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고향은 어디인가
백임현
이사를 많이 하다보니 어쩌다 대형병원 옆에서 노년을 살게 되었다. 어느 새 이십 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처음부터 좋아해서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우연이기도 하고 필연이기도 하였다.
시골 태생인 남편은 퇴직 후에 고향에 가서 산다는 것이 꿈이었다. 성장기를 시골에서 보냈지만 어른이 되고부터는 평생을 서울에서 살았으니 그에게 이곳은 언제나 타향이고, 일시적으로 머무는 낯선 객지일 뿐이었다. 자신이 뿌리내려 정착할 곳은 어린 날 송아지를 끌고 다니던 풀밭이 있고, 남의 집 뜰에서 개구쟁이 친구들과 콩서리 참외서리를 하며 즐겼던 추억이 있고 구슬픈 만가를 읊으면서 꽃상여가 올라가던 선산이 있는 그곳이 그가 마지막 여생을 보내야 할 땅이었던 것이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했던가. 여우도 죽을 때는 태어난 고향 쪽으로 머리를 두고 바다에서 살던 연어도 험한 물길을 거슬러 올라 태어난 곳으로 다시 와서 죽는다는 것을 보면 남편의 고향 사랑은 원초적 속성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금의환향도 아닌 초라한 귀향이면서 그토록 집착하는 모습이 어떤 때는 조금 별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오래전부터 푼푼이 모은 돈을 모아 고향에 작은 텃밭을 마련했고 직장을 나오자 곧바로 귀향 준비를 서둘렀다. 칠백여평 채마밭 둘레에 대추나무 밤나무 등 각가지 유실수를 심었고, 돈을 아끼지 않고 여러 가지 화초를 심어 집터를 조성했다. 그러나 집을 지을 수가 없었다. 절대농지에는 건축허가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골행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때 마침 고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의정부 민락동에 새로 조성되는 아파트 단자로 가게 되었다.
고향은 아니었으나 도심에서 벗어난 외곽지역이라 공기도 맑고 집 뒤에 등산하기 알맞은 산이 있어서 산을 좋아하는 남편은 그런대로 적응하면서 살만하다고 했다.그러나 나는 어설프고 엉성한 점이 많았다. 신설 개발지라 편의시설이 부족해 살기에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교통이 불편하고 시장도 멀었으며 무엇보다도 병원이 멀다는 것이 때로 난감했다. 남편과 달리 나는 원래 시골 생활에 대해 별로 애착이 없었기 때문에 적응해 살기 힘들었다.
심신이 피곤해서였을까. 아니면 어른들이 말씀하듯이 이사를 잘못 온 것일가, 이상하게도 내 건강이 점점 나빠졌다. 응급실에 실려가야 하는 상황이 자주 생기는데 사실 신설단지에서는 그것이 용이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시골생활 3년을 못 넘기고 다시 서울로 유턴하였다. 남편이 등지고 떠났던 도시생활, 남편에게는 미안하고 죄송한 노릇이었다.
결국 아이들이 우리 두 노인을 위한다고 자리 잡은 곳이 병원 동네였다. 병원이 가까워도 이렇듯 담장을 같이하는 지척은 처음이다. 저녁에 불을 켜서 병실마다 불을 밝히면 병원은 호화유럽 유람선처럼 화려해 보인다. 그러나 낮에 보이는 병원 풍경은 우울하다. 시도 때도 없이 다급하게 울려대는 구급차의 경적 소리는 신경이 씌이고 항상 보게 되는 각양각색의 여러 환자 모습은 저녁의 유람선과는 거리가 멀다.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걸음을 옮기는 노인,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에 실려 무기력한 표정으로 이끌려 가는 환자. 가끔 마당에 정차한 대형 장의피를 보게 될 때는 아침부터 마음이 무겁다. 노인에게는 병원이 가까워 좋은 점도 있지만 젊음이들이 살 곳은 아닌 듯싶다.
이곳을 주거지로 택한 것은 남편의 뜻이 아니라 순전히 나의 건강을 고려한 것이었기 때문에 남편에게 늘 미안했다. 하지만 탓하지 않고 남편은 승용차로 시골 텃밭을 오르내리며 무난히 잘 지내줘서 고마웠다.
그러나 나이에는 장사 없고 노인의 건강과 보리이삭 잘 된 것은 믿을 것이 못된다는 말처럼 팔십 대 중반을 넘어서자 운전하며 시골 다니는 일도, 텃밭 가꾸는 일도 힘에 부치도록 점점 기력이 쇠잔해져 갔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갑자기 병세가 심해져 그렇게도 보기 싫어했던 병원의 환자가 되었다. 그로부터 5-6년 병원 길을 다니며 우리도 병원 풍경이 되었다. 이제는 명분이 뒤바뀌어 나를 위한 병원이 아니라 그를 살리는 병원이 되었다.
병세가 길어지면서 인지능력에도 이상이 와 사고력이 단순해지고 현실감각이 혼란스러울 때가 종종 있었다. 특히 공간개념이 불분명해졌다. 그때부터 한동안 주춤하다 싶었던 고향타령이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자다 말고 느닷없이 밭에 가서 풀을 뽑아야 한다고 설치는가 하면, 어느 때는 선산에 성묘 가는 일이 급하다고 작업복을 챙겨입고 나서기도 했다. 정신없는 중에서도 그가 지향하는 곳은 오로지 고향이었다.
원래 조용한 성품이라 병원 같이 사람 많은 곳을 싫어했는데 그는 거의 말기에도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병원가는 일을 귀찮아하지 않았다. 어서 병을 고쳐 고향에 가서 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텃밭에 그가 심은 매화꽃이 만개한 봄날 눈을 감았다. 그리도 가고 싶어하던 고향의 선산에 누웠다.
오늘도 병원 길에는 언제나처럼 많은 환자들이 드나든다. 살아야 한다고 살고 싶다고, 살아서 고향에 가야 한다고 혼신의 힘을 다해 병원 길을 걷던 그의 모습, 지금은 어느 하늘나라 어느 고향길 가고 있을까.
첫댓글 고향 을그리워 하시다 하늘 나라로 가셨네요.
지금 쯤은 고향 텃 밭에서 환 하게 웃고 계실겁니다.
공감이 갑니다.
글을 잘쓰셨네요~^
이 글 속에 제 처지가 겹칩니다.
저도 머지않다는 생각에 이르면
서글퍼집니다. 억지로라도 제겐
어제와 내일은 없고, 오늘만 있다며
자위합니다.
텃밭에 심은 매화꽃이 만개한 봄날, 눈을 감았다. 라는 문장에서 슬픔이 와락 밀려옵니다.
내년 봄에는 저 벚꽃을 볼 수 있을까? 봄이면 늘 듣던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만개한 벚꽃을 보면 늘 슬픕니다.
우리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