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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1949년 기축년 소띠 해에 충청북도 영동 산골마을에서 4남 3녀, 7남매 중 여섯번 째로 태어났습니다.
소띠 해에 그것도 5월에, 더더구나 이른 아침 일을 시작하는 시간에.....
그래서 그런지 지난 61년동안 죽자고 쉬지 않고 일만 해 왔나 봅니다, 이제 쉬어야 할 때도 된것 같은데....
할일도, 해야 할 일도 태산 같이 많아 죽을 시간도 없을것 같습니다.
"사랑만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영혼을 구원하기에 시간이 부족하다"
이런 글귀가 생각이 납니다.
사는 동안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명 감당해야죠,
그리곤 부르시면 할렐루야 환호하며 이 땅을 떠나야죠.
오늘 한민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아내 박정혜와 함께
"장례 지도사" 2급 자격시험을 치루고 왔어요,
앞으로 언제까지 얼마만큼 많은 사람들의 천국 가는 길을 고이 고이
안내 할른지...........
주님 만이 아시겠지요?
아래의 이 소가 저와 꼭 닮은것 같답니다.
우직,
바보,
함지,
<< 부리는 소, 먹이는 소>>
옛 선비 이덕무(李德懋)의 글에 나오는 쟁기질에 관한 글입니다.
"힘 진 농부가 새벽에 봄비를 맞으면서 밭을 갈고 있다.
왼손으로는 쟁기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고삐를 쥐었다.
그 고삐로 검은 소의 등을 때리며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그 소리는 마치 산이 찢어지는 듯, 물이 소용돌이 쳐 흐르는 듯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검은 소는 발굽을 날리며 부드러운 흙을 구름덩이나 물고기 비늘을
나란히 겹쳐 놓은 것처럼 손쉽게 갈아 젖혔다.
이 또한 세상의 한 가지 장쾌한 일이라 하겠다."(이덕무)
워낭소리 영화에 보면 할아버지가 쇠전에서
'부리는 소'를 찾는 장면이 나옵니다.
"부리는 소 있나?"
"부리는 소? 요즘 없어요"
다른 사람에게 물어 보아도 '없어' 하는 대답만 돌아올 뿐입니다.
'부리는 소.'는 쟁기질을 할 수 있는 일소입니다.
옛날에는 농사일을 일소가 다 했는데 지금은 기계가 하기 때문에
일소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거의 잡아먹으려고
키우는 '먹이는 소' 뿐입니다.
소는 사람들의 편리에 따라 '부리는 소'가 되기도 하고 '먹이는 소'가 되지만,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 부리는 소가 될 수도 있고 먹이는 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돼지처럼 살만 피둥피둥 쪄서 잡아먹히는 날만 기다리는 '먹이는 소'가 되시렵니까?
아니면 힘차게 일을 하는 '부리는 소'가 되시렵니까?
저는 요즘 '왜 교인들이 이렇게 힘이 없을까?' 생각을 많이 해보는데,
교회가 교인들에게 온갖 좋은 것들만 먹여서 '먹이는 소'로 만들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고된 훈련을 시켜서 '부리는 소'로 강하게 키워야 끙끙 일도 잘하고
순종도 잘 할텐데 너무 과보호를 하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저도 '부리는 소'가 되고 싶습니다.
워낭소리
어느 날 우연(偶然)히 신학 동기생들과
나는 영화 한편을 보게 되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가슴에 무언가가 뭉클한
짓누름이 있었다.
독립(獨立)영화 ‘워낭소리’였다.
그리곤 곧 교회에 와서 CD를 구해서 성도들과
함께 진지하게 감상을 다시 한번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저씨, 아줌마,
나는 ‘워낭소리’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내 자신과 소를 비교(比較)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할아버지의 진실함과
소의 성실함에 감탄(感歎)하면서
내 자신은 한없이 작게만
느껴졌다.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아직까지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소(牛)만도 못한 인간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 마음의 소리가 오히려
내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 주기까지 했다.
나는 먼저 3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변함없는 소에 대한
할아버지의 가족 같은 사랑 앞에 무릎을
꿇으며 내 가슴을 치게 했다.
아니 어쩜 사람과 동물 사이에
사람 같은 우정(友情)과
그러한 사랑이 가능했단 말인가.
할아버지는 소를 생각해서
자기 논에는 농약을 치지 않았고,
일할 때에도 혹시나 약에 오염된 풀을
뜯어먹을까봐 소입에 망까지
씌워 놓았다.
언제나 할머니보다
늙은 소를 더 사랑했기에
할머니는 항상 불만을 터뜨렸지만,
여전히 할아버지는
소가 항상 최(最)우선이었다.
무뚝뚝한 노인이지만 소를 자랑할 때만은
활짝 웃으시며 말씀하시는데,
소는 그 말을 알아듣는 듯 눈물을 흘린다.
소도 역시나 주인을 생각하는 마음은
사람보다 더 속이 깊다.
무식한 사람일수록 정(情)에 약하고,
장애가 있는 사람일수록
특별한 사물에 대한 애착이 더 강하듯,
그들은 전생에 무슨 부부(夫婦)인 것처럼
서로에 대한 마음은
사람끼리의 사랑보다 더 진솔했고,
둘 사이에 어떤 고난이 와도
이겨나갈 수 있는
우직(愚直)함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큰 능력이었다.
이제 보니
소는 할아버지 자신이었다.
아니 자신보다
더 사랑하고 소중(所重)히 여겼다.
그에게는 소가 전부였기에
소와 함께했던 시간에
기적(奇蹟)같은 일이
그리도 많이 일어났던 모양이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자신에게 수없이 이런 질문(質問)을 했다.
나에게도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유지해
온 참다운 우정이 있는가.
내 인생 전부라 여기며
모든 애정(愛情)을 쏟을 수 있는
일과 사람이 있는가.
아니다.
나는 신(神)을 섬기는 일조차도
밥벌이를 위한
일이 될 때가 많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오로지 내 유익과 결부시켜
자신을 위한
도구(道具)로 쓸 때가 더 많았다.
어떤 일이든 오래 인내하기 보다는
조금만 어려워도 환경(環境)을 탓하며
사람을 원망하며
진실(眞實)에서 멀어져갔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물론 나는 이 모든 원인이 사랑과
신뢰의 결핍(缺乏)에서 왔음을
잘 알고 있다.
이 시대의 종말은
자원부족이나 환경파괴라는
외적(外的)인 요소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식어짐으로 스스로
해체된다는 것을
내 자신을 통해 보는 듯하다.
사랑이란 용납(容納)이다.
용납하지 못하기에 그런 우정도 없었다.
자신을 용서하고
상대를 용납하고
사건을 수용할 때 기적(奇蹟)은
지금도 그처럼 일어날 것으로 믿는다.
두 번째는 사명(使命)에 대한 생각이다.
할아버지는 귀가 어둡다.
그럼에도 소의 턱 밑에 매어놓은 방울인
‘워낭소리’는 얼른 알아들으시고
주무시다가도 일어나신다.
할머니가 무슨 불만을 터뜨려도
묵묵부답이건만,
소의 작은 움직임에는 대꾸를 하신다.
그들은 서로 바라만 보아도
대화(對話)가 통할 것 같은 우정이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서로에 대한 의무(義務)를 충실하게
감당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소를 생각해서
사료를 주지 않고
직접 소죽을 쒀서 주기 위하여
아픈 다리를 끌면서
소꼴을 베러 나가시면서도
아픈 소를 생각하며
눈물을 훔치신다.
소 역시 주인(主人)의 마음을 아는지
제대로 서지도 못 하면서
노인이 고삐를 잡으면
산 같은 나뭇짐도 마다 않고
짊어 나른다.
노부부를 위해 마지막 까지 일만 하다
떠나간 소를 보고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갈 거면 편히 갈 것이지
늙은이들 겨울 나라고 저렇게
많이 해놓고 갔나...’
나는 소가 죽었을 때보다도
할머니의 이 독백이
오히려 내 눈물샘을 자극(刺戟)시켰다.
마지막까지도
아픈 몸으로 그렇게 많은 나무를
해 놓고 죽다니...
바로 이 대목이 무딘 내 자신이
그 소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게 했던 것이다.
소는 이성은 없지만
코뚜레로 제어(制御)받고,
워낭소리로 자신의 위치를 알리고
주인을 부르고 그리고
악한 짐승을 쫒게 했던 것이다.
하물며 나는 무엇인가.
이성과 영성을 소유(所有)하고 있으면서도
무엇이 나를 제어하고 있는가.
과연 소리(Logos)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알고
또 인생의 주인을 부르고 있는가.
오히려 ‘워낭’에 감사는커녕
내 목에 매인 그것이
부담스러워,
할 수만 있으면
멀어지려는 내 자신은
분명 소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세 번째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다.
갈수록 할아버지 입에는
‘아파’ ‘아파’라는 말을 달고 사신다.
할아버지나 소나 이제
너무 늙어 아플 수밖에 없었다.
어느 봄 날,
노인은 수의사에게 소가 올 해를
넘길 수 없을 거라는 사형선고를 듣게 된다.
그런데 정말로 어느 날
외양간에서 소가 일어나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가장 먼저 코뚜레를 풀어주고,
한 평생 달려있던 워낭도
재빠르게 풀어준다.
‘죽으면 좋은데 가 그래이...’
둘 사이에 맺어진
인연을 잘라내며 흐르는 할아버지의 눈물엔
오랜 세월 동거 동락했던 친구가
죽은 듯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더해 준다.
그리고 영화는
그렇게 조용히 끝을 맺는다.
만약 그 영화가
픽션이었다면 감동은커녕 뭔가가 빠진 듯
더 허무(虛無)해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죽는 것은
소뿐만 아니라
인생(人生)도 조용히 끝나기에,
다른 것을 덧칠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감동(感動)을 주기에 충분하다.
누구도
신의 부름 앞에선
어쩔 도리(道理)가 없다.
하지만 죽는다는 문제보다는
그 죽음 속에 진실(眞實)이 담겨 있다면
그 일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동을 줄 수 있다.
그 진실이란
죽기 전 그 사람의 삶 자체가
진실했다면 죽음 이후에
더 큰 풍성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이다.
어느 분이 죽을때에 ‘나는 행복하다...’
‘그동안 고마웠다...’ 두 마디였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성공적인 인생을
산 사람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평생 진실(眞實)하게 살았다는
명백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주여,
신뢰,
가족애,
그리고 눈물이 인생에서
이리도 소중하다는 것을
이 무딘 종은
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 번 깨달게 되었습니다.
소와 할아버지가
그리도 서로에게 동반자였듯이,
저도 당신의 소가되어
마지막 그 순간에,
‘감사합니다!’
‘정말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고백을 한 후
당신 품에 안기게 하소서.
2009년 5월 15일 늦은 밤에 귀한글을 읽으며 내 사명을 생각하며
가정의 달 5월이군요, 제 생일도 끼어 있는 달이지요
금년과 내년에 불을지펴 따듯하게 몸을 녹이며 일하기 위해 나무를 잔뜩 해다 쌓아 놓고 흐믓해 하고 있는 남목사
푸릇푸릇 솟아 올라 무럭무럭 자라는 풀들과 꽃들이 저와 늘 함께하는 자연스런 이웃들이랍니다. 물론 성도들과 가족들, 그리고 이웃들도 있고요. 구원으로 인도해야 할 마을 사람들도 많지요.
2009년 5월 11일(월), 이른 11시 대전 유성 대덕교회 예배당에선 의미있는 한 사건이 진행되었다. 총회에 참석했다,
지금까지 3개 교단농목(기장, 기감, 예장통합)만이 연합해서 농목활동을 해왔다. 하지만 이번엔 적어도 7개 교단이 참여하게 되어 본격적인 한국에 있는 농촌목회자 연합모임을 만들게 되어 의미가 있다. 비록 50여명의 사람들이 모였지만...
이곳에 참석한 분들은 대부분이 농촌에 대한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자신의 현장을 모범적으로 일궈오셨거나, 일구고 있는 분들이다. 농촌을 거쳐가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시고 농촌을 사랑하며, 새로운 대안을 만들기 위해서 농촌현장을 지켜가면서 몸부림치는 분들이라 더욱 의미가 있는 자리라고 본다.
자문위원을 소개했다. 자문위원들은 각 교단별로 선임되었다. 자문위원으로 위촉된 명단은 다음과 같다. 박수영목사(합신농목) / 박흥규목사(기감농목) / 여태권목사(기장농목) / 이태영목사(기장농목) 임인수목사(예장농목) / 조화순목사(기감농목) / 한경호목사(예장농목)/남승복목사(대신농목)
창 립 선 언
전국 방방곡곡의 깊은 산골마을에서,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섬마을에서, 이름없이 빛도없이 젊은이들은 떠나고, 이제는 노인들만 남아 갈수록 황폐해가는 이 땅을 지키며, 생명을 가꾸는 늙은 농부들을 섬기며, 농촌교회를 목회해온 교단별 농촌목회자들이 연대하여 한국기독교 농촌 목회자 연대회의를 발족한다. 우리는 농촌교회 목회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이 땅 농민들이 구원의 기쁨과 물질적 풍요를 넘어선 평화와 생명 공동체적 영성을 경험하게 하고자 노력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죽임과 분쟁의 문명에 맞서 정의와 평화가 함께하는 생명 세계를 일구기 위해 교단과 지역을 초월하여 연대하고 협력한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열악한 농촌 목회현장에서 겪는 애환을 나누며, 농촌선교를 위한 서로의 경험과 정보를 나누며, 농촌목회자들의 자기개발과 친교를 위해 활동한다. 우리는 농촌선교를 위해 헌신하는 도시교회와 농촌교회의 바른 협력 선교모델을 개발하고 농촌지역 선교를 위한 전문적 역량개발에 힘쓴다. 2009년 5월 11일 한국 기독교 농촌목회자 연대회의
대전 대덕 연구단지 안에 위치한 한국 유일의 카이스트 대학 대 운동장에서 대신팀들 시합하기 전에 기념으로...2명은 예장 농목...
예장 통합도 기념으로.... 예장 1등/ 대신 2등 / 기장과 기감 공동 3등.창립선언문에서 밝혔듯이 연대회의를 통해서 생명살림을 위해서, 농촌현장의 새로운 대안모색과 농촌선교를 위한 전문역량이 실제적으로 많이 개발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첫댓글 반나절 정도 뵐수 있었던 목사님 이셨지만~~멋진 삶을 살아오신 멋쟁이셨습니다..^^*
제 바로 위 누나랑 동갑이시네요~ 글 넘 잘 읽었습니다 '워낭소리' 보지 못 했는데 당장 봐야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 전 직원들 합동교육 시간에도 함께 보도록 할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함께 했으면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