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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시와 좋은글。 스크랩 밥 / 정진규
풀잎 추천 0 조회 14 13.12.20 13:1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밥 / 정진규

 

이런 말씀이 다른 나라에도 있을까

이젠 겨우 밥이나 좀 먹게 되었다는 말씀, 그 겸허, 실은 쓸쓸한 安分,

그 밥, 우리나란 아직도 밥이다 밥을 먹는게 살아가는 일의 모두,조금 슬프다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 어머니께서도 길떠난 나를 위해 돌아오지 않는 나를 위해

언제나 한 그릇 나의 밥을 나의 밥그릇을 채워놓고 계셨다 기다리셨다

저승에서도 그렇게 하고 계실 것이다

우리나란 사랑도 밥이다 이토록 밥이다 하얀 쌀밥이면 더욱 좋다

나도 이젠 밥이나 좀 먹게 되었다 어머니 제삿날이면 하얀 쌀밥 한 그릇 지어올린다

오늘은 나의 사랑하는 부처님과 예수님께 나의 밥을 나누어 드리고 싶다

부처님과 예수님이 겸상으로 밥을 드시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분들은 자주 밥알을 흘리실 것 같다 숫가락질이 젓가락질이 서투르실 것 같다

다 내어주시고 그분들의 쌀독은 늘 비어 있었을 터이니까 늘 시장하셨을 터이니까

밥을 드신지가 한참 되었을 터이니까

 

- 한국시인협회 1986년 사화집

............................................................

 

 기둥시계의 동력을 공급해 주는 일, 즉 태엽을 감아주는 일이 밥을 준다는 말과 동의어임을 우습고 의아하게 생각했던 어릴 적 기억이 있다. 그 후 별 의심 없이 그 말은 우리의 보편적 감성에 편입되어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되어 왔는데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넘어 요즘엔 밥줄 시계가 거의 사라진 듯하다. 가만 보면 순우리말에는 중요한 사물일수록 한 음절이라는 사실, 밥 물 술 떡 피 돈 똥 해 달 별 땅 눈 코 귀 입 손 발 꽃 말 새 밤 낮 잠 길 비 눈 빛 불....이 가운데서도 으뜸 중요한 것이 아마도 밥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지하 시인 말마따나 인류활동의 모든 것은 '제사'와 '식사'인데, 제사가 식사이며 식사가 바로 제사로서 이는 '밥'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활동이라 할 수 있겠다.

 

 정진규 시인은 진작 몸을 시적 인식의 바탕으로 삼고 '몸시' 연작을 내놓은 바 있다. 이 '밥시'도 그 갈래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겠다. 달관이 엿보이는 시들은 몸을 기축으로 한 본능적인 시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는데, 그의 시정신은 자연스럽게 도달한 생의 율려, 즉 생명 리듬의 언어적 실현인 것이다. 생각과 감정과 느낌의 총체인 몸과 그 몸을 떠받들고 지탱하는 밥은 인식의 발원이자 결과로 이해된다. 흔히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란 말이나 '이젠 겨우 밥이나 좀 먹게 되었다는 말씀'은 모두 본능적인 몸의 언어일 것이다. '우리나란 사랑도 밥이'고 밥은 곧 하늘이다. 여전히 한반도는 마른논에 물들어가는 것과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게 세상에서 가장 보기 좋은 풍경인 땅이다.

 

 밥은 삶의 모두이면서 요구이자 희망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다른 무엇보다도 밥은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한다. 김일성이 패기 넘칠 때 인민들에게 '이밥에 소고기국을 날마다 먹이는 게 최대 소원이며 과제'라고 자주 말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 북의 현실은 그와 너무나 멀리 있다. 물론 남한이라고 다들 배를 두드리는 상황은 아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이젠 밥이나 좀 먹게 되었'으니 '부처님과 예수님께 나의 밥을 나누어 드리고 싶다'고 한다. 부처님과 예수님이 겸상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대목에서 민족화합은 물론 21세기의 인류문화사적 중요 과제 가운데 하나인 종교와 종교 간의 화해가 염원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런 대동화해가 실현된다면야 민족의 통일도 인류의 평화도 머지않으리라 여겨지지만...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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