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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太白 / 당나라 시선 이백
시선 이백의 초상화
이백[이백, 서기 701년~서기762년]은 중국 당나라 때 명시인으로 시성 두보와 함께
이두[李杜]로 불린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굴원 다음으로중국 문학사상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으로 꼽힌다.
이백(李白 / Li Po / 이태백 / 701-762)
중국 당대(唐代)의 시인.
자는 태백(太白). 청련거사(靑蓮居士)라고도 한다. 두보(杜甫)와 함께 중국 최고의 고전시인으로 꼽힌다(→ 중국문학).
생애
■ 제1기(출생~25세)
출생지와 혈통에 관해서는 촉(蜀)의 면주(綿州:지금의 쓰촨 성[四川省] 창밍 현[彰明縣])에서 출생했다는 설, 5세 때 아버지와 함께 서역에서 이주해왔다는 설, 아버지가 상인이었다는 설, 서북 지방의 이민족이었다는 설 등 일정하지 않다. 경제적으로 매우 풍족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25세경까지 일시적인 여행은 했으나 대체로 촉국에서 지낸 것으로 여겨진다. 일찍부터 독서를 좋아했고, 15세 무렵에는 시문 창작에도 높은 기량을 보였다고 한다. 20세 무렵에는 임협(任俠)의 무리와 사귀었으며, 칼로 사람을 베었다는 기록도 있다. 또 익주(益州:지금의 쓰촨 성에 있음)의 자사(刺史) 소정(蘇頲)에게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동엄자(東嚴子)라는 은자와 함께 민산 산[岷山]의 남쪽에 은거하는 등 세속에서 누릴 수 없는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7
■
제2기(25~42세)
20대 중반에 고향인 촉을 떠나 약 10년간은 안릉(安陵:지금의 후베이 성[湖北省]에 있음)을 중심으로 생활했다. 27세경 그 지방의 명문 허어사(許圉師)의 손녀와 결혼했다. 맹호연(孟浩然:689~740)과의 교제도 이무렵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35세 무렵에는 산둥[山東] 지방을 중심으로 각지를 돌아다녔다. 그후 40세 무렵 공소부(孔巢父)·배정(裵政) 등 은일하는 지식인들과 함께 산둥의 추라이 산[徂徠山] 기슭 죽계(竹溪)에 모여, 술에 취해 생활했다. 당시 이를 '죽계의 육일'(六逸)이라 했다.
■ 제3기(42~44세)
742년(天寶 1) 가을 처음 장안에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친하게 지낸 도사 오균(吳筠)이 조정에 입조하면서 그의 추천으로 벼슬을 하게 된 듯하다. 장안에서는 우선 자극궁(紫極宮:도교사원)에서 당시 저명한 태자 빈객 하지장(賀知章:659~744)을 만나 '천상의 적선인(敵仙人)'으로 찬양되면서, 그 명성이 순식간에 장안의 시단에 퍼졌다. 그뒤 현종(玄宗)을 알현하여 시문의 재능을 인정받아 한림공봉(翰林供奉)으로 임명되었으나 정규직은 아니었다는 설도 있다. 이백의 일생 중 관직에 몸담았던 것은 이 시기이며, 이한림·이공봉 등의 호칭이 이때 나왔다. 조정에 나가는 일은 누구보다도 이백 자신이 희망했던 것이기는 했지만, 궁정시인으로서의 생활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 그는 황제 측근들과의 마찰로 인해 744년 장안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유분방한 사람이 법도와 체면을 중시하는 궁정사회에 적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이백은 화려한 명성과는 달리 굴절된 고독감을 느꼈다. 이 3년간은 시간적으로는 짧았지만, 다수의 작품과 다양한 체험으로 수놓아진 중요한 시기였다.
■ 제4기(44~56세)
744년 봄 장안에서 나온 이백은 동쪽으로 향했으며, 그해 여름 뤄양[洛陽]에서 두보(杜甫:712~770)를 만났다. 두 시인이 만남으로써 서로 그리워하는 아름다운 우정의 시가 탄생되었으며, 문학사적으로도 흥미가 깊은 시기이다. 다만 상호 영향관계에 있어서 두보가 이백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으나 그 역관계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1세의 나이차와 그 시점에서의 명성과 역량의 차이라는 일반적인 원인 외에도 같은 시대의 시인을 평가하는 방식에서 두 사람의 태도가 기본적으로 달랐다는 점도 중요한 원인이다. 이백은 동시대의 시인을 언급한 시가 거의 없다. 이에 반해 두보는 같은 시대의 시인을 읊조린 경우, 그 시인의 작시 기량과 자질을 칭찬한 작품이 많다. 두보 및 고적(高適:702경~765)과의 직접적인 교유는 6개월 내지 1년 반 정도로 끝나고, 이백은 양쯔 강[揚子江] 하류지역에서부터 다시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그러나 완전한 방랑생활은 아니었으며, 양원(梁園:지금의 허난 성[河南省]에 있음)과 산둥 성에 생활의 근거지를 두었다. 장안에서 추방된 후 약 10년간의 이 시기가 제2차 방랑시기이다.
■ 제5기(56~62세)
755년(天寶 14) 11월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나고, 12월 뤄양이 함락되었다. 이듬해 6월에는 장안이 함락되고, 현종은 촉으로 피신했으며, 황태자[肅宗]가 영무(靈武:닝샤후이족 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에서 즉위했다. 당시 이백은 양쯔 강을 따라 선성(宣城:지금의 안후이 성[安徽省]에 있음) 각지를 떠돌아다니고 있었으며, 장안이 함락된 56세의 겨울, 루산 산[盧山]에 은거하고 있던 그는 현종의 아들 영왕(永王) 이린(李璘)의 수군에 막료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이백은 안녹산을 토벌하기 위해 참가했다. 그러나 황실 내부의 분쟁으로 영왕의 군대는 적군(賊軍)으로 간주되었고 영왕은 살해되었으며, 이백도 체포되어 심양(潯陽:지금의 장시 성[江西省] 주장 시[九江市])의 감옥에 갇혔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일단 석방되었으나, 대역죄가 추가되어 결국 멀리 야랑(夜郞:지금의 구이저우 성[貴州省] 서북부)으로 유배되었다. 759년(乾元 2년) 3월 이백은 야랑으로 가던 도중 양쯔 강 상류의 백제성(白帝城)을 지나면서 사면 통지를 받게 되었다. 다시 자유을 얻은 이백은 양쯔 강 중류의 둥팅 호[洞庭湖] 부근에서 시인 가지(賈至:718~772)를 만난 뒤 강남의 온화한 풍토에서 지냈다. 762년(寶應 1) 62세의 이백은 당도(當塗:지금의 안후이 성에 속함)의 현령이었던 족숙(族叔:일족의 숙부 세대에 속함) 이양빙(李陽冰)에게 병든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구당서 舊唐書〉에는 여러 해에 걸친 과도한 음주가 그 원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겨울이 가까워지면서 병세가 악화되었으며, 그해 11월 무렵 이양빙의 손에 시문의 초고를 맡기고 죽었다. 수군에 참가하면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양쯔 강에서 보낸 6여 년의 기간을 만년으로 분류할 수 있다.
작품
이백의 현존하는 1,000여 수의 작품은 제재나 시의 형태로 보아 중국 고전시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 그의 시의 내용을 제재에 따라 자리매김할 경우 가장 대표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여행·이별·음주·달빛·유선(遊仙) 등 소위 그의 세계관에서 유출되는 일련의 제재이다. 그것들은 소재로서 사용되는 경우, 주제로서 사용되는 경우, 혹은 어느 쪽이라고 확정하기 어려운 경우 등 다양하면서도 공통된 감각과 발상으로 그의 시의 특색을 더욱 증폭시켜주었다. 이 때문에 이백의 작품에는 각 제재의 기본적인 성격이 집약적·전형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 많다. 그것은 1,000여 년에 걸친 이백 시의 읽기 방식에서도 어느 정도 확실하게 나타난다. '시사'(詩史)로 불리는 두보의 시집이 대체로 제작연대로 배열된 데 비해, 이백의 시집은 각 시대를 통해 오로지 제재로 구분된 '분류본'이 중심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작품의 제작연대가 불확실한 것이 많다는 외적 조건이 작용했으나 근본적으로 그의 시가 두보의 시와는 달리 개별 작품의 창작 상황을 사상(捨象)시킨 일반적인 상황을 노래했다는 것과 제작연대가 불확실하더라도 작품성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 등이 내적 조건으로 작용했다.
이같은 관점에서 이백 시의 주요한 제재를 보면, 공통된 발상으로서 시공감각의 확대에 대한 지향, 미확정인 것에 대한 지향이라는 2가지 요소가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여행의 시에서 보이는 아득히 먼 시공에 대한 동경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관심, 이별의 시에서 보여지는 장래를 알 수 없는 흔들리는 심상(心象)의 상태, 음주라는 행위에 수반되는 수용하기 힘든 고양감, 심적 세계의 확대, 순간의 영원화, 광대 또는 영원한 시공에서 미지의 세계인 밝은 달빛에 대한 공감, 그리고 인간이 지니는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으로서 설정된 신선의 세계 혹은 그것을 향한 자유로운 비상 등 가장 이백적인 감각을 지닌 제재들 외에 여성의 슬픔을 노래한 규원(閨怨)의 시, 변경의 요새를 수비하는 병사를 노래하는 변새시, 역사를 장식한 장대한 드라마를 미미한 인간세계의 한순간의 꿈으로 노래한 회고시 등 이백은 다른 시인과 더불어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 따라서 두보·한유(韓愈:768~824)·백거이(白居易:772~846) 등이 이룩한 시사(時事)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 서사적 제재에 기초한 장대한 시편, 또는 시에 의해 인생과 자연계의 이치를 이야기하는 사변적인 작품 등은 이백에게서 찾아보기 어렵다. 한편 두보와 한유는 이백의 대표적 제재인 이별에서는 그리 저명한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
한편 시형(詩型)에 있어서도 이백의 작품은 흥미로운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시형으로는 우선 절구(특히 7언절구)를 꼽을 수 있으며, 다음으로 악부(樂府) 계열의 고체시를 들 수 있다. 율시에는 미숙했으며, 특히 7언율시에서는 소수의 작품을 제외하면 볼 만한 작품이 없다. 이백과 두보는 이 점에서도 대조적이다. 두보가 가장 성과를 거둔 시형은 7언율시이며, 상대적으로 7언절구에서는 뒤떨어졌다. 이러한 점에서 백거이의 작품은 비교적 균형있는 분포를 보인다. 또 한유의 대표작에는 장편 고체시에 속하는 것이 많다. 이백은 왕창령(王昌齡:698~755경)과 함께 당대 7언절구의 최고봉으로 평가되고 있다. 후세에 그의 작품은 '신품'(神品)으로도 일컬어졌다. 또 그의 대표작 중 7언절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상당히 높다. 결국 이 시형이 가진 표현기능의 존재방식은 이백에게 있어서 시적 이미지의 존재방식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인물상
이백이 어떠한 인간이었는가 하는 점은 결국 그에 관한 단편적인 전기자료와 그가 남긴 작품을 통해서밖에 알 수 없다. 그는 당시의 시인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정치가를 지망했으나 장안에서의 방만한 생활과 영왕의 수군에 참가했을 때의 낙관성에서 보여지듯이, 정치가로서는 그리 적성에 맞지 않았다. 현종이나 영왕 또는 지방의 유력자들도 시인으로서의 이백이 자신의 궁정이나 막하에 있기를 바랐으며, 그에게 정치적 능력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이때문에 이백은 정치적으로는 평생 불만이었으며, 죽음에 이르러서도 '재능을 펼칠 기회를 만나지 못했다'는 심경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인 실패는 시인 이백에게 더욱 많은 시간과 의욕을 주었으며, 무엇보다도 다양한 경험과 다원적인 시각을 제공했다. 만약 그가 장안에서 궁정시인으로서 성공하고 관리로서 출세했다면, 많은 군중시와 응소시(應詔詩)의 명작을 낳기는 했겠지만, 자유롭고 변화가 심한 이백의 시세계는 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결국 재야의 시인으로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중국문학사 측면으로서는 행운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백의 사상과 시풍에 관해서는 현재까지도 여러 가지 비평이 시도되고 있다. 이를테면 도교적·유교적·낭만적·고전적·정열적·객체적·쾌락적·민요적·애국적 등등, 거기에서 완전히 상반되는 요소가 지적되는 것도 별로 신기할 바가 없다. 한 사람의 시인에게 이만큼 평가가 다양한 예도 드물다. 그의 자유로움과 변환성은 이 점에서도 두드러진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의 작품 전체가 어느 한 가지 기준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다양한, 또는 다원적인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본(傳本)
그의 시문은 사후 이양빙에 의해 〈초당집 草堂集〉(10권)으로 묶여졌다. 또 친구 위호(魏顥)도 〈이한림집 李翰林集〉을 펴냈다. 이들 당대의 이백시집은 일찍이 산실되었다. 북송의 요사(樂史)에 의한 〈이한림집〉 20권과 〈이한림별집〉 10권도 일찍이 산실되었다. 다만 그 계통을 이은 송본(宋本)이 명대에 중간된 〈이한림집〉 30권으로, 소수만 남아 있다. 또 이것들과는 별도로 북송의 송민구(宋敏求)가 요사의 판본을 대폭 증보하여 분류한 책을 펴냈으며, 저명한 문학자 증공(曾鞏)이 재정리한 뒤 쑤저우[蘇州]의 장관 안처선(晏處善)에 의해 1080년에 간행되었다. 이 안씨 간본(蘇州本)은 실전되었지만, 그 계통을 이은 송본 〈이태백문집〉 30권이 현존 최고(最古)의 전본으로서, 일본 도쿄의 세이카도 문고[靜嘉堂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주석서로는 남송 양제현(楊齊賢)의 주에 원초(元初) 소자윤(蕭子贇)이 보충한 〈분류보주이태백시 分類補注李太白詩〉 25권이 가장 앞선 것이다. 청대의 왕기(王琦)는 양(楊)·소(簫) 2가(家)의 주를 보정하고, 여기에 명대 호진형(胡震亨)의 주 〈이시통 李詩通〉과 자신의 주를 첨가하여 상세한 집주를 만들고, 나아가 산문에도 주를 달았으며, 연보와 관련자료도 종합하여 〈이태백문집〉 36권을 간행했다. 이것은 이백 시의 주석사(注釋史)에서 가장 기본적인 문헌으로 손꼽힌다.
<백과사전 / BIE | 金成童 옮김>
이태백의 달과 두보의 밥사발
글 / 양부전
사람들은그본질상낭만을추구하는가싶다.
그래서사람들은천수백년을내려오면서두보는이밥과술과쇠고기가어쩌다생겨얼마나맛나게먹었던지과식으로
생을마감했고술을좋아했던이백은술마시고멱락강에서배타고달놀이를하다가물에빠져죽었다는 조금은허황함에
가까운이야기까지만들어낸게아닌가싶다.
“용재수필(容齋隨筆)”, “이태백”조(條)에따르면이백은멱락강에서술을마시고쪽배를타고달놀이를하다가물에빠져
죽은것이아니라병으로돌아갔다고한다.
“용재수필”의“이태백”조(條)에서는이렇게말하고있다.
이양빙의“이태백초당집서”문에는 “내가당도현령으로있을때태백이병이위중하게되었는데초고만권은수정도못한
상태라병상에서나에게넘겨주면서서문을써달라고했다.”고했고이화의“태백묘지(太白墓志)”에는 “태백은‘임종가’를
쓰고나서죽었다”고했다.
묘지명과“이태백초당집서문”을봐서이태백은확실히병으로돌아갔다. 하지만사람들은그렇게전하지않고있다.
둥근달휘영청밝은밤, 술한잔거나하게들고달빛어린강물에일엽편주띄워놓고풍월읊으며회포를풀던절세의시인
이태백이그출렁이는강물에비낀둥근달의그림자를건져안주를하려고뱃전에서허우적거리다가물에빠져죽는다.
태백이야죽건말건너무나도낭만적이다.
하지만가난하게살았던두보는과식으로죽었다고전한다.
두보의가난한정도는 “가을바람에지붕이날려간노래(草屋爲秋風所破歌)”라는시의제목에서도알수있다.
그러니그가난하고비참함을두보가이밥과술과쇠고기과식으로생을마감했다고함으로써그가난하고굶주림을
달래주려했던가싶다.
낙천적인사람에게는그직성이풀릴만한결말을만들어주고힘들고굶주렸던사람에게는그한을풀만한이야기를
만들어주어서이세상은더아름다운 게 아닐까그렇게생각해본다.
2006년 2월 25일에 찍은 사진이다. 이태백의 묘소는 안휘성 마안산시 당도현 태백진에 있다.
원래는 이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묻혀 있었는데 이곳 청산 아래는 자신이 존경하는 유명한 시인
사조(謝眺: 조는 目변이 아니라 月변인데 그 글자가 컴퓨터에 없음)가 살았던 곳이라,
후세에 범전정(范傳正)이란 이가 이곳으로 이장하고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비석은 이 묘소 바로 앞의 사당 벽에 보존되어 있다. 묘소를 이런 낮은 곳에 쓴 것이 특이하고,
비석을 묘소 앞에 세워두지 않은 것은 바로 앞에 사당이 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와는 다른 모습이다.
<사진: 산절로수절로 제공>
李白의 작품
山中問答 (산중문답)
問余何事棲碧山(문여하사서벽산)
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웃을 뿐, 답은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흘러가나니,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 아니네.
인생조로(人生朝露)
蘇武在匈奴 十年持漢節
소무재흉노 십년지한절
白雁飛上林 空傳一書札
백안비상림 공전일서찰
牧羊邊地苦 落日歸心絶
목양변지고 낙일귀심절
渴飮月窟水 飢餐天上雪
갈음월굴수 기찬천상설
東還沙塞遠 北愴河梁別
동환사새원 북창하량별
泣把李陵誼 相磵漏成血
읍파이릉의 상간누성혈
소무(蘇武) 흉노 땅에 잡혀 있으면서도
십년동안 한나라 사신의 부절(부절)을 지녔다
흰 기러기 상림원까지 날아와
편지를 전했지만 헛일이었고
양을 치느라 변지에서 고생하며
지는 해 볼 적마다 돌아가고픈 마음 간절하네.
목이타면 흉노 땅의 물을 마시고
주릴 때면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삼켰네.
고국으로 돌아가려니 사막의 변방 아득했고
북쪽 하수의 다리위에서 이능과의 이별을 슬퍼했네.
울며 이능의 옷자락을 잡고
마주보며 피눈물 흘렸네.
한나라 무제 때 소무(蘇武)는
사신으로 흉노(匈奴)에 갔다가 포로가 되었지만
19년 동안이나 지조를 지켜 항복하지 않고 모진 고문을 감수하였다.
소무(蘇武)는 뒤에 자신의 생존을 알리는
글을 발에 맨 기러기가 장안 상림원(上林園)에서 잡혀
다시 장안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의 일생이야말로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해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파란만장(波瀾萬丈)한 것이었다.
본편은 소무(蘇武)가 흉노(匈奴)에서 돌아올 때 흉노(匈奴)에 항복한
한(漢)의 장군 이릉(李陵)과 다리 위에서 이별한 유명한 고사를 노래한 시로
이백의 본집(本集) 권 二十二에 실려 있다.
기러기가 편지를 전한다는 이야기는 소무(蘇武)의 고사로부터 나온 것이며
사실이 아니고 이야기가 점차
소무(蘇武)가 그렇게 한 것처럼 전설화(傳說化)되었다고 한다.
春夜洛城聞笛(춘야낙성문적)
봄날 밤에 낙양에서 피리소리를 들으며
誰家玉笛暗飛聲(수가옥적암비성)
散入東風滿洛城(산입동풍만낙성)
此夜曲中聞折柳(차야곡중문절류)
何人不起故園情(하인불기고원정)
어느 집에선가 은은히 날아드는 옥피리 소리
봄바람 불어들어 낙양성에 가득찬다.
이 밤 노래 속에 절양류곡 소리 들려오니
누구인들 고향 그리는 마음 생기지 않으리오.
山中與幽人對酌(산중여유인대작)
兩人對酌山花開(양인대작산화개)
둘이서 마주앉아 잔을 드니 산 꽃이 피고
一杯一杯復一杯(일배일배부일배)
한 잔 한 잔 기울이다 끝없이 마셨네.
我醉欲眠卿且去(아취욕면경차거)
취했으니 자고싶네 그대는 가게나
明朝有意抱琴來(명조유의포금래)
내일 아침 생각나면 거문고 안고 다시 만나세.
春思(춘사) - 봄 생각
燕草如碧絲(연초여벽사) 연(燕) 땅의 풀, 실날처럼 돋을 때면
秦桑低綠枝(진상저록지) 진(秦) 땅의 뽕나무는 초록색 가지 뻗히나니.
當君懷歸日(당군회귀일) 님께서 고향 갈 날 생각하실 때쯤,
是妾斷腸時(시첩단장시) 이 몸은 님 그리워 애간장 태우는 때.
春風不相識(춘풍불상식) 봄바람은 내 심정 아랑곳하지 않고
何事入羅幃(하사입라위) 어쩌자고 침방의 비단 휘장 속에까지 불어드는 가.
月下獨酌(달아래 혼자 술을 -1)
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 화간일호주 독작무상친
꽃속에 술 한 병 들고서, 벗 없이 혼자 술을 드노라.
舉杯邀明月, 對影成三人 거배요명월 대영성삼인
술잔 속에 달님 맞으니, 달과 나와 그림자 셋일세.
月既不解飲, 影徒隨我身 월기불해음 영도수아신
달은 술도 못하고, 그림자도 건성으로 따라다니지만
暫伴月將影, 行樂須及春 잠반월장영 행락수급춘
잠시나마 달과 그림자 데리고, 다가오는 봄날을 즐기노라.
我歌月徘徊, 我舞影零亂 아가월배회 아무영령란
내가 노래하면 달은 노닐고, 내가 춤추면 그림자는 흔드네.
醒時同交歡, 醉後各分散 성시동교환 취후각분산
깨어 있을 땐 함께 즐기고, 취하면 각자 흩어지리.
永結無情遊, 相期邈雲漢 영결무정유 상기막운한
영원히 티없는 교유 맺어서, 먼 銀河에서 다시 만나리.
行路難(인생길 험하구나)
(3首中 第1首)
金樽淸酒斗十千 금준청주두십천
황금 술통엔 萬 말의 청주요,
玉盤珍羞直萬錢 옥반진수직만전
옥쟁반엔 萬냥어치 진수성찬인데.
停杯投箸不能食정배투저불능식
술잔 놓고 젓가락 던져 먹을 길 없으니,
拔劍四顧心茫然 발검사고심망연
칼 뽑아 사방을 보매 마음이 망연하구나.
欲渡黃河氷塞川욕도황하빙색천
황하를 건너자니 얼음이 강을 막고,
將登太行雪暗天장등태행설암천
태행산을 오르자니 백설이 온통 뒤덮였네.
閑來垂釣坐溪上 한래수조좌계상
한가로이 벽계에 와서 낚시 드리우고 앉아
忽復乘舟夢日邊홀부승주몽일변
홀연히 배위에서 임금님 곁에 있는 꿈꿨노라.
行路難, 行路難 행로난, 행로난
인생길 험하구나! 인생길 험하구나!
多岐路, 今安在다기로, 금안재
갈림길 많은데 내 갈 길은 어데 있노?
長風破浪會有時장풍파랑회유시
바람타고 파도 넘을 때가 반드시 있으리니
直掛雲帆濟滄海 직괘운범제창해
높은 돛 곧게 달고 너른 바다를 건너리라.
<註1>
이태백이 간신배들의 농간에 의하여 서울(長安)의
관직에서 쫓겨났으나 여전히 경국제민(經國濟民)과
입공건업(立功建業)하겠다는 정치적 야망을 꺾지않
은 채, 은연중 자신의 포부를 과시한 詩임.
将进酒 / 李白
君不见,黄河之水天上来,奔流到海不复回。
君不见,高堂明镜悲白发,朝如青丝暮成雪。
人生得意须尽欢,莫使金樽空对月。
天生我材必有用,千金散尽还复来。
烹羊宰牛且为乐,会须一饮三百杯。
岑夫子,丹丘生,将进酒,杯莫停。
与君歌一曲,请君为我倾耳听。
钟鼓馔玉何足贵,但愿长醉不愿醒。
古来圣贤皆寂寞,唯有饮者留其名。
陈王昔时宴平乐,斗酒十千恣欢谑。
主人何为言少钱,径须沽取对君酌。
五花马,千金裘, 呼儿将出换美酒,与尔同销万古愁
술을 권하며 / 이백
그대못보았는가하늘에서내린황하가
급히바다로흘러다시돌아오지못하는것을
그대못보았는가호화로운집에서거울보며백발을슬퍼하는것을
아침에검던머리가저녁에하얗게변한것을
삶은마땅히즐거움을즐겨야할지니
황금술잔에헛되이 빈달을담지말게나.
하늘은나에게반드시쓸모있는재능을주었을것이니
모든것을다쓴들다시되돌아오리라
양삶고소잡아마땅히즐기세
한번마련한술자리는넉넉하게즐기세.
잠선생, 단구님이여!
술잔올리니쉬지마시게
그대에게한곡올리오니
그대귀기울여들어주구려
종소리북소리귀한음악에무엇이부족하련가
다만함께취해술깨지않기바라오
옛성현은죽어이미흔적도없지만
오직술만이그이름을남기었다네
옛날조식이평락관에서잔치할때
귀한술아끼지않고즐겼거늘
주인은어찌돈이없다고하는가?
마땅히술을구하여그대와술마시려니
귀한말, 비싼옷
술과바꾸어
그대와함께만고에쌓인수심을삭히리라.
"술을 권하며"는 이태백의 시 중에서도 절창입니다.
이 시가 "그대 못 보았는가 하늘에서 내린 황하가 급히 바다로 흘러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로 시작합니다.
한동안 이 말이 이해되지 않았었습니다. 황하가 하늘에서 내려? 얼마전에 황하 발원지 지명이 성숙해(星宿海)라는 것을 알고,
"별들이 내려와 잠드는 바다"가 황하발원지 그러니 황하가 시작되는 곳이 바로 하늘이라는 이태백의 시는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별들이 내려와 잠드는 바다인 성숙해는 청해성(靑海省)의 꽤나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고 합니다.
長干行
열넷에 당신의 아내가 되어 - 李 白
妾髮初覆額 첩발초복액 제 머리 막 이마를 덮었을 때
折花門前劇 절화문전극꽃 꺾으며 문 앞에서 놀았었지요.
郎騎竹馬來 낭기죽마래 당신은 죽마 타고 와서
繞牀弄靑梅 요상농청매 우물난간을 돌며 청매로 날 희롱했지요
同居長干里 동거장간리 장간 마을에서 함께 살며
兩小無嫌猜 양소무혐시 우리 둘은 조금도 싫어하지 않았어요.
十四爲君婦 십사위군부 열 넷에 당신 아내가 되어
羞顔未嘗開 수안미상개 수줍어 얼굴 펴 본적이 없고
低頭向暗壁 저두향암벽 머리 숙여 어두운 벽을 향해 앉아
千喚不一回 천환불일회 천번 불러도 한번도 말대꾸 못했지요.
十五始展眉 십오시전미 열 다섯에 겨우 눈썹을 펴고
願同塵如灰 원동진여회 생사를 함께 하길 바랬지요.
常存抱柱信 상존포주신 언제나 미생의 신의를 지녔는데
豈上望夫臺 기상망부대 어찌 망부대에 오를 줄 알았겠어요.
十六君遠行 십육군원행 열 여섯에 당신은 멀리 가셨으니
瞿塘艷澦堆 구당염여퇴 구당협의 염여퇴는 물길이 험난한 곳
五月不可觸 오월불가촉 오월이 되어도 배는 갈 수 없고
猿聲天上哀 원성천상애 원숭이 슬픈 울음소리 하늘위로 솟는곳
門前遲行跡 문전지행적 문 앞에 당신 발길 끊기고
一一生綠苔 일일생록태 푸른 이끼 여러 번 돋았지요.
苔深不能掃 태심불능소 이끼 짙어 쓸지 못했는데
落葉秋風早 낙엽추풍조 가을 바람에 나뭇잎 떨어졌어요.
八月蝴蝶來 팔월호접래 팔월인데 나비들이 날아와서
雙飛西園草쌍비서원초 서쪽 동산 풀밭에서 짝지어 나니
感此傷妾心 감차상첩심 이 광경에 제 마음 속상해
坐愁紅顔老 좌수홍안노 시름에 겨워 곱던 얼굴 늙어가요.
早晩下三巴 조만하삼파 언제고 삼파로 내려오시면
預將書報家예장서보가 미리 집에 편지 보내어 알려주세요.
相迎不道遠 상영부도원 맞이하러 가는 길 멀다 않고
直至長風沙 직지장풍사 곧바로 장풍사로 달려가겠어요.
장간 마을에 사는
장사꾼 아낙이 돈벌러 먼길을 떠나간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는 심경을 그린
악부시 이백의「장간행」은
2수가 있는데 그 중 제1수이다.
포주신(抱柱信)은 미생지신(尾生之信)이란 고사로,
『장자』「도척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미생이란 사람이 사랑하는 아가씨와 데이트를 다리 밑에서 하기로 약속하고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와서 강물이 불어나자 미생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다리 기둥을 안고(抱柱) 기다리다가
결국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는 약속을 너무 고지식하게 믿는 것, 융통성이 없는 것을 뜻한다.
아내가 높은 데로 올라가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그 자리에서 죽어 화석이 되었다는 망부대(望夫臺)는
소철(蘇轍)의 『악성집』(樂城集)을 보면 충주 남쪽 수십 리에 있다.고 했다.
여기서는 높은 곳에 올라가 남편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한 것을 뜻한다.
구당(瞿塘)은 사천성 봉절현(奉節縣)에 있는 험준한 협곡으로 장강 삼협의 하나이고, 염여퇴(灩澦堆)는 구당협에
있는 암초인데 겨울에는 강물 밖으로 20장(丈)이나 드러나지만 여름에는 물에 잠겨 배들이 자주 난파된다.
삼파(三巴)는 사천성 동쪽에 있는 파군, 파동, 파서를 말하는데 낭백(閬白)의 물이 파(巴)자 모양으로 굽이 흐른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태심(苔深)은 푸른 이끼가 많다는 뜻으로 흔히 시인들은 근심을 비유하는 뜻으로 많이 쓴다.
장풍사(長風沙)는 안휘 회영현(懷寧縣) 동쪽에 있는 지명인데 지금의 장풍협이다.
이 시는 3단으로 이루어졌다.
첫 단락은 시의 주인공 아낙이 과거를 회상하였다.
장간리는 평민들이 살던 곳이라 엄격한 예교(禮敎)에 구속받지 않고 어릴 적부터 자유분망 하게 자라왔다.
앞머리가 이마를 덮는 서너 살 적부터 둘이서 봄이면 꽃을 꺾어 소꿉장난을 하였다.
어릴 적에 신랑은 때때로 죽마를 타고 와서 우물 난간을 돌며 청매(靑梅)로 나를 놀리기도 하였다.
둘은 흉허물이 없이 지내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어 시기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열 네 살에 죽마고우에게 시집을 왔는데 부끄러워 남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 숙인 채 벽만 보고 있었다.
남편이 천 번 불러야 실낱같은 목소리로 겨우 한번 대답한 수줍은 새댁이었다.
열 다섯 살이 되어서야, 겨우 남편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서 재가 되고 티끌이 될 때까지 백년해로 할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서방님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겠다는 약속을 미생처럼 굳게 지킬 것을 다짐했건만 장사하러 먼길을 떠나버렸기에 망부대에
올라가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할 줄을 예전에 미쳐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사랑하는 임이 계신 구당협은 암초가 많아 뱃길이 험한 곳인지라 오월에도 풍랑이 사나워 건너기가 쉽지 않고,
또한 원숭이 울음소리가 하늘 위로 솟는 험준한 곳이라서 늘 걱정이 태산같음을 노래하였다.
2단은 독수공방의 슬픔이다.
임이 오래 전에 떠나버렸기에 안방 문 앞에는 푸른 이끼가 내 수심만큼이나 무성하게 돋아났다.
차마 이끼를 쓸지 않았는데 그 위에 시간이 무거워져 가을 바람에 우수수 낙엽은 지고,
팔월인데도 나비들이 쌍쌍이 서쪽 동산 풀밭에서 노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정경을 보니 더욱 수심이 쌓여 곱디고운 얼굴에 주름살만 늘고 있다고 한탄하였다.
3단은 하루속히 남편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이다.
님께서 언제든지 삼파로 돌아오신다는 소식을 미리 편지로 알려주시면 님을 마중하는 길이 멀다않고 곧바로 장풍사로
달려가겠다고 하여 미치도록 보고픈 정을 노래하였다.
돈벌러 먼길을 떠난 남편이 하루 빨리 집으로 돌아오기를 애타게 염원한 엘레지로 아낙의 속마음을 꾸밈없이 묘사하였다.
그리움에 지친 여인의 심경을 진솔하게 그려내어 독자로 하여금 생이별의 슬픔을 동감케 한다.
지난 세월을 회상하고 푸른 이끼,낙엽,가을, 바람, 팔월,쌍쌍이 나는 나비 등의 목전의 사물과 계절의 변화를 투영시켜
자신의 쓸쓸한 처지를 형상화하였다.
가을 바람에 나무 잎은 지고 팔월인데 나비들이 짝을 지어 날고 있는 것을 보면서 내 곁에 임이 없음을 속상해하다 보니,
시름에 겨워 곱던 얼굴 늙어가요. "(坐愁紅顔老)라고 한탄한 것이다.
이 아낙은 적극적인 여인이라서 속절없이 탄식만 하지 않았다. 하루 속히 님이 내 곁으로 돌아오기를 빌면서 오신다는
소식만 주신다면 불원천리하고 마중 가겠다고 하였다.
춘원 이광수가 시조「님」에서
산 넘어 또 산 넘어 / 임을 꼭 뵈옵과저 / 넘은 산이 백이언만 / 넘을 산이 천인가 만인가...
/ 두어라 억이요 조라도 / 넘어볼까 하노라
라고 노래한 것처럼, 당신이 오신다면 억 만개의 산을 넘어 마중 가겠다는 것이다.
장간행」제2수에서 어찌하여 장사꾼 아낙이 되어 / 물 걱정 바람 걱정을 해야하는가... (那作商人婦 愁水復愁風)라고 하여
임에 대한 염려와 생이별의 슬픔을 절묘하게 형상화하였다.
남녀간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는 아름답지만, 사랑하는 임을 생이별하고 추야장 긴긴 밤을 독수공방하며 애태우는 정은
실로 눈물겹다.
그러나 사랑 이야기와 그리워하는 정을 시로 노래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젊은 장사군의 아낙이 남편을 생이별하고
사무치는 그리움에 애간장 태우면서 기다리며 염려하는 정을 구구절절 그려내어 우리들로 하여금 생이별의 아픔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일깨워주고 있다. ♣<해설: 문재철>
獨酌 (독작) - 李太白
天若不愛酒
천약부애주 : 하늘이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酒星不在天
주성부재천 : 주성이 하늘에 있을 수 없고
地若不愛酒
지약부애주 : 땅이 또한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地應無酒泉
지은무주천 : 땅에 주천이 있을 수 없도다
天地旣愛酒
천지기애주 : 하늘과 땅이 이렇듯 술을 사랑하거늘
愛酒不愧天
애주부괴천 : 술을 사랑하는 것이 하늘에 죄스러울리 있겠는가
已聞淸比聖
이문청비성 : 내 이미 들었거늘 맑은 술은 성인과 같고
復道濁如賢
복도탁여현 : 탁한 술은 현자와 같다고 일었음을
賢聖旣已飮
현성기이음 : 현자와 성인이 이처럼 술을 마셨거늘
何必求神仙
하필구신선 : 어찌 구태여 신선이 되기를 바라랴
三盃通大道
삼배통대도 : 석잔술을 마시면 대도를 깨닫게 되고
一斗合自然
일두합자연 : 한말술을 마시면 자연과 한몸이 되니
但得醉中趣
단득취중취 : 다만 취중에 얻은 멋들어진 아취를
勿爲醒者傳
물위성자전 : 술 취하지 않는 자에게는 전하지 말지어다
自遣(자견)
對酒不覺暝대주불각명
술을 마시다 보니 어느덧 날이 어둡고
落花盈我衣낙화영아의
옷자락에 수북히 쌓인 낙화여!
醉起步溪月취기보계월
취한 걸음, 시냇물의 달 밟고 돌아갈 제
鳥還人亦稀조환인역희
새도 사람도 없이 나 혼자로다.
그림 / 이백(李白)의 把酒問月(파주문월)
把酒問月(파주문월)
靑天有月來幾時(청천유월내기시)
我今停杯一問之(아금정배일문지)
人攀明月不可得(인반명월불가득)
月行卻與人相隨(월행각여인상수)
皎如飛鏡臨丹闕(교여비경임단궐)
綠煙滅盡淸輝發(녹연멸진청휘발)
但見宵從海上來(단견소종해상래)
寧知曉向雲間沒(영지효향운간몰)
白兎搗藥秋復春(백토도약추부춘)
嫦娥孤棲與誰鄰(항아고서여수린)
今人不見古時月(금인불견고시월)
今月曾經照古人(금월증경조고인)
古人今人若流水(고인금인약류수)
共看明月皆如此(공간명월개여차)
唯願當歌對酒時(유원당가대주시)
月光長照金樽裡(월광장조금준리)
술잔을 잡고 달에게 묻다
푸른 하늘의 달이여, 언제부터 있었느냐?
나 지금 술잔을 멈추고 한 번 물어 보노라.
사람은 저 밝은 달을 잡을 수 없는데
달이 도리어 사람을 따라 오는구나.
떠 다니는 거울같이 밝은 저 달은 선궁(仙宮)에 걸린 듯이
푸른 안개 다 사라지니 맑은 빛을 내는구나.
다만, 밤이면 바다에서 떠오르는 것을 볼 뿐이니
어찌 새벽에 구름 사이로 지는 것을 알리오?
토끼는 일년 내내 불사약을 찧고 있는데
항아는 외로이 살면서 누구와 이웃하고 있는가?
지금 사람들은 옛 날의 저 달을 보지 못하지만
지금 저 달은 옛 사람들을 비추었으리라.
옛 사람이나 지금 사람, 모두 흐르는 물과 같아
다 같이 달을 보고 모두 이와 같았으리라.
오직 바라노라, 노래하고 술 마실 동안은
달빛이 오랫동안 술통을 비추어 주기를...
이백에 대한 후대의 평가 "붓을 들면 비바람이 놀래고 시가 이루어지면 귀신조차 울었어라. 명성이 이로부터 커져 벽지에서 하루아침에 유명해졌네. 훌륭한 저술로 남다른 은혜 입어 세상에 전함이 출중하도다." _두보(杜甫; 唐代)의 「이백에게 보내는 시 20운(寄李十二白二十韻)」 중에서 "이태백의 오칠언절구는 글자마다 신의 경지에 들었고, 편편마다 귀신의 작품이다." _호응린(胡應麟; 淸代)의 『시수(詩藪)』 중에서 "칠언절구는 말은 가깝고 정은 멀며, 머금기도 하고 토하기도 하여 드러나지 않음을 위주로 한다. 다만 눈앞의 경치와 구두어(口頭語)로 읊은 듯하지만 현(弦) 밖에 음(音)이 있고 맛 밖에 또 맛이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귀신과 같이 멀게 느껴지도록 하는 것은 이백의 시뿐이다” _심덕잠(沈德潛; 淸代)의 『설시수어(說詩?語)』 중에서
이백과 항주 서호
<사진출처: 체신가족> [출처] 李太白 / 당나라 시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