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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가곡 르네상스를 꿈꾸며
[중앙뉴스= 신현지 기자] 우리 민족의 감성과 정서가 깔린 가곡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상처받은 민중을 위로하고 희망을 줬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가곡은 대중으로부터 내쳐져 존재감이 희미해졌다. 올해로 가곡 탄생 102주년. 제2의 한국가곡 전성기를 위한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정원이경숙 서울우리예술가곡협회 이사장 (사진=신현지 기자)
지난 11일 여의도 영산아트홀에는 관객이 떼로 몰리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제28회 서울예술가곡제를 관람하기 위한 관객의 물결이었다. 이날 이경숙 서울우리예술가곡협회 이사장은 인사말를 통해 “우리가곡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좀 더 가곡의 대중화에 힘써서 우리 예술가곡이 더욱 크고 넓고 깊게 퍼져나가 밝고 맑은 사회를 만들고 또 음악예술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였다.”며 가곡제의 소회를 밝혔다.
한국 가곡의 제2의 르네상스를 꿈꾸며 28회째 가곡제를 선보이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정원이경숙 서울우리예술가곡협회 이사장. 43년 몸담은 교육계를 마감하고 순수 예술인으로 인생 후반기를 달리고 있는 그의 행보가 장안의 화제라 본지는 그를 조명하기로 했다.
7월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지난 21일, 대학로 한 카페에서 마주한 그는 예사롭지 않은 모습이었다. 단아한 자태에, 어딘가 모르는 깐깐함, 그러면서도 긍정의 에너지가 느껴져 나른한 주위를 단박에 환기시켰다.
“43년 교육계를 마무리하면서 내 후반기를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했다. 그동안 교육계에서의 삶은 내 잠재능력을 키웠던 것이기에 후반기는 이를 바탕으로 좀 더 확장된 삶을 살고 싶었다. 쉽게 말해 사회에 영향력 있는 다양한 직업군들과 교류하면서 또 다른 나의 능력을 발휘해보고 싶다는 욕구였다. 그것이 계기라면 계기였다.”
음악의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으로서 가곡부흥에 나서게 된 계기를 그는 이같이 답했다. 마치 그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아무것도 아닌 일에 웬 소란이냐는 듯 담담하고 고요하게. 그러면서 그는 “진심은 통하는 것, 모든 일에 성심 성의껏 임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이 평소 내 철학이고 신념이다. 지금껏 내가 하겠다고 나선 것에 좌절한 적은 없었다. 다 성공했다.”라고 덧붙였다.
정원이경숙 이사장의 가곡제에서 모습 (사진=서울우리예술가곡협회)
대단한 자신감이고 자부심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인생 후반기에 비 성악가로, 협회 이사장으로 탈바꿈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 기자에게는 보충 설명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는 재촉하지 말라는 듯 잠시 뜸을 들이는 표정이었다. 그러다 “어릴 적 노래에 소질이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실제로 초등학교 5학년 때 전교에서 1위에 뽑혀 CBS 어린이 합창단 단원으로 활동한 적도 있다. 돈이 없이 딱 1년을 하고 그만두었지만”이라며 음악에 잠재적 능력이 있었음을 드러냈다.
의외였다. “돈이 없어 음악을 할 수 없었다.” 라는 그의 말은. 덧쌓인 세월의 무게와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자태에 도회적인 모습이라 그의 말이 생경했다는 뜻이다. 역시 그는 기자의 그런 생각도 빠르게 읽어냈다.
“어릴 적 우리집은 가난했다. 6.25 전쟁으로 아버지가 납북되시는 바람에 난 소녀 가장이될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집 아이라고 학교에서 차별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래서 어릴 적에는 수줍음도 많이 탔다. 우리 어머니는 당시 진명여고를 나오셨지만 생활력은 강하지 못하셨던 것이고, 더욱이 아버지로 인해 신원조회에 걸려 대학 입학에 어려움도 따랐다. 다행히 동네분들 증언으로 2년제 서울교육대학에 입학을 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난 많이 아쉬웠다. 최고의 명문대를 가고도 남은 실력이었으니”
회상에 잠긴 듯한 그의 목소리가 조금은 탁했다. 그렇지만 그는 긍정의 소유자였다. 소녀 가장으로 대학을 마친 1967년 3월, 발령을 받아 교직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의 잠재능력을 펼치기 시작했으니. 햇병아리교사 2개월 만인 갑종수업에서부터였다. 사회과를 맡아 진행한 연구수업에서 그는 당시 어떤 교사도 생각하지 못했던 수업방식으로 교장은 물론 교사들의 뜨거운 관심의 대상에 올랐다. 그리고 이때 얻은 자신감은 끊임없이 일거리를 찾아내는 동력으로 작용돼 수많은 결과물을 낳게 했다. 79년 서울시 초등학교에 국악시범학교가 생기게 된 계기도 그의 그런 선구자적인 연구활동에서 비롯되었던 것이고.
“돌아보면 많은 일을 스스로 찾아했다. 특히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그 중에 국악도 있었다. 대학에서는 깊이 있게 배우지 않았던 것인데 교과서에는 나와 있고. 그래서 따로 개인공부를 했다. 국악고등학교를 찾아가 약 2개월 동안을 장구를 비롯해 우리가락을 배우고 익혔다. 그리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국악음악활동을 통한 음악적 감각계발에 관한 연구’라는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때 교육계 반응도 대단했다. 그 일에 국악시범학교가 생기기까지 했으니. 그런 일이 반복되다보니 스스로 일을 만들고 결과를 얻어내는 것에 두려움이 생기지 않았다. 또 평소 창의적인 일을 좋아하기도 했고, 그래서 학생들 수업도 창의성을 중심으로 하는 개발에 힘썼고 연구결과가 미치는 영향은 컸다"
어디 그뿐이었겠는가 그는 자신감의 여세를 몰아 발령받은 학교마다 동요대회, 어린이 기악 연주대회, 어머니 합창대회 등 학교를 빛내는데 남다른 열정과 끼를 감추지 못했다. 어린이 인성교육에 앞장서 인성교육시범학교를 선보이기도 했고, 2002년 교장으로 부임해서부터는 매주 월요일마다 훈화 말씀으로 어린이 인성교육에 선구자적인 모범을 보여 어린이들은 물론 학부형들에게 최고의 교장 선생님으로 인기를 독차지했다.
정원이경숙 이사장(사진=서울우리예술가곡협회)
매주 월요일마다 학생들에게 들려줬던 훈화말씀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며 톤을 높여 들려주기까지 했다. “언제나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며, 남을 도울 줄 아는 큰사람이 될 서울장충초등학교 어린이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라고 시작하며 이것은 그의 교육철학이며 인생철학이라 했다.
이처럼 열정적인 모습은 그가 정년을 앞둔 서울장충초등학교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끊임없이 일을 찾아내고 그 결과물을 얻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는 당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원어민 영어교사를 장충초등학교에 따로 영입했고, 낙후된 학교 시설 개·보수는 물론 정년퇴임을 1년 앞 둔 2008년에는 장충초등학교 70주년 개교기념을 맞아 그린 콘서트를 성대하게 개최했다. 특히 그린 콘서트에 우리 가곡이 운동장 가득 울려 퍼지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예술종합학고 성악 전공자들까지 초청해 기념비적인 축제의 마당으로 격을 올린 건 대단한 사건이었다. 한 마디로 그건 학교가 어느 교육현장에서도 볼 수 없는 음악축제로 학생들은 물론 그들의 부모들까지도 기억에 남을 일이었던 것이다.
그때의 일을 정원 이사장은 “다양한 대중음악과 우리 것을 경시하는 풍조에 음악의 중심에서 밀려난 가곡이 항상 안타까웠다. 인성 교육에 가곡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는데. 그래서 중구청장의 후원으로 성대한 야외무대를 만들고 우리의 가곡을 중심으로 축제를 펼쳤다. 학생들을 비롯한 학부모, 지역사회 주민들에게 가곡을 통한 화합의 시간을 마련해주고 싶었던 것이기도 했다. 가수 정수라를 비롯해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성악 전공자들이 특별 출연해 주었는데 그때 반응은 대단했다”라고 회상했다.
그러니 정원 이사장이 인생 후반기를 가곡부흥에 열정을 쏟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준비도 철저했다. 정년을 1년 앞둔 2008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문화예술 최고위과정 수료에 이어 2009년 퇴임 후에는 개인레슨을 비롯해 가곡 동호회, 등 가곡 관련한 활동은 하루해가 짧았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이안삼 작곡가를 만나게 됐으니. 이 같은 인연이 그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어느 날 길거리를 걷다가 무심코 발에 툭 걸리는 게 있었다. 평소에는 관심 없이 지나쳤던 것인데 그날은 그렇지 않았다. 호기심에 주워 보니 가곡 전문학원의 홍보지였다. 무조건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이안삼 작곡가를 만났다. 선생님의 ‘아득한 별에 꽃씨 묻으며’를 듣는 순간은 숨이 멎는 듯 했다. 그 노래를 지칠 줄 모르고 밤낮으로 연습했다. 그리고 마침내 선생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됐는데 그때 기쁨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그러니까 이안삼 작곡가를 만나게 된 것이 제2의 가곡 르네상스를 꿈꾸는데 결정적이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하지만 그의 그런 열정만으로 가곡부흥에 불씨를 당기기에는 역부족, 그와 뜻을 같이하는 단체를 결성해야만 했다. 거기에 운영자금도 난제였고. 그렇다고 주저할 그도 아니었다. 긍정의 소유자이며 끊임없이 일을 만들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의 추진력은 여기에서도 통했다. ‘하면 된다’, ‘진심은 통한다’는 두개의 신념으로 창립 멤버를 물색했고 드디어 항해를 시작하게 됐다고.
“2012년 ‘옥타브 합창단'을 창단했다. 이후 2013년 9월9일 귀의 날에 ‘행복한 가곡세상을 열며’라는 주제로 광화문 KT빌딩에서 창립무대를 열었다. 정말 꿈만 같았다. 난 그날 오신 관객 모두를 저명한 인사로 띄워 소개를 했다. 관객 대부분이 내가 동원한 교육계 지인들이기도 했지만 그분들이 지속해서 관심을 갖고 또 찾아올 수 있게 하자는 내 전략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예의와 성의를 갖춰 소개했다. 그런 내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창립 무대에 함께했던 분들은 지금까지도 뜨거운 관심으로 응원을 보내주고 계시니”
무소의 뿔처럼 밀고 나가는 정원이경숙 이사장의 추진력에 2022년 현재 ‘서울우리예술가곡협회’는 연주단원 200명, 카페회원 4700명이 활동 중에 있다. 1년에 3번의 정기공연(서울예술가곡제)과 크고 작은 다양한 무대 300회 이상 그리고 유튜브음악회 27회 등 가곡부흥에 불씨를 당기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러시아, 인도네시아, 대만 등 해외공연만도 놀랍다.
이 같이 높아진 위상으로 협회는 가곡부흥과 발전을 위한 음악장학생도 선발하고 있다. 지난 2019년 3명의 장학생에 이어 오는 11월 11일 가곡의 날에는 7명을 선발할 예정이다. 이번에 선발된 장학생은 정원 이사장의 팬심을 자극하는 가수 김호중의 모교 김천예고의 학생들과 우수한 대학생의 가곡사랑음악회를 함께할 예정이다.
2020년 가곡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내놓은 '가곡이야기 해설집'을 비롯해 전국 군부대의 청년세대에게 가곡공연을 펼치는 일도 협회의 가곡부흥의 일환이며, 올해 3회째를 맞는 태안예술가곡제도 같은 맥락의 활동이다. 올해부터는 안동을 시작으로 지역예술가곡제로 확대할 예정이라 벌써부터 정원 이사장의 마음은 연습실에 있다.
이처럼 한국가곡의 제 2의 르네상스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정원이경숙 이사장. 그의 거침없는 행보에 어려움을 물으니 뜻밖에도 관객모시기라고 했다.
“공연을 할 때마다 관객이 얼마나 와 주실지 그것을 걱정하고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보람과 감동도 관객들이다. 세종문화회관대강당의 3022석을 채운 공연과 러시아 예술인콘서홀의 공연은 지금도 잊지 못할 감동이다. 특히 러시아 공연은 700석의 객석에 800명이 넘는 교민이 몰려왔는데 그때의 일은 여전히 생생하다. 어느 음악회던지 만석을 자랑한다”
그와의 약속된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 어느덧 자리를 마감할 시간이었다. 자리를 서두르자 그는 서울우리예술가곡협회장으로서 바람이 있다며 “학교 교과서에 가곡 부활과 TV방송국의 가곡 프로그램 편성, 어린이 합창단 신설, 그리고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바란다”고 했다. 또 “서울시 지정 공연단체로 인정되었지만 예산까지 제공해 줄 것”을 요청했다.
43년 교육자로 그리고 인생 후반기 순수 예술인으로 가곡부흥에 불씨를 당기는 정원이경숙 이사장, 부디 그의 계획과 바람이 이루어지길, 나아가 제 2의 가곡 르네상스가 이 땅에 꽃피우길 희망해 본다.
서울우리예술가곡협회에 힘찬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첫댓글 이경숙이사장님의 무쏘의 뿔 같은 행보에 큰 박수보냅니다.^^
이렇게 많이읽어주실줄이야몰랐네요
정말감사합니다
보잘것없는인생이지만 늘광명정대한 생각으로 살아 오면서 가곡에 힘이되고있어
가곡에 대한사랑과 그를사랑하는사람들에대한사랑을더넓혀 나가겠습니다 ^^♡
정원 이경숙 회장님의 우리 가곡 사랑 열정과 추진력에
뜨거운 성원을 보냅니다. 홧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