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내 → 감곡 매괴성모 순교지 → 여주 도전리
50.5Km 37.6Km
미리내 순례를 마치고 감곡성당 가는 도중 늦은 점심을 먹었다.
고기를 먹으려고 배티성지, 죽산성지를 거쳐 계속 찾다가
겨우 찾은 한우전문 식당으로 시장하기도 했지만 정말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감곡 성당은 여주에 살 때 여러번 방문한 적이 있다.
서울 성가복지병원 봉사자들이 순례왔을 때 합류했고,
스승예수제자 수녀회 수녀님들이 부활 엠마오 길에 차량봉사,
그리고 우리 부부가 다녀온 적이 있다.
모두 김웅열 신부님 계실 때였다.
느티나무 카페에서 활동할 때 김웅열신부님에게서
성경 신구약 완필로 축복장과 천국의 반지를 받기도 했다.
27. 감곡 매괴성모 순례지 성당
감곡 본당은 1896년 9월 17일 ‘장호원 본당’(長湖院本堂)이란 명칭으로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매괴(묵주기도)의 성모이다.
장호원 지역은 본래 부엉골 본당 관할 지역에 들어 있었다.
부엉골은 현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康川面 釜坪里)에 있던 산간 마을로,
1885년 예수 성심 신학교가 설립되면서 교우촌으로 조성되었고,
1887년 신학교가 서울 용산으로 이전한 뒤에도 얼마 동안 본당으로 남아 있었다.
여주살 때 두 번 찾아간 적이 있지만 신학교터라는 표지판만 있었고
개발이 되지않아 찾기도 힘들었다.
그 후 장호원 지역이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1894년 봄
부엉골 본당 신부로 부임한 부이용(Camillus Bouillon, 任加彌) 신부 때였다.
그는 이곳에 부임한 뒤 본당 위치가 적당치 않음을 깨닫고
장차 이를 이전할 장소를 물색하던 중
1896년 5월 장호원의 매산 언덕에 자리 잡고 있던 한옥을 매입하게 되었다.
이 집은 본래 임오군란 때 민비(閔妃)가 일시 피신하기도 했던 민응식(閔應植)의 한옥으로
1895년 말 의병과 일본군의 전쟁 속에서 불타 버린 상태였다.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허락을 얻어 이를 매입하게 된 부이용 신부는
부엉골에 거처하면서 불탄 집을 수리하였으나 일이 여의치 않자
예정을 앞당겨 1896년 9월 17일 장호원으로의 본당 이전을 결행하였다.
이로써 부엉골 본당은 폐지되었다.
당시 장호원에는 신자수가 5-6명에 불과하였지만,
본당의 관할 지역은 매우 넓어 경기도 여주 · 이천, 충청도 단양 · 제천 ·
충주 · 음성 · 괴산 · 진천 · 청주 · 보은 등이 여기에 속하였으며,
공소수 27개에 총 신자수는 1,300여 명에 이르고 있었다.
장호원에 정착한 뒤 부이용 신부는 우선 사제관과 그에 딸린
소성당 공사를 계속하여 그 해 12월 5일 이를 완공하였다.
그러나 장호원 자체의 신자수가 증가하였고,
또 20여 개에 이르는 공소의 신자들도 증가하는 상태였으므로 성당 건립이 시급하였다.
이에 그는 1903년 성당 신축을 시작하여 다음해 9월에 이를 완공하고,
그 해 10월 2일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신축 성당의 규모는 한옥과 양옥의 절충식으로 총 80평에 달했다.
이 성당은 충청북도에서 가장 먼저 건립된 성당으로
1930년 10월 7일에 고딕식으로 지었으며,
1934년에 석조 건물로 2층의 사제관(현 매괴 박물관)이 건립되었다.
이 성당은 본래 여주군 강천면 부흥골 본당 관할이었는데,
1894년 소신학교가 자리한 부흥골 본당 신부로 부임한 부이용(任加彌)신부가
1896년 9월 감곡 매산(玫山)밑에 임오군란 때(1882년)에 명성황후가 피신해 있었던
민응식의 집이 있었던 곳(현 매괴고등학교)으로 본당을 이전하여 장호원본당이라고 하였다.
이때에 사제관 겸 소성당을 완공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최초의 감곡성당이다.
1903년에 한옥과 서양식을 절충한 사제관과 구 성당(아랫성당)을 신축하게 되었으며,
'매괴의 성모'를 주보로 삼고 뮈텔 주교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 성당은 일제하에 지방민의 교육과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1907년에 매괴학당을 설립하였으며,
1914년에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성체거동행사를 시작하였다.
감곡 성당은 성모마리아께 첫 봉헌된 성전인
'리베리오 교황 성모 대성전'과 영적유대성당으로 선정된 곳이다.
성장과 변모
본당이 점차 정착되면서 부이용 신부는 우선 교육 사업에 눈을 돌렸다.
이에 그는 1907년 남학교인 매괴학당을 설립하고 이어 1912년에는 여학교를 설립했는데,
그중 여학교는 그 해 본당에 부임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이 교육을 담당했다.
이들 학교는 이듬해 6년제 보통학교로 과정이 변경되었다.
한편 부이용 신부는 조림 사업에 솔선수범하였으며,
1914년부터 매산(장미의 언덕)에서 성체거동을 시작하였고,
1922년에 학교 건물을 1차 개축하였다가 1936년 정식 인가를 받고 3층 교사로 증축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본당에서는 1930년 10월 7일에
종각 높이가 130척이 넘는 현재의 고딕 연와조 성당을 신축하고,
1933년 본당 성가집을 편찬 간행하였다.
이렇듯 부이용 신부와 신자들의 열성으로 본당의 교세도 크게 증가하여
1937년에는 총 신자수가 2,150명이 되었다.
일제 말기가 되면서 다른 본당들과 마찬가지로 장호원 본당도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였다.
일본인들의 감시와 간섭이 계속되었고,
1942년에는 보좌 조인환(曺仁煥, 베드로) 신부가 사소한 일로 투옥되기까지 하였다.
한편 일제 당국에서는 매산 언덕에
자기네들의 신사(神社)를 건립하려고 획책한 일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해 부이용 신부가 일본인들의 적국인 프랑스 선교사라는 이유 때문에
용산 신학교에 연금되어야 했다.
그 결과 장금구(莊金龜, 크리소스토모) 신부가 제2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게 되었고,
이어 다음해에는 유영근(劉榮根, 요한) 신부가 부임하여 해방을 맞이하였다.
이때 신자들은 한일합병 당시 부이용 신부가 제대 밑에 숨겨 두었던 태극기를 게양하고,
부이용 신부를 맞이하여 광복의 기쁨을 맛보았다.
부이용 신부는 이해 11월 제4대 주임으로 다시 부임하여 활동하다가 1947년 10월 선종하였고,
그 뒤를 이어 보좌로 활동하던 박고안(朴稿安, 프란치스코) 신부가 주임으로 임명되어
6.25 동란을 겪었으며, 그 후 1953년 3월에 매괴학교를 매괴상업학교로 변경하였다.
이 학교는 1966년에 여자 중학교를 병설한 뒤 학칙을 변경하여
매괴여자중 · 상업학교로 인가를 받았으나, 국민학교는 1972년에 폐교되었다.
한편 감곡 본당은 충청북도(청주교구)의 모본당으로서 그 동안 많은 자본당을 낳게 되었다.
1920년 고마리 본당(증평 본당의 전신), 1932년 청주 본당(수동 본당의 전신),
1945년 충주 본당, 1957년 무극 본당(현 금왕 본당), 1995년 앙성 본당,
2001년 생극 본당 등이 분할 설립되었으며,
다시 이로부터 여러 자본당들이 분리되었다.
뿐만 아니라 교회 묘지의 매입, 자선 활동, 신심 활동 등을 통하여
지역 사회 안에서 활동하는 공동체로 성장시켜 왔으며,
1986년 본당 설립 90주년을 맞이하여 성모 동산을 정비하고
부이용 신부의 입상을 제작, 축성하는 동시에 “감곡 본당 90년사”를 편찬 간행하였다.
1930년 전국에서 18번째, 충청북도에서는 최초로 건립된 감곡 성당은
1996년 1월 5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8호로 지정되었다.
성당 건물은 프랑스 신부인 시잘레(Chizallet, 池士元)가 설계하고 중국인들이 공사를 담당했다.
길이 40m, 넓이 15m, 종탑 높이 36.5m의 고딕식 건축물로 명동 성당의 축소판 같은 인상을 준다.
내부 천장은 원형 돔이고 중앙제대와 옆면에 4개의 소제대가 있으며,
라틴 십자형의 평면 구성은 국내 다른 옛 성당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화강암으로 된 2층 건물인 사제관은 성당이 건립된 4년 후인 1934년에 지은 것이다.
제대 정면에는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게 7발의 총탄을 맞았다는
본당 주보(主保)인 ‘매괴 성모상’이 설치되어 있다.
프랑스의 루르드 성지에서 제작되어 1930년 성당 봉헌 당시 제대 중앙에 안치된 성모상은
7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건재했다.
지금에 와서는 그 총탄 흔적을 통해 성모칠고(聖母七苦)를 기억하며,
주보로서 본당을 수호해주고 전쟁을 겪은
우리 겨레의 아픔에 동참하고자 한 성모의 마음을 깨닫고 있다.
감곡 성당은 2000년에 “감곡(매괴의 성모) 본당 100년사 · 화보집”을 발간하였다.
본당사는 복음의 전래와 교구의 변모, 장호원(감곡) 본당의 설립과 성장,
감곡 본당과 메리놀 외방전교회, 한국인 성직자의 사목과 본당 설립 100주년 행사,
자료집과 뮈텔 주교일기에 나타난 감곡 본당, 공소현황 등으로 정리되어 있다.
또 화보집은 초창기부터 각 시기별로 본당 역대 주임사제와 수도자, 본당 출신 성직자와 수도자,
본당전교 · 단체활동, 성체현양대회, 교육 · 신심활동, 공소행사를 모두 담았다.
2002년 10월 10일에는 유물관(매괴 박물관)을 개관했다.
이 유물관은 1934년 건축된 연면적 353평에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석조 건물로
그동안 사제관으로 사용하던 것을 개조한 것이며,
성당이 최초 설립된 1896년 이후 전해 내려오는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1914년 첫 성체현양대회 당시 사용했던 성모성심기와 예수성심기,
일산(日傘), 제의를 비롯해 본당 신자들이 사용하던 교리서
“요리강령”(1910년본)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감곡 성당은 2005년 2월말 사제관, 수녀원과 함께
‘가밀로 영성의 집’을 신축하고 피정 및 순례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초대 주임인 임 가밀로 부이용 신부의 이름을 딴 ‘가밀로 영성의 집’ 완공으로
순례객 100여명의 숙박이 가능하게 됐다.
청주교구는 2006년 10월 7일 감곡 성당을 ‘매괴 성모 순례지’로 공식 선포했다.
장봉훈 주교는 본당 주보인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을 맞아
교서를 발표하고 감곡 성당을 매괴 성모 순례지로 승인했다.
성모 순례지 지정은 1991년 10월 7일 성모께 봉헌된
수원교구 남양 성모성지에 이어 한국 교회에서 두 번째이다.
장봉훈 주교는 성모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 은총의 표징들로
성당 옆 매괴 성모광장이 일제강점기 중 신사참배 터로 지정되어 공사를 계획했으나
천둥과 소나기, 벼락으로 일제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고,
1950년 한국전쟁 중에 공산당원들이 성당 제대 중앙에 모셔진 매괴 성모상에 총을 쏘았으나
7군데 탄흔이 남는 가운데서도 파괴되지 않아
지금까지 성모칠고를 묵상하도록 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매괴 성모 순례지 선포 이후 감곡 성당은 전 공동체가 성역화에 힘써
가밀로 영성의 집 앞에 임 가밀로 신부 동상을 세우고,
2008년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매산 정상의 매괴 산상에
15m 높이의 대형 십자가와 제대, 성모상과 사도 요한상,
임 가밀로 신부 성체강복상 등을 새로 마련하여 축복식을 갖고
세계적인 성모 순례지로 도약할 채비를 갖췄다.
이로써 1896년 부임하여 50년간 성체 신심과 성모 신심을 두 축으로 해서
공동체를 이끈 임 가밀로 신부의 기도가 그 열매를 맺고 있다.
그리고 2009년 4월 20일 ‘로마 성모 대성전(Saint Mary Major Basilica)과
특별한 영적 유대로 결합된 성당 및 순례지’로 지정되었다.
역사 속 감곡성당(성당 홈페이지에서)
1. 매괴성당의 유래
2. 사랑의 선교사
3. 성모광장
4. 수난받은 성모님
오늘 배티성지 순례를 마치고 안성에서 숙박을 하려고 예약했는데
죽산, 감곡성당 순례를 마치고 나니 제 3고향이나 다름없는 도전리 생각이 났다.
원고향(용인 12년), 2고향(서울 30년), 3고향(은퇴 후 10년), 4고향(제주7년), 기타 10년
갈멜수녀님들이 여주에 꼭 한 번 방문하라는 말씀도 있었고
여주에서 얻은 영세및 견진대자도 보고싶고
또 마을 교우분들의 소식도 궁금했기에 전화를 하고 도전리로 향했다.
먼저 4시 반경 수원 순교 가르멜 봉쇄 여자 수도원을 방문하여
2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도원 설립 준비하실 당시 스페인 본원으로 연락하는
서신을 주고 받을 때 우리집 컴퓨터로 작업을 하시기도 했고
매일 새벽미사 시간에 만나기도 했던 수녀님들이다.
서로 궁금했던 이야기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영성적인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은총의 시간이었다.
홍시 한 상자 밖에 드릴 것이 없었는데 나올 때는 곶감, 빵 등 간식을 싸 주셨다.
후원금 약간 드리고 약속시간에 맞게 수도원을 나왔다.
숙소는 대자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하고 7시에 저녁약속을 했다.
대자 부부와 바오로형제와 어머님과 우리 부부가 함께하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많은 분들이 돌아가시거나 요양원으로 가셨다는 말,
이제는 수도원 미사에 마을교우분들이 참례하지 못해 불편하다는 점,
도전리를 떠난 지 7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많은 것이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수녀님들과 자주 은행을 주우러 다녔던 반계리 은행나무가 유명해져
지금은 축제도 열리고 차량행렬로 무척 붐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바오로씨가 찍은 사진을 몇 장 받고 동영상도 찾아 보았다.
식사 후에 집으로 가는 길에 대자가 치킨집에 미리 주문한
치킨과 생맥주를 찾아와 집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 도중 대자부부가 성지순례를 하고 싶다는 말을 해서
틈틈히 가까운 곳부터 방문할 것을 권유하고 제주에 도착해서
김대건신부님 표착성지에서 2권을 구입해 택배로 보내주었다.
여주에서 출발하다보니 예정에 없었던
풍수원 성당과 홍천 성당까지 순례를 할 수 있었다.
'계획은 인간이 세우지만 좋은 길로 이루어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라는 말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반계리 은행나무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
이 나무는 높이가 34.5m(일반건물 10층 정도 높이),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가 16.9m,
남북으로 31m 정도로 넓게 펴져 있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대략 800년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나무는 예전에 이 마을에 많이 살았던 성주 이씨 가문의 한 사람이 심었다고도 하며,
또 아주 오랜 옛날에 어떤 대사가 이 곳을 지나가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신 후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꽂아 놓고 간 것이 자란 것이라고도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 속에 커다란 흰 뱀이 살고 있어서,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는 신성한 나무로 여겼다.
가을에 이 나무에 단풍이 일시에 들면, 다음 해에 풍년이 든다는 전설도 있다.
반계리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오래되고 큰 나무로서 생물학적 가치가 높은데다,
신목으로서 역할을 하고 전설을 가지고 있는 등
민속문화를 알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무성하게 잘 자라고 있으며,
줄기하고 가지가 균형 있게 퍼져 있어 보호되고 있는 은행나무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멋진 나무로 유명하다.
첫댓글 오늘도 감사합니다 세잎 클로버님. 감곡 성당 매괴 산을 묵주기도를 하며 오르다 정상에 세워진 대형 십자가고상 밑을 지나며 더 작아졌던 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기관단총의 총알이 피해간다 ^^
감사합니다 ^^
이렇게 성지순례
다니실 수 있었던
두 분 정말 부럽습니다.
반계리 은행나무 멋지네요
성균관대 은행나무와 비슷한데
반계리 은행나무가
더 풍성한 거 같아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