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2/18 雨 水
"우표에서 얻은 지식이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많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
2010 - 모태범, 스피드스케이팅 금·은 새 역사 최초로 2개 이상 메달 획득…아시아 최다에도 도전 한국 빙상의 에이스로 등장한 모태범(21.한국체대)이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종목에서 한국 스피드스케이팅 역사에 뚜렷한 이정표 하나를 보탰다. 16일(한국시간)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500m에서 금메달을 따냈던 모태범은 18일 열린 1,000m에서도 은메달을 추가했다. '흑색탄환' 샤니 데이비스(미국.1분08초94)에 불과 0.18초 뒤지는 좋은 성적으로 2위를 차지한 것이다. 이로써 모태범은 한국 선수로는 동계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스피드스케이팅 종목에서 2개의 메달을 따낸 선수로 기록됐다. 한국이 강세를 보인 쇼트트랙에서는 전이경 SBS 해설위원이 현역 때 4관왕에 오르는 등 다관왕이 적지 않았지만, 스피드스케이팅에서 2개 이상 복수의 메달을 따낸 것은 모태범이 처음이다. 1992년 알베르빌대회에서 김윤만이 이 종목 1,000m에서 은메달을 획득하면서 한국 선수로는 첫 메달을 목에 건 이후 18년 만의 쾌거다. 이 대회 전까지 스피드스케이팅에서 한국은 김윤만과 2006년 토리노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500m에서 이강석의 동메달 등 단 2개의 메달을 얻는 데 그쳤다. 아시아 선수가 스피드스케이팅에서 따낸 최다 메달 수는 3개로 남녀를 통틀어 2명에 불과했다. 스피드스케이팅 아시아 첫 금메달리스트인 일본의 시미즈 히로야스가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500m 금메달과 1,000m 은메달을 목에 건 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대회에서 은메달을 추가해 3개를 수확했다. 또 중국 여자 선수인 예차오보는 알베르빌대회에서 500m와 1,000m에서 각각 은메달, 1994년 릴레함메르대회에서 1,000m 동메달을 따낸 바 있다. 모태범이 아직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임을 고려하면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종목 아시아 최다 메달리스트가 될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한편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가장 많은 메달을 딴 선수는 여성 최초로 동계올림픽 5회 연속 금메달의 대기록을 달성한 독일의 '빙상 여제' 클라우디아 페흐슈타인으로 모두 9개의 메달을 땄다. 박성진 기자 sungjinpark@yna.co.kr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10-02-18 오전 11:58:50 http://www.hani.co.kr/arti/sports/sports_general/405336.html
2010 - 멸종위기 재두루미 등 화성·시화호 집단서식 경기 화성호와 시화호, 남양호에 멸종위기종인 재두루미와 흑두루미 등이 서식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화성환경운동연합은 지난해 12월부터 최근까지 화성호와 시화호, 남양호 등지에서 10여차례에 걸쳐 겨울철새 서식현황을 조사한 결과, 세계적 멸종위기종이며 천연기념물(203호)인 재두루미 63마리와 흑두루미(천연기념물228호) 1마리가 겨울을 나는 것을 확인했다고 18일 밝혔다. 특히, 재두루미의 경우 화성호와 시화호 등지에서 철새의 이동시기에 일시적으로 확인된 적은 있지만 이번처럼 집단 월동 모습이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또 화성호 앞 화성 갯벌에서는 천연기념물(326호)인 검은머리물떼새 180여마리가 집단 월동하고 있는 것으로 관찰됐다. 홍용덕 기자 /한겨레 2010-02-18 오후 10:50:21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405507.html
1987 - 한국의 스케이트선수 성시백(成始柏) 출생 성시백 [成始柏, 1987.2.18~ ] 성시백(成始柏, 1987년 2월 18일 ~ )은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이다. 경기고 재학 중 국가대표로 뽑혔다. 2005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탈락, 토리노 동계 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했다. 2006년 ~ 2007년 시즌에는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표로 선발되어, 토리노에서 열린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참가하여 5관왕에 올랐다. 그 후 다시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연세대 졸업 후 용인시청에 입단했다. 2009년 ~ 2010년 시즌에 월드컵에서 여러 차례 입상하였다.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 1500m 경기에서 결승선을 불과 몇 미터 앞에 남겨두고, 이호석 선수의 무리한 인사이드 추월로 인해 같이 넘어져 은메달과 동메달을 놓쳤다. /위키백과
1986 - 현대 자동차의 포니 엑셀 1천 대가 미국 로스앤젤레스 항에 첫 상륙 현대자동차는 지난 76년 에콰도르에 ‘포니택시’ 7대를 수출하면서 국산 자동차 수출시대를 열었다. 수출1호차로 기록된 포니차는 20년간 150만㎞를 운행한후 지난 96년 국내에 재반입돼 현재 현대자동차 문화회관(울산)에 자동차 역사자료로 전시중이다. http://www.ilyosisa.co.kr/ILYO/190/news/business/B1901801.html (참고 - 1986년 1월 20일 현대자동차 포니 엑셀, 첫 대미 수출 선적)
1981 - 포철 4기 설비 확장 공사 준공(조동 연 850만톤 생산) [포항제철소 종합준공] 포철 4기 준공, 세계 11위 대단위 제철소로 부상 포항종합제철의 제4기 설비확장공사가 18일 오전 준공, 전두환 대통령이 제4고로에 불을 붙임으로써 조강생산 연 850만 톤 체제로 들어갔다. 이로써 포철은 자유세계에서 8위, 전 세계에서 11위 가는 대단위 일관제철소로 부상했다. 70년 4월 1일 103만 톤 제1기 설비를 착공한 이래 10년 10개월 동안 4단계에 걸쳐 계속된 확장공사에는 내외자 1조 9,000억 원이 투입됐으며 계속된 공기단축으로 4기 설비 준공을 예정보다 10개월 앞당겨 550억 원의 건설비를 절감했다. 이날 준공식에는 신일본제철의 이나마야 요시히로 회장 등 일본 재계 거물급 인사 57명과 미국, 호주, 캐나다 등 17개국에서 204명의 재계인사가 대거 하객으로 참석했다. 포철의 850만 톤 준공으로 국내 전체 조강생산능력은 1,210만 톤으로 증가, 북괴의 600만 톤(추정)을 크게 앞지르게 됐으며 국내 철강자급률은 조강기준 89%로 크게 높아지게 됐다. 이날 준공식에서 정명식 씨(포철 건설담당 부사장) 등 7명이 은탑산업훈장 등 각종 포상을, 정부 측에서 전계묵 상공부 철강공업국장 등 4명이 홍조근정훈장 등 각종 표창을 받았다. 상을 받은 유공자는 다음과 같다. /동아일보 1981-02-18 /museum.posco.co.kr
[어제의 오늘]1981년 레이건 미 대통령, 레이거노믹스 발표 ㆍ부자 감세 등 정책 큰 후유증 남겨 1981년 1월 영화배우 출신인 로널드 레이건은 미국 역사상 최고령인 70세의 나이에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가 취임 때 내건 구호는 ‘강하고 풍족한 미국’. 당시 미국은 두 자릿수의 물가상승률과 높은 실업률, 마이너스 경제성장 등으로 허덕이던 상황이었다. 막대한 무역적자와 재정적자가 함께 누적되는 ‘쌍둥이 적자’도 이때 시작됐다. 또 부유층을 위주로 한 감세 정책으로 빈부격차를 확대시키며 사회양극화를 초래했다. 레이건의 임기 초 미국 순재산의 8%를 갖고 있던 최상위 1% 부자의 재산이 임기 말에는 12%로 늘어난 반면 복지예산 삭감으로 많은 중산층이 빈곤층으로 전락했다. 집권 당시의 업적으로 호평받은 물가안정조차도 레이거노믹스 때문이 아닌, 달러 강세와 유가 하락에 따른 해외상품 수입 증가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송현숙 기자 /경향신문 2011-02-17 21:40:2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2172140215&code=100100
1981 - 미국의 프로 농구선수 안드레이 키릴렌코(Kirilenko, Andrei) 출생 키릴렌코 [Kirilenko, Andrei Gennadyevich, 1981.2.18~ ] 안드레이 키릴렌코 본명 : Andrei Kirilenko 출생 : 1981년 2월 18일 출생지 : 러시아 우드무르티야 이제프스크 직업 : 농구선수 소속 : 유타 재즈 포워드 신체 : 206cm, 102kg 데뷔 : 1999년 CSKA 모스크바 입단 아내 : 가수 마샤 로파토바 경력 2008년 제29회 베이징 올림픽 농구 러시아 국가대표 2000년 제27회 시드니 올림픽 농구 러시아 국가대표 1999년 유타 재즈 1998년 CSKA 모스크바 /네이트 인물검색 http://people.nate.com/people/info/an/dr/andreikirilenko/
닉슨독트린(Nixon Doctrine)은 1969년 미국 대통령 닉슨(Nixon, Richard, 1913~1994)이 밝힌 아시아에 대한 외교정책으로 괌독트린(Guam Doctrine)이라고도 한다. 1970년 2월 닉슨은 국회에 보낸 외교교서를 통하여 그의 새로운 대아시아정책인 닉슨독트린을 세계에 선포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미국은 앞으로 베트남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한다. ② 미국은 아시아 제국(諸國)과의 조약상 약속을 지키지만, 강대국의 핵에 의한 위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란이나 침략에 대하여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협력하여 그에 대처하여야 할 것이다. ③ 미국은 ‘태평양 국가’로서 그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계속하지만 직접적 ·군사적인 또는 정치적인 과잉개입은 하지 않으며 자조(自助)의 의사를 가진 아시아 제국의 자주적 행동을 측면 지원한다. ④ 아시아 제국에 대한 원조는 경제중심으로 바꾸며 다수국간 방식을 강화하여 미국의 과중한 부담을 피한다. ⑤ 아시아 제국이 5∼10년의 장래에는 상호안전보장을 위한 군사기구를 만들기를 기대한다. /naver
그리니치 표준시[Greenwich Mean Time, GMT] 그리니치 천문대는 천문항해술 연구의 목적으로 찰스 2세가 1675년 런던 교외의 그리니치에 설립한 세계적인 천문대. 1884년 워싱턴회의는 이 천문대를 지나는 자오선을 본초자오선으로 지정하여, 경도(經度)의 원점으로 삼았다.
오펜하이머 [Oppenheimer, Julius(John) Robert, 1904.4.22~1967.2.18] 오늘의 역사 (2월 18일)[1967년]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 사망 제2차대전 중 원자폭탄 개발을 지휘했던 미국의 세계적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1967년 2월 18일 사망했다. 부유한 독일계 유태인으로 태어난 오펜하이머는 미국 로스 앨러모스연구소 소장으로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한 '원자폭탄의 아버지'였다. 라디오와 전화도 없이 학문에만 전념했던 오펜하이머는 1929년의 대공황 사실도 뒤늦게 알 정도였다. 과학자이면서도 8개국어를 익혀 플라톤의 '대화'편을 그리스 원서로 읽고, 산스크리트어로 된 고대 인도의 영웅시 '바가바드기타'를 외울 정도로 다재다능했다. 오펜하이머는 과학자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인이며 단편소설가이기도 했다. 그는 2차대전이 끝난 직후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자신의 손에 피가 흐르고 있다며 양심의 가책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어 원자력의 국제 관리를 주장하며 원폭 제조금지와 사찰을 강조했지만 그를 기다린 것을 매카시즘이었다. 매카시즘 선풍이 한창이던 1954년 4월 12일, 그를 좌경 용공으로 심판하는 청문회가 시작돼 6월 28일 그는 출금금지와 보안 부적격이라는 `유죄` 평결을 받고 모든 공직으로부터 완전 추방됐다. 그러나 사실은 그가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했기 때문에 권력으로부터 추방됐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트루먼 대통령의 신무기 개발 의지와 달리 원자력정책 고문이자 일반자문위원회 의장으로서 수폭 개발을 전원일치로 반대 의결해 권력의 심판대에 올랐다는 것이다. `미국의 수폭연구가 18개월이나 지연된 것은 정부내부에 공산주의자가 있기 때문이다`는 청문회 판결내용도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조선닷컴 2017-02-18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20000426_0022
1966 - 박정희 대통령 동남아 순방 마치고 귀국 (2.7~2.18) 역사속 오늘[1966년 2월 18일] 박정희 대통령 동남아 순방 후 귀국 1966년 오늘! /YTN 2013-02-18 http://www.ytn.co.kr/_pn/0422_201102162301547278 (2월 7일 환송식 후 32명 수행원을 대동하고 루프트한자 전용기로 출발, 오후 5시 말레이시아 도착, 10일 태국 방문, 13일 홍콩 방문, 15일 대만 방문, 18일 귀국)
감비아(Gambia)는 1455년 포르투갈인(人)이 발견하였으며, 1588년부터 영국 상인의 세력권으로 들어갔다. 17세기 후반부터 1780년대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감비아 쟁탈전을 벌였다. 그 결과 1783년 이래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1843년까지와 1866∼1888년에는 시에라리온과 일괄적으로 통치되었다. 1889년 프랑스와의 협정으로 세네갈과의 경계가 확정되었다. 1954년 9월의 헌법으로 자치정부를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고, 1962년 4월의 새 헌법으로 자치로의 전진속도가 빨라졌다. 이어 1963년 10월 내정자치가 인정되었고, 1965년 2월 18일 영국연방 내의 독립국이 되었다. /naver
- 제5대 대통령 취임기념(1963.12.17)
1963 - 박정희의장 정국수습위해 민정불참 성명 [어제의 오늘]1963년 박정희 민정 불참 선언 ㆍ‘악어의 눈물’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던 1963년 초, 군정의 총책임자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또 한번 결단의 순간을 맞고 있었다. 이른바 ‘4대 의혹’ 등 각종 비리에 대한 안팎의 비난과 미국과의 알력, 쿠데타 세력 내부의 분열, 야당의 공세 등으로 군정은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분노인지 체념인지 모를 침묵을 지키던 박 의장은 그해 2월18일 “민정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폭탄 선언을 했다. 목숨을 내놓고 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의 이 같은 선언은 뜻밖이었다. 박 의장은 27일 시민회관에서 군과 정부 요인들을 앞에 놓고 “혁명정부가 기도했던 세대교체 등의 정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했음을 자인한다”면서 민정 불참 의사를 거듭 밝혔다. 박 의장은 이날 눈물을 흘렸다. 유신모기자 /경향신문 2009-02-17 17:59:1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2171759125&code=100100&s_code=ap005
제8회 동계 올림픽 경기대회 [The 8th Olympic Winter Games] 1960년 2월 18일부터 28일까지 개최, 30개국에서 665명의 선수가 참가하였다. 경기는 6개 종목, 27개 세부종목으로 실시되었다. 28년만에 유럽이 아닌 미국에서 다시 개최되었으며, 1955년 파리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캘리포니아주(州)에 있는 스쿼밸리(Squaw valley)의 대회유치를 결정했다. ‘죽음의 골짜기’로 알려진 해발 1,900m의 스쿼밸리가 대회 개최지로서는 위험하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미국은 많은 경비를 들여 4개의 아이스링크와 스키코스·기숙사·선수촌·호텔 등 완벽한 시설을 갖추었다.
- 인촌 김성수 탄신 100주년 기념 (1991.10.11. 발행)
- 동아일보 창간 70주년 기념 (1990.3.31. 발행)
김성수 [金性洙, 1891.10.11~1955.2.18] 오늘의 역사 (2월 18일)[1955년] 인촌 김성수 사망 교육가-언론인-정치가로 알려진 인촌 김성수 선생이 1955년 2월 18일 정경학부에 입학, 1914년 졸업 후 귀국하여, 운영난에 빠진 중앙학교를 인수하여 1917년 3월에 교장이 되었다. 1919년 경성방직회사를 창설하여 경제자립과 민족자본육성에 노력하는 한편, 1920년에는 동아일보사를 창립했다. `동아일보`를 통해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였고, 1923년에는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펴서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힘썼다.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 1946년에는 이학교를 기초로 고려대학교를 설립하였다. 1949년에는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으로, 1951년 제2대 부통령이 되었으나, 정부의 국회탄압사건에 항거하여 이듬해 5월에 사임했다. 1952년 12월에 민주국민당 고문이 되어 야당인으로 호헌세력의 단결을 외치다가 1955년 2월 18일 병사,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받았다. /조선닷컴 2017-02-18 http://focus.history.chosun.com/history/read_body.jsp?id=19990816_0355
- King Tribhuvana, 10th Democracy Day
1951 - 네팔, 영국으로부터 독립 1947년 영국이 인도에서 물러나자 막강한 외세를 상실한 라나 체제는 새로운 위기에 봉착했다. 1950년 11월 인도의 민족주의 운동을 통해 정치적 훈련을 받은 인도 거주 네팔인들을 중심으로 한 반(反)라나 혁명군이 트리부반 왕(1911∼55 재위)과 동맹을 맺고 라나 체제의 타도를 위해 혁명을 일으켰다. 네팔의회당(Nepali Congress Party/NCP)이 이끄는 혁명군은 인도의 강력한 외교적 지원을 등에 업고 1951년에 라나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네팔은 왕정으로 복귀했다. /브리태니커
1951 - 타이완의 정치가, 총통 천수이볜 [陳水扁] 출생 천수이볜 [陳水扁(진수편), 1951.2.18~] 타이완의 정치가. 타이완 타이난현[臺南縣]에서 태어났다. 일용잡부의 가정에서 태어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불릴 만큼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1945 - 러시아의 군인, 장군 이반 체르냐홉스키(Chernyakhovsky, Ivan) 전사 체르냐홉스키 [Chernyakhovsky, Ivan Danilovich, 1906.6.29~1945.2.18] 이반 체르냐홉스키 이반 다닐로비치 체르냐홉스키(러시아어:Ива́н Дани́лович Черняхо́вский; 1906년 6월 29일-1945년 2월 18일)는 제2차세계대전에서 활약한 소련의 군인이다. 대전 말기에는 차수(러시아어: генерал армии, 영어번역은 General of the Army이지만 미국과 달리 소련에서는 원수 아래의 계급이다)까지 승진했는데, 소련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그 계급에 올랐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될 때는 영관급에 불과했으나, 눈부신 전공을 세워 1942년 37세에 장군이 되었고 쿠르스크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대활약을 하여 차수까지 승진, 일약 상관이었던 로코소프스키의 반열의 전선군 사령관이 되었다. 1945년 베를린으로 진격하던 중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현재 칼리닌그라드)에서 전사하였다. /위키백과
1943 - 반나치 저항조직 '백장미'의 숄 남매 체포됨 나치 독일 시대 뮌헨대학 학생이었던 조피 숄(Scholl, Sophie, 1921~1943)은 오빠 한스 숄(Scholl, Hans, 1918~1943) 및 동료들과 함께 ‘백장미(Die weisse Rose)’라는 반나치 저항조직에서 활동했는데, 1943년 2월18일 오빠와 함께 체포돼 4일 뒤 처형당했다. 조피는 21살, 한스는 24살이었다. 백장미 저항운동이란 제2차 세계대전중이던 1942년 6월 익명의 유인물이 뮌헨지역의 불특정 시민들에게 우송됐다. “무책임한 어두운 충동에 몸을 맡긴 지배자 무리들에게 저항도 하지 않고 통치를 허용할만큼 문화민족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은 없다.” 다른 사람이 시작하기를 기다려서는 안된다. “파시즘이나 그와 유사한 모든 절대국가 조직”에 대해 할 수 있는 한 저항을 해야 한다.- <백장미 통신>이라 이름붙인 유인물은 나치의 전쟁수행정책에 대한 ‘소극적 저항’(비폭력불복종)을 촉구했다. <백장미 통신> 제1호는 뮌헨대학 의학부 학생 한스 숄과 알렉산더 슈모렐이 썼다. 제4호까지 냈을 때 그들은 동부전선에 동원돼 전장의 무참한 현실과 유대인 학살 등을 직접 체험한 뒤 더욱 저항 신념을 굳혔다. 1942년 11월에 전선에서 돌아온 그들은 동지들을 늘리는 한편 베를린이나 다른 지역 저항그룹들과 서로 연락을 취했다.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이 패배한 사실을 안 그들은 <백장미 통신> 제6호를 만들었다. 제6호는 “남녀학생 여러분, 우리 민족은 스탈린그라드 괴멸에 떨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우리 민족은 국가사회주의(나치즘)의 유럽 노예화에 저항하고 자유와 명예의 새로운 신념으로 가득찬 진군을 시작하려 한다”고 끝맺고 있다. 학생들과 함께한 쿠르트 후버 교수가 썼다. 최후의 통신이 된 제6호를 조피와 한스는 대학 구내에 배포하다가 대학 직원의 고발로 현장에서 체포됐다. 2월22일 열린 민족재판소는 조피와 한스, 크리스툴 프로프스트 등 3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 뒤 관련자 체포가 잇따라 43년 4월의 제2차 재판에서는 후버 교수, 알렉산더 슈모렐, 빌리 그라프 3명에게도 사형이 선고됐다. 백장미 그룹에 대한 재판은 1944년 10월까지 다섯차례에 걸쳐 모두 14명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나치 지배하의 독일에서 게슈타포의 심문을 받은 시민은 100만명을 넘는다. 민족재판소는 ‘국가반역죄’를 처리할 목적으로 1934년에 설립됐는데, 패전까지 5200건의 사형판결을 내렸다. 백장미는 비좌익계 저항운동을 대표하는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심야통신-백장미의 기도] 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 /한겨레 2006-02-16 오후 04:15:00 http://www.hani.co.kr/arti/BOOK/102802.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