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2/28
"우표에서 얻은 지식이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많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
2008 - [뉴욕필 서울공연] 서울 공연도 감동·환희 [뉴욕필 평양·서울공연] 서울 공연도 감동·환희… 국민일보 주최 예술의 전당서 음악을 통한 남북 화해와 세계 평화를 위해 한반도 여정에 나선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평양·서울 공연이 성황리에 끝났다. 뉴욕필은 평양과 서울에서 선보인 아름다운 클래식의 선율을 통해 전 세계에 인류애, 평화, 화합, 대화, 문화교류의 중요성을 웅변적으로 알렸다.
- 대한민국 최초 우주인 탄생 (2008.4.8. 발행)
2007 - 우주인 후보 2명 러시아로 출국 우주인 후보 28일 러시아 출국 한국인 우주인 후보 고산(30)·이소연(28)씨가 28일 1년 동안 우주인 훈련을 받기 위해 러시아로 출국한다. 과학기술부와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은 27일 “우주인 후보 2명이 다음달 7일 러시아 가가린 우주인 훈련센터에 입소해 내년 3월까지 우주비행에 필요한 각종 훈련과 소양 교육을 받기 위해 28일 출국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소유즈호 및 국제우주정거장에서의 행동 훈련, 생존 및 우주적응 훈련, 과학임무 훈련, 러시아어 교육 등을 모두 1800여시간에 걸쳐 받는다. 고씨는 출국에 앞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첫 한국 우주인 사업이 성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특히 어린이들에게 훈련과정이 소개돼 우주인의 꿈을 품을 수 있도록 하는 뜻깊은 1년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씨는 “걱정에 앞서 흥분과 기대가 훨씬 더 크다”며 “최종 후보로 선발될지 여부에 상관없이 초심을 잃지 않고 열심히 훈련을 받을 생각이다”라고 했다. 한국 우주인은 내년 3월께 훈련을 마치고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우주발사장으로 이동해 4월8일께 우주선 소유스호를 타고 국제우주정거장(ISS)으로 날아가 7~8일 동안 각종 과학실험과 우주인 임무를 수행한 뒤 4월19일께 캡슐에 실려 낙하산을 탄 채 초원에 떨어지는 방식으로 지구로 귀환한다. 이근영 기자 kylee@hani.co.kr /한겨레 2007.02.27 17:52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93193.html
2005 - 한국화가 장우성(張遇聖) 사망 장우성 [張遇聖, 1912.6.22~2005.2.28] 대한민국예술원 원로회원. 호 월전(月田). 경기도 여주 출생. 1933년 육교한어학교(六橋漢語學校)를 졸업하고 1937년 선전(鮮展)에 입선한 후, 1941∼1943년 연속 특선하여 주목받기 시작했다. 1946∼1961년 서울 미술대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1963년 미국 워싱턴에 동양예술학교를 설립, 1964년에는 미국 국무성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69년 한국미술가협회 부이사장, 1970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이사에 취임하고 그해 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또 그해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운영위원이 되고, 1971년부터 홍익대 미술대 교수, 동 미술학부장을 역임했다.
(유관순 열사 영정은 월전 장우성 화백이 제작해 1986년 8월 15일 유관순 열사 추모각에 봉안되었는데, 2007년 2월 28일 석천 윤여환 화백이 그린 새 표준영정을 봉안하였습니다. ^.@)
2003 - 엘살바도르의 대통령 산체스 엘난데스(Sánchez Hernández, Fidel) 사망 산체스 엘난데스 [Sánchez Hernández, Fidel, 1917.7.7~2003.2.28]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스페인어: Fidel Sánchez Hernández)는 1967년부터 1972년까지 엘살바도르의 대통령으로 재임한 인물이다. 군인 출신의 정치가이고, 임기 말 부정선거 혐의로 기소되었다. 엘 디비사데로에서 태어났으며,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후 군인이 되었고, 훌리오 아달베르토 리베라대통령으로부터 내무 장관으로 지명되었다. 1967년 대선에서 승리, 당선되었다. 재임 중 온두라스와 축구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임기 말 벤하민 메히아 대령의 쿠데타로 실각할 위기에 처했지만 살아났다. 하지만 아르투로 아르만도 몰리나를 당선시키기 위해 부정을 저질렀고, 이 혐의로 기소되었다. 2003년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위키백과
국내 이동전화 이용자가 2500만명을 넘어서 국민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이동전화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정보통신부는 2000년 2월 28일 이동전화 신규가입자가 1월보다 118만 3천명 증가한 2542만8천명으로 집계됐다"고 3월 14일 발표했다. 전체 인구의 절반이상(53%)이 이동전화를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동전화 가입자는 1999년 9월 일반전화(시내전화)를 처음으로 앞지른 데 이어 5개월 만에 300만명 이상의 격차를 벌렸다. 이동전화 가입자는 5월말 2732만명까지 증가했으나 6월부터 시작된 이동전화 단말기 보조금 폐지로 6월말에는 100만명 이상이 감소한 2619만명으로 집계됐다. /조선
1992 -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 백범 묘소 참배 백범 김구선생의 암살범인 안두희씨가 3. 1절을 앞둔 1992년 2월 28일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내 김구선생 묘소를 참배했다. 안씨는 묘소앞 대리석 제단에 30여분간 엎드려 오열했으며 참배를 마친 뒤에도 10여분 동안 묘소앞 잔디밭에 누워 흐느꼈다. 안씨는 "전국민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한다"며 "그러나 범행 당시 배후는 없었으며 우발적인 범행이었다"고 부인했다. 참배를 마친 안씨는 "지금까지 네차례 자살을 하려고 했지만 하지 못하고 오늘이야말로 내 제삿날이라는 심정으로 참배했다"고 말했다. 안씨가 김구선생 묘소를 참배한 것은 1949년 김구선생 암살이후 세번째다. 백범 김구선생 암살범인 안두희씨는 1996년 10월 23일 밤 피살당해 사망했다. /조선
1991 - 이라크 항복으로 걸프전 종결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야기된 걸프전이 1991년 2월 28일 이라크의 사실상 완전 항복으로 막을 내렸다.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이날 대이라크 전투행위를 중단한다고 선언한 데 이어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도 이날 이라크군에 전쟁을 중지토록 명령함으로써 걸프전이 사실상 종결됐다. 부시 대통령의 정전 선언 후 걸프전 전 전선에서 총성이 완전히 멈춰 걸프전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2백9일, 전쟁돌입 43일 만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 전쟁에서 다국적군은 이라크에 대해 10만여 회의 공중폭격을 실시해 이라크군 42개 사단가운데 41개 사단을 무력화시켰다. 전쟁 중 이라크가 15만명의 사망자를 낸 데 반해 다국적군은 125명의 사망자만 내 대조를 이뤘다. 전문가들은 이라크의 패인을 제공권 확보 실패와 전자전 장비의 미흡을 들었다. 미국은 전쟁 중 그동안 실전에 배치하지 못한 하이테크 병기를 마음껏 사용해 전쟁 결과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조선
1988.2.28 - 레바논의 작가 미하일 나이미(Naimy, Mikhail) 사망 나이미(나이마) [Naimy(Naima), Mikhail, 1889.10.17(11.22)~1988.2.28] Nouayme, Naimy라고도 씀. 레바논의 문학평론가·극작가·수필가·단편작가. 아랍의 산문소설에 근대적인 사실주의를 도입하는 데 이바지했다. 레바논·팔레스타인·러시아·미국에서 교육을 받았다. 미국 워싱턴주립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뒤 뉴욕에 정착하여 언론인으로 일하는 한편, 미국에서 출판된 아랍어 작품에 대한 평론을 썼고 아랍 작가인 할릴 지브란과 교분을 맺었다. 1932년 그는 존경 받는 작가가 되어 레바논에 돌아와 고향에 정착했다. 단편소설에서 레바논의 사회문제를 이전의 아랍 작가들보다 더 사실적이고 세련된 기법으로 묘사했다. 그의 단편집에는 〈생의 단계들 al-Marāhil〉(1933)·〈옛날 옛적에 Kana ma kāna〉(1937)·〈탈곡장 alBayādir〉(1945)이 있다. 그밖의 뛰어난 저서로는 지극히 주관적으로 쓴 지브란의 전기(1934)와 자서전 〈일흔 Sabun〉(3권, 1959~60)을 들 수 있다. /브리태니커
역사속 오늘[1986년 2월 28일] 팔메 스웨덴 총리 피살 1986년 오늘! 데모에 참가할 정도로 핵 군축과 세계평화에 앞장섰다. /YTN 2011-02-28 월 http://www.ytn.co.kr/article/article_view.php?key= 201102250619113012&s_mcd=0422&s_hcd=
1976 - 미국의 배우 알리 라터(Larter, Ali) 출생 라터 [Larter, Alison Elizabeth "Ali", 1976.2.28~ ] Ali Larter Alison Elizabeth "Ali" Larter (born February 28, 1976) is an American actress. She is perhaps best known for playing the dual roles of Niki Sanders and Tracy Strauss on the NBC science fiction drama Heroes as well as her guest roles on several television shows in the 1990s. Larter's screen debut came in the 1999 film Varsity Blues, followed by the horror films House on Haunted Hill and Final Destination as Clear Rivers. Major supporting roles in the comedy Legally Blonde and the romantic comedy A Lot Like Love led her to lead roles as the titular character in Marigold and in the 2009 thriller Obsessed. Larter achieved wider fame after her portrayal of video game heroine Claire Redfield in the successful films, Resident Evil: Extinction and Resident Evil: Afterlife. Larter's presence in the media is reinforced by her appearances in lists compiled by Maxim, FHM and Stuff as well as People magazine's "Best Dressed List" in 2007. After a three year long relationship with actor Hayes MacArthur, the two married in August 2009 and have a son, Theodore Hayes MacArthur, born December 2010. Early life and modelling http://en.wikipedia.org/wiki/Ali_Larter
1972 - 닉슨 미국 대통령, 중국 지도부와 ‘상하이(上海) 공동성명’ 발표 (발췌) 미국의 외교안보전략은 한마디로, ‘미국을 적대시하는 적성국(敵性國)을 없애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때는 전쟁에서 이김으로써, 2차 대전 직후에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총동원해 적성국을 봉쇄(containment)함으로써, 미국은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려고 했다. 때문에 이 시기 미국은 막대한 군사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70년대 미국은 군사적 긴장도가 높은 봉쇄정책에서 긴장도가 낮은 개입(engagement)정책으로 돌아섰다.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1972년 2월21일에 있었던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이었다.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중국을 방문한 닉슨은 2월28일 중국 지도부와 함께 ‘상하이(上海)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상하이 공동성명은 평화 5원칙과 더불어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한다.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는 대신 미국은 중국과의 군사적 긴장을 줄이고, 여기서 절약된 국력을 미국 경제를 부흥하는데 돌렸다. 이러한 변화를 당시 언론은 ‘데탕트(detente)’라고 불렀다. 미국의 데탕트 외교는 중국이나 소련 같은 적성국가와 교류하며, 그 나라에 조금씩 미국의 체제를 집어넣는 것인데, 이를 학문적으로는 ‘개입정책’이라고 한다. 이후 미국은 개입정책을 지속해 89년엔 동유럽, 91년에는 소련을 붕괴시키고, 미국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은 민주국가로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 [대해부 슈퍼파워 美國軍]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oon@donga.com /신동아 2001년 07월 01일(통권 502 호) 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5/05/24/200505240500011/200505240500011_1.html
정부는 대한항공공사(KAL)를 10년분할 상환조건으로 14억5천3백만원에 한진상사에 정식 불하했다. KAL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던 산업은행은 전격적으로 KAL의 정부주식 1백45만3천주(전체의 96.3%)를 수의계약으로 한진상사에 매각, 2월 28일 신문회관에서 주주총회를 열고 정식운영권을 넘겼다. KAL 주주총회에서 장성환 사장 등 전임원의 사표를 수리하고 새 이사진을 선출했는데 사장과 부사장은 대한항공공사법에 따라 대통령이 임명키로 돼있어 이날 선정하지는 않았으나 회장에는 한진재벌의 총수 조중훈씨가, 사장엔 전명섭씨가, 부사장에는 한진상무 조중건씨가 내정되어 있었다. 한진은 KAL 운영확장을 위해 4발제트 여객기 2대와 DC-9 1대 등 신형여객기를 도입, 본격적인 항공사업에 착수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조선
1967 - 미국의 잡지 발행인, 출판업자 헨리 루스(Luce, Henry) 사망 루스 [Luce, Henry Robinson, 1898.4.3~1967.2.28] 20세기 미국 잡지계의 대부 헨리 루스 사망 미국의 ‘타임’ ‘라이프’ ‘포춘’ 誌 등을 비롯, 수많은 잡지를 창간한 세계적인 잡지왕 헨리 루스가 1967년 2월 28일 향년 68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20세기 미국 신문ㆍ잡지계의 가장 유력한 인물이자 가장 언론적인 존재였다. 1898년 중국 산둥성에서 장로교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4세가 되던 해 미국으로 건너온다.
프라사드 [Prasad, Rajendra, 1884.12.3~1963.2.28] 인도의 정치가. 비하르주(州) 출생. 소지주(小地主)의 아들로 태어나 캘커타대학을 졸업한 후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17년 참파란의 인디고 재배 노동자사건을 계기로 M.간디를 알게 되어 그의 사상에 이끌려서 민족독립운동을 하였으며 이후 간디의 참모로서 국민회의파의 운동에 전렴하였다. 1934년부터 국민회의파 의장에 3선 되었으며, 독립 인도의 헌법기초를 위한 제헌회의의 의장도 지냈다. 독립 후에는 연방의 농업장관, 1950년 대통령이 되었고, 1952년 5월부터 신헌법하의 인도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1962년까지 재임하였다. 국민회의파에서는 항상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네이버
- 4월혁명 1주년 기념 (참고자료)
1960 - 2.28 대구학생의거 2·28 대구학생시위사건 발생
(발췌) 이로써 신탁통치 반대로 결집했던 남한 우익 진영은 단독정부노선과 통일정부노선으로 확연히 갈라섰습니다. 이승만·한민당과 갈라선 김구는 그동안 단선에 반대하고 있던 중도세력과 손을 잡게 됩니다. 이로써 남한 내에서 통일정부를 향한 새로운 흐름을 추동할 남북협상파가 힘을 갖게 됩니다. 1948년 2월 16일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의 김일성·김두봉에게 남북지도자회담을 제안하는 서한을 발송합니다. 김일성에게 보낸 것과 김두봉에게 보낸 것에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그 둘을 종합하면 서한의 요지는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첫째, 민족의 분열과 완전통일을 판가름하는 최후의 순간에 민족국가를 위하여 평생을 노력해온 애국자들이 수수방관해서는 안 된다. 김구와 김규식이 `2월 서신`에서 제안한 남북회담의 특징은 "4김(김구, 김규식, 김두봉,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남북 정치지도자들 간에 정치협상을 하자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남북이 각각 애국정당 대표회의를 소집해 협상대표를 선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김구와 김규식은 회담의 기조를 우리의 일은 우리가 한다는 `자주적 입장`과 더불어 `우방의 호의`를 강조함으로써 결국에는 `유엔감시하의 총선거`를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북한의 입장과 분명히 차이가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김구와 김규식이 북한에 정치협상을 제안해 놓고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단선을 향한 발걸음은 더욱 빨라지고 있었습니다.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접근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하도록 결정하였고, 3월 1일 하지는 선거일자를 5월 10일로 발표합니다. 그러나 2월 28일 김규식은 유엔 소총회 결의에도 불구하고 남북회담을 계속 추진하겠다고 밝혔으며, 김구는 한독당의 3·1절 기념식에서 "38선을 그대로 두고는 민족과 국토를 통일할 수 없다"며 남한 단독선거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피력하게 됩니다. 홍명희도 2월 29일 남한 단독선거 불참을 공식적으로 선언합니다. 동시에 이들은 남북협상을 성사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임영태의 북한역사이야기 /통일뉴스 2001.05.25 12:00:00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199#
1947 - 타이완 2.28 사건 발생 [어제의 오늘]1947년 대만 2·28 대학살 ㆍ국민당 정부 폭정에 항거한 민중 1947년 2월 수만명의 대만 민중이 국민당 정부의 폭정에 항거하다 참혹하게 살해됐다. 2월28일 학살이 시작돼 ‘228사건’으로 부르는 이 대만판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독재 정권 40여년간 금기시되면서 ‘민주화 운동’도 ‘항쟁’도 아닌 ‘사건’으로 남아 있다. 3월4일 천이 총통의 요청으로 국민당 군대가 대만에 상륙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그날 밤 라디오로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군대는 무차별적인 진압에 돌입했다. 통행금지가 내려진 가운데 길거리에 보이는 사람은 그대로 총을 맞고 쓰러졌다. 군인들은 집 안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잡아들였고, 골목에는 시체가 쌓였다. 산으로 도망친 주민들은 추격군에 붙잡혀 죽어갔다. 그해 5월16일까지 대만 전역에서 수만명이 학살됐다. 피해자 규모가 1만~2만명이라는 이야기부터 10만~20만명이라는 추정까지 나온다. 최명애 기자 glaukus@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1-02-27 21:03:3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102272103345&code=100100&s_code=ap005
1944 - 나치 ‘자살폭격대’ 제안 [책갈피 속의 오늘]1944년 나치 ‘자살폭격대’ 제안 한나 라이치(1912∼1979). 그는 세계 최초의 여성 시험비행사로서 숱한 활공 및 비행대회에서 우승했고, 1934년 여성 최고 고도 비행기록을 시작으로 최초로 알프스 산맥을 글라이더로 넘는 등 모두 40여 개의 신기록을 세웠다. 키 145cm, 몸무게 45kg의 왜소한 체격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도전정신과 활화산 같은 정열로 가득했던 그는 어려서부터 비행기를 몰고 아프리카에서 의료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는 꿈을 키워왔다.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90228/8701954/1
1935 - 미국 듀폰사 나일론 개발 성공 듀퐁사 '폴리머 66(나일론)' 개발 1935년 2월 28일 듀퐁사에서 W.H캐러더스가 `폴리머 66(나일론)`을 발명했다. 나일론은 합성고분자 폴리아미드의 총칭으로 아미드결합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슬모양의 고분자이다. 1926년 독일 화학자 H.슈타우딩거의 연구에 자극받아 듀퐁사에서 나일론 연구를 시작했다. 듀퐁사는 1931년 폴리에스테르의 섬유화에 성공했고, 1935년 나일론을 발명했다. 1938년에는 뉴욕세계박람회장에서 그동안의 나일론 연구를 발표하면서, 나일론 스타킹의 판매로 세계최초의 합성섬유가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나일론은 합성섬유 중 최대의 생산액을 보였다. 초창기, 나일론은 양말로 많이 사용되어 인기를 누렸고 그 후 안감, 속옷, 불라우스 등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또 타이어코드, 산업용, 플라스틱 분야에서도 많이 이용되어지고 있다. 나일론, 폴리에스테르, 아크릴은 3대 합성섬유이다. /조선
1935 - 일본의 소설가, 극작가 쓰보우치 쇼요(坪內逍遙) 사망 쓰보우치 쇼요 [坪內逍遙, 1859.6.22~1935.2.28] 일본의 소설가·극작가·문예평론가·영문학자·교육자. 기후현[岐阜縣] 미노가모시[美濃加茂市] 출생. 1883년 도쿄대학 문학부 정치학과 및 이재학과 졸업과 동시에 도쿄 전문학교(早稻田大學의 前身)의 강사가 되었다. 1889년 신소설 《아내》를 발표하여 문단의 선구자가 되었고, 1891년에는 도쿄전문학교 발행의 《와세다 문학[早稻田文學]》을 창간 ·주재하여 동서문명의 조화와 문단의 동향을 밝혔다. 이 무렵에 모리 오가이[森歐外]와의 사이에 몰이상논쟁(沒理想論爭)이 일어났다. 연극개량에 시야를 돌려 희곡 《마키댁(宅)》(1896∼1897)을 발표하자 다카야마 초규[高山樗牛]에게 비판을 당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역사극 논쟁이 일어났고, 이것이 후에 양자간의 역사화(歷史畵) 논쟁으로 이어졌다. 1904년 무용극을 위한 새로운 제안이자, 사극론에 이은 제2의 연극혁신론인 《신악극론(新樂劇論)》을 내놓았고, 이어서 문예협회(1906∼1913)에 거점을 둔 제3의 연극혁신운동인 신극(新劇)운동에 착수, 셰익스피어극 상연을 지도하였다. 그의 필생의 대작업은 시종 연구를 계속한 셰익스피어의 전작번역(全作飜譯)이었으며 1928년에 전40권을 완성하였다. /네이버
- Proclamation of the Egyptian Monarchy
- King Fuad
1922 - 이집트, 영국으로부터 독립 1922년 2월 28일 영국의 보호령이었던 이집트가 공식적으로 독립했다. 이집트는 BC 7세기에 아시리아 침략과 BC 30∼AD 395년에 로마의 점령을 겪은 이후 맘루크 왕조가 지속되면서 아랍화가 완성되었다. 1517년에는 오스만 투르크에 함락되어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의 지배를 받는 속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1798년에 프랑스 군대가 침략해 이집트를 유럽의 정치무대로 끌어들였다. 이후 무하마드 알리가 오스만을 명목상의 종주국으로 하는 왕조를 일으켰으나 지나친 팽창주의 정책으로 인해 이집트는 영국에 막대한 빚을 졌다. 1882년 내란으로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된 이집트는 1914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가 1922년 입헌군주국으로 독립했다. /브리태니커
- 'The Artist's Parents' - 'Swimmer'
- 'Ernst Thaelmann' - They only wanted to learn how to read and write, Nicaragua, 1985~86
1921 - 독일의 화가 빌리 지테(Sitte, Willi) 출생 지테 [Sitte, Willi, 1921.2.28~2013.6.8] Willi Sitte (28 February 1921 – 8 June 2013) was a German painter who was for a long time the president of the East German association of visual artists. Willi Sitte (b Chrastava [Ger. Kratzau], Czechoslovakia [now Czech Republic], 28 Feb 1921). German painter, draughtsman and graphic designer. He began his studies in 1936 at the art school of the North Bohemian Industrial Museum in Liberec (Ger. Reichenberg) and continued at the Hermann G?ring Meisterschule f?r Malerei in Kronenburg on the Eifel. As co-author and signatory of a letter protesting against the school's training methods he was expelled in 1941 and then drafted into military service. He took part in combat between the German Wehrmacht and the USSR, was posted to Italy in 1944 and joined a group of Italian partisans in 1945. In 1946 he returned to his native town via Switzerland and worked there for the Komitee deutscher Antifaschisten. Shortly afterwards he moved to what was then the Soviet-occupied zone of Germany and joined the 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 having become a member of the Kommunistischer Jugendverband in 1936, and then settled in Halle. Both his artistic work and his lifestyle are closely bound up with the political and cultural development of the DDR in all its dogmatic and liberal phases. http://www.answers.com/topic/willi-sitte-2
1919 - 독립선언 장소 변경 [책갈피 속의 오늘]1919년 독립선언 장소 변경 “거사일은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여 독립을 선언한다.”
1919년 2월 24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최린(崔麟) 집에서 천도교와 기독교 대표들 간에 이뤄진 합의. 그러나 그로부터 나흘 뒤인 2월 28일. 독립선언 장소는 서울 종로구 가회동 중국요리점 명월관의 별관인 태화관으로 갑자기 변경됐다. 그 배경과 이유를 놓고 남북한의 역사학자가 토론을 벌인다면 다음과 같지 않을까. 한국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전집과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조선전사(朝鮮全史)’를 토대로 꾸며본 난상 토론. ▽남한 학자=3·1운동 전날인 2월 28일 손병희(孫秉熙) 집에서 민족대표 23인이 참석한 가운데 마지막 사전모임을 열었다. 박희도(朴熙道)가 ‘탑골공원은 군중심리에 의해 폭력화할 우려가 있다’며 장소 변경을 제안했고 참석자 모두가 이에 찬성했다. ▽북한 학자=운동계획을 갑자기 바꾼 것은 무엇보다도 자기들의 ‘독립선언식’ 놀음을 계기로 반일봉기가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일제 탄압의 올가미를 벗어나기 위해 요리점 뒷골방에서 조용히 독립선언식을 진행하려 한 것이다. ▽남=하지만 민족대표들은 2월 28일 모임에서 ‘독립선언 후 일제 경찰이 오더라도 피하지 말고 함께 체포당하여 정정당당하게 경과를 주장할 것’에도 합의했다. ▽북=민족대표란 자들은 독립운동을 자신들의 의도대로 평화적이고 타협적인 ‘독립 청원운동’ 범위에 멈춰 세우려 했다. 그것은 철두철미 반민족적이며 반인민적인 배신행동이다. 그래서 다음 날인 3월 1일 청년학생대표들이 태화관으로 가서 ‘당당한 독립선언을 왜 이런 요리점에서 하는가’라고 추궁하지 않았는가. ▽남=학생대표들이 갑작스러운 장소 변경에 항의하며 민족대표들에게 ‘탑골공원으로 갈 것’을 요청한 것은 맞다. 그러나 민족대표들은 일본 경찰에 에워싸인 채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경찰서로 끌려가면서도 거리의 군중에게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만세를 불렀다. ▽북=민족대표란 자들은 태화관에서 ‘먹자판’을 벌여놓고 독립선언서조차 낭독하지 않았다.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에 스스로 전화를 걸어 일제의 품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민족의 원쑤’들에게 투항해 버린 것이다. 남북한의 대표적인 역사책 내용을 대화 형식으로 바꾼 것뿐인데…. 다 쓰고 나니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은 왜일까요. 내일은 3·1절입니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동아닷컴 2006-02-28 03:08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60228/8279673/1
찰스 스펜서 채플린(Chaplin, Charles Spencer)은 1889년 런던 뮤직홀의 삼류 배우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그가 한살 때 이미 헤어졌으며, 그와 이복형 시드니는 배우였던 어머니 밑에서 자라게 된다. 채플린의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으로 사망했고,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머니는 연극무대에서 들어오는 수입으로 그와 형을 키웠으나 점차 인기가 하락하고 건강이 악화되자, 집안은 급속히 기울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의 정신병 증세는 날로 심해져서 결국 그는 형과 함께 먹을 것을 구하러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http://www.cine21.com/Movies/Mov_Person/person_info.php?id=5466
폴링 [Pauling, Linus (Carl), 1901.2.28~1994.8.19] 라이너스 칼 폴링(Linus Carl Pauling, 1901년 2월 28일 - 1994년 8월 19일)은 노벨 화학상과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미국의 물리화학자이다. DNA의 구조를 밝혀내 노벨상을 받은 제임스 왓슨이 자신이 쓴 《이중 나선(Double Helix)》에서 라이너스 폴링을 "당시 생화학 분야의 권위자였으며, 가장 높은 수준의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그는 분자생물학 분야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962년에는 지표 핵실험을 반대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지금까지 혼자서 노벨상을 두 번 받은 유일한 사람이다. (마리 퀴리는 물리학상을 남편과 함께 받았고 존 바딘은 두 번의 물리학상을 다른 사람과 함께 받았으며 프레데릭 생어는 1980년에 다른 사람과 함께 받았다.) 생애 /위키백과
1897 - 라나발로나 3세 퇴위로 메리나 왕국 멸망 [역사 속의 인물] 마다가스카르 마지막 왕 라나발로나 3세 아프리카 대륙 남동부의 섬나라 마다가스카르는 19세기 말까지 왕국으로 존재했다. 라나발로나 3세는 22세 때인 1883년에 이 나라의 왕이 된 후 선대 여왕인 라나발로나 2세의 전 남편이자 실권자인 라이닐라이아리보니와 정략 결혼했다. 상징적 존재인 여왕은 실권자와 결혼해 권력을 분점, 나라를 다스리는 방식이었다. 라나발로나 3세는 마다가스카르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될 위기에 처하자 영국과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영국은 프랑스의 야욕을 묵인했고 미국은 그녀의 요청을 무시했다. 외교적 노력이 무산되자 마다가스카르 군이 프랑스 군과 전투에 나섰으나 이길 수 없었다. 라나발로나 3세가 재위 14년 만인 1897년 오늘, 왕위에서 물러나면서 마다가스카르 왕국도 멸망했다. 라나발로나 3세는 유폐 생활을 거친 뒤 프랑스의 식민지인 알제리로 추방됐다. 알제리에서 프랑스 정부의 지원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그녀는 고국을 그리워하면서도 프랑스의 파리를 동경했다. 파리를 수 차례 방문, 쇼핑을 즐기며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프랑스 국민들은 그녀에 대해 연민을 느끼며 환대했다. 그녀는 1917년, 57세의 나이로 숨졌다. 김지석/논설위원 /매일신문 2012년 02월 28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4043&yy=2012
바스콘셀로스 [Vasconcelos, José, 1882.2.28~1959.6.30] 그가 쓴 5권의 자서전 〈율리시스 크리올 Ulises Criollo〉(1935)·〈고문 La tormenta〉(1936)·〈재앙 El desastre〉(1938)·〈식민지 총독 El proconsulado〉(1939)·〈불꽃 La flama〉(1959)은 20세기 멕시코에 관한 훌륭한 사회문화적 연구서이다. 또한 축소판 〈멕시코의 율리시스 A Mexican Ulysses〉(1962)도 간행되었다. 변호사였던 바스콘셀로스는 급진파 대통령 후보인 마데로와 빌라를 위해 선거운동을 했다. 멕시코대학교의 총장을 거쳐 문교부장관(1920~24)으로 임명되었는데, 장관 재직시 농촌 학교 프로그램을 확대하는 것을 비롯해 학교 제도의 개혁을 주도했다. 1929년 멕시코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 /브리태니커
- Prehistoric Paintings, Lascaux Cave
브뢰이 [Breuil, Henri(-Edouard-Prosper), 1877.2.28~1961.8.14] 유럽과 아프리카 선사시대 동굴벽화의 권위자로 유명하다. 소르본과 파리 가톨릭 신학연구소에서 교육받았다. 1897년 사제 서품을 받은 직후부터 구석기 예술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해 생애의 대부분을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 북부의 선사예술 연구에 바쳤다. 제2차 세계대전 때와 그뒤에는 아프리카 남부의 예술을 연구했다. 파리의 인류고생물학연구소(1910~)와 콜레주 드 프랑스(1929~47)에서 가르쳤다. 브뢰이는 자신이 직접 그린 동굴벽화와 암각화가 실린 600점이 넘는 저서를 썼다. 주요저서로는 〈알타미라 동굴 La Caverne de Altamira〉(에밀 카르타야크와 공저, 1906)·〈퐁드곰 동굴 La Caverne de Font-de-Gaume〉(루이 카피탕, 드니 페로니와 공저, 1910) ... /브리태니커
Henri-Édouard-Prosper Breuil often referred to as Abbé Breuil (February 28, 1877 - August 14, 1961), was a French archaeologist and paleontologist, famous for his studies of prehistoric cave art, such as that discovered at Altamira and Lascaux. Through his recording of the details of such art he was able to develop a system, which has continued to be useful, to analyze the styles of art and the time periods in which they were produced, as well as interpret the meaning underlying the images. His imaginative writings, combined with beautiful illustrations, inspired readers and were instrumental in bringing the art of ancient peoples to the attention of the world. Unfortunately, in some cases, such as "The White Lady," his imagination went beyond reality, and his interpretation of the artwork was very misleading. Despite such mistakes, Breuil's work has lasting value in its contribution to our appreciation of the art of prehistoric peoples. Through appreciating their art, the lives of these people from the past come to play a role in the advancement of the world as one human family. http://www.newworldencyclopedia.org/entry/Henri_Breuil
그렌펠 [Grenfell, Wilfred, 1865.2.28~1940.10.9] 체셔주 파크게이트 출생. 런던대학을 졸업, 1888년 의사 자격을 획득했다. 1907년 옥스퍼드대학에서 최초의 명예 석사학위를 받았다. 1885년 미국에서 온 전도사 D.L.무디의 영향을 받아 1888년 왕립 원양어부선교단에 참가, 수년간 의료전도에 종사하였다. 1892년 라브라도르 연안 어민의 의료전도사로 선임되어, 첫 2개월 동안에 900명의 진료를 담당하였다. 그의 업적으로 의료뿐만 아니라 교육과 사회복지 사업에도 정부가 원조를 하게 되었고, 1927년에 성 미카엘 성당의 기사(騎士)가 되었다. /naver
1833 - 스위스의 사상가, 법률가 카를 힐티(Hilty, Carl) 출생 힐티 [Hilty, Carl, 1833.2.28~1909.10.12] 베르덴베르크 출생. 독일의 괴팅겐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법률학과 철학강의를 들었다. 1855년 고향인 쿨로 돌아가 18년간 변호사로 활약하였고, 1873년부터 베를린대학에서 헌법과 국제법을 강의하였으며, 1892년 이후는 육군재판장직을 맡았다. 한편 1890년에는 고향의 선거구에서 출마하여 국회의원이 되었고, 또 1909년에는 국제법의 대가로서 헤이그의 국제사법재판소의 스위스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 Guzman Blanco - Martin J. Sanabria 구스만 블랑코 [Guzman Blanco, Antonio, 1829.2.28~1899.7.20] 카라카스 출생. 1870년 쿠데타에 의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1888년까지 대통령으로 재직하였다. 전형적인 라틴아메리카의 군사독재자로서 독재정치를 폈으나 경제개발·무역의 진흥·교육의 보급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1888년 유럽에 머무르고 있는 사이에 쿠데타가 일어나 실각하였다. /naver
르낭 [Renan, (Joseph-)Ernest, 1823.2.28~1892.10.2] 브르타뉴의 고도(古都) 트레기에 출생. H.A.텐과 더불어 프랑스 실증주의(實證主義) 대표자의 한 사람이다. 처음에는 성직을 지망하여 상쉬르피스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헤브라이어 연구에서 성서원전(聖書原典)의 전통적 해석에 의혹을 품고, I.칸트, G.W.F.헤겔의 영향과 A.콩트의 실증주의에 감화를 받아 성직을 단념, 1845년에 학교를 떠났다. 그 후부터 셈어학(語學) ·성서학 ·종교사 연구에 주력하였으며, 특히 실증적인 역사비판의 입장에서 그리스도교의 기원사 저술을 기도하여, 1860∼1861년 시리아로 학술탐험을 감행하였고, 그 후 25년이나 걸려서 그 기원사를 완성시켰다. 청년시절에는 화학자 P.E.M.베르트로와의 교유로 과학에 대한 신념이 자극제가 되어 2월혁명 때 언어학을 중심으로 한 과학 발전에 따른 민주주의적 이상사회 실현에 낙관적인 희망을 피력한 《과학의 미래:Avenir de la Science》(1845)를 저술하였다. 《아베로에스와 아베로이스주의(主義):Averroes et l’averroisme》(1852)로 학위를 받아, 1862년 콜레주 드 프랑스의 헤브라이어 교수가 되었으나, 정통 신앙에 위배되었다는 이유로 한때 파면되고 1871년에 복직, 1884년에는 학장이 되었다. 주요저서인 《그리스도교 기원사:Histoire des origines du christianisme》(7권, 1863∼1883) 중 제1권은 유명한 《예수전(傳) Vie de Jesus》(1863)으로 국내외에 커다란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그리스도교 기원사》는 예수의 인간화, 그리스도교의 문화사적 연구, 성서세계의 심리적 ·문학적 재현에 의의가 있다. 이와 대조가 되는 연구에 《이스라엘 민족사:Histoire du peuple d’Israel》(5권, 1887∼1893)가 있으며,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및 파리 코뮌에 즈음하여 저작한 《프랑스의 지적 ·도덕적 개혁》(1871)과 많은 철학적 에세이 ·문화평론 ·성서연구 및 번역 외에도 유창한 산문으로 르낭의 이름을 떨치게 한 《청소년 시절의 추억:Souvenirs d’enfance et de jeunesse》(1883) 등이 있다. /naver
1820 - 프랑스의 고전비극 여배우 라셸(Rachel) 출생 라셸 [Rachel][Felix, Elisabeth, 1820.2.28~1858.1.3] 본명은 펠릭스(Elisabeth Felix). 가난한 유대인 행상의 집에서 태어나 리옹 가두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10세 때 인정을 받고 음악학교에 입학했다. 그 후 연극으로 전향하여 파리 콩세르바투아르에서 배운 후 코메디프랑세즈에 들어갔다. 1838년 코르네유작(作) 《오라스》의 카뮈역(役)으로 데뷔한 이래, 라신이나 코르네유의 작품을 주로 하였다. 타고난 미모와 조화된 연기, 풍부한 성량, 변화 있는 감정 표현으로 J.T.탈마의 재현이라고 칭송되면서 시들어가던 고전주의 비극을 부활시켰다. 프랑스 각지를 비롯하여 러시아 ·영국을 순연(巡演)하였다. 1855년 미국 공연 후 건강이 악화되어 1856년 이집트 여행을 끝으로 남프랑스에 정착해 그곳에서 죽었다. 서간집을 남겼고, 그녀의 언니 1명, 남동생 1명, 여동생 3명도 모두 배우였다. /naver
라이언 [Lyon, Mary (Mason), 1797.2.28~1849.3.5] 여성 고등교육 분야의 미국인 개척자, 마운트 홀리오크 여자신학교의 설립자·초대학장, 마운트 홀리오크 칼리지의 선구자. 17세 때부터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다. 1817년 실을 잣고 베를 짜서 모은 돈으로 매사추세츠의 애슈필드에 있는 샌더슨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 다니면서 다른 아카데미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교사·행정가로서 성공했고 자신이 가르친 젊은 여성들을 위해 영구적인 여성교육기관을 설립하려는 계획을 가지게 되었다. 같이 공부했던 지리학자 에드워드 히치코크가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1835년 사우스해들리 마을 가까운 곳에 학교 부지를 선정했다. 학교는 1836년 마운트 홀리오크 여자신학교로 인가받았다. 1837년 11월 8일에 개교했고 그녀가 초대 학장이 되어 평생 학장으로 재직했다. /브리태니커
로세티 [Rossetti, Gabriele (Pasquale Giuseppe), 1783.2.28~1854.4.24] 단테 작품에 대한 심오한 해석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가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정치적 망명지인 영국에서 낳은 재능 많은 자녀들 덕분이다.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총명하여 나폴리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1807년에 나폴리의 산 카를로 오페라 하우스에서 오페라 대본작가로 일했으며 그뒤 나폴리에 있는 카포디몬테 국립미술박물관에서 '고대 대리석과 청동관'의 관장으로 근무했다. 1826년 그는 프란세스 메어리 라비니아 폴리도리와 결혼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토스카나 태생으로 영국 가정에 입양되었던 가에타노 폴리도리였으며 이탈리아어를 가르치고 문학가로 활약하던 사람이었다. 그의 4명의 딸들 중 프란세스가 가장 똑똑하고 아름답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로세티는 교수가 되자 동료 망명객들을 맞아들여 이탈리아의 통일자유정부 수립을 위한 홍보활동 등 바쁘게 활동했고, 14세기 이탈리아 민족시인 단테의 저작물을 연구하여 그의 심오한 상징적 의미에 대한 철학·문학 이론서 〈단테의 베아트리체 La Beatrice di Dante〉(1842)를 펴냈다. 이탈리아 시에 대한 사랑과 특히 단테의 작품 〈새로운 삶 La vita nuova〉· 〈신곡 La divina commedia〉에 대한 존경심은 그의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졌다. /브리태니커
- Generals Montcalm and Wolfe
몽칼름 [Montcalm-Grozon, Louis-Joseph de, 1712.2.28~1759.9.14] 샤토드캄디아크 출생. 15세 때 군(軍)에 입대한 후, 폴란드 계승전쟁에 처음 출정하였고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에서도 활약하였다. 1756년 7년전쟁이 일어나자 캐나다의 프랑스군 지휘관이 되어 퀘벡에서 천부적인 대담한 행동으로 오스위고 요새와 윌리엄 헨리 요새를 공략하여 영국군을 격파하였다. 1758년 타이칸달로가를 소수의 병력으로 사수하여 영국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혔으나, 원군(援軍)이 오지 않아 고전하던 끝에 1759년 J.울프 장군의 공격을 받아 퀘벡은 함락되고 몽칼름은 전사하였다. /naver
몽테뉴 [Montaigne, Michel (Eyquem) de, 1533.2.28~1592.9.13] 프랑스 남부 페리고르 지방의 몽테뉴성(Montaigne城:현재의 생 미세르 드 몽테뉴 마을) 출생. 프랑스의 르네상스기(期)를 대표하는 철학자 ·문학자이며 《수상록 Les Essais》의 저자이다. 대대로 보르도에서 살았던 부유한 상인 가문으로 에이켐을 성으로 삼았다가 증조부 라몽 에이켐 때 몽트라베르 남작령(男爵領)에 속하는 몽테뉴성과 그 영지를 매수하여 귀족이 되었다. 아버지 피에르는 프랑스와 1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종군한 군인으로 문예 애호가이기도 하며, 만년에 보르도 시장에 선출되었다. 어머니의 가계는 포르투갈계(系) 유대인의 피를 받았다고 한다. 몽테뉴는 어려서 라틴어 교육을 받았고, 1554년 페리그 재판소에 근무하여 1557년 보르도 고등법원 참사관이 되었다. 그는 때때로 궁정에 찾아가 프랑스와 2세, 샤를 9세의 신임을 얻었다. 1565년 프랑수아즈 드 라 샤세뉴와 결혼, 156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몽테뉴 영주가 되었다. 아버지의 명으로 번역한 15세기 에스파냐 신학자 레이몽 스봉의 《자연신학(自然神學)》을 1569년에 간행하였다. 1571년 37세로 법관생활에서 물러나 독서와 저작 생활로 들어갈 결심을 하였으나, 신 ·구파의 종교전쟁에 휩쓸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1577년 나바르왕 앙리(뒤의 앙리 4세)의 시종이 되었다. 1580년 써 모은 수필을 간추려 《수상록》(2권)을 보르도에서 간행하였다. 이 해 신장결석(腎臟結石) 치료를 겸하여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관광길에 올라 1년 반을 외국에서 보냈다. 이 여행에서 《여행기 Journal de voyage》(1774)가 나왔다. 여행 중에 보르도 시장에 선출된 것을 알고 1581년 말 귀국하였다. 1583년 보르도 시장에 재선되었으나 종교적 내란과 페스트의 유행 등 많은 난국을 맞았다. 1586년에 몽테뉴성으로 돌아가 《수상록》에 증보와 수정을 가하고, 다시 제3권의 수필을 새로 집필하여 1588년 파리에서 《수상록》(3권)을 출판하였다. 그가 ‘결연(結緣)의 딸’이라고 부르기까지 한 구르네와 알게 된 것도 이 해이다. 만년에는 앙리 4세로부터 궁정 출사(出仕)를 간청받았으나 굳이 사양하고 《수상록》 가필(加筆)에 착수하여 죽을 때까지 계속하였다. 그는 처음에 금욕적(禁慾的) 인생관에 호의를 가진 듯이 보였으나, 중도에는 온건한 회의론에 기울어 ‘나는 무엇을 아는가?(Que Sais Je?)’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와 동시에 루크레티우스를 통하여 에피쿠로스의 자연주의에도 공명하였다. 그러나 후기에는 자기의 체험과 독서생활을 근거로, 있는 그대로의 인간, 변천하는 대로의 인간을 그려, 자연에 대하여 단순히 몸을 맡기는 데에 인생의 지혜를 추구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 그르네는 그가 마지막 손질한 것을 기초로 하여 《수상록》의 신판을 펴냈다. 그는 이 《수상록》(3권)으로 프랑스에 모랄리스트의 전통을 구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이래의 프랑스 문학, 유럽 각국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B.파스칼은 몽테뉴의 인생관을 비판하면서도 인간을 관찰하는 점에서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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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