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덕성당 →남방제 →공세리 성당→성거산 성지→배티 성지
20Km 15.6Km 42.8Km 27.8Km
21. 남방제
신창 남방제는 현재는 충남 아산시 신창면 남성1리 마을로
성 조윤호(1848~1866, 요셉)가 태어나서 성장한 곳이다.
조윤호는 성인 조화서 베드로의 아들이며, 1839년에 치명한 조 안드레아의 손자이다.
1848년 충청도 신창에서 막내아들로 태중 교우로 태어났다.
8세 때에 모친을 여의었으며 1865년 아버지를 따라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성지동으로 이사하여 교우 처녀인 이 루치아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1년 후 병인박해가 확대되면서 조화서와 조윤호 부자는
1866년 12월 4일 성지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정원지(일명 원조, 1846~1866, 베드로),
이명서(일명 재덕, 1821~1866, 베드로)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전주 감영에서 부친과 여러 차례에 걸친 신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부친이 형장으로 갈 때에는 서로 천국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였다.
그가 갇힌 곳은 좌옥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부자를 한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칼로 처형할 수 없다는 국법에 따라
부친이 참수된 지 10일 후인 12월 23일(혹은 12월 18일, 12월 28일)에 조윤호는
전주 서문 밖 서천교 형장에서 죽도록 매를 맞고 끝내는 노끈으로 목이 졸려 순교하였다.
당시 나이 18세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죽임을 당한 조윤호 성인은
당시 거지들이 순교자의 시체를 질질 끌고 다니며 거렁뱅이 짓을 하곤 했는데
시체가 하도 참혹해서 거지가 끌고 가면 누구든지 겁에 질려 밥을 주었다고 한다.
이로써 조윤호 집안은 3대에 걸쳐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그의 시신은 서천교 너머 용머리 고개에 묻혔다가, 그 후 교우들이 시체를
소양면 유상리 막고개에 있는 아버지 묘 옆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다른 증언록에는 시신을 용머리에 갖다버렸고 시신을 찾지 못했다고 한 점으로 볼 때
유상리 막고개로 조윤호 시신이 이장되지 못하고
아예 처음부터 시신을 찾지 못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현재는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6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방한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원뿔 형상의 조형물은 신창지역 출신 순교자 36명이
천상의 세계를 향해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을 표현했다.
상부는 십자가 형상의 소나무와 함께 성 조화서 베드로와
성 조윤호 요셉이 서 있는 모습으로 형상화 하였다.
조형물 기단부에는 성 암브로시오의 사은 찬미가의 한부분인
'눈부신 순교자들의 무리가 하느님 아버지를 높이 기려 받드나이다'라고 새겨 놓았다.
22. 공세리 성당
바다가 육지로 깊숙이 들어온 아산만에 인접한 충남 아산군 인주면 공세리 성당은
일찍이 조선조 때 아산 · 서산 · 한산을 비롯해 멀리 청주 · 문의 · 옥천 · 회인 등
40개 고을의 조세(租稅)를 쌓아 두던 공세(貢稅) 창고가 있던 곳이다.
이 창고 건물은 1523년(중종 18년)에 개설됐다가 고종 때 폐지됨으로써
80칸짜리 건물이 헐리고
그 자리에 1897년 구(舊) 성당 및 사제관 건물이 들어섰다.
공세리 본당의 오늘이 있기까지 초대 주임을 지냈던
드비즈 신부의 열정적인 사목 활동이 그 바탕을 이루었다.
드비즈 신부는 2대 기낭 신부가 1년 만에 전임하면서
초대에 이어 다시 3대 주임으로 부임해
1930년까지 34년간 공세리 본당의 기반을 굳건히 하고 발전의 터를 닦았다.
그 크고 화려함으로 건축 당시 아산 지방의 명물로
멀리서까지 많은 구경꾼을 불러왔던 현재의 성당 건물은
그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건축 기술자들을 불러 지휘 감독하면서 지은
1922년도의 성당이다.
길에서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은 마치 순교의 현장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는 안내자처럼 길게 뻗어 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피땀이 범벅이 된 순교자의 발걸음을 묵상하면서 올라가면
한 켠으로는 성당이 자리하고 다른 한 켠으로는 신유박해(1801년)부터
병인박해(1866년)까지 아산 공세리 지역 출신 순교자 32위를 모신
납골식 순교자 현양탑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앞으로 순교자들의 잠자리를
말없이 지켜보는 성모상이 건립되어 있다.
순교자 현양탑이 세워진 곳에는 원래
1867년 정묘년에 순교한 박의서(사바스), 박원서(마르코)
그리고 박익서(본명 미상) 3형제가 나란히 잠들어 있는 묘소가 있던 곳이다.
그리 멀지 않은 옛날, 우리의 신앙 선조들 중에는 전국 곳곳에
이름도 채 남겨 놓지 못한 채 오직 천주를 모신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초개같이 목숨을 던진 무명의 순교자들이 많다.
이곳에 모셔져 있는 박씨 3형제는
겨우 그 이름과 몇 가지 행적이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어떻게 살다가 죽어 갔는지 그리 상세하게 전해 내려오지는 않고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다른 많은 순교자들과 마찬가지로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병인치명사적" 제11권에 보면
"병인풍파를 당하여 3형제가 함께 잡혀 수원으로 올라가며 원서가 말하되
'내 평생 천주 공경을 실답게 하지 못하였더니
오늘 주께서 나를 부르셨노라' 하며 즐거워 …
'동생 들어 보소. 우리 3형제 올라가 위주 치명하자' 하고
조금도 변함없이 3형제 수원으로 올라가니…"라고
이들의 최후의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공세리 성당은
1995년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본당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였고,
1998년 7월 28일 성당과 옛 사제관이 충청남도 기념물 제144호로 지정되었다.
2000년 성당과 옛 사제관의 원형 복원 공사와 사제관, 수녀원, 예수마음 피정의 집,
성체조배실, 주변 정비사업을 시작해 2002년 10월 13일 축복식을 가졌다.
2007년 8월에는 3형제 순교자의 묘가 있던 자리에 순교자 현양탑을 세워
아산 공세리 지역 출신 순교자 28위의 유해와 묘석을 봉안하고
그 위에 도자기 테라코타 부조작품 '28위 순교자'를 설치하였다.
그 후 추가로 발굴된 4위 순교자의 유해 또한 이곳에 모셔졌다.
2008년 9월에는 옛 사제관을 개보수하여 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성당 옆으로는 한적한 오솔길도 마련돼 있는데
이 길에는 예수의 수난을 묵상할 수 있는 14처가 마련돼 있다.
십자가를 지고 피땀을 흘리신 예수와 같이
우리 선조들도 자신의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시대가 가져온 험한 박해의 시기를 겪었던 것이다.
건축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해 온 성당 옆에는 오래 된 고목이 한 그루 있다.
그 연륜을 알 수 없는 고목은 공세리 본당의 긴 역사를
그저 무심한 듯 말없이 증언해주고 있다.
이곳은 천주교를 박해하던 1801년 신유박해 때부터 1873년 병인박해가 끝날 때까지
단지 천주(하느님)를 믿고 공경한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으신 공세리 지역의 순교자들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아산지역의 첫 순교자는 1825년 3월에 체포되어 해미에 투옥되었다가
문초와 형벌을 받고 석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한 허 바르바라를 시작으로
특히 병인박해 때 걸매리 출신 박씨 일가는 물론 박 홍갑, 오 인악, 박 제환(베드로) 등은
당시 불과 18세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믿음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영광스런 순교의 길을 택하였다.
고귀한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면서까지 진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셨던
이곳에 모셔진 순교자들의 삶과 얼, 정신을 우리는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내 평생 천주를 공경함을 실답게 못하였더니 오늘 주께서 나를 부르셨다."
(순교자 박원서 마르코)
이 나무는 수고(樹高)가 21M이고 나무둘레는 3.9M이며,
공세리 성당에 들어서면서 언덕 입구에 눈에 띄게 확연히 드러나는 나무이다.
많은 사연들이 담겨 있는 이 나무는 공세리 성당을 대표하는 나무 중 하나 이기도 하다.
세월의 흐름만큼이나 노쇠해서 현재 치료 중에 있다.
- 수 종 : 느티나무 - 지정번호 : 8 - 16 - 9 - 335
- 지정일 : 1982. 11. 10. - 수령(樹齡) : 250 - 300년
이 나무는 수고(樹高)가 24M에 달하고, 나무 둘레가 6M에 가깝다.
수려하고 아름다운 자태는 공세리 성당 건물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성당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품위있게 한다.
자연스레 지형에 맞춰 자란 뿌리와 패이고 갈라진 웅장한 나무줄기는
그동안 평탄치 않은 세월의 한을 한아름 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나무는 공세리 성당 문지기 나무로 불려지며 성당에 들어서는
이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할 뿐 아니라 웅장하게 뻗은 나무 그늘에 잠시 머물러 있노라면
세속에 찌들고 지친 마음들이 차분하게 정화되고 새로워짐을 느낄 수 있다.
- 수종(樹種) : 뽕나무 - 지정번호 : 8 - 16 - 9 - 336
- 지정일 : 1982. 11. 10 - 수령(樹齡) : 350년
23. 성거산 성지
경기도와 충청북도 경계선에 자리 잡고 있는 성거산 성지는
천안시 북면 납안리 46-1번지로 되어 있다.
한국의 성지 중에서 보기 드물게 해발 500m의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이 성지는
차령산맥 줄기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특히 봄, 가을에는 꽃들과 단풍으로 찾아 온 순례자들의 감탄을 자아내고 있다.
성거산이란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이 수행원들과 함께 성환 지역에 머무르면서
잠시 쉬는 동안 오색구름이 맴돌며 신령한 기운이 감도는 모습을 보고
‘거룩할 성(聖)'자에 '거할 거(居)'자로 이름을 지어준 다음
이 산에서 제사를 지낸 데서 유래한다.
또한 태조 이성계와 세종대왕도 온양 온천에 목욕을 하러 올 때마다
이곳 성거산에 들려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이곳 성거산 성지 주변은 박해 때 신앙의 선조들과 순교자들이 피신하여
신앙생활을 영위했던 삶의 터전인 교우촌 7개가 산재되어 있어
선조들의 신앙의 향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860년대부터 1920년 사이에 세워진 교우촌을 보면 서덕골(서들골), 먹방이, 소학골,
사리목, 매일골, 석천리, 도촌 등이 있었으며, 이 교우촌 중 목천 서덕골 교우촌은
뮈텔 주교가 배티 삼박골 교우촌까지 사목 방문을 할 때 거쳐 가는 경로였다.
또한 서덕골 교우촌은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백부 최영렬이 이주해 살던 곳으로,
1839년 기해박해 이후 최양업 신부의 둘째 아우인 최선정 안드레아가 맡겨져 성장한 곳이며
최양업 신부도 종종 드나들었던 곳이다.
특히 소학골 교우촌은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칼레(Calais, 姜) 신부와 페롱(Feron, 權) 신부가
박해를 피해 머물다 중국으로 탈출한 곳이고, 박해가 끝난 뒤에도 뮈텔(Mutel, 閔德孝) 주교,
두세(Doucet, 丁) 신부, 베르모렐(Vermorel, 張) 신부가 거처하거나 순방하던 곳이다.
칼레 신부와 페롱 신부는 병인 박해 때 동료 선교사들이 곳곳에서 체포되자
전교 여행을 중단하고 한실(현 경북 문경군 마성면 성내리) 교우촌에서 숨어 지냈다.
그러다가 포졸들에게 쫒기면서 연풍을 지나 괴산과 진천을 거쳐
배티 삼박골 교우촌에 머무르다가 마지막으로 소학골에 와서
페롱 신부와 함께 잠시 은신하다가 조선을 떠난 유서 깊은 교우촌이다.
또한 소학골 교우촌에는 병인박해시 10명의 순교자가 탄생했는데,
5명은 공주 감영에서 참수형을 당했고 나머지 5명은 서울 포도청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공주 감영에서 참수당한 최천여 베드로, 최종여 라자로, 배문호 베드로, 고 요셉,
채서방 며느리는 성거산 성지 제1줄무덤에 안치되어 있다.
현재 제1줄무덤에 총 38기, 제2줄무덤에 총 36기의 묘봉이 있는데,
시신(屍身)들이 겹쳐 묻혀 있어 실제 이곳에 안장된 순교자의 수는 훨씬 더 많다고 한다.
1959년 미군의 공군기지가 성거산 정상에 주둔하면서 도로를 개설할 때
도로 상에 있었던 묘봉 수가 총 107기였다고
이장(移葬) 작업에 참여한 6명의 증언이 있었다.
따라서 이곳은 병인박해 때 내포지방에 살다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 때문에
순교를 당한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안식처이다.
하느님과 진리를 위해, 사랑은 죽음보다 강함을
생명을 바쳐 증거한 순교자들의 신앙은
오늘날 한국 교회를 탄생시킨 원동력이 되고 못자리가 되었다.
그동안 오고가는 사람도 없이 벌 · 나비 · 짐승들만이 함께 했던
성거산 성지의 무명 순교자들은
침묵의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다.
성지 현황을 보면 제1줄무덤에서 제2줄무덤까지의 거리가 약 530m 정도로,
가는 동안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칠 수 있도록 14처가 설치되어 있고,
넓은 성모광장에는 야외제대와 신자석이 마련되어 있어
야외미사를 봉헌하기에 불편함이 없다.
또한 순례자들이 식사를 하고 쉴 수 있는 쉼터도 마련되어 있다.
제2줄무덤부터 시작하는 2.1km 거리의 '순교자의 길'에는
순교자와 관련된 많은 조각품과
한국의 103위 성인과 성거산(소학골) 출신 순교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55개의 대형 호롱등이 설치되어 있어 전구하며 조용히 묵상할 수 있다.
2011년 5월 7일에는 성거산 아래 성지 초입에 건립한 성당과
수산나 피정의 집에 대한 봉헌식을 가졌다.
한편 교우촌 중에서 가장 오래된 소학골 교우촌에는
박해 때 교우들이 살던 집터와 태풍에 의해 쓰러진 돌배나무가 남아 있어
오랜 역사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성거산 성지는 깊은 산골에 위치해 소음이 없으며 공기가 맑고 전망이 아름다워
한 번 순례를 온 이들은 꼭 다시 오고 싶어 하는 곳이다.
특히 계절마다 무명 순교자를 상징하는 각종 야생화가 피어 군락을 이루며
주변 환경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2008년 12월 22일 성거산 성지는 '천안 성거산 천주교 교우촌터'라는 명칭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75호로 등록되었다.
첫댓글 20년 전 신앙초기때는 칼을 두려워했어요.이젠 그렇지 않아요.천국에서 영원히 산다고 생각하니...
순교가 겁나지 않아요 ^^
항상 형제님께 고마운 마음입니다 ^^
덕분에 편안하게 봅니다.
순례 때 도움이 많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2022년
성지 순례 때
공세리 성당이 빠져서
올해는 꼭 가보려고 하는데
도움이 많이 될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