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학번 야구 선수들
나를 영원히 야구의 매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한 선수들, 흔히 말하는 58년 개띠들이 바로 그들이다. (물론 당시의 관행으로 인해 57년이나 심하면 56년생도 더러 있었을 것이고) 58년 개띠면서도 1년을 유급 78학번이 되어버린 군상상고-동국대-해태 출신의 김성한선수나 대구상고-한양대-삼성 출신의 이만수선수 공주고-고려대-OB베어스 출신의 김경문 선수처럼 반대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 77학번 선수들을 한번 돌아보기로 하자
최동원, 그를 처음 보다
습관처럼 갔던 당시의 서울운동장, 76년 어느 하루는 나를 야구의 마력에 영원히 빠지게 만들었던 날이었다. 당시 나는 빨간색 유니폼이 너무도 인상적인 서울의 신흥 명문 신일고의 팬이었다. 당시 2학년이던 박종훈(현재 LG트윈스 감독) 1학년이던 故 김정수(고려대-MBC청룡)와 최홍석(고려대-MBC청룡)의 팬이기도 했다. 그날 신일고의 상대팀은 전통의 명문 경남고등학교.
당시 이 팀엔 이미 토성중학교 시절 부터 스포츠 신문에 이름을 올렸고 고1이 되면서 일간스포츠의 1면을 장식하는 일도 많았던 불세출의 투수 최동원이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단 한번도 그의 경기를 직접 본 적이 없었던 나는 그날 그의 투구를 보고 단박에 그의 팬이 되고 말았다. 경악 그 자체였다. 난 그 후 수십년을 야구장을 들락거렸지만 당시의 최동원을 능가하는 투수를 볼 수 없었다.
심지어 최동원 본인마저도 고3~대학 2학년 때의 투구를 더 이상 보여주지 못한다. 당시 신일고를 응원하러 갔던 나와 내 친구는 약속이나 한 듯 경남고를 응원하고 있었고 그 시간 부터 최동원의 팬이 되고 만다. 경기의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요즘 말하는 야신을 본 것이었다.
그 후 최동원은 나의 영웅이 되었다. 삼성에서 비참한 모습으로 은퇴할 때 조차도 그는 나의 영웅이었다.
하나 특이할 만한 일은 그런 불세출의 투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경남고의 전국대회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다는 점이다.(전국대회 1회 우승) 그도 그럴만한 것이 최동원 투수를 제외하고는 1루수를 보며 제2의 투수로 활약했던 동갑나기 왼손의 이우상(연세대-포철-청보핀토스)정도만 수준급의 선수였고 나머지 선수들은 마치 이대호와 여덟난장이 시절의 롯데와 같은 형편이었다.
김시진-김용남의 활약
반면 76년 최동원에 이어 고교야구 전체 투수랭킹 2~3위를 다투던 대구상고의 김시진투수(한양대-삼성-롯데 현 히어로즈 감독)와 군산상고의 김용남(한양대-해태-빙그레)투수는 각각 2학년생인 이만수와 김성한으로 대표되는 막강한 타력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또한 경남고는 당시 부산예선도 쉽게 통과를 장담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는데 그 이유는 동갑나기 좌우펀치 노상수(고려대-롯데)와 이윤섭(고려대-롯데)이란 수준급의 언더핸드(노상수)와 좌완(이윤섭) 투수를 보유했던 부산상고와 부산 예선을 벌여야 했던 상황이었다. 물론 상대적으로 그해애 전통의 명문답지 않게 빈약한 전력을 보였던 부산고와 경남상고의 부진탓에 부산에 주어진 전국대회 티켓 두장 중 한장은 쥘 수 있었으나 간혹 부산상고에게 예선에서 잡혀 부산 2위로 전국대회에 진출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부산고는 그해 아예 이름있는 선수들을 배출하지 못했지만 양상문(부산고-고려대-롯데-청보)가 1학년에 재학중이었고 경남상고는 영남대와 롯데에서 활약했던 84년 우승멤버 김재상선수가 77학번으로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해의 부산야구는 전국 투수랭킹 1위 최동원과 4위 노상수란 걸출한 투수들은 있었으나 타자쪽에선 흉년이었다.인접한 마산상고에서는 77학번중 동아대와 롯데에서 활약한 박용성과 건국대와 해태에서 선수 생활을 했던 초고교급 유격수 임정면 선수를 배출하는 실적을 올리고 있었다. 대기만성형의 박용성과는 달리 임정면선수는 날렵한 수비와 수준급의 타력을 보유한 특급선수로 출발했으나 프로에서의 성적은 미미했던 베짱이형의 선수였다.
야구 명문 인천고의 인호봉과 양승관
당시 수준급의 77학번 선수를 배출한 학교로 인천의 명문 인천고를 빼놓을 수 없다.
비록 그해 전국대회 성적은 좋지 않았으나 그 후 82년 프로야구 출범 이후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삼미 슈퍼스타스에서 그나마 에이스와 중심타자로 활약했던 인호봉투수와 양승관선수가 이해 인천고를 졸업한다.(둘 다 인하대 진학) 인천고의 투수 계보는 이전의 2년선배 임호균(동아대-삼미-롯데)에 이어 인호봉을 거쳐 김상기(인하대-청보) 최계훈(인하대-청보) 권명철(인하대-OB_해태)그리고 히어로즈에서 활약중인 김수경으로 이어진다.
양승관선수는 당시 너무나 좋지 않은 삼미의 성적때문에 차라리 강팀으로 트레이드시켜 선수를 키워주자는 일부팬들의 성화가 있을 정도로 당시 삼미에서는 군계일학의 타자였다. 특히 형제선수로도 유명했으나 그의 동생들은 형만한 아우 없다고 이름을 날리지 못하고 사라진다. 또한 인하대 삼미에서 대형포수로 활약했던 김진우선수도 이해 인천고를 졸업한다. 같은 인천지역인 동산고에는 후에 인하대를 거쳐 삼미에서 에이스 인호봉투수에 이어 넘버 투로 활약한 김재현투수가 동년배로 재학중이었다.
대구는 대구상고의 김시진 투수 외에 경북고의 배터리 성낙수(경희대-삼성)투수와 박정환(한양대-삼성) 포수가 나란히 77학번이었는데 성낙수는 그 전해 2학년 시절 1년 선배 당시 광주일고의 김윤환(광주일고-고려대-해태-태평양)에게 고교야구 최초의 3연타석 홈런을 맞은 후유증 때문인지 이 해에는 큰 활약을 못했다. 또 한 대건고의 마지막 세대인 장태수(상업은행-삼성)와 원민구(영남대-제일은행)가 배출된 해이기도 하다. 대건고는 이들이 졸업한 후 팀이 해체된다. 장태수는 이후 삼성과 롯데에서 외야수로 활약했지만 고교시절엔 유격수로 이름을 날렸고 원민구는 상당한 야구센스를 갖춘 선수였지만 삼성의 제의를 뿌리치고 제일은행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한다.
김종모도 77학번
호남지역은 위에 언급한 군산상고의 김용남 투수외에 같은 팀의 외야수 김종윤(건국대-해태) 선수가 77학번으로 있었고 고교야구 당시에는 큰 활약을 못했으나(실제로 당시의 기억이 전혀 없다) 그 후 영남대와 해태를 거쳐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강타자로 성장하는 광주상고의 김종모선수가 3학년으로 재학중이었다.
당시만 해도 강원도와 충청도는 야구 불모지였기에 이해에 마땅한 77학번 선수를 배출해 내지 못했다.(그 1년 이전에 대전고를 거쳐 연세대에 진학한 김태호란 투수를 통해 충청야구는 어느 정도 전국대회에 얼굴을 비춘 상태였고 1년 후 김경문 오영세 배터리의 활약으로 공주고가 전국대회 최초의 우승팀이 된다)
양세종, 김광수,선우대영도 빛났던 이름들
서울에선 우선 서울고의 특급좌완 선우대영(중앙대-OB베어스)선수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해 경남고의 이우상투수와 부산상고의 이윤섭 투수를 능가하는 고교 제1의 좌완투수였으나 팀 전력의 누수로 인해 큰 영광은 누리지 못했다. 그 후 프로에 진출해 고교시절의 명성을 찾는 듯 했으나 결국 병역문제로 인해 미국행을 택하며 짧은 프로야구 인생을 마감한다.
투수로는 서울시 예선에서 성동고를 상대로 퍼펙트게임을 기록하며 두각을 나타냈던 황기선투수(유한공고-OB베어스-해태타이거스...한대화와의 트레이드로 더 유명해진 선수) 가 또한 77학번이며 야수로는 장충고 연세대를 거쳐 OB에 입단한 명3루수로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했던 양세중선수가 있다. 특히 양세종선수는 입학과 동시에 주전 3루수로 활동해 같은 해 입학한 최동원 선수와 더불어 연세대 야구의 전성기를 누린다.
이 외에 선린상고 건국대를 거쳐 역시 OB에서 명 2루수로 활약했던 김광수선수도 77학번 출신이며 프로야구 원년 코리언시리즈 1차전에서 OB베어스의 깜짝선발로 등장해 호투했던 언더핸드 투수 강철원(농협-OB베어스) 투수도 이해 동대문 상고를 졸업한다. 위의 선수들 중 프로야구 선수 활동중 현역병으로 입대해 그 기량을 십분 발휘하지 못했던 노상수선수와 양세종선수는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기 그지없다.
대충 돌아 본 77학번 야구선수들의 활약은 활약 그 자체로 보다 나에게는 나를 야구의 매력에 빠지게 만들었던 하나의 연표로서 내 개인사엔 무척이나 중요한 자리를 하고 있다.
첫댓글![헐](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34.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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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학번에 정말 대단한 선수들 많았었내요![~](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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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92황금학번을 정말 좋아했었는데 저랑 동갑이라기 보다는 정말 대단한 선수들이 많았었죠 92황금 학번들 ..저와 형님사이의 연륜차이가 이만큼이나 큰것이군요^^
역시 그시대를 주름잡던 선수들이 엄청많았네요 그시대의 야구는 정말이지 먹고 살기힘든시절 국민들을 하나로 모을수있는 고교야구가 엄청난 인기가 있었다는건만 조금들어서 아는데 실로 엄청난 선수들이 활약했네요 그리고 박용성 선수는 롯데의 4번타자로써 후반기에는 홈런왕까지 차지했었고 ㅎㅎ 정말 프로야구의 붐을 이끌어준 1세대분들이라 말할수있겠네요 역시 울나라야구역사도 아마로보면 정말 무시할수없는 역사를 가졌네요~~^^좋은글 감사합니다 벽천행님~~ㅎㅎ
이거..머....76년산인 저로써는.....태어나던 때 생각이 나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