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2/26
"우표에서 얻은 지식이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많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
2010 - '피겨퀸' 김연아 금메달! 연아 228,56 세계신…푸른 여신, 세계를 넘어 ‘금’ 프리스케이팅서 150.06 '피겨퀸' 김연아(20.고려대)가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피겨 여자 싱글에서 한국인으로는 사상 최초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김연아는 26일(한국시간) 캐나다 밴쿠버 퍼시픽 콜리세움에서 치러진 대회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150.06점을 얻어 쇼트프로그램 점수(78.50점)를 합쳐 총점 228.56점을 받아, '동갑 라이벌' 아사다 마오(일본205.50점)를 23.06점 차로 제치고 우승했다. 김연아와 '금메달 경쟁'을 펼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아사다는 큰 점수 차로 은메달에 머물렀고, 어머니를 잃은 충격을 딛고 연기를 펼친 조애니 로셰트(캐나다)가 202.64점으로 감격스런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로써 김연아는 한국인 사상 최초로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따낸 주인공이 됐다. 1968년 그르노블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에 이광영(남자)과 김혜경, 이현주(이상 여자)가 처음 출전한 지 42년 만에 달성한 쾌거다. 이날 김연아가 프리스케이팅에서 받은 150.06점은 자신이 지난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2009-2010 국제빙상경기연맹(ISU) 그랑프리 1차 대회에서 기록한 역대 최고점(133.95점) 무려 16.11점이나 뛰어넘은 놀라운 기록이다. 총점 역시 자신이 같은 대회에서 기록한 역대 여자 싱글 최고점(210.03점)을 넘어선 새로운 기록이며, 신채점제(뉴저지시스템) 도입 이후 여자 선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220점을 넘겼다. 24일 쇼트프로그램에서도 역대 최고점 기록을 경신한 김연아는 올림픽의 중압감을 이겨내고 쇼트프로그램과 프리스케이팅, 총점에서 모두 역대 최고점을 새로 쓰는 완벽한 연기를 펼쳤다. 이영호 기자 sncwook@yna.co.kr (밴쿠버=연합뉴스) /한겨레 2010-02-26 오후 01:30:15 http://www.hani.co.kr/arti/sports/sports_general/406943.html
2009 - T-50 고등훈련기 UAE 판매 실패 4년간 추진해왔던 고등훈련기 T-50의 수출이 좌절됐습니다. YTN 2009-02-26 13:29 http://www.ytn.co.kr/news/theme_view.php?tidx=573&key=200902261329162485
2006 - 노무현 대통령 취임 3주년 맞아 출입기자들과 산행 간담회 盧대통령 출입기자단과 산행 간담회 "임기중간 선거 많이 국정 흔들" 노 대통령은 이날 등산 후 오찬을 겸한 간담회를 가진 데 이어 '취임 3주년을 맞아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편지'를 별도로 냈다. 국민 서한은 오는 3월23일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 행사의 발제문 성격으로 양극화 해소의 필요성을 거듭 역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노 대통령은 국민 서한에서 양극화 재원확보와 관련, "당장 돈을 더 내거나 빚을 내자고 하지는 않겠다"면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세원 발굴에 강력히 나서고 근로자와 서민들이 억울하지 않도록 공평과세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5년 임기는 너무 길다=노 대통령은 산행 간담회에서 "대통령 임기 중간에 선거 같은 것을 하지 않으면 좋겠다"며 "선거 변수가 끊임없이 끼어들기 때문에 국정이 끊임없이 흔들린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대통령 임기 5년이 긴 것 같다. 대통령이나 정부ㆍ국회가 5년의 계획을 세워 제대로 일을 하려 한다면 중간 중간에 선거가 너무 많은 것은 좋지 않다"고 지적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2∼3년 업적의 중간 평가를 위해 적절하게 (임기 중간에) 선거를 넣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2년을 갖고 중간평가를 한다고 하면 결국 이미지 평가일 수밖에 없다"며 "중간 선거는 여러 변수가 끼어들기 때문에 그것을 평가라고 볼 수 없고 선거가 너무 자주 있는 것이 좋은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개헌발언에 대해 "개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직접 끄집어 내지 않을 것이고 우선 순위도 아니다"고 해명했으나 4년 중임제 개헌과 대선과 총선을 같이 치르자는 의미로 받아들여져 정치권의 개헌논의에 불을 댕길지 주목되고 있다. 앞서 지난 22일 이해찬 국무총리는 국회답변에서 "대통령은 5년 단임제이고 국회의원은 임기가 4년이며 국회의원 선거 사이에 지자체 선거가 있어 혼란스럽다"며 "개헌은 2007년 대선에 적용하기 위해 하는 것"이라며 대선 전 개헌 필요성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여당은 지방선거 전 개헌 공론화에 부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미 FTA는 중국 견제용=노 대통령은 산행 후 가진 오찬 간담회에서 잔여기 중 양극화 해소와 한미 FTA 등 2가지 과제에 역점을 두겠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2가지 모두 복잡한 문제여서 남은 2년도 만만치 않게 시끄러울 것이며 아주 버거울 것 같다"고 토로했다. 노 대통령은 한미 FTA가 "우리 경제를 위해 국제적 환경을 어떻게 조성해야 하는가, 그 중에서 가장 역점을 둔 것이 중국을 따돌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에 대한 고민의 결과로 나온 것"이라고 소개했다. 노 대통령은 "중국을 따돌리기 위해 선진국의 여러 분야 가운데 우리가 따라잡지 못한 분야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바로 금융 허브 전략, 물류 허브 전략, 고급 지식 서비스의 신성장 동력화 등"이라고 지적했다. 노 대통령은 "그런데 FTA에 대해 미국이 별 관심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며 "이 때문에 여러 나라들과 동시다발적인 FTA를 추진하는 등 미국의 관심을 끌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 미국이 먼저 FTA 협상을 추진하자고 손을 내밀었다"고 말했다. 권구찬 기자 chans@sed.co.kr /서울경제 2006/02/26 18:24 http://economy.hankooki.com/lpage/news/200602/e2006022618244370290.htm
2006 - 17세기 일본문서 "독도는 조선 땅" 시마네현 가문 전승 문서 공개 17세기 日문서 "독도는 조선 땅" 시마네현 가문 전승 문서 독도를 ‘조선 강원도에 속한 섬’으로 기록한 17세기 일본측의 공문서가 26일 공개됐다. 이 문서는 최근 ‘다케시마의 날’을 선포해 물의를 빚고 있는 일본 시마네(島根)현의 한 가문에 전승된 것이다. 손승철(孫承喆) 강원대 사학과 교수는 최근 무라카미(村上) 가문으로부터 ‘원록 9 병자년 조선주착안 일권지각서(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의 원본 사진을 입수하고 이를 공개했다. http://www.chosun.com/national/news/200602/200602260458.html
2006 - 정진석 추기경 첫 미사 26일 정오 서울 명동성당 미사. 정진석(鄭鎭奭) 추기경은 앞으로 남북통일, 부의 양극화, 진보·보수 및 세대 간 갈등 등의 문제 해소와 공동선(共同善) 증진에 앞장설 뜻을 밝혔다. 정 추기경이 추기경으로서 가진 첫 강론이다. “추기경의 역할은 하느님 뜻의 전달자로서 교황의 말씀을 각계각층에 잘 전달해 해당 국가의 운영에까지 반영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정진석 추기경 서임 후 교구 신자들과의 첫 만남인 이날 미사에는 정 추기경을 친견하기 위해 평소보다 거의 2배나 많은 2000여명의 신자들이 참석해 성당 대성전은 물론 꼬스트홀(문화관)까지 가득 메웠다. 정 추기경은 신자들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모범적인 삶을 살 것을 당부하고, “교우 여러분이 국민으로부터 지지받을 때 제 말도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며 사회적 문제에 대한 발언을 확대할 것을 시사했다. 정 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을 겸한 제가 추기경에 임명된 것은 서울과 평양을 잘 어울릴 수 있도록 하라는 뜻”이라고 의미를 강조했다. 그는 “북한의 동포들은 식량도 없고, 종교자유도 없는 어려운 상황”이라며 “하느님이 자비를 베푸셔서 하루속히 북한 주민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하자”고 말했다. 이날 미사 말미에 축하화환이 증정되고 백남용 신부가 작사·작곡한 축가가 연주되자 신자들은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다. 미사 후 정 추기경이 성당 정문 앞에서 신자들에게 감사인사를 할 때는 수백 명의 신자들이 그를 둘러싸 손을 잡고 사진 촬영하며 37년 만의 추기경 탄생을 축하했다. /조선
2006 - 세계인구 65억명 넘었다 세계 인구가 26일을 기해 65억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인구통계국의 국제 프로그램센터의 분석에 따르면 세계 인구는 한국 시각 26일 오전 9시16분을 기해 65억명을 넘어섰다고 MSNBC방송이 25일 보도했다. 현재 초당 4.4명이 태어나고 있으며 현 인구는 1990년에 비해 4배 가량 늘어났다. 통계국은 지난 2004년 3월 보고서를 통해 1999년 6월에 인구 60억명을 넘어섰다고 밝힌 바 있어 7년도 채 되지 않아 5억명이 늘어난 것이다. 또 6년 후인 2012년 10월 18일 오후 4시36분(미국 동부 시각)에 70억명을 넘길 것으로 예상했다. /조선
2001 - 남북 이산가족 200명 서울-평양에서 50년 만에 혈육 상봉(3차 상봉) 제3차 이산가족 상봉이 2001년 2월 26일부터 2박3일간 서울과 평양에서 이뤄졌다. 서울 센트럴시티에선 100명의 북측 이산가족들이 500여명의 남쪽 가족을 만났으며, 이어 평양 고려호텔에선 남한 이산가족 100명이 북쪽 가족들과 눈물어린 포옹을 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1969년 12월 대한항공 여객기 승무원으로 근무하다 납북된 딸 성경희씨를 어머니 김삼례씨가 32년 만에 만나 회한의 정을 나눈 순간이었다. 또한 6.25때 포로가 돼 북한에 살고 있던 국군 포로 2명도 평양에서 남한측의 동생들을 만나 눈물의 50년을 회상했다. 서울에선 고 정지용 시인의 둘째 아들이 남쪽의 형을 만나 얼싸안고 굵은 눈물을 흘렸다. /조선
2001 - 탈레반, 불상 폭파 선언 [책갈피 속의 오늘]2001년 탈레반, 불상 폭파 선언 2001년 2월 26일 아프가니스탄에서 경악할 만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 70030000000134/20080226/8548375/1
1970 - 간호사 주사 거부로 병원 업무 마비 오늘의 역사(2월 26일) 간호사 주사 거부로 병원 업무 마비 전국에 있는 6천여명의 간호사들이 일제히 주사를 거부하였다. 오늘의 역사(2월 26일) /고성 인터넷뉴스 2008-02-26 오전 9:33:23
- 'Danza Dell'Orso' - 'Abstract'
1966 - 이탈리아 화가 지노 세베리니(Severini, Gino) 사망 세베리니 [Severini, Gino, 1883.4.7~1966.2.26] 이탈리아의 화가. 코르토나 출생. 1900∼1901년 로마에서 G.발라에게 사사하고, 1906년 파리로 옮긴 후 G.쇠라(1859∼1891)의 영향을 받아 점묘주의(點描主義)로 출발하였다. 1909년 보초니 등의 미래파운동에 참여, 밀라노에서 '미래주의 선언'에 가담하고, 《여행의 회상》 《적십자열차》 《물랭루주의 곰춤 Dance of Bear at The Moulin Rouge》(1913) 등 미래파작품을 발표, 미래파 국제화단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그러나 1910년경부터는 P.피카소의 큐비즘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 점차 미래주의를 버리고 고대 건축양식을 따른 벽화를 그리는 등 신고전주의적 작풍으로 전향하였다. 이와 같은 경향은 《큐비즘으로부터 고전주의까지 Du Cubisme au classicisme》(1921)를 발표한 1921년경까지 작품의 기조를 이루었으나, 1914년경에 들어서는 다시 처음으로 추상적 구성을 시도하면서 바뀌었다. 그러나 1939년에는 일종의 절충적 작풍을 보이고, 그후 점차 추상적 작풍으로 변하였다. 그후 1922년 파라초 몬테그포니(피렌체 근처)에서 프레스코화를 제작하면서부터 벽화 모자이크에도 흥미를 가졌고, 작풍도 H.마티스의 영향을 받아 장식적 경향이 강화되었다. 1935년 로마 콰드리엔날레상을 받고, 1950년에는 베네치아 비엔날레 1등상을 획득하였으며, 만년에는 추상화로 전향하였다. /네이버
1963 - 민주공화당 창당 [오늘의 역사]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 1963년 오늘 5·16 주체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공화당이 탄생했다. 5·16 이념 계승과 민족적 민주주의 구현을 표방한 민주공화당은 창당 초부터 김종필 계열과 반대 계열 간의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1963년 8월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이 입당해 총재직을 맡으며 이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 승리함으로써 제3, 4공화국의 여당으로 장기 집권했다. 민주공화당은 반공안보와 경제개발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한국 근대화를 추진했지만, 민주성보다는 효율성을 강조하는 마인드로 개헌 요구를 철저히 봉쇄하고 유신헌법를 고수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충청투데이 2008.02.25 19:00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3275
1956 - 시인 실비아 플래스-테드 휴스 첫만남 [책갈피 속의 오늘]1956년 시인 실비아 플래스-테드 휴스 첫만남 “그는 애무를 하며 내 귀걸이와 헤어밴드를 낚아챘다. 그가 내 목덜미에 키스할 땐 나도 그의 뺨을 세차게 물어뜯었다.” http://news.donga.com/3//20070226/8411223/1
- 1948.5.10. 총선거 기념 1948 - UN, 남한 단독 총선거안 가결 [오늘의 역사]UN 남한 단독 총선 결정 국제연합은 1948년 2월 26일 열린 유엔 3차 총회에서 남한 단독으로 총선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국제연합은 1년 전인 1947년 남북한 인구비례에 따른 총선 실시를 결의한 바 있다. 그러나 인구비례에 따른 총선이 남한에 유리하다는 이유로 소련이 이를 거부함에 따라 남북한 총선이 성사되지 못했다. 결국 유엔 총회는 공산권의 기권 속에 33대 2로 단독 총선안을 가결했다. 유엔총회의 결정이 나오자 미군정과 이승만 박사를 비롯한 우익진영은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반면, 김구 선생 등은 단독총선이 남북분단을 고착시킬 것이라며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고 총선 불참을 선언했다. 결국 석달 뒤인 1948년 5월 10일 첫 국회의원 선거가 남한 단독으로 치러져 제헌의회가 구성됐다. 선거결과 이승만을 추종하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총의석의 27.5%인 55석을 차지해 제1세력으로 부상했다. 한국민주당은 당중진을 포함한 대부분이 탈락, 총의석의 14.5%인 29명만이 당선됐고 대동청년단이 12명, 민족청년단이 6명, 무소속이 85명 당선됐다. /충청투데이 2009.02.25 20:00 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2856
- 메이지 일왕 결혼 25주년 기념 [어제의 오늘]1936년 일본군 황도파 쿠데타 ㆍ日 군국 파멸의 징조 1936년 2월26일 새벽 일본 육군성과 참모본부, 의사당, 총리 관저 등 정부 주요 건물이 1400여명의 군인들에게 포위됐다. 정부 핵심 포스트를 장악한 이들은 곧바로 사이토 마코토 내대신, 와타나베 조타로 육군교육총감 등을 살해했다. ‘2·26 사건’으로 불리는 이날의 쿠데타는 가난한 일본 동북부 농촌 출신의 위관급 젊은 장교들이 주축이었다. 정치인 부패와 재벌의 횡포, 농촌 황폐화, 빈부격차 등으로 일본이 망하고 있다고 분개하며 정계와 군부를 비롯한 일본 사회 전체를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본 군내 ‘황도파’ 파벌이었다. 유신모기자 /경향신문 2009-02-25 18:23:5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2251823595&code=100203&s_code=ap005
- Japan, 50 Yen (Banknote) 1936 - 일본의 정치가, 총리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 암살 다카하시 고레키요 [高橋是淸, 1854.7.27~1936.2.26] 근대 일본의 정치가·재정가. 1867~69년 센다이 한[仙台藩] 유학생으로서 미국에 가서 어렵게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그뒤 초대 특허국장을 거쳐 1892년 일본은행에 들어가 1911년 총재가 되었다. 1913년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權兵衛] 내각의 대장상(大藏相)이 되면서 정우회(政友會)에 입당했다. 1921년 암살된 하라 다카시[原敬]의 뒤를 이어 총리 겸 대장상이 되었다. 1927년 금융공황이 일어나자 그해 4월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내각의 대장상이 되어 3주간의 지불유예긴급칙령(모라토리엄)을 공포하는 등 제반조치를 취하여 위기를 극복한 뒤 42일 만에 사임했다. 그뒤 이누카이[犬養]·사이토[齊藤]·오카다[岡田] 내각의 대장상으로서 재정문제 처리에 실력을 발휘해 재계의 수호신적 존재가 되었으나, 군부와 충돌하여 2·26사건 때 암살당했다. 저서로 〈다카하시 고레키요 자전 高橋是淸自傳〉(1936)이 있다. BIE /브리태니커
1935 - 영국의 로버트 왓슨-와트가 레이더에 대한 시연을 하다 (참고) [이 주일의 역사] 왓슨 와트, 레이더 특허(1935.4.2) △왓슨 와트, 레이더 특허(1935.4.2) 영국 왕립물리연구소 연구원 로버트 왓슨 와트(Robert Watson-Watt)는 1935년 1월 항공부로부터 라디오파를 이용해 적기를 파괴하는 살인광선을 만들 수 있는지 문의를 받는다. 답은 간단했다. 라디오파는 비행기에 타격을 주기엔 너무 약해 살인광선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왓슨 와트는 다른 대안을 제시한다. 라디오파를 발사해 날아오는 비행기의 위치를 탐지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였다. 라디오파가 금속에 부딪치면 반사되어 신호가 되돌아오는 성질을 이용한 것이었다. 정광용 기자 kyjeong@ /부산일보 09-03-30 [10:50:00]
- Wallach and van der Waals
1931 - 독일의 유기화학자 오토 발라흐(Wallach, Otto) 사망 발라흐 [Wallach, Otto, 1847.3.27~1931.2.26] 독일의 유기화학자.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출생하였다. 괴팅겐대학교에서 뵐러의 지도를 받았으며 1870년에 본대학으로 옮겨 케쿨레의 조수가 되었다가 1879년에 약화학(藥化學) 교수가 되었다. 1889년 V.마이어의 후임으로 괴팅겐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1915년에 은퇴하여 여생을 연구에 바쳤다.
1919 - 미국의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으로 지정 (발췌) 그랜드 캐년의 자연보호에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윌리엄 해리슨(William Harrison)과 디오도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그리고 우드로우 윌슨(Woodrow Wilson)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랜드 캐년의 자연보호 과정은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1919년 2월26일 민족 자결주의를 외쳐 유명해진 미 28대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에 의해 125만 에이커에 달하는 이 지역 일대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미연방 정부의 관리와 보호 속에 있게 되었다. [여행전문가 대니 박의 미국 가이드-신의 작품 “그랜드 캐년 1박2일 코스” - 5회] /여행만들기 04-03 19:22
1916 - 독일-프랑스 베르덩 전투 (6일째)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오늘, 베르됭(Verdun) 전투가 엿새째로 접어들었다. /YTN 2011-02-26 토 http://www.ytn.co.kr/article/article_view.php?key= 201102250614279867&s_mcd=0422&s_hcd=
1903 - 이탈리아 화학자 줄리오 나타(Natta, Giulio) 출생 나타 [Natta, Giulio, 1903.2.26~1979.5.2] 이탈리아의 화학자. 필름·플라스틱·섬유·합성고무 제조에 쓰이는 고중합체(高重合體)의 개발에 이바지했다. 1963년 독일의 카를 치글러와 함께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1924년 밀라노공과대학에서 화학공학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파비아대학교·로마대학교·토리노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있었으며, 그뒤 밀라노로 돌아가 공업화학 교수 겸 연구소장이 되었다(1938). 그의 초기 연구는 메탄올·포름알데히드·부티르알데히드·숙신산 등을 공업적으로 합성하는 기초를 마련했다. 1953년부터 그는 거대분자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치글러 촉매를 써서 프로필렌 중합반응 실험을 한 결과 매우 규칙적인 분자구조를 가진 폴리프로필렌을 얻었다. 이러한 중합체들은 경도가 크고 녹는점이 높기 때문에 상업적으로 중요하다. /브리태니커
1903 - 영국의 군인 오드 윙게이트(Wingate, Orde) 출생 윙게이트 [Wingate, Orde Charles, 1903.2.26∼1944.3.24] 영국의 군인. 뛰어난 '게릴라전' 지휘관으로서 찰스 조지('중국인') 고든 장군과 T.E. 로렌스('아라비아의 로렌스') 대령의 전통을 이어받아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영국인과 구르카족 및 미얀마인으로 구성된 그의 게릴라 여단인 '친디트' 또는 '윙게이트의 돌격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미얀마 북부의 밀림에서 병력이 훨씬 우세한 일본군을 괴롭혔다. 그는 차터하우스 퍼블릭 스쿨(사립학교)과 울리지의 영국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뒤, 1923년에 영국 육군포병장교가 되어 수단에서 복무하면서 리비아 사막을 탐험했다(1928~33). 1936~39년에 팔레스타인에서 정보장교로 일하는 동안 윙게이트는 야간 순찰대를 조직하여 모술과 하이파를 잇는 송유관 연변의 유대인 공동체를 습격하는 아랍인들을 물리쳤고, 가볍게 무장한 보병으로 적의 후방을 공격하는 '침투' 작전을 시험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1941년 1~5월, 그는 에티오피아와 수단 연합군을 이끌고(에티오피아 황제인 하일레 셀라시에와 함께) 이탈리아군이 점령하고 있는 아디스아바바를 빼앗았다. 인도로 파견된 그는 '친디트'를 조직하는 한편, 프랭크 도 메릴이 지휘하는 미군 돌격대 '메릴의 특공대'를 훈련시켰다. 1943년 2~5월, '친디트'는 일본군에 점령된 미얀마를 향해 서쪽에서 침투하여 친드윈 강을 건넜고, 공중 보급을 받으면서 이라와디 강에 다다를 때까지 효과적인 전투를 벌였다. 그들은 이라와디 강과 동부 전선의 살윈 강을 잇는 일본군의 통신로를 끊기 위해 이라와디 강을 건넜지만, 지형이 불리한 것을 알고 인도로 우회하여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944년 3월에 소장 대리로서 미얀마 중부로 침투하는 공수부대를 지휘하게 되어 만달레이-미치나를 잇는 중요한 철도를 절단했지만, 그 직후에 비행기 추락 사고로 죽었다. /브리태니커
1896 - 소련의 정치가 안드레이 즈다노프(Zhdanov, Andrey) 출생 즈다노프[Zhdanov, Andrey Aleksandrovich, 1896.2.26~1948.8.31] 소련의 관료·공산당간부. 1915년 볼셰비키 당원이 되어 1917년 10월혁명 이후로 계속 승진을 거듭했다. 마침내 레닌그라드의 정치적 지도자가 되어 1941~44년 독일군의 포위공격 때 레닌그라드의 방어를 지휘했다. 스탈린의 절친한 동료로서 제2차 세계대전 후 정치적 지위가 가장 높이 올랐다. 1939년부터 정치국 정위원이 된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후의 문화활동을 위한 이념적 지침을 엄격하게 강화했다(→ 주다노프 정풍운동). 1947년 국제 소비에트 선전국인 코민포름의 창설을 주도했다. 1948년 주다노프는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그 사건은 그의 동맹자들과 추종자들에게는 불길한 사건이 되었으며, 그가 죽은 뒤 바로 악명 높은 레닌그라드 사건이 일어났다. 그의 정적인 G. M. 말렌코프와 L. P. 베리아의 공작이라고 여겨지는 이 사건에서 주다노프의 동료들과 부하들이 상당수 포함된 2,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숙청되었다 (→ 레닌그라드 사건). /브리태니커
1887 - 미국의 프로 야구 선수 그로버 알렉산더(Alexander, Grover) 출생 알렉산더 [Alexander, Grover Cleveland, 1887.2.26~1950.11.4] [역사 속의 인물] 알코올중독자 투수 알렉산더 요즘 운동선수들은 전부 애국자인 듯하다. 국제대회 우승은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지만, 병역면제를 받을 만한 성적을 올리고 선수들이 미칠 듯이 기뻐할 때는 박수와 함께 씁쓸함을 동시에 느끼곤 한다. 자유분방한 미국에서도 예전 운동선수, 연예인도 병역의무에 예외가 없었다. 한국보다 훨씬 더 엄격했다. 전설적인 강타자 타이 콥이 한국전에서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한 것을 비롯해 숱한 연예인, 스포츠 스타들이 전쟁 때마다 입대해 최전선에서 싸웠다. 전설적인 우완 투수 그로버 알렉산더(1887~1950)도 참전 용사였다. 1887년 오늘, 미국 네브래스카주에서 태어나 1911년 필라델피아 필립스에서 데뷔했다. 스피드도 대단했지만 제구력이 완벽했다. 1915~ 17년 3년 연속 30승 이상을 기록했고 90개의 완봉승(메이저리그 역대 2위)을 거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프랑스 전선에서 포격 소리로 인한 신경쇠약으로 알코올 중독자가 됐다. 1926년 월드시리즈 7차전에서 환상적인 투구로 우승을 일궈냈지만 전쟁 후유증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산산이 부서진 채 술과 함께 생애를 마쳤다. 박병선(편집부국장) /매일신문 2011년 02월 26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9360&yy=2011
1869 - 러시아 혁명가, 교육학자 크룹스카야(Krupskaya, Nadezhda) 출생 크룹스카야 [Krupskaya, Nadezhda Konstantinovna, 1869.2.26~1939.2.27] 레닌(Lenin, Vladimir)의 부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 일찍 아버지와 사별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여자 전문학교 재학 중에 마르크스주의 혁명운동에 참가하여 퇴교당한 후, 성인의 야간 일요학교에서 노동자 교육활동에 종사하다가 1896년 체포, 레닌과 함께 시베리아로 유형되어 형지에서 결혼하였다. 1901년 유럽으로 망명하여 교육학의 고전적 사상을 연구하고, 1915년에 《국민교육과 민주주의 Narodnoe obrazovanie i demokratiya》를 저술하였다. 1917년 러시아로 돌아가 11월혁명 이후 교육인민위원부에서 소련 교육정책의 기초를 닦았으며, 사회주의 건설에 필요한 교육의 이론화와 실천에 힘썼다. 저서로는 《레닌에 대한 회상 Vospominaniya o Lenine》(1957) 《교육학 전집 Pedagogicheskive sochineniya》(11권, 1957~1963) 등이 있다. /네이버
1861 - 불가리아 왕 페르디난드(Ferdinand) 출생 페르디난드 [Ferdinand, 1861.2.26~1948.9.10] 페르디난드는 엽관제도를 활용해 불가리아 내정을 굳건히 다졌다. 1908년 10월 5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합병 전야 기회를 이용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불가리아 완전 독립을 선언했으며 왕, 즉 차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제국주의적 야심도 품고 있었던 그는 발칸 동맹의 형성(1912)을 주도했다. 불가리아·세르비아·그리스·몬테네그로(비공식적으로 참여)로 구성된 이 동맹은 유럽 지역에 속한 투르크의 분할을 추구했다(제1차 발칸 전쟁, 1912. 10~1913. 5). 그의 영토적 야심은 승리를 거둔 동맹국들간에 점령된 투르크 영토의 배분 문제를 놓고 의견일치를 보지 못해 좌절되었고, 세르비아와 그리스로 하여금 불가리아에 대항해 동맹을 결성하도록 만들었다. 투르크·루마니아도 참가하게 된 이 동맹에서 패한 불가리아는(제2차 발칸 전쟁, 1913. 6~7) 발칸 인접 국가들과 적대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분노한 페르디난드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불가리아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편에 서서 참여한다는(1915~18) 결정을 내렸다. 불가리아의 군사적 패배(1918)로, 그는 아들 보리스 3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1918. 10. 4). 그뒤 코부르크에서 여생을 보냈다. /브리태니커
1846 - 미국의 정찰병, 들소 사냥꾼 버팔로 빌 코디(Cody, Buffalo Bill) 출생 코디 [Cody, William Frederick 'Buffalo Bill', 1846.2.26~1917.1.10] 미국의 정찰병, 유명한 들소 사냥꾼. 별칭은 Buffalo Bill. 인디언과의 싸움에도 참가한 다채로운 경력의 인물로 꾸민 이야기와 멜로드라마를 통해 미국 서부의 실상과 정취를 극화했다. 뒤에는 화려한 '와일드 웨스트 공연단'을 설립해 국제적인 공연을 벌였다. 1857년 아버지가 죽은 뒤 11세에 캔자스로 가 마차화물운송회사의 기마 전령사로 일했다. 이 회사는 훗날 러셀메이저스앤드워델사로 발전했고 이들은 '포니 속달우편'(Pony Express)을 취급했다. 10대를 넘기기 전에 이미 그는 뛰어난 말몰이꾼이자 사냥꾼, 그리고 인디언과의 싸움에 명수가 되어 있었다. 남북전쟁(1861~65)에 참전한 뒤 군대에 소속된 민간인 정찰병으로, 캔자스의 엘즈워스 요새의 전령사(1866~67)로 일했다. 1867~68년에는 들소를 사냥해 유니언퍼시픽철도 건설 현장의 노동자들에게 공급했다. 8개월간 모두 4,280마리의 들소를 사냥한 후 대평원지역에 최고의 들소 사냥꾼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코디는 정확한 사격술뿐만 아니라 자신이 답사한 광대한 지역을 모두 완벽하게 기억해내는 능력으로 명성을 얻었다. 또한 인디언들의 풍습을 비롯해 그들의 용기와 끈기에 대한 폭넓은 지식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그는 저항을 계속하던 미시시피 강 서쪽의 인디언들을 완전히 진압하는 여러 차례의 작전에 참여하여 미국정부를 위해 일했으며, 특히 제5기병대를 위해 정찰병과 안내인으로 일했다. 1872년 명예 메달을 받았으나 장교도 병사도 아니었다는 이유로(정찰병은 민간인으로 분류되었음) 1916년 취소당했다. 미군 당국은 그가 죽은 뒤인 1989년 그에게 명예 메달을 되돌려주었다. 그는 모두 합해서 16차례의 인디언 전쟁에 참여했다. 그 가운데에는 네브래스카의 수 군(郡)에서 샤이엔족의 전사인 '옐로 헤어'('옐로 핸드'로 잘못 알려져왔음)의 머리 가죽을 벗겨 크게 알려진 적도 있었다(1876. 7. 17). 이러한 무용담은 신문기자들뿐만 아니라 싸구려 작품을 쓰는 작가들에게도 아주 좋은 소재였다. 이들은 거칠게 말을 타며 총쏘는 솜씨가 빠른 코디를 서부의 영웅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같은 작품을 맨 처음으로 쓴 작가 가운데에는 네드 번틀린(필명은 E. Z. C. 저드슨)과 프렌티스 잉그럼이 있었다. 서부의 이야기를 극화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코디는 1872년 번틀린이 쓴 연극 〈초원의 정찰병 The Scouts of the Prairie〉의 주인공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자 쉽게 승낙했다. 연기는 아주 볼품이 없었으나 그는 최고의 연예인이 되었고 관객들도 그에게 열광했다. 공연이 없을 때면 미국 서부로 사냥을 하러온 부유한 동부인들과 유럽 귀족들의 안내를 자주 맡았다. 1883년 코디는 와일드 웨스트 공연단을 조직했다. 이들의 공연에는 떠들썩한 총싸움 장면을 비롯해 들소 사냥, 데드우드(사우스다코타의 인디언 추장)를 잡는 장면, 포니 속달우편 배달부들이 말을 달리는 모습, 그리고 거칠게 말을 모는 카우보이들과 인디언들이 외치는 모습들이 들어가 있었다. 그의 공연에 나온 배우들로는 유명한 장총 명사수인 애니 오클리와 인디언 추장인 시팅 불이 있다. 코디의 공연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으나 경영부실로 그는 이 공연 사업으로 얻은 재산을 모두 날렸다. 죽기 바로 2개월 전에 버지니아 주 포츠머스에서 마지막으로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브리태니커
1815 - 나폴레옹, 귀양지 엘바섬에서 탈출 [책갈피 속의 오늘]1815년 나폴레옹 엘바섬 탈출 프랑스는 ‘역사의 공기’가 희박해질 때마다, 그래서 질식할 지경이 되면 그를 찾았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사그라질 때면 역사 속에서 그를 뒤적였다. 그가 거두었던 수많은 승리는 ‘프랑스의 영광’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는 시대(時代)의 아들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없었다면 나폴레옹도 없었다.’ 그는 정복자이자 해방자였다. 그는 자신의 말발굽 아래 프랑스혁명의 이념을 전파했다. 그 질곡의 ‘앙시앵 레짐’에 자유, 평등, 박애의 씨앗을 뿌렸다. 그 정치적 산물이 ‘나폴레옹 법전’이다. 법 앞에서 만인의 평등, 종교 선택의 자유, 재산권 보장, 농노제 폐지…. 그는 혁명의 구호를 현실에서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야심가였다. 프랑스혁명의 다시없는 상속자이면서 동시에 혁명의 열매를 ‘훔친’ 독재자였다. “그는 왕좌가 아니면 단두대 외에는 머물 생각이 없었다.”(앙드레 모루아) 다양한 분야에 걸친 그의 유산은 보나파르티즘이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귀결된다. 그는 역사의 격동기에 사상적 차이와 종교적 갈등을 공화국의 단일성이라는 최고의 가치 속에 묻었다. “나는 프랑스 인민이라는 가장 큰 당파에 속한다. 나는 ‘붉은 모자’를 쓴 혁명가도 아니고, ‘붉은 구두’를 신은 귀족도 아니다.” 그의 전기를 집필한 막스 갈로는 나폴레옹이 근대인의 정치적 갈망의 심장에 자리 잡은 그 무엇이었다고 말한다. “풍문과 우연만으로 영웅은 탄생하지 않는다.” ‘왕관을 쓴 혁명.’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1804년 그가 황제에 즉위하자 베토벤은 “인민의 주권자도 역시 속물이었다”고 비난했다. 역사는 그가 무모한 러시아 원정으로 45만명의 인명을 희생시킨 독재자로 지목한다. “나폴레옹이 자유에 반대한 ‘카이사르’임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된다.” 1815년 엘바섬에서 탈출한 나폴레옹은 그해 워털루전투에서 패배한 뒤 절해고도 세인트 헬레나에 유배된다. 이 ‘코르시카의 늑대’는 숨질 때까지 처절한 고독 속에서 시간이라는 괴물과 싸우며 우울한 내면 속으로 풍화되어 갔다. 마지막 순간 그는 이렇게 읊조린다. “내 인생은 얼마나 멋진 소설 같았던가….”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동아닷컴 2004-02-25 18:46:00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20040225/8033550/1
- Daumier - 'Crispin and Scapin'
- 'Train Compartment' - 'The Dream'
1808 - 프랑스의 화가, 판화가 오노레 도미에(Daumier, Honoré) 출생 도미에 [Daumier, Honoré, 1808.2.26(20)~1879.2.11(10)] 프랑스의 화가 ·판화가. 5세 때 유리직공이며 시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이주하였다. 어려서부터 공증인 사무실의 급사나 서점 점원 일을 하며 고생하였으나, 화가를 지망하여 석판화 기술을 습득하였다. 1830년 《카리카튀르》지 창간에 즈음하여, 이 잡지의 만화기고가로 화단에 데뷔하였고, 1832년 국왕 루이 필리프를 공격하는 정치만화를 기고하여 투옥되었다. 1835년 언론탄압에 의한 이 잡지의 발행금지 후에는 사회 ·풍속 만화로 전환하여, 주로 《샤리바리》 지상에서 활약하였는데, 분노와 고통을 호소하는 민중의 진정한 모습을 때로는 휴머니스틱하게, 때로는 풍자적인 유머를 담아 그렸다. 그 후 40년간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생태를 풍자하였다. 그의 석판화 제작량은 통산 4,000점에 이르고, 이 밖에 목판화가 있다. 40세경부터는 서민의 일상생활을 주제로 한 유화나 수채화 연작을 시도, 날카로운 성격묘사와 명암대조를 교묘히 융합시킨 이색적인 화풍으로 《세탁하는 여인》《3등열차》《관극(觀劇)》《돈키호테》 등 걸작을 남겼다. 석판화의 대표작은 《로베르 마케르》이다. 그의 유화나 수채화는 그가 죽을 때까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죽기 1년 전인 1878년에야 첫 개인전을 열었으나 거의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 게다가 만년에는 거의 실명상태로 친구가 제공한 발몽두아의 조그만 집에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네이버
위고 [Hugo, Victor-Marie, 1802.2.26~1885.5.22] [역사속의 인물] 佛 문호 빅토르 위고 탄생 자신이 가장 힘들고 비참하다고 느낄 때 저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1802년 오늘 태어난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가 바로 그러하다. 그의 걸작 대부분은 망명생활 중에 쓰여졌다. 소설 '레 미제라블' '바다의 노동자', 시집 '명상시집' 등은 영국 해협의 저지섬과 건지섬을 전전하면서 나왔다. 19년간의 고통스런 망명생활을 풍성한 수확의 시기로 승화시켰다. 그는 20세에 문필활동을 시작, 낭만주의 운동을 이끌며 20년 가까이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다 10여년간 절필하고 정치활동에 전념했으나 1851년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반대해 국외로 추방당했다. 나폴레옹 3세 몰락과 함께 공화주의의 옹호자로서 민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 파리로 돌아왔다. 영예로운 말년을 보내다 1885년 사망했을 때 국장(國葬) 수준의 장례식이 치러졌다. 그가 고통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작품 곳곳에서 보여주듯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이상적인 사회건설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병선 사회1부장 lala@msnet.co.kr /매일신문 2009년 02월 26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8922&yy=2009 "세상의 모든 군대보다도 강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제 때를 만난 사상이다. " - 빅토르 위고
- '103위 성인상', 문학진 작, 혜화동성당 소장
이승훈 [李承薰, 1756~1801.2.26] 정약종 [丁若鍾, 1760~1801.2.26] 한국 최초의 천주교신자 이승훈 사형(순교) 1801년 2월26일, 이승훈, 정약종 등 초창기 천주교 지도자 6명이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서소문 밖 네거리(지금의 서소문공원)에서 참수됐다.
1786 - 프랑스의 물리학자 프랑수아 아라고(Arago, Francois) 출생 아라고 [Arago, (Dominique-)Francois(-Jean), 1786.2.26~1853.10.2] 에스타젤 출생. 파리 에콜폴리테크니크에서 공부했고, 처음에는 위도측정원(緯度測定員)으로 일했다. 1809년 과학아카데미 회원에 선출되고, G.몽즈의 뒤를 이어 에콜폴리테크니크의 수학 및 측지학 교수가 되었으며, 동시에 천문대 간부를 겸하고 1830년 그 대장이 되었다. 열렬한 공화주의자로서 7월혁명(1830) 후 하원의원이 되었고, 2월혁명(1848)의 성공으로 육해군장관으로 근무하던 중 1852년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가 일어나자, 이듬해 이에 대항하던 중 파리에서 병사하였다. 광학 분야에서는 파동설(波動說)의 입장에 서서 A.J.프레넬을 지지하고, 편광의 연구를 진행, 편광면의 회전, 굴절광의 기울기를 확인, 복굴절(複屈折)로부터 광선은 횡파(橫波)임을 발표했다. 또한 파동설을 검증하려고 회전거울을 이용 광속도측정을 제안했으나, 이것은 후에 J.푸코가 실지로 측정하여 입자설을 뒷받침하는 학설이 되었다. 전자기학에서는 솔레노이드 안의 철의 자성화에서 시작, 1820년 전류의 자기작용(磁氣作用)을 조사했고, 1824년 ‘아라고의 원판’이라고 하는 맴돌이전류현상을 발견했다. M.패러데이는 이 맴돌이전류를 실마리로 하여 전자기반응을 연구하여, 전자기학을 개척했다. 과학사가로서도 알려져 있고, 게이뤼삭과 공동으로 학회지 편집을 담당하는 등 학계에 크게 공헌하였다.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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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