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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에서 북서쪽으로 850km 북위 60도에 위치한 러시아 제2의 도시로 피터의 도시라는 이름은 도시의 수호자로 성 베드로(St Peter)와 동시에 이 도시를 만든 러시아의 표트르 Ⅰ세(피터대제, Peter I the Great)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18세기 초 표트르 1세는 당시 낙후한 러시아의 유럽화를 위한 전초기지로 발트 해 연안의 늪지대와. 네바 강 하구의 섬들 위에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표트르 대제는 스스로 노동자들과 함께 오두막에 기거하며 관리들과 노동자들을 독려하여 101개의 섬을 365개의 다리로 연결하여 북쪽의 베니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1712년에는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옮겼는데, 이를 계기로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유럽식 근대 도시로 급성장하여 자그마한 어촌에 불과했던 네바강 하구 늪지대와 섬들이 러시아 제2의 도시가 되었다.
북쪽의 베니스 상트 페테르부르크 시내를 가로 세로로 연결해주는 운하.
네바강과 모이까강을 연결하는 겨울운하. 1719년경 최초이름은 표트르 겨울궁전의 이름을 따서 겨울궁전운하라고 했는데, 대리석?(화강암 같은데)으로 된 세 개의 아취형 다리가 겨울운하를 가로지르며 건설되어 미술에서 말하는 원근법효과를 보여준다는데 처음다리는 사진 찍을 때 그만 실수해서 아래 살짝 걸렸고 두 번째는 이탈리아 피렌체 아르노 강에 있는 베키오 다리처럼 거창한 2층 건물로 마지막은 첫 다리와 같이 아취형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성 이삭 성당(St. Isaacs’s Cathedral. 러시아: Исаакиевский собо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으로, 원래 명칭은 ‘이사악키이예프스키 사보르’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아니라 달마티아의 성 이삭이라는 정교회 성인의 이름이다. 달마티아의 성 이삭의 축일은 5월 30일인데 바로 그 날이 표트르 대제의 생일이기 때문이다.
성 이삭 성당은 표트르 대제가 시작하여 다음은 예카테리나 대제가 그다음에 파벨 1세가 건설하였지만 연약한 지반과 또 다른 원인으로 계속 부셔지고 말았다. 그래서 현존하는 성당은 파벨 1세의 아들인 알렉산드르 1세가 건립을 시작한 것으로 프랑스 출신 궁정 건축가 오귀스트 드 몽페랑의 설계한 것이다. 몽페랑의 감독 아래 이 도시의 건설자인 표트르 대제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1818년 5월 30일에 만들기 시작하여 40년 후 알렉산드르 2세 때 1858년 5월 30일에 완공되었는데 공사에 동원된 사람이 50만 명이었다고 한다.
황금빛 돔을 만드는 데에는 100kg 이상의 금이 들어갔다고 하며 오늘날에도 도시의 상징적 역할을 하고 있다. 준공 당시 러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로 높이는 101.52m로 30층 빌딩 높이와 같고 64~114톤에 이르는 72개의 커다란 원형의 화강암기둥(한 덩어리의 화강암기둥으로 무게는 64~114톤)들이 둘러싸고 있어 지금도 웅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성당 밑에는 2만 4000개의 말뚝이 박혀 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곳이 늪지대였기 때문에 기초를 다지기 위하여 말뚝을 박았다고 한다. 또 성당 안에는 유명한 22명의 화가들이 참여하여 완성한 103점의 벽화와 52점의 캔버스 그림이 있으며 황금 돔 아래 전망대(높이 43m)에 올라가면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아래 둥근 화강암 원기둥아래 관람객이 올라가있는 것을 보면 성당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 할 수 있다.
니콜라이 1세(Nikolai I)
성 이삭 성당을 바라보고 서있는 기마동상의 주인공으로 파벨1세(재위 1796-1801)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장남 알렉산드르 1세(재위 1801-1825) 사후 둘째 콘스탄틴이 계승권을 포기하는 바람에 황제(재위 1825~1855)가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전광장(St Petersburg Palace Square)
겨울궁전(에르미타쥬 박물관)앞에 아주 커다란 궁전 광장이 있다. 궁전광장의 왼쪽에는 에르미타주 미술관, 오른쪽에는 구참모본부 건물이 있는데, 광장 중앙에 1834년 니콜라이 1세가 프랑스 나폴레옹 1세의 러시아 침략(1812년)을 물리치고 승리한 알렉산드르 1세 황제를 기념하여 한 덩어리의 붉은색 화강암으로 무게 600톤 높이 47.5m의 알렉산더 원기둥을 세웠다. 그런데 광장이 너무 커서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어 그랬는지 이곳에서 1905년의 제1차 러시아 혁명의 발단이 되었던 ‘피의 일요일’과 ‘1917년 10월의 혁명’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정치적 집회와 문화 공연 등 예술 행사가 자주 열린다고 한다.
구참모본부 - 아취형 문 지붕에는 ‘영광의 병거’라는 6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 조각상이 있는데 전차에는 승리의 여신 니케를 의미하는 천사가 그리고 좌우 양쪽 끝에는 2명의 병사가 말고삐를 잡고 있다.
에르미타쥬 박물관(hermitagemuseum겨울 궁전)
은은한 녹색과 흰색이 어울려 눈부신 바로크 양식의 '겨울 궁전'은, 러시아의 차르(황제)들이 겨울에 머무르는 궁전이었다. 표트르 대제의 딸인 옐리자베타에 의해 바실리에프스키섬에 1754년에서 1762년까지 건설하였는데 옐리자베타 여제는 궁전이 완공되기 전에 사망했으나 예카테리나 대제와 그녀의 뒤를 이은 차르들이 궁전을 사용했다. 제정 러시아가 1917년 혁명으로 막을 내리기 전까지 겨울 궁전은 계속 황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궁전을 지은 이탈리아 건축가 바르톨로메오 라스트렐리는 코린트 양식의 기둥머리와 수많은 조각들로부터 아름다운 곡선미를 보이는 다양한 장식적 요소를 궁전의 세 개의 층 전체에 사용하여, 호화로운 바로크 건축 양식의 대표적인 궁전을 만들었다.
오늘날 겨울 궁전 일부를 이루고 있는 에르미타주 미술관은 세계 일류의 미술관 중 하나인데, 이것은 1764년 예카테리나 대제가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2세로부터 빚에 대한 상환금 대신으로 225점의 그림을 받아 이것으로 궁전 안에 훌륭한 예술 작품 컬렉션을 전시하면서 시작되었다.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예카테리나 2세(대제)는 그 후 4천 점 이상의 작품들을 사 모으면서 계속 궁전 건물을 박물관으로 바꿔 나갔다. 고대 이집트와 스키타이 황금 유물, 그리스-로마의 조각과 동전,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 르네상스 3대 거장의 작품과 고흐, 피카소, 마티스, 루벤스, 로댕 그리고 정선된 러시아 미술품들까지 다양하게 전시되어있다. 영국이나 프랑스의 박물관과 다른 점은 영국과 프랑스는 대부분 약탈에 의한 유물인 반면 러시아는 정식으로 대금을 지불하고 사온 것이라 정당하고 깨끗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에르미타쥬의 의미는 휴식공간`은둔지라고 한다.
알렉산더(알렉산드르) 원주 - 광장 중앙에 1834년 니콜라이 1세가 프랑스 나폴레옹 1세의 러시아 침략(1812년)을 물리치고 승리한 알렉산드르 1세 황제를 기념하여 한 덩어리의 붉은색 화강암으로 무게 600톤 높이 47.5m의 알렉산더 원기둥을 세웠다. 맨 위에 천사가 십자가를 잡고 있는 알렉산더 원기둥, 이렇게 무겁고 큰 한 개로 된 돌기둥을 어떻게 세웠을까?.
에르미타쥬 박물관(hermitagemuseum겨울 궁전) - 광장 정면에서 본 모습.
아마 관광 기념사진의 모델인 듯 옛날 복장을 하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화려한 마차와 또 잘생긴 남녀 모델이 준비되어 있다.
겨울궁전의 중앙계단(요르단계단 :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은 예수를 기리기 위한 세례식이
네바 강에서 치러졌을 때 러시아 황실 가족이 이 계단을 이용한 것에서 유래)으로 입구부터 화려함이 넘친다.
18C : 겨울 궁전에 방문한 외교사절들이 오르내리던 계단으로 대사의 계단으로 불렸다.
19C : 매년 1월 황족들이 네바강에서 세례의식을 행하기 위해 이 계단을 이용하였기에 요르단 계단이라고 불렸다.
표트르 홀(소옥좌관) - 1883년 드 몽페랑이 설계한 홀인데 아미코나의 ‘표트르 1세와 미네르바’라는 상징적 그림과 대제의 낙관과 왕관, 쌍두 독수리 등 표트르대제의 상징 요소들이 장식되어 있고 그 앞에는 클라우젠이 제작한 안나 요안나브나(안나 이바노브나?)의 왕좌가 놓여있는데 의자 등판에 러시아 국가문장이 은실로 수놓아져 있다. 그리고 양쪽의 푸른색 돌기둥은 공작석이다.
게오르기 홀(대옥좌관) - 예카테리나 대제 때 만들었으나 1837년 화재로 훼손되자, 니콜라이 1세가 백대리석으로 1841년에 다시 만들었는데 규모가 표트르 홀 보다 크고 정면 중앙에 왕좌가 놓여있다. 그 후 러시아 황실의 모든 공식적인 역사가 이 방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문장관 - 국가 조직의 상징물이 전시되는 곳. 문장(紋章)은 국가나 가문, 단체, 개인 등을 상징하는 도안`상징표시로 12세기부터 유럽에서 문장을 방패 등의 무기를 넣어 전쟁터에서 가문을 밝히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나중에는 직업, 동맹, 학교, 기업 등의 여러 단체에서도 사용하게 되었다.
전쟁 갤러리 – 알렉산드르 1세가 프랑스 나폴레옹 원정군을 물리치고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갤러리로 전쟁에 참여한 332명 장군들의 초상화가 전시되고 있다. 그런데 당시 화가가 초상화 제작 전에 사망한 13명의 장군은 지금도 빈자리로 남아있다. 에구 조금 더 버티다가 가실 것이지 순서를 기다리다 지쳐서... 지금 같으면 장군 집합 > 1열 종대 > 차레로 여기 앉아>정면을 향하여 주목 > 김치! > 찰칵 이러면 끝나는데.
궁전에 있는 발쇼이 교회 내부모습과 쿠폴(가운데 돔모양 채광 천정)
쿠폴
알렉산드르 1세 기념관
로코코시대 프랑스 예술관
= 지난 1월 정기출사 장소인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르미타시박물관과 공동으로 개최하고 있는 특별전 <예르미타시박물관전, 겨울궁전에서 온 프랑스미술>에서 전시되는 작품이 바로 여기에 전시되고 있었던 작품들입니다. 2015년에는 스쳐 지나며 엉터리로 본 것을 이번엔 천천히 감상하기 위해 2월 안에 가보려 합니다.
– 팔리코네(팔코네 – 18세기 프랑스 최대의 조각가)의 조각작품 2점
손가락을 입에 가져대는 아무르(침묵을 명하는 큐피드)
겨울(여인의 좌상인데 겨울:winter?이라 처음에 이름이 맞는지 혼란).
그리고 이 작품과 대등한 우동의 작품 볼테르도 있지만 사진은 생략.
겨울궁전 황금 응접실 – 벽면이 황금으로 도금되어있음. 다른나라 궁전에 비해 겨울궁전은 장식으로 사용한 황금(gold)이 어마어마한 것 같다.
고딕 스타일의 니콜라이 2세의 서재. 그런데 다른 방과 비교해 너무 어둡다. 공부?하다 눈 버릴 듯...
황금공작 시계 – 전시품 중 제일 비싼 것으로 황금으로 된 공작과 닭, 부엉이가 시간이 되면 서로 움직이며 시간을 알린다는데, 현재는 움직이지 않게 해놓았다. 그 대신 옆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로 시계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영국에서 제작한 것으로 예카테리나 2세(대제)에게 애인?인 포템킨 장군이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대형 시계 조형물이니 금값만으로도 엄청날 듯...
유럽에는 이렇게 인형이나 동물로 보통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건물 외벽에 시계 조형물이 무척 많은데 그 시기가 우리나라 조선시대 측우기, 자격루 만들던 15C라 우린 물시계인데 유럽은 태엽시계라...(러시아의 공작시계는 18C입니다)
렘브란트의 방탕한 자식 – 돌아온 탕자(1669년 작품)
렘브란트가 생애 마지막 해에 성서의 돌아온 탕자를 그린 작품으로 아버지 앞에 누더기 옷을 입고 무릎을 꿇은 작은아들과 그 아들을 두 손으로 감싸 안은 아버지, 그리고 그 옆에서 물끄러미 서있는 큰아들을 그렸다. 아버지의 얼굴은 집나간 작은아들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느라 시력이 상실된 노인으로 또 두 손은 좌우를 다르게 그렸는데, 부드럽게 그린 오른손은 모성을 투박한 왼손은 부성를 의미한다. 중세시대 성부의 자비로움을 손을 통해 표현하였고 성부 하느님은 어머니의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을 모두 가지고 있는 존재로 또 감싸 안은 두 손은 못난 자식과 나약한 인간들을 따뜻하게 포용하고 보호하는 사랑의 모습으로 나타냈으며 옆에 서서보고 있는 모범생인 큰 아들은 탕자인 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이러한 행동이 공정한 것인가 하는 의구심과 평소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처사에 대한 불평 억울함 그리고 동생에 대한 질투 따위를 그린 것으로 아마 보통 평범한 일반사람들의 가치기준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
칼리반 화병관 – 1개의 벽옥으로 만들었는데, 14년간 시베리아 장인들이 만든 작품으로 무게가 19톤이라 160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로 옮겼다고 한다.
피의 구원 사원(그리스도 부활 성당) - 유명한 모스크바의 성 바실 성당과 규모는 좀 작지만 비슷한 러시아 스타일의 기념비적인 정교회 성당으로 알렉산더 2세가 1881년 암살당한 장소에 세워져서 일명‘피의 사원'이라고도 불린다. 이 사원은 알렉산더 3세가 1883년에서 1907년 동안 건축가 알프레드 팔란다와 이그나탸의 공동 작업으로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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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북유럽 해설과 더블어 감살 잘 했씀니다.
잘 보고 갑니다.
좋은작품 즐감합니다.다른 작품도 댓글 부탁합니다.댓글도 품앗이라고 합니다.
쉽게 볼수없는 곳 작품 잘 보았습니다.
색다른 건축물의 모습들
설명과 함께 잘 보았습니다
귀한작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