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짜 농부의 아내
김형숙 헬레나
어제만 해도 아무것도 없던 광야 같던 땅은 개벽이라도 한 것처럼, 생명을 듬뿍 담은 연초록의 들판으로 변했습니다.
바로 만물이 꿈틀대는 봄이였습니다. 여기저기서 농부는 논을 갈고 열심히 모를 심습니다.
일을 마친 농부는 이마의 땀을 씻으며 손과 발을 씻고 ,이제는 기다립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땡볕이 내리는 자연의 시련을 겪으면서, 모는 깊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쑥쑥 자라
황금빛 벼가 되어 고되게 일한 농부의 밥상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와 나는 빚쟁이를 피해 대야로 숨어들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부모님 집이있었기에 가게와 아파트를 날린
우리는 도망치듯 시골로 내려왔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먹고 살 것을 고민하다가 여러 형제 앞으로 되어 있는
논을 한번 우리가 지어보자는 바오로의 말을 반신반의하면서 무작정 농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바오로는 어릴 때의 기억을 더듬으며 ,볍씨와 흙을 사다가 모판에 씨를 뿌리고 정성스럽게 모를 키웠습니다.
모판에 뿌려진 연보라색의 볍씨는 너무 예뻐서 힘든 줄도 모르고 일을 하였고, 그 씨가 잘 자라기를 기도하며 기다리던
그 시간들은 행복했습니다.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농사를 짓던 첫해는 대풍이었습니다. 장님 문고리 잡았다고 주위에서 놀려댔지만 그래도 바오로는 의기양양하며 으시대고
자랑하였습니다. 저도 그런 바오로가 대견하였습니다.
농부의 첫 걸음이었기에 누군가 잘 살아보라고 힘을 팍팍 실어 주었나봅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툴지만 농부가 되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한편 돈은 없어도 행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럭저럭 농사의 재미도 있고 자신감도 생기던 때, 우리에게 또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항상 하던 대로 볍씨를 뿌리고 흙을 뿌렸는데 잘 자라야 할 모가 병이 들어 시들시들 죽어가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주위 어른들은 모판을 다 엎고 새로 모판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였으나 우리 부부는 죽어가는 모판에 약을 주고 물을 주면서
밤낮으로 돌보며 자식 키우듯 사랑을 주었더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며칠 밤을 자고 일어나 들여다보니 누렇게 떠버렸던 모가 다시 생기를 얻고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이 순간, 우리 부부는 서로 손을 잡고 덩싱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이때가 살면서 행복했던 순간 중의 또 하나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감사드립니다. 이렇게도 도와주시는군요.
이렇게 사랑해 주시는군요. 광야에 버려진 탕자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해 주시는군요.
짐승과 함께 썩은 음식을 먹으며 살면서, 야수의 마음으로 돌아가던 탕자를 이끄시어 따뜻한 아버지의 고향으로
발을 돌려주시는군요.
오래도 역시 초짜 농부는 모를 심습니다. 초짜 농부 바오로는 이제는 늙어 농사 짖기가 많이 힘들어 합니다.
잘 자란 모판을 빼서 내 논으로 나르려면, 리어카에 담아 수 십 번을 날라야 합니다.
그 일이 모내기 중에 가장 힘든 일중의 하나입니다.
우연히 성당 교우들과 밥을 먹다가 모심기의 고충을 이야기 하였더니, 걱정 말라며 도와주겠다고 선뜻 약속을 하였다고 하며
바오로는 기뻐하였습니다.
다음날 야보고 형제님과 베네딕도 형제님은 아침 일찍 트럭을 몰고 오셨습니다. 모판 나를 일이 걱정이었는데 이런 든든한
두 일꾼을 보내주시어 감사합니다. 트럭에 모판을 가득 싣고 달렸습니다.
흙이 잔뜩 묻은 바오로와 나는 트럭 짐칸에 앉은 채....
두 명이 죽게 하루 종일 하여도 벅찬 일이 두 형제님의 수고와 도움으로 오전에 금방 끝났기에 다 함께 점심을 꿀맛처럼
달게 먹었습니다. 기쁜 일이 생기면 전염이 되나봅니다. 모를 다 심고 빈 모판을 정리하고 있는데 논 옆으로 운동을 하며
지나가던 엘리사벳 언니가 장갑을 끼고 달려들어 모판을 정리하여 주었습니다.
또 예쁜 천사를 보내주셨군요.
하느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올해처럼 농사를 지으면 바오로는 100살까지도 농사를 지을 수 있을 것 같네요.
그 모는 잘 자라 짙푸른 바다의 물결을 이루고 있습니다. 역시 초짜 농부 바오로는 하늘을 바라보며 기다릴 줄 아는 것 같습니다. 오래가 예전과 다른 이유는 그 모를 바오로 혼자 심은 것이 아니라, 두 형제님과 아름다운 자매님의 땀과 수고로움이 있었기에, 그들과 함께 심은 모가 잘 자라기를 바랄 것입니다. 바오로와 야고보와 베네딕도 형제님, 엘리사벳 언니와 함께 저는
하늘을 바라보며 기다립니다.
여러 해가 바뀌어도 바오로와 나는 또 농사를 지을 것입니다.
역시나 우리는 초짜 농부입니다. 1년, 10년, 20년을 일하여도 우리는 늘 초짜 농부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1년, 10년, 20년을 성당에 다녀도 나는 초짜 신앙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 선 나는 늘 어린아이와 같은 미숙아입니다. 그래서 요람에 있는 아이를 돌보듯 칭얼대면 젖을 주고,
울면 자장가를 불러주며, 내가 바르게 땅 위에 설 때까지 아버지께서는 기다리며 나를 바라보고 계시겠지요.
벼가 자라 비바람과 뜨거운 땡볕을 견디고 잘 영글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귀한 양식이 되라고 하시는 것처럼....
믿음도 이와 같기에 오늘도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기도합니다.
농부가 모를 심고 하늘을 바라보며 기다리듯, 나에게도 견딜 수 있는 인내를 배우고,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간직하고,
먼 훗날 내 손안에 튼실한 열매를 맺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 열매가 크면 좋고, 크지 않아도 좋고, 모든 것을 아버지께서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