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가 런던 코벤트가든 로열오페라하우스 무대에 벨리니의 [노르마] 타이틀 롤로 데뷔했을 때,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태어난 젊은 소프라노 존 서덜랜드(Joan Sutherland, 1926-2010)는 노르마 아이들의 유모 역인 클로틸데 역으로 함께 무대에 섰다. 그 역은 정말 작은 배역에 불과했지만 그로부터 7년 뒤인 1959년, 서덜랜드는 도니체티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타이틀 롤을 칼라스에게서 넘겨받게 된다.
연출가 프랑코 제피렐리의 소개로 만난 뒤 처음으로 서덜랜드의 노래를 들었을 때 칼라스 역시 이 젊은 소프라노의 비범한 재능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 했다. 주위 사람들은 ‘칼라스가 자신의 입지에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고 기록했다. 이후 서덜랜드는 칼라스가 최고의 해석자로 군림해온 벨칸토 레퍼토리 배역 대부분을 물려받았다. 노르마, 루치아, 엘비라(청교도), 아미나(몽유병자) 등의 배역으로 벨칸토 옥좌에 등극한 것이다.
대영제국 데임(Dame: 남성의 ‘Sir(경)’에 해당하는, 여성을 위한 명예의 칭호) 칭호를 받은 존 서덜랜드는 꾀꼬리처럼 맑고 청아한 음색 덕분에 ‘나이팅게일’이라는 애칭으로 전 세계 오페라 팬들의 사랑을 받았고, 목소리를 악기처럼 자유자재로 다루며 ‘하이F샤프’라는 경이로운 고음을 내는 서덜랜드를 비평가와 전문가들은 ‘라 스투펜다(La Stupenda: 경이로운 인물)’라는 별칭으로 받들었다. 이 별칭은 서덜랜드가 1960년 베네치아에서 헨델의 [알치나]를 공연했을 때 감격한 청중이 “라 스투펜다!”라고 외쳐대는 것을 듣고 영국 ‘가디언’ 지에서 기사 제목을 이처럼 붙인 데서 비롯했다. 훗날 서덜랜드는 자신의 자서전 제목을 ‘라 스투펜다’로 지었다.
음악리스트
No.
존 서덜랜드 주요 아리아
1
도니체티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중 ‘광란의 아리아Mad Scene’ / 존 서덜랜드, 파리 오페라 코러스, 파리 콩세르바투아 오케스트라, 넬로 산티(지휘)
2
도니체티 [연대의 딸] 중 마리의 아리아 ‘C’en est donc fait’(온갖 부귀도)...‘Salut a la France!’(프랑스 만세!) / 존 서덜랜드, 로열 오페라하우스 합창단, 로열 오페라하우스 오케스트라, 리처드 보닝(지휘)
3
들리브 [라크메] 중 라크메의 아리아 ‘Ou va la jeune hindoue’(종의 노래) / 존 서덜랜드, 로열 오페라하우스 오케스트라, 프란체스코 몰리나리-프라델리
4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 중 비올레타의 아리아 ‘Sempre libera’(언제나 자유롭게) / 존 서덜랜드, 피렌체 대극장 오케스트라
존 서덜랜드는 1926년 11월 7일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이민자인 재단사였고, 아마추어 메조소프라노 가수였던 어머니는 서덜랜드가 노래를 좋아하게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아기 때부터 키가 크고 무게가 나가는 우량아였다는 점도 서덜랜드와 칼라스의 공통점이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했던 서덜랜드는 당연히 성악을 공부하고 싶어 했지만, 여섯 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집안 사정이 무척 어려웠던 탓에 10대 중반에는 성악을 포기하고 다른 직업을 가지려고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즈음 콩쿠르에서 우승해 장학금을 받은 덕분에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1961년 11월 서덜랜드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데뷔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성악 수업을 받기 시작한 것은 18세 때로, 부부였던 존 디킨스와 에바 디킨스가 서덜랜드의 첫 스승이었다. 스물세 살이었던 1950년, 서덜랜드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비중 있는 콩쿠르인 ‘선(Sun) 아리아 경연대회’에서 [아이다]의 아리아 [이기고 돌아오라니!]를 불러 우승을 차지했고, 곧 ‘모빌 퀘스트 어워드’를 수상하면서 콘서트/오라토리오 연주자로 성악 인생을 시작했다.
위의 두 가지 상금으로 런던에 유학할 수 있게 된 서덜랜드는 그곳에서 공부하던 중 1952/53년 시즌에 코벤트가든에 데뷔했다. 처음에는 [마술피리] 중 밤의 여왕의 첫 번째 시녀 역, [아이다]의 신전 여사제 역, 위에서 소개한 [노르마]의 클로틸데 역 등 작은 배역으로 시작했지만, 곧 비범한 재능을 인정받은 그는 [가면 무도회]의 아멜리아 역으로 성공적인 주역 데뷔를 해냈다. 그에 이어 [피가로의 결혼]의 백작부인, [아이다]의 타이틀 롤, [마탄의 사수]의 아가테 등의 주역으로 빠른 시간 안에 발돋움했고, 마침내 오펜바흐의 [호프만 이야기]에서 올림피아, 안토니아, 줄리에타 세 여주인공 역을 모두 소화하는 쾌거를 이뤘다. [오텔로]의 데스데모나, [리골레토]의 질다 역, 1955년 마이클 티펫의 초연작 [한여름 밤의 결혼]의 고난도 배역인 제니퍼 역도 그에게 주어졌다.
‘이졸데의 전설’이라 할 수 있는 노르웨이 소프라노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를 특별히 존경하고 숭배했던 서덜랜드는 일찍이 바그너 전문 가수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성량이 풍부하고 목소리가 컸기 때문에 스승들 역시 서덜랜드에게 바그너 여주인공 역할들이 어울린다고 믿었다. 그러나 바그너를 택하게 된 데는 드러내 말하지 않은 다른 이유도 있었다. ‘미운 오리 새끼’였던 칼라스의 젊은 시절만큼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서덜랜드는 외모에 어느 정도 열등감을 지니고 있었고, 자신처럼 키 크고 당당한 체구를 가진 데다 유난히 눈에 띄는 커다란 턱을 지닌 소프라노에게 어울리는 배역은 바그너의 이졸데나 발퀴레 역이라고 생각했다. 벨칸토 오페라의 청순가련형 여주인공 역에는 자신의 외모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동반자와의 만남이 이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던 같은 시드니 출신의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 리처드 보닝(1930- )을 알게 된 것이다. 음악적 교감과 동향인의 정으로 빨리 가까워진 이들은 1954년에 결혼했고 2년 뒤 아들 아담을 얻었다. 보닝은 처음부터 서덜랜드의 목소리가 ‘도니체티나 벨리니 같은 벨칸토 오페라에 적합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는 바그너 작품을 노래하면 서덜랜드의 맑고 가벼운 소리를 망치게 될 것이라며 아내가 된 서덜랜드를 꾸준히 설득했다. “저보다 보닝이 제 목소리에 적합한 레퍼토리를 먼저 알고 있었어요. 그에게 설득 당하고 나서 결국 그게 옳았다는 걸 저도 깨닫게 됐죠.” 서덜랜드는 그렇게 회고했다.
루치아와 노르마, 불멸의 연인
도니체티 [라메르무어의 루치아]에서 루치아 역을 맡은 서덜랜드. 1959년
영화감독이자 오페라 연출가 프랑코 제피렐리는 마리아 칼라스를 처음 만났을 때와 존 서덜랜드를 처음 만났을 때 받은 인상을 비슷하게 기억했다. “나무둥치처럼 뻣뻣하고 태도가 서툰 데다 옷으로 신체의 결점을 커버할 줄도 모르는” 가수들이었다. 바로 1959년 코벤트가든에서 제피렐리가 연출한 [루치아]로 서덜랜드는 불멸의 명성을 전 세계에 알린다. 제피렐리는 오페라 연출 작업 중에 가수들과 깊이 포옹을 하는 등 몸으로 부딪치며 연기 방식을 설명하는 편이었는데, 서덜랜드는 처음엔 당황해서 얼굴을 붉히며 뒤로 물러섰지만 이내 결심한 듯 심호흡을 하고는 자기편에서 열정적으로 제피렐리를 포옹했다고 한다.
이 공연의 지휘는 칼라스와 수많은 오페라 작업을 한 툴리오 세라핀이 맡았는데, 제피렐리를 설득해 이 공연의 연출가로 데려온 인물도 바로 세라핀이었다. 세라핀은 제피렐리에게 “엄청난 재능을 지녔지만 아주 문제가 많은 젊은 소프라노가 있다”고 알렸다. 바로 이 ‘문제’는 유연성 없고 경직되어 있는 서덜랜드의 연기력을 뜻했고, 제피렐리는 이 문제를 해결해 서덜랜드를 백조로 변신시켰다.
이날 공연의 청중은 대화를 나누듯 또는 묘기를 겨루듯 플루트와 음악을 주고받는 이 젊은 소프라노에게 넋을 잃고 열광했다. 칼라스의 뒤를 이을 새로운 스타의 탄생이었다. 서덜랜드는 그토록 어려운 ‘광란의 아리아’를 노래하며 무대 위를 날아다니게 만들어준 제피렐리에게 깊이 감사했다. 이후로도 서덜랜드가 광란의 아리아를 노래할 때면 너무 몰입해 흥분하다가 실신하는 관객들까지 생겨났다. 오늘날까지도 투명한 고음과 완벽한 콜로라투라 테크닉,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감동에 관한 한 서덜랜드를 뛰어넘는 루치아는 찾아보기 어렵다.
‘광란의 아리아’를 노래하는 서덜랜드. 1959년 코벤트가든.
서덜랜드는 1958년 첫 음반으로 바흐의 칸타타 [마음과 말과 삶]을, 이듬해에는 [위대한 목소리들(Grandi Voci)]이라는 제목으로 파이지엘로를 비롯한 18세기 작곡가들의 음악을 녹음했다. 줄리니, 프리처드, 보닝을 위시해 수많은 지휘자들과 함께 한 서덜랜드의 오페라들은 그 제목과 배역만 열거한다 해도 쉽게 끝나지 않는다. 헨델, 모차르트, 베르디, 바그너, 브리튼 등 바로크에서 현대 오페라에 이르기까지 그 다양한 스펙트럼만으로도 서덜랜드는 경이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레퍼토리의 폭을 논한다면 서덜랜드는 결코 칼라스를 뛰어넘을 수 없었다. 그의 강점은 무엇보다도 ‘테크닉으로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도니체티 [연대의 딸]에서 마리 역을 맡은 서덜랜드. 1959년
‘성악 비평의 제왕’으로 불리는 위르겐 케스팅은 “목소리의 성층권에서 서덜랜드의 소리는 별처럼 반짝이지만, 그 힘 있고 안정적인 목소리는 거의 언제나 구름에 덮인 듯하다. 발음에 무심한 편이어서, 그의 노래는 마치 가사가 있는 노래를 보칼리제(가사 없는 노래)로 바꾸어놓은 듯이 들린다.”라고 평했다. 발음에 관한 비판이 제기되었을 때 서덜랜드 자신은 “그런 고음에서 발음을 정확하게 할 수 있는 가수는 아무도 없어요.”라며 스스로를 변호했다.
오늘날 서덜랜드는 영상으로 감동받기보다는 ‘음반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소프라노’가 되었다. 그가 부른 [연대의 딸]의 마리 역할이 성악적으로 아무리 탁월해도, 나탈리 드세처럼 그 역할로 감정이입을 일으키는 외모를 지니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음반 속에서 금속성 고음으로 섬세하고 화려한 트릴을 들려줄 때면 그런 불세출의 나이팅게일이 존재했음에 새삼 감사하게 된다.
서덜랜드보다 아홉 살 아래였던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거의 20년 동안 서덜랜드의 상대역으로 수많은 벨칸토 레퍼토리를 노래했고 상당수의 음반 작업을 함께 했다. 1990년에 고향 시드니에서 은퇴 공연을 가진 서덜랜드는 20년 뒤인 2010년, 남편 보닝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83세로 삶을 마무리하며 전 세계 오페라 팬들의 마음에 새겨졌다.
이미지 목록
1976년 벨리니의 [청교도]에서 같이 노래하는 서덜랜드와 파바로티
서덜랜드와 루치아노 파바로티
추천음반
[CD] 도니체티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존 서덜랜드, 루치아노 파바로티, 셰릴 밀른즈, 니콜라이 기아우로프 등, 리처드 보닝 지휘, 런던 코벤트가든 로열오페라하우스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1971년 녹음
[CD] 도니체티 [연대의 딸], 존 서덜랜드, 루치아노 파바로티 등, 리처드 보닝 지휘, 런던 코벤트가든 로열오페라하우스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 1968년 녹음
[CD] 도니체티 [사랑의 묘약], 존 서덜랜드, 루치아노 파바로티, 도미니크 코사, 스피로 말라스 등, 리처드 보닝 지휘, 잉글리쉬 체임버 오케스트라 및 암브로시언 오페라 합창단, 1970년 녹음
이화여대 독문과 및 대학원 졸업하고 독문과 강사를 역임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독문학 및 음악학 수학, 서울대에서 공연예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연합뉴스 오페라 전문 객원기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오페라, 행복한 중독], [사랑과 죽음의 아리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