의 설법에서 4만 명의 비구를 교화시켰다고 한다.
註 163
원 세조(世祖)의 연호로 지원 18년은 고려 충렬왕 7년(1218)이다.
註 164
고려시대의 유명한 유학자이다. 무신란 전인 의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형 세공과 함께 현달하였다고 하는데 구체적인 관력은 알 수 없다.
註 165
금(金) 선종(宣宗)의 연호이다. 그러나 정우 연호는 4년으로 끝났으므로 정우 7년은 선종의 또 다른 연호인 흥정(興政) 3년에 해당한다.
註 166
중국에서 천지개벽 때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다고 하는 제왕이다.
註 167
송 신종(神宗)의 연호로, 원풍 년간은 1078년~1085년이다.
註 168
중국의 역사책이다.
註 169
중국 춘추시대 노(魯)의 애공(哀公)이 14년(기원전 477) 봄에 서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기린(麒麟)을 잡은 일을 말한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경논소
색인어
국명 : 대금
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요동성육왕탑(遼東城育王塔) >고구려 성왕이 탑을 세우다(기원전37년 (음))
고구려 성왕이 탑을 세우다 ( 기원전 37년 )
요동성육왕탑(遼東城育王塔)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註 170170 현재 전하지 않아서 찬자와 찬술 시기, 내용, 체제는 알 수 없다. 불(佛)·법(法)승(僧) 삼보(三寶)의 영험과 감응을 기록한 책으로 추정된다.닫기≫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고려 요동성(遼東城)註 171171 지금의 중국 요녕성 요양시이다.닫기 옆의 탑은 옛 노인들이 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옛날에 고려 성왕(聖王)이 국경을 순행하여 행차했을 때 이 성에 이르러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은 것을 보고 구름 안을 와서 찾아보니 어떤 승려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는데 다가가면 곧 사라지고 멀리서 보면 다시 나타났다. 옆에 세 겹의 토탑(土塔)이 있었는데 위가 솥을 엎어놓은 것과 같았으나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시 가서 승려를 찾으니 오직 잡초만 있었고 땅을 1장(丈) 정도 파 보았더니 지팡이와 신을 얻었고 또 파보니 명(銘)을 얻었는데 위에 범서(梵書)註 172172 인도의 산스크리트 문자로 기록된 글이다.닫기가 쓰여 있었다. 시신(侍臣)이 그것을 알아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불탑(佛塔)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자세히 물으니 답하기를 ‘한(漢)나라 때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름은 포도왕(蒲圖王) 본래 휴도왕(休屠王)이라 쓰여 있고 하늘에 제사지내는 금인(金人)註 173173 부처를 가리킨다.닫기이다.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신심(信心)이 생겨 7중 목탑(七重木塔)을 세웠는데 후에 불교가 비로소 들어와 그 시작과 끝을 다 알게 되었다. 지금 다시 그 높이를 줄였는데 본래의 탑은 썩어서 무너졌다. 아육왕註 174174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제3대 왕으로 불교를 인도 곳곳에 전파하였으므로 불교계에서는 그를 이상적 군주로 추앙한다.닫기이 염부제주(閻浮提洲)註 175175 불교에서 말하는 4대주(四大洲)의 하나이다. 수미산 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는 삼각형으로 된 섬으로써 인도를 가리키기도 한다.닫기를 통일하고 곳곳에 탑을 세웠으니 이상할 것이 없다.
또한 당나라 용삭(龍朔)註 176176 당 고종의 연호로 661년(문무왕 1)~663년(문무왕 3년)에 사용하였다.닫기 연간에 요좌(遼左)에 전쟁이 있어서 행군(行軍) 설인귀(薛仁貴)註 177177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칠 때 당군을 지휘했던 장수이다.닫기는 수나라가 친 요동의 옛 땅에 이르러서 산의 불상을 보았는데 텅 비어서 쓸쓸하고 사람의 왕래가 끊겨 있었다. 옛 노인에게 물으니 ‘이것은 선대에 나타난 것이다’라고 하였고 곧 그림으로 베껴 경사로 돌아왔다. ≪약함(若函)註 178178 대장경을 넣어둔 함이다.닫기≫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서한(西漢)과 삼국(三國)의 지리지(地理志)를 살펴보면, 요동성은 압록강 밖에 있고 한(漢)의 유주(幽州)註 179179 한나라 때 만들어진 13주 중 하나로 현재의 중국 요녕성 일부, 북경, 천진, 내몽골 자치구 일부 등을 포함한다. 후한 말기에는 공손찬, 원소 등과 연(燕)이 이곳에서 세력을 길러 나갔다.닫기에 속한다. 고려의 성왕은 어느 임금인지 알 수 없다. 혹은 동명성제(東明聖帝)註 180180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 주몽을 말한다.닫기라고 하는데 아닌 듯하다. 동명은 전한(前漢) 원제(元帝) 건소(建昭)註 181181 전한 원제(元帝)의 연호로 기원전 38년~34년에 사용하였다.닫기 2년에 즉위하여 성제(成帝) 홍가(鴻嘉)註 182182 전한 성제(成帝)의 연호로 기원전 20년~17년에 사용하였다.닫기 임인(-0019)에 승하하였다. 이때 한 또한 아직 패엽(貝葉 : 불경)을 보지 못하였는데 어찌 해외의 배신(陪臣)이 벌써 범서를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부처를 칭하여 포도왕이라 한 것은 아마 서한시대 때 서역의 문자를 혹시 알고 있는 자가 있어서 고로 범서라고 한 듯하다.
≪고전(古傳)≫을 살펴보면 아육왕은 귀신의 무리에게 명하여 9억의 사람이 사는 땅마다 탑 하나를 세우게 하였으며, 이와 같이 하여 염부계 안에 8만 4천개를 세워 큰 돌 속에 숨겼다고 한다. 지금 곳곳에 상서로움이 나타나는 것이 하나가 아닌데 대개 진신 사리는 감응을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다.
註 170
현재 전하지 않아서 찬자와 찬술 시기, 내용, 체제는 알 수 없다. 불(佛)·법(法)승(僧) 삼보(三寶)의 영험과 감응을 기록한 책으로 추정된다.
註 171
지금의 중국 요녕성 요양시이다.
註 172
인도의 산스크리트 문자로 기록된 글이다.
註 173
부처를 가리킨다.
註 174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제3대 왕으로 불교를 인도 곳곳에 전파하였으므로 불교계에서는 그를 이상적 군주로 추앙한다.
註 175
불교에서 말하는 4대주(四大洲)의 하나이다. 수미산 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는 삼각형으로 된 섬으로써 인도를 가리키기도 한다.
註 176
당 고종의 연호로 661년(문무왕 1)~663년(문무왕 3년)에 사용하였다.
註 177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칠 때 당군을 지휘했던 장수이다.
註 178
대장경을 넣어둔 함이다.
註 179
한나라 때 만들어진 13주 중 하나로 현재의 중국 요녕성 일부, 북경, 천진, 내몽골 자치구 일부 등을 포함한다. 후한 말기에는 공손찬, 원소 등과 연(燕)이 이곳에서 세력을 길러 나갔다.
註 180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 주몽을 말한다.
註 181
전한 원제(元帝)의 연호로 기원전 38년~34년에 사용하였다.
註 182
전한 성제(成帝)의 연호로 기원전 20년~17년에 사용하였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불탑·승탑·탑비
색인어
이름 : 포도왕,아육왕,설인귀,동명성제,동명,원제,성제,부처,포도왕,아육왕
서명 : 삼보감통록
국명 : 고려,고려,당,수,서한,한,고려,전한,한,서한
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요동성육왕탑(遼東城育王塔) >찬하여 말하다
찬하여 말한다.
아육왕의 보탑(寶塔)은 속세 곳곳에 세워져
비에 젖고 구름에 묻히고 이끼마저 아롱졌다
생각컨대 그때의 길손의 눈은
몇 사람이 제신(祭神)의 무덤을 가리켰을까
주제분류
문화>문학>문학형식>시문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 >허황후가 아유타국에서 파사석탑을 가져오다(48년 (음))
허황후가 아유타국에서 파사석탑을 가져오다 ( 48년 (음) )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
금관(金官)註 183183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일대에 있었던 초기 가야의 중심지이다.닫기 호계사(虎溪寺)註 184184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었던 절이다.닫기의 파사석탑(婆裟石塔)이라는 것은 옛날에 이 읍이 금관국이었을 때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비인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무신註 185185 원문에는 ‘갑신(甲申)’으로 되어 있으나 ‘무신(戊申)’의 오기이다. 이에 따라 번역한다.닫기에 서역의 아유타국(阿踰陁國)註 186186 아유타국의 실체에 대해 몇몇 견해가 있는데, 김석형은 아유타국을 일본에 있던 가락국의 分國으로 보았고(김석형, ≪초기조일관계연구≫, 사회과학원 출판사, 1966), 아요디아 왕가는 서기 20년 경에 크샨의 군대에 의해 王都를 잃고 어디론가 떠났으며, 허황후가 5월에 배로 출발해서 7월에 도착하였는데 아요디아가 있는 갠지스강 상류까지는 배가 거슬러 올라갈 수 없으므로, 왕녀의 사실상의 출발지는 오늘날의 타이국의 메남 강가에 있는 옛 도시 아유티야로 추정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아요디아 왕국이 1세기 전에 건설한 식민국이라고 한 이종기의 견해도 있다(이종기, ≪가락국탐사≫, 일지사, 1977, 99~100쪽). 한편 김병모는 타이 메남강 가에 건설한 식민국 아유티야는 부정하고 아요디아를 근원지로 보았다(김병모, 「가락국 허황옥의 출자-아유타국고」, ≪삼불김원룡교수정년퇴임기념논총≫ Ⅰ, 일지사, 1987: 「고대한국서역관계-아유타국고(Ⅱ)」, ≪한국사논총≫ 14, 1988: 「가락국 수로왕비 탄생지」, ≪한국상고사학보≫ 9, 1992).닫기에서 싣고 온 것이다. 처음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장차 동쪽으로 가려 하였는데 파도신의 노여움에 막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 부왕(父王)에게 말하였다.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가라고 명하니 곧 쉽게 건널 수 있어서 남쪽 해안에 정박하였다. 붉은 돛, 붉은 깃발, 주옥(珠玉) 등 아름다운 것을 실었기 때문에 지금 주포(主浦)라고 부른다. 처음 언덕 위에서 비단 바지를 풀은 곳은 능현(綾峴)이라고 하며, 붉은 깃발이 처음 들어온 해안은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한다.
수로왕이 그를 맞이하고 함께 나라를 다스린 것이 150여 년이었다. 이때에 해동에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다. 대개 불교가 아직 들어오지 못하여 토착인들이 신복하지 않았으므로 본기에는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제8대 질지왕(銍知王) 2년 임진(452년)에 이르러서야 그 땅에 절을 세웠다. 또 왕후사(王后寺) 아도(阿道) 눌지왕(訥祇王)의 시대로 법흥왕대의 전이다.를 창건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복을 빌고 겸하여 남쪽의 왜를 진압하고 있는데 가락국 본기에 자세히 보인다.
탑은 모가 4면으로 5층이고 그 조각이 매우 특이하다. 돌에 미세한 붉은 반점 색이 있고 그 질은 무르니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본초(本草)≫註 187187 ≪신농본초(神農本草)≫의 줄임말이다. 후한대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책으로 365가지의 약초를 기록하여 상중하품으로 나누었다.닫기에서 말하는 닭벼슬의 피를 찍어 검사했다는 것이 이것이다.
금관국은 또한 가락국(駕洛國)이라고도 하는데 본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註 183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일대에 있었던 초기 가야의 중심지이다.
註 184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었던 절이다.
註 185
원문에는 ‘갑신(甲申)’으로 되어 있으나 ‘무신(戊申)’의 오기이다. 이에 따라 번역한다.
註 186
아유타국의 실체에 대해 몇몇 견해가 있는데, 김석형은 아유타국을 일본에 있던 가락국의 分國으로 보았고(김석형, ≪초기조일관계연구≫, 사회과학원 출판사, 1966), 아요디아 왕가는 서기 20년 경에 크샨의 군대에 의해 王都를 잃고 어디론가 떠났으며, 허황후가 5월에 배로 출발해서 7월에 도착하였는데 아요디아가 있는 갠지스강 상류까지는 배가 거슬러 올라갈 수 없으므로, 왕녀의 사실상의 출발지는 오늘날의 타이국의 메남 강가에 있는 옛 도시 아유티야로 추정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아요디아 왕국이 1세기 전에 건설한 식민국이라고 한 이종기의 견해도 있다(이종기, ≪가락국탐사≫, 일지사, 1977, 99~100쪽). 한편 김병모는 타이 메남강 가에 건설한 식민국 아유티야는 부정하고 아요디아를 근원지로 보았다(김병모, 「가락국 허황옥의 출자-아유타국고」, ≪삼불김원룡교수정년퇴임기념논총≫ Ⅰ, 일지사, 1987: 「고대한국서역관계-아유타국고(Ⅱ)」, ≪한국사논총≫ 14, 1988: 「가락국 수로왕비 탄생지」, ≪한국상고사학보≫ 9, 1992).
註 187
≪신농본초(神農本草)≫의 줄임말이다. 후한대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책으로 365가지의 약초를 기록하여 상중하품으로 나누었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불탑·승탑·탑비
정치>왕실>왕족>왕후·왕비
문화>사상>불교사상>사원·단월
색인어
지명 : 금관성,금관,서역,공주,주포,능현,기출변,해동
서명 : 본초
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 >찬하여 말하다
찬하여 말하다
석탑을 실은 붉은 돛대 깃발도 가벼운데,
신령께 빌어서 험한 물결 헤쳐왔다
어찌 다만 황옥(黃玉)을 도와 건넜을 뿐이겠는가
천년 동안 남쪽 왜의 침략을 막았다
주제분류
문화>문학>문학형식>시문
색인어
이름 : 황옥
국명 : 왜
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고려영탑사(高麗靈塔寺) >보덕이 신인을 만나 영탑사를 세우다
보덕이 신인을 만나 영탑사를 세우다
고려영탑사(高麗靈塔寺)
≪승전(僧傳)≫註 188188 고려의 승려인 각훈(覺訓)이 편찬한 ≪해동고승전≫을 말한다.닫기에 석 보덕(釋普德)은 자(字)가 지법(智法)이고 전 고[구]려용강현(龍岡縣) 사람이라고 한다. 자세한 것은 뒤의 본전에 실려 있다. 항상 평양성(平壤城)에 살았는데 산방(山房)의 노승이 와서 강경(講經)을 요청하였다. 법사는 굳이 사양하다가 면치 못하여 가서 ≪열반경(涅槃經)≫註 189189 ≪대열반경(大涅槃經)≫으로 석존의 입멸을 기록한 경전이다. 대승, 소승 두 가지의 열반경이 있다.닫기 40여 권을 강연하였다. 강연이 끝나고 성의 서쪽 대보산(大寶山) 동굴 아래에 이르러 참선을 하는데 어떤 신인(神人)이 와서 청하기를 “이 땅에 와서 살라”고 하고 곧 앞에 석장을 두고 그 땅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 아래에 팔면칠층석탑(八面七層石塔)이 있다.” 그곳을 파보았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인하여 정사(精舍)를 세우고 영탑사(靈塔寺)註 190190 평안남도 평양시 서쪽의 대보산(大寶山)에 있었던 절이다.닫기라고 하고서 그곳에서 살았다.
註 188
고려의 승려인 각훈(覺訓)이 편찬한 ≪해동고승전≫을 말한다.
註 189
≪대열반경(大涅槃經)≫으로 석존의 입멸을 기록한 경전이다. 대승, 소승 두 가지의 열반경이 있다.
註 190
평안남도 평양시 서쪽의 대보산(大寶山)에 있었던 절이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사원·단월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법명·법호)
문화>사상>불교사상>경논소
색인어
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황룡사장육(皇龍寺丈六) >진흥왕이 황룡사를 세우다(553년 2월 (음))
진흥왕이 황룡사를 세우다 ( 553년 02월(음) )
황룡사장육(皇龍寺丈六)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 즉위 14년 계유 2월 장차 궁궐을 용궁(龍宮)註 191191 신라의 궁궐 이름으로 추정된다.닫기의 남쪽에 지으려 하는데 황룡(黃龍)이 그 땅에 나타나서 이에 고쳐서 절을 짓고 황룡사(黃龍寺)註 192192 황(黃)은 오색의 하나이며, 방위로는 중앙, 오행으로는 토(土), 계절로는 여름에 해당한다. 황색은 황제를 상징하므로, 황(黃)과 황(皇)은 의미가 통하는 것으로 보인다.닫기라고 하였다. 기축년(569년)에 이르러 담을 두르고 17년 만에 바야흐로 완성하였다.
註 191
신라의 궁궐 이름으로 추정된다.
註 192
황(黃)은 오색의 하나이며, 방위로는 중앙, 오행으로는 토(土), 계절로는 여름에 해당한다. 황색은 황제를 상징하므로, 황(黃)과 황(皇)은 의미가 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사원·단월
정치>신이>기타>용
색인어
이름 : 진흥왕
제4 탑상(塔像第四) >황룡사장육(皇龍寺丈六) >아육왕의 황금황철로 장육상을 조성하다(574년 3월 (음))
아육왕의 황금황철로 장육상을 조성하다 ( 574년 03월(음) )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 남쪽에 큰 배가 하곡현(河曲縣) 사포(絲浦) 지금 울주 곡포(谷浦)이다.에 정박하였다. 조사하여 보니 첩문이 있었는데 “서축(西竺)註 193193 옛 인도의 명칭이며, 서인도 또는 포괄적인 의미의 인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닫기의 아육왕(阿育王)註 194194 범어로 Asoka이다. 아서가(阿恕伽), 아수가(阿輸伽)라고도 하며, 무(無憂)로도 번역된다. 인도의 대향화국(大香華國)에 실재했던 정복왕으로, 기원전 2세기경에 인도를 통일하였다. 처음에는 포악하였으나 후에 부처에게 귀의하여 불교를 보호하고 널리 전파시켰다.닫기이 황철(黃鐵) 5만 7천근과 황금 3만푼 별전(別傳)에는 철 40만 7천근, 금 천냥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인 듯하다. 혹은 3만 7천근이라고 한다을 모아 장차 석가삼존상註 195195 주존인 석가모니불과 협시보살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삼존상을 말한다.닫기을 주조하려고 하였으나 아직 이루지 못해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웠고 축원하여 ‘원컨대 인연이 있는 나라에 이르러 장육존용(丈六尊容)을 이루어라’라고 하고, 아울러 일불이보살상(一佛二菩薩像)의 모형도 실었다.”
현의 관리가 장계를 갖추어 왕에게 아뢰니 사자를 시켜 그 현의 성 동쪽 시원하고 높은 곳을 골라 동축사(東竺寺)註 196196 울산광역시 동부동 마골산(摩骨山)에 있는 사찰로 진흥왕 34년(573)에 창건되었다.닫기를 창건하고 그 삼존불을 맞아서 안치하였다. 그 금과 철은 서울로 옮겨와서 대건(大建)註 197197 중국 남조 진(陳) 선제(宣帝)의 연호로 대건 년간은 569년~582년이다.닫기註 198198 신라의 제26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79년~632년이다. 진흥왕 대의 비약적인 영토확장과 제도정비를 바탕으로 하여 중앙의 통치제도를 크게 정비하였다.닫기 6년 갑오 3월 사중기에는 계사 10월 17일(573년)이라고 한다.에 장육존상을 주성하여 한 번에 이루었다. 무게는 3만 5천 7근으로 황금 1만 1백 9십 8푼이 들어갔고, 두 보살에는 철 1만 2천 근과 황금 1만 1백 3십 6푼이 들어갔다. 황룡사에 안치하였다.
다음해(575년)에 장육존상이 눈물을 흘렸는데 발꿈치까지 이르러 땅 1척을 적셨다. 대왕이 승하할 조짐이었다. 혹은 존상이 진평왕대에 이루어졌다고 하기도 하는데 잘못이다.
별본(別本)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아육왕은 서축의 대향화국(大香華國)註 199199 고대 인도에 있던 국가 가운데 하나로 기원전 2세기경에 인도를 통일하였다..닫기에서 부처가 돌아가신 뒤 100년 사이에 태어났다. 진신을 공양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하여 금과 철 약간 근을 모아 세 번 주성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그때 왕의 태자가 홀로 그 일에 참여하지 않자 왕이 사자를 보내 그를 꾸짖었다. 태자가 주청하기를 “혼자 힘으로는 이루지 못합니다. 일찍이 이루지 못할 것을 알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렇게 여겨 이에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웠다. 남염부제(南閻浮堤) 16 대국(大國), 500 중국(中國), 1만 소국(小國), 8만 취락註 200200 특정된 숫자의 나라와 취락이 아니고, 지역을 표시하기 위해 불경에 있는 숫자를 인용한 것이다.닫기을 두루 돌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모두 주조하지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신라국에 이르자 진흥왕이 그것을 문잉림(文仍林)에서 주조하여 불상을 완성하니 상호(相好)가 다 갖추어졌다. 아육은 이에 무우(無憂)라고 번역되었다.
후에 대덕註 201201 지혜와 덕망이 높은 승려를 말한다. 본래 부처님을 일컫던 말인데, 뒤에 승려의 존칭으로 사용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승과에 급제하면 대선(대선(大選))이 되고, 이어 대덕·대사·중대사·삼중대사로 승진하였다.닫기자장(慈藏)이 당으로 유학하여 오대산(五臺山)註 202202 중국 산서성 오대현(五臺縣) 동북에 있는 산으로, 중국 4대 명산의 하나이다. 문수보살이 현신했다는 전설이 있는 곳으로, 최상부에 평평한 5개의 봉우리가 있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다.닫기에 이르러 문수보살의 현신이 감응하여 비결을 주고 인하여 부탁하여 말하기를 “너희 나라의 황룡사는 곧 석가와 가섭불(迦葉佛)이 강연하던 땅으로 연좌석(宴坐石)이 아직 있다. 그러므로 천축의 무우왕(無憂王)이 황금 약간 근을 모아 바다에 띄워 1300여 년을 지난 연후에 곧 너희 나라에 도착하여 이루어져 그 절에 안치되었다. 대개 위덕의 인연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다. 별기(別記)에 수록된 것과는 같지 않다.
불상이 조성된 후에 동축사의 삼존 또한 옮겨와 절 안에 안치하였다.
절의 기록에는 “진평왕 5년 갑진(584년)에 금당註 203203 부처를 금인(金人)이라고도 하므로, 본존불을 안치한 건물을 가리킨다.닫기이 조성되었고, 선덕왕대 절의 첫 주지는 진골인 환희사(歡喜師)였고, 제2주지는 자장국통이고 그 다음은 국통註 204204 신라 때 제일 높은 승직으로, 진흥왕 12년(551) 고구려에서 온 혜량법사(惠亮法師)로부터 비롯되었다.닫기혜훈(惠訓), 그 다음은 상률사(廂律師)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병화가 이미 있어서 큰 불상과 두 보살상은 모두 녹아서 사라졌고 작은 석가상은 아직 남아 있다.
註 193
옛 인도의 명칭이며, 서인도 또는 포괄적인 의미의 인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註 194
범어로 Asoka이다. 아서가(阿恕伽), 아수가(阿輸伽)라고도 하며, 무(無憂)로도 번역된다. 인도의 대향화국(大香華國)에 실재했던 정복왕으로, 기원전 2세기경에 인도를 통일하였다. 처음에는 포악하였으나 후에 부처에게 귀의하여 불교를 보호하고 널리 전파시켰다.
註 195
주존인 석가모니불과 협시보살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삼존상을 말한다.
註 196
울산광역시 동부동 마골산(摩骨山)에 있는 사찰로 진흥왕 34년(573)에 창건되었다.
註 197
중국 남조 진(陳) 선제(宣帝)의 연호로 대건 년간은 569년~582년이다.
註 198
신라의 제26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79년~632년이다. 진흥왕 대의 비약적인 영토확장과 제도정비를 바탕으로 하여 중앙의 통치제도를 크게 정비하였다.
註 199
고대 인도에 있던 국가 가운데 하나로 기원전 2세기경에 인도를 통일하였다..
註 200
특정된 숫자의 나라와 취락이 아니고, 지역을 표시하기 위해 불경에 있는 숫자를 인용한 것이다.
註 201
지혜와 덕망이 높은 승려를 말한다. 본래 부처님을 일컫던 말인데, 뒤에 승려의 존칭으로 사용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승과에 급제하면 대선(대선(大選))이 되고, 이어 대덕·대사·중대사·삼중대사로 승진하였다.
註 202
중국 산서성 오대현(五臺縣) 동북에 있는 산으로, 중국 4대 명산의 하나이다. 문수보살이 현신했다는 전설이 있는 곳으로, 최상부에 평평한 5개의 봉우리가 있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다.
註 203
부처를 금인(金人)이라고도 하므로, 본존불을 안치한 건물을 가리킨다.
註 204
신라 때 제일 높은 승직으로, 진흥왕 12년(551) 고구려에서 온 혜량법사(惠亮法師)로부터 비롯되었다.
주제분류
문화>사상>불교사상>불보살상·불사리
문화>사상>불교사상>사원·단월
문화>사상>불교사상>승려(법명·법호)
색인어
이름 : 아육왕,아육왕,진흥왕,아육,무우,자장,무우왕,진평왕,선덕왕,환희사,자장,혜훈,상률사
지명 : 하곡현,사포,서축,서축,남염부제,문잉림,오대산,천축
국명 : 대향화국
卷 第三 >제4 탑상(塔像第四) >황룡사장육(皇龍寺丈六) >찬하여 말하다
찬하여 말하다
속세의 어느 곳이 진향(眞鄕)이 아니겠느냐만
향화(香火)註 205205 향을 태우고, 등불을 켜는 것인데, 여기서는 불교를 의미한다.닫기의 인연은 우리나라가 으뜸이다
이는 아육왕이 착수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월성(月城) 옛터를 찾아온 것이다
註 205
향을 태우고, 등불을 켜는 것인데, 여기서는 불교를 의미한다.
주제분류
문화>문학>문학형식>시문
색인어
이름 : 아육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