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문회를 지켜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추상같은 의원님들의 질문앞에 땀흘리는 후보들의 마음속에 분명히 한가지 생각이 있어지겠다. '더럽고 치사해서 나도 의원한번 해봐야지' 장관이 되어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나, 청문회 스타를 꿈꾸면서 실랄하게 파헤치는 의원님들이나 모두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청문회를 보면서 언젠가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대앞에 설 때를 생각하며 살아가야 하겠다는 결심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본문을 갖고 묵상하면서 더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인생의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지난주 한 텔레비전 방송에서 10살짜리 영재라는 이재혁이란 초3짜리 아이가 자기의 공부비법을 소개한다고 해서 들어봤습니다.
첫 번째를 말하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꿈을 가지라' 그것이 공부하는 첫 번빼 비법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더 걸작입니다. '꿈을 가져야 꿈을 향해서 노력하게 됩니다. 꿈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꿈에 가깝게 갈 수 있습니다.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오늘 집에 돌아가서 애들 잡지 마시기 바랍니다. 애가 꿈이 없는 것, 다 부모 잘못입니다. 자기 스스로 반성하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꿈 즉 인생의 목표가 있으면 두가지 장점이 저절로 생깁니다. 노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애들 공부안한다고 야단하는 대신 꿈을 갖도록 돕는 부모가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생기는 유익은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로 방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대접을 했습니다. 겉옷을 벗어 바닥에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메시아의 호칭을 예수님께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람들의 환호에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을 뺏기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왜 예루살렘에 올라오셔야 했는지 그 목적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경우에 초심을 잃는지 아십니까?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심각한 실패를 경험했을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되기 때문에 초심을 버리고 일단 살고보자고 생각합니다. 그때 죽어야 성공합니다. 초심을 지켜야 위대한 인생을 삽니다.
다른 하나는 지나친 성공을 했을때입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칭찬하고 놀라고 환호해줄때 초심을 잃어버립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모습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의 환호를 이용해서 더 유명해질 수 있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한번 더 행하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행하셨다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는 대신 잡혀가셨고, 매를 맞았으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의 성취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에는 상황에 따라 변하는 모순이 없었습니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고 한결같으셨습니다.
사람이 한결같기란 참 어렵습니다. 항상 웃는 모습, 항상 성실한 모습 흐트러짐이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일랜드출신의 작가이며 언론인인 코넬리우스 라이언은 2차대전을 무대로한 지상최대의 작전, 머나먼 다리등의 소설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는 5년간을 암으로 투병하다 죽었는데, 투병중에도 항상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기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하나님, 오늘도 좋은 날을 주심을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한번은 그의 아내가 뭘 그리 감사하냐고 묻자 그가 말했습니다. "새날을 맞는 다섯 가지 기쁨이 있는데 첫째, 사랑하는 당신을 다시 볼 수 있고, 둘째, 가족들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셋째, 병들어 눕기 전에 작품을 탈고한 것과 넷째, 병마와 싸울 힘을 주시고, 무엇보다 주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것에 대해서 감사한다오" 사람이란 존재는 감정의 동물입니다. 그래서 격정과 혼동과 분노 가운데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위대한 인격자일수록 인생의 위기속에서 한결같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가 세상에 끼쳐야할 영향력이란 사람들의 환호에 빠져 초심을 잃어버리지 않는 태도 그리고 그에서 비롯된 한결같음입니다. 이것이 인생을 향한 분명한 목적을 하나님께 두는 데서 비롯되었음을 기억하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네 청소하는 일이었습니다. 정치가들이나 대제사장을 만나신 것이 아니라 성전을 청소하는 일이 주님이 하신 일이었던 것입니다. 주부들이 가장 하기 싫어하는 일이 뭔지 아십니까? 청소입니다. 귀찮거든요. 그런데요, 가장 싫어하는 일을 가장 공들여 일해야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귀찮고, 더럽고 어려운 일 하기 싫어합니다. 그런데 청소란 잘못되고 흐트러진 것을 바로잡는 일입니다. 그래서 중요하고 잘해야 하는 일입니다. 강철왕 카네기의 후계자가된 사람은 차베스 쉬브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임시 청소부로 입사해서 정식 공장 경비가 되었습니다. 그의 성실성과 자기계발의 노력을 본 카네기는 그를 비서로 삼았고 초등학교 졸업학력의 차베스는 카네기의 회사를 물려받았습니다. 가장 귀찮은 일을 최선을 다할 때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에수님은 성전에서 가장 먼저 성전을 청소 즉 정화하셨습니다. 청소란 말의 뜻이 뭡니까? 버려야 할 것을 버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깨끗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일은 가장 먼저 하셨습니다. 고전3:16-17절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그렇다면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성전된 너희의 몸도 청소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안에 버려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잡고 깨끗하게 해야할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물질적인 탐욕입니다.
12절입니다.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뜻밖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분의 격노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제자들도 당황했을 것입니다. 평소 충돌을 피해오셨던 예수님이 정면충돌을 각오하고 행하신 이 사건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이렇게 격분하셨을까요? 성전을 정화하는 일 그것이 모든 신앙의 회복을 위한 첫 번째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신앙의 회복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척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자기는 물질에 욕심이 없는 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뒤로는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 정말이지 속물입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모습 뒤에는 깨끗한 척하는 제사장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역사적인 정황은 그렇습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샹겨나면서부터 성지순례라는 개념이 생겼고, 제물을 갖고 갈 수 없었기 때문에 돈을 갖고 와서 제물을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장사가 되니까 제사장들이 욕심을 냈습니다. 자기들이 장사군들을 앞세워 제물을 팔게하고 검수할 때 자기들과 계약한 장사꾼들의 제물이 아니면 NO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성전에서 제물을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득을 장사꾼들과 제사장들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가장 먼저 없어져야하는 모습이 바로 물질에 대한 탐욕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손경구씨가 쓴 돈과 영적성숙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탄은 이익에 초점을 맞추게 하지만 하나님은 먼저 바른 것에 초점을 맞추게 하신다.' 지난주 다이소라는 1000원 균일가 매장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1997년 IMF때 사업을 시작해서 지금 국내에 약550개정도의 점포를 가진 회사입니다. 일본다이소가 지분의 34% 투자했지만 국내기업입니다. 지난해 매출액이 3,300억인데 순이익은 10억입니다.
당장에 이익이 그렇게 작아서야?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명동에 300평규모의 매장이 있습니다. 천원에서 5천원짜리를 파는 매장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박정부 사장의 사업의 목표입니다. 유통의 문화를 바꾸겠다는 거에요. 이익을 추구하기보다 잘못된 유통문화를 바꾸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익이 초점이 아니라 바른 것을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현대인에게는 누구나 물질에 대한 욕심이 있습니다. 아무도 물질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정직하지 않으면 제대로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물질에 대한 욕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어느 정도 선을 그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이 재정을 사용하는데 훈련받지 못했기 때문에 탐욕을 잠재울만한 힘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성공을 유산으로 남기는 법에서 폴 마이어는 크라운 파이낸셜 미니스트리(Crown Financial Ministries)의 CEO인 하워드 데이턴를 통해서 어린아이들에게 4가지를 훈련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일상적인 책임감을 확립하는 것, 일에 전력을 다하는 것, 집에서 용돈을 버는 것,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마이어는 그 훈련들을 통해서 물질에 관한한 우리가 하나님의 청지기임을 가르쳐야 한다고 합니다. 중세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초대교회에는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교회는 금으로 기둥을 만들고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 하나님의 집을 지었다. 그래서 은과 금은 이제 우리에게 너무 많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잃었다."
바로 한국교회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안에 주님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위해 가장 먼저 물질적 탐욕을 씻어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두 번째는 형식적인 신앙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종교가 타락하면 가장 먼저 예배가 소홀히 여김을 받습니다. 유대왕국의 말기에 하나님은 짐승의 기름에 질렸다고 선언하십니다. 수없이 많은 예배가 드려졌지만 진정한 예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는 함정이 하나 도사리고 있습니다.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요소들이 익숙해져서 기쁨과 새로움을 잃어버리는 것이 수렁입니다.
이 수렁은 깊어서 한번 빠지면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저는 영성훈련을 섬기는 사역자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훈련의 취지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영성훈련은 자기가 섬기는 교회와 가정과 직장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갈 힘을 길러주는 훈련입니다.
이 훈련도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은혜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과 섬김이 변질된다는 것입니다. 왜그럴까요? 익숙해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1년에 2회이상 이 훈련을 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6개월마다 한번 섬기러가면 모든 것이 새롭기 때문입니다. 저는 익숙해지기보다는 어떻게 섬기는거지? 하고 고민하는 것이 하나님편에서 더 낫다고 믿고 있습니다.
뭐든지 익숙해지면 그만큼 큰 위험이 따르는 것입니다. 가끔 비행기 사고 소식을 듣습니다. 물론 피할 수 없는 천재지변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유능하고 경험이 많은 비행사의 소홀함 때문입니다. 타이타닉호는 항해전부터 빙산에 대한 경고를 받았고, 4월14일에는 무려 6번의 경고전문을 받앗지만 선장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경험과 관록을 의지했고 마침내 그로부터 10흘후 4월14일 빙산과 충돌하여 467명의 승객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청소를 통해서 예루살렘에 만연해 있는 형식적인 제사를 청소하셨습니다. 진정한 헌신이 없는, 거룩한 죄사함의 은총이 없는 에배를 거부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예배의 자세를 돌아보게 합니다.
경기도 수원시 우만교회에 다니는 여자 프로기사 조혜연 8단은 주일에는 절대로 바둑돌을 잡지 않숩니다. 주일을 성수하기 위해서입니다. 5년전 마스터스 대회때는 결승에 진출했지만 주일에 대국이 열려 기권했습니다. 오는 11월 광저우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선발된 조8단은 남녀혼성경기가 주일에 열린다는 이유 때문에 결국 불참을 결정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그녀가 시대착오적인 결정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주일을 너무 쉽게 범하고 있다는 생각도 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필요이전에 하나님의 뜻이라는 원칙을 저버리면 교회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 예배, 기도회, 성경공부 여러 가지 면에서 교회가 사람들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안에 있는 형식화된 기도, 예배, 봉사와 헌금, 체면유지를 위한 신앙생활을 버려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재철 목사는 새신자반이란 책에서 이런 간증을 합니다. “오래 전 토요일 밤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시 서재로 가려는데 마침 아이들이 컴퓨터로 오락을 즐기고 있었다. 나도 아이들 틈에 끼어 잠시 오락을 즐겼다. 고작 15분 정도였다. 그리고 다시 서재에서 주일설교 준비를 계속했다. 다음 날 아침, 예배당에 들어가서 눈을 감았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눈을 감는 순간, ‘뿅’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눈앞에 전자오락의 화면이 펼쳐진 것이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지만, 나는 그 순간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나는 목사다. 그리고 주일 1부 예배가 시작되기 전, 금요일 오후부터 근 40시간 동안 주일예배를 준비하면서 마음을 가다듬는다. 40시간에 비하면, 내가 전자오락을 즐긴 15분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짧은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그 짧은 15분 동안의 영상이 나도 모르게 주일 아침까지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면, 아무 준비 없이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교인들의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토요일 밤에 그 이튿날 드릴 흠 없는 예배를 위해 기도로 준비하는 사람의 예배와, 밤 12시가 넘기까지 TV를 시청하는 사람의 예배가 동일할 수는 없다. 예배 시간 전에 미리 예배당에 나와 기도로 예배를 시작하는 사람의 예배와, 예배가 시작된 후 허겁지겁 달려와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의 예배가 동일할 수도 없다. 예배는 준비된 마음으로 드려야 한다. 예배는 예배당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그대가 그대의 집에서 예배를 준비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우리의 신앙생활속에 형식화된, 너무 익숙해서 감동과 새로움이 없이 무의미하게 반복되고 있는 것은 없는가? 바로 그것을 청소하시는 주님의 손에 의해서 거룩한 성전으로 거듭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