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아빠는 피아노를 팔지 않아요
1961년 ABC의 협주곡 경연대회 주 대결승이 있은지 한두 주일뒤, 데이빗이 항상 친근하게 '짐
경'이라고 부르는 제임스 펜버티가 데이빗의 경력을 위해 능력이 되는대로 최대한 돕겠다는 선의
를 가지고 헬프갓네 집을 찾아왔다.
유명한 작곡가이기도 한 펜버티는 진심으로 데이빗의 재능을 믿었다. 이제 그는 데이빗의
ABC 경연대회 우승으로 생겨난 홍보효과와 유명 미국인 음악가들이 추천을 바탕으로 유대인 사
회를 몰아 데이빗의 교육을 위한 기금을 모을 계획이었다. 6월 11일, 그가 쓴 기사 '아빠는 피아
노를 팔지 않아요'가 (선데이 타임즈) 머리기사로 나왔다.
데이빗이 피아노 앞에 앉은 사진이 신문 4분의 1면 크기로 났고, 그 밑에 지난 해 데이빗이
ABC 경연대회에 나온 이야기로 기사가 시작되었다. 펜버티는 데이빗을 "너무 작은 저고리에 너
무 짧은 바지 차림으로 나타난 핼쑥한 어린 소년"으로 묘사했다. "캐피톨 극장 무대 위를 머뭇머
뭇 걸어가" 피아노에 앉았는데, "너무나 작아서 연주회용 그랜드 피아노 페달에 발이 거의 닿지
않을 정도였다"고 썼다. 그리고 "몇 초 뒤 청중은 열세 살 난 피아니스트가 그 어려운 라벨의 피
아노 협주곡을 놀랄 정도로 힘차게 연주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이런 묘사에 대해 데이빗에게 물었더니 그는 머리를 가로 저으면서 말했다. "아주 화려해요,
아주 화려해. 그렇지만 사실이 아녜요. 짐 경은 그냥 사람들 눈물을 짜낼 생각이었어요."
기사는 계속해서 데이빗의 음악 수준과 해외에서 공부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설명했다. 한껏
정성을 쏟은 펜버티의 글을 이렇게 계속되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상당한 액수의 장학금을 받
지 못한다면, 혹은 특별한 기금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필
자는 이번 주에 알게 되었다." 이어 그는 가난에 대해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설명을 시작했다.
"헬프갓은 아내와 다섯 아이들을 부양해야 한다... . 폴란드 태생인 피터와 레이(원문대로) 헬프
갓이 퍼스의 불워 거리에 있는 집에서 그들의 매력적인 가족을 어떻게 행복하게 하고 잘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지 필자로서는 이해할 길이 전혀 없다. 얼마 전 피터 헬프갓은 병을 얻었는데
그 때 그들의 작은 집에는 가구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피터는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집안에서 어느 정도 생계를 유지하고 싶었죠. 그래서 피아노 할부금만큼은 어떻게 어
떻
게 냈습니다.' 헬프갓 가족은 참으로 자존심이 강한 가족이다.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그러나 데이빗 같은 소년에게 적절한 교육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는 가족은 오로지 부유한 사람
들뿐이다. 필자는 그가 언젠가는 이 도시에 명예를 안겨 줄 것으로 믿는다. 그러기에 우리 지역
사회는 그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 주어야 마땅한 것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 소년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있다... . 그가 쓰는 피아노는 철저하게 수리를 받아야 한다. 거기서 연습할 때마
다 아마도 악몽 같을 것이다. 그리고 앉아서 연습하는 피아노 의자는? 집에서 만든 것이다."
이 가사는 몇 가지 강력하고도 서로 다른 반응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 대부분은 펜버티가 의도
하지도 내다보지도 못한 것이었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 반응은 온전히 긍정적이었다. 그 날 오
후 그의 사무실 전화기는 가난에 시달리는 이 어린 신동에게 돈과 피아노 의자, 피아노 무료 조
율을 해 주겠다는 내용의 전화로 불이 날 지경이었으니까.
그러나 헬프갓 가족에게 6월 11일 일요일은 '눈물의 날'이었다. 펜버티에게 자기도 모르는 사
이에 기사에 실린 내용 대부분을 일러준 셈인 피터로서는 그 가사가 가족들, 특히 재능이 뛰어난
아들을 그가 적절히 뒷받침하지 못했다는 구체적인 설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오로지 부
유
한 가족들'만 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피터의 가족은 어느 모로 보나 부유하지 않았으니까 기사
는 피터에게 수치였다. 그 기사 때문에 그는 자신이 가치 없고 쓸모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창
고에 살면서도 사들이는 단계에서부터 시작해서 많은 것을 희생하고 마련한 그 피아노가 데이빗
에게 '악몽'이라는 것이다. '어린 왕자'에게 피아노 의자를 만들어 주고자 애쓴 것까지 동정의
대
상에 되어 사람들의 기부금을 부추겼다. 이런 것들은 피터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다.
데이빗에게 그 기사는 방향은 달라도 역시 아픈 결과를 낳았다. "아버지는 아주 또렷하게 말
했어요. '데이빗, 읽지마. 울게 될 테니까.' 그렇지만 난 아빠 말을 듣지 않았죠. 그래서 결국
읽었고 그래서 며칠 동안, 며칠 동안 내내 울었죠. 많이 울었죠. 애가 가난하다고 했거든요. 내
또래들이, 무슨 말이냐 하면 학교에 있는 내 또래들이 우리가 얼마나 가난한지를 알고 나면 나한
테 성가시게 굴지 않을까 싶어 겁났거든요."
데이빗에게 유일한 위안거리는 그의 음악에 대한 펜버티의 칭찬이었다. "그러면서도 기분이
아주 좋기도 했죠. 내 연주에 대해 쓴 말이 맘에 들었거든요. 나에 대해 쓴 부분은 정말 좋았어
요. 나에 대해 쓴 부분은 정말 좋았어요. 황홀했어요." 데이빗이 말했다.
그러나 그 기사 때문에 -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기사에 있는 문장 하나 때문에 - 화가
난 사람들이 또 한 무리 있었다. "헬프갓 가족은 참으로 자존심이 강한 가족이다.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하는 부분 때문에 유대인 사회가 들끓었다 그동안 그토록 도와준 건 어
디 가고? 데이빗의 바르 비츠바는 어떡하고? 언론에서 '그들의' 데이빗을 언급하면서 어떻게
그
들은 언급하지 않을 수가 있나? 기사는 헬프갓 가족의 민족을 '폴란드 태생'이라고만 표시함으
로
써 원래 목적에서 벗어나 데이빗과 유대민족을 따로 놓아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 다음 안식일에 피터가 회당에 나타났을 때 회중 가운데 일부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확히 어
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피테에게 알렸다. 데이빗은 근처에 서서 피터의 이중성격이 결국 어떻
게 그에게 피해를 끼치는지를 보았다.
그 날의 기억은 언제나 데이빗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브렉클러 가족은 오랫동안 우리를 도왔
고, 그래서 다들 아버지가 짐 경과 만났을 때 그 이야기를 했어야 옳다고 생각했어요. 다들 도움
을 받은 사실을 인정하고 고마움을 표시했어야 마땅하다고 했죠. 그 부자 유대인들은 무척 화가
났어요. 그래서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우린 당신에게서 손을 떼겠소. 우리가 그토록 도와
줬는데도 자존심 강한 당신 가족은 아무에게서도 도움을 받지 않겠다고 하니까."
피터 입장에서는 이런 식으로 욕을 먹는 일이, 특히 도움과 관계된 부분이라 상처에 소금을 뿌
리는 것과 같았다. 기사에서 헬프갓 가족의 자존심을 언급한 것이 대중 앞에서 피터가 어느 정
도 체면이 서는 유일한 부분인데, 앞으로는 어떤 기자와 만나도 그 부분은 이용할 수 없다고 이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다름 아닌 데이빗 때문이다. 그
가 애초에 스스로 이런 수모를 감내한 것도 데이빗 때문이지 않았던가.
한편 브렉클러 가족은 아버지 일에는 '손을 떼겠다'고 하긴 했지만 아들에 대해서는 전혀 그
럴
생각이 없었다. 그 안식일 전 주에 알렉 브렉클러는 아이작 스턴과 만나 데이빗의 장래에 대해
의논했다. 그 모임은 퍼스의 음악계 사람들이 데이빗을 도울 방법을 찾기 위해 모여 의논한 뒤
에 있었다. 이들은 데이빗의 미국 유학생활 5년동안 학비와 생활비로 5천 파운드는 들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들은 이어 퍼스 시장 해리 하워드 경을 찾아가 데이빗을 유학 보내기 위한 기
금의 후견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피터 헬프갓은 이런 모임에서 한 번도 초대받거나 의논상
대가 된 적이 없었다.
데이빗은 6월 18일 일요일, 그러니까 '부자 유대인들'로부터 욕을 먹은 바로 다음 날, 피터
가
(선데이 타임즈)지를 펼쳐 들고 이런 모임에 대한 내용과 또 한 주 동안 데이빗에게 제공된 갖가
지 도움에 대해 3면에 실린 기사를 읽고나서 어떤 기분이 되었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이 기
사는 펜버티가 쓰지는 않았지만, 피터가 읽은 바로 그 순간 데이빗의 나머지 인생에 영향을 끼친
한 문장, 정확하게 말해 한 낱말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문장은 이렇다. "시드니의 저명한 사업
가 모임에 피아니스트 (원문데로) 아이작 스턴과 퍼스 사업가 알렉 브렉클러 씨가 배석했다."
오늘날까지도 데이빗은 이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아버지가 그 기사를 읽던 순간의 기억이 거
울처럼 또렷하게 되살아나 혼란과 고통에 시달린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도 이런 감
정을 아프게 느꼈다.
"우린 기금을 모을 거고 또 내가 준비가 되면 유학을 갈 거라고 얘기했었어요. 그렇게 의논이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아버지는 갑자기 방향을 바꿔 전혀 반대되는 말을 했어요. 돌아
가는 기계에다 막대기를 쑤셔 박은 셈이죠." 데이빗은 놀랄 정도로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신문
에 난 기사에서는 야무진 알렉이 아이작 스턴과 만났다고 되어 있었죠. 아버지는 그 이름을 본
그 산간, '야무진 알렉'이라는 이름을 본 순간 곧장 으으, 으으... "데이빗은 으르렁거리는 소리
를
내어 아버지의 기분이 사나워진 것을 흉내냈다. "그러더니 몽땅 취소해 버린 거예요! 부모 권위
로 단번에! 아버지가 말했죠. '기금은 이제 없어. 돈은 모으지 않아. 미국도 끝이야. 아무 것
도 안돼. 그리고 돈은 다 돌려보내!' 아버지는 온통 신경이 곤두서서 앙심뿐이었어요. 낱말 하
나
때문에! 그 분 이름 때문에! 그 이름 때문에 그런 피해가 돌아온 거예요! 그 낱말 하나를 본
것 때문에! 끝장이었어요. 다 끝장 난 거예요."
"그러니까, 오로지 브렉클러 씨가 아이작과 만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금을 취소했다는 말이
에요?" 나는 믿을 수가 없어 물었다.
"그래요, 브렉클러 가족은 나를 미국으로 보내는 일에서 한몫을 하고 싶었죠. 우리를 아주 아
주 오래 오래 도와주고 있었잖아요. 그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죠. 다들 나를 미국으로 보내고
싶어했으니까. 그리고 나도 미국으로 가려면 그 사람들 도움이 필요했어요. 돈이 드니까요. 그
렇지만 아빠는 자존심이 너무 강했어요. 아빠는 아주 가난하고 아주 자존심이 셌어요. 너무나
가난하고 너무나 자존심이 셌어요. 브렉클러 가족들에 대해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어야 하
는데 말이죠. 어쨌거나 그냥 도움을 받아들여야 되는 건데 말이죠. 도움을 그냥 받아들이는 거
예요."
"그런데 왜 신문에 난 이름이... ?"
"아버지한테 그렇게 지독한 영향을 끼쳤나 하는 거요?" 같은 의문을 수십 년 동안 품어 온 데
이빗이 말을 가로막았다. 그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필시 천 번도 더 이 문제를 풀어 보려고 했
을 것이다. "에, 그러니까... 아버지의 문제가 뭐였을까요? 아버지는 필시 독재자 기질이 있었겠
죠... 어쩌면... 어쩌면 독재자였겠죠. 한 번도 거기에 대해 나랑 이야기를 나눈 족이 없었어요.
우린 그 문제에 대해 한 번도 가슴을 털어놓고 대화한 적이 없어요. 하여간 그게 진물러가고 있
었어요. 곪아터지는 식으로 말이죠. 아버지는 브렉클러 가족한테 아주 화가 나 있었고 아주 깊
은 원한을 품었어요."
"그러니까 당신을 미국으로 보내고 싶어하지 않은 이유가 오로지... "
"야무진 알렉이죠." 데이빗은 다시 말을 가로막았다. 그 때의 일이 그에게 이해되는 한도까지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조금도 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마침내 의문을
풀어 버리고 깊어하는 것도 같았다. "아빠는 원한을 품고 있었어요! 그렇게 오랫동안 내내 원한
을 품고 있었던 거죠! 야무진 알렉 브렉클러 씨는 애가 아버지와 따로 살아야 된다고 생각했으
니까요. 아버지가 파괴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아이들을 기를 자격이
없다고 본 거죠. 그리고 브렉클러 가족은 우리가 창고에서 살던 시절에 아버지를 울렸어요. 그
래서 그 날부터 아버지는 원한을 품었죠. 그 날부터 아버지는 원한을 잊은 적이 없어요. 애 생
각엔 유대인들은 원한을 품어서는 안 돼요. 그러니까, 결국 독일 총통 히틀러도 비엔나에서 가난
한 화가로 살던 시절에 유대인들이 약간 비열하게 대했기 때문에 유대인들한테 그런 원한을 품었
잖아요. 어리석은 일이잖아요! 어리석어요! 원한을 품어서는 안 돼요. 그렇게 살면 안 돼요.
인생은 너무 짧으니까."
마침내 데이빗은 슬퍼졌다. 그리고 슬픈 기분 덕분에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그는 어
깨를 으쓱하면서 한동안 지난날을 돌이켜 보았다. "그래서 내 생각엔 아버지가 약간 어리석었던
거 같아요, 정말. 그런 이름 하나로 모든 게 바뀌고 역사의 방향이 바뀌고 온 세상이 바뀌게 하
다니. 62년도에 줄리어스 캐천 앞에서 (차임즈)와 (라 캄파넬라)를 연주했을 때 그 분은 아버지
한테 이렇게 말했어요. '아이작 스턴 장학생으로 미국에 가면 누구나 아주 훌륭하게 보살핌을
받
습니다. 왜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죠. '나한테 상처를 줬으니까
요.'
그리고 그런 위대한 미국 콘서트 피아니스트들은 아버지와 대화하는 게 시간 낭비고 내가 그냥
유학을 갔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이런 잘못을 바로잡아 보겠다고 쓴 그 많은 돈하며.
아까운 일이죠, 정말. 생각 없고 멍청하고, 하여간 그런 거예요."
그러나 데이빗은 처음 나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었을 때 아버지의 극단적인 반응 뒤에 숨어 있
는 의문을 풀지 못한 상태였다. 열 번째, 열다섯 번째 들려주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역사
의 방향이 바뀌고 온 세상이 바뀌었다"고 했다고 했을 때 데이빗이 과장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
도 그에게는 그렇게 바뀌었다. 그런 사정의 앞뒤를 모두 끼워 맞추는 데에는 수많은 세월이 걸
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