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을 켜자 낯선 섬나라의 말소리가 흘러 나왔다.“ 어젯밤 오사카에서 10대의 소녀가 옥상에서 투신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요즘 들어 청소년들의 의식수준이 점점 더 극단적으로 치달아 가는 가운데...”"오사카라..여기서 꽤나 가깝잖아...?" 어느새 다음 소식으로 넘어가 버린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다가 상투적인 소식에 흥미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텔레비전을 꺼버렸다.
11월에 막 들어선 어느 날 밤, 사전 연락도 없이 아즈미라는 평범한 이름을 가진, 그러나 전혀 평범하지 않은 소녀가 찾아왔다.“안녕~ 여전히 나른해 보이는구나, 켄 짱~” 갑작스런 방문자는 현관 앞에서 힘겨운 웃음을 지으며 시시한 인사를 건넨다. 아마도 산을 오르다시피 걸어온 것이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내가 지금 있는 이곳은 해발 150미터에 위치한 별장이라 내가 한번 마을에 갔다 오는 것만 해도 진을 다 빼놓고야 마는 곳이다. 여자인 소녀가 힘들지 않을 리가 없다.“실은 말야, 여기오기 바로직전에 사고를 봤어! 사고랄까.... 너도 알지? 이 무지막지한 산길을 따라 내려가면 신칸센 근처에 새로 신축한 아파트가 있잖아~ 거기서 어떤 여자애가 투신자살을 했다지 뭐야? ”?? “...그래? 그거 끔찍했겠네...”“응!응! 머리가 터진게...으...생각하기도 싫어....아무튼 말야? 최근에 그런 일이 많다고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도 있는 줄은 몰랐어! 꿈속에 나올까봐 무섭다니깐...”“자- 이건 선물!” 소녀는 현관에서 신발 끈을 풀며 손에든 비닐봉지를 건넨다. 안에는 하겐다즈의 아이스크림 두 개, 아마 녹기 전에 냉장고에 넣어두라는 것 같지만, 이런 추운날씨에 녹을 리가 없다. 내가 느릿한 동작으로 아이스크림의 종류를 확인해 보는 사이에, 소녀는 마치 제집인양 신발을 벗고 문턱을 넘어서고 있었다. 소녀가 걸어가고 있는 이 집은 일본에서도 알아주는 대기업 혼다의 사유별장으로서, 작년에 혼다를 물려받은 아버지.....의 배려로 방학을 맞은 내가 이곳에서 지내고 있다. 현관에서 2미터는 넘어가는 기다란 복도를 지나가면 내가 침실을 겸하고 있는 책이 산더미로 쌓여 발 디딜 틈조차 없는 거실이 나온다.어느새 거실에 다다른 소녀의 등을 바라보면서, 나도 거실로 향했다.“으엑.....여기가 정말 사람 사는 곳 맞아? 완전 돼지우리가 따로 없잖아!! 아무리 방학이라고는 하지만 좀 심하지 않아? 하다못해 사람이 지나갈만한 길 정도는 만들어 두는 게 어때??”그런 말을 지껄이면서도 소녀는 잘도 길을 찾아 움직이고 있다.“길이라...네가 그런 말할 처지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알기로는 아마 네 방은 이곳보다 더? 심했으면 심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어. 너의 그 현란한 발놀림이 그걸 증명하고 있다고. 게다가 그때 어떤 친절한 분께서 뒤에서 떠밀어 주시는 덕분에 책에 파묻혀 압사 당할 뻔 하기도 했지 아마....”“우으...숙녀의 방을 처음본소감이 ‘여긴 폐차장 이냐?’ 이었던 무례한 사람에게는 그 정도도 약과라구!” 토라진듯이 중얼거리며 소녀는 소파에 가득한 책을 밀어버리고선 털썩 앉는다.다른 사람에게는 냉정한 이 녀석은 유독 나한테만 귀여운 짓을 많이 하는 것 같다.-저번에 소녀의 집에 가보고 알게된 사실이다.-“숙녀가 이 먼 곳까지 행차 하셨는데, 차 한 잔 정도는 내오는게 어때?”“있다면야 주고는 싶은데 아쉽게도 어디사시는 여인네께서 자기가 끓인다고 주전자를 가져가서는 단10분만에 주방을 초토화시켜 버려서 말야. 나도 몇 일째 인스턴트만 섭취중이야.”“아하하하;;; 누..누가 그랬을까나?? ...... 아잉~ 겨우 그런 일 을 가지고! 잊어버려~”??? 너 같으면 잊어버리겠냐....... 무안한 듯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바닥에 아무렇게나 어질러진 책을 직시하고 있는 소녀를 바라본다.
이 소녀는, 나와는 1년전 에 만나 친구가 되었었다. 그때 나는 일본의 문화를 소개하는 텔레비전 프로를 보고 어린마음을 가지게 되어 일본에 대해 야릇한 탐험 의식으로 여기저기 일본을 헤집고 다닌 적이 있다. 그러던 하루는 탐험도 질리고 날은 덥고 해서 공원 벤치에서 나무를 방패삼아 금방이라도 녹아버릴 것만 열기를 내뿜고 있는 태양의 시선을 피하고 있는데 난생 처음 보는 소녀가 다가와서 레드슈팅스타-그때 최고의 인기 아이스크림이었다.- 아이스크림을 같이 먹자고 내밀었었다. 당황 반 기대 반으로-난 그때 처음으로 레드슈팅스타란 걸 먹어봤다. 뭐. 무지하게 맛없었긴 했지만.- 그 일을 계기로 소녀와 나는 서로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거의 매일 같이 어울려 다녔다. 서로 어느정도 친해져 갈 무렵, 방학이 끝나가고 있었기에 나는 한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던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소녀를 만나 편지를 건네었다.‘자’‘이게뭐야?? ’‘내 메일주소. 나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잇는 소녀를 뒤로하고 돌아서며 말했다.‘메일 기다릴게..... 그럼....’ 그렇게 약간 얼떨떨하게 편지를 받은 소녀는 한 달이 지나서야 메일을 보냈다. 내용은 지극히 간단했다. 지금까지 보내지 못한 이유와, 메일을 주고받으면 제대로 놀 수가 없으니깐 I.C.M 이라는 채팅프로그램에서 만나자는 말이 였다. 나는 소녀의 제안을 따라 I.C.M에 가입하였고, 소녀와 만나 가상현실이란 세계에 푹 빠져들었다. 그건. 소녀도 마찬가지 였으리라. 우리는 인터넷에서 채팅을 통해 계속해서 친해져 갔다. 얼굴을 맞대고서는 하지 못할 말도, 채팅 속에서 라면 얼마든지 가능했고, 우리는 자신들의 가족사나 교우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서로를 알아갔다. 비록 가상현실 이였지만, 현실에서 만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느껴지는 두근거림......난.... 소녀를 좋아하고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학교에 구비된 기숙사에서 여느때와 같이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던 어느 날, 12월의 말이 다된 크리스마스이브에 일본에서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켄!! 전화받아~”“알았어! 젠장...아즈미랑 노는데 누가 방해 하는거야??” “쯧쯧 컴퓨터가 애 버리는 구나 옛날에는 정말 착한녀석이였는데.......”“그러게 말야 근데 너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 않냐?”“뭐?? 내가 뭐했다고!!”정말......수준 떨어져서 같이 있다는 게 창피해지는 녀석들이다. 아아... 아즈미가 보고 싶다.....
“여보세요 켄 입니다.” “켄?? 엄마야~ 그동안 잘 지냈지? 한국에 가서 한번 도 연락이 없어서 걱정했잖니! 연락 좀 하고 살아~”? 이모다..? 대기업? 혼다의 후계자와 결혼한 이모는 어릴 때부터 날 키워?? 주신, 새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다. 아니, 새어머니가 맞구나....... 선천적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이모는 나를 자신의 양자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이모는 꽤나 부자였던 어머니의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나를 키우는 척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사실은 나 같은 건 무지하게 귀찮아하는 것이 틀림없다.“죄송해요...학교일이 좀 바빴어요...”내 입에서는? 정해진 대본이라도? 읽는 듯이 거짓말이 흘러 나온다. 이모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자신의 말을 이어 간다.“그래 알았어~ 이제 곧 방학이지? 놀러 오지 않을래? 엄마가 멋진데 데려다 줄께~”언제나 그렇게 말해서 초대를 하고는 항상 날 혼자 두게 한다. 날 초대하는 것도 으레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기 때문이겠지......가고 싶지 않다. 그런 곳..... 가봤자 재미도 없다. 아즈미가 떠올랐기 때문일까? 내 입은 나의 의지를 무시해 버린 채 멋대로 말을 내뱉어 버린다.“응......갈께요........”
아무튼 그렇게 알게 되어 지금까지 채팅프로그램을 통해? 각별한 사이가 된 소녀가 지금 내 앞에서 책의관리를 잘 못 한다느니 뭐래니 하며 잔소리를 하고 있는 이 녀석이다. 소녀는 홍수와 같은 유행의 물결, 그 흐름에 몸의 맡기는 현대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유별나게 유행에 집착하는 별종이다. 소녀의 생김새를 말하자면.......-소녀말대로 하자면,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개성- 머리는 있는 대로 짧게 깍아 스포츠머리를 연상시키고, 붉은색 염색에, 상당히 불량해 보이는 피어싱도 여러개를 하고있다.키는 백육십이 될 듯 말 듯. 약간 날카로운 얼굴 생김새는 소년미가 물씬 풍겨서, 어딘가의 여학교에 진학하면 인기 만점일 듯싶다. 뭐, 상당히 날라리 같이 생기긴 했지만, 외모와는 다르게 장학금까지 꼬박꼬박 받는 모범생이다.“켄짱! 듣고있어?? 뭐야! 오랜만에 만나러 왔는데~ 이야기를 잘 듣지도 않고,... 너무해! 애정이 식었어!!” 그런 외모에도 불구하고 애교는 만점이다.“너..어디 아프냐...그리고 애정이아니라 우정이겠지....”“으으...아무렴 어때!? 아! 맞다? 나 너희 엄마 만나고 왔어. 되게 젊으시던데? 근데 한번쯤은 연락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이 별장에 틀어박힌 후로 한번 도 연락하지 않았다며??” .........엄마는 아즈미를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단 한번 도 말한 적이 없는데......뒷조사라도 하는건가.......내가 그렇게 미덥지 못한걸까? 소녀에게 다 털어놓고 기대고 싶다......-소녀에게는 아직 이 부분까지 말하진 않았다.- 그러나 내입은 내 의지와는 반대로 정해진 대사를 버릇처럼 말할 뿐이다.“그야 뭐... 귀찮기도 하고...특별한 용건도 없으니깐...”“이~봐! 켄짱! 그럼 못쓴다니깐! 가족이란 말야~ 특별한 용건이 없어도 연락을 하고 사는거야~ 게다가 엄마랑은 진짜 오랜만에 만났으니 한번쯤에 찾아가라구! 좀 있으면 한동안 못 만나잖아!”“네에 네에~ 안 그래도 내일이나 모레쯤에 가볼까 생각 했사옵니다~prite lesu님~” 내가 놀리고 있다는 걸 눈치 챘는지 소녀는 새빨개진 얼굴로 분하다는 듯이 소리친다.“우우... 놀리지마!! 그보다.......너는 언제나 그런 말만 하고 한국에 돌아가기 직전에 얼굴 잠깐 비추고 가버릴 위인이잖아! 우으....저번에도......그땐 정신이 없어서 아무 말도 못했지만! 그런 식으로 가버리면......남겨진 사람은......” 소녀는 아마도 내가1년 전에 별다른 연락 없이 메일주소만 던져두고 한국으로 가버린 것을 탓하는 것이 틀림없다. 소녀의 눈가에 물기가 어리는것 같다. “아...저기......미안.......”“됐어! 아무튼 빨리 연락해....... 엄마 기다리시겠다......” 소녀의 울음기 섞인 말에 왠지 화가 난다. 왜 남의 가족사에 이렇게 신경을 쓴다는 말인가. 극단적으로 말해 내가 이모를 안 만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호적상으로도 다른 사람들 눈에도 이모가 나의 엄마인 것은 변함없는 사실인 것이다. 어찌되었든 나는 일본에 왔으니, 지금 이대로도 아무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사실 이모도 나 같은 건 별로 보고 싶지 않아 하는 것에 틀림없는데.......머릿속에서 소녀의 말을 주제로 격렬한 토론을 펼치고 있을 무렵, 소녀의 목소리가 나의 상념을 끊고 나에게로 전해진다.“저기 켄....”“왜?”? 심상치 않은 분위기.... 뭔가 심각한 이야기라도 하려는 것일까......??“내가 사온 아이스크림... 지금 먹으면 안될까...? 나 배고파~”.......이 녀석은 사람을 허탈하게 만드는데 무언가 특별한 재주라도 있는 것 같다.“ 식충이라도 들었나보군 잠깐만 기다려” 약간의 복수차원에서 한 말에 뒤에서 소녀가 뭐라고 소리쳤지만 못 들은 척 거실의 지저분함을 가볍게 뛰어넘는 주방으로 들어선다. 레드슈팅스타....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이스크림이다. 소녀가 좋아하는건 왠만하면 좋아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녀가 사실상 가장 좋아하는 이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지 못하는 이유는 입안에 넣었을 때의 톡톡 튀면서 혓바닥을 자극하는 그 느낌, 크게 자극하여 미각 통치 체제를 완전히 바꿔버리지 못하는 그 소심하기 짝이 없는 작은 개혁이, 나에게는 안하느니만 못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켄~아이스크림 거기서 혼자 다 먹는 거야?? 왜 이렇게 늦어~!!”“아... 미안 미안~ 지금 간다.” 또 다시 소녀의 잔소리가 몰아칠 것 같았기에, 서둘러 주방을 나선다.“우음~~아아 이 톡 쏘면서 시원한 맛 너무 좋아~ 켄 은 어때?” 레드 슈팅스타를 입안 가득 집어넣고 우물거리며 소녀가 물어왔다.“흠...글세... 난 그저 그래...-차마 싫다고 말할 수 는 없다.- 근데....? 특별히 이걸 좋아하는 이유라도 있는 거야?”나는 먹기 싫다는 마음을 여실히 드러내며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뒤적이며 소녀에게 묻는다.“그야~ 신선하잖아~고리타분하지 않은 새롭게 톡 쏘아오는 자유의 느낌, 왠지 해방된 것만 같아서 기분이 좋아~저번에도 말하지 않았나?”“그랬었나? 그나저나 그 날라리 패션도 그런 의미?”“날라리 패션이라니!! 내가 누누이 말했지! 이건 개.성 이라니깐! 미성년자라면 이 정도는 해봐야 하는 거야! 그게 바로 인생을 사는 맛이란 것이지!” 녀석의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듣고 있자면, 나까지 바보가 되는 느낌이다. 이런 걸 사고방식의 차이라고 하는 것일까? 우리는 취향이 비슷했지만, 이 문제에 대한 의견만은 언제나 달라 그에 느껴지는 거리감만큼은 도통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창밖으로 푸른 달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소녀가 문득 생각이 난 듯 말을 꺼냈다.“켄.... 자살이란 거에 대해...어떻게 생각해?? ”“글세,,,, 나약한 자들의 도피행각? 다르게 본다면 사고라고도 할 수 있겠고......”“사고?“ 의아한 듯이 소녀가 물어온다. “그게 그렇잖아? 죽은자는 과연 자신이 원해서 죽은 것일까? ”“무슨말이야? 잘 모르겠어....” “모든 현상과 결과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되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야, 자살을 하는 사람은 그걸 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것이 있었겠지. 그런 게 있었다면 그런 것. 이미 자살이라고 할 수 없어. 자의라고들 하지만 떠밀린 것이나 마찬가지니깐. 게다가 사고라고 하기에는 최종결정을 자신이 했지. 그러니깐 그냥 사고라고 정의해 버리는 거야. 세상은 순서의 차이에 따라 그 개념이 천차만별로 달라져 버리니깐. 중간 정도가 좋겠지.....”“흐음...상당히 자세하네? 켄 도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던거야?”“응? 그야..뭐 없다고는 못하겠지. 하지만 딱 한가지 방법만은 거절하고 싶어.”“어떤거?”“그 있잖아 고층건물에서 떨어져서 퍽 터지는거~” “왜..? ” 소녀의 목소리가 묘하게 떨리는 것 같다.“그야.. 자살이란 것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는다는 각오의 뜻이잖아? 하지만 웃기게도 투신자살 같은걸 해버리면 주목을 받게 되어버려... 아마 투신자살을 하는 부류는 자신에게 무언가 작은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조금씩 갖고 있는 것이겠지.”“너무....단정적이야......!!! 켄 이..... 그걸 어떻게 알아??? ” 화를 내는 아즈미.......일순간 바뀐 소녀의 태도에 나는 당황해 버렸다. 내가 어쩔 줄 몰라 하자 ‘흥. 됐어’라고 말해버리고는 고개를 돌려버린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다. 내 기억으로는 바로 한달 전 까지만 해도 채팅에서.......“자살은 바보 같은 짓이야 하는 녀석들 머릿속은 어떻게 생겨먹은 걸까?” 하며 흥분하여 마구 비난을 했었는데....... 억울하다.......나도 사실은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 할수 있다구!! 쳇......“너.......오늘 좀 이상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별로..........” 얼굴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내가 무언가실수라도 한 것일까?? 그에 대해 물으려 했었는데,? 소녀가 선수를 쳤다.“켄....나 그만 쉬고 싶어......미안.........”?? 쉬고 싶다고 말하는 소녀를 손님이 묵는 방에 데려다주고 거실로 내려왔다. 평소의 그 익숙한 정적 그대로인데도 오늘따라 온몸을 불쾌하게 휘감는다. 소녀의 시무룩한 얼굴이 떠오른다. 나 때문인 것 만 같아 마음이 무겁다. 바깥의 서늘한 공기가 그리워진다.“하아.......산책이나........조금 해볼까.........”
내가 밖으로 나온 것은 한창 하늘위의 달이 성세를 떨치고 있을 때였다.? 역시 한겨울의 산속이라 그런지 밤공기가 차갑다. 마지막 전철은 이미 끊긴지 오래고, 거리는 고요에 감싸여 있었다. 조용하고....쌀쌀하고...마치 어둠이란 파도에 묻혀버리는 잃어버린 도시처럼, 조용한 정적 속에 휩싸여 있는 그 광경은 한장의 사진처럼, 인공적 이여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나를 더욱 움츠러들게 만든다. 산 밑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크림색 가로등의 불빛이 심해어의 파닥거림을 생각나게 만든다.? 그런 가운데 푸른 달빛만이 고요한 도시를 빛내며 이 밤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정지해버린듯한 이 세계에서, 달빛과 나만이 살아있는 것 같아 몹시 눈이 시리다. 달빛에 쫓기듯...산길을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거리에는 아무것도 있지 않는다. 단지 커다란 아파트 한 채만이 위태롭게 서있을 뿐이었다. 아파트 주위를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옥상위로 무엇인가 아른거리는 실루엣이 보인다. 바람에 휘날리는 붉은 커텐 같은 그 실루엣은, 어느새 인가 중력의 법칙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땅으로 떨어져 버렸다. 좀처럼 들을 기회 없는, ‘퍽석’ 하는 소리...아마 사람이 떨어져 죽은 것이겠지...저 정도 높이라면 절대로 살아남을 리가 없다. 어느새 내가 서있던 아스팔트 위로 푸른 달빛을 받아 빛나고 있는 진홍빛의 파도가 번져오고 있었다.
낯익은 천장이 보인다.“뭐지.......꿈....인가?” 나를 지탱해주고 있던 체온으로 약간 따스해진 소파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깨질 것만 같다.어제 그냥 자버렸던 것일까? 하지만 너무나도 실감났는데...........“으읔...두통약이....어디있더라...?”텅 비어있는 약병을 보며 짜증나는 이 상황을 타개할 해결책을 곰곰이 생각했다.“아즈미는...아직도 자나?” 두통약을 부탁하기위해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기며 소녀가 잠들어 있는 방으로 향한다. 하지만 방에는 아무도 없다.“매정한 녀석......... 말도 없이 그냥 나가 버리냐...으으...아주 죽겠군...”먼지가 가득한 복도에 주저앉아서 차가운 벽에 머리를 기대고 두통이 가시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어제 먹다가 남긴 레드슈팅스타가 뇌리에 떠오른다. 어디선가에서 두통에는 차가운 게 좋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다. “안 먹는 것 보다는........낳겠지...........” 슈팅스타의 톡톡 튀는 맛을 입안에 가득 밀어 넣으며 사라져 버린 소녀를 생각했다. 하겐다즈의 레드슈팅스타......여전히 맛없는 그 아이스크림을 억지로 입안에서 녹이고 있을 무렵 고요하게 온몸을 죄여오는 정적을 깨는, 그래서 오히려 더 기분 나쁘게만 들려오는 전화소리가 울렸다. “하아...정말...짜증난다니깐........”말로는 투덜거리면서도 내손은 느릿하게 수화기를 귀에 갖다 대고 있었다.“여보세요.....”수화기 속에서 놀란 듯한, 울음 섞인 말들이 빠르게 흘러나온다. 시계의 끝에서 텔레비전의 브라운관이 눈에 들어왔다. 떨리는 내손은 어느새 텔레비전을 켜고 있었다. 차가운 검은 상자 안에서 낯익은 소녀의 사진이 보인다. 그 속에서는 언제나 냉정한 얼굴로 정해진 대사만을 읽는 일본의 아나운서가 약간 격양된 어조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귓속이 윙윙 거려 평소 같으면 쉽게 알아들을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화면만으로 그 뉴스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 수가 있었다. 얼마 전에도 그런 뉴스를 봤기 때문이리라. ‘신칸센 근처의 아파트.......투신자살.......’어느새 내손위의 아이스크림은 내손의 통제를 벗어나 바닥을 더럽히고 있었다.레드슈팅스타의 붉은 빛이.....꿈에서 본 진홍빛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은.... 내 착각인 것일까...?
그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잿빛의 하늘이 몸도 마음도 무겁게 짓누르던 날, 소녀는 연기를 타고 한줄기 바람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두 번 다시는 이 땅을 밟을 수 없으리라. 질식할 것만 같은 정적이 사람들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았다. 기다란 산길을 따라 별장에 올라갔다. 소녀가 이 길을 아주 힘겹게 올라갔을 것이라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소녀를 내 주위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노트북을 켠다. 익숙하지만 낯선 소리가 울리고, 노트북의 액정에 낯익은 화면이 들어왔다. 메일을 확인한다. 새로 온 편지가 한통......아즈미가 보낸 것이다. 날짜는 어제인 것 같다. 내용은 간단했다.‘http://blog.navi.com/redshootingstar" 들어가 보라는 것인가...? 자판을 기계적으로 두드린다. 역시 예상대로 소녀의 개인홈페이지다.? 화면 왼쪽 상단에 DIARY 라는 문구가 보인다. 녀석이 직접 쓴 가상일기다. 쓰여 지기 시작한 것은...아마도 나랑 만나기도 전인 아주 오래전부터........ 일기속의 소녀는, 죽고 싶었다고 한다. 자살 사이트를 통해 차근차근 준비해 오던 죽음을, 그날따라 공원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나를 만나게 되어 떨쳐버릴 수 있었다고 한다. 소녀는 세상이 답답하다고 말한다. 구속된 자유, 철창에 갇힌 새를 면할 수 없는 자신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구속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 가상현실을 만들고, 그 속에서 제한된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자신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싫다고 말한다. 소녀는 드넓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있는 새를 향한 동경을 가지고 일기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했다.“멍청이........ 새는 결코 자유롭지 않아.......” 언젠가 소녀가 말한 레드슈팅스타를 좋아하는 이유가 귓가에 맴돈다. 짜증이 났다. 역시 이 녀석은 바보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바로 전날, 편의점에 들려 소녀가 그토록 좋아하는 레드 슈팅스타를 한가득 사서 녀석이 녹아있는 곳으로 갔다. 녀석이 물속 어디선가 바라보고 있을 것 만 같은 맑은 강물에 레드슈팅스타를 하나하나 집어던지고 작은 파문이 일었다 사라지는 커다란 호수를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파문이 사라져 갈 때 마다 마음이 가벼워 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니가 그렇게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다. 실컷 먹으라고......많이 힘들었을 테니깐.... 그러니깐...... 그곳에서 행복하게 살아.......”얼어 붙어버린 입가에서 하얀 연기와 함께 몇 마디 말소리가 흘러나온다. 소녀의 웃는 모습이, 엷은 살얼음으로 가득한 마치 하나의 아이스크림처럼 보이는 호수의 수평선 위로 보이는 것도 같았다. “힘들면.....힘들다고 말을 했으면 좋았잖아.......” ?하늘위로 너무나도 차갑게 보이는 푸른 달이 내 눈을 시리게 만들고 있었다.
1월의 얼어붙은 하늘.....그 높은 하늘 위를 날아가는 새가 떨어져 내린다.남쪽으로 미처 날아가지 못한 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