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나그네
글 德田 이응철(강원수필고문)
언젠가 당시 김유정문학촌 전상국 이사장님께서 사석에서 김유정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산골 나그네라고 잘라 말씀하신 적이 있다. 동감이다. 1933년 김유정 처녀 작품-. 나그네는 여자다. 가을이다. 19세쯤 되어 보이는 낯선 나그네가 저녁 무렵 덕돌이 집을 찾는다. 웬 여자 나그네?
덕돌이는 홀어머님과 술장사를 하나보다. 첫닭이 울 때 마을 갔던 덕돌이가 들어온다. 용마루가 쌩쌩 울 때 개가 요란히 짖는다. 그때 누가 찾아왔다. 나그네였다.
-쥔어른 계서유?
-누구유?
처음 보는 아낙네가 마루 끝에 와 섰다.
-저 하룻밤만 드새고 가게 해주세유
-어서 들어와 불 쬐게유
-이리저리 얻어먹고 단게유
며칠 있던 나그네는 남편도 없는 몸이라고 간다고 하더니 주인이 더 쉬어 가라고 해서 머문다. 홀어머니는 술값을 받으러 이 동네 저 동네 다니고, 어느새 솥에 불을 지피어 부랴부랴 밥을 짓는 나그네-. 술집에서 손님에게 술도 권하니 영락없는 며느리다. 수입도 늘었다. 딸처럼 가까이하는 어머니- 결국 장가를 든다. 덕돌이와 나그네-. 상투 튼 덕돌인 어른이 되어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러던 그날 밤-. 부인인 나그네는 아뿔싸 뜬금없이 혼인도 했는데 도망을 간 것이다. 알고 보니 10리 먼 마을 어귀 물방앗간에 병든 남편을 들춰 깨워 야반도주 하다니-. 당시는 가난과 걸식, 유랑민이 참으로 많았다고 한다. 부평초 같이 떠도는 풀뿌리들-.
잡초처럼 짓밟히면서도 살아남는 민초들, 결국 나그네는 덕돌이와 위장결혼을 한 셈이다. 대개 술집 작부들과 사뭇 달리 당시 들병이는 가족이 있다는 것이다. 당시 결혼을 하려면 선채금 30원에 신붓감을 데려온다.
산골 나그네와 결혼 그리고 남편을 살리기 위해 목숨 걸고 위장결혼하고 야반도주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나 보다. 김유정 작품 솥을 보라, 술값 대신 근식이가 맡긴 솥을 들병이 계숙이는 남편에게 지우고 어느 새벽 조밥 꽁댕이를 씹으며 어린 것 등에 없고 동트기 전 줄행랑을 치지 않았던가. 건너편엔 막국수를 누르는데-.들병이들은 이렇게 술을 팔면서도 남편들을 먹여 살린 것이다. 일주일 안팎으로 이루어진 이야기-. 더욱 놀란다. 덕돌이와 홀어머니는 닭 쫒다 지붕 쳐다보는 격이리라. 유랑민들이 질경이 풀처럼 밟히며 들판을 방황했겠지
옷 구하기가 힘들었나보다. 궁핍한 세상. 남편의 겨울 옷을 구하기 위해 술청을 들며 위장결혼을 하고-. 남편 격인 덕돌이의 새 옥양목 바지 저고리를 훔쳐 도망간다. 1930년대 아리고 쓰린 우리 조상들의 모습에 모골이 송연할 만큼 당시 서민 계급이 두렵다. 당시 내가 태어났다고 해도 영락없는 서민이 분명하다.
도적년- 헌데 은비녀는 두고 갔다? 병든 남편에게 홑적삼을 벗기고 훔쳐 온 헐렁한 옷을 입혀 도망친다. 신연강 가는 길목, 걸음아 나 살려라, 나그네들을 감싸 주는 자연공간은 가을이었다.
이 글은 김유정네 소작을 하는 한들마을 돌쇠 모자네 집에 한여름 들렸을 때 들은 이야기를 쓴 자전적인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삶은 곧 모순이란 생각이 지배한다. 모든 겉치레들이 허상이다. 김유정 작가는 이 소설에서 어찌나 깊어가는 가을밤을 문학적으로 잘 묘사했는지 -. 섬세한 의성어들,
-산골의 가을은 왜 이리 고적할까! 퐁! 퐁! 퐁! 쪼록 퐁!
지난번 김유정 선생 제 86주기 추모제 겸 김유정 동상 이전 제막식 때 춘천문협에서 펼친 산골나그네를 간단한 연극으로 보여줄 때 내용은 익히 알고 있지만 어찌나 재미가 솔솔 나던지, 준철 회원의 익살이 덕돌이로 착각할 정도였지.
지금도 나는 실레마을을 산책할 때면 한들(大平)마을을 지나며 두리번거린다. 큰 개울이 흐르고 마을을 이 고장에서는 한두루라 했지. 김유정 소작인 돌쇠 모자가 살았다는 팻말을 보면서 산골나그네란 소설이 탄생한 마을임에 새삼 돌아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