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장.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과 거듭남의 비밀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이란 전도顚倒된 몽상夢想을 멀리 떠나보내는 것이다. 전도 는 머리가 거꾸로 땅에 떨어지듯이 뒤집힌 것을 말한다. 몽상이란 꿈과 같은 생각이니, 전도 몽상은 뒤집힌 꿈같은 생각을 뜻한다. 한마디로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니 이 잘못된 생각을 멀리 하는 것이 원리전도몽상이다. 우리는 매일의 일상에서 수많은 착각을 일으키며 살아간 다. 속담에도 '자라 보고 놀란 사람은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다. 인도의 인식론에서 자주 비유를 드는 내용 가운데 하나가 뱀에 대한 비유다. 어두운 길을 가다가 새끼줄을 보고 뱀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듯이, 우리 인간은 흔히 잘못된 판단을 일으키며 산다는 것이 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을 멀리 떠나보내는 것이 원리전도몽상이다. 반야심경에서는 공의 논리를 떠난 일체의 판단은 오류요 전도된 몽상과 같은 것이다. 전도 몽상의 대표적인 경우를 들면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네 가지로 요약이 가 능하다. 깨끗함淨과 부정함不淨, 괴로움苦과 즐거움樂, 영원한 것常과 영원하지 못한 것無 常, 내가 있다는 것我과 내가 없다는 것無我에 대한 서로 상반된 생각이나 주장이 그것이다. 깨끗하지 못한 것을 깨끗하다고 하는 것이나, 괴로운 것을 즐겁다 하는 것이나, 영원하지 못 한 것을 영원하다고 하는 것이나, 내가 없는데 내가 있다고 하는 생각이나 주장이 그러하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생각하거나 주장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네 가지 판단의 구분은 불교의 이상적 상태를 말할 때 자주 언급하게 되는, 이른바 상락 아정常樂我淨에 대한 것이다. 이는 영원하고 즐겁고 참된 자아의 맑은 세계를 지칭하는 극락 極樂이나 정토淨土의 상태를 말할 때 사용하는 네 가지 범주라고 볼 수 있다. 상락아정에 대 한 올바른 판단도 공의 논리를 떠나서는 불가능하다. 공의 논리를 떠나면 어느 한쪽으로 반드 시 치우치게 된다. 불교의 출발점은 '바른 인식' 곧 정견正見에서 시작된다. 바른 인식이야말 로 해탈에 이르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바르게 보지 못하기 때문에 온갖 집착과 번민이 따르 게 된다. 사물과 사건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여실如實함을 볼 수 있는 '여실지견如實之 見'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을 사실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다면, 사실 그 자체를 놓고 감정에 휩싸여 분노를 일으키거나 혹은 슬퍼하거나 원망할 이유가 없어지게 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가장 경계해 야 할 것은 허망虛妄한 분별심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경계해야 할 것은 '없는 것을 있다 고 집착하는 것'이다. 이러한 집착은 끝내 비극을 낳는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생각이 나, 명예, 권력, 미모 등등, 이 세상의 그 어떤 외부적인 조건들이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 는 생각은 전도된 몽상에 불과하다. 이는 헛된 꿈에 불과하고 영원에 비추어볼 때는 일장춘몽 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행복은 내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면의 조건을 갖추 는 것도 '실상'의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전제로 한다.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는 일은 중요하다. 성서 <히브리서>의 기자가 말하는 것처럼, "믿음 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實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헛되고 허망한 믿음이어서는 안 된다. 믿음도 참 믿음이 있다. 참 믿음이란 참에 대한 믿음이다. 참은 '진리'다. 그러므 로 진리에 대한 바른 믿음은 결국 바라는 바의 '실상' 곧 여실함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에서의 '실상'은 성육신成肉身, incamation에서 절정을 이룬다. 보이지 않던 것 이 실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던 진리의 '말씀'이 '육신'이 됨으로써 '도성인신道 成人身'의 세계가 이루어졌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공'이 '묘하게 나타난' '진공묘유眞空 妙有'의 세계를 이룬 것이다. 보이지 않던 진리가 현실화되는 세계, 그것이 실상의 세계다. 그리스도교에서 '거듭남'을 말하는 것도 진리의 실상을 바로 보는 영적인 눈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이 거듭남은 '돈오頓悟'적 사건이다. '어둠'이 '빛'을 알아차리는 순간적 변화요 총 체적, 생명적 변화의 사건이다. 실상을 바로 보는 돈오적인 정견正見은 환각幻覺과 착각의 미혹된 세계에서 방황하다가 홀 연히 보이지 않던 '빛'을 보고 자신의 벌거벗음을 깨닫는 사건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의 벌거벗음을 깨달았던 것과도 같다. 진리의 빛 속에서 어둠이 드러나듯이 미혹된 신화의 세계에서 실상의 세계로 전환하는 일이야말로 원리전도몽상의 일이다. 인류사의 오래 된 과거 어느 한 때에는 태양의 일식작용을 신神이 인간에게 전하는 일종의 신호로 생각한 적 도 있었다. 또한 혜성이 신의 분노를 나타내는 흉조凶兆라고 믿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마녀 사냥식의 종교적인 편견도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특히, 확인도 증명도 불가능한 믿음의 세계에서는 종교적 전통의 권위가 잘못된 판단으로 이끄는 일에 한몫 거들 수도 있다. 오늘날에는 종교적 권위 그 자체만으로는 보편적 진리를 주장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제는 권위가 아니라 '실상'을 바로 보는 '정견'만이 필요하다. 전 견은 바른 믿음 곧 '정신正信'이다. 견해도 따지고 보면 신념체계이기 때문이다. 원리전도몽 상을 말할 때 전도는 경도傾倒된 생각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는 잘못된 견해다. 공 空도 색色을 떠나 생각할 수 없기에 공즉시색이라 했듯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진리가 예수 의 몸으로 구현되었고, 세상의 삶으로 체현되었다. 공의 관점에서 색을 바라볼 때 더 이상 경도된 삶을 살지 않을 수 있듯이, 하나님, 즉 도 道, logos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허황된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다. 관점의 시작이 중요 하다. 바른 관점, 바른 이해를 위해 명상이 필요하다. 본질을 꿰뚫어 보는 직관적 명상 말이 다. 틀에 박힌 신앙의 교리적 명상이 아니라, 명상의 어둠 속에서 섬광으로 번쩍이는 '빛'을 경험해야 한다. 온갖 편견과 독선을 배제한 '있는 그대로'의 실상인 '진리'를 체험하기 위한 삶의 명상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명상은 마약이 아니라 마약에서 깨어나게 하는 일침一針 이다. 토머스 머튼의 말처럼 명상은 '우상의 무서운 파괴요 불사름'이기 때문이다. 내면의 우 상파괴, 이것이 원리전도몽상이요 거듭나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