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동선은 민족음악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민족이란 단어가 그에게 붙는 이유는 일제강점기 누구보다 투철한 민족의식으로 살아왔기때문일 것입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과 베를린에 유학한 지식인이기에 그에 대한 일제의 억압과 회유는 집요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온갖 고초를 감내하며 늘 한복을 입고 다니고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한글 문패를 달면서 일제의 폭거에 저항했습니다. 당시 일제는 우리 문화를 말살하기위해 작곡가에게 엔카의 2박자 트로트 작곡을 강요했는데 채동선은 오히려 구전된 민족음악의 채고에 혼신을 다했고 압박이 강해지자 절필선언까지 하기도 했지요. 그가 평범한 작곡가가 아니라 민족음악의 선각자로 존경받는 이유입니다.
오늘 소개하는 가곡은 채동선의 대표곡으로, 한 멜로디에 세 개의 가사가 붙은 특이한 곡입니다. 덧붙이면 채동선의 곡하나로부터 3개의 가곡(고향, 망향, 그리워)이 탄생한 것이지요.
첫 곡은 잘 아시는 "향수"의 작시가 정지용의 시 "고향"에 채동선이 곡을 붙힌 "고향"(1936년)입니다. 그리고 해방후, 정지용의 월북의혹으로 이 노래가 금지되면서 다시 박화목의 시로 "망향"이란 노래로 개사되었고 10년이 지나 채동선의 아내가 남편 사후, 채동선 가곡집을 만들면서 남편의 절친 이은상에게 부탁해서 "그리워" 라는 노래가 다시 만들어지지요. 이렇게 3개의 버젼이 각각의 사연을 담고 시간을 건너 탄생합니다.
음악 평론가들은 이 노래의 특징을 장조와 단조가 통음되고 멈출듯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는 늘임표를 다량 사용하여 고향에 대한 애절한 마음과 당시 민족이 부침했던 슬픔과 한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뛰어난 서정성을 가진 우리 가곡의 정체성도 잘 드러나 있고요.
그가 세상을 떠난지 오래 되었지만 고향 벌교사람들의 채동선에 대한 사랑과 존경은 끝없이 이어져 "채동선 음악당"을 세워 그의 항일정신과 음악성을 후세에 전하려고 노력하는데 작은 읍 곳곳에 음악학원이 있고 "1학생1악기" 학습의 열기가 대단하다고 합니다.
세분의 다른 가사입니다.
ㅡ 정지용 시 고향 ㅡ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ㅡ 박화목 시 망향 ㅡ
꽃 피는 봄 사월 돌아오면
이 마음은 푸른 산 저 넘어
그 어느 산 모퉁길에
어여쁜 님 날 기다리는 듯
철 따라 핀 진달래 산을 덮고
먼 부엉이 울음 끊이잖는
나의 옛 고향은 그 어디런가
나의 사랑은 그 어디멘가
날 사랑한다고 말해 주렴아 그대여
내 맘속에 사는 이 그대여
그대가 있길래 봄도 있고
아득한 고향도 정들 것 일레라.
ㅡ 이은상시 그리위 ㅡ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도
그리운 옛님은 아니뵈네.
들국화 애처롭고
갈꽃만 바람에 날리고
마음은 어디고 붙일 곳 없어
먼 하늘만 바라본다네.
눈물도 웃음도 흘러간 세월
부질없이 헤아리지 말자.
그대 가슴에 내가
내 가슴에는 그대 있어
그것만 지니고 가자꾸나.
그리워 그리워 찾아와서
진종일 언덕길을 헤매다 가네.
그가 태어난 곳은 벌교, 세상을 떠난 곳은 부산, 신접살림을 하며 이소란 여사와 산 곳은 서울 성북동인데 아직도 표지판과 집터가 남아 있다고요.
언제 들어도 눈물이 날 것 같은 이은상 작시, 채동선 작곡 "그리워" sop. 송광선의 가르빙가 목소리로 감상하세요. 오늘도 나우N 히어!
https://youtu.be/mhiQRrQlR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