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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거이(白居易-백낙천)
晩年의 백거이 모습
백거이(白居易-백낙천)
(병)Bo Juyi (웨)Po Chü-i.
772~846.
중국 중당시대(中唐時代:766~826)의 시인.
백거이/ 작자 미상의 초상화
자는 낙천(樂天),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 시호는 문(文). 허난 성[河南省] 신정 현[新鄭縣] 사람이다.
중당시대에는 과거제도가 효과를 거두어 그 시험에 통과한 진사 출신의 신관료집단이 진출하여 구문벌을 압도했는데, 백거이가 이 시기에 태어난 것은 그로서는 행운이었다. 백거이는 800년 29세 때 최연소로 진사에 급제했다. 이어서 서판발췌과(書判拔萃科)·재식겸무명어체용과(才識兼茂明於體用科)에 연속 합격했다. 그 재능을 인정받아 한림학사(翰林學士)·좌습유(左拾遺) 등의 좋은 직위에 발탁되었다. 〈신악부 新樂府〉·〈진중음 秦中吟〉 같은 풍유시와 〈한림제고 翰林制誥〉처럼 이상에 불타 정열을 쏟은 작품을 창작한 것도 이때이다. 808년 37세 되던 해에 부인 양씨(楊氏)와 결혼했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편 시 〈장한가 長恨歌〉에는 부인에 대한 작자의 사랑이 잘 반영되어 있다.
811년 모친상을 지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던 그는 814년 다시 장안(長安)으로 돌아왔으나, 태자좌찬선대부(太子左贊善大夫)라는 한직밖에 얻지 못했다. 게다가 그 이듬해에 발생한 재상 무원형(武元衡) 암살사건에 관하여 직언을 하다가 조정의 분노를 사 강주사마(江州司馬)로 좌천되었다. 이 사건은 백거이가 관계에 입문한 이래 처음 겪은 좌절이었으며, 또한 그의 시심(詩心)을 '한적'·'감상'(感傷)으로 향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820년 헌종(憲宗)이 죽고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백거이는 낭중(郎中)이 되어 중앙으로 복귀했고, 이어 중서사인(中書舍人)의 직책에 올라 조칙(詔勅) 제작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이같은 천자의 배려에 감격하여 국가의 이념을 천명하는 데 진력했다. 822년 이후 항저우자사[杭州刺史]·쑤저우자사[蘇州刺史]를 역임했다. 뤄양[洛陽]으로 돌아온 뒤에는 비서감(秘書監)·형부시랑(刑部侍郞)·하남윤(河南尹) 등의 고위직과 태자빈객분사(太子賓客分司)·태자소부분사(太子少傅分司)와 같은 경로직(敬老職)을 거쳤으며, 842년 형부상서(刑部尙書)를 끝으로 관직에서 은퇴했다. 한림학사 시절의 동료 5명은 모두 재상이 되었으나 백거이는 스스로 '어옹'(漁翁)이라 칭하며 만족해 했다. 이같은 성실하고 신중한 태도로 인해 그는 정계의 격심한 당쟁에 휘말린 적이 없었다.
백거이는 문학 창작을 삶의 보람으로 여겼다. 그가 지은 작품의 수는 대략 3,840편이라고 하는데, 문학 작가와 작품의 수가 크게 증가한 중당시대라 하더라도 이같이 많은 작품을 창작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구나 그의 작품은 형식이 다양하여 고체시(古體詩)·금체시(今體詩:율시)·악부(樂府)·가행(歌行)·부(賦)의 시가에서부터, 지명(誌銘)·제문(祭文)·찬(贊)·기(記)·게(偈)·서(序)·제고(制誥)·조칙·주장(奏狀)·책(策)·판(判)·서간(書簡)의 산문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학형식을 망라했다. 또한 그는 훌륭한 친구를 많이 사귀었는데, 친구들과 서로 주고 받은 시문에는 친애의 정이 물씬 배어 있다. 특히 원진(元稹) 및 유우석(劉禹錫)과의 사이에 오간 글을 모은 〈원백창화집 元白唱和集〉과 〈유백창화집 劉白唱和集〉은 중당시대의 문단을 화려하게 장식한 우정의 결실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여러 작품 가운데에는 정치이념을 주장한 것도 있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도 있는데, 모두 평담한 언어로 알기 쉽게 표현되었으며, 시에 봉급의 액수까지 언급하는 등 매우 당당했다. 때문에 평이하고 속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비상한 노력과 식견에 의해서 달성된 것이었다. 그는 1편의 시가 완성될 때마다 노파에게 읽어주고 어려워하는 곳을 찾아 고치기까지 할 정도로 퇴고(推敲)를 열심히 했다. 백거이가 자신의 시문에 일상어를 유효적절하게 구사한 것도 그의 표현을 간명하게 한 큰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가 일상어를 사용한 것은 구어문학(口語文學)을 추구했기 때문이 아니다. 문언(文言)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구어를 자신의 언어 속에서 활용하려 했을 따름이었다. 또한 그는 어휘를 매우 신중하게 선택했다. 고금문학(古今文學)에 나타난 어휘를 천지(天地)·산천(山川)·인사(人事)·조수(鳥獸)·초목에 이르기까지 1,870개 부문으로 분류하여 〈백씨육첩 白氏六帖〉 30권을 펴냈다. 이 책을 통해 그가 어휘를 선택하고 그 의미를 확인하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이백(李白)·두보(杜甫)·한유(韓愈) 등 백거이와 이름을 나란히 하는 시인의 작품에는 송대 이래 많은 주석서가 있는 데 반해, 〈백씨문집 白氏文集〉에는 그러한 주석서가 없는 것 또한 특기할 만하다. 종래의 주석서는 난해한 말에 관한 출전을 찾아내어 설명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나, 백거이의 작품에는 이러한 주석서가 필요없었던 것이다.
백거이는 문학을 2가지의 차원에서 이해했다. 그는 초기에 왕자(王者)의 정치이념은 문학에 의해서 표현되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위정자를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은 이상에 불타던 젊은시절의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신악부서 新樂府序〉에서 "글은 임금·신하·백성·만물을 위해 짓는 것이지 글을 위해 짓는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본래 천하의 정치에 책임을 져야 하고, 그 작품은 백성의 뜻을 군주에게 전달함과 동시에 정치의 옳고 그름을 풍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시경 詩經〉이야말로 이같은 문학의 본질을 잘 나타낸 작품이며, 후세 특히 육조(六朝) 이후의 문학은 기교만을 중시한 나머지 본래의 이념을 상실했다고 비판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809년에 완성된 통렬한 풍유시 〈신악부〉 50편을 비롯하여 〈백씨문집〉에 수록된 100분야에 대한 '판'(判)과 75편의 '책'(策), 200편의 〈한림제고〉, 233편의 〈중서제고 中書制誥〉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백거이가 지은 '조'(詔)·'칙'(勅)·'제'(制)·'고'(誥) 등은 한림학사들에게 〈육전 六典〉보다도 더 존중받았다. 〈육전〉은 칙명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당대 관계에서 최고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글을 짓는 궁극적인 목적은 천자 대신 천자의 세계관과 이념을 그에 걸맞는 전아(典雅)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이었고, 조·칙·제·고 등은 그 주요한 서술형식이었다. 칙명을 받아 그러한 글을 짓기 위해서는 정확한 식견과 웅장한 필치를 지녀야만 했다. 뛰어난 작가는 '대수필'(大手筆)이라 하여 커다란 영예를 부여받았는데, 백거이는 그중 한 사람이었다.
백거이는 문학으로써 정치이념을 표현하고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여 실제 행동에 옮기도록 하는 것을 문학활동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815년 강주사마로의 좌천과 목종의 죽음은 그에게 큰 좌절을 안겨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정치 문학으로부터 탈피하여 인생의 문학을 추구하게 되었다. 장경(長慶) 4년(824) 목종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친구 원진에 의해 〈백씨장경집 白氏長慶集〉 50권이 편찬되었다. 당시 백거이의 나이는 53세였으며 '장경'은 목종의 죽음과 동시에 새로이 바뀐 연호였다. 따라서 〈백씨장경집〉은 죽은 천자의 후한 대접을 그리워함과 동시에 자신의 인생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835년 백거이는 60권본의 〈백씨문집〉을 강주 둥린 사[東林寺]에 봉납했고, 이듬해 65권본을 뤄양의 성선사(聖善寺)에, 3년 후 67권본을 쑤저우의 남선사(南禪寺)에 봉납했다. 842년 이전의 50권 이외에 '후집'(後集) 20권을 정리하고 이어서 845년 5권의 '속후집'(續後集)을 편찬함으로써 합계 75권의 '대집'(大集)을 완성했다. 846년 8월, 75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다.
<백과사전>
백거이 문학관
이백(李白: 701~762)이 죽은 지 10년, 원결(元結)이 죽은 바로 그해에 태어난 백거이는 어릴 때부터 문학혁신의 기풍과 곤궁한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 후 그는 관계에 진출하여 정치의 문란과 관리들의 부패, 과중한 세금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고통 등
불평스러운 사회현상을 목도하고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구세제민(救世濟民)의 뜻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사실 관직이 그다지 높지도 않고 실권도 없었기에 시가(詩歌)로써 민생의 고통을 대변하고 정치의 부당함을 풍자하여 탐관오리를 공격하는 도
구로 삼았던 것이다.
그는 시가란 단지 음풍농월(吟風弄月)하는 오락물이 아니라 시정에 도움이 되고 사람의 마음과 세상의 이치에 보탬이 되는 내용을 가져야 비로소 그 존재의 의의와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그의 문학사상은 <여원구서(與元九書)>, <신악부서(新樂府序)>, <책림(策林)> 등에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 특히 좌천시기(원화 10년 12월)에 쓴 <여원구서>에서 그는 시에 대한 종래의 자기 견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릇 글은 귀한 것이다. 삼재(三才)에는 각기 글이 있다. 하늘의 글은 삼광(三光: 해, 달, 별)이 으뜸이고, 땅의 글은 오재(五材: 금, 목, 수, 화, 토)가 으뜸이며, 사람의 글은 육경 (六經: 시, 서, 예, 악, 역, 춘추)이 으뜸이다. 육경을 말한다면 시가 으뜸이다.
왜인가?
성인은 사람의 마음을 감화시켜 천하를 화평케 한다. 사람의 마음을 감화시키는 데에는 정(情)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말보다 처음인 것이 없으며, 소리보다 절실한 것이 없고, 뜻보다 깊이 것이 없다. 시는 정을 뿌리로 삼고, 말을 싹으로 하고, 소리를 꽃으
로 하며, 뜻을 열매로 삼는다. 위로는 성현에서 아래로는 우민(愚民)에 이르기까지, 보잘 것 없는 돼지나 물고기에서 신묘한 귀신에 이르기까지, 여럿이 나뉘어도 기(氣)는 같고, 형체가 달라도 정은 하나니, 소리를 듣고서 응하지 아니하고, 정을 나눔에 느끼
지 않는 것이 없다. 성인은 그러함을 알아서 그 말에 따라 육의(六義: 風, 雅, 頌, 賦, 比, 興)로 날줄을 삼고, 그 소리에 따라 오음(五音: 宮, 商, 角, 徵, 羽)으로 씨줄을 삼았다."
(夫文尙矣, 三才各有文, 天之文, 三光首之, 地之文, 五材首之, 人之文, 六經首之. 就六經 言, 詩又首之. 何者? 聖人感人心而天下和平. 感人心者, 莫先乎精, 莫始乎言, 莫切乎聲, 莫深乎義. 詩者, 根情, 苗言, 華聲, 實義. 上自賢聖, 下至愚騃, 微及豚魚, 幽及鬼神, 群分而氣同, 形異而情一, 未有聲入而不應, 情交而不感者, 聖人知其然, 因其言, 經之以六義, 緣其聲, 緯之以五音).
그는 시가 정(情), 말, 소리, 뜻의 결합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데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시가에 민생의 고통을 반영하는 것이 바로 시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사명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문장은 시대에 부합되게 지어야 하고, 시가는 시사에 부합되게 지어야 한다.( <여원구서>: 文章合爲時而著, 歌詩合爲事而作.)"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시는 반드시 육의에 부합하여야 사회적 사명을 달성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시경(詩經)≫의 현실주의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계속하여 그는 시경의 정신이 당대에 들어서서 충분히 실현되지 못하였음을 인식하고 당대 이전의 작자들에게 시가의 사회적 효용이 없음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당대 시인들에 대해서도 시경의 정신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음을 비평하였다.
"당이 흥한 2백년 이래 그 사이 시인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내세울 만한 작품으로는 진자앙(陳子昻)의 <감우시(感遇詩)> 20수, 포방(鮑魴)의 <감흥시(感興詩)> 15수 등이 있다. …… 이백(李白)의 작품은 특출하여 다른 사람들이 미칠 수 없지만 풍(風),
아(雅), 비(比), 흥(興)의 작품을 찾아보면 열에 하나도 없다. 두보(杜甫)의 시는 …… <신안리(新安吏)>, <석호리(石壕吏), <동관리(潼關吏)>, <한로자(寒蘆子)>, <유화문(留花門)> 등의 작품과 "부귀한 집 대문에는 술과 고기 냄새 진동하는데, 길가에는 얼어 죽은 시체가 나뒹군다." 와 같은 시구가 들어있는 작품은 30~40수에 불과하다. 두보조차 이러하거늘 하물며 두보 보다 못한 사람들에 있어서랴!"
(唐興二百年, 其間詩人, 不可勝數, 所可擧者, 陳子昻有感遇詩二十首, 鮑魴有感興詩十五篇. …… 李之作, 挨奇矣, 人不逮矣, 索其風雅比興, 十無一焉. 杜詩 …… 然其新安吏·石壕吏·潼關吏·寒蘆子·留花門之章, '朱門酒肉臭, 路有凍死骨'之句, 亦不過三四十首. 杜尙
如此, 況不逮杜者乎!)
그는 시가의 이러한 사회적 효용을 달성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써 채시관(採詩官) 제도의 시행을 황제에게 건의하여 시와 정치의 밀접한 관계를 역설하였다.
"신이 듣건대 성왕은 다른 사람의 말을 참작하여 자신의 허물을 보완하여 이로써 다스림의 근본을 세우고 교화의 근원을 이끈다고 합니다. 장차 풍속을 살피는 관리를 뽑고 채시관을 설립하여 노래 부르는 소리와 풍자하는 시를 매일 아래에서 채집하고 해마다 위에 바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을 일러 말하는 자는 죄가 없고 그것을 듣는 자는 스스로 경계하기에 족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策林> 第69 '採詩': 臣聞, 聖王酌人之言, 補己之過, 所以立理本, 導化源也. 將在乎選觀風之使, 建採詩之官, 俾乎歌詠之聲, 諷刺之興, 日採於下, 歲獻於上者也. 所謂言之者無罪, 聞之者是以自誡.)
결론적으로 그는 "임금, 신하, 백성, 사물을 위하여 시를 지은 것이지 문체를 위하여 지은 것이 아니며(<新樂府序>: 爲君, 爲臣, 爲民, 爲物, 爲事而昨, 不爲文而作.)", "윗사람은 풍(風)으로써 아랫사람을 교화하고, 아랫사람은 풍으로써 윗사람을 풍자해야 한다.(<毛詩大序>: 上以風化下, 下以風刺上.)"는 정신에 입각하여 시의 사회적 효용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실천하기 위하여 정치와 사회를 비판한 <풍유시> 172수를 짓고 그것에 최고의 평가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시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그가 40세 전후에 황제의 신변에서 좌습유가 되었을 때 가장 강렬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강주(江州)로 좌천된 후에는 인생관과 함께 시풍의 변화를 겪는다. 이에 "문장으로 명성을 얻고 마침내 문장으로 죄를 받게 된(<여원구서>:
始得名於文章, 終得罪於文章.)" 백거이는 뒷일들을 떨쳐 버리고, "한 가지 일도 이루지 못한 채 강주로 좌천의 길을 떠나는구나!
(<題四皓廟>: 不成一事貶江州.)", "새장 속에 갇힌 몸 언제나 풀려날까?(<紅鸚鵡>: 籠檻何年出得身.)", "내 스스로 자문하건대, 어찌 자연으로 돌아옴이 늦었던가?(<仙娥峯下作>: 感彼私自問, 歸山何不早.)"라고 하며 초기의 시상과는 판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백거이의 이러한 변화는 두 가지 측면으로 분석할 수 있는데, 하나는 문학의 자연적인 변동에 기인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집정자의 지지를 받지 못한 까닭이다.
(陳寶條 <白居易在文學史上的獨特地位>)
백거이 시의 분류
백거이는 <여원구서(與元九書)>에서 자신의 시를 아래와 같이 풍유시(諷諭詩), 한적시(閒適詩), 감상시(感傷詩), 잡률시(雜律詩)의 4종류로 분류하였다.
"좌습유가 된 이래로 사물을 접하면서 느낀 모든 찬미, 풍자, 흥(興), 비(比)에 관한 것과 무덕(武德)에서 원화(元和)까지 시사를 제재로 삼고 '신악부'라 제목을 붙힌 것을 합한 150여수를 풍유시라 하였다. 또 공직에 물러나 홀로 지내거나 병을 핑계로 물러나서 한가하게 거처하면서 분수를 알고 몸을 잘 보전하며 마음이 끌리는 대로 읊은 것 100수를 한적시라 하였다. 또 사물이 밖에서 끌어당기고 정감이 안에서 움직여 느낌이 닿는대로 찬탄하여 읊조린 것 100수를 감상시라 하였으며, 5언, 7언, 장구(長句), 절구의 100운에서 2운에 이르는 것 400여수를 잡률시라 하였다."
(自拾遺來, 凡所遇所感, 關於美刺興比者, 又自武德訖元和, 因事立題, 題爲新樂府者, 一百五十首, 謂之諷諭詩, 又或退公獨處, 或移病閒居, 知足保和,吟翫性情者, 一百首, 謂之閒適詩, 又有事物牽於外, 情理動於內, 隨感遇而形於歎詠者, 一百首, 謂之感傷詩, 又有五言七言長句絶句, 自一百韻至兩韻者, 四百餘首, 謂之雜律詩.)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풍유시는 바로 풍자시로 그 내용은 정치의 좋고 나쁨과 민생의 고락 등을 노래한 것이며, 그 범위는 권력을 잡고 있는 권신과 재야의 은사를 불문하고 논하여 시대의 부족함과 시정의 득실을 도우고 살핀 것이다. 이것은 국풍(國風)에서 그 방법을 취한 것으로 <시서(詩序)>에서 말하는 "문장을 가지고 넌지시 간하니 말하는 자는 죄가 없고, 그것을 듣는 자는 족히 경계해야 한다.(<毛詩大序>: 主文而譎諫, 言之者無罪, 聞之者足以戒.)"는 것과 같은 것이다. 풍유시 중 가장 전형적인 것으로는 <신악부> 50수와 <진중음(秦中吟)> 10수를 들 수 있으며, 여기에서 거론한 중점적인 문제는 ① 백성들의 고통스런 생활상, ② 과중한 세금과 부역, ③ 권문세가와 귀족들의 사치와 낭비, ④ 세력자들의 권력남용과 횡포, ⑤ 쓸데 없는 전쟁, ⑥ 권력자에 아부하거나 위선에 찬 세상 인심, ⑦ 부녀자의 문제 등이다.(金學主, 李東鄕 ≪中國文學史Ⅰ≫, 韓國放送通信大學出版部, 1986. p322)
그러나 백거이는 강주로 좌천된 후부터는 <방어(放魚)>, <문백상(文柏牀)>, <심양삼제(潯陽三題)>, <대수(大水)> 6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풍유시를 쓰지 않았으며, 시절을 감상하고 늙음을 탄식하거나 자식과 친구를 슬퍼한 몇몇 시들 외에는 모두 한적한 생활을 표현하였다. 이와 같이 마음속에서 한적하고 쾌락한 생활을 희망했던 그는 이러한 마음을 주제로 삼아 주로 자연의 풍광(風光)과 마음의 평정을 읊은 시를 한적시라 이름하였으며 그 평가는 풍유시 다음에 두었다.
감상시란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면 실제로 한적시와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그러나 풍유시가 세상을 풍자하고 한적시가 허심탄회하게 자연의 풍광을 읊은 것이라면, 감상시는 인생의 경험에서 감정적으로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 즉 인생에 대한 허무, 애상, 인정, 세정(世情), 추억, 우정 등에 관한 감회와 감정을 노래한 것이다.(楊林 <白樂天과 그의 詩>, 서울대학교대학원, p26) 이것은 주로 노년기에 쓴 작품으로 그 분량은 매우 적다. 그러나 이러한 부류의 감상시 중에서도 <장한가(長恨歌)>와 <비파행(琵琶行)> 등은 창기들도 능히 암송할 수 있을 정도로 시정(市井)에 널리 유행하여 천고의 걸작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잡률시는 어떤 사물에 정감을 느끼고 흥취가 일어나서 짓거나 아름다운 형식과 격률에 치중한 시의 한 체재를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에 속하는 작품으로는 격시(格詩)라는 형식을 포함하여 모두 2203수로 그가 분류한 시가 유형 중에 그 편수가 가장 많다. 그러나 사실상 잡률시 중에는 풍유시에 속하는 것도 있고 한적시나 감상시에 속하는 것도 있다.
백거이가 자신의 시집 15권을 처음으로 편집한 것은 헌종(憲宗) 원화 15년(815)의 일이다. 그때 그는 자신의 시를 상술한 바와 같이 풍유, 한적, 감상, 잡률로 사분하였고, 그후 목종(穆宗) 장경 4년(834)에 시문을 함께 담은 ≪백씨장경집(白氏長慶執)≫을 편집했을 때도 여전히 이 네 가지 분류 방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문종(文宗) 대화 2년(828)에 ≪백씨장경집≫ 이후의 시문을 모아 후집 5권을 3차 편집하였을 때는 이미 있던 작품은 그대로 두고 새로운 작품만을 분류하면서 격시(格詩)와 율시(律詩) 두 종류로만 분류하였다. 그는 그러한 분류 기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율시는 이미 아는 바와 같고, 격시는 대체로 한위(漢魏)의 고시에 다른 다양한 형식이 가미되어 좀 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는 일종의 고체시를 가리키는 것이다.(劉本棟 ≪白居易≫, 中國歷代詩人選集 18, 林白出版社, 1978, 金在乘 <白居易의 格詩考> 中國人文科學 제3집, 1984, 참고)
백거이의 격시는 만년에 쓰여진 것으로 형식이 다양하며, 내용은 일상생활에서 느낀 정감과 당시의 생활상을 소박하게 기록한 것으로, 관직생활, 술, 지족안분(知足安分)하는 낙천적인 생활태도를 읊은 것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백향산시집(白香山詩集)≫에서 격시라는 이름으로 분류된 작품은 모두 293수이며, 그의 나이 51세(장경 2년, 822)부터 71세(회창 2년, 842)까지 20년 사이에 쓰여진 것이다.
백거이 시의 특징
백거이의 시가 당대 그 누구보다 많은 독자층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시가 갖는 독특성 때문이며, 그것은 대체로 평이성, 풍자성, 사실성으로 귀납할 수 있다.
1) 평이성(平易性)
"백낙천은 시를 지을 때마다 한 사람의 노파도 그것을 이해하도록 하였다. '이해 못하겠습니까?'라고 물어보아 '이해하겠습니다.'라고 하면 그것을 기록하고, '이해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면 다시 그것을 쉽게 고쳤다."
(<甌北詩話>: 白樂天每作詩, 令一老嫗解之, 問曰解否? 曰解則錄之, 不解則復易之.)
여기에서 그가 얼마나 일반대중이 읽기 쉽도록 평이한 시어(詩語)를 사용하여 시를 지었는지 알 수 있다. 명대(明代) 호응린(胡應麟)은 ≪시수(詩藪)≫ 권6에서, "낙천의 시는 세상에서 이르기를 얕고 속되다고 하는데 이는 뜻과 말이 합치되었기 때문이다.(樂天詩, 世謂淺近, 以意與語合也.)"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얕고 속되다"고 한 말은 곧 평이하다는 뜻이며, "뜻과 말이 합치되었다"는 것은 그의 시어가 복잡하거나 함축적이지 않은 직설적인 언어라는 뜻이다. 이러한 직설적인 언어 구사가 가장 잘 나타난 시가 바로 풍유시와 <비파행>, <장한가> 등이다. 특히 그의 시는 장안(長安)에서 강서(江西) 3~4천리에 이르는 향교, 불사, 객사라든지 일반 서민, 승려, 과부, 처녀들의 입에까지 회자하였다. 절간의 벽에 그의 시가 쓰여지고 <장한가>를 외우는 기녀가 술좌석에서 돈을 더 요구할 수 있었던 것도 실은 그의 시가 평이한 언어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2) 풍자성(諷刺性)
뜻이 과격하고 말이 질박한 것이 백거이 풍유시의 특색이다. 뜻이 과격하다는 것은 그의 시가 노골적인 풍자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인데, 그는 이 점에 있어서 두보를 비평하고, 두보의 시 중에서도 "부귀한 집 대문에는 술과 고기 냄새 진동하는데, 길가에는 얼어죽은 시체가 나뒹군다.(朱門酒肉臭, 路有凍死骨)"는 것과 같은 사상만을 취하여 그의 풍유시를 써 나갔다. 이러한 특성은 그의 풍유시 172수 가운데 매우 뚜렷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그가 당시의 정치나 사회를 풍자한 것은 바로 그의 문학 주장의 실천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풍자성을 가진 그의 풍유시는 일반 서민의 입장을 대변하여 그들의 고통을 노래하였기 때문에 대중적인 사랑을 더욱 많이 받을 수 있었다.
3) 사실성(寫實性)
백거이의 시 3800여수는 모두 그가 일생동안 겪은 생활의 기록이며 당대의 사회상과 생활상을 반영한 한 폭의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자치통감(資治通鑑)·당기(唐紀)≫에서는, "헌종 원화 2년에 백거이는 악부 및 시 100여편을 지어 시사를 풍자하였다.(憲宗元和二年, 白居易作樂府及詩百餘篇, 規諷時事.)"라고 하였고, <여원구서>에서는, "문장은 시대에 부합되게 지어야 하고 시가는 시사에 부합되게 지어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시사를 풍자하고 시대나 시사에 부합되게 지어야 한다는 것 등은 바로 백거이 시의 사실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상생활과 시사를 이탈하지 않고 현실을 충실하게 노래한 그의 사실적 시가창작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자료: 병풍바위>
백거이와 도림선사
중국 당나라 때 시인인 백거이는 뛰어난 시작활동으로 당대 문인은 물론 온 백성의 사랑을 받았다.
백거이가 강주자사로 부임하던 때의 일이다.
유명한 시인을 맞게 된 강주지방 사람들은 매우 기뻐하며 부임해올 날짜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제일 먼저 강주에 사는 도림 선사를 찾아갔다.
백거이의 방문에 승려들과 절 안 사람들은 들뜬 표정들이었다.
얼굴이 붉어진 승려 한 명이 백거이의 방문 소식을 전하기 위해 선사에게 뛰어갔다.
마침 도림선사는 흙벽을 바르고 있었다.
백거이가 인사차 들렀다는 승려의 말을 듣고도 선사는 꿈쩍하지 않았다.
어느새 승려를 뒤따라온 백거이가 조심스럽게 허리를 구부려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도 선사는 흙벽 바르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이었다.
이윽고 선사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자네는 군자인가 아니면 소인인가?"
(자신이 영접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느냐는 물음이었다.)
백거이가 대답했다.
"군자가 되려고 노력합니다만..." 백거이는 말끝을 흐렸다.
그 때까지 흙벽 바르기를 멈추지 않던 선사가 흙판에 흙이 다 떨어졌다는 표시로 흙판을 두드렸다.
그러자 백거이는 얼른 두 손으로 흙을 떠서 흙판에 올려놓았다.
선사가 백거이의 더럽혀진 손을 잠시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 자네가 그 유명하다는 백거이란 말이지."
백거이가 "예" 하고 대답하자 선사는 들릴듯 말듯하게 말했다.
"겨우 흙이나 떠 주는 사람이구만."
선사의 말씀에 백거이는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좋은 글'에서>
백거이 작품
賦得古原草送別 (부득고원초송별)
離離原上草 이이원상초 언덕 위 우거진 풀들은
一歲一枯榮 일세일고영 해마다 시들고 다시 무성해진다네
野火燒不盡 야화소부진 들불을 놓아도 다 타지 않고
春風吹又生 춘풍취우생 봄바람 불어오면 다시 돋아난다네
遠芳侵古道 원방침고도 아득한 향기 옛길을 덮고
晴翠接荒城 청취접황성 옛 성터엔 푸른빛 감도는데
又送王孫去 우송왕손거 또 그대를 떠나보내고 나면
悽凄滿別情 처처만별정 이별의 정만 풀처럼 무성하리
야화소부진춘풍취우생(野火燒不盡春風吹又生)
'들불을 놓아도 다 타지 않고, 봄바람이 불면 다시 돋아난다'
들풀의 끈질긴 생명력을 통하여 자연의 영고성쇠를 노래한 시구(詩句).
【고사】
중국 당(唐)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지은 <부득고원초송별(賦得古原草送別)>의
한 구절이다. <부득고원초송별>은 <초(草)>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백거이는 15세 때 수도인 장안(長安)에 가서 당시 시인으로 명성을 날리던 고황(顧況)을
찾아갔는데, 고황은 어린 소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그의 이름 '거이(居易)'를 빗대어,
"장안의 쌀값이 비싸니 살아가기 어려울 것(長安米貴, 居住不易)"
이라며 비꼬았다. 그러나 백거이가 이 시를 보여주자,
"이런 재주가 있다면 살아가기가 쉬울 것(有才如此, 居亦容易)"
이라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야화(野火)는 들판의 마른 풀을 태우기 위하여 지르는 불을 말한다.
'야화소부진 춘풍취우생'은 들불을 놓아도 풀은 완전히 다 타 없어지지 않고
봄이 되면 다시 파릇파릇 돋아나는 것을 묘사한 구절로,
간결하면서도 깊은 함의(含意)를 지닌 명구(名句)로 꼽힌다.
이 구절에 대하여는 소인(小人)이나 사악(邪惡)함이 근절되지 않는 것을 비유한 것으로
해석하거나, 치세(治世)와 난세(亂世)가 회돌이처럼 되풀이되는 세상사를 비유한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글자료: 양지>
장한가 (長恨歌-기나긴 한의 노래)
漢皇重色思傾國 한황중색사경국 한나라 황제는 색을 즐겨 경국지색 찾았으나
御宇多年求不得 어우다년구부득 여러 해 동안 구했어도 얻지 못하였네
楊家有女初長成 양가유녀초장성양씨 가문에 갓 장성한 딸이 있었는데
養在深閨人未識 양재심규인미식 깊은 규방에서 자라 사람들은 알지 못했지만
天成麗質難自棄 천성려질난자기 타고난 미모는 그대로 묻힐 리 없어
一朝選在君王側 일조선재군왕측어느 날 갑자기 간택되어 군왕을 모시게 되었네
廻眸一笑百媚生 회모일소백미생 눈웃음 한 번에 백가지 애교가 피어나니
六宮粉黛無顔色 육궁분대무안색 육궁의 단장한 미인들의 안색이 무색해졌네
春寒賜浴華淸池 춘한사욕화청지 봄 추위에 천자는 화청 연못에 들기를 허락하여
溫泉水滑洗凝脂 온천수활세응지 온천의 부드러운 물로 윤기 있게 몸을 씻었네
侍兒扶起嬌無力 시아부기교무력 시녀들이 부축하여 일어나니 그 아름다움에 당할 힘이 없었네
始是新承恩澤時 시시신승은택시 이때부터 천자의 승은을 받게 되었네
雲빈花顔金步搖 운빈화안금보요 구름같은 머리칼, 꽃같은 얼굴, 흔들거리는 금장식
芙蓉帳暖度春宵 부용장난도춘소 부용꽃 수놓은 휘장 안은 따뜻하고 봄날은 깊어만 갔네
春宵苦短日高起 춘소고단일고기 봄밤은 짧아 천자는 해가 높이 뜬 뒤에 일어났고
從此君王不早朝 종차군왕불조조 이 때부터 천자는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네
承歡侍宴無閒暇 승환시연무한가 그녀는 천자 기분에 맞춰 시중 들기에 여념이 없어
春從春遊夜專夜 춘종춘유야전야 봄이면 춘정을 즐겨 온 밤을 지새니
後宮佳麗三千人 후궁가려삼천인 후궁에는 빼어난 미녀 3천 명이 있었지만
三千寵愛在一身 삼천총애재일신 그 3천명이 받을 총애가 그녀에게만 있었네
金屋粧成嬌侍夜 금옥장성교시야 금옥에서 화장한 뒤 황제의 밤 시중을 들었고
玉樓宴罷醉和春 옥루연파취화춘 옥루에서 잔치가 끝난 뒤에는 춘정에 취하였네
姉妹弟兄皆列土 자매제형개열토 그녀의 자매 형제는 봉토를 받았고
可憐光彩生門戶 가련광채생문호 가엾고 불쌍했는데 그들의 집에 광채가 나게 되었네
遂令天下父母心 수령천하부모심 마침내 천하의 부모들 마음은
不重生男重生女 부중생남중생녀 아들 낳기보다 딸 낳기를 중시하게 되었네
驪宮高處入靑雲 여궁고처입청운 여산의 여궁은 높이 솟아 구름에 닿았고
仙樂風飄處處聞 선락풍표처처문 신선의 풍악은 바람타고 여기 저기서 들려오네
緩歌慢舞凝絲竹 완가만무응사죽 부드러운 노래 하늘거리는 춤은 관현악기에 어우러지고
盡日君王看不足 진일군왕간부족 군왕은 종일토록 바라보건만 그래도 부족하다 하였네
漁陽鼙鼓動地來 어양비고동지래 어양에서 반란군 기병들 북소리가 지축 울리며 들려 오고
驚破霓裳羽衣曲 경파예상우의곡 연주되던 예상우의곡은 놀라 중단되었네
九重城闕煙塵生 구중성궐연진생 구중궁궐에 연기와 먼지가 피어 오르고
千乘萬騎西南行 천승만기서남행 수천만 기병들은 서남쪽으로 달아났다네
翠華搖搖行復止 취화요요행부지 황제의 깃발을 흔들며 가다 서다 하면서
西出都門百餘里 서출도문백여리 장안 서쪽 백여리에 이르렀다네
六軍不發無奈何 육군불발무내하 육군(황제근위대)이 출발하지 않으니 황제인들 어찌 하겠는가
宛轉蛾眉馬前死 완전아미마전사 양귀비는 고꾸라져 말 앞에서 살해되었네
花鈿委地無人收 화전위지무인수 그녀의 꽃비녀는 땅에 버려졌으나 거두는 사람도 없었네
翠翹金雀玉搔頭 취교금작옥소두 물총새 깃털, 공작모양 황금 머리장식, 옥비녀도 떨어졌다네
君王俺面救不得 군왕엄면구부득 천자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녀를 구하지 못하니
回看血淚相和流 회간혈루상화류 뒤로 돌아서서 피 눈물만 흘렸다네
黃埃散漫風蕭索 황애산만풍소삭 황색먼지 뿌옇고 바람은 쓸쓸하고 삭막한데
雲棧縈紆登劍閣 운잔영우등검각 구름까지 닿을 듯 높고 구불구불한 길로 검각산을 오르네
峨眉山下少人行 아미산하소인행 아미산 기슭에는 지나는 사람도 적고
旌旗無光日色薄 정기무광일색박 천자의 깃발도 빛이 없고 햇빛도 약하다네
蜀江水碧蜀山靑 촉강수벽촉산청 촉나라 강물은 파랗고 촉나라 산빛은 푸른데
聖主朝朝暮暮情 성주조조모모정 천자는 아침 저녁 그리운 정으로 가득하다네
行宮見月傷心色 행궁견월상심색 행궁에서 달을 보면 마음 상하고
夜雨聞鈴腸斷聲 야우문령장단성 밤비 속에 창자를 끊는 듯한 방울소리를 듣는다네
天旋地轉廻龍馭 천선지전회용어 천하 정세는 바뀌어 천자는 장안으로 어가를 돌리고
到此躊躇不能去 도차주저불능거 그곳에 이르자 머뭇거리며 떠나지 못했다네
馬嵬坡下泥土中 마외파하이토중 마외 고개 아래 진흙 속에
不見玉顔空死處 불견옥안공사처 옥같은 얼굴은 볼 수 없고 죽은 자리만 남아 있었다네
君臣相顧眞霑衣 군신상고진점의 천자도 신하도 서로 눈물로 옷을 적셨고
東望都門信馬歸 동망도문신마귀 동쪽 성문 향해 말이 가는대로 돌아왔다네
歸來池苑皆依舊 귀래지원개의구 돌아오니 연못도 동산도 옛날 그대로
太液芙蓉未央柳 태액부용미앙류 태액 연못 연꽃도 미앙궁 버드나무도 그대로였다네
芙茸如面柳如眉 부용여면류여미 연꽃은 그녀 얼굴같고 버들은 그녀 눈썹같으니
對此如何不淚垂 대차여하불루수 그것들을 대하니 어이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
春風桃李花開日 춘풍도리화개일 봄바람에 복숭아꽃 살구꽃 피는 날이나
秋雨梧桐葉落時 추우오동엽락시 가을비에 오동잎 떨어질 때
西宮南苑多秋草 서궁남원다추초 서궁이나 남원에는 가을 풀이 무성하고
落葉滿階紅不掃 낙엽만계홍불소 낙엽이 섬돌을 덮어도 단풍을 쓸어낼 사람이 없구나
梨園弟子白髮新 이원제자백발신 이원제자들도 백발이 성성하게 되었고
椒房阿監靑娥老 초방아감청아로 초방(양귀비 거처하던 궁)의 궁녀들 푸르던 눈썹이 늙었구나
夕展螢飛思悄然 석전형비사초연 저녁 궁전에 반딧불이 날아드니 심사는 더욱 쓸쓸하고
孤燈조盡未成眠 고등조진미성면 외로운 등잔 심지 다 타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다네
遲遲鐘鼓初長夜 지지종고초장야 시각을 알리는 종과 북소리가 들려오니 초저녁 밤은 길고
耿耿星河欲曙天 경경성하욕서천 날이 새는 하늘에 은하가 반짝이는구나
鴛鴦瓦冷霜華重 원앙와랭상화중 원앙 모양의 기와에는 차가운 서리꽃 겹겹이 쌓였는데
翡翠衾寒誰與共 비취금한수여공 비취 수놓은 이불은 싸늘하여 함께 잘 사람이 없구나
悠悠生死別經年 유유생사별경년 삶과 죽음의 세계는 멀어 오랜 세월이 흘러가고
魂魄不曾來入夢 혼백부증내입몽 혼백은 꿈에서조차 찾아오지 않는구나
臨공道士鴻都客 임공도사홍도객 임공에서 온 도사가 장안의 홍도문에서 머물고 있다는데
能以精誠致魂魄 능이정성치혼백 지극한 정성으로 죽은 자의 혼을 불러 낼수 있다 하네
爲感君王輾轉思 위감군왕전전사 그는 천자가 잠못 이루고 사모함에 감동하여
遂敎方士殷勤覓 수교방사전근멱 가르침에 따라 방사를 시켜 부지런히 혼이 있는 곳을 찾게 했다네
排雲馭氣奔如電 배운어기분여전 방사는 구름을 가르고 번개처럼 달려가
昇天入地求之遍 승천입지구지편 하늘에 오르고 땅속에 들어가 샅샅이 찾았다네
上窮碧落下黃泉 상궁벽락하황천 위로 하늘 끝 아래로 황천까지 찾았으나
兩處茫茫皆不見 양처망망개불견 어디나 망망할 뿐 혼을 찾을 수 없었다네
忽聞海上有仙山 홀문해상유선산 문득 들리는 말이 해상에 신선 사는 산이 있는데
山在虛無縹渺間 산재허무표묘간 그 산은 아무 것도 없는 먼 곳에 있다고 하는구나
樓閣玲瓏五雲起 누각영롱오운기 누각은 영롱하고 오색 구름 피어나는데
其中綽約多仙子 기중작약다선자 그 안에는 가냘픈 모습의 선녀가 여럿 살고 있다 하네
中有一人字太眞 중유일인자태진 그 중에 자를 태진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雪膚花貌參差是 설부화모참치시 눈같은 살결과 꽃같은 얼굴이 양귀비와 비슷하다 하네
金闕西廂叩玉경 금궐서상고옥경 선산 황금 궁전 서쪽 건물 옥문을 두드렸다네
轉敎小玉報雙成 전교소옥보쌍성 소옥(시녀)을 시켜서 쌍성(시녀)에게 알리게 했다네
聞道漢家天子使 문도한가천자사 한나라에서 먼길 찾아온 천자의 사자라는 말 듣고
九華帳裏夢魂驚 구화장리몽혼경 호화로운 휘장 안의 혼백이 꿈에서 깨어났다네
攬衣推枕起徘徊 남의추침기배회 옷을 잡고 베개를 밀치며 일어나 서성거리다가
珠箔銀鉤이리開 주박은구이리개 진주 발과 은 병풍을 연달아 열어 젖히고
雲빈半偏新睡覺 운빈반편신수각 구름머리 한쪽으로 기운 것이 방금 잠에서 깨어난 듯
花冠不整下堂來 화관부정하당래 머리 화관도 바로 잡지 못한 채 뜰로 내려왔다네
風吹仙袂飄요擧 풍취선몌표요거 바람이 불어 신선의 옷깃을 펄럭이게 하니
猶似霓裳羽衣舞 유사예상우의무 마치 예상우의 춤을 다시 보게 해주는 듯 하구나
玉容寂寞淚난干 옥용적막누난간 옥 같은 얼굴에 쓸쓸하게 눈물 떨어지니
梨花一枝春帶雨 이화일지춘대우 마치 배꽃 가지가 봄비를 맞는 듯 하구나
含情凝제謝君王 함정응제사군왕 정다운 눈길로 사자를 보며 군왕께 감사를 전하는데
一別音容兩渺茫 일별음용양묘망 "이별후 천자의 목소리와 모습이 모두 흐릿해졌사옵니다
昭陽殿裏恩愛絶 소양전리은애절 소양전에서 천자의 사랑을 받았으나 그것도 끊어졌고
蓬萊宮中日月長 봉래궁중일월장 선산 봉래궁에서 긴 세월을 보냈사옵니다
廻頭下望人환處 회두하망인환처 머리를 돌려 아래 인간세상을 굽어 보아도
不見長安見塵霧 불견장안견진무 장안은 보이지 않고 먼지와 안개만 자욱할 뿐
唯將舊物表深情 유장구물표심정 다만 천자가 주신 기념품으로 내 깊은 정을 표시하고
鈿合金釵寄將去 전합금차기장거 나전 상자와 금비녀를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釵留一股合一扇 차류일고합일선 금비녀와 나전 상자도 반씩 나누어 간직하렵니다
釵擘黃金合分鈿 차벽황금합분전 그리고 금비녀도 반으로 나누고 나전 상자도 둘로 나누었답니다
但敎心似金鈿堅 단교심사금전견 우리 마음 이 비녀와 나전처럼 굳게 지켜나간다면
天上人間會相見 천상인간회상견 언젠가 천상이든 인간 세상이든 만날 날이 있겠지요"
臨別殷勤重奇詞 임별은근중기사 헤어질 무렵 간곡하게 거듭 전할 말 부탁했는데
詞中有誓兩心知 사중유서양심지 그 중에는 두 사람만 아는 맹세의 말이 있었다네
七月七日長生殿 칠월칠일장생전 칠월칠석에 장생전에서
夜半無人私語時 야반무인사어시 아무도 없는 오밤중에 은밀히 속삭였던 말
在天願作比翼鳥 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 재지원위연리지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자고"
天長地久有時盡 천장지구유시진 천지 영원하다 해도 다할 때가 있겠지만
此恨綿綿無絶期 차한면면무절기 이 애닯은 사랑의 한 영원히 끊어지지 않으리라
이해와 감상
비익조(比翼鳥) : 비익조(比翼鳥)는 중국 숭오산(崇吾山)에 산다고 전해지는 새로 날개와 눈이 하나 뿐이어서 암수가 몸을 합쳐야만 날아갈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남녀간의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 많은 문학작품에서 이 비익조가 인용되었다.
연리지(連理枝) : 한 나무의 가지와 다른 나무의 가지가 서로 붙어서 나뭇결이 하나로 이어진 것.
장한가는 절세미녀 양귀비(楊貴妃)와 절대 권력을 휘둘렸던 현종(玄宗)의 비련(悲戀)에 관한 노래로서 4장으로 되어 있다.
제l장은, 권력의 정상에 있는 황제와 절세가인 양귀비의 만남과, 양귀비에게 쏟는 현종황제의 지극한 애정 등을 노래하였다.
제2장은,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몽진하는 길에, 양귀비를 죽게 한 뉘우침과 외로움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황제의 심정과 모습을 그렸다.
제3장은, 환도 후 양귀비의 생각만으로 밤을 지새는 황제를 묘사한다.
제4장에서는, 도사의 환술(幻術)로 양귀비의 영혼을 찾아, 미래에서의 사랑의 맹세를 확인하게 되었으나, 천상(天上)과 인계(人界)의 단절 때문에 살아 있는 한 되씹어야 할 뼈저린 한탄이 길게 여운을 끈다.
장한가의 배경
回眸一笑百媚生, 눈동자를 돌려 살며시 미소 지으면 끝없는 애교 발산하여,
六宮粉黛無顔色. 수많은 후궁들의 빼어난 아름다움 빛을 잃게 되었네.
後宮佳麗三千人 후궁에는 삼천 명의 미인 있으나
三千寵愛在一身 삼천 명에게 갈 사랑을 홀로 독차지하였네.
당 현종이 재위한 기간 중 전반기인 개원(開元) 연간에는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에 버금갈만한 치적을 세워 '명황(明皇)'으로 까지 칭해졌으나 후반기로 갈수록 그의 명성은 퇴색하여 당의 멸망을 재촉하는 단초를 제공한 황제가 되었다. 당의 쇠퇴를 전적으로 현종이 양귀비에게 빠져 정사를 그르친 것으로 책임을 돌릴 수는 없을지라도, 현종의 양귀비에 대한 미혹이 정치를 함에 있어 판단과 통찰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현종에게는 여러 가지 수식이 따라 다니는데, 그것들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현종은 당대 (唐代) 여러 황제 가운데 재위 기간이 가장 긴 황제였다. 그는 712년 황제의 자리에 올라 45년 동안 황제로 군림하였다. 현종은 또한 가장 장수한 황제였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그는 78세까지 장수하였다. 그리고 현종은 자신의 생일인 8월 5일을 경축일로 삼아 전국적으로 3일을 쉬도록 하였는데, 이 또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현종은 자녀를 가장 많이 둔 황제였다. 그에게는 30명의 아들과 29명의 딸 등 모두 59명의 자녀가 있었다.
당 현종의 제위가 더할 나위 없이 공고해질 즈음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비인 무혜비(武惠妃)가 세상을 떴다. 황제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오랫동안 애통해 하였다. 이 때 주위에서 현종에게 여러 여인을 추천하였지만 눈에 들어오는 자가 없었다. 얼마 후 한 여인이 현종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뜻밖에도 자신의 아들 수왕(壽王)의 비인 양옥환(楊玉環)이었다. 양옥환의 미모에 홀린 현종은 이것 저것 잴 여유가 없었다. 혜비가 죽은 지 1년도 되지 않아 현종은 자신의 비로 삼아 혜비가 받았던 예우로 똑같이 양귀비를 예우하는 동시에, 자신의 아들에게는 다시 다른 여인을 비로 간택해 주었는데, 이 때 현종은 이미 50대였으며 양귀비는 17살이었다.
양귀비의 미모는 백거이가 그의 시 <장한가>에서 묘사한 것처럼 현종을 홀리고도 남을 정도로 출중하였다.
현종은 양귀비와의 사랑에 밤이 짧은 것은 안타까워하며, 조정에 나가 정치를 하는 것을 게을리하기 시작하였다. 이 즈음 잠재해 있던 여러 문제점들과 혼란이 한꺼번에 폭발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안록산(安祿山)의 난이다. 755년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켜 낙양을 공격하여 점령하고는 이듬해는 당시 수도였던 장안마저 점령하자, 현종은 양귀비를 데리고 신하들과 촉(蜀) 땅으로 피난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때문에 현종은 반란군을 피해 도주한 첫 번째 황제라는 불명예 또한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다. 현종이 도주한 이튿날 행차가 마외(馬嵬)라는 지역에 다다랐을 때, 황태자 이형(李亨)은 여러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간신 양국충(楊國忠)을 처결하고, 아울러 현종에게 양귀비 또한 사형에 처하도록 압박하였다. 이미 권위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져 명목상 황제로 남아있던 현종은 피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면서 양귀비를 하얀 비단으로 목 졸라 황천길로 가도록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때 그녀의 나이 38 살이었다.
君王掩面救不得 황제는 차마 보지 못하고 얼굴 가리며 양귀비를 구하지 못하는데,
回看血淚相和流 뒤돌아보는 황제의 눈에는 피눈물 흘러내리네
현종은 양귀비를 이곳 마외에 매장한 후 촉 땅으로 서둘러 피난 갔다. 양귀비의 묘는 원래 흙으로 덮여있던 토총이었으나, 이 흙에서 향기가 나고 피부에 좋다는 소문이 나 많은 사람들이 몰래 흙을 파가는 바람에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 이에 다시 봉분을 벽돌로 쌓아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글자료: It's 美>
매탄옹(賣炭翁 - 숯파는 노인)
伐薪燒炭南山中 (벌신소탄남산중) 장작을 베어 숯을 태우는 남산에서
滿面塵灰煙火色 (만면진회연화색) 얼굴 가득 먼지와 재, 그을린 빛
兩鬢蒼蒼十指黑 (양빈창창십지흑) 양쪽 구렛나루는 허옇고, 열손가락은 시꺼멓다
買炭得錢何所營 (매탄득전하소영) 숯을 팔아 돈을 얻으면 어디에 쓰고자 하나
身上衣裳口中食 (신상의상구중식) 몸에 걸칠 옷과 입에 넣을 음식이오
可憐身上衣正單 (가련신상의정단) 가련한 몸이 걸친 건 옷 한벌 뿐
心憂炭賤顧天寒 (심우탄천고천한) 마음은 숯값이 떨어질까 걱정하여 날이 춥기만을 바란다
夜來城外一尺雪 (야래성외일척설) 간밤에 성 밖 일척의 눈이 내리고
曉駕炭車輾氷轍 (효가탄차전빙철) 새벽 숯을 담은 수레를 타고 삐걱거리며 얼음 자국을 남긴다
牛困人飢日已高 (우곤인기일이고) 소는 피곤하고 사람은 배고픈데 해는 벌써 높고
市南門外泥中歇 (이남문외이중헐) 시장 남문 밖 흙바닥 위에서 쉰다
翩翩兩騎來是誰 (편편양기내시수) 거들거리며 두마리 말을 타고 오는 이는 누군가?
黃衣使者白衫兒 (황의사자백삼아) 황색옷의 사자와 흰 삼베옷의 어린이
手把文書口稱敕 (수파문서구칭칙) 문서를 손에 들고 조서라고 칭하며
廻車叱牛牽向北 (회차질우견향북) 수레를 돌려 소를 몰아 북쪽을 향해 끌고간다
一車炭重千餘斤 (일차탄중천여근) 수레 한대 숯의 무게는 천근이 넘지만
宮使驅將惜不得 (궁사구장석부득) 궁궐의 사자가 끌고가는데 아쉬워한들 어찌하리오
半疋紅綃一丈綾 (반필홍초일장능) 반필의 붉은 명주실과 일장의 비단을
繫向牛頭充炭値 (계향우두충탄치) 소머리에 메어보내니 '숯값으로 충분하겠지'란다
이해와 감상
백거이(白居易)의 매탄옹(賣炭翁; 숯파는 노인)은 신악부(新樂府) 50수 중 32수로 숯파는 노인을 통해 궁중 조달 제도를 비판한 시다. 이 시를 보면 왜 사람들이 그를 풍유시인(諷誘詩人)이라고 칭하는지 간단히 이해할 수 있을만큼 그의 풍자 정신이 잘 나타난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선별,번역된 한시집을 보면, 백거이 부분에선 보통은 이 시가 빠지지 않고 나올 정도니, 우리나라에선 백거이 시 중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싶다.
당나라 시대에 궁중에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는 기관을 궁시(宮市)라고 불렀다. 지금으로 치면 조달청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중국에선 주로 이러한 기관을 환관이 담당하였는데, 물건을 구매하는 과정에서 부정부패가 성행하였다. 강제로 터무니없는 저가에 매수하거나 무상으로 몰수한 다음, 장부 상에는 마치 적정가나 고가에 산 것처럼 위장하여 정부 자금을 횡령하였다. 이런 방법으로 환관들은 부를 축적하였지만, 원래 이것은 일반 백성이 받아야할 대가인 것이다. 백성들이 궁핍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렇듯이 일부 계층이 지나치게 호사스러운 생활을 영유하려면 다른 계층에 대한 조직적인 착취가 필요한데, 궁시 제도의 폐단은 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케이스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성당 시대의 호화로움은 이러한 착취를 바탕으로 완성된 것이다.
이런 궁시 제도를 풍자적으로 비판한 것이 바로 이 시이다. 이 시의 중간 부분을 보면 黃衣使者白衫兒(황의사자백수아)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이 당시의 환관과 그의 수행원을 묘사하고 있다. 하루 하루 겨우 연명하는 노인의 숯을 황제의 명령을 핑계로 강제로 빼앗듯이 가져가고는 아주 적은 대가로 만족하라는 불공정 관행 때문에 당시 민중들은 얼마나 고생하였는가? 백거이는 이를 노골적으로 비판하기 보다는 '아쉬워 한들 어쩌겠냐', '숯값으로 충분하겠지'라는 구절을 통하여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백거이의 뛰어난 시작(詩作)기법이 엿보인다.
백거이의 시 중에서는 이렇듯 사회 풍자적인 시가 많은데, 이런 시는 주로 그가 젊었을 ? 작성하였다고 보면 된다. 처음 궁궐에 발을 들여놓았을때 그는 상당히 강경한 개혁적인 인사였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반대 세력의 표적이 되어 지방으로 좌천 당한 이후로는, 사회 비판적인 성향이 옅어지고, 다분히 자기 만족적이거나 안빈낙도를 즐기는 풍류(風流; 위의 풍유와는 기본적으로 다른 뜻이다)적인 시가 많아졌다. 이것은 그가 사회 자체에 환멸을 느낀 탓인 듯 하다. 보통 개혁에 아주 적극적이다가 크게 좌절하였을 때, 사회 도피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역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글: 2007.06.13 by seattleruler>
琵琶行(비파행 -비파의 노래)
潯 陽 江 頭 夜 送 客 (심양강두야송객) 심양강 나루에서 손님을 밤에 보내려니
楓 葉 荻 花 秋 瑟 瑟 (풍엽적화추슬슬) 단풍잎 갈대꽃에 가을바람 쓸쓸하다.
主 人 下 馬 客 在 船 (주인하마객재선) 주인은 말 내리고 손님은 배에 타고
擧 酒 欲 飮 無 管 絃 (거주욕음무관현) 술을 들어 마시려니 음악이 없구나.
醉 不 成 歡 慘 將 別 (취불성환참장별) 이별을 하려하니 취해도 즐거움 없고
別 時 茫 茫 江 浸 月 (별시망망강침월) 망망한 이별의 강에 달빛만 젖어 있네.
忽 聞 水 上 琵 琶 聲 (홀문수상비파성) 홀연히 물 위로 비파소리 들려오니
主 人 忘 歸 客 不 發 (주인망귀객불발) 주인도 손님도 자리를 뜨지 못하네.
尋 聲 暗 問 彈 者 誰 (심성암문탄자수) 소리 찾아 조용히 누구인지 물으니
琵 琶 聲 停 欲 語 遲 (비파성정욕어지) 비파소리 그치고 대답이 없구나.
移 船 相 近 邀 相 見 (이선상근요상견) 배를 옮겨 가까이가 자리를 청하니
添 酒 回 燈 重 開 宴 (첨주회등중개연) 술 따르고 등 밝혀 다시연회를 여네.
千 呼 萬 喚 始 出 來 (천호만환시출래) 부르고 또 청해 겨우 나타났는데
猶 抱 琵 琶 半 遮 面 (유포비파반차면) 비파 안고 얼굴을 반쯤 가렸네.
轉 軸 撥 絃 三 兩 聲 (전축발현삼량성) 꼭지를 틀고 현을 골라 두세 번 소리 내니
未 成 曲 調 先 有 情 (미성곡조선유정) 곡조도 이루기 전 정이 먼저 흐르네.
絃 絃 掩 抑 聲 聲 思 (현현엄억성성사) 줄 누르고 손끝으로 옮기니 소리 처량하고
似 訴 平 生 不 得 志 (사소평생불득지) 평생에 못 이룬 한 호소하듯 하네.
低 眉 信 手 續 續 彈 (저미신수속속탄) 눈 섶을 내리깔고 손에 맏겨 비파 타니
說 盡 心 中 無 限 事 (설진심중무한사) 마음속 숱한 사연 모두 털어 놓는듯 하네.
輕 攏 慢 撚 撥 復 挑 (경롱만연발복도) 가벼이 누르고 비벼 뜯고 다시 퉁기니
初 爲 霓 裳 後 六 么 (초위예상후륙요) 처음은 예상곡 뒤에는 육요구나.
大 絃 嘈 嘈 如 急 雨 (대현조조여급우) 큰 줄은 소란스런 소나기 같고
小 絃 切 切 如 私 語 (소현절절여사어) 작은 줄은 가냘픈 속삭임 같고,
嘈 嘈 切 切 錯 雜 彈 (조조절절착잡탄) 소란함과 가냘픔 섞어서 타니
大 珠 小 珠 落 玉 盤 (대주소주락옥반) 크고작은 구슬 옥 쟁반에 떨어지듯 하네.
間 關 鶯 語 花 底 滑 (간관앵어화저활) 때로는 꾀꼬리 소리 꽃가지 아래 흐르듯 하고
幽 咽 泉 流 氷 下 灘 (유인천류빙하탄) 샘물이 어름 밑을 흐르며 흐느끼는 듯 하고,
氷 泉 冷 澁 絃 凝 絶 (빙천랭삽현응절) 찬물이 얼어 붙듯 줄을 잠시 멈추니
凝 絶 不 通 聲 漸 歇 (응절불통성점헐) 멈추는 그대로 소리 또한 멎었는데
別 有 幽 愁 暗 恨 生 (별유유수암한생) 또다른 깊은 근심 남모르는 원한 일어
此 時 無 聲 勝 有 聲 (차시무성승유성) 소리 없음이 있음보다 애절하네.
銀 甁 乍 破 水 漿 迸 (은병사파수장병) 갑자기 은병 깨져 술이 쏟아져 나오듯
鐵 騎 突 出 刀 槍 鳴 (철기돌출도창명) 철기가 돌진하여 칼과 창이 부딪쳐 울 듯 하네.
曲 終 收 撥 當 心 畵 (곡종수발당심화) 곡이 끝나 비파 안고 한번 그으니
四 弦 一 聲 如 裂 帛 (사현일성여렬백) 네 현이 동시에 울리니 비단 찢어지듯 하여라
東 船 西 舫 悄 無 言 (동선서방초무언) 동쪽배 서쪽배의 손님들 초연하여 말이 없고
唯 見 江 心 秋 月 白 (유견강심추월백) 오직 강 가운데의 가을 달 밝은 것만 바라보네.
沈 吟 放 撥 揷 弦 中 (심음방발삽현중) 침착히 읊으고 발을 거두어 악기 줄에 꼽으니
整 頓 衣 裳 起 斂 容 (정돈의상기렴용) 옷을 정돈하고 일어나 얼굴을 가다듬는다.
自 言 本 是 京 城 女 (자언본시경성녀) 스스로 말하기를, 본래 서울 여자인데
家 在 蝦 蟆 陵 下 住 (가재하마릉하주) 하마릉 아래의 집에 살았다 하네.
十 三 學 得 琵 琶 成 (십삼학득비파성) 열세살에 비파를 배워고
名 屬 敎 坊 第 一 部 (명속교방제일부) 유명한 교방의 제 일부에 속했었다네.
曲 罷 曾 敎 善 才 服 (곡파증교선재복) 한 곡조 타고 나면 일류 악사들도 탄복하고
粧 成 每 被 秋 娘 妬 (장성매피추낭투) 화장하면 번번히 미인들의 질투를 받았다네.
五 陵 年 少 爭 纏 頭 (오릉년소쟁전두) 오릉의 젊은이들 머리얽히어 다투고
一 曲 紅 綃 不 知 數 (일곡홍초불지수) 한 곡에 붉은 비단 수없이 받았다네.
鈿 頭 銀 篦 擊 節 碎 (전두은비격절쇄) 자개 박은 은비녀머리 박자 맞추다 깨뜨리고
血 色 羅 裙 飜 酒 汚 (혈색라군번주오) 붉은 비단치마 술로 얼룩졌었다 하네.
今 年 歡 笑 復 明 年 (금년환소부명년) 웃고 즐기며 한 해 한 해 보내느라
秋 月 春 風 等 閑 度 (추월춘풍등한도) 세월 가는 줄을 모르고 지냈는데,
弟 走 從 軍 阿 姨 死 (제주종군아이사) 동생은 군대 가고 양어머니마저 죽고
暮 去 朝 來 顔 色 故 (모거조래안색고) 어느덧 나이 들어 얼굴빛이 변하니
門 前 冷 落 車 馬 稀 (문전랭락차마희) 문 앞은 쓸쓸하고 찾는 손도 드물어
老 大 嫁 作 商 人 婦 (로대가작상인부) 늙어서 어쩔 수 없이 상인의 아내 되니
商 人 重 利 輕 別 離 (상인중리경별리) 상인은 이익보다 이별을 가벼이 여겨
前 月 浮 梁 買 茶 去 (전월부량매다거) 지난달 부량으로 차를 사러 갔다 하네
去 來 江 口 守 空 船 (거래강구수공선) 강어귀에 왔다 갔다 빈 배만 지키자니
繞 船 月 明 江 水 寒 (요선월명강수한) 차가운 강의 배를 비추는 달만 밝구나
夜 深 忽 夢 少 年 事 (야심홀몽소년사) 밤이 깊어 홀연 어린시절 꿈속에 젖으면
夢 啼 粧 淚 紅 欄 干 (몽제장루홍난간) 꿈도 울어 난간을 붉은눈물로 화장시킨다네.
我 聞 琵 琶 已 嘆 息 (아문비파이탄식) 비파 소리 듣고 이미 탄식 했던 나는
又 聞 此 語 重 喞 喞 (우문차어중즐즐) 여인의 말 듣고 또한번 한숨이 나네.
同 是 天 涯 淪 落 人 (동시천애륜락인) 우리는 다같은 천애의 물가에 떨어진 사람들
相 逢 何 必 曾 相 識 (상봉하필증상식) 만남이 어찌 예전에 알던 사이만의 일이랴.
我 從 去 年 辭 帝 京 (아종거년사제경) 나는 지난 해에 서울(장안)을 떠나
謫 居 臥 病 潯 陽 城 (적거와병심양성) 심양성에 귀양와 병들어 누웠다네
潯 陽 地 僻 無 音 樂 (심양지벽무음악) 심양 땅은 외지고 음악도 없어
終 歲 不 聞 絲 竹 聲 (종세불문사죽성) 한해가 다가도록 악기소리 못 듣고
住 近 盆 江 地 低 濕 (주근분강지저습) 분강 가까이 살아 땅이 낮고 또 습해
黃 蘆 苦 竹 繞 宅 生 (황로고죽요댁생) 갈대와 대숲만 집을 둘러 무성 타네
其 間 旦 暮 聞 何 物 (기간단모문하물) 그 간 아침저녁 들은 소리라고는
杜 鵑 啼 血 猿 哀 鳴 (두견제혈원애명) 피맺힌 두견새와 원숭이의 슬픈 소리
春 江 花 朝 秋 月 夜 (춘강화조추월야) 봄 강의 아침 꽃과 가을 밤 달빛 아래
往 往 取 酒 還 獨 傾 (왕왕취주환독경) 가끔 술을 얻어 홀로 잔을 기울이고
豈 無 山 歌 與 村 笛 (기무산가여촌적) 어찌 산 노래와 초동의 피리 없으랴 만
嘔 啞 嘲 折 難 爲 聽 (구아조절난위청) 조잡하고 시끄러워 들어주기 어렵다네
今 夜 聞 君 琵 琶 聲 (금야문군비파성) 오늘밤 그대의 비파 소리 들으니
如 聽 仙 樂 耳 暫 明 (여청선악이잠명) 신선 음악 들은 듯 귀 잠시 맑았네.
莫 辭 更 坐 彈 一 曲 (막사경좌탄일곡) 사양 말고 다시 앉아 한 곡 들려주오
爲 君 飜 作 琵 琶 行 (위군번작비파행) 내 그대 위해 비파행을 지으리니
感 我 此 言 良 久 立 (감아차언량구립) 나의 말에 한 동안 서 있는듯 하더니
却 坐 促 絃 絃 轉 急 (각좌촉현현전급) 물러앉아 줄 울리니 곡조는 점점 급해져
凄 凄 不 似 向 前 聲 (처처불사향전성) 슬프기 그지 없어 앞의 곡과 다르니
滿 座 重 聞 皆 掩 泣 (만좌중문개엄읍) 듣는 모든 사람 소리 죽여 흐느끼네
座 中 泣 下 誰 最 多 (좌중읍하수최다) 그 중 누가 눈물을 가장 많이 흘렸는가
江 州 司 馬 靑 衫 濕 (강주사마청삼습) 강주사마의 푸른 적삼 흠뻑 젖어 있구나.
[작품 해제]
비파행 [琵琶行]은 중국 중당(中唐)의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시다. 816년 작. ‘비파인(琵琶引)’이라고도 한다.
당시 백거이는 신악부(新樂府)를 비롯한 일련의 사회비판의 시 때문에 중앙에서 쫓겨나, 천애(天涯:하늘 끝)라고 하던 주장 [江]에 좌천되어 있었다. 그 때는 그의 인생과 문학의 위기이기도 했는데, 어느 가을 날 저녁 우연히 들려오는 비파 소리에 느낀 바 있어 자신의 내면을 대상으로 단숨에 이 시를 지어냈다.
제1장에서는 비파의 음색에 매혹되어 끊임없이 떠오르는 환상을 “間關鶯語花底滑, 幽咽泉流氷下難”과 같이, 때로는 화사하게 때로는 울적하게 펼쳐 나간다. 그것은 바로 음악을 언어로 옮기는 독창적인 형상이 되기도 한다.
제2장에서는 한때 화려한 서울(장안)에서 미모와 슬기로 뭇사람의 이목을 끌었던 몸이 지금은 상인의 아내가 되어, 강상(江上)의 배에서 외로이 남편을 기다린다는, 비파를 탄주하는 여인의 술회에 문화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변경의 땅에서 잿빛의 나날을 보내는 자신의 처지가 생각되어 누를 길 없는 한탄을 슬픈 억양으로 노래하였다.
이 시는 칠언(七言)의 유려한 울림을 거침없이 88행에 실었으며, 문자로 음악을 시각화(視覺化)하면서, 변전하는 운명에의 통곡을 표상하고 인간의 비애를 빼어나게 결정시켰다. 그후에 이 시는 음악을 문자로 정착시키는 수법의 지침이 되었고, 또 음악 연주자와 시인의 인간관계적 구성을 거쳐 소설과 희곡에 오래도록 제재(題材)를 제공하였다. 서유럽에서는 장한가(長恨歌) Everlasting Remorse)》에 대응하는 ‘류트송(Lute Song)’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백과사전>
속좌우명(續座右銘)
勿慕富與貴 물모부여귀
부귀를 바라지 말고
勿憂賤與貧 물우천여빈
빈천을 근심하지 말라
自問道何如 자문도하여
도리가 어떠한가를 스스로 물어봐야지
貴賤安足云 귀천안족운
어찌 족히 귀천만을 말하는가
聞毁勿戚戚 문훼물척척
비방을 들어도 걱정말고
聞譽勿欣欣 문예물흔흔
칭찬을 들어도 기뻐하지 말라
自顧行何如 자고행하여
행실이 어떠한가를 스스로 돌아봐야지
毁譽安足論 훼예안족론
어찌 족히 훼예만을 논하는가
無以意傲物 무이의오물
내 생각으로 다른 사물에 오만하지 말고
以遠辱于人 이원욕우인
남으로부터 욕됨을 당함을 멀리하라
無以色求事 무이색구사
아부하는 얼굴로 일을 하지 말고
以自重其身 이자중기신
자신의 몸을 자중하여라
游與邪分歧 유여사분기
노닐 때는 사악함과 떨어지고
居與正爲隣 거여정위린
평소 살아감에는 정직함과 이웃하라
於中有取捨 어중유취사
중용에서 취사선택하고
此外無疏親 차외무소친
이것 외에는 친하고 소원함을 없애라
修外以及內 수외이급내
밖을 닦아서 내면에 미치게 하고
靜養和與眞 정양화여진
온화함과 진실됨을 조용히 길러라
養內不遺外 양내불유외
내면을 기름에 외면을 버리지 말고
動率義與仁 동솔의여인
의리와 사랑으로 행동하라
千里始足下 천리시족하
천리길도 첫걸음에서 시작하며
高山起微塵 고산기미진
높은 산도 미세한 티끌에서 높아진다
吾道亦如此 오도역여차
나의 도리도 또한 이와 같아서
行之貴日新 행지귀일신
실행하여 날마다 새롭게 됨을 귀하게 여긴다
不敢規他人 불감규타인
감히 남을 규제하지 못하여
聊自書諸紳 료자서제신
애오라지 스스로 여러 옷띠에 적어두고서
終身且自勖 종신차자욱
죽을 때까지 장차 스스로 힘써서
身沒貽後昆 신몰이후곤
자신이 죽은 뒤에는 후손까지 끼친다
後昆苟反是 후곤구반시
후손 중에서 진시로 이를 어기면
非我之子孫 비아지자손
결코 나의 자손이 아니리라
양죽기(養竹記)
竹似賢何哉(죽사현하재) : 대나무는 현명한 사람과 비슷한데, 왜 그런가?
竹本固(죽본고) : 대나무 뿌리는 단단하여,
固以樹德(고이수덕) : 단단함으로써 덕을 세우고 있다.
君子見其本(군자견기본) : 군자는 그 뿌리를 보면
則思善建不拔者(칙사선건불발자) : 곧 뽑히지 않는 훌륭한 덕을 세울 것을 생각하게 된다.
竹性直(죽성직) : 대나무의 성질은 곧아서,
直以立身(직이립신) : 곧음으로써 자신이 몸을 서게한다.
君子見其性(군자견기성) : 군자는 그 성질을 보면
則思中立不倚者(칙사중립불의자) : 곧 어느 편에도 의지 하지 않는 마음이 서게 할 것을 생각하게 된다.
竹心空(죽심공) : 대나무 속은 비어서,
空以體道(공이체도) : 비어있음으로써 도를 체득하고 있다.
君子見其心(군자견기심) : 군자는 그 빈 속을 보면
則思應用虛受者(칙사응용허수자) : 곧 자기의 마음을 비우고 남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응용할 것을 생각하게 된다.
竹節貞(죽절정) : 대나무 마디는 곧아서,
貞以立志(정이립지) : 곧음으로써 뜻을 세우고 있다.
君子見其節(군자견기절) : 군자는 그 마디를 보면
則思砥礪名行(칙사지려명행) : 곧 자기 이름과 행실을 갈고 닦아서
夷險一致者(이험일치자) : 순경에서나 험경에서나 한결 같을 것을 생각하게 된다.
夫如是故(부여시고) : 이러하기 때문에
君子人(군자인) : 군자들이
多樹之(다수지) : 이것을 많이 심어
爲庭實焉(위정실언) : 정원수로 삼고 있는 것이다.
貞元十九年春(정원십구년춘) : 정원 19년 봄에
居易以拔萃選及第(거역이발췌선급제) : 발췌과에 급제하여
授校書郞(수교서랑) : 교서랑 벼슬이 제수되었다.
始於長安(시어장안) : 처음 장안에 와서
求假居處(구가거처) : 빌리어 살 곳을 구하다가
得常樂里故關相國私第之東亭고관상국사제지동정(득상락리) : 상락리의 작고하신 관국공 사저의 동쪽 정자에
而處之(이처지) : 거처하게 되었다.
明日(명일) : 다음 날
屨及于亭之東南隅(구급우정지동남우) : 정자의 동남쪽 모퉁이로 산책을 나갔다가
見叢竹於斯(견총죽어사) : 거기에 대나무 숲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枝葉殄瘁(지엽진췌) : 가지와 잎새가 말라 죽어
無聲無色(무성무색) : 볼품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詢乎關氏之老(순호관씨지노) : 관상국 댁의 늙은 하인에게 물어보니
則曰(칙왈) : 대답하기를,
此相國之手植者(칙왈차상국지수식자) : “이것들은 관상국께서 손수 심었던 것입니다.
自相國捐館(자상국연관) : 관상국께서 집을 내어놓아
他人假居(타인가거) : 다른 사람이 빌려 살게 되었는데,
繇是(요시) : 이 때부터
筐篚者斬焉(광비자참언) : 광주리를 만드는 자들이 베어가기도 하고
篲箒者刈焉(수추자예언) : 빗자루를 만드는 자들이 잘라가기도 하여,
刑餘之材(형여지재) : 형벌을 받듯 잘리우고 난 나머지 대나무들에는
長無尋焉(장무심언) : 한발 길이로 자란 것도 없고
數無百焉(수무백언) : 그 수도 백이 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又有凡草木(우유범초목) : 또 뭇 풀과 나무들이
雜生其中(잡생기중) : 그 속에 섞여 나서
苯䔿薈蔚(분준회울) : 무성히 잡생하게 되어
有無竹之心焉(유무죽지심언) : 대나무는 없어진 듯한 마음까지 갖게 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居易惜其嘗經長者之手(거역석기상경장자지수) : 나는 이것들이 일찍이 훌륭한 분의 손을 거쳤으나
而見賤俗人之目(이견천속인지목) : 천하고 속된 사람들의 눈에 띄어
翦棄若是(전기약시) : 이처럼 잘려지고 버려지게 되었으나
本性猶存(본성유존) : 그 본성만은 그대로 보존되고 있음이 애석하였다.
乃刪翳薈(내산예회) : 이에 무성한 초목은 잘라내고
除糞壤(제분양) : 더러운 흙은 긁어내고
疏其間(소기간) : 대나무 사이를 티워주고
封其下(봉기하) : 그 아래 흙을 북돋아 주었는데,
不終日而畢(불종일이필) : 하루가 다가기 전에 일을 끝내었다
於是日出(어시일출) : 이렇게 하여 해가 뜨면
有淸陰(유청음) : 맑은 그늘이 생기고
風來有淸聲(풍래유청성) : 바람이 불어오면 맑은 소리가 들리며,
依依然欣欣然(의의연흔흔연) : 휘청휘청 기쁜 듯 하여,
若有情於感遇也(약유정어감우야) : 마치 감정이 있어 은덕에 감사하고 있는 듯 하였다.
嗟乎(차호) : 아아!
竹植物也(죽식물야) : 대나무는 식물이다.
於人何有哉(어인하유재) : 사람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以其有似於賢(이기유사어현) : 대나무가 현명한 사람과 비슷하다고 해서
而人猶愛惜之(이인유애석지) : 사람들은 그것을 애석하게 여겨
封植之(봉식지) : 북돋아 심어주었으니
況其眞賢者乎(황기진현자호) : 하물며 진정 현명한 사람에 대해서야 어떠하겠는가?
然則竹之於草木(연칙죽지어초목) : 그러니 대나무를 보통 풀과 나무에 비긴다면
猶賢之於衆庶(유현지어중서) : 마치 현명한 사람과 보통 사람들을 견주는 것이나 같다.
嗚呼(오호) : 아아!
竹不能自異(죽불능자이) : 대나무는 스스로 기이함을 나타낼 수가 없는데도
惟人異之(유인이지) : 오직 사람들이 그것을 기이하게 대해주고 있다.
賢不能自異(현불능자이) : 현명한 사람도 스스로 기이함을 나타낼 수는 없는 것이고
惟用賢者異之(유용현자이지) : 오직 현명한 사람을 등용해야할 사람이 그를 기이하게 해주어야 한다.
故作養竹記(고작양죽기) : 그러므로 <양죽기>를 지어
書于亭之壁(서우정지벽) : 정자의 벽에 써 놓아
以貽其後之居斯者(이이기후지거사자) : 뒤에 여기에 살게 될 사람들에게 남겨주고,
亦欲以聞於今之用賢者云(역욕이문어금지용현자운)
: 또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 현명한 사람을 등용해야 할 사람들에게도 이 뜻이 알려지도록 하려는 것이다.
苦熱(고열)
人人避暑走如狂 (인인피서주여광).....사람들은 미친 듯 피서를 떠나지만
獨有禪師不房出 (독유선사불방출).....스님만은 방 안에서 두문불출하네
可是禪房無熱到 (가시선방무열도).....선방에는 더위도 얼씬거리지 못할까
但能心靜卽身冷 (단능심정즉신냉) ....마음이 고요하니 몸도 시원할 테지
感 興 (감 흥)
吉凶禍福有來由 [길흉화복유래유] 길흉화복에는 이유가 있으리니
但要深知不要憂 [단요심지불요우] 원인 깊이 살피되 두려워 마라
只見火光燒潤屋 [지견화광소윤옥] 불길이 젖은 집을 태움은 보았으나
不聞風浪覆虛舟 [불문풍랑복허주] 풍랑이 빈배를 뒤집음은 못 들었네
名爲公器無多取 [명위공기무다취] 명예는 모두의 것 많이 가지려 말고
利是身災合少求 [이시신재합소구] 이득은 몸의 재난 적당히 탐하여라
雖異匏瓜難不食 [수이포과난불식] 표주박과 달라서 안 먹을 수 없지만
大都食足早宜休 [대도식족조의휴] 배부름이 느껴지면 먹기를 그쳐라
太行路(태행로)
太行之路能최車(태행지로능최거) 태행은 길이 험해 수레를 부순다지만
若比人心能坦途(약비인심능탄도) 그대 마음에 비하면 평탄하다네
巫峽之水能覆舟(무협지수능복주) 무협은 물결이 심해 배를 뒤엎어지만
若比人心是安流(약비인심시안류) 그대 마음에 비하면 순탄하다네
人心好惡苦不常(인심호악고불상) 변덕스런 사람 마음 좋았다 나빴다
好生毛羽惡生瘡(호생모우악생창) 좋으면 감싸주고 싫으면 상처주네
與君結髮未五載(여군결발미오재) 그대와 결혼한 지 오 년도 못되어
豈期牛女爲參商(기기우녀위삼상) 정 깊던 우리 둘 멀어질줄 몰랐네
古稱色衰相棄背(고칭색쇠상기배) 옛부터 늙어지면 서로가 등진다고
當時美人猶怨悔(당시미인유원회) 옛 미인들도 원망하고 후회했지만
何況如今鸞鏡中(하황여금난경중) 어찌된 일인지 거울속에 비친 얼굴
妾顔未改君心改(첩안미개군심개) 늙지도 않았는데 그대 마음 변했네
爲君薰衣裳 (위군훈의상) 그대 위해 향훈을 옷에 뿌려도
君聞蘭麝不馨香(군문란사불형향) 그대는 난사의 향내 초차 모르고
爲君盛容飾 (위군성용식) 그대 위해 화장하고 치장을 해도
君看金翠無顔色(군간금취무안색) 그대는 보고도 표정이 없네
行路難 (행로난) 인생 길은 험난하여
難重陳 (난중진) 그 어려움 말도 못해
人生莫作婦人身(인생막작부인신) 세상에 나서 여자 몸 되지마라
百年苦樂由他人(백년고락유타인) 백년의 고락이 남에게 달렸다네
行路難 (행로난) 인생 길 험난하기가
難於山 (난어산) 산보다 험난하네
險於水 (험어수) 물보다 험난하네
不獨人間夫與妻(부독인간부여처) 오직 부부간만 그런 것이 아니니
近代君臣亦如此(근대군신역여차) 요즈음 군신간도 또한 같다네
君不見 (군불견)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左納言右納史 (좌납언우납사) 임금의 좌우 측근들을
朝承恩暮賜死 (조승은모사사) 아침에 은총 받고 저녁에 죽음 받네
行路難 (행로난) 우리 인생 길이 험난한 것은
不在水 (부재수) 물길에 있지 않고
不在山 (부재산) 산길에 있지 않고
只在人情反覆間(지재인정반복간) 오직 변하는 사람 마음 안에 있네
晩年의 백거이 모습
백거이(白居易-백낙천)
(병)Bo Juyi (웨)Po Chü-i.
772~846.
중국 중당시대(中唐時代:766~826)의 시인.
백거이/ 작자 미상의 초상화
자는 낙천(樂天),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 시호는 문(文). 허난 성[河南省] 신정 현[新鄭縣] 사람이다.
중당시대에는 과거제도가 효과를 거두어 그 시험에 통과한 진사 출신의 신관료집단이 진출하여 구문벌을 압도했는데, 백거이가 이 시기에 태어난 것은 그로서는 행운이었다. 백거이는 800년 29세 때 최연소로 진사에 급제했다. 이어서 서판발췌과(書判拔萃科)·재식겸무명어체용과(才識兼茂明於體用科)에 연속 합격했다. 그 재능을 인정받아 한림학사(翰林學士)·좌습유(左拾遺) 등의 좋은 직위에 발탁되었다. 〈신악부 新樂府〉·〈진중음 秦中吟〉 같은 풍유시와 〈한림제고 翰林制誥〉처럼 이상에 불타 정열을 쏟은 작품을 창작한 것도 이때이다. 808년 37세 되던 해에 부인 양씨(楊氏)와 결혼했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편 시 〈장한가 長恨歌〉에는 부인에 대한 작자의 사랑이 잘 반영되어 있다.
811년 모친상을 지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던 그는 814년 다시 장안(長安)으로 돌아왔으나, 태자좌찬선대부(太子左贊善大夫)라는 한직밖에 얻지 못했다. 게다가 그 이듬해에 발생한 재상 무원형(武元衡) 암살사건에 관하여 직언을 하다가 조정의 분노를 사 강주사마(江州司馬)로 좌천되었다. 이 사건은 백거이가 관계에 입문한 이래 처음 겪은 좌절이었으며, 또한 그의 시심(詩心)을 '한적'·'감상'(感傷)으로 향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820년 헌종(憲宗)이 죽고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백거이는 낭중(郎中)이 되어 중앙으로 복귀했고, 이어 중서사인(中書舍人)의 직책에 올라 조칙(詔勅) 제작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이같은 천자의 배려에 감격하여 국가의 이념을 천명하는 데 진력했다. 822년 이후 항저우자사[杭州刺史]·쑤저우자사[蘇州刺史]를 역임했다. 뤄양[洛陽]으로 돌아온 뒤에는 비서감(秘書監)·형부시랑(刑部侍郞)·하남윤(河南尹) 등의 고위직과 태자빈객분사(太子賓客分司)·태자소부분사(太子少傅分司)와 같은 경로직(敬老職)을 거쳤으며, 842년 형부상서(刑部尙書)를 끝으로 관직에서 은퇴했다. 한림학사 시절의 동료 5명은 모두 재상이 되었으나 백거이는 스스로 '어옹'(漁翁)이라 칭하며 만족해 했다. 이같은 성실하고 신중한 태도로 인해 그는 정계의 격심한 당쟁에 휘말린 적이 없었다.
백거이는 문학 창작을 삶의 보람으로 여겼다. 그가 지은 작품의 수는 대략 3,840편이라고 하는데, 문학 작가와 작품의 수가 크게 증가한 중당시대라 하더라도 이같이 많은 작품을 창작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구나 그의 작품은 형식이 다양하여 고체시(古體詩)·금체시(今體詩:율시)·악부(樂府)·가행(歌行)·부(賦)의 시가에서부터, 지명(誌銘)·제문(祭文)·찬(贊)·기(記)·게(偈)·서(序)·제고(制誥)·조칙·주장(奏狀)·책(策)·판(判)·서간(書簡)의 산문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학형식을 망라했다. 또한 그는 훌륭한 친구를 많이 사귀었는데, 친구들과 서로 주고 받은 시문에는 친애의 정이 물씬 배어 있다. 특히 원진(元稹) 및 유우석(劉禹錫)과의 사이에 오간 글을 모은 〈원백창화집 元白唱和集〉과 〈유백창화집 劉白唱和集〉은 중당시대의 문단을 화려하게 장식한 우정의 결실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여러 작품 가운데에는 정치이념을 주장한 것도 있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도 있는데, 모두 평담한 언어로 알기 쉽게 표현되었으며, 시에 봉급의 액수까지 언급하는 등 매우 당당했다. 때문에 평이하고 속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비상한 노력과 식견에 의해서 달성된 것이었다. 그는 1편의 시가 완성될 때마다 노파에게 읽어주고 어려워하는 곳을 찾아 고치기까지 할 정도로 퇴고(推敲)를 열심히 했다. 백거이가 자신의 시문에 일상어를 유효적절하게 구사한 것도 그의 표현을 간명하게 한 큰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가 일상어를 사용한 것은 구어문학(口語文學)을 추구했기 때문이 아니다. 문언(文言)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구어를 자신의 언어 속에서 활용하려 했을 따름이었다. 또한 그는 어휘를 매우 신중하게 선택했다. 고금문학(古今文學)에 나타난 어휘를 천지(天地)·산천(山川)·인사(人事)·조수(鳥獸)·초목에 이르기까지 1,870개 부문으로 분류하여 〈백씨육첩 白氏六帖〉 30권을 펴냈다. 이 책을 통해 그가 어휘를 선택하고 그 의미를 확인하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이백(李白)·두보(杜甫)·한유(韓愈) 등 백거이와 이름을 나란히 하는 시인의 작품에는 송대 이래 많은 주석서가 있는 데 반해, 〈백씨문집 白氏文集〉에는 그러한 주석서가 없는 것 또한 특기할 만하다. 종래의 주석서는 난해한 말에 관한 출전을 찾아내어 설명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나, 백거이의 작품에는 이러한 주석서가 필요없었던 것이다.
백거이는 문학을 2가지의 차원에서 이해했다. 그는 초기에 왕자(王者)의 정치이념은 문학에 의해서 표현되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위정자를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은 이상에 불타던 젊은시절의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신악부서 新樂府序〉에서 "글은 임금·신하·백성·만물을 위해 짓는 것이지 글을 위해 짓는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본래 천하의 정치에 책임을 져야 하고, 그 작품은 백성의 뜻을 군주에게 전달함과 동시에 정치의 옳고 그름을 풍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시경 詩經〉이야말로 이같은 문학의 본질을 잘 나타낸 작품이며, 후세 특히 육조(六朝) 이후의 문학은 기교만을 중시한 나머지 본래의 이념을 상실했다고 비판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809년에 완성된 통렬한 풍유시 〈신악부〉 50편을 비롯하여 〈백씨문집〉에 수록된 100분야에 대한 '판'(判)과 75편의 '책'(策), 200편의 〈한림제고〉, 233편의 〈중서제고 中書制誥〉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백거이가 지은 '조'(詔)·'칙'(勅)·'제'(制)·'고'(誥) 등은 한림학사들에게 〈육전 六典〉보다도 더 존중받았다. 〈육전〉은 칙명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당대 관계에서 최고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글을 짓는 궁극적인 목적은 천자 대신 천자의 세계관과 이념을 그에 걸맞는 전아(典雅)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이었고, 조·칙·제·고 등은 그 주요한 서술형식이었다. 칙명을 받아 그러한 글을 짓기 위해서는 정확한 식견과 웅장한 필치를 지녀야만 했다. 뛰어난 작가는 '대수필'(大手筆)이라 하여 커다란 영예를 부여받았는데, 백거이는 그중 한 사람이었다.
백거이는 문학으로써 정치이념을 표현하고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여 실제 행동에 옮기도록 하는 것을 문학활동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815년 강주사마로의 좌천과 목종의 죽음은 그에게 큰 좌절을 안겨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정치 문학으로부터 탈피하여 인생의 문학을 추구하게 되었다. 장경(長慶) 4년(824) 목종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친구 원진에 의해 〈백씨장경집 白氏長慶集〉 50권이 편찬되었다. 당시 백거이의 나이는 53세였으며 '장경'은 목종의 죽음과 동시에 새로이 바뀐 연호였다. 따라서 〈백씨장경집〉은 죽은 천자의 후한 대접을 그리워함과 동시에 자신의 인생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835년 백거이는 60권본의 〈백씨문집〉을 강주 둥린 사[東林寺]에 봉납했고, 이듬해 65권본을 뤄양의 성선사(聖善寺)에, 3년 후 67권본을 쑤저우의 남선사(南禪寺)에 봉납했다. 842년 이전의 50권 이외에 '후집'(後集) 20권을 정리하고 이어서 845년 5권의 '속후집'(續後集)을 편찬함으로써 합계 75권의 '대집'(大集)을 완성했다. 846년 8월, 75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다.
<백과사전>
백거이 문학관
이백(李白: 701~762)이 죽은 지 10년, 원결(元結)이 죽은 바로 그해에 태어난 백거이는 어릴 때부터 문학혁신의 기풍과 곤궁한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 후 그는 관계에 진출하여 정치의 문란과 관리들의 부패, 과중한 세금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고통 등
불평스러운 사회현상을 목도하고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구세제민(救世濟民)의 뜻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사실 관직이 그다지 높지도 않고 실권도 없었기에 시가(詩歌)로써 민생의 고통을 대변하고 정치의 부당함을 풍자하여 탐관오리를 공격하는 도
구로 삼았던 것이다.
그는 시가란 단지 음풍농월(吟風弄月)하는 오락물이 아니라 시정에 도움이 되고 사람의 마음과 세상의 이치에 보탬이 되는 내용을 가져야 비로소 그 존재의 의의와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그의 문학사상은 <여원구서(與元九書)>, <신악부서(新樂府序)>, <책림(策林)> 등에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 특히 좌천시기(원화 10년 12월)에 쓴 <여원구서>에서 그는 시에 대한 종래의 자기 견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릇 글은 귀한 것이다. 삼재(三才)에는 각기 글이 있다. 하늘의 글은 삼광(三光: 해, 달, 별)이 으뜸이고, 땅의 글은 오재(五材: 금, 목, 수, 화, 토)가 으뜸이며, 사람의 글은 육경 (六經: 시, 서, 예, 악, 역, 춘추)이 으뜸이다. 육경을 말한다면 시가 으뜸이다.
왜인가?
성인은 사람의 마음을 감화시켜 천하를 화평케 한다. 사람의 마음을 감화시키는 데에는 정(情)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말보다 처음인 것이 없으며, 소리보다 절실한 것이 없고, 뜻보다 깊이 것이 없다. 시는 정을 뿌리로 삼고, 말을 싹으로 하고, 소리를 꽃으
로 하며, 뜻을 열매로 삼는다. 위로는 성현에서 아래로는 우민(愚民)에 이르기까지, 보잘 것 없는 돼지나 물고기에서 신묘한 귀신에 이르기까지, 여럿이 나뉘어도 기(氣)는 같고, 형체가 달라도 정은 하나니, 소리를 듣고서 응하지 아니하고, 정을 나눔에 느끼
지 않는 것이 없다. 성인은 그러함을 알아서 그 말에 따라 육의(六義: 風, 雅, 頌, 賦, 比, 興)로 날줄을 삼고, 그 소리에 따라 오음(五音: 宮, 商, 角, 徵, 羽)으로 씨줄을 삼았다."
(夫文尙矣, 三才各有文, 天之文, 三光首之, 地之文, 五材首之, 人之文, 六經首之. 就六經 言, 詩又首之. 何者? 聖人感人心而天下和平. 感人心者, 莫先乎精, 莫始乎言, 莫切乎聲, 莫深乎義. 詩者, 根情, 苗言, 華聲, 實義. 上自賢聖, 下至愚騃, 微及豚魚, 幽及鬼神, 群分而氣同, 形異而情一, 未有聲入而不應, 情交而不感者, 聖人知其然, 因其言, 經之以六義, 緣其聲, 緯之以五音).
그는 시가 정(情), 말, 소리, 뜻의 결합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데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시가에 민생의 고통을 반영하는 것이 바로 시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사명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문장은 시대에 부합되게 지어야 하고, 시가는 시사에 부합되게 지어야 한다.( <여원구서>: 文章合爲時而著, 歌詩合爲事而作.)"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시는 반드시 육의에 부합하여야 사회적 사명을 달성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시경(詩經)≫의 현실주의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계속하여 그는 시경의 정신이 당대에 들어서서 충분히 실현되지 못하였음을 인식하고 당대 이전의 작자들에게 시가의 사회적 효용이 없음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당대 시인들에 대해서도 시경의 정신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음을 비평하였다.
"당이 흥한 2백년 이래 그 사이 시인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내세울 만한 작품으로는 진자앙(陳子昻)의 <감우시(感遇詩)> 20수, 포방(鮑魴)의 <감흥시(感興詩)> 15수 등이 있다. …… 이백(李白)의 작품은 특출하여 다른 사람들이 미칠 수 없지만 풍(風),
아(雅), 비(比), 흥(興)의 작품을 찾아보면 열에 하나도 없다. 두보(杜甫)의 시는 …… <신안리(新安吏)>, <석호리(石壕吏), <동관리(潼關吏)>, <한로자(寒蘆子)>, <유화문(留花門)> 등의 작품과 "부귀한 집 대문에는 술과 고기 냄새 진동하는데, 길가에는 얼어 죽은 시체가 나뒹군다." 와 같은 시구가 들어있는 작품은 30~40수에 불과하다. 두보조차 이러하거늘 하물며 두보 보다 못한 사람들에 있어서랴!"
(唐興二百年, 其間詩人, 不可勝數, 所可擧者, 陳子昻有感遇詩二十首, 鮑魴有感興詩十五篇. …… 李之作, 挨奇矣, 人不逮矣, 索其風雅比興, 十無一焉. 杜詩 …… 然其新安吏·石壕吏·潼關吏·寒蘆子·留花門之章, '朱門酒肉臭, 路有凍死骨'之句, 亦不過三四十首. 杜尙
如此, 況不逮杜者乎!)
그는 시가의 이러한 사회적 효용을 달성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써 채시관(採詩官) 제도의 시행을 황제에게 건의하여 시와 정치의 밀접한 관계를 역설하였다.
"신이 듣건대 성왕은 다른 사람의 말을 참작하여 자신의 허물을 보완하여 이로써 다스림의 근본을 세우고 교화의 근원을 이끈다고 합니다. 장차 풍속을 살피는 관리를 뽑고 채시관을 설립하여 노래 부르는 소리와 풍자하는 시를 매일 아래에서 채집하고 해마다 위에 바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을 일러 말하는 자는 죄가 없고 그것을 듣는 자는 스스로 경계하기에 족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策林> 第69 '採詩': 臣聞, 聖王酌人之言, 補己之過, 所以立理本, 導化源也. 將在乎選觀風之使, 建採詩之官, 俾乎歌詠之聲, 諷刺之興, 日採於下, 歲獻於上者也. 所謂言之者無罪, 聞之者是以自誡.)
결론적으로 그는 "임금, 신하, 백성, 사물을 위하여 시를 지은 것이지 문체를 위하여 지은 것이 아니며(<新樂府序>: 爲君, 爲臣, 爲民, 爲物, 爲事而昨, 不爲文而作.)", "윗사람은 풍(風)으로써 아랫사람을 교화하고, 아랫사람은 풍으로써 윗사람을 풍자해야 한다.(<毛詩大序>: 上以風化下, 下以風刺上.)"는 정신에 입각하여 시의 사회적 효용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실천하기 위하여 정치와 사회를 비판한 <풍유시> 172수를 짓고 그것에 최고의 평가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시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그가 40세 전후에 황제의 신변에서 좌습유가 되었을 때 가장 강렬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강주(江州)로 좌천된 후에는 인생관과 함께 시풍의 변화를 겪는다. 이에 "문장으로 명성을 얻고 마침내 문장으로 죄를 받게 된(<여원구서>:
始得名於文章, 終得罪於文章.)" 백거이는 뒷일들을 떨쳐 버리고, "한 가지 일도 이루지 못한 채 강주로 좌천의 길을 떠나는구나!
(<題四皓廟>: 不成一事貶江州.)", "새장 속에 갇힌 몸 언제나 풀려날까?(<紅鸚鵡>: 籠檻何年出得身.)", "내 스스로 자문하건대, 어찌 자연으로 돌아옴이 늦었던가?(<仙娥峯下作>: 感彼私自問, 歸山何不早.)"라고 하며 초기의 시상과는 판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백거이의 이러한 변화는 두 가지 측면으로 분석할 수 있는데, 하나는 문학의 자연적인 변동에 기인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집정자의 지지를 받지 못한 까닭이다.
(陳寶條 <白居易在文學史上的獨特地位>)
백거이 시의 분류
백거이는 <여원구서(與元九書)>에서 자신의 시를 아래와 같이 풍유시(諷諭詩), 한적시(閒適詩), 감상시(感傷詩), 잡률시(雜律詩)의 4종류로 분류하였다.
"좌습유가 된 이래로 사물을 접하면서 느낀 모든 찬미, 풍자, 흥(興), 비(比)에 관한 것과 무덕(武德)에서 원화(元和)까지 시사를 제재로 삼고 '신악부'라 제목을 붙힌 것을 합한 150여수를 풍유시라 하였다. 또 공직에 물러나 홀로 지내거나 병을 핑계로 물러나서 한가하게 거처하면서 분수를 알고 몸을 잘 보전하며 마음이 끌리는 대로 읊은 것 100수를 한적시라 하였다. 또 사물이 밖에서 끌어당기고 정감이 안에서 움직여 느낌이 닿는대로 찬탄하여 읊조린 것 100수를 감상시라 하였으며, 5언, 7언, 장구(長句), 절구의 100운에서 2운에 이르는 것 400여수를 잡률시라 하였다."
(自拾遺來, 凡所遇所感, 關於美刺興比者, 又自武德訖元和, 因事立題, 題爲新樂府者, 一百五十首, 謂之諷諭詩, 又或退公獨處, 或移病閒居, 知足保和,吟翫性情者, 一百首, 謂之閒適詩, 又有事物牽於外, 情理動於內, 隨感遇而形於歎詠者, 一百首, 謂之感傷詩, 又有五言七言長句絶句, 自一百韻至兩韻者, 四百餘首, 謂之雜律詩.)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풍유시는 바로 풍자시로 그 내용은 정치의 좋고 나쁨과 민생의 고락 등을 노래한 것이며, 그 범위는 권력을 잡고 있는 권신과 재야의 은사를 불문하고 논하여 시대의 부족함과 시정의 득실을 도우고 살핀 것이다. 이것은 국풍(國風)에서 그 방법을 취한 것으로 <시서(詩序)>에서 말하는 "문장을 가지고 넌지시 간하니 말하는 자는 죄가 없고, 그것을 듣는 자는 족히 경계해야 한다.(<毛詩大序>: 主文而譎諫, 言之者無罪, 聞之者足以戒.)"는 것과 같은 것이다. 풍유시 중 가장 전형적인 것으로는 <신악부> 50수와 <진중음(秦中吟)> 10수를 들 수 있으며, 여기에서 거론한 중점적인 문제는 ① 백성들의 고통스런 생활상, ② 과중한 세금과 부역, ③ 권문세가와 귀족들의 사치와 낭비, ④ 세력자들의 권력남용과 횡포, ⑤ 쓸데 없는 전쟁, ⑥ 권력자에 아부하거나 위선에 찬 세상 인심, ⑦ 부녀자의 문제 등이다.(金學主, 李東鄕 ≪中國文學史Ⅰ≫, 韓國放送通信大學出版部, 1986. p322)
그러나 백거이는 강주로 좌천된 후부터는 <방어(放魚)>, <문백상(文柏牀)>, <심양삼제(潯陽三題)>, <대수(大水)> 6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풍유시를 쓰지 않았으며, 시절을 감상하고 늙음을 탄식하거나 자식과 친구를 슬퍼한 몇몇 시들 외에는 모두 한적한 생활을 표현하였다. 이와 같이 마음속에서 한적하고 쾌락한 생활을 희망했던 그는 이러한 마음을 주제로 삼아 주로 자연의 풍광(風光)과 마음의 평정을 읊은 시를 한적시라 이름하였으며 그 평가는 풍유시 다음에 두었다.
감상시란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면 실제로 한적시와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그러나 풍유시가 세상을 풍자하고 한적시가 허심탄회하게 자연의 풍광을 읊은 것이라면, 감상시는 인생의 경험에서 감정적으로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 즉 인생에 대한 허무, 애상, 인정, 세정(世情), 추억, 우정 등에 관한 감회와 감정을 노래한 것이다.(楊林 <白樂天과 그의 詩>, 서울대학교대학원, p26) 이것은 주로 노년기에 쓴 작품으로 그 분량은 매우 적다. 그러나 이러한 부류의 감상시 중에서도 <장한가(長恨歌)>와 <비파행(琵琶行)> 등은 창기들도 능히 암송할 수 있을 정도로 시정(市井)에 널리 유행하여 천고의 걸작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잡률시는 어떤 사물에 정감을 느끼고 흥취가 일어나서 짓거나 아름다운 형식과 격률에 치중한 시의 한 체재를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에 속하는 작품으로는 격시(格詩)라는 형식을 포함하여 모두 2203수로 그가 분류한 시가 유형 중에 그 편수가 가장 많다. 그러나 사실상 잡률시 중에는 풍유시에 속하는 것도 있고 한적시나 감상시에 속하는 것도 있다.
백거이가 자신의 시집 15권을 처음으로 편집한 것은 헌종(憲宗) 원화 15년(815)의 일이다. 그때 그는 자신의 시를 상술한 바와 같이 풍유, 한적, 감상, 잡률로 사분하였고, 그후 목종(穆宗) 장경 4년(834)에 시문을 함께 담은 ≪백씨장경집(白氏長慶執)≫을 편집했을 때도 여전히 이 네 가지 분류 방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문종(文宗) 대화 2년(828)에 ≪백씨장경집≫ 이후의 시문을 모아 후집 5권을 3차 편집하였을 때는 이미 있던 작품은 그대로 두고 새로운 작품만을 분류하면서 격시(格詩)와 율시(律詩) 두 종류로만 분류하였다. 그는 그러한 분류 기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율시는 이미 아는 바와 같고, 격시는 대체로 한위(漢魏)의 고시에 다른 다양한 형식이 가미되어 좀 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는 일종의 고체시를 가리키는 것이다.(劉本棟 ≪白居易≫, 中國歷代詩人選集 18, 林白出版社, 1978, 金在乘 <白居易의 格詩考> 中國人文科學 제3집, 1984, 참고)
백거이의 격시는 만년에 쓰여진 것으로 형식이 다양하며, 내용은 일상생활에서 느낀 정감과 당시의 생활상을 소박하게 기록한 것으로, 관직생활, 술, 지족안분(知足安分)하는 낙천적인 생활태도를 읊은 것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백향산시집(白香山詩集)≫에서 격시라는 이름으로 분류된 작품은 모두 293수이며, 그의 나이 51세(장경 2년, 822)부터 71세(회창 2년, 842)까지 20년 사이에 쓰여진 것이다.
백거이 시의 특징
백거이의 시가 당대 그 누구보다 많은 독자층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시가 갖는 독특성 때문이며, 그것은 대체로 평이성, 풍자성, 사실성으로 귀납할 수 있다.
1) 평이성(平易性)
"백낙천은 시를 지을 때마다 한 사람의 노파도 그것을 이해하도록 하였다. '이해 못하겠습니까?'라고 물어보아 '이해하겠습니다.'라고 하면 그것을 기록하고, '이해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면 다시 그것을 쉽게 고쳤다."
(<甌北詩話>: 白樂天每作詩, 令一老嫗解之, 問曰解否? 曰解則錄之, 不解則復易之.)
여기에서 그가 얼마나 일반대중이 읽기 쉽도록 평이한 시어(詩語)를 사용하여 시를 지었는지 알 수 있다. 명대(明代) 호응린(胡應麟)은 ≪시수(詩藪)≫ 권6에서, "낙천의 시는 세상에서 이르기를 얕고 속되다고 하는데 이는 뜻과 말이 합치되었기 때문이다.(樂天詩, 世謂淺近, 以意與語合也.)"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얕고 속되다"고 한 말은 곧 평이하다는 뜻이며, "뜻과 말이 합치되었다"는 것은 그의 시어가 복잡하거나 함축적이지 않은 직설적인 언어라는 뜻이다. 이러한 직설적인 언어 구사가 가장 잘 나타난 시가 바로 풍유시와 <비파행>, <장한가> 등이다. 특히 그의 시는 장안(長安)에서 강서(江西) 3~4천리에 이르는 향교, 불사, 객사라든지 일반 서민, 승려, 과부, 처녀들의 입에까지 회자하였다. 절간의 벽에 그의 시가 쓰여지고 <장한가>를 외우는 기녀가 술좌석에서 돈을 더 요구할 수 있었던 것도 실은 그의 시가 평이한 언어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2) 풍자성(諷刺性)
뜻이 과격하고 말이 질박한 것이 백거이 풍유시의 특색이다. 뜻이 과격하다는 것은 그의 시가 노골적인 풍자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인데, 그는 이 점에 있어서 두보를 비평하고, 두보의 시 중에서도 "부귀한 집 대문에는 술과 고기 냄새 진동하는데, 길가에는 얼어죽은 시체가 나뒹군다.(朱門酒肉臭, 路有凍死骨)"는 것과 같은 사상만을 취하여 그의 풍유시를 써 나갔다. 이러한 특성은 그의 풍유시 172수 가운데 매우 뚜렷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그가 당시의 정치나 사회를 풍자한 것은 바로 그의 문학 주장의 실천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풍자성을 가진 그의 풍유시는 일반 서민의 입장을 대변하여 그들의 고통을 노래하였기 때문에 대중적인 사랑을 더욱 많이 받을 수 있었다.
3) 사실성(寫實性)
백거이의 시 3800여수는 모두 그가 일생동안 겪은 생활의 기록이며 당대의 사회상과 생활상을 반영한 한 폭의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자치통감(資治通鑑)·당기(唐紀)≫에서는, "헌종 원화 2년에 백거이는 악부 및 시 100여편을 지어 시사를 풍자하였다.(憲宗元和二年, 白居易作樂府及詩百餘篇, 規諷時事.)"라고 하였고, <여원구서>에서는, "문장은 시대에 부합되게 지어야 하고 시가는 시사에 부합되게 지어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시사를 풍자하고 시대나 시사에 부합되게 지어야 한다는 것 등은 바로 백거이 시의 사실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상생활과 시사를 이탈하지 않고 현실을 충실하게 노래한 그의 사실적 시가창작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자료: 병풍바위>
백거이와 도림선사
중국 당나라 때 시인인 백거이는 뛰어난 시작활동으로 당대 문인은 물론 온 백성의 사랑을 받았다.
백거이가 강주자사로 부임하던 때의 일이다.
유명한 시인을 맞게 된 강주지방 사람들은 매우 기뻐하며 부임해올 날짜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제일 먼저 강주에 사는 도림 선사를 찾아갔다.
백거이의 방문에 승려들과 절 안 사람들은 들뜬 표정들이었다.
얼굴이 붉어진 승려 한 명이 백거이의 방문 소식을 전하기 위해 선사에게 뛰어갔다.
마침 도림선사는 흙벽을 바르고 있었다.
백거이가 인사차 들렀다는 승려의 말을 듣고도 선사는 꿈쩍하지 않았다.
어느새 승려를 뒤따라온 백거이가 조심스럽게 허리를 구부려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도 선사는 흙벽 바르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이었다.
이윽고 선사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자네는 군자인가 아니면 소인인가?"
(자신이 영접하지 않는 것을 이해하느냐는 물음이었다.)
백거이가 대답했다.
"군자가 되려고 노력합니다만..." 백거이는 말끝을 흐렸다.
그 때까지 흙벽 바르기를 멈추지 않던 선사가 흙판에 흙이 다 떨어졌다는 표시로 흙판을 두드렸다.
그러자 백거이는 얼른 두 손으로 흙을 떠서 흙판에 올려놓았다.
선사가 백거이의 더럽혀진 손을 잠시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래, 자네가 그 유명하다는 백거이란 말이지."
백거이가 "예" 하고 대답하자 선사는 들릴듯 말듯하게 말했다.
"겨우 흙이나 떠 주는 사람이구만."
선사의 말씀에 백거이는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좋은 글'에서>
백거이 작품
賦得古原草送別 (부득고원초송별)
離離原上草 이이원상초 언덕 위 우거진 풀들은
一歲一枯榮 일세일고영 해마다 시들고 다시 무성해진다네
野火燒不盡 야화소부진 들불을 놓아도 다 타지 않고
春風吹又生 춘풍취우생 봄바람 불어오면 다시 돋아난다네
遠芳侵古道 원방침고도 아득한 향기 옛길을 덮고
晴翠接荒城 청취접황성 옛 성터엔 푸른빛 감도는데
又送王孫去 우송왕손거 또 그대를 떠나보내고 나면
悽凄滿別情 처처만별정 이별의 정만 풀처럼 무성하리
야화소부진춘풍취우생(野火燒不盡春風吹又生)
'들불을 놓아도 다 타지 않고, 봄바람이 불면 다시 돋아난다'
들풀의 끈질긴 생명력을 통하여 자연의 영고성쇠를 노래한 시구(詩句).
【고사】
중국 당(唐)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지은 <부득고원초송별(賦得古原草送別)>의
한 구절이다. <부득고원초송별>은 <초(草)>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백거이는 15세 때 수도인 장안(長安)에 가서 당시 시인으로 명성을 날리던 고황(顧況)을
찾아갔는데, 고황은 어린 소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그의 이름 '거이(居易)'를 빗대어,
"장안의 쌀값이 비싸니 살아가기 어려울 것(長安米貴, 居住不易)"
이라며 비꼬았다. 그러나 백거이가 이 시를 보여주자,
"이런 재주가 있다면 살아가기가 쉬울 것(有才如此, 居亦容易)"
이라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야화(野火)는 들판의 마른 풀을 태우기 위하여 지르는 불을 말한다.
'야화소부진 춘풍취우생'은 들불을 놓아도 풀은 완전히 다 타 없어지지 않고
봄이 되면 다시 파릇파릇 돋아나는 것을 묘사한 구절로,
간결하면서도 깊은 함의(含意)를 지닌 명구(名句)로 꼽힌다.
이 구절에 대하여는 소인(小人)이나 사악(邪惡)함이 근절되지 않는 것을 비유한 것으로
해석하거나, 치세(治世)와 난세(亂世)가 회돌이처럼 되풀이되는 세상사를 비유한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글자료: 양지>
장한가 (長恨歌-기나긴 한의 노래)
漢皇重色思傾國 한황중색사경국 한나라 황제는 색을 즐겨 경국지색 찾았으나
御宇多年求不得 어우다년구부득 여러 해 동안 구했어도 얻지 못하였네
楊家有女初長成 양가유녀초장성양씨 가문에 갓 장성한 딸이 있었는데
養在深閨人未識 양재심규인미식 깊은 규방에서 자라 사람들은 알지 못했지만
天成麗質難自棄 천성려질난자기 타고난 미모는 그대로 묻힐 리 없어
一朝選在君王側 일조선재군왕측어느 날 갑자기 간택되어 군왕을 모시게 되었네
廻眸一笑百媚生 회모일소백미생 눈웃음 한 번에 백가지 애교가 피어나니
六宮粉黛無顔色 육궁분대무안색 육궁의 단장한 미인들의 안색이 무색해졌네
春寒賜浴華淸池 춘한사욕화청지 봄 추위에 천자는 화청 연못에 들기를 허락하여
溫泉水滑洗凝脂 온천수활세응지 온천의 부드러운 물로 윤기 있게 몸을 씻었네
侍兒扶起嬌無力 시아부기교무력 시녀들이 부축하여 일어나니 그 아름다움에 당할 힘이 없었네
始是新承恩澤時 시시신승은택시 이때부터 천자의 승은을 받게 되었네
雲빈花顔金步搖 운빈화안금보요 구름같은 머리칼, 꽃같은 얼굴, 흔들거리는 금장식
芙蓉帳暖度春宵 부용장난도춘소 부용꽃 수놓은 휘장 안은 따뜻하고 봄날은 깊어만 갔네
春宵苦短日高起 춘소고단일고기 봄밤은 짧아 천자는 해가 높이 뜬 뒤에 일어났고
從此君王不早朝 종차군왕불조조 이 때부터 천자는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네
承歡侍宴無閒暇 승환시연무한가 그녀는 천자 기분에 맞춰 시중 들기에 여념이 없어
春從春遊夜專夜 춘종춘유야전야 봄이면 춘정을 즐겨 온 밤을 지새니
後宮佳麗三千人 후궁가려삼천인 후궁에는 빼어난 미녀 3천 명이 있었지만
三千寵愛在一身 삼천총애재일신 그 3천명이 받을 총애가 그녀에게만 있었네
金屋粧成嬌侍夜 금옥장성교시야 금옥에서 화장한 뒤 황제의 밤 시중을 들었고
玉樓宴罷醉和春 옥루연파취화춘 옥루에서 잔치가 끝난 뒤에는 춘정에 취하였네
姉妹弟兄皆列土 자매제형개열토 그녀의 자매 형제는 봉토를 받았고
可憐光彩生門戶 가련광채생문호 가엾고 불쌍했는데 그들의 집에 광채가 나게 되었네
遂令天下父母心 수령천하부모심 마침내 천하의 부모들 마음은
不重生男重生女 부중생남중생녀 아들 낳기보다 딸 낳기를 중시하게 되었네
驪宮高處入靑雲 여궁고처입청운 여산의 여궁은 높이 솟아 구름에 닿았고
仙樂風飄處處聞 선락풍표처처문 신선의 풍악은 바람타고 여기 저기서 들려오네
緩歌慢舞凝絲竹 완가만무응사죽 부드러운 노래 하늘거리는 춤은 관현악기에 어우러지고
盡日君王看不足 진일군왕간부족 군왕은 종일토록 바라보건만 그래도 부족하다 하였네
漁陽鼙鼓動地來 어양비고동지래 어양에서 반란군 기병들 북소리가 지축 울리며 들려 오고
驚破霓裳羽衣曲 경파예상우의곡 연주되던 예상우의곡은 놀라 중단되었네
九重城闕煙塵生 구중성궐연진생 구중궁궐에 연기와 먼지가 피어 오르고
千乘萬騎西南行 천승만기서남행 수천만 기병들은 서남쪽으로 달아났다네
翠華搖搖行復止 취화요요행부지 황제의 깃발을 흔들며 가다 서다 하면서
西出都門百餘里 서출도문백여리 장안 서쪽 백여리에 이르렀다네
六軍不發無奈何 육군불발무내하 육군(황제근위대)이 출발하지 않으니 황제인들 어찌 하겠는가
宛轉蛾眉馬前死 완전아미마전사 양귀비는 고꾸라져 말 앞에서 살해되었네
花鈿委地無人收 화전위지무인수 그녀의 꽃비녀는 땅에 버려졌으나 거두는 사람도 없었네
翠翹金雀玉搔頭 취교금작옥소두 물총새 깃털, 공작모양 황금 머리장식, 옥비녀도 떨어졌다네
君王俺面救不得 군왕엄면구부득 천자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녀를 구하지 못하니
回看血淚相和流 회간혈루상화류 뒤로 돌아서서 피 눈물만 흘렸다네
黃埃散漫風蕭索 황애산만풍소삭 황색먼지 뿌옇고 바람은 쓸쓸하고 삭막한데
雲棧縈紆登劍閣 운잔영우등검각 구름까지 닿을 듯 높고 구불구불한 길로 검각산을 오르네
峨眉山下少人行 아미산하소인행 아미산 기슭에는 지나는 사람도 적고
旌旗無光日色薄 정기무광일색박 천자의 깃발도 빛이 없고 햇빛도 약하다네
蜀江水碧蜀山靑 촉강수벽촉산청 촉나라 강물은 파랗고 촉나라 산빛은 푸른데
聖主朝朝暮暮情 성주조조모모정 천자는 아침 저녁 그리운 정으로 가득하다네
行宮見月傷心色 행궁견월상심색 행궁에서 달을 보면 마음 상하고
夜雨聞鈴腸斷聲 야우문령장단성 밤비 속에 창자를 끊는 듯한 방울소리를 듣는다네
天旋地轉廻龍馭 천선지전회용어 천하 정세는 바뀌어 천자는 장안으로 어가를 돌리고
到此躊躇不能去 도차주저불능거 그곳에 이르자 머뭇거리며 떠나지 못했다네
馬嵬坡下泥土中 마외파하이토중 마외 고개 아래 진흙 속에
不見玉顔空死處 불견옥안공사처 옥같은 얼굴은 볼 수 없고 죽은 자리만 남아 있었다네
君臣相顧眞霑衣 군신상고진점의 천자도 신하도 서로 눈물로 옷을 적셨고
東望都門信馬歸 동망도문신마귀 동쪽 성문 향해 말이 가는대로 돌아왔다네
歸來池苑皆依舊 귀래지원개의구 돌아오니 연못도 동산도 옛날 그대로
太液芙蓉未央柳 태액부용미앙류 태액 연못 연꽃도 미앙궁 버드나무도 그대로였다네
芙茸如面柳如眉 부용여면류여미 연꽃은 그녀 얼굴같고 버들은 그녀 눈썹같으니
對此如何不淚垂 대차여하불루수 그것들을 대하니 어이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
春風桃李花開日 춘풍도리화개일 봄바람에 복숭아꽃 살구꽃 피는 날이나
秋雨梧桐葉落時 추우오동엽락시 가을비에 오동잎 떨어질 때
西宮南苑多秋草 서궁남원다추초 서궁이나 남원에는 가을 풀이 무성하고
落葉滿階紅不掃 낙엽만계홍불소 낙엽이 섬돌을 덮어도 단풍을 쓸어낼 사람이 없구나
梨園弟子白髮新 이원제자백발신 이원제자들도 백발이 성성하게 되었고
椒房阿監靑娥老 초방아감청아로 초방(양귀비 거처하던 궁)의 궁녀들 푸르던 눈썹이 늙었구나
夕展螢飛思悄然 석전형비사초연 저녁 궁전에 반딧불이 날아드니 심사는 더욱 쓸쓸하고
孤燈조盡未成眠 고등조진미성면 외로운 등잔 심지 다 타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다네
遲遲鐘鼓初長夜 지지종고초장야 시각을 알리는 종과 북소리가 들려오니 초저녁 밤은 길고
耿耿星河欲曙天 경경성하욕서천 날이 새는 하늘에 은하가 반짝이는구나
鴛鴦瓦冷霜華重 원앙와랭상화중 원앙 모양의 기와에는 차가운 서리꽃 겹겹이 쌓였는데
翡翠衾寒誰與共 비취금한수여공 비취 수놓은 이불은 싸늘하여 함께 잘 사람이 없구나
悠悠生死別經年 유유생사별경년 삶과 죽음의 세계는 멀어 오랜 세월이 흘러가고
魂魄不曾來入夢 혼백부증내입몽 혼백은 꿈에서조차 찾아오지 않는구나
臨공道士鴻都客 임공도사홍도객 임공에서 온 도사가 장안의 홍도문에서 머물고 있다는데
能以精誠致魂魄 능이정성치혼백 지극한 정성으로 죽은 자의 혼을 불러 낼수 있다 하네
爲感君王輾轉思 위감군왕전전사 그는 천자가 잠못 이루고 사모함에 감동하여
遂敎方士殷勤覓 수교방사전근멱 가르침에 따라 방사를 시켜 부지런히 혼이 있는 곳을 찾게 했다네
排雲馭氣奔如電 배운어기분여전 방사는 구름을 가르고 번개처럼 달려가
昇天入地求之遍 승천입지구지편 하늘에 오르고 땅속에 들어가 샅샅이 찾았다네
上窮碧落下黃泉 상궁벽락하황천 위로 하늘 끝 아래로 황천까지 찾았으나
兩處茫茫皆不見 양처망망개불견 어디나 망망할 뿐 혼을 찾을 수 없었다네
忽聞海上有仙山 홀문해상유선산 문득 들리는 말이 해상에 신선 사는 산이 있는데
山在虛無縹渺間 산재허무표묘간 그 산은 아무 것도 없는 먼 곳에 있다고 하는구나
樓閣玲瓏五雲起 누각영롱오운기 누각은 영롱하고 오색 구름 피어나는데
其中綽約多仙子 기중작약다선자 그 안에는 가냘픈 모습의 선녀가 여럿 살고 있다 하네
中有一人字太眞 중유일인자태진 그 중에 자를 태진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雪膚花貌參差是 설부화모참치시 눈같은 살결과 꽃같은 얼굴이 양귀비와 비슷하다 하네
金闕西廂叩玉경 금궐서상고옥경 선산 황금 궁전 서쪽 건물 옥문을 두드렸다네
轉敎小玉報雙成 전교소옥보쌍성 소옥(시녀)을 시켜서 쌍성(시녀)에게 알리게 했다네
聞道漢家天子使 문도한가천자사 한나라에서 먼길 찾아온 천자의 사자라는 말 듣고
九華帳裏夢魂驚 구화장리몽혼경 호화로운 휘장 안의 혼백이 꿈에서 깨어났다네
攬衣推枕起徘徊 남의추침기배회 옷을 잡고 베개를 밀치며 일어나 서성거리다가
珠箔銀鉤이리開 주박은구이리개 진주 발과 은 병풍을 연달아 열어 젖히고
雲빈半偏新睡覺 운빈반편신수각 구름머리 한쪽으로 기운 것이 방금 잠에서 깨어난 듯
花冠不整下堂來 화관부정하당래 머리 화관도 바로 잡지 못한 채 뜰로 내려왔다네
風吹仙袂飄요擧 풍취선몌표요거 바람이 불어 신선의 옷깃을 펄럭이게 하니
猶似霓裳羽衣舞 유사예상우의무 마치 예상우의 춤을 다시 보게 해주는 듯 하구나
玉容寂寞淚난干 옥용적막누난간 옥 같은 얼굴에 쓸쓸하게 눈물 떨어지니
梨花一枝春帶雨 이화일지춘대우 마치 배꽃 가지가 봄비를 맞는 듯 하구나
含情凝제謝君王 함정응제사군왕 정다운 눈길로 사자를 보며 군왕께 감사를 전하는데
一別音容兩渺茫 일별음용양묘망 "이별후 천자의 목소리와 모습이 모두 흐릿해졌사옵니다
昭陽殿裏恩愛絶 소양전리은애절 소양전에서 천자의 사랑을 받았으나 그것도 끊어졌고
蓬萊宮中日月長 봉래궁중일월장 선산 봉래궁에서 긴 세월을 보냈사옵니다
廻頭下望人환處 회두하망인환처 머리를 돌려 아래 인간세상을 굽어 보아도
不見長安見塵霧 불견장안견진무 장안은 보이지 않고 먼지와 안개만 자욱할 뿐
唯將舊物表深情 유장구물표심정 다만 천자가 주신 기념품으로 내 깊은 정을 표시하고
鈿合金釵寄將去 전합금차기장거 나전 상자와 금비녀를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釵留一股合一扇 차류일고합일선 금비녀와 나전 상자도 반씩 나누어 간직하렵니다
釵擘黃金合分鈿 차벽황금합분전 그리고 금비녀도 반으로 나누고 나전 상자도 둘로 나누었답니다
但敎心似金鈿堅 단교심사금전견 우리 마음 이 비녀와 나전처럼 굳게 지켜나간다면
天上人間會相見 천상인간회상견 언젠가 천상이든 인간 세상이든 만날 날이 있겠지요"
臨別殷勤重奇詞 임별은근중기사 헤어질 무렵 간곡하게 거듭 전할 말 부탁했는데
詞中有誓兩心知 사중유서양심지 그 중에는 두 사람만 아는 맹세의 말이 있었다네
七月七日長生殿 칠월칠일장생전 칠월칠석에 장생전에서
夜半無人私語時 야반무인사어시 아무도 없는 오밤중에 은밀히 속삭였던 말
在天願作比翼鳥 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 재지원위연리지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자고"
天長地久有時盡 천장지구유시진 천지 영원하다 해도 다할 때가 있겠지만
此恨綿綿無絶期 차한면면무절기 이 애닯은 사랑의 한 영원히 끊어지지 않으리라
이해와 감상
비익조(比翼鳥) : 비익조(比翼鳥)는 중국 숭오산(崇吾山)에 산다고 전해지는 새로 날개와 눈이 하나 뿐이어서 암수가 몸을 합쳐야만 날아갈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남녀간의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 많은 문학작품에서 이 비익조가 인용되었다.
연리지(連理枝) : 한 나무의 가지와 다른 나무의 가지가 서로 붙어서 나뭇결이 하나로 이어진 것.
장한가는 절세미녀 양귀비(楊貴妃)와 절대 권력을 휘둘렸던 현종(玄宗)의 비련(悲戀)에 관한 노래로서 4장으로 되어 있다.
제l장은, 권력의 정상에 있는 황제와 절세가인 양귀비의 만남과, 양귀비에게 쏟는 현종황제의 지극한 애정 등을 노래하였다.
제2장은,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몽진하는 길에, 양귀비를 죽게 한 뉘우침과 외로움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황제의 심정과 모습을 그렸다.
제3장은, 환도 후 양귀비의 생각만으로 밤을 지새는 황제를 묘사한다.
제4장에서는, 도사의 환술(幻術)로 양귀비의 영혼을 찾아, 미래에서의 사랑의 맹세를 확인하게 되었으나, 천상(天上)과 인계(人界)의 단절 때문에 살아 있는 한 되씹어야 할 뼈저린 한탄이 길게 여운을 끈다.
장한가의 배경
回眸一笑百媚生, 눈동자를 돌려 살며시 미소 지으면 끝없는 애교 발산하여,
六宮粉黛無顔色. 수많은 후궁들의 빼어난 아름다움 빛을 잃게 되었네.
後宮佳麗三千人 후궁에는 삼천 명의 미인 있으나
三千寵愛在一身 삼천 명에게 갈 사랑을 홀로 독차지하였네.
당 현종이 재위한 기간 중 전반기인 개원(開元) 연간에는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에 버금갈만한 치적을 세워 '명황(明皇)'으로 까지 칭해졌으나 후반기로 갈수록 그의 명성은 퇴색하여 당의 멸망을 재촉하는 단초를 제공한 황제가 되었다. 당의 쇠퇴를 전적으로 현종이 양귀비에게 빠져 정사를 그르친 것으로 책임을 돌릴 수는 없을지라도, 현종의 양귀비에 대한 미혹이 정치를 함에 있어 판단과 통찰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현종에게는 여러 가지 수식이 따라 다니는데, 그것들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현종은 당대 (唐代) 여러 황제 가운데 재위 기간이 가장 긴 황제였다. 그는 712년 황제의 자리에 올라 45년 동안 황제로 군림하였다. 현종은 또한 가장 장수한 황제였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그는 78세까지 장수하였다. 그리고 현종은 자신의 생일인 8월 5일을 경축일로 삼아 전국적으로 3일을 쉬도록 하였는데, 이 또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현종은 자녀를 가장 많이 둔 황제였다. 그에게는 30명의 아들과 29명의 딸 등 모두 59명의 자녀가 있었다.
당 현종의 제위가 더할 나위 없이 공고해질 즈음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비인 무혜비(武惠妃)가 세상을 떴다. 황제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오랫동안 애통해 하였다. 이 때 주위에서 현종에게 여러 여인을 추천하였지만 눈에 들어오는 자가 없었다. 얼마 후 한 여인이 현종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뜻밖에도 자신의 아들 수왕(壽王)의 비인 양옥환(楊玉環)이었다. 양옥환의 미모에 홀린 현종은 이것 저것 잴 여유가 없었다. 혜비가 죽은 지 1년도 되지 않아 현종은 자신의 비로 삼아 혜비가 받았던 예우로 똑같이 양귀비를 예우하는 동시에, 자신의 아들에게는 다시 다른 여인을 비로 간택해 주었는데, 이 때 현종은 이미 50대였으며 양귀비는 17살이었다.
양귀비의 미모는 백거이가 그의 시 <장한가>에서 묘사한 것처럼 현종을 홀리고도 남을 정도로 출중하였다.
현종은 양귀비와의 사랑에 밤이 짧은 것은 안타까워하며, 조정에 나가 정치를 하는 것을 게을리하기 시작하였다. 이 즈음 잠재해 있던 여러 문제점들과 혼란이 한꺼번에 폭발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안록산(安祿山)의 난이다. 755년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켜 낙양을 공격하여 점령하고는 이듬해는 당시 수도였던 장안마저 점령하자, 현종은 양귀비를 데리고 신하들과 촉(蜀) 땅으로 피난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때문에 현종은 반란군을 피해 도주한 첫 번째 황제라는 불명예 또한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다. 현종이 도주한 이튿날 행차가 마외(馬嵬)라는 지역에 다다랐을 때, 황태자 이형(李亨)은 여러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간신 양국충(楊國忠)을 처결하고, 아울러 현종에게 양귀비 또한 사형에 처하도록 압박하였다. 이미 권위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져 명목상 황제로 남아있던 현종은 피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면서 양귀비를 하얀 비단으로 목 졸라 황천길로 가도록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때 그녀의 나이 38 살이었다.
君王掩面救不得 황제는 차마 보지 못하고 얼굴 가리며 양귀비를 구하지 못하는데,
回看血淚相和流 뒤돌아보는 황제의 눈에는 피눈물 흘러내리네
현종은 양귀비를 이곳 마외에 매장한 후 촉 땅으로 서둘러 피난 갔다. 양귀비의 묘는 원래 흙으로 덮여있던 토총이었으나, 이 흙에서 향기가 나고 피부에 좋다는 소문이 나 많은 사람들이 몰래 흙을 파가는 바람에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 이에 다시 봉분을 벽돌로 쌓아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글자료: It's 美>
매탄옹(賣炭翁 - 숯파는 노인)
伐薪燒炭南山中 (벌신소탄남산중) 장작을 베어 숯을 태우는 남산에서
滿面塵灰煙火色 (만면진회연화색) 얼굴 가득 먼지와 재, 그을린 빛
兩鬢蒼蒼十指黑 (양빈창창십지흑) 양쪽 구렛나루는 허옇고, 열손가락은 시꺼멓다
買炭得錢何所營 (매탄득전하소영) 숯을 팔아 돈을 얻으면 어디에 쓰고자 하나
身上衣裳口中食 (신상의상구중식) 몸에 걸칠 옷과 입에 넣을 음식이오
可憐身上衣正單 (가련신상의정단) 가련한 몸이 걸친 건 옷 한벌 뿐
心憂炭賤顧天寒 (심우탄천고천한) 마음은 숯값이 떨어질까 걱정하여 날이 춥기만을 바란다
夜來城外一尺雪 (야래성외일척설) 간밤에 성 밖 일척의 눈이 내리고
曉駕炭車輾氷轍 (효가탄차전빙철) 새벽 숯을 담은 수레를 타고 삐걱거리며 얼음 자국을 남긴다
牛困人飢日已高 (우곤인기일이고) 소는 피곤하고 사람은 배고픈데 해는 벌써 높고
市南門外泥中歇 (이남문외이중헐) 시장 남문 밖 흙바닥 위에서 쉰다
翩翩兩騎來是誰 (편편양기내시수) 거들거리며 두마리 말을 타고 오는 이는 누군가?
黃衣使者白衫兒 (황의사자백삼아) 황색옷의 사자와 흰 삼베옷의 어린이
手把文書口稱敕 (수파문서구칭칙) 문서를 손에 들고 조서라고 칭하며
廻車叱牛牽向北 (회차질우견향북) 수레를 돌려 소를 몰아 북쪽을 향해 끌고간다
一車炭重千餘斤 (일차탄중천여근) 수레 한대 숯의 무게는 천근이 넘지만
宮使驅將惜不得 (궁사구장석부득) 궁궐의 사자가 끌고가는데 아쉬워한들 어찌하리오
半疋紅綃一丈綾 (반필홍초일장능) 반필의 붉은 명주실과 일장의 비단을
繫向牛頭充炭値 (계향우두충탄치) 소머리에 메어보내니 '숯값으로 충분하겠지'란다
이해와 감상
백거이(白居易)의 매탄옹(賣炭翁; 숯파는 노인)은 신악부(新樂府) 50수 중 32수로 숯파는 노인을 통해 궁중 조달 제도를 비판한 시다. 이 시를 보면 왜 사람들이 그를 풍유시인(諷誘詩人)이라고 칭하는지 간단히 이해할 수 있을만큼 그의 풍자 정신이 잘 나타난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선별,번역된 한시집을 보면, 백거이 부분에선 보통은 이 시가 빠지지 않고 나올 정도니, 우리나라에선 백거이 시 중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싶다.
당나라 시대에 궁중에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는 기관을 궁시(宮市)라고 불렀다. 지금으로 치면 조달청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중국에선 주로 이러한 기관을 환관이 담당하였는데, 물건을 구매하는 과정에서 부정부패가 성행하였다. 강제로 터무니없는 저가에 매수하거나 무상으로 몰수한 다음, 장부 상에는 마치 적정가나 고가에 산 것처럼 위장하여 정부 자금을 횡령하였다. 이런 방법으로 환관들은 부를 축적하였지만, 원래 이것은 일반 백성이 받아야할 대가인 것이다. 백성들이 궁핍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렇듯이 일부 계층이 지나치게 호사스러운 생활을 영유하려면 다른 계층에 대한 조직적인 착취가 필요한데, 궁시 제도의 폐단은 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케이스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성당 시대의 호화로움은 이러한 착취를 바탕으로 완성된 것이다.
이런 궁시 제도를 풍자적으로 비판한 것이 바로 이 시이다. 이 시의 중간 부분을 보면 黃衣使者白衫兒(황의사자백수아)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이 당시의 환관과 그의 수행원을 묘사하고 있다. 하루 하루 겨우 연명하는 노인의 숯을 황제의 명령을 핑계로 강제로 빼앗듯이 가져가고는 아주 적은 대가로 만족하라는 불공정 관행 때문에 당시 민중들은 얼마나 고생하였는가? 백거이는 이를 노골적으로 비판하기 보다는 '아쉬워 한들 어쩌겠냐', '숯값으로 충분하겠지'라는 구절을 통하여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백거이의 뛰어난 시작(詩作)기법이 엿보인다.
백거이의 시 중에서는 이렇듯 사회 풍자적인 시가 많은데, 이런 시는 주로 그가 젊었을 ? 작성하였다고 보면 된다. 처음 궁궐에 발을 들여놓았을때 그는 상당히 강경한 개혁적인 인사였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반대 세력의 표적이 되어 지방으로 좌천 당한 이후로는, 사회 비판적인 성향이 옅어지고, 다분히 자기 만족적이거나 안빈낙도를 즐기는 풍류(風流; 위의 풍유와는 기본적으로 다른 뜻이다)적인 시가 많아졌다. 이것은 그가 사회 자체에 환멸을 느낀 탓인 듯 하다. 보통 개혁에 아주 적극적이다가 크게 좌절하였을 때, 사회 도피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역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글: 2007.06.13 by seattleruler>
琵琶行(비파행 -비파의 노래)
潯 陽 江 頭 夜 送 客 (심양강두야송객) 심양강 나루에서 손님을 밤에 보내려니
楓 葉 荻 花 秋 瑟 瑟 (풍엽적화추슬슬) 단풍잎 갈대꽃에 가을바람 쓸쓸하다.
主 人 下 馬 客 在 船 (주인하마객재선) 주인은 말 내리고 손님은 배에 타고
擧 酒 欲 飮 無 管 絃 (거주욕음무관현) 술을 들어 마시려니 음악이 없구나.
醉 不 成 歡 慘 將 別 (취불성환참장별) 이별을 하려하니 취해도 즐거움 없고
別 時 茫 茫 江 浸 月 (별시망망강침월) 망망한 이별의 강에 달빛만 젖어 있네.
忽 聞 水 上 琵 琶 聲 (홀문수상비파성) 홀연히 물 위로 비파소리 들려오니
主 人 忘 歸 客 不 發 (주인망귀객불발) 주인도 손님도 자리를 뜨지 못하네.
尋 聲 暗 問 彈 者 誰 (심성암문탄자수) 소리 찾아 조용히 누구인지 물으니
琵 琶 聲 停 欲 語 遲 (비파성정욕어지) 비파소리 그치고 대답이 없구나.
移 船 相 近 邀 相 見 (이선상근요상견) 배를 옮겨 가까이가 자리를 청하니
添 酒 回 燈 重 開 宴 (첨주회등중개연) 술 따르고 등 밝혀 다시연회를 여네.
千 呼 萬 喚 始 出 來 (천호만환시출래) 부르고 또 청해 겨우 나타났는데
猶 抱 琵 琶 半 遮 面 (유포비파반차면) 비파 안고 얼굴을 반쯤 가렸네.
轉 軸 撥 絃 三 兩 聲 (전축발현삼량성) 꼭지를 틀고 현을 골라 두세 번 소리 내니
未 成 曲 調 先 有 情 (미성곡조선유정) 곡조도 이루기 전 정이 먼저 흐르네.
絃 絃 掩 抑 聲 聲 思 (현현엄억성성사) 줄 누르고 손끝으로 옮기니 소리 처량하고
似 訴 平 生 不 得 志 (사소평생불득지) 평생에 못 이룬 한 호소하듯 하네.
低 眉 信 手 續 續 彈 (저미신수속속탄) 눈 섶을 내리깔고 손에 맏겨 비파 타니
說 盡 心 中 無 限 事 (설진심중무한사) 마음속 숱한 사연 모두 털어 놓는듯 하네.
輕 攏 慢 撚 撥 復 挑 (경롱만연발복도) 가벼이 누르고 비벼 뜯고 다시 퉁기니
初 爲 霓 裳 後 六 么 (초위예상후륙요) 처음은 예상곡 뒤에는 육요구나.
大 絃 嘈 嘈 如 急 雨 (대현조조여급우) 큰 줄은 소란스런 소나기 같고
小 絃 切 切 如 私 語 (소현절절여사어) 작은 줄은 가냘픈 속삭임 같고,
嘈 嘈 切 切 錯 雜 彈 (조조절절착잡탄) 소란함과 가냘픔 섞어서 타니
大 珠 小 珠 落 玉 盤 (대주소주락옥반) 크고작은 구슬 옥 쟁반에 떨어지듯 하네.
間 關 鶯 語 花 底 滑 (간관앵어화저활) 때로는 꾀꼬리 소리 꽃가지 아래 흐르듯 하고
幽 咽 泉 流 氷 下 灘 (유인천류빙하탄) 샘물이 어름 밑을 흐르며 흐느끼는 듯 하고,
氷 泉 冷 澁 絃 凝 絶 (빙천랭삽현응절) 찬물이 얼어 붙듯 줄을 잠시 멈추니
凝 絶 不 通 聲 漸 歇 (응절불통성점헐) 멈추는 그대로 소리 또한 멎었는데
別 有 幽 愁 暗 恨 生 (별유유수암한생) 또다른 깊은 근심 남모르는 원한 일어
此 時 無 聲 勝 有 聲 (차시무성승유성) 소리 없음이 있음보다 애절하네.
銀 甁 乍 破 水 漿 迸 (은병사파수장병) 갑자기 은병 깨져 술이 쏟아져 나오듯
鐵 騎 突 出 刀 槍 鳴 (철기돌출도창명) 철기가 돌진하여 칼과 창이 부딪쳐 울 듯 하네.
曲 終 收 撥 當 心 畵 (곡종수발당심화) 곡이 끝나 비파 안고 한번 그으니
四 弦 一 聲 如 裂 帛 (사현일성여렬백) 네 현이 동시에 울리니 비단 찢어지듯 하여라
東 船 西 舫 悄 無 言 (동선서방초무언) 동쪽배 서쪽배의 손님들 초연하여 말이 없고
唯 見 江 心 秋 月 白 (유견강심추월백) 오직 강 가운데의 가을 달 밝은 것만 바라보네.
沈 吟 放 撥 揷 弦 中 (심음방발삽현중) 침착히 읊으고 발을 거두어 악기 줄에 꼽으니
整 頓 衣 裳 起 斂 容 (정돈의상기렴용) 옷을 정돈하고 일어나 얼굴을 가다듬는다.
自 言 本 是 京 城 女 (자언본시경성녀) 스스로 말하기를, 본래 서울 여자인데
家 在 蝦 蟆 陵 下 住 (가재하마릉하주) 하마릉 아래의 집에 살았다 하네.
十 三 學 得 琵 琶 成 (십삼학득비파성) 열세살에 비파를 배워고
名 屬 敎 坊 第 一 部 (명속교방제일부) 유명한 교방의 제 일부에 속했었다네.
曲 罷 曾 敎 善 才 服 (곡파증교선재복) 한 곡조 타고 나면 일류 악사들도 탄복하고
粧 成 每 被 秋 娘 妬 (장성매피추낭투) 화장하면 번번히 미인들의 질투를 받았다네.
五 陵 年 少 爭 纏 頭 (오릉년소쟁전두) 오릉의 젊은이들 머리얽히어 다투고
一 曲 紅 綃 不 知 數 (일곡홍초불지수) 한 곡에 붉은 비단 수없이 받았다네.
鈿 頭 銀 篦 擊 節 碎 (전두은비격절쇄) 자개 박은 은비녀머리 박자 맞추다 깨뜨리고
血 色 羅 裙 飜 酒 汚 (혈색라군번주오) 붉은 비단치마 술로 얼룩졌었다 하네.
今 年 歡 笑 復 明 年 (금년환소부명년) 웃고 즐기며 한 해 한 해 보내느라
秋 月 春 風 等 閑 度 (추월춘풍등한도) 세월 가는 줄을 모르고 지냈는데,
弟 走 從 軍 阿 姨 死 (제주종군아이사) 동생은 군대 가고 양어머니마저 죽고
暮 去 朝 來 顔 色 故 (모거조래안색고) 어느덧 나이 들어 얼굴빛이 변하니
門 前 冷 落 車 馬 稀 (문전랭락차마희) 문 앞은 쓸쓸하고 찾는 손도 드물어
老 大 嫁 作 商 人 婦 (로대가작상인부) 늙어서 어쩔 수 없이 상인의 아내 되니
商 人 重 利 輕 別 離 (상인중리경별리) 상인은 이익보다 이별을 가벼이 여겨
前 月 浮 梁 買 茶 去 (전월부량매다거) 지난달 부량으로 차를 사러 갔다 하네
去 來 江 口 守 空 船 (거래강구수공선) 강어귀에 왔다 갔다 빈 배만 지키자니
繞 船 月 明 江 水 寒 (요선월명강수한) 차가운 강의 배를 비추는 달만 밝구나
夜 深 忽 夢 少 年 事 (야심홀몽소년사) 밤이 깊어 홀연 어린시절 꿈속에 젖으면
夢 啼 粧 淚 紅 欄 干 (몽제장루홍난간) 꿈도 울어 난간을 붉은눈물로 화장시킨다네.
我 聞 琵 琶 已 嘆 息 (아문비파이탄식) 비파 소리 듣고 이미 탄식 했던 나는
又 聞 此 語 重 喞 喞 (우문차어중즐즐) 여인의 말 듣고 또한번 한숨이 나네.
同 是 天 涯 淪 落 人 (동시천애륜락인) 우리는 다같은 천애의 물가에 떨어진 사람들
相 逢 何 必 曾 相 識 (상봉하필증상식) 만남이 어찌 예전에 알던 사이만의 일이랴.
我 從 去 年 辭 帝 京 (아종거년사제경) 나는 지난 해에 서울(장안)을 떠나
謫 居 臥 病 潯 陽 城 (적거와병심양성) 심양성에 귀양와 병들어 누웠다네
潯 陽 地 僻 無 音 樂 (심양지벽무음악) 심양 땅은 외지고 음악도 없어
終 歲 不 聞 絲 竹 聲 (종세불문사죽성) 한해가 다가도록 악기소리 못 듣고
住 近 盆 江 地 低 濕 (주근분강지저습) 분강 가까이 살아 땅이 낮고 또 습해
黃 蘆 苦 竹 繞 宅 生 (황로고죽요댁생) 갈대와 대숲만 집을 둘러 무성 타네
其 間 旦 暮 聞 何 物 (기간단모문하물) 그 간 아침저녁 들은 소리라고는
杜 鵑 啼 血 猿 哀 鳴 (두견제혈원애명) 피맺힌 두견새와 원숭이의 슬픈 소리
春 江 花 朝 秋 月 夜 (춘강화조추월야) 봄 강의 아침 꽃과 가을 밤 달빛 아래
往 往 取 酒 還 獨 傾 (왕왕취주환독경) 가끔 술을 얻어 홀로 잔을 기울이고
豈 無 山 歌 與 村 笛 (기무산가여촌적) 어찌 산 노래와 초동의 피리 없으랴 만
嘔 啞 嘲 折 難 爲 聽 (구아조절난위청) 조잡하고 시끄러워 들어주기 어렵다네
今 夜 聞 君 琵 琶 聲 (금야문군비파성) 오늘밤 그대의 비파 소리 들으니
如 聽 仙 樂 耳 暫 明 (여청선악이잠명) 신선 음악 들은 듯 귀 잠시 맑았네.
莫 辭 更 坐 彈 一 曲 (막사경좌탄일곡) 사양 말고 다시 앉아 한 곡 들려주오
爲 君 飜 作 琵 琶 行 (위군번작비파행) 내 그대 위해 비파행을 지으리니
感 我 此 言 良 久 立 (감아차언량구립) 나의 말에 한 동안 서 있는듯 하더니
却 坐 促 絃 絃 轉 急 (각좌촉현현전급) 물러앉아 줄 울리니 곡조는 점점 급해져
凄 凄 不 似 向 前 聲 (처처불사향전성) 슬프기 그지 없어 앞의 곡과 다르니
滿 座 重 聞 皆 掩 泣 (만좌중문개엄읍) 듣는 모든 사람 소리 죽여 흐느끼네
座 中 泣 下 誰 最 多 (좌중읍하수최다) 그 중 누가 눈물을 가장 많이 흘렸는가
江 州 司 馬 靑 衫 濕 (강주사마청삼습) 강주사마의 푸른 적삼 흠뻑 젖어 있구나.
[작품 해제]
비파행 [琵琶行]은 중국 중당(中唐)의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시다. 816년 작. ‘비파인(琵琶引)’이라고도 한다.
당시 백거이는 신악부(新樂府)를 비롯한 일련의 사회비판의 시 때문에 중앙에서 쫓겨나, 천애(天涯:하늘 끝)라고 하던 주장 [江]에 좌천되어 있었다. 그 때는 그의 인생과 문학의 위기이기도 했는데, 어느 가을 날 저녁 우연히 들려오는 비파 소리에 느낀 바 있어 자신의 내면을 대상으로 단숨에 이 시를 지어냈다.
제1장에서는 비파의 음색에 매혹되어 끊임없이 떠오르는 환상을 “間關鶯語花底滑, 幽咽泉流氷下難”과 같이, 때로는 화사하게 때로는 울적하게 펼쳐 나간다. 그것은 바로 음악을 언어로 옮기는 독창적인 형상이 되기도 한다.
제2장에서는 한때 화려한 서울(장안)에서 미모와 슬기로 뭇사람의 이목을 끌었던 몸이 지금은 상인의 아내가 되어, 강상(江上)의 배에서 외로이 남편을 기다린다는, 비파를 탄주하는 여인의 술회에 문화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변경의 땅에서 잿빛의 나날을 보내는 자신의 처지가 생각되어 누를 길 없는 한탄을 슬픈 억양으로 노래하였다.
이 시는 칠언(七言)의 유려한 울림을 거침없이 88행에 실었으며, 문자로 음악을 시각화(視覺化)하면서, 변전하는 운명에의 통곡을 표상하고 인간의 비애를 빼어나게 결정시켰다. 그후에 이 시는 음악을 문자로 정착시키는 수법의 지침이 되었고, 또 음악 연주자와 시인의 인간관계적 구성을 거쳐 소설과 희곡에 오래도록 제재(題材)를 제공하였다. 서유럽에서는 장한가(長恨歌) Everlasting Remorse)》에 대응하는 ‘류트송(Lute Song)’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백과사전>
속좌우명(續座右銘)
勿慕富與貴 물모부여귀
부귀를 바라지 말고
勿憂賤與貧 물우천여빈
빈천을 근심하지 말라
自問道何如 자문도하여
도리가 어떠한가를 스스로 물어봐야지
貴賤安足云 귀천안족운
어찌 족히 귀천만을 말하는가
聞毁勿戚戚 문훼물척척
비방을 들어도 걱정말고
聞譽勿欣欣 문예물흔흔
칭찬을 들어도 기뻐하지 말라
自顧行何如 자고행하여
행실이 어떠한가를 스스로 돌아봐야지
毁譽安足論 훼예안족론
어찌 족히 훼예만을 논하는가
無以意傲物 무이의오물
내 생각으로 다른 사물에 오만하지 말고
以遠辱于人 이원욕우인
남으로부터 욕됨을 당함을 멀리하라
無以色求事 무이색구사
아부하는 얼굴로 일을 하지 말고
以自重其身 이자중기신
자신의 몸을 자중하여라
游與邪分歧 유여사분기
노닐 때는 사악함과 떨어지고
居與正爲隣 거여정위린
평소 살아감에는 정직함과 이웃하라
於中有取捨 어중유취사
중용에서 취사선택하고
此外無疏親 차외무소친
이것 외에는 친하고 소원함을 없애라
修外以及內 수외이급내
밖을 닦아서 내면에 미치게 하고
靜養和與眞 정양화여진
온화함과 진실됨을 조용히 길러라
養內不遺外 양내불유외
내면을 기름에 외면을 버리지 말고
動率義與仁 동솔의여인
의리와 사랑으로 행동하라
千里始足下 천리시족하
천리길도 첫걸음에서 시작하며
高山起微塵 고산기미진
높은 산도 미세한 티끌에서 높아진다
吾道亦如此 오도역여차
나의 도리도 또한 이와 같아서
行之貴日新 행지귀일신
실행하여 날마다 새롭게 됨을 귀하게 여긴다
不敢規他人 불감규타인
감히 남을 규제하지 못하여
聊自書諸紳 료자서제신
애오라지 스스로 여러 옷띠에 적어두고서
終身且自勖 종신차자욱
죽을 때까지 장차 스스로 힘써서
身沒貽後昆 신몰이후곤
자신이 죽은 뒤에는 후손까지 끼친다
後昆苟反是 후곤구반시
후손 중에서 진시로 이를 어기면
非我之子孫 비아지자손
결코 나의 자손이 아니리라
양죽기(養竹記)
竹似賢何哉(죽사현하재) : 대나무는 현명한 사람과 비슷한데, 왜 그런가?
竹本固(죽본고) : 대나무 뿌리는 단단하여,
固以樹德(고이수덕) : 단단함으로써 덕을 세우고 있다.
君子見其本(군자견기본) : 군자는 그 뿌리를 보면
則思善建不拔者(칙사선건불발자) : 곧 뽑히지 않는 훌륭한 덕을 세울 것을 생각하게 된다.
竹性直(죽성직) : 대나무의 성질은 곧아서,
直以立身(직이립신) : 곧음으로써 자신이 몸을 서게한다.
君子見其性(군자견기성) : 군자는 그 성질을 보면
則思中立不倚者(칙사중립불의자) : 곧 어느 편에도 의지 하지 않는 마음이 서게 할 것을 생각하게 된다.
竹心空(죽심공) : 대나무 속은 비어서,
空以體道(공이체도) : 비어있음으로써 도를 체득하고 있다.
君子見其心(군자견기심) : 군자는 그 빈 속을 보면
則思應用虛受者(칙사응용허수자) : 곧 자기의 마음을 비우고 남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응용할 것을 생각하게 된다.
竹節貞(죽절정) : 대나무 마디는 곧아서,
貞以立志(정이립지) : 곧음으로써 뜻을 세우고 있다.
君子見其節(군자견기절) : 군자는 그 마디를 보면
則思砥礪名行(칙사지려명행) : 곧 자기 이름과 행실을 갈고 닦아서
夷險一致者(이험일치자) : 순경에서나 험경에서나 한결 같을 것을 생각하게 된다.
夫如是故(부여시고) : 이러하기 때문에
君子人(군자인) : 군자들이
多樹之(다수지) : 이것을 많이 심어
爲庭實焉(위정실언) : 정원수로 삼고 있는 것이다.
貞元十九年春(정원십구년춘) : 정원 19년 봄에
居易以拔萃選及第(거역이발췌선급제) : 발췌과에 급제하여
授校書郞(수교서랑) : 교서랑 벼슬이 제수되었다.
始於長安(시어장안) : 처음 장안에 와서
求假居處(구가거처) : 빌리어 살 곳을 구하다가
得常樂里故關相國私第之東亭고관상국사제지동정(득상락리) : 상락리의 작고하신 관국공 사저의 동쪽 정자에
而處之(이처지) : 거처하게 되었다.
明日(명일) : 다음 날
屨及于亭之東南隅(구급우정지동남우) : 정자의 동남쪽 모퉁이로 산책을 나갔다가
見叢竹於斯(견총죽어사) : 거기에 대나무 숲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枝葉殄瘁(지엽진췌) : 가지와 잎새가 말라 죽어
無聲無色(무성무색) : 볼품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詢乎關氏之老(순호관씨지노) : 관상국 댁의 늙은 하인에게 물어보니
則曰(칙왈) : 대답하기를,
此相國之手植者(칙왈차상국지수식자) : “이것들은 관상국께서 손수 심었던 것입니다.
自相國捐館(자상국연관) : 관상국께서 집을 내어놓아
他人假居(타인가거) : 다른 사람이 빌려 살게 되었는데,
繇是(요시) : 이 때부터
筐篚者斬焉(광비자참언) : 광주리를 만드는 자들이 베어가기도 하고
篲箒者刈焉(수추자예언) : 빗자루를 만드는 자들이 잘라가기도 하여,
刑餘之材(형여지재) : 형벌을 받듯 잘리우고 난 나머지 대나무들에는
長無尋焉(장무심언) : 한발 길이로 자란 것도 없고
數無百焉(수무백언) : 그 수도 백이 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又有凡草木(우유범초목) : 또 뭇 풀과 나무들이
雜生其中(잡생기중) : 그 속에 섞여 나서
苯䔿薈蔚(분준회울) : 무성히 잡생하게 되어
有無竹之心焉(유무죽지심언) : 대나무는 없어진 듯한 마음까지 갖게 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居易惜其嘗經長者之手(거역석기상경장자지수) : 나는 이것들이 일찍이 훌륭한 분의 손을 거쳤으나
而見賤俗人之目(이견천속인지목) : 천하고 속된 사람들의 눈에 띄어
翦棄若是(전기약시) : 이처럼 잘려지고 버려지게 되었으나
本性猶存(본성유존) : 그 본성만은 그대로 보존되고 있음이 애석하였다.
乃刪翳薈(내산예회) : 이에 무성한 초목은 잘라내고
除糞壤(제분양) : 더러운 흙은 긁어내고
疏其間(소기간) : 대나무 사이를 티워주고
封其下(봉기하) : 그 아래 흙을 북돋아 주었는데,
不終日而畢(불종일이필) : 하루가 다가기 전에 일을 끝내었다
於是日出(어시일출) : 이렇게 하여 해가 뜨면
有淸陰(유청음) : 맑은 그늘이 생기고
風來有淸聲(풍래유청성) : 바람이 불어오면 맑은 소리가 들리며,
依依然欣欣然(의의연흔흔연) : 휘청휘청 기쁜 듯 하여,
若有情於感遇也(약유정어감우야) : 마치 감정이 있어 은덕에 감사하고 있는 듯 하였다.
嗟乎(차호) : 아아!
竹植物也(죽식물야) : 대나무는 식물이다.
於人何有哉(어인하유재) : 사람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以其有似於賢(이기유사어현) : 대나무가 현명한 사람과 비슷하다고 해서
而人猶愛惜之(이인유애석지) : 사람들은 그것을 애석하게 여겨
封植之(봉식지) : 북돋아 심어주었으니
況其眞賢者乎(황기진현자호) : 하물며 진정 현명한 사람에 대해서야 어떠하겠는가?
然則竹之於草木(연칙죽지어초목) : 그러니 대나무를 보통 풀과 나무에 비긴다면
猶賢之於衆庶(유현지어중서) : 마치 현명한 사람과 보통 사람들을 견주는 것이나 같다.
嗚呼(오호) : 아아!
竹不能自異(죽불능자이) : 대나무는 스스로 기이함을 나타낼 수가 없는데도
惟人異之(유인이지) : 오직 사람들이 그것을 기이하게 대해주고 있다.
賢不能自異(현불능자이) : 현명한 사람도 스스로 기이함을 나타낼 수는 없는 것이고
惟用賢者異之(유용현자이지) : 오직 현명한 사람을 등용해야할 사람이 그를 기이하게 해주어야 한다.
故作養竹記(고작양죽기) : 그러므로 <양죽기>를 지어
書于亭之壁(서우정지벽) : 정자의 벽에 써 놓아
以貽其後之居斯者(이이기후지거사자) : 뒤에 여기에 살게 될 사람들에게 남겨주고,
亦欲以聞於今之用賢者云(역욕이문어금지용현자운)
: 또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 현명한 사람을 등용해야 할 사람들에게도 이 뜻이 알려지도록 하려는 것이다.
苦熱(고열)
人人避暑走如狂 (인인피서주여광).....사람들은 미친 듯 피서를 떠나지만
獨有禪師不房出 (독유선사불방출).....스님만은 방 안에서 두문불출하네
可是禪房無熱到 (가시선방무열도).....선방에는 더위도 얼씬거리지 못할까
但能心靜卽身冷 (단능심정즉신냉) ....마음이 고요하니 몸도 시원할 테지
感 興 (감 흥)
吉凶禍福有來由 [길흉화복유래유] 길흉화복에는 이유가 있으리니
但要深知不要憂 [단요심지불요우] 원인 깊이 살피되 두려워 마라
只見火光燒潤屋 [지견화광소윤옥] 불길이 젖은 집을 태움은 보았으나
不聞風浪覆虛舟 [불문풍랑복허주] 풍랑이 빈배를 뒤집음은 못 들었네
名爲公器無多取 [명위공기무다취] 명예는 모두의 것 많이 가지려 말고
利是身災合少求 [이시신재합소구] 이득은 몸의 재난 적당히 탐하여라
雖異匏瓜難不食 [수이포과난불식] 표주박과 달라서 안 먹을 수 없지만
大都食足早宜休 [대도식족조의휴] 배부름이 느껴지면 먹기를 그쳐라
太行路(태행로)
太行之路能최車(태행지로능최거) 태행은 길이 험해 수레를 부순다지만
若比人心能坦途(약비인심능탄도) 그대 마음에 비하면 평탄하다네
巫峽之水能覆舟(무협지수능복주) 무협은 물결이 심해 배를 뒤엎어지만
若比人心是安流(약비인심시안류) 그대 마음에 비하면 순탄하다네
人心好惡苦不常(인심호악고불상) 변덕스런 사람 마음 좋았다 나빴다
好生毛羽惡生瘡(호생모우악생창) 좋으면 감싸주고 싫으면 상처주네
與君結髮未五載(여군결발미오재) 그대와 결혼한 지 오 년도 못되어
豈期牛女爲參商(기기우녀위삼상) 정 깊던 우리 둘 멀어질줄 몰랐네
古稱色衰相棄背(고칭색쇠상기배) 옛부터 늙어지면 서로가 등진다고
當時美人猶怨悔(당시미인유원회) 옛 미인들도 원망하고 후회했지만
何況如今鸞鏡中(하황여금난경중) 어찌된 일인지 거울속에 비친 얼굴
妾顔未改君心改(첩안미개군심개) 늙지도 않았는데 그대 마음 변했네
爲君薰衣裳 (위군훈의상) 그대 위해 향훈을 옷에 뿌려도
君聞蘭麝不馨香(군문란사불형향) 그대는 난사의 향내 초차 모르고
爲君盛容飾 (위군성용식) 그대 위해 화장하고 치장을 해도
君看金翠無顔色(군간금취무안색) 그대는 보고도 표정이 없네
行路難 (행로난) 인생 길은 험난하여
難重陳 (난중진) 그 어려움 말도 못해
人生莫作婦人身(인생막작부인신) 세상에 나서 여자 몸 되지마라
百年苦樂由他人(백년고락유타인) 백년의 고락이 남에게 달렸다네
行路難 (행로난) 인생 길 험난하기가
難於山 (난어산) 산보다 험난하네
險於水 (험어수) 물보다 험난하네
不獨人間夫與妻(부독인간부여처) 오직 부부간만 그런 것이 아니니
近代君臣亦如此(근대군신역여차) 요즈음 군신간도 또한 같다네
君不見 (군불견)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左納言右納史 (좌납언우납사) 임금의 좌우 측근들을
朝承恩暮賜死 (조승은모사사) 아침에 은총 받고 저녁에 죽음 받네
行路難 (행로난) 우리 인생 길이 험난한 것은
不在水 (부재수) 물길에 있지 않고
不在山 (부재산) 산길에 있지 않고
只在人情反覆間(지재인정반복간) 오직 변하는 사람 마음 안에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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