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 (본명 박택수) 시인
1970년 대구 출생
1998년 <동아일보신춘문예>
시집 ; 『벌레 11호』
주소 ;
((리폼))무덤을 그리는 X(에게)
―「무덤을 그리는 X에게(2002. 여름. 『시작』)」을 기념함
여정
X((가)) 무덤을 그리고 싶은 날이면 ((Y))가 잠든 사이 ((Y의)) 살을 찢고 ((Y의)) 뼈를 들어((낸다)). ((Y의)) 뼈를 깨끗이 씻어 고이 빻아((둔다)).
캔버스를 치고 ((흙))색으로 밑칠을 하는 X((가)) 이제 밑그림을 그((린다)). ((X의)) 손끝((에서 여섯)) 개의 무덤이 솟아오르면 ((X의)) 작업실 가득 까마귀 떼가 날아((든다)). 까마귀 떼의 울음소리((가 X의)) 그림 위로 차곡차곡 쌓((여간다)).
X((의)) 손끝으로 ((비명))이 ((새겨지))면 ((X는 여섯)) 개의 무덤 가득 아교칠을 ((한다)). 그 위로 ((Y의 하얀)) 뼛가루((가 차곡차곡 쌓여간다)). ((Y의 하얀)) 뼛가루가 다할 때까지 겹겹으로 ((쌓여간다)).
((여섯)) 개의 무덤((이)) 희((뿌옇))게 반짝이면 X((가)) 이제((야)) 웃((는다)). ((여섯)) 개의 무덤((들을 한쪽)) 벽에 걸어두고 ((Y의 체취와 숨소리))를 그리워((한다)). ((여섯)) 개의 무덤에서 ((Y의)) 숨소리라도 ((새어나오))는 날이면 ((X는)) 그 ((그림)) 아래 향나무화분((을)) 놓아((둔다)). 바람 없는 날에도 바람을 느끼는 향나무처럼 ((Y))가 없는 날에도 ((Y의 숨소리와 체취를)) 느끼((는 X가 희뿌연 무덤들의 가지들을 뭉클뭉클 뻗어간다)).
* 몇 명의 내가 너무 낡아서 (나)를 잘라내고 ((Y))로 덧대어 수선해본다
2010피스 퍼즐;「불면(2001)」
―조르주 쇠라의 점묘법을 기념함
여정
수도꼭지, 물이, 새, 내, 귓속, 물이, 차, 박쥐우산, 쓰고, 걸어, 이 길, 스텐(stain, 비틀어, 비틀어, 잠겨 지, 않, 날들, 또독또, 밤이, 와, 해, 지지, 않, 먹구름, 몰려와, 해, 사라지, 않, 비, 내려, 대지, 타들, 갔, 퍼석, 하늘, 늘, 먼지, 별, 하나, 뵈지 않, 새끼손가, 손톱만, 달, 뵈지 않, 모래바람, 불어, 내, 살점, 또독또, 떨어져, 사막, 횡단하, 낙타, 눈 속, 뼈다귀, 남은, 시체, 한 구씩, 놓여, 선인장마저, 쪼그라들,
허우적대, 식인상어, 내 몸속, 이빨, 드러내, 달, 물어뜯, 별, 집어삼키, 수면, 위, 떠, 방주, 식인상어, 이빨, 구멍, 뚫, 비둘기, 날개, 젖어들, 셈, 함, 야벳, 아랫도리, 젖어들, 방주, 만드, 노아, 망치소리, 내 귓속, 두들기, 갈보리언덕, 예수, 십자가, 못 박히, 죽은, 나사로, 썩은 내, 풍기, 무덤, 나오고, 베드로, 귓속, 닭, 세 번, 울어대, 그, 소리, 선악, 열매, 떨어지, 요단강, 요한, 물, 세례, 주, 모세, 지팡이, 홍해, 가르, 노예들, 홍해, 또독또, 건너,
수도꼭, 햇살, 떨어지, 마른, 잎들, 어둠속, 온몸, 뒤척이, 길, 잃, 어린양, 울음, 규칙적, 돋아, 나, 이름 없, 호숫가, 거닐, 수면 위, 익사, 한 구, 떠오르, 나, 불어터, 그 익사체, 건져, 나, 젖은 주머니, 뒤적, 가죽지갑, 꺼내, 그, 안, 신분증, 바라보, 증, 내 사진, 무덤, 표정, 나, 보고, 나, 수면, 거울인, 내, 모습, 바라보, 고개, 떨구, 수도꼭지, 또독또, 눈물, 새,
북지장사 가는 길
― 초등동창 강윤을 기념함
여정
시인의 길을 지나 북지장사 가는 길에는 대명국민학교가 있다. 13살인 친구와 13살인 내가 그 길을 오르고 있다. 북지장사 가는 길에는 형덕이도 있고 성호도 있다. 우리는 펩시병콜라에 빨대 네 개를 꽂고 서로 먹으려고 머리를 들이밀고 있다. 솔잎香 가득하다. 북지장사 가는 길에는 펩시동물백과사전에 붙일 동물스티커도 몇 장 있고 보석콘에 들어있는 가짜우표도 몇 장 있다. 대명국민학교를 지나 41살인 친구와 내가 굴곡을 오르내리며 올라가고 있다. 우리보다 먼저 굴곡을 오르내리며 내려가는 계곡물이 맑은 소리를 흔든다. 우리는 살짝 웃는 얼굴로 답을 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간다.
북지장사 가는 길에는 빽빽한 소나무들이 하나 둘 자리를 비켜주고 터를 내준다. 그 터에는 한일극장이 들어서 <셔터 아일랜드>와 <타이탄>을 동시상영하고 있다. 우리는 두 영화가 시작하는 바다 위를 나란히 걸어간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우리를 따라 걷는다. 나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랭보의 가면을 씌어준다. 그 가면 사이로 <토탈 이클립스>가 흘러내리고 시인 베를렌느가 시인의 길, 육필공원에 있던 거대한 남근 두 개를 들고 잠시 모습을 드러낸다. 친구는 다음 영화 예고편을 상영해준다. 우리는 예고편인 <페르시아의 왕자: 시간의 모래> 위에 걸터앉아 잠시 쉬기로 한다.
북지장사 가는 길 바위에는 쌍둥이를 낳고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나버린 13살짜리 진경이도 있고 중학교를 같이 다니다 소식이 끊겨버린 16살짜리 민이도 있다. 솔잎香 아득하다. 가구공장을 하기위해 베트남을 오가는 41살의 형덕이도 있고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40살의 성호도 있다. 그들 옆에는 13살짜리 짝꿍들이 그들의 자리를 찾느라 분주하다. 우리는 그 친구들을 바위에 남겨두고 가던 길을 계속 오른다. 북지장사 가는 길에는 내 건강을 염려하는 친구의 디지털카메라가 있고 어머님의 안부를 물어보는 내 모자가 있다. 친구의 대소사가 있고 나의 투병기와 간병기도 있다.
북지장사로 들어서는 길목에는 도통한 犬公 두 마리가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그 허공을 烏公 한 마리가 지나간다. 북지장사 입구에는 우리를 초월한 또 다른 犬公 한 마리가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우리는 금강문을 지나 재건축중인 대웅전 앞에 서서 난감해한다. 나는 그곳에 친구의 경산시청을 잠시 지었다가 이내 허물어버린다. 우리는 요사채를 지나 삼층석탑을 향한다. 두 개의 석탑이 오랜 친구인 냥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서서 재건축중인 우리를 바라본다. 친구는 디지털카메라를 나에게 맡기고 석조지장보살좌상과 삼존불을 찾아 계단을 오르고 있고 나는 신비한 교음을 내고 있는 烏公을 찾아 소나무사이를 두리번거리고 있다. 우리는 犬公 세 마리의 배웅을 받으며 북지장사를 돌아 나온다. 북지장사 가는 길은 친구의 디지털카메라 안에 사진파일로 고스란히 남아있다. 우리는 사진파일로 담을 수 없는 파일들을 압축파일로 담으며 북지장사를 내려온다.
며칠 후, 북지장사 가는 길이 이메일 대용량첨부파일로 왔다. 나는 내 컴퓨터에 압축된 대용량첨부파일을 옮겨 푼다. 북지장사 가는 길과 사진파일로 담을 수 없는 파일들까지 함께 풀린다.
어머니의 짐
― 케이블TV, 드라마 채널. 1
여정
칠순의 어머니, 또 무거운 짐을 양손에 들고 가신다. 스쿠알렌과 알콕시 두 박스, 어머니의 양팔을 늘어뜨린다. 조금씩 멀어지는 어머니, 아들은 자신을 위해 한 팔이 없는 옷과 두 개의 손가락이 없는 장갑을 끼고 굳은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본다.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빛이 스며들면 스며들수록 어머니의 몸에서 자꾸 팔이 자란다. 칠순의 양팔보다 더 탄력 있는 팔들이 두 개, 세 개, …… 늘어난다. 그 손에는 신앙촌 밍크 담요, 신앙촌 간장, 신앙촌 잡화 보따리, ……가 어머니의 팔들을 늘어뜨린다. 아들은 자신을 위해 두 눈에 눈물을 머금는다. 그 눈물에 젖은 어머니, 그 눈물을 머금은 어머니의 몸에서 더 많은 팔들이 자란다. 새로 자란 한 손이 아들의 한 팔을 들고 있고 또 다른 한 손은 두 개의 손가락을 꼭 거머쥐고 있다. 아들은 잠시 두 눈을 감는다. 감긴 두 눈으로 어머니의 몸에서 칠순의 양팔보다 탄력이 없는 팔들이 두 개, 세 개, …… 늘어난다. 그 여러 손들이 힘을 모아 무거운 아들을 들려고 애를 쓴다. 아들은 그 여러 손들을 위해 자기의 몸을 여러 조각으로 나눈다. 두 눈을 뜨자 그 눈물에 젖은 어머니, 더 작아지고 더 옅어진다. 그리고…… 코너다.
자모의 검
- 여정
혹자가 말하길, 입속은 자객들의 은신처란다. 그들이 즐겨 쓰는 무기는 '영혼을 베는 보검'으로 전해오는 자모의 검이란다. 을씨년스런 날이면 자객들은 검은 말을 타고 허허벌판을 가로질러 어느 심장을 향해 힘차게 달려간단다. 천지를 울리는 말발굽 소리 어느 귓가에 닿으면 그들은 어김없이 이성의 칼집을 벗어던지고 자모의 검을 빼어든단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 한 영혼의 목을 뎅거덩 자르고 나면 자객들은 섬뜩한 미소로 조위금을 전하고 또 다른 심장을 향해 말 달려간단다. 그날에 귀머거리는 복 있을진저, 자객들의 불문율에 있는 '귀머거리의 목은 칠 수 없다'는 조항에 따름이라.
혹자가 말하길, 자모의 검에 찔린 사람들은 귀부터 썩어간단다. 귀가 썩고 뇌가 썩고, 썩고 썩어 생긴 가슴의 커다란 구멍으로 혹한기의 바람이 불어대고 수많은 까마귀떼의 날개짓이 장대비처럼 내린단다. 그 부리에 생살이 뜯기고 새하얀 뼈를 갉히며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단다. 그날에 수다쟁이는 화 있을진저, 더 많은 까마귀떼를 불러들임이라.
자객들의 말발굽 소리 요란한 날이면 너희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두 손으로 귀부터 틀어막고 묵직한 바위 뒤에 숨어 최대한 몸을 낮춰라. 그리하면 자객들이 탄 검은 말들이 너희를 비켜가리니, 자모의 검일망정 결코 너희를 해(害)치 못하리라. 귀 있는 자들은 들어라. 이 말로 더불어 너희가 그날에 '복 받았다' 일컬음을 받을지니, 부디 그날에 너희에게 복 있을진저, 혹자의 말이니라.
— 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칼질
- 여정
나는 그녀의 손을 꼭 거머쥐고 지하 레스토랑으로 들어간다
나는 돈까스, 그녀는 비후까스
메뉴판이 우리를 조금 갈라놓는다
하지만,
우리는 똑같이 수프를 떠먹는다
나는 돈까스, 그녀는 비후까스
수프를 담았던 빈 접시가 우리를 조금 더 갈라놓는다
나는 돈까스 위에 그녀를 살짝 올려놓는다
그녀는 비후까스 위에 나를 살짝 올려놓는다
나는 왼손으로 고기를 누르고 오른손으로 고기를 자른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고기를 누르고 왼손으로 고기를 자른다
나는 6번의 칼질로 그녀를 19조각 낸다
그녀는 5번의 칼질로 나를 16조각 낸다
하지만,
우리는 중간중간 똑같이 샐러드를 먹는다
나는 커피, 그녀는 주스
음식을 담았던 빈 접시가 우리를 완전히 갈라놓는다
나는 오른손으로 사막의 태양이 이글거리는 블랙커피를 마신다
그녀는 왼손으로 남극의 빙산이 둥둥 떠 있는 오렌지주스를 마신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똑같이 먹을 음식이 남아 있지 않다
나는 그녀를 자리에 두고 카운터로 가서 음식값을 치른다
나는 그녀를 자리에 두고 지하 레스토랑 계단을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