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님, 이번 국장급 인사는 기자실서 하겠습니다"
- 196,70년대 한국 언론 기자실 풍속도 그 회고와 체험적 단상
작금 활자매체나 전파매체 또는 인터넷 매체의 신문 방송 등 각종 매스 미디어나 매스컴들이
자주 페이크 뉴스나 편향보도 또는 과장이나 오보를 일삼는다 해서 너무나 모욕적인 '기레기'라는
말로 기자들을 입에도 못 담을 어휘로 폄하하고 있음에 즈음하여, 1960년대 후반서 70년대
전반에 걸쳐 '종이쟁이(?)'를 한 경험이 있는 필자에겐 남달리 느끼는 실망이 참으로 크고
또한 안타깝기 짝이 없다. 무관의 제왕이니 사회의 거울이니 민중의 지팡이니 하며 신망받던
기자직이 사이비 기자인양 매도되어 선망은 커녕 권언유착이나 권력의 시녀라는 비아냥으로
내몰리며 나락으로 떨어진 배경에는 물론 자업자득이란 비판과 스스로 성찰의 여지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이는 직업의 특성과 언론의 속성을 고려하지 않은 이해의 부족이란 측면도
엄연히 존재함을 차제에 강변하고 싶다.
거의가 원초적으로 매스컴과 언론을 통해서 알게 된 뉴스나 지식 습득의 고마움은 금세
잊고 자기 중심으로 관심이 있거나 우호적인 집단이나 자기 편의 유불리나 득실에 따라
언론을 평가하는 이기주의적 발로가 지배적인 측면도 있다는 게 필자의 소신이다.
이는 영국의 전국 유력지 The Times나 The Guardian, The Sun,Daily Mail, Financial Times 및
Daily Mirror, The Independent 등의 1면 톱 기사, 헤드라인이 똑 같은 날은 거의 없다는 데서
찾을 수도 있다. 각 신문마다 정치 이념이 다르고 같은 보도자료라도 각기 논조가 다르기 때문이고 이념
성향과 소득 수준에 따라 고정 독자층이 있어 입장이 엇갈리는 까닭이다.
그리고 어느덧 필자 생각은 향수가 되어 그 옛날로 달음질 친다. 그때 그시절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단순하게 한때 그런 시절도 있었다는 아스라한 추억의 소야곡 같은 것. 1972년 쯤일까? 필자가 교통부를
출입하던 시절, 출입기자 27명을 대표하는 D일보 소속 L간사가 어느날, 당시 장성환(張盛煥) 공군참모
총장 출신 장관의 바톤을 이어 받아 역임 뒤 최경록(崔慶祿) 육군참모총장 출신 장관에게 바톤을 넘긴,
공군참모총장 출신으로 입각한 김구(金九) 선생의 둘째 아들, 제21대 김신(金信) 교통부장관과 예하
국장들이 배석한 출입기자단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장관님, 이번 국장급 인사는 기자실에서 하겠습니다"
라는 진담같은 농담이 예사롭던 옛 기자실의 풍속도에 놀라 어안이 벙벙했던 기억이 엊그제 같다.
따라서 1960년대, 지금으로부터 50여년전의 대한민국의 중앙부처 기자실과 기자단에 대해 가끔
회상하며 싱긋이 웃는 버릇이 생겼고 차제에 옛 기자실 풍경을 추억하는 마음에서 당시의 실상을
되돌아 보고싶다. 그때는 약관 20대에도 장관부처에 출입하게 되면 기자증 하나로도 특혜받는
프리미엄이 제법 많았었다. 왼손으로 양담배를 입에 물고 오른손으로 국산품 애용을 강조했던 당시
기자들 속성을 시대가 달라졌다고크게 욕할 생각은 없다. 당시는 자기가 커버하는 부처와 관련된 소관 업무는
물론 그 외에도 기자신분증을 슬쩍 보이곤 무소불위로 어디건 마음대로 드나들며 거드름을 피우는 경우가
적지 않아 "기자면 다냐?" 가 유행했던 시절이었다. 특히 문화행사나 공연장 같은 곳은 취재를 핑계로 자기 뿐만
아니라 덤으로 몇몇사람을 달고 가기도 일쑤였으니 지금 돌이켜 보면 어처구니가 없지만 이같은 사례들은
공공연히 자행됐던 웃지 못 할 풍습이요 관행이었다.
그 대신 본연의 업무인 취재 활동은 열악한 여건으로 어려움이 많았고 출입처마다 분야별 전문지식의
단기간 습득에 피가 말랐고 발로만 뛰던 기자들에겐 이동에 따른 위험도 많아 1단짜리 기사 한줄(당시
신문 한면은 세로 총 17단에 1단의 제목은 6자 내지 8자에 본문 활자수는 13자)을 취재하기 위해 가까운
곳은 두 발로 걷고 먼 곳은 어렵게 배차를 받아, 신문사 사기(社旗)를 휘날리며 취재 현장으로 단숨에
달려가야 했다. 취재를 하고 나선 데드라인에 맞춰 대개의 경우 내근자에게 전화로 송고를 하거나 귀사를
해서 기사를 썼다. 핸드폰과 노트북이 있고 각종 송수신 기기가 즐비한 데다가 사무실만 지키고 있어도
귀찮을 정도로 각종 관련 뉴스나 보도자료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지금에 비하면 정말 호랑이
담배피우는 아득히 먼 얘기임에 틀림없다.
필자가 출발한 60년대 후반의 기자실(記者室) 또는 프레스룸(Press Room)은 중앙의 장관부처
또는 차관급 청단위와 정당, 대형 국영기업, 민간 대기업, 금융단, 일선 경찰서 등이 취재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해준 장소로 1920년부터 일본의 기자클럽 영향을 받아 출입처를 가진
기자들이 결성하여 출입기자단 또는 출입처 기자단으로 불리며 설치됐다.
이어 5.16 이후 박정희 정부가 효율적인 언론을 통한 정책 홍보를 위해 1963년청와대에
기자실을 설치하고 아그레망(agrément)을 통해 출입기자를 제한도 한 게 시초였다.
초기엔 청와대에 등록하여 취재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출입기자등록에 관한 규정'에 따라 한국신문
협회와 한국방송협회, 한국기자협회 및 인터넷신문협회, 인터넷기자협회, 한국사진기자협회, 한국TV
카메라기자협회, 한국온라인신문협회, 서울외신기자클럽에 가입한 회원사의 추천을 받아야 했고
2000년대는 정권에 따라서 변화가 심해 기자실을 폐지하고 개방형 브리핑룸제도를 도입했고 이어
기자 전용 춘추관을 만들어 취재를 전면 개방한 것으로 듣고 있다.
초기엔 기자실이 없어 출입 기자들이 대통령 비서실 안으로 들락이며 비서관이나 행정관들의 근무처를 마구
휘젓고 다니며 취재를 하는 바람에 취해진 조치였다. 나아가 청와대는 기존의 언론 정책서 탈피하여 일정한
시간까지 보도를 금지하는 '엠바고(Embargo)' 제도와, 기록에 남기지 않는 비공식 발언은 취재원이 독자나
시청자의 알 권리를 일시적으로 제한하는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 제도와 또 보도진들에게 어떤
상황이나 사건이 벌어지게 된 배경에 대해 취재원을 공개하지 않는 조건으로 브리핑하는 '백그라운드 브리핑
(Background Briefing)' 방식 등 미국식 취재 원칙과 보도 방식을 도입했고 필요시엔 기자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보도자료를 전달하는 방법도 병행했다.
그리고 6, 70년대엔 정부 각 부처의 기자실도 출입기자 중심으로 운영됐다. 그러나 출입기자단이 가입을 허용한
언론사 기자에 한해 이용이 가능케 하는 등 배타적이고도 폐쇄적인 운영이 끊임없이 문제시 됐으나 이 악질적
취재 카르텔 관행은 쉽게 개선되지 않았다. 필자가 일선에서 뛰던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에는 각 부처 출입
기자들이 취재 후 마감 시간에 데스크에 모이면 기자실의 평폐가 화제에서 벗어나는 날이 없었는데 5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지 반세기가 흘렀으니 요즘 사정이 필자에겐 너무나 궁금하고 오로지 도처에 넘쳐나는 각종 정보의
홍수를 접하면 옛날에 사건 사고 현장 또는 완전 봉쇄된 취재원으로부터 한 마디의 말, 한줄의 자료가 아쉬워
정보의 이삭줍기에 목을 매던 시절의 기억이 꿈만 같다.
당시를 돌이켜 보면 뭣 보다, 특히 기자실의 헤게모니는 이를 선점한 몇몇 유력지가 중심이 되어 전횡을 했고
마이너 언론들은 기자실을 맴돌며 눈치나 보고 아예 드나들 엄두도 못냈고 비회원이 간혹 아첨 차원에서 중요
기사나 특종을 취재해서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배당 받은 촌지로 포커를 치고 있는 기세 등등한 고참 기자
들에게 상납을 하거나 아니면 심봤다 촌지 케이스를 만들어 기자실에 연결하기를 거듭하게 되면 시간이 흘러
한 해가 저무는 연말에 마지못해 가끔, 이름하여 '총회'라는 비공개 회의에서 그 공로를 가상히 여겨 가입을
고려하는 예비 명단에 오르게 되고 가입 결정 통지를 받게 되면 무슨 큰 벼슬이라도 한 것처럼 감지덕지 하는
것이 당시 기자실 입단 순서요 풍속도였다.
그리고 당시 기자실 주변은 활자매체인 신문과 통신이 크게 설쳤고 회원자격은 중앙 일간지 유력 언론사의
경우는 기자가 바뀌어도 뒤를 잇는 후임에게 자동 승계가 됐으나 부처에 따라서 방송사들은 끼워주질 않아
별도로 기자실을 운영하기도 했으며 사세가 약한 일부 신문이나 경제지 및 통신사와 지방지 역시 자유로운
기자실 출입은 제약이 많고 굳게 닫힌 심사관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취재 보도 관행도 지금이나 예나 다를
바가 없겠지만 영국의 기자들은 엠바고 위반이나 일방적 편집 보도, 사적인 대화내용 보도 등 언론윤리강령을
위반하는 사레가 드물고 또 기자들이 높은 지식과 전문성을 갖춘 데다가 취재 윤리를 철저히 지키기 때문에
공무원과 언론이 서로 믿고 자연스럽게 접촉하고 또 철저한 준비와 과학적 브리핑 시스템으로 과장 보도나
오보를 예방하기 때문에 우리식의 아니면 말고식의 추측 보도나 악의성 보도는 드물다고 한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이 하늘에 별따기였던 60년대 후반, 특히 인문계 전공의 경우 법정계나
경상계 외에는 입사 원서 내기도 힘들던 시절, 유독 전공에 관계없이 응시가 가능한 분야가 언론계이고
보니 많아야 여나믄명 뽑는데 너나 없이 수만명이 몰리는 도떼기 판이 된다. 필자도 1차 서류, 2차
영어 국어 상식, 3차 기사 작성, 4차 면접에 걸친 관문에서 운좋게 공채 3기로 턱걸이 합격은 했으나
첫 월급은 지금도 잊혀지지도 않는 '일금 7,000원'이 매월 거르지 않고 제때에 나오니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는
수습기자 시절이 그래도 무척이나 신이 났던 기억이다.
편집부와 교정부 지방부에서 문선과 지형을 배우고 윤전기 도는 모습을 견학하며 내근을 하다가
다행스럽게 외근 기회가 주어졌다. 수습기자들은 새벽 공기를 가르며 제일 먼저 출이하는 곳이
간밤에 백차에 실려온 잡범이나 취객들, 밤의 여인들이 실려와 소란을 피우는 험악하고 시끄러운
난장판 분위기에서 길들여지게 일선 경찰서를 먼저 출입시켜 소위 '사스마와리(察廻)' 라는 과정을
거치는 것을 철저한 원칙으로 삼는 루틴 신고식을 해야 했다.
6개월 수습기간을 거친 후 어느날 필자에게도 외근 취재부 기자로 활동할 출입처가 배정됐다.
첫 출입처는 육사교장, 상공장관, 국방장관과 국회의장을 지낸바 있는 정래혁(丁來赫) 예비역 장군이
수장으로 있는 최대 국영기업체 한국전력이었다. 당시 이낙선(李洛善) 상공부 장관 시절
외청인 표준국, 계량국, 특허국과 국립공업연구소를 커버하며 한전을 출입하게 되니 공보관실이 있어
쉴 수도 있고 취재기자들을 위해 여러 편의도 제공됐다.
겨우 한 살 위로 ROTC 1기로 후배들 군기를 잡으려는 상공부 본부를 출입하는 1기생 배병휴(裵秉烋)
선배 기자의 눈에 들려고 하늘같이 모셨고 담배를 물면 서로 먼저 라이트를 켜 대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기억이 떠오른다. 배 선배 대타로 최초의 차관기업 울산의 한국알미늄 준공식에
수영비행장을 거쳐 박정희 대통령을 수행한 절호는 지금 생각해도 가문의 영광, 텔레비전 뉴스에 수행하는
필자 모습을 본 고향 부모들은 크게 출세나 한 줄 알고 야단이셨던 기억 또한 새롭다.
배 선배는 당시 상공부 출입기자실에서는 기사 잘 쓰기로 정평이 나있는 민완 기자로 명성이 정말 대단했다.
그리고 당시는 원전 보다 수력과 화력발전 시설이 많아 출입처의 시설 견학 삼아 곳곳에 흩어져 있는 발전
설비를 제법 상당한 출입기자 대접을 받으며 답습했다. 제2의 태양으로 일컫는 전력에 대한 '발전과 송전과
배전'에 관한 현장 학습을 통한 체계적 전기 현장 공부가 재미있기도 했다. 그러나 기자단의 일원으로 출입을
계속하며, 비록 술밖에 배운 게 없다손쳐도 '언론고시'를 패스했다는 자부심으로 취재에 열중하는 막내격
필자의 눈에는 선배 기자들이 농담으로라도 취재보다 젯밥에 관심이 더 많아 보였다. 함께 혜택을 받을 때
처음엔 두렵기도 했으나 나중엔 스스럼 없이 동화되게 마련이었다. 심지어 사람 좋기로 이름난 어느 선배가
취재대상 고위 간부들이 독식으로 삼키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면 목안으로 넘어가기 전에 되돌려 일정
몫을 기자와 나눠 가져야 한다고 이르던 농담은 지금도 기억에 짠하다.
아들을 낳으면 기자를 시키되 딸을 낳으면 기자에겐 절대 시집을 보내지 말라는 아이러니는 차치하고
기자란 직종이 꼭 필요하며 사회의 온갖 면을 전방위로 비쳐주는 사회의 거울이 신문이나 방송 등 활자매체나
전파매체를 통해 메시지를 전하는 매스컴이고 보면 언론의 순기능적인 사명감이나 정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모지람이 없겠지만 그 역기능을 부각시켜 부정적으로 몰아가는 소위 '기레기'란 폄훼성 표현으로 매도하는
식의 언론관은 과감히 배제돼야 한다는 게 평소 필자의 소신이라고 모두에 밝혔듯 이 졸고에서는 오로지 50년
전을 추억하며 회고하는 에세이적 낙서 삼아 지난 날을 회고하는 시간으로 2회에 걸쳐 희미한 기억을
더듬으며 독자와 함께 옛 추억의 오솔길을 걸어 보기로 한다.
한전에 이어 경제지의 특성으로 해서 관세업무에 관심이 많던 필자는 다음 출입처로, 제주지검장 출신으로
대통령이 점지한 이택규(李宅珪) 검사가 초대 청장을 맡은 관세청을 출입하며 송병순(宋炳循/한해대조선4기)
세무국장과 오순희(吳淳熙/한해대항해10기) 부산세관장, 김동수(金東洙/한해대기관13기) 사무관을 만나
관세청 기사 많이 쓴다고 총애를 받으며 기자실에서 크게 환영받던 생각이 난다. 이 청장은 일선세관 순시를
갈 때에는 단신인 청장 신장에 딱 어울리는 탓인지 기자실 최단신 필자를 기자실을 대표해서 부산세관을
시발점으로 세관 감시선을 타고 마산과 여수세관을 거쳐 충무출장소까지를 한바퀴 돌던 일정도 기억에 떠
오른다. 마침 파독 간호사로 도이치 마르크를 벌러 갔다 귀국한 지금의 옆방 권사를 알게된 터라 인천
세관이 이삿짐을 일사천리로 통관시켜 안방까지 실어다주는 특혜를 받은 게 기억에 남고 관세청장과 세관
순시를 할 때마다 뒷 포켓에 집혔던 촌지는 그 시절 관례였기에 오프 더 레코드로 해야겠다.
이어 부산시장서 옮겨 앉은 김현옥(金玄玉) 시장의 서울시청 2진 출입으로 신영호(申榮鎬) 선배를 보좌
하며 서울의 9개 구청과 수도사업소를 비롯한 서울시 관할 곳곳을 김 시장을 수행, 골목마다 훑으며 다니던
기억과 1970년 4월 8일 준공 석달만에 33명이 사망한 마포구 창전동 소재 와우아파트가 무너진 청천벽력
사고가 뇌리를 스친다. 신년 초 각 구청을 초도 순시하던 김 시장이 동대문구 용두동 근처 어느 도로가
지저분하다고 이를 혀로 핥아서라도 깨끗이 정리하라고 강한 어조로 지시하던 모습도 떠오른다.
그리고 와우 사고 수습후 11평짜리 그 아파트를 어렵사리 내집으로 마련하고 지상 최고의 스윗홈으로
여기고, 박봉으로 지금은 50대에 이른 남매를 키운 지난 날이 처연하고도 아련하게 눈에 밟힌다.
이어 서소문동 한국은행에 기자실이 있던 금융단과 서소문에 법조계 기자실이 있던 법원, 그리고 지금은
어디멘지 알 길이 없는 당시 논밭 경작지에 둘러쌓인 비행장과 섞여 있던 섬, 바로 여의도의 개발계획
취재를 위해 지프차를 타고 자주 들락이던 생각도 난다. 이때를 전후하여 업계에선 부산항부두관리협회가
설립되고 한국도선사협회가 발족했으며 한편 KAL기 납북사건 발생, 제3한강교(한남대교)가 개통되고
또 해외 뉴스로는 미 우주선 아폴로가 달에 착륙했으며 국내 뉴스로는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되기도 했다.
기자란 직업도 철새처럼 회사 방침에 따라 출입처가 바뀌면 미련없이 정들고 익숙한 보금자리를 떠나게
마련이라 1971년인가 필자로선 기자로서 마지막 출입처인 교통부 기자실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Mark Ruffalo와 Rachel McAdams 주연, 보스톤 교구 가톨릭 사제들 성추행 폭로 Spotlight 출연진
앞서도 언급했듯이 6,70년대 출입기자들의 일상은 급한 취재 상황이 발생할 경우는, 지금도 예외일
수는 없겠지만, 데스크에 알리고 새벽같이 출입처나 사건 현장으로 바로 출근하는 게 예사였다.
초년병 올챙이 기자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밤샘 근무는 1970년 3월31일, 50년전의 김포공항 얘기를
영원히 잊을 수 없다. 난데 없이 정체불명의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불시착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정보만
듣고 동료 몇과 함께 취재차에 실려 현장으로 달려갔다. 출입처에 관계없이 초긴급 상황이 벌어지면
편집국 취재부가 온통 올코트 프레싱 작전을 벌이게 되지만 예나 지금이나, 군대나 직장 어느 조직에서나
별 볼일 없이 힘들고 애먹는 곳은 사스마와리(察廻)로 신참 졸병이 호출돼 밤새는 건 당연한 처사였다.
흔이 줄여서 '요도(Yodo)호 사건'으로 불렸던 일본 적군파 요원들에게 납치된 '일본항공(JAL)351기'가
1970년 3월 31일 오전 7시 10분, 도쿄 하네다(羽田) 공항을 출발, 후쿠오카 이타즈케(板付) 공항으로
가던 중에 갑자기 김포공항에 비상착륙한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져 온 나라가 들썩였다.
세계혁명을 꿈꾸는 붉은 테러리스트, 이들 젊은 좌파 군사조직 적군파 요원들은 여성 수장 '시게노부
후사코(重信房子)'의 지휘에 따라 나고야 상공에서 기장에게 무조건 평양으로 가자고 협박하자 기장은
당해 항공기는 국내선이라서 연료유를 충분히 보충해야 가능하다며 후쿠오카 공항에 불시착하게 된다.
승객중 적군파 학생 15명으로부터 비행기를 폭파하겠다는 위협을 받고 피랍된 351기는 일본
당국이 경찰 700여명을 동원하고도 5시간이 넘도록 손을 못써 납치범들 제압에 실패, 겨우
이들을 설득하여 전체 승객 131명 중 노약자와 어린이 등 23명만을 풀어주고 김포를 이륙,
한국 동북 해상으로 비행하다 서북방으로 진로를 급선회, 철원 북방에서 휴전선을 넘은 뒤 기선을 돌려
김포공항을 평양이라 속이고 위장 착륙을 한 것. 기장이 머리를 써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한국 공수
단원들은 북한군을 가장, 비행기에 접근하여 납치범들에게 "여기가 평양이다. 여러분을 환영한다",
"곧 버스가 도착할테니 빨리 내려라"며 속임 작전을 펴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일성 초상화를 가져와라", "평양이 아니라 서울인 것 같다", "왜 이리 비행기가 많으냐"며
실랑이를 벌였고 서울을 평양으로 둔갑시키는 기상천외의 기막힌 각종 작전이 펼쳐지는 판이었다.
심지어 '평양도착 환영'이란 플래카드를 내걸고 납치 JAL351기 주위에는 차량 범퍼와 넘버 등을
지워 북한 현장감을 살리기 위한 지프와 버스 여러 대를 눈에 띄도록 공항을 돌게 하거나 북한 깃발을
흔들어 보이기도 하고 북한 군복을 입은 군인들도 영화 촬영장 엑스트라처럼 비행기 주위를 오가고
서성거리게 하며 평양 일색 풍경을 연출하기에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또 하오에는 JAL 김포 현지 직원 야마모토(山本)가 납치 항공기에 접근하여 "나는 아사히(朝日)신문
평양 특파원인데 여러분들 오시느라 수고 많았다". "곧 내릴 준비를 서두르기 바란다"고 평양임을
거듭 강조했으나 거짓임을 눈치챈 적군파들은 비행기 문을 열지 않고 평양행을 고집했다.
납치범들은 결국 협상 끝에 탑승객 전원을 김포공항에서 풀어주고 야마무라 신치로(山村 新治郎) 일본
운수성 정무차관을 인질로 삼아 김포공항 착륙 71시간만에 평양으로 기수를 돌려 떠났고 납치 항공기
기체와 야마무라 차관은 4월 4일 귀한했다. 납치범 중 생존자는 지금도 북한에 살고 있다는 후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꽃샘 추위 밤공기가 살을 에던 3월말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숙하며 김포공항 철조망
밖에서 진을 치고 철야 잠복 근무, 그것도 단순히 시야에 겨우 잡히는 납치 항공기의 겉모습만 바라보며
취재하던 살벌한 기억을 더듬으면 이 순간도 모골이 송연함을 떨칠 수 없다. 그러나 평상시 기자들이
출입처 기자실를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는 소위, 정회원 자격이 없으면 이같은 극한 상황속의 취재
현장에서 함께 뛰면서도 간헐적으로 전달되는 기내 분위기 한줄 기삿감을 두고 양반과 상놈의 입장보다
더한 신분의 차이를 무시할 수 없었고 서자 취급 받는 기자가 많았으니 참으로 너무나 안타까웠었다.
당시는 '갑질'이란 단어가 없었던 시절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그게 바로 대표적인 갑질이었단 생각이다.
다행스럽게 필자는 전임 선배들이 터를 잘 닦아 놓은 터라 새내기치고는 고생이 덜 했던 기억이다.
기자실 출입 회원으로 잔반이나 소속사의 사세나 영향력을 등에 업고 무언의 유세를 보이는 꼴이란 지독한
꼴불견이었지만 이를 드러내고 불평하거나 항의하는 반응은 거의 타부시했었다. 그리고 당시 대개의
기자실에는 아파트 입구의 메일박스처럼 출입기자들 소속 매체의 회사명이 붙은 우편 락커함이 있어
평소에도 전달 사항이나 분배되는 촌지라도 있나 하고 개인 금고처럼 수시로 열어 자주 살피곤 했었다.
가끔 봉투가 잡히면 안주머니에 넣었다가 남몰래 조용히 펴보고 흐뭇해 하던 생각도 난다.
사실 중앙 일간지가 충심이 돼 결성된 1960년대 기자단은 힘센 권력에 대항하는 언론인들의 결사체
구실을 하는 조직이란 명분으로 태동했으나 세월이 흐르며 도중에 상당히 변질, 권력의 치부나 부정을
눈감아 주고 기자 개인과 소속 언론사의 이익을 추구하는 담합의 온상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권력과 언론이 한 통속이 되어 본연의 취재활동이나 사회 정화란 순기능 보다 이익추구에 몰두하는
폐쇄적 언론 카르텔 구심점 역할을 하기도 했다는 비판을 받기에 자유롭지 못했다. 당시의 국무위원급
장관 부처 기자실이란 방은 출입기자들이 그 본업인 기사를 쓰는 곳이라기 보다 군림의 상징이요
쉼터나 휴식처 내지는 편의시설이란 인상이 더 강했었다.
물론 기자단이나 기자실이 중요 정책이나 정보 공개를 꺼리는 권력이나 정부기관에 대해 집단적 압력
행사를 통해 긍정적 효과를 도출해내는 순 기능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기자실에는 취재한
기사를 송고할 수 있게 책상과 전화가 놓여있고 부처에 따라서는 극비 회의나 포커를 할 수 있게
라운드 테이블과 의자가 준비된 별도의 밀실이 마련돼 있으며 심지어 취침이 가능한 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놀음판이란 정해진 곳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보면 오소리 잡는 굴 같이 담배연기 자욱한
밀실의 라운드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특히 촌지라도 생기는 날이면 제법 판돈도 크게 포커판을 벌여
카드를 쪼으던 하우스 같던 모습 등 그 시대 기자실의 흔한 속 풍경이 추억으로 회상된다.
또 하나의 기자실 풍경, 주로 연말이 되면 소위 '총회'를 앞두고 밀실서 부처 각 실국지장이나 업계서
거둬들인 촌지를 테이블 위에 수두룩히 부어놓고 손가락에 침 발라 월급 봉투처럼 지폐를 분배해서
담아 연말 보너스 격으로 나눠 주던 그때 그시절 그 광경도 지금 되돌아 보면 그래도 어쩐지 따뜻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추억으로 떠오른다. 하기야 1991년 지상에도 보도된 바 있는 보사부의 촌지를 넘은
1억원에 가까운 척지(尺志) 사건이나, 흔히 콜을 해서 취득한 금품을 기자단에 전액 내놓지 않고
반타작을 하거나 심지어 독식으로 착복하다가 기자단에서 축출당하는 불명예는 당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인간이 지닌 직업과 시대적 속성의 한 단면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필자가 현역 시절에 겪은 또 하나 언론계의 큰 변혁은 소위 '프레스 카드(Press Card)'란 제도의
출현이었다. 1963년 청와대에 기자실이 설치된 이후 1967년에는 정부가 각 부처에 기관장 직속으로
공식적인 기구로 공보관실을 제도화하여 정책 홍보 및 출입기자들의 취재 편의 도모 기능을 다하는 부서로
정착화 시켰다. 하긴 당시, 나도 기자 너도 기자 누구도 기자에, 악덕 언론사나 사이비 기자들이 판을 쳐
사회적 문제점으로 대두되어 정리 대상의 위험수위를 보인 탓도 있지만 효율적 언론 기능 제고와 통제를
위해 1972년에는 정식으로 소위 '프레스 카드(Press Card)' 제도를 도입하게 된다.
주무부 문화공보부는 전국의 기자들에게 고유번호를 기재한 기자증을 발급했지만 취재활동을 하는
기존 모든 기자들 전체에게 일제히 발급하지는 않았다. 장관급이나 차관급 행정 부처에 설치된
기자실 47개를 18개로 줄였다. 차관급 청장이 최고위직인 외청들은 기자실을 없애는 등 전체
출입기자 790명을 465명으로 감축했다. 미확인 풍문으로 당시 필자가 들은 바에 의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충청지방의 한 교각 건설 준공식에 참석했다가 점심때가 돼도 헬멧 쓴 근로자들이 식사를 않고
있어 관계자들에게 까닭을 물은즉슨 식권이 동이 난 때문이란 답을 듣고 당일 행사 식권 배부 내역을
조사한바 신설 다리 하나 준공 행사에 중앙과 지방에서 몰려든 기자들에게 식권을 나눠주니 힘들게
공사장에서 일한 근로자 몫이 모자랐다는 보고였다는 것.
1962년 군사정부가 실시한 언론 구조 개편 10년만에 또 다시 나도 기자 너도 기자 시대가 도래한 셈이었다.
언론 정비의 빌미가 됐는지는 모르지만 한국외대 정진석(鄭晉錫) 교수의 자료에 의하면 신문협회가 집계한
일간지의 본사 기자가 2,564명, 주재기자가 1,676명이었고 일차 프레스 카드 발급자는 중앙일간지가 본사
1,533명, 주재 384명, 지방일간지가 본사 789명, 주재 367명, 통신사가 본사 401명, 주재 60명, 방송기자가
KBS209명, 민방 434명에 달했다. 보도증 또는 기자증으로 불리기도 한 프레스 카드를 첨 받아 쥐고 필자도
무척 신기했으며 취재에 앞서 프레스카드를 내 보여야 취재에 응했던 현장 기억도 되살아 난다.
언론의 통제기능으로도 이용된 것으로 생각되는 프레스카드 제도는 사이비 기자의 설 자리를 박탈한다는
취지로 정부 기관은 물론 일반 기업도 이를 소지한 기자에 한해 취재에 응하여 편의를 제공토록 하고 해외
여행과 전화 청약 등에도 언론인으로서 혜택을 받도록 운용했다. 이어 '정부출입기자대책'을 발표, 정부 각
부처의 출입기자실과 기자의 수를 대폭 제한하여 행정부처에 있는 기자실을 한 부에 하나만 두도록 통합,
폐쇄하고 출입기자도 한 부처에 1개사에서 1명만 출입하도록 제한했다. 이어 각 언론사는 자진 폐간, 통폐합
등을 통해 숫적으로도 크게 줄였다. 실제 5.16후 자율 형식으로 진행된 언론기관 최대의 통폐합 등 충격적인
언론 정비는 1980년에 이뤄졌고 살아 남은 언론사는 각종 지원에 힘입어 경영 호전을 누리기도 했다.
필자가 서울시청, 상공부, 관세청에 이어 1971년 출입처가 교통부로 바뀌어 첫 출근을 하는 날은 애당초
각오는 하고 갔지만 선임에 이어 기자실 회원자격이 자연 승계 되는 건지 아님 다시 심사대상에 올라 대기
상태에 들어가는지 아리송했었지만 워낙 몸을 낮추고 싹싹하게 군 탓에 크게 불편을 겪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마 처음엔 준회원 정도, 나중엔 정회원 대접을 받으며 열심히 활동하고 부지런히 취재했던 것
으로 생각된다. 당시 청와대, 중앙청, 경제기획원을 비롯하여 재무부, 농림부, 상공부, 건설부, 체신부,
외무부, 내무부, 법무부, 과기처, 국방부, 문교부, 보사부, 문공부, 서울시 등 중앙부처의
총 출입기자실은 47개에서 18개로 줄어들었다.
프레스카드 발급제 이후, 이들 18개 부처는 재무부 125명을 최다로 해서 최소 문공부 16명 등 모두 790명
에서 출입기자가 325명이나 줄어들어 출입기자 등록을 마친 보도증 소지자는 465명으로 감소했다.
필자가 기자 생활 마감전 마지막 출입처로 배정된 교통부(MOT)에는 총 27명의 언론사 명단이 등재돼 있었고
그중 기자실 출입이 자유로웠던 기자단 정회원은 2/3 정도에도 못 미쳤던 것 같다. 희미한 기억으로 등록
언론사는 종합지로는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서울신문, 경향신문, 한국일보, 대한일보, 신아일보 등,
경제지로는 매일경제, 서울경제, 현대경제, 산업경제, 상공일보 등, 통신사로는 동양통신, 동화통신, 합동통신,
무역통신, 시사통신, 산업통신, 경제통신 등이었고, 영자신문으로 KT와 KH, 방송사로는 KBS, MBC, CBS,
TBC, DBS 등이 함께 드나들며 기사 담합도 하고 취재경쟁을 벌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당시 교통부는, 김구(金九) 선생 차남으로 샹하이에서 태어나 중화민국 공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6.25때 전투
비행단 공군대령 시절에 평양 승호리철교 폭파란 너무나 혁혁한 공훈을 세웠던 3성의 공군참모총장 출신 김신
(金信/1922~2016) 장군이 장관(제21대), 교토제대 및 서울대 법학부를 졸업, 경북대, 동국대와 서울대 교수를
역임한 이재철(李在澈) 차관, 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 정영훈(鄭泳勳/1932~2011) 해운국장, 서울대를 졸업한
김완수(金完洙) 육운국장, 헌병대 출신 민영환(閔泳煥) 항공국장 등 50년 전의 얼굴들과 당시에 취재에 열을
올렸던 그 시절이 생생히 기억난다. 그리고 힘께나 쓰는 유력 언론의 출입 기자들과 해운국장 공보관 등 거의가
연세대 출신들이라 괜히 주눅이 들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조심스레 옆을 살펴보니 나중에 창원
총국장을 지낸 KBS의 김두석(金斗錫/행정60) 선배와 합동통신의 김덕성(金德成/정외과64) 후배가 조족지혈로
눈에 띄어 눈치로만 힐끔거렸던 기억이다.
당시 기자실 멤버는, 뒤에 국회의원이 된 동아일보 이상하(李相河), 조선일보 장광대(張光大), 동화통신
김종인(金鐘仁), 서울신문 유승삼(劉承三), 한국일보 윤국병(尹國炳), 중앙일보 김경철(金慶澈),
대한일보 이원영(李元英), 무역통신 임영창(林榮昌), CBS 송석형(宋錫亨) 등이 생각나는데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름과 얼굴이 또렷하게 그려진다. 출입기자들을 담당하는
공보담당관실은 임유순(任裕淳)의 바톤을 이어받은, 역시 연세대 출신 선우만진(鮮于萬鎭) 공보관과
김상진(金相珍) 선박담당관, 김병훈(金秉薰) 내항과장, 최각(崔角) 외항과장, 이석환(李錫煥) 선원과장,
김재승(金在昇), 박경현(朴慶鉉) 선박 및 측도과장, 김준경(金準卿) 항만과장, 박수환(朴秀煥) 지도과장
등이 생각나고 큰 폼을 잡던 이한림(李翰林) 관관공사 사장의 모습도 눈에 아른거린다.
뒤에 해운국장과 철도청장을 역임한 최훈(崔薰), 최장화(崔章和), 이원(李沅) 사무관과 머리띠를 두르고 진급
시험 준비를 열심히 하던 허용구(許容九) 주사 모습도 생생히 떠오른다. 나중에 서기관으로 진급, 선원과장이
되어 서재국(徐載國) 영국 해무관의 주선으로 필자와 함께 유럽 여러나라를 출장다니던 때도 벌써 40년
전의 일이다. 필자는 경제지의 특성을 살려 종합지들이 교통 사고나 사건에 관심을 두고 지면을
구상하는 데 반해 주로 선박과 육해공상의 화물수송에 역점을 두고 취재를 했다. 특히 해운에 관심을
갖고 한국선주협회를 중심으로 한 외항해운선사 및 대리점을 찾아 베를 날듯 열심히 취재를 했다. 계획된
경제개발계획에 의거 생산이 늘고 국제교역이 증가, 외항해운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감에 따라 선복량
증강이 현저히 늘어 해운업이 비약적 발전상을 보이던 때였다.
이재철 차관에 이어 김완수(金完洙) 차관이 뒤를 이었고 이용(李龍) 철도청장에 이어 역시 군 출신으로 뒤에
마사회장과 충북지사를 지내기도 한 오용운(吳龍雲) 청장이 부임하여 출입기자들에게 쌀을 보내고 겨울 추위에
따뜻하게 지내라고 담요를 선물했던 일은 두고 두고 정겨운 기억으로 해마다 되살아난다.
1972년, 김학열(金鶴烈)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주빈으로 모시고 5.16 직후 총 10만톤에 불과했던
우리나라의 외항 상선대가 10배가 넘는 100만톤을 기록했다고 큰 잔치를 벌였던 기억도 새롭다.
당시 해상물동량이 1,600만톤으로 늘어 1억달러 운임수입을 올리며 국적선 적취율은 23%를 기록했다.
최초로 한/일간에 컨테이너 항로, 한/인니간에 정기항로가 개설됐고 박건석(朴健碩) 사장의 범양전용선은
조선공사에서 11,322G/T의 국내 최대의 벌크선 팬코리아호를 건조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또 하나 기억은 당시 철도청 포함, 교통부 출입기자들은 전관특면이라는 무료 철도이용증을 발급받아
언제나 특석 철도편을 이용할 수 있는 편의를 제공받은 일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크게 우쭐하기
충분했던 특혜였다.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기도 하고 우습게도 생각되는, 정부 기관이나
업계가 취재 기자들에게 베풀던 사은품과 선물을 뒤돌아보면 가난한 후진국의 어렵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어
참으로 초라했었단 생각이 든다. 해운단체로는 주요한(朱耀翰) 회장 및 김병두(金昞斗) 전무의 선주협회가
비교적 여유롭게 식음이나 떡값과 촌지를 건넸고 전택보(全澤珤) 선박대리점협회장은 김준경(金準卿)전무와
강영구(姜榮九) 사무국장을 통해 명절이면 꼭 와이셔츠를 맞출 수 있는 쿠폰을 선물로 주거나 설탕을
교환하는 상품권을, 그것도 자주 다니는 몇 기자에게만 나눠 줬었다.
옛 1950년대 선물로는 햅쌀, 달걀, 생닭, 밀가루를 주고 받다가, 60년대는 설탕이나 비누, 조미료,
양말 등, 70년대는 식용유, 치약, 믹스커피에 넥타이, 지갑, 허리띠, 구두표 등, 80년대는 양복맞춤 쿠폰,
한복 맞춤 쿠폰, 갈비, 쇠고기, 참치 등, 90년대는 인삼, 꿀, 영지버섯, 과일, 백화점 상품권이
주류를 이뤘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홍삼, 올리브기름, 과일, 와인, 헬스기구, 골프채, 레포츠 등 고가품에
이어 지금은 모바일 상품권, 디지털 선물에 이르고 있고 웃어야 할지, 요즘은 심지어 반려동물 선물 세트도
유행하고 있으며 그 종류도 다양하여 홍삼이 든 참치에 아토피 개선 유산균까지 등장하고 있다니 참으로
세상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명절을 맞아 출입 기자들에게 그래도 정성과 인정을
담은 증표로 전했던 사랑이 듬뿍 담긴 선물이었단 생각으로 흐뭇한 추억이다.
5,60년대 식순이 차순이 공순이로 불리며 식모와 버스차장과 여공으로 밖에 일자리를 찾을 수 없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절차를 생략하지 않는다고 했듯 고난과 눈물로
점철된 그 시절을 딛고 밟아 오늘을 이룩한 과정에는 정부관리나 직장인이나 기자나 그 어느 직종이건 간에
그래도 그 시대를 질머진 전위병과 역군으로 오늘의 풍요로운 밥상을 마련했다는 자부심을 저버려서는 안될
것이란 다짐이다. 그리고 누구라도 기자풍토를 논하기 위해 돌을 쳐들어도 먼저 자기 머리를 치지 않고서는
한줄의 글도 쓰지 못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것이라고 술회한 어느 기자 출신의 회고록이 가슴을 적신다.
지금 같이 정보 통신 기술의 발달로 노트북 컴퓨터와 휴대전화를 아용하여 언제 어디서든 취재가
가능하고 송고가 용이하며 앉아 있어도 보내오는 기사가 넘쳐 홍수를 이루는 판이고 보면 옛처럼
기자실에 상주하며 뉴스거리가 생기길 기다릴 필요가 없어진 한편 기자실을 통해 취재원이
제공하는 보도자료에 의해 판박이 획일적으로 신문이나 방송이 뉴스를 생산함으로써 취재분야에
대한 창의적인 해설이나 전문성의 결여를 초래한다는 주장에 대해 필자도 논리적 근거가 있다는 생각이다.
끝으로 이 칼럼을 통해 몇 번 언급한 크롱카이드와 월트 리프만 같은 논조의 기자상, 그리고 영화
스포트 라이트(Spotlight)나 더 포스트(The Post)에서 진정한 기자정신과 품격을 다시 배우며 한번
기자는 영원한 기자란 수습기자 시절의 선서를 여든의 이 나이에 또 한번 반추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