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한 조선인들의 생각과 발견 과정 및 그 내용과 해석!
이 글은 광개토대왕릉비를 보는 고려와 조선인들의 생각 및 능비의 발견 과정과 그 내용을 살펴
보고 한국, 북한, 일본, 재일사학자 및 중국의 왕건군등 학자들의 해석을 비교해 보기로 합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414년에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대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것으로, 중국 길림성
지안(集安 집안)현 태왕향(太王鄕) 대비가(大碑街) 에 있고, 높이 6.39m 인 다듬지 않은 응회암에
정방형 예서로 각자하였는데 능비의 남서쪽 200m 에 광개토왕의 무덤인 태왕릉(太王陵)이 있습니다
2005년 심양에서 밤기차를 타고 퉁화(通化)를 거쳐 환인에서 오녀산성을 보고 지안(집안)에 도착해 택시
를 대절해서 광개토대왕릉비와 왕릉을 보고는 장군총에 환도산성과 국내성 및 오회분묘와 지안박물관
을 구경하고 기차로 백하에 도착해 백두산에 올랐는데 저 능비를 보면서 고려와 조선시대를 떠올렸습니다.
1. 고려와 조선의 국경선 확장
668년 고구려가 망하고 통일신라의 국경선은 황해도에서 원산만이었으며 신라의 전방
군사 거점은 황해도 평산의 패강진이었는데, 왕건은 918년 철원에서 왕위에 오른지
3달만에 평양에 대해 말했으며 개성으로 수도를 옮긴건 4개월 후인 919년 1월 입니다.
“평양 옛 도읍이 황폐한지 오래이나 옛 터가 남아있다, 가시넝쿨이 무성한 탓에 여진인들이
수렵을 하고 변방 고을들을 침입하니 피해가 막심하다. 백성들을 평양으로 옮겨 살게하여
국가의 변방을 튼튼히해 백세토록 이익이 되도록 해야 한다 - 고려사 권이 태조원년 918년 9월
926년에 발해가 거란에 망하고 936년에 후백제를 멸해 3국을 재통일 하는데, 당나라가
고구려인들을 중국땅으로 잡아간지라 300년 가까이 사람이 살지않아 황무지로 변한
평양 옛터에 사람을 보내 목책을 두르고 남쪽 백성들을 이주시켰으며 수백년간 대를
이어 살던 평안남도의 여진족들을 죽이고 쫓아내며 청천강까지 국경선을 확장 합니다.
993년 소손녕이 침공했을때 서희는 담판을 통해 압록강 하류 강동 6주를 확보하는데... 여진족을
쫓아내고 차지해도 거란이 묵인하겠다는 뜻이니 평안북도의 30% 를 획득했으며,
368년 후인 공민왕 1361년에 다시 진격해 압록강 중류인 강계(江界)와 만포(滿浦)를 점령합니다.
1392년 조선이 건국했을 때 국경선은 평안북도의 3분지 2인 압록강 중부 강계와 만포였는데
태종때 북쪽을 침공해 1416년 여연군을 설치했고, 세종때인 1432년 최윤덕은 1만 5천으로
여진족 이만주를 격파한후 자성군을 설치하니.... 수백년 대를 이어살던 고향땅을 침략자에게
뺏긴 여진족들이 계속 반격해 오는 가운데 이천이 다시 북진해 무창군과 우예군을 설치합니다.
2. 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한 고려인과 조선인의 시각
1370년 1월 고려 공민왕은 요동을 되찾기 위해 이성계를 진격시키니 그는 기병 5천에 보병 1만으로
9년전에 여진족을 쫓아내고 차지한 강계를 지나 만포에서 압록강을 건너 광개토대왕비와 왕릉 및
국내성과 환도성을 지나서 이오로 테무르와 고안위가 지키던 우라산성(오녀산성, 옛 졸본성) 을
공격해 함락하는데, 1만 5천 고려인은 모두 저 비와 왕릉이 여진족 금나라의 유적으로 알았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 멸망 800년 후인 1445년 조선 세종 때 지어진 악장(樂章)인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 제39장 압강(鴨江) 주해(註解)에 처음 등장하니 “평안도 강계부(江界府) 강 건너에
오래된 성이 있는데, 금(金) 황제의 성(城)이고 북쪽 7리 떨어진 곳에는 비(碑) 가 있다”고 했습니다.
금(金) 황제의 성으로 오인된 것이 고구려의 옛 평지 도성(국내성)이며, 북쪽 7리에 있는 비는
광개토왕릉비를 가리키는데, 조정과 대신들은 저 비와 왕릉을 금나라 유적으로 오인
했고 명나라에 가는 조선의 사신들은 광개토대왕비를 보고도 금나라 유적으로 생각했습니다.
668년에 고구려가 망한후 신라가 차지한건 고구려땅의 10분지 1인 황해도 뿐이었고, 당나라는 고구려
가 다시 일어설지도 모르니 후환을 없애기 위해 고구려인들은 중국땅으로 잡아간지라 평양 일대는
300년간 사람이 살지 않았으니 고구려 백성의 20~30% 정도만 신라와 고려로 흡수됐는데,
고구려 유민 중에 신라 진골 계급에 오른 자는 단 하나도 없었으니 저 비와 왕릉이 잊혀질만도 합니다.
성종 18년(1487년) 평안감사 성현이 만포에서 압록강을 건너서 명나라땅인 지안(集安 집안)에 가서 지은
망황성교(望皇城郊, 황성 들판을 바라보며) 에서 지안을 황성(皇城), 태왕릉(광개토대왕)을 황제릉(帝陵),
비는 천척비(千尺碑) 라 하고 주변에 강이 천연의 해자 역할을 하기에 비문을 읽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중종 25년(1530년)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지안을 황성평(금나라 수도), 왕릉인 태왕릉(광개토대왕)을 금나라
황제의 묘로 설명하고 높이 10장이나 되는 농석이 있다 하였으며 중종 31년(1536년) 심언광(沈彦光) 이
여진족에게 압록강가에서 퇴거하라고 타이르라는 임무를 받고 파견되었던 때에 지은 시가 지봉유설에
전하는데, 시에서 지안(집안)을 황성(荒城)이라 하고 황제 유적의 큰 비(皇帝遺蹟巨碣)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1596년에 조선의 한성부 남부주부 신충일(申忠一)이 건주(建州) 의 누르하치(Nurhachi)
가 있는 성에 다녀와 쓴 견문록인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 에도 기록이 있으니
집안 지역에 옛 고구려의 도성과 장군총, 능비로 추정되는 ‘비(碑)’ 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3. 광개토대왕릉비의 발견과정
광개토대왕릉비가 소재한 만주 지역은 청나라 건국 이후 여진족(만주족) 들이 중국을 정복해서
다스리려고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땅으로 이주한지라 심양(요동)을 빼고는 텅텅 비었으니.....
시조의 성지(聖地) 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봉금되었으나 1876년 봉금제도(封禁制度) 가 풀립니다.
청나라는 1880년에 회인현(懷仁縣)을 설치하고 사람들이 들어와 살도록 하였는데, 이후
한 농부가 능비를 발견하여 현에 신고를 하자 장월(章越)이 휘하의 관월산(關月山)
이라는 사람을 시켜 조사하게 하였는데, 당시 능비의 표면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비를 뒤덮고 있는 덩굴과 비면에 붙은 이끼를 완전히 제거하는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회인현의 지시에 의해 이러한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니 이 과정에서 작업자들이
비의 표면에 말똥을 바르고 마르기를 기다린 뒤 불을 지르는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이때 열이
가해진 능비의 몸에 균열이 가고 일부 표면이 떨어져 나가는등 심각한 손상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관월산(關月山) 등에 의해 제작된 부분 탁본들이 금석문 애호가에게 소개되면서 능비의 존재가
외부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북경(北京)의 금석학계에서 능비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
이 생겨났으니 1882년 청나라의 금석학자 · 서예가들이 능비의 탁본들을 입수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비가 발견된 초기에는 다듬지 않은 자연석이라 비면의 상태가 좋지 않았던 데다가,
탁본 여건의 미비 등으로 인해 비면의 일부만 탁본을 하거나, 글자의 윤곽을 모사(摹寫)
하고 빈자리에 먹을 칠하는 방식으로 제작된 묵수곽전본(墨水廓塡本) 이 제작되었습니다.
다음해인 1883년 일본 참모본부 소속으로 사코 가게노부〔酒匂景信〕 중위가 능비를 발견한
뒤, 곧바로 묵수곽전본 형태의 탁본을 구하여 일본으로 보냈으니 광개토대왕비에 관한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는 일본 제국이 시작했으며.... 2년 만에 참모부에서 도본을
내놓았고 1889년에 『회여록(會餘錄)』이라는 잡지에 능비의 전체 판독문과 논문
들이 실리면서 이 자료가 이후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 학자들의 연구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4. 비문 조작·변조설
1972년에 재일 사학자 이진희씨가 '사코가 신묘년조 기사를 변조한 탁본을 제작하였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비석 표면에 석회를 도포하였다.' 는 조작설(석회도말론)을 주장해 학계에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석회를 바른 이유가 글자가 훼손됐기 때문이라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글자를 알아
볼수 없다고 해서 아예 글자를 가려버리는 행위 자체가 논란이 될 수밖에 없었으니
일본 육군참모본부 주도로 광개토왕릉비를 훼손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이후 일본이 직접 개입했다는 물증이 없고, 해당지역에 거주하던 중국인 민초들에 의해
훼손되었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사람의 손이 닿았고 몇몇 글자가 변조되었다는 것이니 1980년대에
랴오닝 성 박물관장이었던 주운태는 일본이 개입한게 아니라 일반인에 의해 오염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1981년부터 능비를 직접 조사한 왕젠췬(王健群; 왕건군) 은 '비석에 석회는 탁본으로 생계를 유지
하던 중국인 초천부(初天富 )가 탁본을 쉽게 뜨기 위해 울퉁불퉁하거나 갈라진 곳에
채워넣은 것' 이라 설명하였는데, 보다 선명하게 뜨기 위해 쇠똥을 발라 불로 이끼를
태우면서 비석에 금이 갔으며 또 1902년 부터는 표면을 반듯하게 하느라 석회를 발랐다고 합니다.
비면에 석회를 바르고 탁본을 제작하는 실상에 대해서는 1913년에 집안 일대의 고구려 유적들을
조사하였던 세키노 타다시(關野貞)나 이마니시 류(今西龍)를 비롯해 여러 학자들이 문제점을
지적한 적이 있었으며, 이후 1959년에 미즈타니 데지로(水谷悌二郞)도 능비를 연구할 때
석회에 의해 비면이 가공되기 이전에 제작한 원석 탁본을 중시해야 한다는 점을 누차 강조합니다.
중국의 학자 왕건군은 능 비를 직접 조사하고는 400페이지에 이르는 "호태왕비"
라는 책자에서 동양 4국과 미국, 유럽등의 연구성과를 총 망라하여 책을 내면서
고구려가 자신의 전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사실을 과장(!)” 했을 뿐인데,
한국(북한)과 일본은 모두 자신에게 유리한 아전인수식 해석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석회 탁본’의 문제점이 적극 거론되면서 1980년대부터 비면에 석회를 바르기 전에 만들어진
탁본인 ‘원석 탁본’ 들이 잇따라 발견되었으니 중국 베이징北京〕 대학 도서관 도서들과
대만(臺灣) 부사년(傅斯年) 도서관 도서, 일본의 미즈타니 데지로본과 가네코오테이본
등이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임창순본, 서울대학교규장각 도서, 혜정박물관 도서 등이 있습니다.
5. 광개토대왕릉비 크기와 내용
능비는 높이 6.39m 인 응회암에 정방형 예서로 각자하였는데 암석에 특별히 가공을 가하지는 않았
으며 각면 외곽에 윤곽선을 긋고 다시 세로선을 그어 행을 구분하였는데, 글자의 크기는 11 -
16cm 로 대개는 14 ~ 15cm 정도이며 44행 1,775자 중 150여 자는 훼멸되어 판독이 불가능 합니다.
비석은 물리적으로는 4면이지만 내용상 3부로 나누는데, 제1부는 시조 추모왕의 건국
설화로 시작하여 유류왕, 대주류왕 3대 까지의 고구려 왕실의 연원과 광개토대왕의
업적에 대한 칭송이고, 제2부는 연대순으로 기록한 광개토대왕의 훈적이며, 제3부는
그 수나 출신 등 수묘인에 관한 사항과 수묘인 제도와 법의 공표 등으로 구성됩니다.
2부 훈적 부분은 모조리 굴복하지 않거나 쳐들어온 적을 쳐부순 무훈의 열거로
이뤄진 점에 특색이 있으니 연대순으로 나열하여 ①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친정한 경우와 ② 군사를 파견하여 벌한 경우로 나누어 확실하게 명시했습니다.
그리고 각 기사는 모두 토벌 대상 세력이 어떠어떠한 잘못을 저질러 구실을 제공하였으니
이에 벌하였다는 구조로 이러한 구성은 3부의 수묘인 부분과 결부하여 전체를 하나의
맥락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광개토대왕 이래 수묘인을 정벌한 세력에서 잡아온
속민으로 두도록 했으므로 정복 전쟁은 곧 수묘역 제도를 지탱하는 토대였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객관적으로 기록하기 위한 글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미화, 찬양” 하기
위해 지었으므로 서술 전개가 고구려 중심으로 왜곡, 과장된게 많고 백제, 신라, 왜 등을 비하
하는 부분도 많으므로 원문과 해석문을 읽을 때는 저 내용대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삼국사기에 392년 5월에 고국양왕이 죽고, 광개토대왕이 즉위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광개토
대왕은 392년에 즉위했지만, 능비에 기년과 육십갑자를 토대로 역산하면 광개토대왕
의 즉위년은 신묘년(391) 이니 삼국사기의 기록을 1년씩 당겨야 하는데, 계속 1년씩
어긋나기 때문에 광개토왕의 치세기에 한해서는 삼국사기가 1년씩 오류라고 여겨집니다.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와 1145년에 지은 삼국사기 연대가 정확하게 일치하므로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년을 1년 뒤로 늦춰야 한다고도 주장하지만, 신묘년 호태왕이라는 청동 방울이 발굴되면서
광개토왕의 원년은 391년임이 중론이 되었는데 혹자는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391년은 전왕의 통치
연대이므로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는 다음해인 392년을 광개토대왕 원년으로 시작했다고도 말합니다.
6. 광개토대왕릉비 본문과 해석 및 학자들의 이견
아래의 광개토대왕비문의 내용은 전북대 김병기 교수님이 해석한 것으로 원문과 김교수님의 해석을 싣고
그 밑에 보충 설명과 다른 학자들의 의견을 추가해서 적었으며 양이 많아 제가 일부 편집을 했습니다.
國罡上廣開土境好太王(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1면 1행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出*, 生而*有聖德*,
#####命駕 옛날에 시조인 추모왕이 나라를 건립할 때에 그의 부친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여랑으로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다. 태어나자 곧 성덕이 있었다.
1면 2행 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 言曰, 我是皇天之子母, 河伯女郞,
鄒牟王, 爲我木連葭浮龜 應聲卽爲(我連葭浮龜) 순행 남하하였다. 남하하는 길에 부여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었다. 왕은 나루에 이르러 말했다. “나는 황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다. 나를 위해 거북
을 띄워 배로 삼고 갈대로 다리를 만들어라” 소리에 따라 즉시 거북과 갈대로 이루어진 다리가 나타났다.
1면 3행 (我?)連葭浮龜, 然後造渡, 于沸流*谷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迎王. 연후
에 강을 건넜다. 비류곡 홀본지방 서쪽의 산 위에 성을 쌓아 도읍을 삼았다. 세상의 왕위를 즐기지
않아 (하늘은) 황룡을 보내 왕을 영접하였다. 왕은 문득 홀본 동강에서 황룡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 주몽의 이름은 당시에 문자를 만들지 못했으니 훗날 중국에서 한자가 들어오자 추모(鄒牟 삼국사기,
광개토왕릉비, 모두루), 주몽(朱蒙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국통감, 중국 사서)으로 불렸으며 또
삼국사기에는 중모(中牟)와 중해(衆解), 상해(象解), 삼국유사에 추몽(鄒蒙), 일본서기에 중모(仲牟),
또 일본의 신찬성씨록에는 주배(朱背) 와 도모(都慕) 로도 기록했는데 당시 발음은 “추모” 로 봅니다?
이는 신라는 신로(新盧) · 시라(斯羅) ·서나(徐那)· 서라벌(徐羅我) · 서야(徐耶:徐耶我) · 서라(徐羅) ·
서벌(徐我) 과 계림(鷄林)으로 기록됐으며, 가야도 가야(加耶·伽耶·伽倻)·가라(加羅)· 가량(加良)·
가락(駕洛)· 구야(狗邪· 拘邪)·임나(任那), 한(韓) 으로 기록된 것과 유사하니 저 이름들이 한반도
에 문자가 없던 시절에 순수 우리말로 지어져 말로만 부르다가 훗날 한자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1면 4행 龍負升天.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 紹承基業遝*至十七世孫, 土廣開土境平安好太王
유명을 이어받은 세자 유류왕이 치국지도로 사업을 진흥시켜 국가가 大治 되었다. 대주류왕은
양대의 기업을 계승하여 계속 발전했다. 이어 17세를 전하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렀다.
1면 5행 二九登柞, 號爲永樂太王. 思澤洽*于皇天, 威武柳被四海. 掃除不#, 庶寧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18세에 즉위하여 존호를 영락태왕이라 했다. 그의 은택은 황천과 같았고, 그의 무공은 사해에
진위하였다. 외래의 침략을 제거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평안히 그 업에 종사할 수 있게 했다.
국가는 부유하고 백성도 은실(殷實)했다. 오곡이 풍숙했다. 하늘은 왜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가?
1면 6행 弔, 십*有九, 宴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 銘記勳績, 以求
後世 焉其詞*曰 39세에 국가와 세상을 사별해 내던지니, 갑인년 9월 29일 을유에 왕을
안장했다. 그 앞에 비를 세워 왕의 훈적을 명기하여 후세인에게 보이노라. 각사(刻詞)로 말한다.
1면 7행 永樂五年, 歲在乙未, 王以碑麗*不歸*#人, 躬率往討, 過富山*負碑至鹽水*上, 破其三*部落
六七百營*, 영락 5년은 을미년으로 왕은 비려가 고구려 함몰인들을 귀환해 주지 않기 때문에
몸소 토벌에 나섰다. 부산을 넘어 산을 등에 지고 염수에 이르러 비려의 3부락 6~7백명을 파하고
소, 말, (碑麗* (비려) : 거란의 한 지파. 태자하 상류지역에서 활동. 고구려와 인접해 늘 전쟁 상태)
※ 위 내용은 광개토대왕 5년이 아닌 즉위 원년의 일로도 보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북으로 거란 정벌, 남녀 5백 명을 사로잡고 본국인으로 사로잡혔던 백성 1만인을
설유하여 귀국하게 하였다. 돌아오면서 양평도를 거쳐 동으로 왔다.” 라고 나옵니다.
1면 8행 羊, 不可稱數, 于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城, 力城*, 北豊*, 王備獵*, 游觀土境*,
田獵而還. 양떼를 헤아릴 수 없이 노획했다. 돌아오면서 양평도(요양)를 거쳐 동으로
왔다. #성, 역성(요동), 북풍에 이르러 왕은 사냥준비를 시켰다. 순유와 사냥을 하며 돌아왔다.
百殘, 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백잔, 신라, 구시속민, 유래조공,
백잔(= 백제), 신라는 옛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왔다.
※ 백제와 신라는 원래 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어서 조공을 했다고 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며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치고 속민인 신라를 공격한 왜군
을 치기 위해 또 군대를 파병한 명분을 얻기 위해 사실을 왜곡 과장한 것입니다.
※ 왕건군은 430년대에서야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했다고 주장하는데, 385년 고국양왕
이 요동을 점령했으나 같은 해에 연나라 모용농이 회복했다고 하며, 그러나
광개토왕 14년(404년) 에 연나라 모용희가 요동성을 공격했으나 함락하지는 못합니다.
1면 9행 ,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軍至窠南, 그러나 신묘년 이래로 왜가 바다를 건너 백잔과 신라를 쳐 신민으로 삼았다.
때문에 6년 병신에 왕은 몸소 수군을 인솔하여 백잔국을 토벌했다. 군사가 백잔소굴 남쪽에 이르러
※ 정인보와 박시형은“도해파”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고 목적어 왜가 생략되어 있다
고 여기며 관정우(菅政友) 는 “도해, 파백잔” 으로 읽었으며 또 북한의
김석형은 “왜이신묘년래 (고구려가) 도해파백잔. (고구려가 신라) 로 읽습니다.
※ 왕건군은 위의 본문 그대로 읽고는‘왜가 바다를 건너 백잔과 신라를 쳐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구절은
사실이 아니지만,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부풀리기 위해 그처럼 강대한 적인 왜군을
쳐부수었다고 과장되게 표현했다고 말합니다, 또 그래야 이후 고구려 5만 대군의 남진이 명분이 선다는“
다르게는 “백잔․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 아직 조공을 바치지 않았고,
그리고 왜(倭)는 신묘년(391)부터 무엄하게 건너왔기 때문에
왕께서 백잔과 왜는 공파하고 신라는 신민으로 삼았다.” 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고구려가 아무런 명분도 없이 백제를 정벌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백제 정벌의 명분을 만들려고 “왜를
실제보다 과장되게 서술”해서 백제와 신라를 정벌했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백제를 공격
해서 왜의 세력을 몰아내고 신라를 공격한 왜를 물리쳐서 이전의 속국 관계를 복원하려 했다고 말합니다.
2면 3행 ####逼其國城, 殘不服義, 敢出迎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殘兵 ####
그 국성에 다가갔다. 백잔은 의에 복종하지 않고 감히 나와 영전했다.
왕은 위엄으로 대로하여 아리수(한강)를 건너 선두부대를 보내 성으로 진격했다. 백잔 군대는
2면 4행 歸穴, 就便圍城.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跪王自誓, 從今以後,
永爲奴客*. 太王 恩赦始* 구렁으로 돌아갔다. 쫓아 이어 성을 포위했다. 백잔의
주는 곤경에 빠져 남녀 생구 1천인과 세포 1천필을 헌납하고 왕 앞에 꿇어 앉아
맹세했다. “지금으로부터 이후 영원히 노객이 되겠소” 태왕은 은혜를 베풀어 용서하고
2면 5행 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得*五十八城, 村七百, 將殘主*弟幷大臣十人, 旋師還都. 八年戊戌*,
敎遣偏師*觀* (帛愼土谷; 6행) 미혹하여 저지른 허물을 용서하고 뒤에 그가 공손한 성의를
다 할 것인지를 살피기로 했다. 이번에 58성과 7백촌을 얻었다.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이끌고 개선군대를 거느리고 환도했다. 8년 무술에 군대를 변경의 백신토곡에 보내어 살피게 하여
2면 6행 因便抄莫斯羅城, 加太羅谷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論事. 九年己*, 百殘違誓,
與倭和*(通;7행) 인하여 다시 막사라성, 가태라성에서 남녀 3백여인을 잡아왔다. 이 이후로
조공하여 일을 논하게 되었다. 9년 기해에 백잔은 자기의 맹세를 위반하고 왜와 더불어 통호했다.
2면 7행 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稱其忠誠, 왕은 남으로 평양을 순유했다. 그리고 신라가 사자를
보내어 왕에게 아뢰었다. 왜인이 나라 안에 가득 차 성과 못이 파괴되니 노객(신라왕)
은 백성으로써 왕의 명을 듣기를 원한다고 했다. 태왕은 인자하여 그들의 충성을 칭찬했다.
2면 8행 特遣使還, 告以密*計.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住*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신라 사신을 특별히 돌려보내며 비밀계획을 말했다.
10년 경자에 보병, 기병 5만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걸쳐 왜인이 가득했다. 관군이 도착하자 왜적은 퇴각했다.
※ 十年*庚子 : 400년. 신라 내물 이사금 45년으로 이시기에 주목할 만한 기사는 없으나
단 393년에 왜인이 금성(서라벌)을 포위하고 5일 동안이나 공격했다는 기사는 있음.
2면 9행 #######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 拔新羅城, 鹽*城, “倭寇大潰”*,
城內 ####### (서기 400년에) 왜의 배후를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까지 이르자 성은
즉각 항복하여 신라인으로 지키게 하였다. 신라성과 염성을 장악하여 왜구는 크게 무너졌다. 성안의
※ 任那加羅*(임나가라) : 김해 금관가야를 말함. 삼국사기 강수전에 본래 임나가량인이라는 대목이
있으니 昌原 鳳林寺 眞鏡大師 寶月凌空塔碑 (924) 에 "선조가 임나의 왕조이다" 라고 적혀 있음.
※ 安羅人* : 일본 학자들은 安羅(안라)를 아라가라의 다른 명칭으로 임나일본부의 용병이라고
해석함. 신공왕후 49년 3월조에 보면 신라의 安羅卓淳(안라탁순) 등 7국 점령 이라는
기사가 있음. 그러나 중국의 왕건군은 安 은 동사로 羅人(라인) 은 新羅人(신라인) 으로 봄.
※ 쌍구가묵본 날조논란 : 주운태가 제작한 탁본을 기반으로 왕건군의 석문했으니 ‘왜만왜궤(倭滿倭潰)
를 위 원문에서 처럼 왜구대궤(倭寇大潰)’ 로 판독하는게 일반적이니, 쌍구가묵이든 혹은 광개토
왕릉비의 금석문이든 자료가 어떤식으로든 날조, 개찬 되었다는게 한중일 삼국 학자들의 결론입니다.
괄호는 다른 학자들이 제기한 판독이니 이로써 쌍구가묵본을 토대로 석문하여 '왜만왜궤' 라고 해석한
일본학계의 주장은 힘을 잃게 되는데 왜구대궤라고 풀이할 경우 해당 문장은 다음과 같이 달라집니다.
(從)新羅城(宮)城倭滿倭潰城(內)□□(盡)□□□安羅人戍兵 (쌍구가묵본)
(從)新羅城(宮)城倭寇大潰城(內)□□(盡)□□□安羅人戍兵 (비교연구본)
왕건군의 석문은 노태돈 이형구 손영종 임세권 등에 의해 지지를 받았지만, 일본 학계에서는 최근
에도 이러한 왕건군의 주장을 무시한채 아직도 왜만왜궤(倭滿倭潰)로 해석하는 트렌드가
강하니 이 문구는 신묘년만큼 민감한 부분은 아니지만 신라를 약탈한 왜구의 규모를 짐작케
할수있는 문장이므로, 이 날조된 (혹은 변조된) 문장이 지닌 가치는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많은 사람의 오해와 다르게 뜨거운 감자인 391년 신묘년조와 관련해서는 한중일
3국의 탁본 비교 연구에서도 별 차이가 발견되지 않아 개찬되지 않았다는게
중론이니....... 즉, 신묘년조 논쟁과 비문 조작 논쟁은 전혀 다른 별개의 것 입니다.
2면 10행 ################十九, 盡拒隨倭*, 安羅人戍兵. 新*羅城##其#######言
################ 십분의 구는 왜를 모두 따라가기를 거절하여 신라인으로
수성하게 했다. 신라성...... 3면 1행 ##且#######################
辭###出#######殘*倭潰(逃;2행) 나머지 왜구는 무너져 흩어져 도망갔다.
3면 2행 逃. 拔#城, 安羅人戍兵. 昔新羅寐錦*, 未有身來論事*, ####廣開土境好太王####
*寐錦#家僕句* #성을 탈취하여 신라인을 안치하여 지키게 했다. 전에 신라
이사금은 스스로 와서 조공청명함이 없었다. 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이사금은...
3면 3행 請###朝貢. 十四年甲辰*, 而倭不軌, 侵入帶方*界, 和通殘兵#*石城, #連船###,
王躬率住*討, 從平穰 3면 4행 ###鋒相遇, 王幢要截盪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조공했다. 14년 갑진에 왜는 양국의 관계를 파괴하고 대방의 경계를 침입하여 백잔병과 연합하여
석성을 공격했다. 왕이 몸소 병사를 영도하여 토벌했다. 평양을 떠나 선봉이 적과 만났다. 왕의
군대는 길을 끊고 막아 사방에서 추격하여 살해하여 왜구는 궤멸되어 패했고 참살된 자가 무수했다.
※ 왜군은 400년에 고구려 5만대군에 패해 김해가야인과 함깨 일본으로 달아났는데
4년후인 404년에 왜군이 황해도에 침공하니 관개토대왕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물리쳤다는 기록인데 이때 백제가 왜군의 바닷길을 안내한 것으로 보입니다.
3면 4행 十七年丁未*, 敎遣步騎五萬, ########. 王師 ### 17년
정미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하여..... 왕사는~~
※ 17년 丁未*(정미)는 407년 후연 모용희 建始(건시) 1년이고 백제 전지왕 3년인데
고구려군이 정토한 대상 국가는 어느나라인가에 대해 여러 학설이 있습니다.
1. 今西龍 - 倭, 2. 三宅米吉, 박시형, 김석형 - 백제(왕건군은 백제쪽에 기록이 없다고 반박함)
3. 이병도 - 가야, 왜 4. 김정학 - 왜, 백제 5. 浜田耕策 - 선 왜, 후 백제
6. 문정창, 정두희, 천관우 - 후연(자치통감 403년 숙군성 공격을 407년 기사로 봄?
3면 5행 四方合戰, 斬煞蕩盡. 所獲鎧甲一萬餘領, 軍資器械, 不可稱數. 還破沙溝城, 婁城,
牛#*城, #城, ##### 사방 포위 작전을 썼다. 적은 전부 참살되었으며 개갑
만여령을 노획하고 군자 기계는 수를 셀 수 없었다. 돌아오며 사구성, 누성, 우#성, #성
3면 6행 #城. 卄年庚戌, 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 中叛不貢. 王躬率住討, 軍到餘城*,
而餘擧*國駭服. 獻出#### #성을 빼앗았다. 20년 경술, 동부여는 옛적에 추몽왕의
속민이었는데 중도에 이반하여 다시는 조공하지 않아 왕은 몸소 군대를 이끌고
동부여를 토벌했다. 왕이 동부여의 도읍에 다다르자 동부여는 두려워하여 항복했다.
※東夫餘* : 이병도는 강원도 북부 동예 지방으로 천관우는 두만강 하류로 봄.
3면 7행 ##. 王恩普覆*, 于是施還. 又其慕花隨官來者, 味仇婁鴨盧*, 卑斯盧鴨盧,
社婁鴨盧, 肅斯舍鴨盧, ### 왕의 은혜가 고루 미치자 왕이 돌아왔다.
그 교화를 흠모하여 관군을 따라온 자가 미구로 압로, 타사루 압로, 숙사사 압로, ###
3면 8행 鴨盧. 凡所攻破城六十四*, 村一千四百. 守墓*人烟戶*. 賣句餘*民*國烟二看*烟三*.
東海賈*國烟三看烟五, 敦城 압로였다. 무릇 성 64개를 공파하고 촌 1천4백을 취득
했다. (광개토왕의) 수묘인 연호다. 매구여의백성은 국연2 간연3. 동해가는 국연3 간연5, 돈성
※ 六十四* : 영락 6년의 58개성과 17년의 6개성을 합한 성의 수로 봄.
3면 9행 民四家盡爲看烟. 于城一家爲看烟. 碑利城二家爲看烟. 平穰城民國烟一看烟十.
此連二家爲看烟. 徘婁 백성의 4가는 모두 간연이 된다. 우성의 일가는 간연이 된다.
비리성의 2가는 국연이 된다. 평양성 백성은 국연1, 간연10. 차련2가는 간연이 된다. 배루
3면 10행 人國烟一看烟십*三. 梁谷*二家爲看烟. 安夫連卄二家爲看烟. 改谷三家
爲看烟. 新城*三 인은 국연1, 간연43. 양곡2가는 간연이 된다. 양성 2가
는 간연이 된다. 안부련 22가는 간연이 된다. 개곡3가는 간연이 된다. 신성3
※ 梁谷* 은 梁貊之谷 으로 요양 지방이며 新城* 은 서천왕 7년 (276) 왕이 신성에 이르렀다. 봉상왕
2년(293) 5년(296) 전연의 모용외와 신성에서 충돌, 광개토왕 9년(399, 400) 거기대장군 모용희가
선봉이 되어 신성, 남소 2성을 장악했다. 박시형은 심양으로 왕건군은 집안현 서북, 혼강 일대로 봄
※ 선비족 모용씨의 후연은 당시 중국의 최강대국이었으나 창업자 모용수가 죽은후 장안
의 탁발선비 북위의 공격으로 수도 중산이 함락당하자 북쪽으로 달아나 열하지역
용성에 도읍하니, 연나라는 영토와 인구가 30% 로 줄어들었는데, 북위는 장안
주변에 적대국들이 많은지라 저들을 평정하게 되면 몇십년 후에는 재침공할 것 입니다.
후연은 시급히 국세를 회복해야 하는데 마침 399년에 고구려 5만대군이 신라 서라벌을 포위
한 왜군과 김해가야 연합군을 치러 남진하자 이 기회를 틈타 고구려의 신성과 남소성을
공격해서 함락하고는 700리 땅을 차지하고 주민 5천여인을 잡아갔는데, 광개토대왕
은 군대가 없으니 두 성을 구원하지 못하고 남진한 5만 대군을 급히 소환했으며 재정비
를 마친 2년후 저 2개 성은 방비가 엄중하니 북쪽으로 올라가 숙군성을 공격하고 돌아옵니다.
※ 간연(看烟)에 대한 구절은 생략함 - 4면 6행 若吾萬年之後, 安守墓者, 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
令備洒掃.” 言敎如此, 是以如敎令, 取韓穢二百卄家. 慮 내 만년의 후에는(죽은 뒤에는)
묘를 안전하게 지키는 자는 다만 내가 몸소 순행하여 약탈해온 한예(노예)를 취해
청소를 준비케 한다.” 교시가 이와같아, 이것으로써 교령과 같이 한예 220가를 취하였다.
4면 7행 其不知法則, 復取舊民一百十家. 合新舊守墓戶國烟卄*, 看烟三百, 都合三百卄*家.
自上祖先王以來, 墓上 그 법칙을 모를까 염려하여 구민 110가를 다시 취해, 합이
신구 수묘호 국연 30, 간연 300으로 도합 330가 이다. 윗조상, 선왕 이래로부터 묘위에
6. 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한 추가 사항
1)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그리고 중국 사서에 나오는 고구려 기사 보다 광개토대왕비의 기록이 훨씬 가치
가 크니..... 후대에 씌여진 사서 보다는 당대인이 기록한 금석문의 가치가 높기 때문인데, 반면에 저
능비는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세웠으니 과장되거나 왜곡된 부분이 있는게 흠입니다.
2)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즉 “광개토(廣開土)” 는 이웃
나라를 침략해서 영토를 넓혔다는 말이니 고구려인들로서는 자랑스럽겠지만...
침략을 당해 전쟁에서 패한 백제, 동부여, 숙신, 후연, 왜와 특히 5만 원군의 도움을
받아 수도 서라벌이 함락되는 것을 모면한 신라로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3) 일본이 고대 한반도 남부를 경략해 “임나” 라는 식민지를 건설했다는게 임나일본부설로 일본서기 신공
왕후의 신라정벌 기록에다가 금석문인 광개토대왕비의 신묘년 기사가 더해졌는데, 이는 백제 근초고왕
이 신라 및 가야를 정벌한 기사의 "주어를 백제에서 왜로" 바꾸어 일본서기에 기록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4) 비문에는 “백제가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국” 이라 나오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니, 342년 전연
의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략해 수도 환도성(국내성) 이 함락되고 왕모와 왕비에 수도의 백성
5만명이 포로로 끌려가니.... 간신히 홀로 도주한 고국원왕은 국내성이 폐허가 된지라 다음해
동황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345년 전연이 떠보려고 남소성을 함락해도 일체 움직이지 않습니다.
전연을 공격해 잃어버린 수도 백성을 되찾아와야 하지만 칭신 조공하는등 세력이 약한지라 27년간
온 힘을 다해 세력을 길러서는 전연 대신에 만만해(?) 보이는 백제를 침공하니, 369년에 근초고왕
이 남쪽 마한(혹은 비자발, 남가라, 안라, 다라, 탁순과 가라?) 을 정벌하러 간 빈틈을 노린 것입니다.
369년에 고국원왕은 전연에 빼앗긴 국세를 보충하기 위해 대신 백제인들을 잡아오려고 2만으로
황해도 치양성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근구수 왕자에게 대패해 군사 5천명과 수곡성을 잃었으며,
371년에 재침하나 패해서 후퇴하자 근초고왕은 3만으로 추격하니 평양에서 싸우다가 전사합니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를 철천지 원수라면서 보복을 준비했으니, 소수림왕과 고국양왕 때 조용히
국력을 키웠고 광개토대왕때 백제를 쳐서 58성을 공취해 원수를 갚은 것인데, 백제가 고구려
보다 국력이 더 강했는데도 그후 광개토대왕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패한 것은 비문에 나오듯
광개토대왕은 “수군” 을 양성해 백제 강화도와 제물포를 우회공격해 승리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 첫번째는 오녀산성, 두번째와 세번째는 환도성, 네번째와 다섯번째는 국내성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