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역의 무당은 이른바 강신무(降神巫) 세습무(世襲巫)의 무당 구분에서 보면
강신무란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신병에 걸려 무당이 될 조짐을 보여 내림굿을 하여 되는 무당,
즉 신의 뜻에 따라 되는 무당을 일컬으며 대략 한강 이북지역의 무당들은 이 계통에 속한다.
세습무란 무가(巫家)에서 태어나 다른 무당집 아들과 혼인을 하여
대개 전라도 지역을 포함한 한강 이남의 성무현상(成巫現象)이다.
강신무이건 세습무이건 복잡한 무속의 교리·의례·기술 등을
또한 강신무의 경우 일반 정상인 중에서도 신병이 걸려서 무당이 된다고 하지만
대개의 경우 신병에 걸린 무당을 살펴보면 친척 중에 무당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비(Harvey)에 의해 조사된 왕십리 만신의 경우도 그녀의 친정어머니가 만신이었으며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양반가의 딸로 신병에 걸려 집에서 쫓겨나 양부모 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註] 또 황해도 무당 김금화의 경우도 그녀의 외할머니가 만신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서울의 무당은 신병 또는 무병의 징후를 보이는데
대체로 정신병과 같은 병의 증세를 보이고 오랫 동안의 치료가 효과가 없음이 대부분이다.
서울 현저동에 거주하는 무당 이지산(1930년생)의 무병체험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가 14살 되던 해, 그는 친구들과 함께 시내 중심가로 갔었는데
혼자 그리로 가서 한 무더기의 돌더미를 찾아내고 그곳에서 청동불상 하나를 꺼냈다.
한달쯤 뒤 어떤 신령에 이끌려 북악산에 가서 옛날 엽전 아홉개를 땅에서 파내었다.
2년동안이나 그는 무구를 얻게 되는 여러 다른 종류의 체험을 가졌다.
1947년 6월에는 한 꿈에 두 장군이 각기 흰 말과 붉은 말을 타고 여러 군졸을 거느리고
첫날 밤 그는 잠이 들어서 누가 자기를 여러 차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이남희(그의 본명)야, 가자!’고 하여 그가 일어나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보았으나,
그 후 서울의 집에서 몸에 진동이 엄습해 와 그의 온 사지가 격렬하게 떨게 되었다.
의사들이 왔으나 손을 쓸 수 없었고, 그는 스무 하룻동안 먹지도 않은 채
그 동안 집안 식구들이 피치 못하게 무당과 판수를 찾아가서 물어 보았더니,
그 문복(問卜)한 결과가 하나 같이 그가 신들렸다는 것이고
그의 어머니가 한 무당의 말대로 반주검이 된 그의 아들 앞에서 빌 때에
그 후 내림굿을 한 다음에 그는 무당이 되었다.
[註] 위와 같은 증세가 무병 또는 신병으로 간주되면 무당이 되라는 신의 뜻으로 생각해서
무당이 되기 위한 의례를 행하는데 이것을 내림굿이라고 한다.
내림굿이란 기존의 무당을 신어머니로 삼아 신어머니와 신딸관계를 맺고
이 사람으로부터 내림굿을 행하여 받은 후에 무당이 될 것을 작정한다.
내림굿에는 허주굿과 내림굿으로 두가지가 있으며
허주굿은 무당 후보자의 신병이 무당
이 되려는 징조의 신병인지 아니면 단순한 잡귀에 위한
정신증상인지를 구별하는 굿이라 할 수 있다.
허주굿 후에 내림굿이 행하여진다.
무당과 대담해 보면 신병에 걸려 할 수 없이 무당이 되어야 한다는 ‘팔자론’을 피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본인은 무당노릇 하기가 싫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여진다고 호소한다.
수원의 한 박수는 택시운전기사였는데 무병이 걸렸지만 한사코 무당업을 거절하였으나
자꾸 택시사고 등이 나서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무당
이 되었다고 피력하고 서울의 왕십리에 있는 무당도 무당 노릇을 게을리 하거나 안하면
온몸이 아프고 고문당하는 것처럼 괴로워서 안할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대체로 무병증상이 있어도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무당이 되기를 거절하는데
그렇게 되면 위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고나 우환이 끊이질 않고
심한 경우에는 ‘인다리 놓는다’라는 현상까지 생긴다.
무당이 될 후보자가 계속 거부하면 벌로서 그 집안의 가족 중의 한사람이
이유 없이 죽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한 생명을 빼앗으면서까지
집요하게 무당이 될 것을 신은 요구한다는 해석이다.
이지산박수의 경우 여덟살된 동생이 원인 모르게 갑자기 죽었다고 한다. [註]
내림굿을 한 후에는 신어머니 밑에서 이 무당은
무속에 관한 여러 지식을 배워야 한다.
무속의 신들의 명칭·기능·성격 등에 관한 교리·무가·춤·악기 다루는 법·의상·제상차림
점치는 방법 등 신도들과의 관계 유지법 등 무당
초보자가 배워야 할 내용은 대단히 많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신어머니가 친절히 체계적으로 가르쳐주는 경우는 드물어서
무당 후보자는 부지런히 본인의 열성에 의해 습득해야 한다.
대체로 신어머니로부터 많이 배우지만 굿이란 3∼4명의 무당
이 공동으로 행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굿에 참가하여
다른 무당의 굿하는 것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다.
또한 이름 있는 무당을 찾아가서 신어머니의 허락 하에 배울 수 있다.
따라서 강신무의 경우 신이 들려야 무당이 되는 자격이 성립되지만
신만 들렸다고 무당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무당은 다년간의 학습을 거쳐야
비로소 무당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신만 들리고 무당공부를 하지 않으면 영으로 보는 점쟁이노릇 밖에는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신이 들리지 않은 사람 가운데서도 무당의 공부를 하여
무당 이상으로 굿도 잘하고 무가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추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무당노릇은 못한다. 신이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무당 이지산에 의하면 서울의 무당은 계급과 유파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최길성과 조흥윤은 각기 이지산과 대담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의 것을 소개하는 이유는
이지산과 대담한 내용이면서도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서울지방의 무당은 조종(祖宗)이 오만수(吳萬壽)인데 그의 세 딸,
즉‘맏형 만신’‘둘째만신’‘막내만신’이 3대신이 되어 맏형은 구파발에,
둘째는 동문(東門) 밖 각심절에, 막내는 우수현(牛首峴)의 당주(堂主)가 되었다.
이 세 지역마다 각 특징이 있는데, 구파발에서는 ‘낮일(지노귀굿)’을,
각심절에서는 ‘안일’을, 우수현에서는 ‘바깥일’을,
할미당에서는 ‘지노귀굿’이나 ‘배송굿’을, 국사당에서는
양반층의 ‘산치성(山致誠)’을, 사신성황(使臣城隍)에서는 사신을 위한 굿을 했다.
세 딸은 다시 각각 네 사람의 제자를 두어 가르쳤는데 이들이 12대신이 되었다.
굿의 종류로는 진적굿, 천신굿(薦新굿), 삼년시력굿, 환갑여탐굿, 혼인여탐굿,
물에서 하는 용신굿(龍神굿), 병굿(病굿), 진혼구굿, 진진혼구굿,
새남굿(천근 새난 만근 대도령), 얼새남굿, 탈상굿,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넋건지기 굿,
미친 사람 치료하는 챙개벗기는 굿, 살풀이굿, 새로 강신한 사람에게 해 주는 허주굿,
또는 내림굿, 천연두신을 보내는 배송굿이 개인의 굿이고,
동리 일동 마을에서 하는 굿으로는 도랑굿, 당산굿, 부군당굿,
군웅당굿이라는 것이 있다. [註]
서울과 그 주위에는 중요한 무당의 유파가 셋 있다.
각 본은 나름대로의 특징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 굿에 있어 그러하다.
동쪽의 각심절본, 남쪽의 노들본, 그리고 서쪽의 구파발본이 그것이다.
동쪽의 각심절본은 진적굿과 재수굿으로 특별히 유명하다.
서쪽본은 진오라기가 그 전문인 반면
남쪽본은 우수재서낭당에서의 서낭굿으로 명성이 높다.
이에 따라 각 본은 다소간 서로 다른 무(巫)관습을 가진다.
따라서 한 무당이 예컨대 서쪽본 출신의 신아버지에게서 무(巫)학습을 전했으면
그는 이 무당유파에 속하게 된다.
이런 유파의 기원에 관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옛날 오만수라 하는 무조(巫祖)가 살았는데 그에게는 신딸이 넷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양씨부인으로서 덕물산 무전통(巫傳統)을 세웠고,
다른 셋은 여형제들인데 서울에 발을 붙이면서 각기 한 유파씩 만들었다.
이 전통이 오늘날까지도 전해진다.[註]」
또한 무당은 몸주신을 누구를 모시느냐에 따라 계급의 위치가 정해진다.
최길성은 다섯 가지 유형으로 보는 반면 조흥윤은 일곱 가지의 계급이 있다고 본다.
몸주신을 모시는 것을 유형별로보면 다음과 같다.
○ 불사방(개성지방에서는 선관(仙官), 남쪽지방에서는 보살님)
옥황천존(玉皇天尊), 선화천존(善化天尊), 일월성진(日月星辰), 칠성(七星),
산신(山神), 용신(龍神), 불사(佛師), 삼불제석(三佛齊釋) 등
○ 절래[전내(殿內)] : 관성제군[關聖帝君 (관운장)], 소열황제[昭列皇帝 (유현덕)],
장장군[(張將軍 (장익덕)], 와룡선생[臥龍先生 (제갈공명)],
옥천대사[玉泉大師 (관운장스승)], 신장[神將 (오호대장)]
○ 만신[萬神, 무격(巫覡)] : 최영장군(崔瑩將軍), 여장군(呂將軍), 성조(聖祖),
별군웅(別軍雄), 왕신[王神 고려왕(高麗王)], 임경업장군(林慶業將軍),
만명[萬明 대신(大神), 만신의 신]
○ 넋무당 : 명부십대왕(冥府十大王), 사자(使者), 넋말명(넋末溟)
○ 무성패 : 태왕[太王 (천연두로 죽은 여아의 신)], 명도[明圖 명두(明斗)] [註]
a. 상속임, 또는 불사방, 나무는 선관이라 부르고 여무에게는 보살이라는 별도의 칭호가 있다.
b. 중속임, 전내 또는 전안이라고도 부른다.
c. 상당주, 또는 박수 그리고 중당주 또는 만신이 이 계급에 속한다.
d. 뒷전 무당
e. 넋무당, 넋대신, 넋반 또는 걸레라 불린다.
f. 태주방
g. 명도, 흠치앞치 또는 무성패가 다른 이름이다.」
한 무당이 어느 계층에 속하게 되는가 하는 것은
그가 몸주로 받아들인 신령의 종류에 따른다.
이 몸주는 내림굿에서 대부분 이미 확정되는데, 그에 따라서 무당
의 계급이 정해진다. 그러나 아래 계층에 속하던 무당이 보다 높은 계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
그가 그후에 보다 높은 계층의 신령에 씌어서
그를 제 몸주의 하나로 받아들일 때 그것은 가능해진다.[註]
무당들 내의 조직은 별로 발달되어 있지 않다. 조직성이 발달되지 않은 것은
무당집단 뿐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직업집단에 걸친 대부분의 현상이라 하겠다.
무당의 일은 대체로 두가지로 나누어 진다.
신도들이 와서 집안의 문제를 상의하는 점복행위와 굿행위이다.
점복행위는 개인적으로 신도와 1 : 1의 관계로 맺기 때문에 혼자서도 충분히 행할 수 있다.
그러나 굿은 3∼6명의 무당이 동원되기 때문에 다른 무당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무당이 굿에 참여하는 방법은 자기 자신의 신도로부터 굿을 청해 받았을 때와
다른 무당이 청해 받은 굿에 초청받았을 때이다.
다른 무당에 의해 초청받는 경우는
자기가 얼마나 딴 무당을 초청했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결국 무당도 품앗이와 같아
자기가 다른 무당을 많이 초청할수록 초청받을 율이 높은 것이다.
또 다른 경우는 굿은 12거리 이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무당은 그 다양한 12거리를 다 잘할 수는 없다.
어떤 무당은 무슨거리를 특히 잘한다는 전문성에 의해 초청받는 경우가 있다.
켄달(Kendull)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영수엄마라는 무당은 대감거리를 특히 잘하여
그것에 의해 초대받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註]
따라서 무당들 내에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협동관계에 있으면서도
만약 굿할 때 초대받으리라 생각했던 동료로부터 소외당했거나 또는
초대했는데 응하지 않는다거나 하면 사이가 벌어진다.
또 굿한 후에 수입의 분배를 가지고도 싸움이 자주 일어난다.
양주의 수다장이 만신은 그녀가 유명하기 때문에 다른 무당들이 많이 초대하였으나
그녀가 특히 분배에 있어 욕심장이 노릇을 하여
근년에는 다른 무당들이 초대하기를 기피한다고 한다. [註]
무당이 사제자라면 신도에 해당하는 무(巫)의 신봉자들은 단골이라 부른다.
대개 단골들은 여자들로 한 무당이 수명에서 수십명의 단골 신봉자를 거느리고 있다.
이들은 집안에 우환이 있을 때, 어려운 일을 결정할 때
무당과 상의를 하며 정월달에는 신수점도 보러 오고
또 무당이 정기적으로 하는 굿에도 열심히 참여하여
명이 짧은 자식을 ‘무당에게 파는’행위도 한다.
따라서 단골의 집에 우환이 있거나 또 재수를 위하여
또는 사람이 죽었을 때 재수굿, 진오기굿 등을 부탁하기도 한다.
무당과 단골관계가 성립되는 이유로서는
어머니나 시어머니의 단골무당을 계속 인계받는 경우도 있고
소개나 권유에 의하기도 하고 또 무당에 의한 굿이나 처방이
효험이 있을 경우 성립된다.
따라서 단골관계가 영원할 필요도 없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간다거나,
또는 무당이 신통하지 않다고 판단될 때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서울에는 무당들이 굿을 하기 위하여 빌리는 굿당이 여러 개 있다.
50여년 전만 해도 60개가 넘는 굿당이 서울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많이 사라지고 몇 남지 않았다.
과거에 알려졌던 유명한 굿당들의 이름은 홍제동의 할미당,
무악재 부근의 사신당, 인왕산의 국사당, 마포의 부군당, 뚝섬의 하주당,
세검정의 원앙당 등이다.
인왕산의 국사당은 가장 잘 알려진 굿당으로서 원래 남산에 있던 것이
일제 때에 신사(神祠)를 지으면서 인왕산으로 옮겨졌으며
지금도 많은 굿이 행하여지고 있다.
대개 3, 4월과 9, 10월에 가장 굿이 많이 행하여지며
약 50여회 이상의 굿이 행하여 진다고 한다.
첫댓글 무당의 역사에 대하여 공부했습니다.
정보 고맙습니다.
공부합니다.
공부하고갑니다 감사합니다
저두 공부해요.
덕분에 공부합니다.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