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신장 투루판의 위구르족 가정 (투르판=연합뉴스) 권수현 기자 =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투르판의 위구르족 가정 안방. 안주인이 위구르 전통악기 '두타르'를 들어 보이고 있다. 2015.6.26. inishmore@yna.co.kr (우루무치·타청<신장위구르자치구>=연합뉴스) 권수현 기자 = 중국 신장위구르(新疆維吾爾)자치구 성립 60주년 기념 취재행사를 주최한 국무원과 자치구 정부가 줄곧 강조한 메시지는 '56개 민족이 한가족처럼 조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일정 첫날 관람한 '실크로드쇼'부터 위구르족, 카자흐족, 회족, 키르기스족, 타지크족 등 신장자치구에 거주하는 다양한 소수민족의 문화를 소개하는 내용이었었다.
신장이 중국 전 국토 면적의 6분의 1을 차지하고 한족과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47개 민족이 거주하는 최대 소수민족 자치구라는 특성을 한눈에 보여주는 무대였다.
그 뒤로도 소수민족과 관련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이어졌다.
창지(昌吉) 회족자치주에서의 회족 음식문화 체험, 실크로드와 소수민족 역사를 다룬 박물관 관람, 투루판(吐魯番)의 위구르족 농가 방문, 카자흐스탄과의 접경지인 타청(塔城)지구 위민(裕民)현의 카자흐족 마을과 카자흐족 출신 '혁명영웅' 기념공원 견학 등 어딜 가나 소수민족과 관련되지 않은 곳이 드물었다.
소수민족 인사와 가족들과의 만남도 취재 일정표를 빼곡하게 채웠다.
산유지인 커라마이(克拉瑪依)시에서는 중국석유천연가스집단(CNPC) 산하 중유개발공사 소속의 위구르족 '석유영웅' 러우즈마이마이티 바커(肉孜買買提 巴克·40)의 성공 스토리 소개에 잔뜩 공을 들였다.
이 회사의 채유공 100만명 가운데 전문기술자 자격을 가진 사람은 100명 남짓 불과한데 바커는 이중 유일한 위구르족이다.
신장 남서부 허톈(和田)의 가난한 집안 출신인 그는 17세까지 중국 표준어인 푸퉁화(普通話·만다린)을 전혀 구사하지 못했지만 단시간에 이를 깨친 뒤 입사 10년만인 2006년 전문기술자 자격을 따냈고, 우수사원과 우수공산당원 등 상도 여럿 받은 입지전적 인물이라는 게 커라마이시와 CNPC 관계자들 설명이다.
중국 신장의 이슬람 복식 금지 게시물 (우루무치=연합뉴스) 권수현 기자 =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우루무치시 동북부 수이모거우구(水磨溝區)의 노인복지시설에 붙은 이슬람교 전통복식 제한 게시물. 사진 왼편의 소수민족 전통복장은 허용한 반면 여성의 신체 일부를 가리는 이슬람교의 전통 복식은 금지하고 있다. 2015.6.27 inishmore@yna.co.kr 타청에서는 러시아인 어머니와 만주족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러시아족' 여성 갈리나 바거다너우와(乃+小麗娜 巴哥達諾娃·61)를 중심으로 한 다민족 가정을 만났다.
바그다너우와씨는 만주족 남편을 만나 결혼해 아들 둘을 뒀는데 첫째는 한족 여성과 결혼했고 둘째아들은 몽골족 아가씨와 약혼한 사이다.
또 그의 시동생은 회족 여성과 결혼하는 등 이 가정에만 다섯개 소수민족이 섞여 있다. 타청에서는 이처럼 2개 이상 민족이 섞인 가정이 이 지역 전체의 20%가량을 차지한다고 지역정부 관계자들은 강조했다.
이런 사례들은 중국정부가 한결같이 주장해온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다민족 공동체'의 모습을 뒷받침하는 듯 보이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여전히 그런 '모범 사례'가 필요한 상황임을 드러내는 것이기도했다.
실제로 '중화민족 한가족'의 이면에 자리한 크고 작은 균열은 의외로 쉽게 눈에 띄었다.
이번 프로그램에 참여한 내외신 기자들의 공통 화제 가운데 하나였던 펑자이(封齋), 즉 라마단(이슬람교 단식성월) 기간의 낮시간 단식 등 이슬람교 전통에 대한 규제가 단적인 예다.
정부의 공식 입장은 '종교활동은 제한하지 않는다'이다. 하지만 위구르족을 중심으로 한 무슬림 소수민족 분리독립주의 세력이 확산할 것을 우려한 당국이 최근 수년간 라마단을 앞두고 공산당원과 공무원, 학생, 교사를 상대로 단식 금지령을 내리는 등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는 외신 보도는 끊이지 않고 있다.
올해도 비슷한 소식들이 전해진 가운데 라마단 기간 열흘여 동안 신장을 방문한 기자들은 대부분이 무슬림인 위구르족 등 신장의 소수민족에 대한 당국의 종교활동 단속 여부에 높은 관심을 기울였다.
답사 지역이 한족 주민 비율이 높고 경제적으로 더 발달한 북부 지역에 집중돼 있어 위구르족 인구가 많은 남부를 아우른 신장 전체 상황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무슬림에 대한 규제는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었다.
지난달 23일 찾아간 우루무치의 신장사범대학 국제교류담당 책임자는 학교의 라마단 정책에 대한 질문에 "기말고사 기간 학생들의 건강을 위해 단식은 허용하지 않는다"고 망설임 없이 답했다.
중국 신장 우루무치 바자르의 위구르족 상인2015.6.27 (우루무치=연합뉴스) inishmore@yna.co.kr 하지만 이 학교의 외국인 등 무슬림 학생들은 "(학교 지침과) 상관없이 낮 시간 금식을 지킨다. 금식하는 데에 크게 문제 될 게 없다"며 개의치 않는 반응을 보였다.
우루무치(烏魯木齊)시 동북부 수이모거우구(水磨溝區)의 노인복지시설 방문 때는 정문 앞에 붙어 있던 무슬림 여성의 전통복식 제한에 대한 게시물이 관심거리였다.
게시물은 여성의 머리카락만 수건으로 가리는 것은 허용되지만, 눈만 내놓고 얼굴 전체를 가리는 니캅이나 눈 부위까지 망사로 덮어 몸 전체를 가리는 부르카 등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라마단과 관계가 있느냐는 외신기자들의 질문에 시설 관계자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종종 그런 포스터가 붙는다"고 답했다.
모든 무슬림의 라마단 금식이 당국의 규제대상은 아니었다. 기업체 노동자나 퇴직자 등은 별 제약 없이 단식을 하고 있었다.
대형 화물차 생산업체 산시자동차(陝汽·산치)그룹의 우루무치 공장의 경우 임직원 600명 가운데 100여명이 무슬림을 포함한 소수민족이었는데 공장 관계자는 이들 모두 라마단 기간 자유롭게 단식을 하고 있으며 이들을 위한 식당도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타청(塔城)시에서 만난 위구르족 여성 마리야(馬利亞·53)씨도 "시 공무원으로 일하다 3년 전 퇴직한 뒤부터는 매년 라마단에 단식을 한다"고 말했다. 다만 퇴직 전에는 일할 때 굶으면 힘들기 때문에 금식을 한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재미있는 것은 취재진 가운데 중국 언론매체 기자들은 라마단 단식을 자유롭게 하는 사례를 집중적으로 소개한 데에 비해 프랑스나 영국 등 서구권 기자들은 단식을 못하는 사례를 파고드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중국의 소수민족과 종교 정책에 대한 안팎의 시선이 이렇게 달랐다.
2009년 7월5일 우루무치에서 발생해 200명 가까운 사망자를 낸 유혈사태의 아물지 않은 상처도 어렴풋이 보였다.
우루무치 시내 관광명소인 바자르에서 만난 한족 견과류 상인은 "칠오(7.5) 이후 손님이 많이 줄어들었는데 아직 그전 수준으로 매출이 돌아오지 않았다"며 "당시 (충돌) 현장과 집이 가까워 밖에 잘 나다니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한족 상인은 기자가 위구르족 거주지 방향을 묻자 "그곳은 위험하다. 혼자 가면 안된다"고 만류하기도 했다.
중국 신장의 카자흐족 어린이(타청=연합뉴스) 권수현 기자 =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타청지구의 유목민 텐트 앞에서 카자흐족 어린이가 양에 우유를 먹이고 있다. 2015.7.2 inishmore@naver.com 며칠 뒤 따로 다시 바자르에 들렀을 때 위구르족 상인들에게도 당시 상황을 물어봤지만 서툰 한족의 언어(漢語)로 말을 붙여오는 이방인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그냥 괜찮았다"는 말 정도였다.
프로그램에 참가한 한족 출신 중국 매체 기자는 최근 수년간 신장지역 곳곳을 숱하게 여행했지만 위구르족이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면서 "2009년 이후 한족과 위구르족 사이에 불신의 골이 깊어졌다"고 안타까워했다.
신장 방문 기간 남부 허톈과 카스(喀什) 등에서는 위구르족으로 추정되는 용의자들과 경찰의 유혈충돌이 이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취재일정 중 별다른 사고나 위험은 없었지만 이동 중 고속도로 나들목 등 주요 길목에서 마주친 무장한 공안들의 모습에서 적지않은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신장자치구정부 신문판공실 관계자는 유혈충돌에 대한 질문에 "실제 일어난 게 맞다"고 확인하면서도 "그런 테러는 신장에서 아주 작은 부분이다. 이번 취재 프로그램도 내가 사랑하는 고향 신장의 진짜 모습을 안팎에 보여주기 위해 마련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 한편의 의문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수십년간 한족의 대량 이주를 이끈 변방지역 준군사조직 '생산건설병단'이 중국 전체에서 신장에만 남아있는 모습, 한족 인구가 많은 도시나 병단지역의 번듯한 모습과 상대적으로 낙후한 소수민족 주거지의 대비, 다양한 우대정책에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소수민족의 경제적·사회적 지위….
불과 10여일간의 체류기간에도 어렵지 않게 목격한 이 '틈새'를 통해 좀처럼 녹아들지 못하고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양측의 미묘한 경계가 더 또렷이 보이는 듯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