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2. 8.
사무실을 비웠지만 마무리하지 못한 게 생각 나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낯선 남녀가 껴안고 있다가 깜짝 놀라고 나도 놀란다.
11년 만에 갑자기 갈 데가 없어졌으니 민망(憫惘)하고 망연(茫然)하다.
날씨는 영하 10도에 가까운 혹한(酷寒)인데 부동산도 당구장도 다 문을 열지
않아 로비에서 서성댄다.
내가 갈 데가 없다니,
스스로 결정을 하였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처음 겪는 일이다.
정년퇴직을 했으면서도 늘 갈 데를 만들었고 내 사유(思惟)의 공간이 있었는데,
비밀을 쌓아둔 다락방 같은 사무실을 빼고 막상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나의 모습이 초라해지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이다.
앞으론 어떻게 할까.
문화원이나 복지회관에 가서 무슨 과목을 수강 신청할까,
헬스클럽에 다녀볼까, 아니면 매일 산에 가야할까,
청와대 김현철 비서관은 50~60대면 산에 가지 말고 컴퓨터에서 악성댓글도
달지 말고 아세안으로 가라고 했는데 그쪽에도 전혀 문외한(門外漢)이니 온갖
궁리를 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사내는 밥숟가락 내려놓으면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는 원칙아래 수십 년간
이행을 하였지.
오죽하면 집에 좀 붙어 있으라는 잔소리를 들을 정도로 바깥생활을 했는데,
이젠 꼼짝없이 삼식(三食)이 노릇을 해야 하나 만감이 교차한다.
2. 11.
오늘은 무엇을 할 것인가 산책을 하며 곰곰이 생각해본다.
사람이 세상을 살다보면 역경이 적지 않다.
또한 구차하게 움직이면 괴로움을 이기지 못한다.
세상사는 일에 어려움은 늘 있게 마련이지만 아등바등 발만 구르며 살기엔
시간이 너무 짧다.
산책 후 서재 문을 닫아걸고 마음을 고요하게 가지려 해도 마음대로 되지를
않는다.
닫은 방안엔 적막하고 소슬하다.
몸에 기운은 남아도는데 마음에 불빛이 꺼져가니 문제로다.
바람이 창문을 두드린다.
가을은 수렴의 계절이지만 겨울은 비움의 계절이다.
낙목한천(落木寒天)의 겨울도 이젠 막바지로구나.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이 끝나자 라흐마니노프의 '광시곡'이 흘러나온다.
잔잔하고 부드러운 클래식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지금부터 내 인생은 3막 3장중 3장에 해당된다.
현역이 1막이라면 은퇴 후 10년을 잘 먹고 잘 놀고 산에 꾸준히 올랐으니
2막까지는 잘 살은 모양이다.
각오를 했지만 3막에 막상 부딪히니 갈 곳이 없는 신세가 되었다.
며칠 전 단톡에 만사여의(萬事如意)란 글이 올라왔다.
해석을 하면 '모든 일을 마음먹은 대로 이루게 해 달라'는 말이다.
세상을 만든 조물주도 마음먹은 대로 다 못할 텐데, 인간이 다할 수 있도록
조물주가 과연 도와줄까.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두 가지도 마음먹은 대로 하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좋은 꽃은 반쯤 피었을 때가 보기 좋다.
대부분의 꽃은 활짝 피었다가 흐드러진 뒤에는 추하게 떨어진다.
황혼인생에선 무엇이든 조금 부족할 때 그치는 것이 좋다.
때로는 끝까지 가면 안 가느니만 못할 때도 있다.
더 갖고 다 가져도 인간의 욕망은 그침이 없기에 충족되지를 않는다.
이젠 조금 부족해도 마음이 충만해진다면 그 길을 가고 싶다.
사무실에서 옮겨온 전신거울에 초로(初老)의 모습이 보인다.
나이 드는 것도 성장 과정의 일부이고 노년이어서 생기는 장점도 많다.
갈 데가 없다고 엉긴 먼지 가득한 방 안에만 있을 수 없기에 방한복장을
하고 집을 나선다.
버스 정류장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마음을 다스리니 정신은 상쾌하고 근심이
사라진다.
나이 들어 아픈 것이야 당연하지만 정신마저 피폐해지면 금세 망가지기에
오늘도 친구들이 많이 모이는 당구장으로 갈 곳을 정한다.
2019. 2. 11.
석천 흥만 졸필
첫댓글 사무실을 닫았다니 당분간 적적하겠네.
그래도 친구들이 모이는 당구장이라도 있으니...
그곳이야 말로 샹그릴라 아니겠나 ?
커더란 키에 방한복장을 하고 어슬렁거리는 늙으수레한
친구의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네.
하여간 몸 건강 잘 챙기시고 잘 지내시게나..... 일동친구
대단한 사색의 글월 감명깊게 읽고, 한수 배웠다.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