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하는 일군이 됩시다
2024년 6월 16일 / 마 9:35-38
어느 때를 막론하고 복음사역에는 적극적인 희생과 헌신이 필요하였다. 특히 ‘추수할 것은 많되’라고 하시어 구원해야 할 영혼이 많음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추수 때가 되면 가라지와 알곡이 나눠진다. 신학대학에 입학하면 1학년 때에 열심히 부르는 곡이 있다. 교회에서는 자주 부르는 곡이 있다. ♬ 찬송가 495장
➊ 익은 곡식 거둘 자가 없는 이때에 누가 가서 거둘까 내가 어찌 게을러서 앉아 있을까 어서 가자 밭으로 보내 주소서 보내 주소서 제단 숯불 내 입술에 대니 어찌 주저할까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➋ 주가 두루 다니시며 일꾼 부르나 따르는 자 적구나 보라 주의 사랑하는 익은 곡식을 어서 거두러 가자 보내 주소서 보내 주소서 제단 숯불 내 입술에 대니 어찌 주저할까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➌ 주가 나를 인도하니 언제 어디나 기뻐 가서 일하리 주가 명령 내리실 때 능력 받아서 기뻐 거두리로다 보내 주소서 보내 주소서 제단 숯불 내 입술에 대니 어찌 주저할까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그런데 이 곡은 그렇게 불러서는 안 된다. 이사야 선지자와 같이 철저한 준비를 하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이사야 선지자처럼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사 6:8 / 그때에 내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내야 좋을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려고 할까?’ 그래서 내가 대답하였다. ‘주님, 제가 가겠습니다. 저를 보내 주소서.’
길 잃은 양은 누구인가?
길을 잃는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아무 힘없는 양에게는 길을 잃는다는 것이 더욱 비참한 일이다. 집에서 몇 마일 안떨어진 곳에서 길을 잃을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 양이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길을 찾는 비상한 능력을 타고난다. 그 중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는 '돌아온 래시(콜리는 ‘돌아온 래시’로 유명한 견종이다. 돌아온 래시에서 1943년에 나온 영화 ‘래시 집에 오다’도 영화로 나왔다)'일 것이다. 낯선 땅에서 강과 들, 언덕과 산들, 시골길을 건너 수백 마일 길을 지나 집을 찾아온 한 콜리견의 모험담이다. 수십 일 동안 그 먼 길을 지나면서 온갖 역경을 딛고 래시는 지친 몸과 상처입은 발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개나 고양이, 말, 기타 여러 동물을 주인공으로 한 이와 유사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수백 마일이나 떨어진 낯선 땅에서 마침내 농장으로, 방목지로, 농장 뒷문으로 돌아와 깜짝 놀라 반가이 맞는 주인에게로 돌아오는 이야기들이다. 들짐승들의 경우에는 먼 곳에 흩어져 있다가도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러나 양만은 예외이다. 폐쇄된 장소에서는 양도 어느 정도 길을 찾을 수 있다. 양은 자기 초장을 알고 계곡, 심지어 자기가 태어난 곳과 어미양의 젖을 빤 곳도 기억한다. 양은 아침 일찍 한쪽에서 풀을 뜯었으면 나중에는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그늘에 들어가 쉬는 것은 늘 똑같은 장소이고, 똑같은 그룹에 섞여 잠자며, 풀을 뜯는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자기가 원래 풀 뜯던 곳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 가엾은 양을 낯익은 땅에서 떠나게 만들면 양은 완전히 길을 잃고 만다. 방향 감각이 전혀 없다. 적응력도 없다. 집 찾아가는 길을 전혀 찾지 못한다. 그저 원을 그리며 돌다가 당황했을 때 그러듯 ‘매애애앰’ 소리만 계속 내고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른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워하고 적응하지 못하다가 며칠 후에야 비로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고지대에 있는 방목지에는 울타리가 없는데, 각 목장주가 소유한 양들은 자기네 구역에 그대로 남아 있는다. 스코틀랜드에서는 큰 무리의 양들이 모여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 8천에서 1만 마리까지 - 그 중 이웃 목장에 속한 양들은 고작해야 이삼십 마리밖에 안된다.
길 잃은 양에 대한 성경의 묘사는 진리 그 자체이다. (흔히들 생각하는 바와는 반대로) 양들은 매우 아름답고 겸손하며 대단히 영리한 반면 너무나도 쉽게 길을 잃고 방황한다. 일단 길을 잃으면 먹이나 물은 전혀 찾지 못한다. 양떼에게 사시사철 하루도 빠짐없이 먹이를 주고 물을 공급해 주며 풀을 뜯을 수 있도록 돌봐주는 수천 명의 헌신적인 목자들이 아니라면 전세계 11억 마리 양들은 얼마 안가서 굶거나 목말라 죽고 말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의 길 잃은 양의 비유만큼 가장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으면서 생생한 묘사도 없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더 적절한 비유를 말해 주시는 예수님께서는 양의 심리를 가장 잘 묘사하셨다. 다른 모든 동물들은 몇 시간이 흐른 뒤에라도 자신이 흘린 냄새를 추적해서 실마리를 찾아내고 동무들이 있는 곳을 찾아갈 수 있다. 하지만 양은 예외이다! 가엾은 양은 길을 잃어버리면 갈피를 못잡고 방황하다가 어쩔 줄 몰라 포기하고 만다. 이 유명한 비유는 양의 상태를 생생하게 묘사해 주며, 목자 없이 내버려진 인류의 애처로운 영적 상태를 말해 준다. 목자로서의 경험과 이사야 53장의 예언적 말씀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진리를 잘 알고 계셨다.
이 구절의 심오한 의미는 그것이 기록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니 그 어느때보다도 오늘날의 현실에 들어맞는다. 이 점에 대해 깊이 묵상해 보자. 21세기를 눈앞에 둔 지금, 예수님께서 사셨던 때로부터 약 2천년이 지난 지금, 인류의 위대한 업적을 우리는 자랑스러이 바라보고 있다. 인류는 수많은 눈부신 업적을 이루어왔다. 세상은 과학적, 기술적, 농업적 진보로 가득 차 있으며 온갖 경이로운 일들을 체험하고 경험하고 있다.
남극의 매서운 추위와 사막의 뜨거운 열기, 이 모두 온도조절 장치로써 적당한 온도로 조절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난방, 냉방, 에어컨디셔너 등의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새처럼 날아 다니는 것은 과거에 일부 사람들만의 꿈이었지만 이제는 음속보다도 더 빨리 날 수 있으며, 공간의 제약 없이 이웃집에 걸어가는 속도로 세계 곳곳을 날아다닐 수 있게 됐다.
과거에는 질병과 고통으로 형제와 자매가, 가족과 친구, 아들과 딸이 열 명에 한 명꼴로 죽어갔지만, 이제는 팔뚝에 주사 한 방만 놓으면 신체의 적 질병에 대해 면역 체계가 생기고 사람들은 건강과 장수를 누리게 되었다. 신체의 각종 부분, 내장, 심장마저도 수리가 가능하고 이식되기까지 한다. 마치 기계공이 자동차 부품을 가는 것만큼이나 용이하다. 알람 소리에 잠에서 깨고 약을 먹고 잠이 드는 현대인은 자신의 모든 물질적 필요를 조달받고 있다.
과거에 우주는 미지의 영토였으며 하나의 신비로서 남아 있었다. 놀라움과 경이의 원천, 지구에 발을 딛고 사는 자그마한 존재 인간에게 있어서는 불가사이한 대상이었지만 오늘날 인간은 두려움없이 그 발을 우주를 향해 내딛고 있다. 땅을 비추고 광대한 대양을 항해하는 선박을 인도해 주었던 저 달, 바다와 강의 조수를 움직이게 하며 연인들에게는 낭만을, 기이한 영향을 내려 주던 달도 인간에게 정복당하고 인간의 무거운 발자욱을 느껴야만 했다.
인류는 과연 만물의 영장이다. 어류, 동물, 조류, 기타 모든 형태의 생물들의 조인이며 인간은 그들 위에 군림해 왔다. 인간은 동물의 왕국의 군주이다. 인간은 광물의 부도 모두 차지했다. 인간은 원소와 중성자, 양자, 원자력까지 자유자재로 동력화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그의 지성과 과학, 기술의 힘을 감지했고, 세상은 보다 낫게 혹은 더 나쁘게 변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인간은 과거 여느 때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 그의 혼과 내적인 영적 성품은 창조 때부터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오직 살아 계신 주님을 믿고서 위에서부터 오는 새로운 출생을 경험한 자들만이 예외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하나의 수수께끼요 모순이며 역설이다. 그토록 진보된 것 같고 영리하고 똑똑한 것처럼 보이고, 지성의 면에서는 모든 동물 위에 뛰어난 것 같지만 문명의 겉치레 이면에는 가련하고 연약한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참으로 시편 기자가 노래했듯 인간은 ‘놀랍고도 경이롭게’ 지어졌으며(시 139:14),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지어졌다(히 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인간이다. 온갖 유한함, 온갖 연약함, 온갖 외로움, 온갖 제약, 온갖 취약점 등을 지닌 인간이다. 어떻게 이토록 뛰어난 지적 존재가 그토록 어리석을 수 있단 말인가?
▶ 여기서 또 하나의 교훈을 배워 보자. 목자 없는 양이 완전히 무방비 상태인 것처럼, 우리 또한 선한 목자이신 주님이 없이는 공격에 쉽게 쓰러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무서운 영적 전쟁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수많은 맹수들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으며, 그 맹수들 중에는 우리의 대원수 마귀가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고 명령한다.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기 때문이다(벧전 5:8).
▶ 우리는 얼마나 쉽사리 불식간에 붙잡혀 희생당하고 마는가. 특히 우리가 지나치게 자신만만하거나 무사태평할 때, 또는 '그런 일은 나한테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잘못된 안도감에 안주하고 있을 때 그렇다. 얼마나 많은 위대하고 능력있으며 똑똑한 사람들이, 큰 업적을 남긴 위대한 지도자들, 고결한 시민들, 유명한 배우들과 작가, 시인, 화가, 음악가, 연설가, 정치인, 군사 영웅들이 그만 저 무서운 맹수 사탄에게 희생당하였는가? 자신이 지닌 천재성과 독창성, 크나큰 성공에도 불구하고 한 순간의 유혹에 빠져 그만 모든 것을 잃고 마는 것이다.
그 거대한 악의 세력은 현 세상에 풀려나서 선한 사람들의 눈을 멀게 만들고, 인간의 욕망과 인간의 약점을 미끼삼아 그들을 죄의 노예로 만들고 있다. 우리는 우리 주위의 타락한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까지 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어떻게 그렇게 똑똑하고 재능있는 사람들이 그처럼 어리석고 말도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인생의 승리자로 여겨지던 사람들이 그처럼 쉽사리 희생자로 변하며, 그것도 너무나 갑작스럽게, 너무나 쉽게 타락하고 마는 것인가? 왜 강한 자가 그렇게도 쉽게 떨어지는 것인가?
▶ 현대 이론, 철학, 심리학에서는 영적으로 잃어버린 바 된 인간의 상태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심리학적 방법으로 답을 찾아 보려고 방황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호언장담은 현대판 바벨탑이요 해답을 주는 대신 혼란만 가중시키고 있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인간의 이론을 믿고 있다. 여기에도 분명 믿음이 요구된다. 선한 목자의 사랑어린 부르심에 응답하는 데도 믿음이 필요한 것처럼. 양쪽 모두 믿음이 요구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인간은 영적으로 잃어버린 바 된 상태이다. 양은 참으로 쉽게 길을 잃는다. 이 사실은 양을 도살장으로 유도할 때 사용되는 법칙이다. 뉴질랜드에서는 약 4천만 마리의 양이 시장에 판매되는데, ‘유다’라 불리는 양이 양들을 도살장으로 이끌고간다. 이 ‘유다 양’은 덩지 큰 거세한 숫양으로 양들을 몰아넣는 우리 맨 밑바닥에서부터 꼭대기에 있는 도살장까지 유도한다. 불쌍한 양들은 코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는 채 그저 따라만 간다. 꼭대기에 다다르면 ‘유다 양’을 위한 탈출구가 열리고 이 양은 재빠르게 빠져나가 다시 밑바닥에 있는 다른 양들을 또다시 죽음의 장소로 인도하는 일을 반복한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영적인 교훈이 있다. 당신이 따라가는 지도자가 누구인지 주의해야 한다. 올바른 인도자를 따라가야 하고, 올바른 길, 목자이신 주님께서 지도하시는 길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야 한다. 선한 목자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곁길로 빗나가게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결코 우리가 해를 당하거나 상처를 입도록 이끄시지도 않는다. 그와 반대로 주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며 그곳에서 우리의 혼을 소생시키신다.
현대인은 집단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선한 목자께서 찾아 주시고 사랑 많은 품 안으로 안아 주시며 그분의 강한 어깨 위에 올려 주시며 사랑해 주시고 먹여 주시며 그의 목자가 되어 주시고 무서운 상실감에서 풀어 주시어 집으로 데려가 주시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 우리가 양처럼 연약하고 유한하며 힘없고 자기를 방어할 줄 모르며 공격에 무방비상태라는 것을 알면 그러한 현실은 그다지 놀라울 것도 못된다. 선한 목자 주님이 아니면 우리는 맹수 마귀의 기만, 미혹, 유인, 속임수와 계략에 쉽사리 희생당할 것이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 우리의 유일한 방어책, 우리의 유일한 대책은 선한 목자께 있으며 그분만이 저 무서운 맹수를 능히 물리쳐 주실 수 있다. 양 스스로에게는, 자신의 힘과 능력 안에는 나신을 방어할 수 있는 길이 전혀 없지만, 선한 목자 주님의 양떼에 속해 있는 양이라면 그 양은 어떤 이도 해칠 수 없다. 그분의 양은 결코 부족함이 없을 것이며, 결코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죽음의 그림자의 골짜기를 지나야 할 때도 있을 것이나, 주와 함께 행하는 양은 악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 곁에는 선한 목자께서 함께 행하시기 때문이다. 무방비 상태로 있을 필요도 없고, 공포 속에서 당황할 필요도 없으며, 망연자실해할 필요도 없다. 우리의 목자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추수할 영혼을 바라보는 일군이 되자.
예수님이 보실 때는 언제나 추수할 영혼이 많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잘 보지 못한다. 예수님은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라’(37절)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눈에는 보이는 곳마다 추수할 영혼들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면서 그를 따르는 여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면서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를 지심이 마땅한 일이나 너희들이 더 문제니 너와 너희 자녀의 영혼을 위해서 울라’라고 하셨다.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불쌍한 영혼을 바라보셨다. 예수님은 언제나 추수해야 할 영혼을 생각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이 보실 때는 이 세상이 온통 추수할 곡식으로 가득 차 있다. 주위를 신령한 눈으로 바라보면 추수할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영적으로 바라보면 여기 저기 영적으로 추수할 대상으로 가득 차 있다. 추수할 일군에게는 모두가 추수할 대상으로 보인다. 영적으로 추수할 영혼이 보여야 한다.
예수님 보혈의 은총을 힘입고 성령의 안약을 발라서 추수할 대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 성령으로 내 영혼이 변화받고 거듭나서 새로운 영적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열리시기를 소원한다.
♬ 589장 ➊ 넓은 들에 익은 곡식 황금 물결 뒤치며 어디든지 태양에 향기 진동하도다
<후렴> 무르익은 저 곡식은 낫을 기다리는데 때가 지나가기 전에 어서 추수 한다 아멘
➋ 추수할 것 많은 때에 일꾼 매우 적으니 열심있는 일꾼들을 주여 보내 주소서
➌ 먼동뜰 때 일어나서 일찍 들에 나아가 황혼 때가 되기까지 추수하게 하소서
➍ 거둬들인 모든 알곡 천국 창고 들인 후 주가 베풀 잔치자리 우리 참여하겠네
▶ 이 땅을 거닐고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이 서로의 곁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런 무리를 볼 때 정치가들은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을 자기에게 표를 던질 수 있는 한 표로 본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자기 장사의 대상으로 자기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고객으로 본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을 보시고, 무리들을 보았을 때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고 있는 양들로 보셨다. 성경이 인간에 관한 여러 가지 아름다운 묘사들을 하는 중에 가장 탁월한 묘사 중에 하나가 양이라는 표현이다. 인생을 양으로 보시는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기 위해서 왔다’라고 하셨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생들이 예수님의 눈에는 목자 없는 양으로 보였다. 목자 없는 양들 방황하는 양들로 보시는 예수님처럼 추수할 영혼을 바라보는 일군이 되자.
♬ 경배와 찬양에 이런 곡이 있다.
➊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내게 무얼 원하나 공허한 그 눈빛은 무엇으로 채우나 모두 자기 고통과 두려움 가득 감춰진 울음소리 주님 들으시네 ➋ 캄캄한 세상에서 빛으로 부름 받아 잃어버린 자들과 나누라고 하시네 주의 사랑으로만 사랑할 수 있네 우리가 나눌 때에 그들 알겠네 (후렴)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 마음 주가 여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모두 알게 되리 사랑의 주님
■ 미국의 유명한 부흥 목사님인 찰스 피니는 어느 날 미국의 시카고 거리에 왔다가 거리의 교차로에서 많은 사람들이 물밀 듯 지나가는 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곁에 있는 분이 ‘목사님! 왜 그러세요?’ 그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저 사람들이 지옥으로 가고 있잖아. 복음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지옥으로 가고 있잖아.’
우리도 지옥갈 영혼을 민망히 여기며 추수하는 일군이 되자. 유리하는 심령을 민망히 여기는 일군이 되자.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무리를 보시고 예수님은 민망히 여기시니’라고 하셨다. 여기서 민망하다는 말은 ‘함께 고통한다’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유리하는 양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보셨다. 양의 방황이 자신의 방황이었다. 양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이고, 양의 눈물이 자신의 눈물이었다. 그들의 방황 두려움 아픔 좌절을 자신의 좌절처럼 아파하셨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하나님이 부르시는 일꾼은 예수님처럼 민망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 헨리 나우엔은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라는 책에서 예수님을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하였다. 자신은 건강한 상태에서 자기와 다른 사람을 접근해 간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오셨고 종의 모습으로 오셨다. 또 강보에 싸인 아기의 모습으로 오사 이 땅에서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셨다. 우리처럼 고통을 당하셨고, 아파도 하셨고, 인생의 아픔을 경험하심으로 우리를 이해하셨다. 우리를 치료할 수 있는 치유자,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하시며 동시에 제자들에게도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셨다.
그런데 이 책에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를 인용하였는데, 어떤 랍비 하나가 우연히 예언자 엘리야를 만나게 되었다. 랍비가 예언자 엘리야에게 물었다. ‘메시야는 언제 오십니까?’ 그러니까 엉뚱한 대답을 하셨다. ‘가서 직접 물어보세요. 메시야에게 직접 물어보세요.’, ‘아니! 어디 계신데요?’, ‘아마 저기 성 바깥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계실 것입니다.’, ‘아~ 그래요. 내가 어떻게 메시아를 알아볼 수가 있을까요?’ 이때 엘리야라는 선지자가 말하기를 ‘그분은 많은 사람들 사이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도 상처를 입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상처를 풀었다 감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기 상처만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두리번거리며 도울 자를 찾고 계실 것입니다. 이 바로 메시아일 것입니다.’
추수할 일군은 사람들을 볼 때 민망히 여기며 아픔을 보면 함께 아파하고, 좌절할 때 붙들어 주고, 낙심할 때 위로하며 버릴 수 없어 사랑하는 마음으로 접근해 가는 사람이 추수할 일군이다.
내 상처도 있고 아픔도 있으나 자기 아픔 속에만 빠지지 않고나 내 아픔을 통해서 나보다 더한 아픔 속에 주저앉아 있는 이웃들을 민망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일꾼이 추수할 일군이다.
자신을 바라보면 자신도 상처가 많다. 아픔도 많다. 그러나 자신의 상처에 집중하고 있으면 인생은 그냥 자기 상처와 싸우다가 끝난다. 자신에게도 상처가 있지만 그러나 상처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였다면 더 깊은 더 예리한 상처 때문에 울고 있는 수많은 영혼, 목자 없이 방황하고 예수님이 없이 방황하고 있는 이웃들을 찾아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 모습을 바로 보는 심령이라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눈물로 기도할 수밖에 없다. 유리방황하는 불쌍한 영혼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에 눈물 지울 수밖에 없다.
중병이 들어서 몸부림치는 모습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품고 기도하는 일이 귀한 일이다. 빚을 지고 있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여기면서 기도하는 일도 귀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목자를 만나지 못하여 고생하며 유리하는 모습을 보고 더욱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눈물과 금식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욱 귀한 일이다. 예수 믿고 죽는 것은 영적인 면에서는 불쌍한 것이 없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예수 믿고 죽는 것은 최고의 복이다.
계 14:13 / 또 나는 바로 내 머리 위에서 '기록하라. 드디어 주님을 위하여 순교를 당한 사람들이 보상받을 때가 왔다'고 외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성령께서도 '그렇다. 그들은 참으로 복받은 사람들이다. 이제 그들은 모든 수고와 시련에서 벗어나 쉬게 될 것이다. 그들의 착한 행실이 영원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신보다는 영혼이 귀중하다. 그 영혼을 끌어안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한 번 의미 있게 살고 싶다. 무의미하게 그냥 내 일생의 상처 붙들고 몸부림치다가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쓰임을 받는 인생이 되기 원합니다. 추수할 일꾼으로 쓰임 받는 인생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원하시면 저를 쓰실 수가 있사오니 저를 사용해 주시옵소서.’라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허드슨 테일러도 중국의 수많은 영혼들이 예수 알지 못하고 죽어 가는 영혼을 생각하며 절규했다 한다. ‘하나님이여! 저 죽어 가는 영혼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추수하는 일군으로서 이런 영혼을 위한 애정 어린 절규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이 참된 추수하는 일군이다.
바울처럼 형제 골육 친척이 구원받는다면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구원받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모세처럼 ‘생명책에 이름이 지워진다’하여도 자기 백성들이 멸망당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선택하겠다는 마음을 품는 것이 진짜 추수하는 일군의 마음이다(롬 9:1-5).
유리하는 영혼을 민망히 여기는 일군이 됩시다. 복음 전파를 위해 쓰임 받는 일군입니다.
요한 웨슬레가 한번은 그의 시대에 효과적인 세계복음화의 전략을 위해서 동료 지도자들과 모인 적이 있었다고 한다. 여러 가지 방법들이 토의되고 있었다. 갑자기 웨슬레가 일어나더니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고 한다. "방법이요? 우리에게 방법이 있다면 단 한 가지의 방법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만약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죄만을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100명만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금년이 지나가기 전에 이 세상을 뒤집어 놓겠다."
세계 기독교 교회사를 기술한 학자 가운데 라토렛이라는 학자가 1세기의 초대교회를 기록하면서 ‘초대교회 역사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힌 바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스토리’라고 기록하였다 한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우리 주변에서 아무나 볼 수 있는, 우리가 접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혀서 세상을 바꾸고 있는 삶의 이야기가 초대 교회사라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지식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프로그램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조직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후원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만 성령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교회는 프로그램, 지식, 조직, 후원도 가지고 있지만,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너무나 부요해져서 성령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는지 모른다. 이제 할 일은 성령의 권능을 사모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 10:1)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낼 때 그냥 보내지 않았다. 권능을 주어 보냈다. 복음은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전한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성령의 권능이 함께 하면 귀신이 쫓겨나고 모든 병과 약한 것들을 고치게 된다. 추수하러 가는 자에게 반드시 하나님께서 권능을 주신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신 말씀대로 성령의 권능 받고 증인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