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개마고원을 휩쓸고 지나는 바람, '空' 이련마는
어쩌자고 너는 저잣거리의 삶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가!
22.12.20, 샛별리 뒷산에서 『경허』를 완독하며.
고해 속의 물고기, 소년 동욱
경허가 살다간 1846년에서 1912년 조선은 개항 직전의 뜨거운 공기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외세에 대항하는 수많은 의병들의 저항과 농민전쟁이 해마다 계속되는 암울한 시대였다. 밀려들어오는 서구와 서구화된 일본의 세력 앞에서 개화당과 척사파로 분열된 상층 지식인들은 대립을 거듭하였으며, 외세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려는 집권층의 반동성은 민중들에게 더욱 참혹한 수탈의 고통을 주었다. 이에 저항하는 민란이 도처에서 일어나서 민중들은 유랑의 길에서 떠돌아야 했다.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에서 굴하지 않는 조선의 운명을 이렇게 적었다.
"조선은 동양역사의 장거리에 앉은 늠름대장부요, 서리 아래 국화요, 눈 속의 매화요, 또 바람 가운데 대竹요, 진흙 속에 핀 연꽃으로서 계속 몰려 지내면서도 한 번도 몸을 더럽히지 않은 절대 철부哲婦였습니다."
경허는 1846년 8월 24일(헌종 12년, 丙午) 전주 자동리子東里에서 부친 송두옥宋斗玉과 모친 밀양 박씨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태어난 뒤 사흘 동안 울지 않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만해 한용운은 자신이 작성한 <경허약보>에서 '선사의 속성은 송씨, 법명은 성우惺영리할성牛이며 처음 이름은 동욱東旭, 법호는 경허,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라고 적고 있다.
경허의 출생연도는 한용운의 1849년설과 한암 중원漢巖重遠의 1857년설, 김지견의 1846년설이 있다. 그러나 이 출생연도들은 무려 3년에서 11년간의 편차가 있어 연보 작성에 많은 어려움을 주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김지견의 연대비정과 <<경허집>>에 수록된 경허의 진술을 토대로 김지견의 1846년 출생설에 동의하고자 한다.
경허 자신이 1902년(대한 광무 6년)에 작성한 <범어사금강암칠성각창건기>에서 '이제 이미 늙어 영고성쇠를 다 겪었으니 백 가지 생각이 식은 회처럼 식어버렸도다(今己老矣閱(검열할열)盡榮枯慮灰冷)' 라고 자신의 노쇠함을 한탄하고 있다. 만약 1857년 출생설이 맞다면 1902년 당시 46세인 경허가 자신의 노쇠를 이처럼 한탄할 수가 있을까? 김지견의 1847년 출생설에 의하면 경허의 나이 이때 57세이다. 이때쯤 되어야 비로소 늙음을 한탄할 수 있지 않을까?
경허의 부친 송두옥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동욱은 1854년 9세의 나이로 모친 박씨를 따라 상경하여 광주廣州 청계사 계허대사의 문하에서 머리를 깍고 사미계를 받음으로써 초기의 수행을 시작한다. 경허의 친형 태허泰虛스님은 이미 공주 마곡사에서 출가하여 수행자의 길을 걷고 있었다.
불교수행자들이 닦는 초기수행의 본질은 정신적인, 육체적인 집중과 마음의 청정을 닦는 일이다. 즉 집중과 청정은 불교수행의 준비단계인 것이다. 행자들에게 불교문헌을 가르치기보다는 먼저 청소와 취사 등 여러 가지 단순노동을 반복하게 한다. 단순노동이야말로 주의력을 한곳으로 응집시키는 집중력과 마음의 때를 씻어내는 청정을 닦기 위한 가장 직접적인 수행방법이기 때문이다.
선종의 제5조 홍인(弘忍, 601~674)은 어느날 질문 하나를 받았다.
"수도자는 왜 도시나 마을에서 수도하지 않고 깊은 산림에 은둔해야 합니까?"
선문의 조사, 홍인은 대답한다.
"훌륭한 건물의 재목은 원래 심산유곡에서 나온다. 세속에서 자라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쉽사리 칼이나 도끼에 찍히지 않은 채 하나하나가 빼어난 재목으로 자라난 뒤 비로소 귀중한 마룻대나 대들보로 쓰이게 된다. 따라서 정신을 그윽한 산림에서 다듬고 혼탁한 세속의 먼지를 털어낸 다음 수도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리하여 깨달음의 나무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다."
한 사람의 초기수행은 그 수행자 일생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다. 좋은 환경과 훌륭한 스승 문하에서 육체적인 절제와 종교적인 의지, 그리고 학문에 대한 드넓은 안목을 익히게 되면 그 수행자의 역량은 ~ 틀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인간의 마음에 관한 공부라면 반드시 십여 년은 심산유곡에 묻혀 자연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 경학經學이든, 선수행이든, 포교든 평생 이끌고 갈 힘이 생긴다.
이름을 떨치는 강백이 되다
1859년(철종 10년) 14살의 사미승 동욱에게 문자의 세계를 일러 준 최초의 스승이 나타난다. 그는 청계사에 와서 한 여름을 지내는 선비였다. 선비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묵묵하게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사미승 동욱의 순수한 모습에 이끌렸다. 선비는 소년 동욱을 불러 앉혀 천자문을 가르쳤다. 동욱은 선비에게 글을 배워 눈에 스치면 배우고 듣는 대로 문리를 해석할 만큼 큰 진보가 있었고, 마침내 <<통감사략>>을 하루에 대여섯 장씩 외우는 재능을 발휘한다. 선비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으로 뛰어난 재능을 가졌구나. 옛말에 천리마 같은 훌륭한 말도 백락(중국 전국시대 말 감정가) 을 만나지 못하면 소금수레를 끌며 고생한다더니 지금 동욱자네가 바로 그렇구나. 훗날 반드시 큰 그릇이 되어 일체중생의 스승이 되어지이다."
그러나 사미승 동욱의 청계사 시대는 글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욱의 스승 계허화상의 환속으로 끝난다. 환속이란 출가의 삶을 버리고 자신이 떠나왔던 세속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스승 계허는 어린 나이에 자신의 문하에 들어와서 사시사철, 밤낮으로묵묵히 자신의 주변을 맴돈 동욱을 저버리는 것이 가슴 아팠다. 애석하게 여겨 계룡산 동학사의 만화萬化 강백에게 십대의 동욱을 추천하는 편지를 들려 동학사로 향하게 한다.
만화라는 법명을 가진 스님은 두 분이 있다. 경허의 스승 만화보선과 금강산 건봉사의 만화 관준이다. 만화관준은 1881년(조선 고종 18년 辛己)에 그 유명한 건봉사 제4회 염불만일회를 개설한 인물이다. 지금은 비무장지대의 폐허로 남아 있지만 옛 건봉사의 사적기에는 만화당비와 만화당진영을 전하고 있어서 그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또한 만화 관준은 만해 한용운의 스승이다. 한용운은 스승 만화를 위해 '만화화상을 대신하여 임향장林鄕長'이라는 시를 남겼다.
경허를 불교경학의 세계로 이끈 은혜를 베푼 만화 보선은 경허 자신이 '만화강사는 나의 수업사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以而萬化講師 爲我之受業師可也)'라고 추억하고 있는 중요한 인물이다. 열혈의 독립운동가로서 비극적인 옥중사死를 맞이한 초월동조(初月東照, 1878~1944)스님이 쓴 <<계룡산동학사사적>>에는 동학사를 중심으로 한 만화 보선의 계보가 잘 나와 있다.
"만화는 금강산 스님이다. 보선은 그 이름이며 권화문의 제일 선지식이다. 우운友雲스님이 바로 그의 고족이며 운구雲句, 남화南化, 허봉虛峰스님은 모두 만화의 법을 이은 스님들이다. 지금 閣에 있는 龍岩과 虎峰 두 스님의 진영은 바로 추사秋史가 撰(지을찬)한 것이니 바로 만화스님과의 인연으로 오게 된 것이다. 용암은 바로 증옹사曾翁師이시다.
경허는 당시 권화문두勸和門頭의 제일 선지식이라고 불린 만화보선의 문하에서 불교경학의 기본적 체계인 일대시교一代時敎를 수료한다. 권화문이란 대중 교화의 탁월한 방편을 의미한다. 만화보선은 불교경학에 숙달한 강백인 동시에 추사 김정희와도 교류를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만화 보선은 경허의 자질이 영특함을 보고 각별한 지도를 아끼지 않았다.
한함 중원이 작성한 <선사경허화상행장>은 경허의 강원생활을 보여주는 일화를 적고 있다.
"하루의 과제로 정해진 경소經疏(트일소)를 한 번 보고 곧 외워버리고 나서는 종일 자다가 다음 날 물음에 답할 때에는 그 문의文義를 풀이함이 마치 장작을 쪼개고 등불을 비추듯이 환하였다. 강사가 그 잠이 많은 점을 탓하는 한편 그 재주를 시험하고 따로 <<원각경>>의 소초 대여섯 장에서 열 장 정도를 과제로 정하여 주었다. 그러나 화상은 여전히 잠을 자면서도 외우는 것은 마찬가지여서 대중들이 모두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감탄하였다."
훗날 그의 설법과 선시, 여러 記文에서 보이는 심원유장流長한 문체와 내용들은 모두 이 시기의 수업에서 그 기초가 준비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강원시절 경허는 불경뿐만 아니라 유명한 學塾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儒家와 老裝의 전적들을 공부하여 한 경지를 이룬다.
<경허약보>에는 이 시기의 경허를 '공부를 하는 데 한가하지도 바쁘지도 않게 해도 남보다 앞섰으며 내외전을 섭렵하여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팔도에 이름을 떨쳤다'고 적고 있다.
무더운 한 여름에 경전을 공부하는 학승들은 모두 옷을 입고 바로 앉아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경허는 혼자 옷을 벗어붙인 채 아무렇지 않게 경전을 읽으면서 형식과 의례를 좇지 않았다. 一愚라는 강사가 경허를 보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참으로 大乘의 法器로다. 그대들로서는 따라가지 못한다."
袁(옷길원)宏(클굉)道의 '학문은 다른 여러 가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직 만 가지를 두드려 한 조각을 이루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學問只要打成一片耳)' 는 타성일편의 삼매에서 비롯된 무상무념의 한 표현이 아니었을까?
<<宗鏡錄>>을 쓴 영명 연수 역시 경전연구자, 불교연구자가 체득해야 할 자기 준거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만약 부처님의 가르침을 연구하고자 寶藏을 찾아볼 때는 낱낱의 모든 것을 자기에게 돌려 녹여내어 언어가 참다운 마음에 그윽하게 합일되어야 한다. 다만 중요한 것은 말뜻에 집착하거나 문구를 따라서 견해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바로 모름지기 경전을 찾아서 읽되 본래적인 진리에 계합한다면, 곧 無師智가 현전할 것이며 天眞의 도에 어둡지 않을 것이다."
1868년(고종 5년) 23세의 경허는 동학사에서 대중들의 추대를 받아 불교경학을 강의하는 강백으로 강의를 시작한다. 출가한 지 14년 만의 일이다. 경허의 淸(맑을청)敏(민첩할민)한 강의를 듣기 위해 사방의 학인들이 마치 물 흐르듯이 몰려오고 강원은 큰 성황을 이룬다.
조선중기 이후부터 구한말까지 강원의 강사는 반드시 학승들의 모임인 學契에서 선출하였다. 함께 공부하던 수십 명의 동료들, 선배 노덕스님들이 강사취임에 동의한다는 도장을 찍어야 했다. 그만큼 강원의 강사는 명실공히 한 시대 불교학의 수준을 가늠하는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경허는 1899년 11월 1일 해인사에서 작성한 <함께 선정과 지혜를 닦아 도솔천에 나며 성불하기를 권하는 결사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세존께서 이르시기를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며 요의경了義經을 따르고 불요의경을 따르지 말라" 하셨다. 지금까지 열람해 온 화엄경. 법화경. 능엄경. 원각경. 유마경. 열반경 등의 대승경전과 마명. 용수. 무착. 천친 등이 지은 대승의 논서들과, 전등록. 종경록. 선문염송 등의 선문어록 가운데 어느 곳에 말세 중생이 진정한 도를 참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문구가 있었던가?"
이 글에 보이는 문헌들은 대장경의 백미를 망라하고 있다. 경허는 이 대장경의 골수를 면밀하게 연구하고 자신의 언어로 수용했으며 大悟 이후 이 대총서의 정수를 선체험의 정상에서 막힘 없이 설파해낸 인물이다. 강단에 선 경허는 주로 <<화엄경>>을 강의했다. 화엄사상은 삶과 죽음이 무한히 반복되는 윤회의 연속적 순환과정을 토대로 불교의 궁극적인 이상인 붓다의 법계를 지향한다. 대승불교의 웅대한 설계도인 <<화엄경>>은 불성의 전개가 무한히 지속되는 붓다의 법계가 중중무진, 무한히 개방되어 있다고 설한다.
죽음의 처마 아래에 서서
경허는 1879년(고종 16년) 6월, 옛날의 스승 계허화상을 찾아뵙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가 34살 되는 해였다.
경허는 길을 떠났다. 수많은 초가지붕들을 인 산비탈의 작은 집들이 도로도 없이, 눈에 띄는 높은 건물도 없이, 헐벗은 산야를 무대로 밀집해 있는 초라한 회색의 애처로운 풍경을 가진 마을들을 지나서 서울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여행 도중 경허는 天安의 한 마을을 지나다가 폭풍우를 만났다. 경허는 민가의 추녀 밑에서 비를 피하려했으나 집주인은 경허에게 한사코 거부의 손짓을 내저으며 말했다.
"저리 가시오."
쫒겨난 경허는 그동네의 여러 집을 찾아갓지만 모두 내쫓아서 천지를 분간할 수 없이 퍼붓는 폭풍우를 피할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의 야박한 심성을 이상하게 여긴 경허가 쫓아내는 이유를 묻자 분노와 공포에 질린 한 마을 사람이 경허를 질타하듯 말했다.
"이보시오, 뉘신지는 모르겠으나 이 마을은 전염병이 치열하여 걸리기만 하면 서 있던 사람도 죽으니 어찌 손님을 들일 정신이 있겠소?"
경허는 낙숫물이 떨어지는 처마 밑에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주검들이 거적에 덮여 있는 것을 보고 목이 조여들고 숨이 막혀왔다.
한암 중원은 죽음의 벼랑에 홀로 선 스승 경허의 심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화상께서 이 말을 듣고 모골이 송연해지고 정신이 아뜩해져서 죽음이 임박하여 목숨이 한 호흡 사이에 끊어질 것 같았으니, 일체 세간이 모두 꿈속에서 바라보던 경치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다."
실제로 역사는 1879년(고종 16년) 6월 일본으로부터부산에 전염된 콜레라가 전국에 퍼졌으며, 7월 콜레라 때문에 부산 무역정停을 폐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 조선에 와 있던 프랑스인 천주교 선교사 샤를르 달레(1829~1878)는 <<한국천주교회사>>(1864)에서 이렇게 적었다.
ㅡ계속. 집자 첫날. 22.12.20, 23:35 終
"조선인들은 그 이야기를 할 때면 지금도 벌벌 떤다. 어디를 가나 죽음이요, 약은 ㅎ나도 없었다. 어떤 가정에서든지 초상이 나고, 어떤 집에서든지 시체가 있고 또 가끔 길에 송장이 즐비한 경우도 있었다...... 이 시기에는 콜레라가 이 나라에 뿌리를 박다시피 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막대한 희생을 내게 했는데, 특히 1858년과 그 후 4,5년간이 더욱 심했다."
조선후기 사회가 경험한 전염병과 기근으로 인한 전국적인 인적 손실은 전란의 피해보다 극심해서 조정에서는 活人署와 惠民署를 설치하여 약과 식량을 배급하는 구호활동을 폈다. 그러나 역사는 '집권층의 무능과 비리로 그나마도 제대로 행해지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이 시기의 전염병과 기근은 결국 전통 농촌사회의 해체와 유랑민을 대량으로 발생시켜서 조선왕조의 해체를 촉진하게 된다.
경허는 바로 서 있던 사람도 전염병으로 금방 쓰러져 죽는 지옥도를 목전에서 보았다. ...누구보다도 유창하고 자신 있는 어조로 불교의 진수를 강의해 온 그였지만 지금 자신의 목전에 드리워진 죽음의 손길 앞에서는 얼마나 무력하고 헛된 일인지를 알리는 내면의 번개가 경허의 존재를 송두리째 흔들고 지나갔던 것이다.
이 돌연한 無常의 뼈저린 체험으로 훗날의 경허는 <참선곡>의 첫 소절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홀연히 생각하니 도시몽중都是夢中이로다
천만고 영웅호걸 북망산 무덤이요
부귀문장 쓸데없다 황천객을 면할소냐
오호라 나의 몸이 풀끝에 이슬이요
바람 속의 등불이라"
인간은 모두들 제각기 다른 다양한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앞에서는 죽음의 방식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마지막에는 사막만이 남는다. 한번 그 사막을 본 사람은 더 이상 삶이 영원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나 생로병사라는 인간의 유한함을 깊이 사유하고 숙업을 정화하는 마음의 깨달음을 향해서 걸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너무나 쉽게 사라져 버리는 젊음과 질병과 사멸의 길을 향해서 천천히, 때로는 급격한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가는 삶의 실상을 숨기거나 잊고 싶어한다. 그러나 '당신은 죽음에 관심이 없지만 죽음은 오직 당신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둘 필요가 있다.
불교의 가사문학을 대표하는 회심곡의 유장한 가락은 이 비애의 중심에 자리 잡은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체념을 '할 수 업다 할 수 업다...... 라는 자탄의 어조로 노래한 뒤, 인간에 이 공도를 뉘가 감히 막을손가'라는 자탄의 어조로 노래한 뒤, 눈앞의 물질적 퓽요와 육신의 젊음에 사로잡혀서 죽음의 얼굴을 잊고 있는 자신의 無明을 돌이켜서 회심의 길을 찾고자 한다.
"영혼의 검은 새가 날아가는 그날
그대 육신의 잎들은 떨어져 흩어지고
육신은 오물이나 재가 되리니
그 어여쁨과 생명의 광채는
어디서도 보지 못하리라"
명부의 그늘을 지배하는 죽음의 신은 '왜 그토록 인간은 삶에 집착하는가? 죽음이야말로 영원한 안식이라는 것을 인간은 모른다는 말인가?' 라는 의문을 풀기 위해 젊은 청년으로 변신한다. 죽음의 신은 생기 넘치는 젊인이들을 넋을 잃고 바라보기도 하고 죽음 앞에서 발버둥치는 노인들을 싸늘한 눈초리로 바라보기도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호수에 빠진 어린이를 구한 뒤 비애를 느끼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길을 잃고 영원한 中陰의 세계를 헤매고 다닌다는 이야기였다.
"실낫같은 이내몸에 팔둑갓흔 쇠사슬로 결박하야 끄러내니
혼비백산 나죽겠네 여보시오 사자님네 노자도 갓고가게
만단개유 애걸한들 어늬사자 들을손가 애고답답 서른지고
이를어이 하잔말가 불상하다 이내일신 인간하직 망극하다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진다고 설어마라 명년삼월 봄이오면
너는다시 피련마는 우리인생 한번가면 다시오기 어려워라
북망산 돌아갈제 엇지갈고 심산험로 한정업난 길이로다
언제다시 도라오랴 이세상을 하직하니 불상하고 사련하다
처자의 손을잡고 만단설화 다못하여 정신차려 살펴보니
약탕관 버려놓고 지성구호 극진한들 죽을목숨 살릴손가'
불교에서는 이 죽음의 신을 無常殺鬼라고 부른다.
불교는 인생의 몽환을 깨닫고 苦와 번뇌를 지멸하는 해탈의 道를 설한다. '태어남은 고통이며 늙음은 고통이다. 병드는 것은 고통이며, 죽음에 이르고 마는 숙명도 고통이다. 원한 있는 자와 만나는 것도 고통이며, 애착하는 존재들과 헤어지는 것도 고통이며, 욕구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음도 고통이며, 다섯 가지 감관이 평화롭지 않은 것도 고통이다'라고 설한다. 그러나 어찌 인생의 고통이 여덟가지 뿐이겠는가.
'인생은 불안과 위기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그 원인과 해탈의 길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그렇다면 불교는 허무주의도 염세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허무와 염세의 어두운 심연을 뛰어넘어서 미망을 벗어버린 지혜와 자비의 삶을 실현하는 길을 설하는 가르침인 것이다.
붓다는 자신의 입적을 예감하고 쿠시나가라로 향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던 도시 바이샬리를 향해 "이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며, 인간의 삶은 감미로운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눈을 가리는 일상의 엷은 커튼에 속아서 죽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죽음의 검은 날개는 언제나 우리 곁을 퍼득이며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은 얼마나 허술한가. 죽음은 장소와 시간에 상관없이 언제까지나 당신을 추격하는 영원한 스토커인 것이다.
禪은 靈智不昧(새벽매??), 本證妙修를 가르친다.우리가 아무리 어두운 미망 속에 있더라도 우리의 영지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이 본래 증득한 영지를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영지가 어떤 순간에 눈뜨게 되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이를 '직관'이라고 부른다.
가톨릭 예수회의 창시자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도 페스트를 체험하고 결정적인 회심을 체험한다. 그는 1521년 스페인과 프랑스의 전쟁에서 부상당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속세의 생활을 청산하고 수도자의 길을 가기 위해 바르셀로나를 향해 길 떠났다가 1522년 페스트로 죽어가는 거리를 본다. 로욜라는 그 거리에서 결정적인 회심을 체험한다.
이것이 바로 우연을 결정적인 발견의 순간으로 바꾸는 영지의 힘이며, 어떤 위대한 발견이나 종교적인 전환에는 영지의 직관이 크게 작용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불교에서는 이 직관의 내용을, 깨달음의 내용을 보리심이라고 하며, 이를 발보리심, 또는 줄여서 '發心'이라고 한다. 즉 보리심은 깨달음의 실현, 불교의 실천에 관한 강렬한 염원, 또는 정열적인 의지를 의미한다.
경허는 1899년 11월 해인사에서 작성한 <결동수저예동생도솔동성불과계시문>에서 이렇게 썼다.
금강경은 설했다.
"무릇 형상 있는 모든 것은 다 허망하다."
또한 열반경은 설했다.
"모든 지어진 것은 無常하다. 이것이 생멸의 법칙이다."
이 게송들은 우리 불가나 삼척동자나 죽과 밥이나 먹을 줄 아는 사미승도 자주 보고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경전을 연구하고 참선한 대덕스님들도 조금이라도 주의를 기울여 살피지 못하고 태연히 지나쳐 버리며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생각해 보지도 않나니 하물며 반조하고 성찰하여 밝게 깨달아닦을 수 있겠는가?
아, 아. 슬프도다. 이 몸은 허망하기가 물거품과 같아서 건강한 청년기가 머물지 않고 지나가 버리는 것이 달리는 말과 같으며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풀끝에 매달린 이슬과 같고 금방 꺼져버림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도다."
차라리 바보가 될지언정
불교경전은 불교의 진수를 갈무리한 法寶이며 인도와 중국문명의 만남을 축으로 전개되어 온 오랜 불교인문학의 역사와 방대한 사상, 논리체계를 집약하고 있다.
그러나 경전을 읽는 자신의 內心自證이 없거나 또는 경전이해를 위한 자기 준거가 확립되지 않으면 결국 경전과 언구의 노예가 되고 만다. 인간이사상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이 인간을 부리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경전을 잔뜩 인용하고 '불교는...... 인 것 같다', '불교는 ......일 것이다'라고 앵무새처럼 반복하여 읊조리는 인간녹음기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럴 때 인간 구원의 의지나 정열은 생겨날 수 없고 오히려 경전을 잘 안다는 교만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경허는 비 내리는 죽음의 마을을 떠나 동학사로 돌아오는 길에 다짐한다.
"이 생애가 다하도록 차라리 바보가 되어 지낼지언정
문자에 매이지 않고 조사의 도를 닦아 삼계를 벗어나리라
此生永爲痴呆(어리석을매)漢 不爲文字拘(거리낄구)繫(맬계) 參尋(찿을심)祖道 超出三界"
경허는 死神의 완강한 손길에 붙잡혔다가 풀려난 듯 허겁지겁 그 참혹한 콜레라의 밤을 떠나왔다. 경허는 죽음의 신에 쫓기듯 길을 걸으며 탄식했다.
"오호라. 생사의 신속함이여! 나고 죽는 일은 큰일이로다. 그 많은 책들과 성현들의 말씀이 과연 무엇이었던가? 생사일대사를 마치려면 반드시 깨달아야 하리라."
인간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은 人惑(미혹할혹)과 物惑의 실체인 자아의 少世界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물리치지 않으면 인혹과 물혹은 끝나지 않는다. 인혹과 물혹을 물리치지 못한 인간은 항상 현상의 저편에 도사린 공포에 떨어야만 하는 것이다.
나귀의 일과 말의 일
경허의 영혼이 경련을 일으키며 수많은 화두의 숲을 헤매다가 찾아낸 화두는 오직 영운 지근 선사의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驢(당나귀려)事未去馬事到來)는 화두였다.
한 중이 영운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불법의 큰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도다."
중이 알지 못하고 다시 가르침을 청하자 선사께서 이르셨다.
"채기彩(채색채)氣는 항상 밤에 움직이고 精靈은 낮에 만나기 어렵도다."
師曰 彩氣夜常動 精靈日少逢(맞이할봉)
이 선문답이 바로 경허가 참구한 영운 지근의 화두이다. 12지 가운데 당나귀해란 없다. 그러므로 당나귀 해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시간, 없는 것, 비실재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비실재는 空이며, 無이며, 죽음이며, 관념이자 무시간이다. 이에 비해서 말의 일은 실재하는 현재이며, 존재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당나귀의 일과 말의 일은 인간의 정신이 궁극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는 有와 空, 삶과 죽음, 시간과 무시간의 대립을 상징한다.
공과 유, 자아와 무아, 돈오와 점오, 마음의 청정과 오염과 같은 교리의 인식론적인 이해는 두 마리의 당나뒤와 말이 서로충돌할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고민과 갈등을 수반한다. 즉 동일한 대상에서 파생된 양면적 가치의 의문을 해명하고자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상반된 두 개의 명제, 즉 가치관이 서로 쟁탈, 대립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번뇌가 바로 지혜'라는 대승불교의 양향적 명제는 치열한 실천을 통해서 검증되고 해소되어야 한다. 아무리 화려한 언어로 장식된 사상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목을 묶어 매는 황금사슬이며 당나귀를 매는 말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禪은 '황금의 사슬을 끊고 당나귀를 매는 말뚝을 잡아 뽑는다'고 설한다.
모든 불교사상가들은 이 황금의 사슬을 끊고 당나귀를 매는 말뚝을 뽑기 위해서 가위눌린 듯한 악몽의 긴 터널을 통과해 갔다. 이치열한 모색의 정점에, 가위눌린 듯한 악몽의 긴 터널 끝에 바로 禪이 있는 것이다.
영운 지근은 왜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고 답했는가? 일반적인 안목으로 볼 때 修道란, 깨달음이란, 진리란, 먼저 현실의 일을 초득하고 나서 눈에 보이지 않는 비실재, 道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즉 말의 일이 먼저이고 당나귀의 일은 나중의 문제이다. 그러나 禪에서는 그렇지 않다. 선은 '부처님의 법계에는 들기 쉽지만 마계에 들기는 더욱 어렵다'고 설한다. 魔界가 없다면 佛界도 없다. 마계와 불계는 서로 相卽하면서 이 우주의 眞性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마계를 불계로 변화시킬 수 있는 法力이 없는 머릿속의 禪은 사실 선이라고 할 수 없으며 대승불교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유마경>>에서, 보살은 삼악도에 떨어져 모든 악마와도 손을 잡는다고 선언한다.
"삼악도에 떨어져서 모든 악마들과 더불어 함께 손을 잡고
수고하는 모든 이들의 벗이 된다."
<셔사미거마사도래>의 화두를 그려 낸 영운 지근은 중국 선종의 5家 중의 일가인 위앙종의 開祖, 위산 영우(771~853)의 제자로 복사꽃을 보고 깨들은 선승이다.
영운 지근은 30년 동안 깨달음의 劍을 찾아 방황하던 선의 검객이었다. 어디에서도 생사의 그물을 단칼에 베어 버릴 칼을 찾을 수 없었던 그는 어느 해 봄날 우연히 선원의 뜰에 활짝 핀 복사꽃을 보고 30년 동안의 기나긴 꿈에서 깨어나 오도송을 노래했다.
"삼십년 동안 검을 찾던 나그네 있어
하릴없이 피고 지는 꽃 꺽어들기 몇 번이던가
복사꽃 한 번 본 뒤로
제 다시 미혹치 않으리"
三十年來尋劍客
尋(찾을심)劍客 영운 지근의 꿈은 지금까지 이 땅 방방곡곡 절에 심검당尋劍堂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간화선의 시작
禪의 제1원칙은 몸으로 직접 부딪쳐 연마함, 즉 體究鍊磨이다. 참선수행과 철저한 공안투과를 통해서 인간이 개념적 분별이 해체된 無形相의 마음을 자신의 체험으로 이행시켜 나갈 수 있다.
수많은 대중들에게 불교경전의 진수를 청민하게 설파하던 젊은 학승 경허가 콜레라의 회색 지옥도를 보고 선의 길로 발심한 것은 바로 체구연마의 제1원칙과 만난 것이다.
걸어도 걷는 줄 모르고 앉아도 앉는 줄 모르도록 마음과 경계가 하나가 된 疑團을 품고 동학사로 돌아온 경허는 학인들을 불러모아 말했다.
"그대들은 인연 따라서 잘들 가시오. 나는 이제 경을 가르치는 강사 노릇에는 뜻이 없습니다."
경허는 학인들을 모두 떠나 보내고 그 날부터 방문을 닫은 채 꼿꼿이 앉아 참선을 시작했다.
淸虛休靜은 <<선가귀감>>에서 말했다.
"참선에는 모름지기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큰 믿음,
둘째 큰 분노,
셋째 큰 의문 이니 만약 그 한 가지라도 빠진다면 마치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마침내 쓸모 없는 그릇이 될 뿐이다."
청허휴정은 왜적의 침입으로 야기된 국난을 이기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해 "내가 세세생생 지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무고한 백성의 살육을 뒷짐 지고 볼 수 없다"고 외치며 승려의 몸으로 칼과 창을 잡은 僧軍의 지도자이다. 그러나 청허 휴정의 닌면목은 선사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 돌파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휴정의 제자이며 승병장이었던 기허 영규(?~1592)역시 선의 대분지를 역사의 무대에서 실현한 선승이다. 그는 왜적을 무찌른 금산전투에서 후퇴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여기서 죽는다. 어찌 살고자 하리오! 死耳 豈(어찌기)可生" 하고 외치면서 8백 명의 승병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고 있다.
이처럼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 죽음도 불사할 수 있는 엄청난 분노의 에너지는 완성도 높은 의지의 직관을 실천하는 현실 돌파력과 무관하지 않다. 선은 선방의 좌복 위에서 끝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선의 대분지는 큰 분노를 가르치는가? 불교는 분노야말로 가장 악질적이고 저질적인 번뇌라고 설하지 않는가? 하지만 선은 원망과 분노를 피해야 할 무서운 번뇌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대 자신의 원한과 분노의 불꽃을 타오르게 하라
천둥과 같이 분노하고 땅이 우는 것처럼 원망하라
뜨겁게 활활 타오르며 모든 광석을 녹여 내어
금을 제련해 내는 큰 용광로와 같이
분노하고 또 원망하라"
굶주리며 헤매다
선은 우아한 예술이나 말장난이 아니다. 선의 예술이나 선문학은 선의 하잘 것 없는 부산물에 불과하다. 언젠가 한 혁명가는 '혁명이란 사교를 위한 칵테일파티가 아니다. 한 힘이 목숨을 걸고 다른 힘을 전복시키는 행위이다"라고 말했다.
경허의 선시 <우연히 읊은 시 遇吟>을 보자. 제2구의 넉 자가 멸실되고 없다.
"오랜 풀무질로 두드려서 쇠똥을 모두 精練하였네
ㅇㅇㅇㅇ도 어찌 그 밖이랴
뒤집힌 견해로는 法印을 알 수 없어
물이 흐르는 대로 남김없이 맡겨 익숙해졌네
타오르는 불꽃 위에 앉을 수 없다고 누가 말하는가
몸이 상한다는 것은 사람이 살 수 없다는 말이 아니네
아득히 높은 벼랑에서 손을 놓고 돌아오니 다만 이것뿐
감히 보장하노라 수행자들이여 머뭇거리지 말라"
대승불교는 대중을 부터의 세계로 이끌겠다고 보리심을 발한 사람들의 불교이다. 대승불교는 인간의 고통과 불안에 맞서서 냉정하고도 침착한 자세로 투쟁하는 정열로 불타는 사람들의 불교이다. 불교적인 것과 인연을 맺더라도 불교적인 결실을 맺고 있는 모든 인간의 삶은 말과 교리를 앞세우는 것보다 훨씬 대승적이다. 말로만 통념상의 대승불교를 외칠 것이 아니다.
보통 '우리 한국불교는 대승불교'라고 자부하고 동남아시아의 불교를 소승불교라고 폄하하면서 으쓱거린다. 家의 윤리를 확대한 삶을 살고자 출가했지만 또 다른 문중주의와 패거리의식에 젖어 있는 교단의 소승적인 모습은 언급하지 않더라도 대승불교 교학은 그 이념 자체가 도대체 너무 고급스럽다. 아무리 반야, 중관, 화엄, 선과 같은 고급교학이나 수행론이라고 할지라도 실천이 없는 부화무행浮華(빛날화)無行한 교학은 그 자체가 처음부터 대승적이지 못하다. 왜냐하면 말만 대승불교입네 하는 언어의 무덤일뿐이어서, 정작 대승불교의 존립기반인 대중의 삶과는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형태의 형이상학에 사로잡힌 소승불교인 것이다.
그 결과 대승불교의 '일체중생은 모두 부처님의 성품을 지니고 있다一切衆生 皆有佛性'는 인간 긍정의 강령을 부조리하고 모순 많은 현실에 임의적으로 적용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안이한 愚衆化와 악평의 늪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으며 '아아! 찬란해. 인간은 모두 부처구나' 하고 만족하는 불교가 결코 아니다.
경허는 1846년부터 1912년까지의 67년이라는 시간동안 1862년 진주민란에 이은 삼남 각지의 민란, 1866년 병인양요,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1884년 갑신정변, 1892년부터 1894년까지 이어졌던 갑오농민전쟁, 1905년 을사보호조약체결, 그리고 1910년의 한일합방조약체결로 이어지는 격변의 한 중심을 통과하였다.
콧구멍 없는 소가 되다
경허가 방문을 닫은 채 결사적인 참선을 시작한 것은 1879년(己酉, 고종 16년), 나이 34세 되는 해였다. <여사미거마사도래>의 화두를 참구하면서 다리를 찌르고 머리를 부딪쳐서 수마를 쫓았다. 그야말로 필사적인 정진이었다.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
이 무슨 도리인가?
경허의 화두는 은산철벽에 부딪쳤다. 은산철벽이란 말 그대로 은 으로된 산과 철 로된 장벽이다. 바람도 물도 통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읽었거나 듣고 사용하던 정보로는 이 은산철벽을 넘을 수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화두의 종류를 많이 알거나 선어록을 잘 읽을 수 있다 하더라도 이 은산철벽을 넘지 않는 한 그것은 구두선口頭禪이다. 이 은산철벽 앞에서 화두 타파를 통해 깨달음을 체득하는 간화선看(볼간)話禪이 시작되는 것이다.
한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조주가 말했다.
"뜰앞의 잣나무이니라(庭前栢樹子정전백수자)."
한 스님이 동산선사에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동산이 말했다.
"삼베가 세 근이니라(麻三斤)."
한 스님이 운문선사에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운문이 말했다.
"똥 치우는 막대기이니라(乾(하늘건)屎(똥시)厥(말뚝궐, 앞에 木변))"
방거사가 마조선사에게 물었다.
"만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것은 무엇입니까?"
마조가 말했다.
"그대가 서강의 물을 한 입에 다 마실때를 기다려 말해 주리라."
한 스님이 운문선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께서 나오신 곳입니까?"
운문이 말했다.
"동산이 물 위로 가느니라(東山水上行)
이 시기 경허의 철저한 화두 참구는 경허의 설법, <등암화상에게 준다>는 법문에서 잘 정리되고 있다. 그리고 (아래)이것은 경허가 화두를 참구하는 모든 선수행자들에게 전하는 화두 참구의 법문이기도 하다.
한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물었다.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말했다.
"없다(無)."
생명을 머금고 꼬물거리는 미물에게도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였거늘 조주스님은 무엇 때문에 불성이 없다고 했는가? 옷 입고 밥 먹고 대소변을 보거나스승을 모시거나 제자를 가르칠 때나, 경전을 읽고 손님을 맞이하고 보내거나, 머물고 앉으며 누울 때나 어느 때 어디서나 마음의 빛을 돌이켜 이 화두를 비추어 보고 이 화두를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다시 관하고 닦아서 세간의 온갖 번뇌와 사량분별하는 마음이 오직 이 '무'자를 꿰뚫어야 한다. 이와 같이 공부하여 날이 오래고 달이 깊으면 자연히 깨닫게 되나니 마치 굶주린 사람이 한 술 밥에 능히 단번에 배부르지 못하고 글씨를 배우는 사람이 한 권의 종이를 가지고 판단하고 시종일관 동요하지 않으면 그 도를 이루기 어렵다.
화두를 들 때, 물을 거슬러 돛을 달듯이 하되 혹은 냉정하고 혹은 담담히 하라. 아무런 재미가 없기도 하고 혹은 마음이 갑갑하고 열이 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남의 집 일이 아니다.
화두를 드는 가장 미묘한 공부법은 다만 정신을 집중하되, 너무 조급히도 하지 말고 너무 늦추지도 말고 깨어있어서 살피며 고요하고 면밀히 하여 호흡을 평범히 하며 주리고 배부름을 평등히 하며 눈에다 정기를 모으고 척추는 꼿꼿이 세워야 한다.
한세상 보내는 인생은 마치 문틈으로천리마가 달리는 것을 순간 내다보는 것처럼 덧없으며, 풀끝에 매달린 이슬과 같아서 위태롭기가 바람 앞의 등불이다. 백 가지 계교를 다 부려본들 마지막 이른곳은 마른 뼈 한 줌일 뿐이다.
생각해 보라. 인생의 덧없음이 이와 같이 빠르고 생사의 일이 크고 급한 것이니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해야 한다. 태어났어도 온 곳을 모르고 죽어도 가는 곳을 모르며 業識이 아득하니 육신이 무너지고 불길이 치솟아 四生과 六趣가 가슴속으로부터 잉태되니 어찌 두렵지 아니한가?
참되고 바른 참선수행이 아니면 어떻게 생사의 업력을 대적하겠는가? 이렇게 분명하게 성찰하여 공부를 헛되이 하지 말지어다. 이와 같이 이끌어주시는 바는 모두 부처님과 조사님들의 지식하고 지극한 가르침이다. 감히 한마디 한 구절도 서로속일 수 없다. 옛 가르침을 감히 저버릴 수 없어서 어리석은 마음으로 한마디 하였노라."
[웰컴페이지 '나의 모든 것'에서 모셔 온
동학사]
경허가 동학사에서 폐침망찬하고 용맹정진하고 있을 때 원규元圭라는 한 사미승이 옆에서 시중을 들었다. 이 사미는 훗날 동은화상이라는 거승이 된다. 원규 사미의 속성은 이씨였다. 그의 부친이 여러 해 동안 좌선하고 스스로 깨달은 것이 있어서 사람들은 사미의 부친을 이처사라고 불렀다. 평전 <<경허선사>>를 쓴 이홍우가 1972년 11월 서울 사간동 법련사에서 인터뷰한 변설호(당시 85세) 스님은 십대 시절에 학명화상의 상좌로 한때를 보냈다.
변설호 스님은 원규사미의 부친인 이처사를 이진사라고 불렀으며, 이진사는 당시 왕실과도 친분이 있는 사람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깊이 터득한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처사는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재가의 불교탐구자다운 품격을 갖춘 인물이었던 것이다.
원규사미의 스승이었던 학명화상이 그 집에 가서 이처사와 함께 이야기하다가 사미의 부친 이처사가 말했다.
"공부를 하지 않는 중은 필경 소가 됩니다."
학명스님은 이말을 받아서 말했다.
"중이 되어 마음을 밝히지 못하고 다만 신도의 시주만 받으면 반드시 소가 되어서 그 시주의 은혜를 갚게 됩니다."
이처사가 힐난했다.
"소위 사문의 대답이 왜 이렇게 도리에 맞지 않습니까?"
학명스님이 말했다.
"나는 禪旨를 잘 알지 못해서 그러하오니 어떻게 대답해야 옳습니까?"
이처사가 말했다.
"어찌 소가 되기는 되어도 콧구멍 뚫을 곳이 없다 하지 않습니까?"
그 스님은 묵묵히 돌아가서 원규사미에게 말했다.
"너희 부친께서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하던데 나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사미는 말했다.
"지금 籌室주실 화상이 선공부를 심히 간절히 하여 잠자는 것도, 밥 먹는 것도 잊고 있으니 마땅히 이와 같은 이치를 알 것입니다. 스님께서는 가서 물어보십시오."
학명은 혼연히 가서 경허에게 예배를 마치고 앉아서 이처사의 말을 그대로 정했다. 경허는 학명이 전하는 "콧구멍이 없는 소" 라는 말을 듣고 마침내 大悟하게 된다. 때는 기묘년(1879) 11월 15일이다.
송대에 편찬된 <<가태보등록>>이라는 禪 의 등사燈史는 깨달음의 새벽을 노래한 선시 한 편을 싣고 있다.
"창가의 빗소리를 들으며 지새웠던 아승지 겁의 어두운 밤
그 마음 홀로 전하며 들려오는 산사의 새벽 종소리 속에 밝아오네"
阿(언덕아)僧祗(토지의신지)劫(위협할겁)夜窓雨 直指單傳曉寺鐘
폭풍우 속에서 보낸 아승지겁의 어두운 밤이 지나고 새벽이 밝아왔다. 경허는 이제 당나귀의 일과 말의 일 사이에서 방황하는 일이 없는 콧구멍 없는 소가 된 것이다. 콕구멍 없는 소는 콧구멍을 꾄 고삐가 없으므로 이리저리 끌려 다닐 일이 없는 소이다. 바로 자유와 해탈을 상징한다. 그래서 경허는 자신의 새로운 법명을 성우惺(영리할성)牛, 즉 깨달은 소라고 이름지었다.
한암 중원의 기록을 보자.
"이처사의 "콧구멍 없는 소(牛無鼻孔(구멍공)處)"라는 말을 전해들은 화상의 안목은 정히 움직여, 옛 부처 나기 전의 소식이 몰록 드러나 활연히 현전하였다. 평평한 대지가 꺼지고 物과 我를 함께 잊으며 바로 옛 사람의 크게 쉰 곳에 이르니 백천법문과 무량한 妙義가 당장 얼음 녹듯이 풀렸다."
경허가 학명화상이 전해 준 이처사의 "콧구멍 없는 소"라는 말을 듣고 돌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선승들은 오랜 수행과 단련 끝에 정신적, 물리적 機緣(깨달음의 계기)으로 섬광과 같은 깨달음을 얻는다. 그 몇 가지 예를 보자.
혜가와 승찬: 보리달마의 안심법문에 의해 깨달음
동산 양개: 강을 건너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깨달음
현사 사비: <<능엄경>>을 보다가 깨달음
임제 의현: 대우에게 방棒(발음은 봉)을 두들겨 맞고 깨달음
영운 지근: 청소하다가 던진 기왓장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음
영원 유주: 경행 중 벗겨진 신발을 다시 신다가 깨달음
목암 법충: 절 안의 방앗간에 걸린 '법륜상전'이라는 편액을 보고 깨달음
경수 교형: 운판 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음
석두 자회: 매일 돌을 쪼개다 돌과 망치기 부딪치며 튀어 나오는 불꽃을 보고 깨달음
청허 휴정: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달음
고봉 원묘: 목침이 침상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깨달음
중봉 명본: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고 깨달음
초석 범기: 성루의 북소리를 듣고 깨달음
선승들의 깨달음은 갑작스럽게 다가온다. 옛 선승들은 '할喝(꾸짖을갈)' 이나 '방(棒봉) 이라는 격렬하고도 야성적인 표현을 즐겨 썼다. 그들은 사상이나 논리보다도 가장 실존적인 상황, 찰나와 영원을 관통하는 깨달음을 단 일회의 행동, 할과 방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인간은 세 개의 독화살을 맞은 채 신음하면서 살아간다. 탐욕, 증오(성냄), 어리석음 즉, 貪瞋(부릅뜰진)癡 삼독이다. 이 三毒의 소멸을 위해 최소한의 윤리적 자각과 마음의 평화, 지혜의 수련, 즉 戒(경계할계)定(정할정)慧 三學을 강조한다.
어리석음으로 고민하던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물었다 씀을 마치자 공연시리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나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어서일 게다).
"스승님, 저는 이제 수행을 그만두고 세속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그럭저럭 살아가고자 합니다. 저는 너무 어리석어서 수행승이 될 수 없습니다."
인생의 깊은 심연에 통달한 아라한은 가르쳤다.
"제자여, 가장 큰 어리석음은 정작 자신이 어리석은 줄 모르는 어리석음이다.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깨달은 사람은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거나 적어도 지혜의 눈을 뜨게 될 행운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어리석다라는 말은 사실 어리석지 않음을 뜻한다(마지막 귀절에 이르자 다시 눈시울이 촉촉해진다. 못난 제자를 위로하는 스승의 따뜻한 마음이 오롯이 느껴지므로)."
붓다는 "인간은 번뇌의 오물에 의해 더럽혀져 있지만 더러움 그 자체는 아니다"라고 따뜻한 인간 긍정의 안목을 보여 준다.
경허는 항상 어리석음의 덫에 걸릴 수밖에 없는 인간의 미망을 설하고 또 설한다.
마음 밖에 다른 법은 없으니
두 눈 가득히 하얀 눈과 달이로다
높은 산, 물 흐르는 강가, 늙은 소나무 밑에서
맑고 푸른 긴 밤 새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참으로 이 도리는 그대에게 알릴 수 없으니
道를 얻은 자만이 바야흐로 알리라
心外無法 滿目雪月
高岑(봉우리잠)流水長松下 永夜淸霄(하늘소)何所爲
眞可謂(이를위)這(이저)箇(낱개)道理 非汝境界 同道方知
한암 중원은 심법을 깨닫고 완성한 직후, 경허의 감격을 위와 같이 묘사했다. 대오 이후 경허는 한동안 누가 오건 가건 전혀 개의치 않고 편안한 안식을 누렸다.
어느 날 경허는 그에게 교학을 가르친 스승 만화스님이 방에 들어와도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다. 평생을 경전의 숲에서 보낸 준엄한 학승이었던 만화보선은 경허의 그런 모습을 의아하게 여겼다. 스승이 방에 들어오면 앉아 있다가도 벌떡 일어나야 하는 법이거늘 누워서 아예 스승을 쳐다보지도 않다니, 그야말로 안하무인이었다.
'웬일로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는가?"
ㅡ계속. 22.12.21 16:26 終. 삼성이어폰 집을 어제 샛별리 뒷동산 갔다오면서 잃어버린 거 같다ㅜㅜ 욕실에서 꺼내어 놓은 거 같은데 아무리 찾아도 없으니. 로아를 의심해보며 실없이 웃는다ㅎ 내일이 어머니 기일이라 우성마트에서 아내와 제물을 장만했다. 실업수당을 받으므로 용돈이 말라 지하실의 펠리가 배고파 울어도 울게 놔둔다. 저잣거릴 쌈박질하며 산다는 뜻은 진섭빙모와 산성酒를 어쩌지 못한 限의 명칭이다. 돈이 없으니 책을 오래 읽게 되고 정신이 맑아진다. 내일은 길병원 시티촬영일, 사흘 후 봉암리 삼거리 송년회이므로 어지간하면 안하던 손까지 벌렸다.
동년동월 19:30, 이어서 집자
경허는 말했다.
"일이 없게 된 사람(無事之人)은 본래 이렇습니다."
이미 제자가 자신과는 다른 경계에 서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된 만화는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경허의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성리학과 사대부들의 압제에 시달리면서 가냘픈 명맥을 유지하던 조선불교는 그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현대 한국의 불교선종은 새로운 중흥의 계기를 맞이한다.
우리나라 불교에 선불교가 전해져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불교 수행법으로 인식되고 독자적인 법맥을 형성하기까지 모두 세번의 선불교 형성과정을 겪었다.
최초의 禪 전래는 진덕왕 4년(650)에 입唐하여 중국 선종의 제4 도신(50~651)의 법맥을 계승하고 돌아온 신라의 법랑法朗이다.
법랑의 법을 이은 신행信行(703~779) 또한 스스로 입당하여 북종선의 개조, 신수神秀선사의 제자인 보적(651~739)의 문인이었던 지공志空에게 수학하고 돌아와 지리산 단속사에서 입적하였다.
이것이 첫번째 선의 생성과정이다.
두 번째는 도의선사에 의한 남종선 전래와 나말여초의 구산선문의 성립이다. 가지산문의 개조, 도의道義(?~825)선사가 783년 입당하여 마조도일의 제자인 서당지장의 법을 잇고 귀국하자 수많은 스님들이 속속 입당하여 혜능 이래의 남종선의 법맥을 계승하게 된다. 이는 구산선문의 성립으로 대표되는 신라 선종으로 전개된다.
구산선문의 성립은 도의선사가 귀국한 821년부터 가장 늦게 성립된 이엄의 수미산문의 932년까지 112년 동안 전개되었다. 구산선문의 선승들은 당시 압도적인 수세를 보이던 신라화엄교학을 극복하고, 독자적인 선수행과 대중 교화를 통해 한국선의 토착화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이후 구산선문의 법맥은 분할적으로 계승되고 있다.
세 번째 한국선의 형성은 고려의 태고 보우(1301~1382)선사에 의한 구산선문의 통합 노력과 임제선의 수용이다. 태고 보우가 임제종 약깊에 속하는 설암 조흠(1215~1287)의 제자 급암 종신과 그의 제자 석옥 청공(1272~1352)의 법을 전해와 조선시대 이후에는 임제종의 선사상과 법맥을 계승하는 '태고 보우- 환암 혼수- 구곡 각운- 벽계 정심- 벽송 지엄- 부용 영관- 청허 휴정(1520~1604)으로 이어지는 조계선종이 전개된다.
그리고 불교 암흑기였던 조선 중기이후 한국선은 부침을 거듭하다가 섬광과도 같은 경허의 출현으로 인해 그 정체성을 복원하고 깨달음의 길을 열어 간다.
현대의 대한불교 조계종이 성립되기까지는 현대 한국선의 중흥조라고 불리는 경허 성우선사의 투철한 선체험과 활동이 근.현대 한국선가에 새로운 활력이 되었다.
수월 음관(1855~1928). 남전 한규(1868~1936). 만공 월면(1871~1946). 혜월 혜명(1861~1937). 한암 중원(1876~1951). 동산 혜일(1890~1965). 춘성 창림(1891~1977). 금오 태전(1896~1968). 전강 대우(1898~1975). 향곡 혜림(1912~1978). 경봉 원광(1892~1982)은 모두 경허 문하에서 직접 수학하고 깨달음을 얻은 선사이거나 그들의 제자, 또는 경허선사를 사숙한 인물들이다.
이들에 의해서 전개된 새로운 선불교 운동은 일년에 두 차례 하는 정기적인 수선안거 전통을 회복했으며, 강원과 선원제도를 통해 사교입선捨(버릴사)敎入禪이라는 선풍을 확립하였다. 당시에는 아무도 짐작 못 했겠지만 불과 한 세기가 다 가기도 전에 경허가 밝힌 깨달음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이어져 밝은 빛을 발하면서 세간의 미망을 일깨웠다.
경허가 참구하고 깨달음을 증득한 선이란 무엇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계승한 초기불교의 수행자들 이래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불교의 철인들은 '苦에서의 해탈'이라는 근본 문제에 주목하고 있다. 즉 유한하며 부정확한 실존적인 상황에 구속되어 있는 인간의 고통을 피고자被(이불피)苦者의 위치가 아니라 고의 생성과 소멸의 능동적인 주체로서 자신을 응시하고 본래적인 자기를 성찰, 회복하는 수행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수행의 대표적인 유형을 우리는 선이라고 부른다.
선불교의 기원을 설명하는 한 전승에 의하면 선은 붓다 석가모니의 깊은 깨달음을 상징하는 한 송이의 꽃과 미소에 그 원초적 기원을 두고 있다.
영축산에서 설법을 하시던 세존께서는 대중들에게 한 송이 연꽃을 들어 보였다. 대중들은 그 영문을 몰랐으나 오직 가섭존자만이 홀로 미소를 지었다. 이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진리에 관한 바른 안목(正法眼藏)
열반으로 향하는 미묘한 마음(涅(개흙열)槃(소반반)妙心
형상을 벗어난 실상(實相無相)
지극히 미묘한 진리의 문(微妙法門)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不立文字)
경전의 법을 넘어선 가르침(敎外別傳)을
마하가섭에게 전하노라.
깨달음의 경계마저 허물다
1880년 구한말, 한국 선문의 운명을 한 어깨에 짊어진 오도자로 변모한 경허선사는 1881년 홍주(충남 서산시 고북면 장요리) 연암산 천장암에 머물면서 자신의 깨달음을 더욱 굳게 다지는 보림(保任, 깨달음을 이룬 후 그 깨달음을 견고하게 하는 과정) 을 행했다. 당신 천장암에는 경허의 친형인 태허선사가 모친, 밀양 박씨를 모시고 주석 중이었다.
서산시 고북면 소재지에 도착하기 전 큰길에서 5킬로미터쯤 들어간 지점의 연암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천장암은 내포평야의 비산비야가 빚어낸 구들들의 물결 속에 고요히 자리한 작고 쓸쓸한 암자이다. 오래된 소나무 숲에 덮인 고요한 암자, 천장암은 경허에게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천장암 뜰에 서면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일 없는 들사람이 태평가를 부르네' 라는 경허의 오도송 한 구절처럼 연암산 밑으로 고북면 들녘의 논들이 펼쳐져 있고, 들녘 너머 저 멀리 바다를 안고 굽이치는 서해안의 해안선이 보인다. 해안선 안쪽으로는 천수만 간척둑에 가로막혀서 큰 호수로 변해 버린 간월호가 석양의 노을에 반짝거리며 일렁거리고 있다.
경허는 평생 바람과 물처럼 이 땅의 산수를 떠돌면서도 오도悟道후 자신이 보림을 행하고 첫 설법을 한 이 천장암을 오고 가며 지친 육신을 쉬곤 했다. 평생 천장암을 잊지 못했던 것이다.
<천장암에 붙여서(題天藏庵)>라는 시에서 경허는 이렇게 천장암을 노래했다.
속세와 청산 어디가 더 좋은가
봄빛 내리는 성터 어디엔들 꽃이 피지 않으랴만
누군가 惺牛의 일 묻는다면
돌계집 마음속 겁외의 노래하리라
世與(줄여)靑山何者是 春城無處不開花
傍(곁방)人若(같을약)問惺牛事 石女心中劫外歌
[홍성신문.내포타임즈에서 모셔 옴, 천장암]
올 가을 천리포수목원을 들러서 덕숭산을 휘돌아
예산 사과밭을 들렀던 그때,
천장암이 노상 내곁에서 맴돌았다.
천장암은 힘들게 걸어서 올라가야만 하는 곳인줄
알았기에...
못 들른 게 후회되기도 하지만 지금, 이 책 『경허』를 읽지 않고
천장암에 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결례일 것만 같아
외려 다행이지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처럼 봄날의 새순이 수놓아졌을 때 넉넉한 마음으로 찾아가 보고프다.
경허는 오도 이후 1898년 해인사로 이석移錫(주석석)하기까지 천장암을 비롯해 마곡사, 도비산 부석사, 상왕산 개심사, 덕숭산 정혜사 등지를 여행하며 자신의 안목을 다지고 제자들을 지도했다. 야트막하지만 수려한 산야와 서해안의 장엄한 낙조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충청도 절들은 경허의 반생이 묻어 있다.
그 옛날 한 선승은 보림의 필요성에 대해서 '납자가 비록 도를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만약 깊이 숙성시키고 두텁게 다음지 않으면 반드시 준폭峻暴을 일으키게 되어 교문을 지키지 못하고 장차 화를 부르게 된다'고 적었다.
선에서 강조하는 화두의 참구란 사실 모든 인간적 불안과 모순, 의혹의 거품을 걷어내기 위해 스스로 시련을 가하는 노력의 표현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 자기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자기의 현전現前을 완성했을 때 자유로운 것이다.
선종의 초조, 보리달마는 불교의 진리에 따라서 살아가는 규범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불교의 진리에 따라서 살아가는 규범이란 무엇인가?
불법의 본질은 순수한 자각 바로 그것이다. 이 순수한 자각은 모든 형상에 대한 집착을 초월한 자각이다. 이 자각은 모든 번뇌의 오염과 집착에서 자유로우며 자기와 타인의 분별이 없다. 경전에서도 '불법에 중생이란 없다. 왜냐하면 번뇌의 오염에서 해탈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한다.
지혜로운 성자들은 이 진리를 깨달아 불법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아간다. 영원한 생명에는 무기력한 기색이란 조금도 없기 때문에 지헤로운 이는 고통 받는 중생들을 위한 헌신, 즉 보시를 위하여 항상 자기 자신의 신체.생명.재산을 관대하고 자비롭게 바칠 준비가 되어있다. 그들은 공을 철저하게 통찰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것에도 의존하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모든 중생들에게 봉사하는 유일한 동기는 어떤 대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중생의 오염된 마음을 밝혀 주기 위한 것일 뿐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자신의 몸가짐을 바르게 하며 동시에 남에게 관대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깨달음의 도를 장엄하게 빛낸다. 이것이 불교의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현자들의 삶이다.
22.12.21, 21;21 終.
(2022/12/23, 12:36 어젯밤 기제사. 형내외, 아우내외, 명례누나와 지성이, 이서방(쩡이는 간부회식). 뻥게와 가자미찜 대딸기 그리고 속초회를 가져오신 명례누님. 그리하여 삼십만원 든 상차림은 탐탁했다. 큰딸의 제주도산귤도 감사하고. 가족 둘러앉아 명례누나 가져온 회와 가평 잣막걸리를 먹었다. 지성이 꺼 남겨놓고. 내가 진설 바로 전 목욕하러 갔다가 나오니 진설이 끝나 있었네. 명암형이 그 솜씨로 곶감을 세워 더욱 좋았다. 축문에 '불승영모'를 삽하다. 종잔에는 잠깐 7부를 잊었다. 밤과 국이 나온 후에 흥규가 첨잔하였다. 그 무렵에 지성이가 왔고, 그 집 특유의 재담에 화기로운 모임이 된다. 절을 올리면서 할머니.아버지.어머니는 인류의 조상이 되시고, 형과 누나와 그외 모두는 그 조상의 현재태가 되어 감사의 념을 올렸다. 기제사에는 무엇보다도 진설상 앞에서 가족이 화합하는 모습이 가장 가치있는 예절이라. 나는 이 마음 영원히 변치않길 기도한다. 늙은모습이 역력한 형수의 귀엽고 사랑스럽던 젊은 얼굴은 어디로 가벼렸을까? 앉았다가 일어서는 데에 한참의 시간이 걸리고, 로보트가 갓 발을 떼는 것같은 우수꽝스런 하체를 갖고도 베드민턴 게임 예기를 할땐 홍조와 더불어 날렵한 코트의 활약을 펼치는 묘사가 지칠줄 모른다. 덩달아 지성이도 베드민턴의 묘한 매력을 찬탄하고. 왕손가락 첫매디 부분이 튀어 나오고 울툭불툭하던 명례누나의 손가락들...ㅜㅜ 그 누나는 아내에게 수고비를 건네고, 오빠에게 용돈을 드린다. 헤어질무렵, 로아의 모습이 젊잖코 이쁘고 우는소리 안한하면서 신사임당을 붙여 주셨다. 그 예길 하자하니 지성이는 십만원을 로아에게 안기고, 아우도 2만원을 로아게게 안겼다. 20:00 조금 넘어 시작한 기제사는 21:00 경에 끝났다. 식구들이 의정부로, 독산동으로 떠난 뒤, 한시간 후 명례누나에게 전화를 거니 문막을 거의 다 갔다고 한다. 아들을 내려주, "어떻게 아이들 있는곳에서 잠을 자고 가니? 차라리 졸리면 휴게소에서 자지." 효성이 지극했던 명례누나라서 회나 딸기 가자미찜 뻥게를 가져오시는 거겠지... 생각하면 누나의 효성에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지금시간은 어제로부터 밤이 지나고 낮 12:59분, 늦잠을 자야 할 누나이므로 전화를 삼간다. 의젓하게 주관해준 아내는 자유시간으로 놀러 나갔고 나는 실업급여학습을 2차 진행하고 있다. 왜? 처음 했던 게 그만 허탕이 됐기 때문에. 어떻뜬지 내가 처음 시작할 때 >부분을 2차례 연속 눌르지 못해서, 시간을 많이 지체하였었고, 다시 하여 어떻뜬 성공하고 끝을 보았는데, 마침 '확인' 이 없는고로 다시 들어가서 실행해보니 0% 아니던가! 그래서 다시 실행하고 있다.)
<<경허집>>은 경허의 보림과정을 이렇게 적었다.
"스님께서 천장암에 주석하실 때 한 벌 누더기 옷으로 추운 겨울이나 찌는 듯한 여름에도 한 번도 갈이입지 않으시고, 모기와 빈대가 몸을 찌르고 이들이 옷에 가득하여 온몸이 헐어서 벗겨져도 고요하고 의연한 자세를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 날 큰 구렁이가 벽을 뚫고 들어와 어깨와 등에 올라가 서리고 있는 것을 함께 있는 사람들이 일러주어도 태연한 마음으로조그도 동요하지않자 구렁이가 스스로 기어나갔다. 道에 疑淸이 깊이 익지 않았다면 누가 감히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한 번 앉아 여러 해를 지냈지만 찰나와 같이 보내셨다."
오직 인생과 禪의 궁극적인 문제만이 남아 있는 그 작은 방 문틀에는 누군가 쓴 圓成門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경허집>>은 경허의 개당설법을 <오도가>라는 제목을 붙여서 싣고 있다.
사방을 돌아보아도 아무도 없으니
衣鉢을 누구에게 전하리요
사방을 돌아보아도 아무도 없으니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리요
봄 산에 꽃이 활짝 피니 새들은 노래하고
가을 밤의 달은 밝고 바람은 맑기만 하다
정녕 이러한 때 無生의 一曲歌를 얼마나 불렀던가
한 가락 노래를 아는 사람 없으니 때는 말세인가
나의 운명인가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산 빛은 문수의 눈이요, 물소리는 관음의 귀로구나
"이랴, 이랴!" 소를 부르고 말을 부름이 곧 보현이요
장서방 이서방이 본래 비로자나불이로다
부처와 조사가 禪과 敎를 설한 것은
모두가 특별한 것이 아니고 분별을 냄이로다
돌사람이 피리 불고 목마가 졸고 있건만
범부들은 자기의 성품을 알지 못하고
성인의 경계일 뿐 나의 분수가 아니라고 말한다
참으로 가련하구나 이런 사람은 지옥의 찌꺼기밖에 못된다
나의 전생 일을 살펴보니 胎卵濕化 四生과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인 六趣의 그 험난한 길에
오랜 세월 돌고 돌아 온갖 고초를 겪음이 금생에 와서
눈앞에 보는 듯 분명하니 사람으로서 차마 어찌하랴
다행히 숙세의 인연이 있어 사람되고 장부되어
출가하고 得道하니
네 가지 어려운 가운데 하나도 부족함이 없도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며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라고 말함을 듣고서 본래면목을 깨닫고 보니
이름도 空하고형상도 공하니 고요한 곳에 항상 밝게 빛나도다
이로부터 한 번 들으면 천 가지 깨달아
눈앞에 홀로 빛나는 광명이 寂光土요
정수리 뒤의 신비한 모습은 金剛界로다
四大와 五陰이 청정법신이요
극락세계란 바로 화탕지옥과 한빙지옥이 함께하는 곳이요
華藏刹海란 劒樹地獄과
火山地獄 속의 法性土요
썩은 거름 무더기와 똥 무더기가 대천세계이며
개미 구멍과 모기 눈썹이 三身과 四智이며
허공과 삼라만상이 눈에 닿는 대로 본래의 천진이니
아아, 참 기이하고 기이하도다
시원한 솔바람이여 사방이 푸른 산이로다
가을 달 밝게 빛나니 하늘이 물이런가
노란 꽃, 푸른 대, 꾀꼬리 소리, 재잘거리는 제비 울음이
항상 그대로 大用이어서
어느 곳에 드러나지 않음이 없도다
市門天子가 무엇이 귀할까 보냐
모름지기 평지 위에 일어나는 파도요
九天의 玉印이로다
참으로 괴이하구나 해골 속의 눈동자여
한량없는 부처와 조사가 항상 앞에 나타나는도다
초목과 기왓조각, 자갈이 곧 화엄이요, 법화로다
내가 항상 설하노니 가고 머물고 누움이 바로 이것이며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는 것이 곧 이것이다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나니
지옥이 변하여 천당이 되니 모두 나의 작용에 있으며
백천법문과 한없는 묘한 이치가 마치
꿈을 깨어 연꽃을 피운 것과 같도다
有와 無의 두 변과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어느 곳에서 찾을까
시방세계가 안과 밖이 없이 큰 광명 덩어리뿐이로다
내가 큰 법왕이 되었으므로 저 모든 법에 다 자재하나니
옳고 그르고 좋고 나쁨에 걸림이 없도다
어리석은 사람이 이 말을 들으면
내가 헛소리를 한다고 믿지 않고 또 따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귀 뚫린 사람이 있어 자세히 믿어 의심이 없으면
문득 安心入命處를 얻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노니 한 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만겁에 다시 만나기 어렵나니
부질없는 목숨은 아침에 저녁을 기약할 수 없도다
눈먼 당나뒤가 다리만 믿고 가다가
안전한 것과 위태로움도 알지 못하는구나
저것도 이러하고 이것도 저러하니
어찌하여 내게서 無生法을 배워
人天의 대장부가 되려 하지 않는가
이와 같은 까닭으로 재삼 입을 수고롭게 하여 부촉하노니
내 일찍이 방랑자가 되었기에 나 또한 나그네를 불쌍히 여기노라
슬프다 어이하리 무릇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랴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구나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으니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랴
게송으로 말하리라
홀연히 고삐 뚫을 곳이 없다는 사람의 소리를 듣고
몰록 깨닫고 보니 삼천대천세계가 나의 집이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일 없는 들사람이 태평가를 부르네
忽聞人語無鼻孔 頓(조아릴돈)覺三千是我家
六月鷰巖山下路 野人無事太平歌
바로 1881년 6월, 경허의 나이 서른여섯 되던 해이다.
경허는 왜 자신의 첫 설법에서 그토록 깊은 내면의 고독을 토로해야 했던 것일까? 모든 분야에서든지 어떤 체계의 정점에 도달한 사람들은 쉽게 입을 열지 않는다. 이미 할 말이 없어져 버린 고수들은 가장 완벽하게 묵비권을 지킨다. 진리의 정상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두 가지 길만이 놓여 있다. 입을 열 것인가 아니면 침묵 속으로 사라질 것인가.
붓다도 그랬다.
붓다의 이 같은 고독과 갈등을 알아차린 한 梵天이 부처님께 설법하기를 청했다고 경전은 기록한다.
세상에는 어떤 더러움에도
물들지 않는 순결한 마음들이 무척 많습니다
이들은 진리의 목소리를 목마르게 찾습니다
부디 감로의 문을 열어
행복한 분께서 깨치신 법을 설하소서
반드시 깨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붓다는 가르침을 세상에 전할 것을 결심하고 다음과 같이 외쳤다.
그들에게 감로의 문은 열렸다
귀 열린 자는 들으리라
눈 있는 자는 볼 것이다
자신의 낡은 사념을 버리고
진리의 북소리를 들을지어다
경허의 오도가는 실로 그 구성이나 형태, 實義로 보아도 완성도 높은 조사선의 법어가아닐 수 없다. 그 누가 있어 경허의 그 치열하고 완성도 높은 유심론을 능가할 수 있으랴?
눈 앞에 홀로 빛나는 광명이 적광토요
정수리 뒤의신비한 모습은 금강계로다
사대와 오음이 청정법신이요
극락세계란 바로 화탕지옥과 한빙지옥이 함께하는 곳이요
華藏刹海란 검수지옥과
화산지옥 속의 봅성토요
썩은 거름 무더기와 똥 무더기가 대천세계이며
개미 구멍과 모기 눈썹이 三身과 四智이며
허공과 삼라만상이 눈에 닿는대로 본래의 천진이니
아아, 참 기이하고 기이하도다
그 노래에 '슬프다 어이하리 무릇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랴.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구나. 사방을 돌아보아도 사람이 없으니 의발을 누구에게 전하랴' 고 하신 구절로 시작하고 끝을 맺으셨으니 이는 그 당시 스승과 제자, 벗들 사이에 道의 연원淵(못연)源이 이미 끊어져서 서로 인증할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한암 중원은 경허의 도저한 고독이 바로 경허 자신의 깨달음을 증명해 줄 사람이 없음을 탄식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한암 중원은 법맥상승에 관한 경허으 언명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이제 화상께서 남기신 가르침을 받들어 법통의 계보를 따져 보건대 화상은 龍岩 慧彦(선비언) 의 법을 잇고, 혜언은 금허 법첨을 잇고, 법첨은 율봉 청고를 잇고, 청고는 청봉 거안을 잇고, 거안은 호암 체정을 이었으며, 청허는 편양에게 전하고, 편양은 환성에게 전하였으니 경허화상은 청허로부터 11세손이 되시며 환성에게는 7세손이 되신다."
이상의 법맥상승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태고 보우 ㅡ 환암 혼수 ㅡ 구곡 각운 ㅡ 벽계 정심 ㅡ 벽송 지엄ㅡ 부용 영관 ㅡ 청허 휴정 (1520~1604)ㅡ 편양 언기 ㅡ 풍담 의심 ㅡ 월담 설제 ㅡ 환성 지안(1664~1729) ㅡ호암 체정 ㅡ 청봉 거안 ㅡ 금허 법첨 ㅡ 용암 혜언 ㅡ 경허 성우
경허는 천장암에서 보림을 행한 이후 20여 년간 천장암과 서산 개심사, 지금의 서산시 부석면 취평리 도비산 부석사 등지로왕래하면서 새로운 선의 바람을 일으킨다. 한암 중원은 충청도 일원의 이 절들을 경허가 '머물러 쉬면서 도를 연마한 도량'이라고 기록한다.
훗날 경허의 법을 잇고 그의 선법을 널리 편 만공 월면과 혜월, 수월 등의 제자들을 만나고 깨달음으로 이끈 시기도 바로 이때이다.
1789년의 오도 이후 54세의 원숙한 나이로 접어든 1899년, 해인사 인경불사의 초청을 받아 해인사로 이석할 때까지 경허의 발자취는 주로 동학사, 천장암, 서산 도비산 부석사, 개심사, 보석사, 대전 묘각사, 사불산 대승사, 문경 봉암사 등 충청도와 경상북도 일원의 절로 이어지고 있다.
태평상인이 계룡산에 있다가 선사의 높은 성호 듣고 서산 부석사로 찾아와서 물었다.
"무엇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뜻입니까?"
스님이 주장자로 한 번 쳤다.
상인上人이 말했다.
"치는 것은 마음대로 치지만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에는 어긋납니다."
스님이 도로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뜻인가?"
태평상인이 주장자로 스님을 치자 스님이 말했다.
"사자는 사람을 무는데 한나라 개는 흙덩이만 쫓는구나."
상인이 말했다.
"법은이 망극합니다."
스님은 웃으며 방장실로 돌아갔다.
이 인물은 구한말 재가禪의 숨은 달인이다. 출가한 선승은 아니다. 이 인물의 속성은 무안 박씨이며 경북 영해 태생이다. 박태평은 진사 시험에도 합격한 선비이지만 당시 불교계의 契학을 대표하던 석교율사의 문하에서 재가 오계를 받고 삼 년 동안 정진하여 견성한 인물이다.
세간과 청산이 무엇이 옳으랴
봄 되면 사람 사는 어디든 꽃은 피는 것
만약 누가 惺牛의 일 묻는다면
石女의 노래 속에 劫外歌라네
世與(줄여)靑山何者是 春城無처不開花
傍(곁방)人若問惺牛事 石女心中劫外歌
혹 사람들이 큰 도시에 나가셔서 교화를 떨치라고 권하면 곧 "나에게 한 가지 서원이 있으니 발이 경성땅을 밟지 않는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드디어 주장자를 꺾어 문밖에 내던져 버리고 번연히 산을 떠나시어 장소에 따라 교화를 펴시되 격식을 벗어 버리시고상투적인 것을 떠나서 궤칙을 두지 않으셨다. 혹 저잣거리에서 하염없이 노닐며 세속의 먼지 속에 섞으셨으며 때로는 한가롭게 솔숲의 정자에 누워 풍월을 읊으시니 그 초탈하신 모습을 사람들이 헤아리기 어려웠다.
어느때에는 가르침을 보여 주심이 지극히 자세하고 친절하시어 가히 생각할 수도 없는 미묘한 가르침을 주시기도 하셨으니 선에 철저하시고 악에도 철저하시어 가히 닦아도 끊어버릴 수 없는 것을 닦아서 끊어버리신 것이다. 또한 문장과 필법이 뛰어나시어 사람들이 흉내 낼 수 없었으니 참으로 근세에 드문 위대한 분이었다."
한암 중원의 전하는 편린 중의 하나다.
이 모든 것이 서로 섞여서 오늘날 사람들이 굴절시키고 있는 경허의 像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경허의 상을 온전히 그려낼 수는 없다. 그것이 경허의 비극이자 경허만의 영광인 것이다.
천생의 스승, 경허
대한불교 조계종은 禪을 근본 종지로 삼는 선종이다. 본종 종헌 제1장 종명 및 종지 제1조의 "본종은 대한불교 조계종이라 칭한다. 본종은 신라 도의국사가 찬수한 가지산문에서 기원하여 고려 보조국사의 중闡(밝힐천)을 거쳐 태고보우국사의 제종포섭으로서 조계종이라 공칭하여 이후 그 종맥이 면면불절한 것이다" 고 선언한다.
경허의 법을 잇거나 경허를 사숙한 현대의 저명한 선사들은 수월 음관(1855~1928). 남전 한규(1868~1936). 만공 월면.혜월 혜명(1861~1937). 한암 중원. 동산 혜일(1890~1965). 춘성 창림(1891~1977). 금오 태전(1896~1968). 전강 대우(1898~1975). 향곡 혜림(1912~1978). 경봉 원광(1892~1982) 등이다.
경허는 천장암 시절부터 전설적인 수행으로 후세의 귀감이 된 수월 음관에게 보조 지눌의 <<수심결>>을 가르쳤다. 경허의 법을 이은 수월은 깊은 수행력에서 우러나온 법력으로현대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종정들인 동산, 효봉, 청담과 금오 태전 등의 현대 선승들과 만주지역의 신자들에게 깊은 감화를 준 선사이다. 한때 출가초기의 수행을 쌓던 동산, 효봉, 청담이 만주로 수월선사를 찾아와 머물며 가르침을 받았을 정도로 그감화력이 알려진 인물이다.
수월선사의 속성은 전씨이며 충청도 홍성 출신이다. 1883년 29세의 나이로 서산 천장암에서 태허 성원 화상의 문하에 출가하여 경허선사에게 선을 닦았다. '水月'이라는 법호도 경허선사가 직접 지어주었으며 혜월. 만공과 함께 경허 문하의 세 달月이라고불린다. 1887년 겨울 천수呪를 독송하여 불망념지를 얻은 후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 중원과 함께 참선하였다.
수월은 이후 묘향산 비로암에서 3년간 수도하였으며 강계군 천마산 자조사子兆寺를 거쳐 백두산 밑 회막동에서 3년 동안 소를 기르며 지냈다. 또한 중국 동녕현 동삼차구에서 6년간 거주하며 정진하다가 1921년 왕청현 나재구 송림산에 화엄사를 짓고 8년 동안 주석하다가 1928년 7월 16일 세수 74, 법랍 45세로 입적하였다.
경허의 후광으로 인해 항상 눈부신 빛을 발하는 또 한 사람의 선사가 바로 만공 월면이다. 현대 한국선문에서 만공선사의 위치는 각별하다. 그는 경허 성우의 법을 이은 선사이면서 선문의 거대한 산맥을 이룬 덕숭산문의 실질적인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만공 월면은 전북 태인군 태인면 상일리에서 태어났다. 송씨인 만공은 14세 때인 1884년에 동학사의 어린 행자로 머물고 있을 때 경허와 처음 만나게 된다.
1884년 10월 초순의 어느 날, 천장암에 머물고 있던 경허가 설법을 하기 위해 동학사에 나타났다. 소년 만공이 본 경허의 첫인상은 육척이 넘는 체구에 위풍이 당당하고(수염이 꺼멓코ㅎ) 눈빛이 강렬하여 무서워서 도망칠 정도였다.
"나무는 삐뚤어지지않고 곧아야 쓸모가 있고 그릇도 찌그러지지 않아야 쓸모가 있는 법입니다. 사람도 마음이 불량하지 않고 착하며 정직해야 합니다." 동학사의 강사스님이 먼저 이렇게 설법을 했다.
경허의 법문 차례가 되었다. 경허는 형형한 눈빛을 번쩍이며 입을 열었다.
"지금 본사 강사스님은 '반듯하고 정직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삐뚤어진 나무는 삐뚤어진 대로 곧고, 찌그러진 그릇은 찌그러진 대로 반듯하며, 불량하고 성실하지 못한 인간은 나름대로 착하고 성실하며 쓸모가 있는 법입니다."
소년 만공은 분명히는 알 수 없지만 경허의 설법에 무언가 깊은 뜻이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소년은 생애 내내 경허를 따르게 된다.
다음날 소년 만공을 지도하던 진암스님은 경허헤게 말한다.
"이 소년에게 비범한 기틀이 엿보입니다. 스님이 데려다가 잘 지도하여 장차 불교계를 받칠 동량이 되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경허는 소년을 서산 청장암으로보내어 그해 12월 8일 태허화상을 은사로 삼고 자신이 계사가 되어 사미계를 준다. 법명은 월면月面이었다.
월면이 25세가 되는 1895년, 온양 봉곡사에서 처음 심지가 밝아지게 된다. 어느 날 새벽 자신의 화두였던 '만 가지 법이 하나로 돌아간다.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萬法歸一 一歸何處라는 화두를 참구하며 "만약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뵙고자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관하여 일체가 오직 마음으로 지은 바인 것을 관하라" 하고 염불하면서 새벽종을 울리다가 오도하고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짓는다.
빈 산 서리 기운 고금 밖이요
흰 구름 맑은 바람 홀로 오가네
무슨 일로 달마는 서쪽 하늘을 건너왔던가
축시에 닭 울고 인시에 해가 솟네
空山理氣古今外 白雲淸風自去來
何事達摩越西天 鷄鳴丑時寅日出
이후 공주 마곡사에서 3년간 정진하다가 1896년 7월 보름날 마곡사를 찾아온 경허에게 그간의 깨달음을 점검 받고 경허선사로부터 조주의 무자화두를 참구하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월면이 자신의 공부를 스승에게 고하자 경허는 말했다.
"불 속에서 피어난 연꽃이구나."
경허의 격려는 <<유마경>>에 실린 '불 속에 핀 연꽃은 바로 희유한 것이니 세간 속에서 선을 행하고자 하는 희유함도 또한 이와 같다'는 구절이다. 번뇌의 진흙속에서 연꽃을 피운다는 것보다는 훨씬 더 강렬한 어조를 담은 격려이다.
<<유마경>>은 일찍이 선종에서도 애독하던 경전이다. 유마경이 설하는 대승의 보살행이 이루어지는 그 공간은 극락정토가 아니다. 절도 아니다. 유마경의 공간은 바로생과 사의 숙업, 인간의 욕망이 쉴새없이 휘저어 내는 번뇌의 진흙탕이다. 그 번뇌의 진흙탕에서 연꽃을 피우려는 아름다운 꿈이 바로 <<유마경>>의 이상이다.
그래서 '마땅히 벗어나야 할 번뇌의 진흙탕에서 감히 깨달음의 연꽃을 피우겠다니......' 라고 의혹을 품은 사람들은 예부터 <<유마경>>을 불온한 내용을 가진 경전으로지목하기도했다.
철저하게 반권위적이며 '非道가 곧 불도'라는 위험한 역설을 설하는 <<유마경>>의 문맥을 분명 윤리적 우월감에 가득 찬 인간의 눈으로 읽는다면 이 경은 분명 반역의 경전일 수도 있다.
지금도 일부 불교인들은 붓다의 십대제자를 압도해버리고 '번뇌가 바로 지혜다 煩惱卽菩提(한자는 끌제字, 그러나 소리는 보리의 '리'로 읽는다) 라고 선언하는 유마의 언행은 승가의 종교적 권위를 무시하고 무조건 현실을 긍정하는 愚衆化의 괴수쯤으로 여기고 있다. 이처럼 유마경이 의혹에 찬 시선을 받는 데에는 분명 그 의혹의 깊이 만큼 이 경전에는 무언가 기존의 불교가 떠받들어온 가치를 압도하고 해체해 버리는 파괴력이 있기 때문이다.
경허는 월면에게 물었다.
"藤토시 하나와 좋은 부채 하나가 있다. 토시를 부채라고 해야 하는 것이 옳은가, 부채를 토시라고 하는 것이 옳은가?"
월면은 대답했다.
"토시를 부채라고 하여도 옳고 부채를 토시라고 하여도 옳습니다."
경허는 다시 물었다.
"그대가 일찍이 <<다비문茶毘(밝을비)文>>을 읽었는가?"
"예. 보았습니다."
경허는 다시 물었다.
"눈이 있는 석인이 두 눈에서 눈물을 흘린다(有眼石人齋下淚) 고 하였으니 이 참뜻이 무엇인가?"
"모르겠습니다."
경허는 말했다.
"유안석인재하루를 모르고 어찌 토시를 부채라고 하고 부채를 토시라고 하는 도리를 알겠는가?"
경허는 이어서 월면에게 자상하게 설명했다.
"그대의 공부에 만법귀일 일귀하쳐의 화두는 더 이상 진보가 없다. 이제부터는 다시 조주스님의 무자화두를 참구하라. 그리고 圓頓門을 짓지말고 徑(지름길경)截(끊을절)門을 지어라."
그날 이후 월면은 '無'자 화두를 참구하며 날을 새웠다.
1898년 7월 경허가 머물고 있던 서산 도비산 부석사로 간 월면은 스승에게 공부를 점검받은 뒤 그해 부산 범어사 계명암 선원에서 경허를 초청하자 스승을 모시고 하안거를 마친다. 그 후 월면은 통도사 백운암에 잠시 머물다가 장맛비 속에 들려오는 새벽 종소리를 듣고 확철대오하게 된다.
1904년 7월 15일 월면은 천장암에서 경허선사로부터 전법게와 비로소 그 유명한 '만공'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구름 달 시냇물 산마다 같은데
수산선자의 큰 가풍이여
여기 무문인을 조용히 분부하노니
한 조각 방편기틀이 안중에 살았구나
雲月溪山處處同 叟(늙은이수)山禪子大家風
慇(괴로워할은)懃(우수할근)分付(줄부)文印 一段(조각단)機權活眼中
저 먼 북방으로 떠나기 전 경허는 만공에게 뒷일을 부탁하며 "불조의 혜명을 자네에게 이어가도록 부촉하노니 불망신지不忘信之하라" 고 이르고 떠난다. 이후 만공선사는 경허선사의 명실상부한 계승자로서 덕숭산에 작은 암자를 짓고 금선대라고이름 붙인 뒤 수년간 머물면서 보림하였다. 그리고 수덕사, 정혜사, 견성암을 중창하고 선풍을 크게 떨쳤다.
1946년 10월 20일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 사람 만공! 자네와 내가 이제 인연이 다 되었으니 이별해야겠네" 하고 껄껄 웃은 뒤 입적하였다. 세수 76세, 법랍 62세였다.
만공선사의 법을 이은 제자로는 보월 성인, 혜암 현문, 고봉 경욱, 금봉 주연, 전강 영신, 효봉 원명, 벽초 경선, 춘성 창림, 초부 적음, 설봉 학몽, 만허 해륜, 일엽(수덕사의 여승)이 있다.
(오늘 집자 終, 2022.12.23, 21:08 금일의 실업급여 관련 인터넷 수강은 정말 걱정꺼리임을 증명하고도 남았다. 두번을 듣고, 그게 또 안된다고생각해서 60%를 진행하느라고 14:00가 다 되었다. 허나 인터넷 신청이라는 항목을 그만 깜빡 잊어버린 것이었으니.. 그것은 내가 북부노동구에 가서 담당이 해 주었기 때문에 뇌에 남아 있질 못했던 것이다. 아무튼지간에 지금 영하 5~6도에 칼바람이 부는데, 책을 반납하러 간다. 으휴~~ 밖에는 지금 혹한의 추위?? 나는 너무 겁많은 소년이 되어버렸나바)
(24일을 봉암리 삼거리에서 청우 망년회 개최. 삼거리가 갖는 어떤 상징성에 관련하여 회장으로서 발언할 때 언급했으면 훨씬 좋았을 듯. 그런 아쉬움. 대체적으로 잘 치름. "후배님 감사해요 좀더 잘해주고 싶었는데~ 부족해도 이해해주고 맛나게 먹어주어서 고마워요 만나서 반가왔어요" 메시지 오다. 오늘은 26일 월요일 계양도서관에서 다시 『경허 』 빌려옴. 12:13, 집자 시작
한암은 경허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제자였다. 그래서 수제자인 만공조차도 1930년 한암에게 경허의 생애를 정리하는 <<선사경허화상행장>>의 집필을 의뢰하였다. 이후로는 한암이 집필한 경허행장보다 나은 문건은 나오지 않았다. 한암은 현대 한국불교조계종의 첫장을 연 초대 조계종 종정으로 수도자의 분상을 생애 내내 굳건하게 지키면서 수많은 준족을 길러 낸 고승이다.
한암 중원은 강원도 화천 출생으로 속성은 방方씨이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했으나 '반고씨 이전에는 누가 있었는가?' 라는 근원에 관한 의문을 품고 1987년 21세 때 금강산 장안사의 행름선사의 문하에 출가하였다. 어느 날 금강산 신계사의 강회에서 <<수심결>>을 읽고 경학 연구를 물리친 뒤 참선을 시작한 이후 제방의 선원에서 수행하다가 1899년 성주 청암사에서 경허선사를 만나 크게 깨닫는다.
1899년 당시 나이 24세였던 한암 중원은 수도암(정빈이와 같이 갔던 그 수도암이 맞겠지.. 경허선사가 있던 그때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흘러 법전스님이 수도암을 중창했었을까?)에서 경허가 설하는 <<금강경>>을 들었다.
"무릇 형상 있는 모든 것은 허망하다
만약 모든 상을 非相이라고 보면
곧 여래를 보게 되리라"
한암은 경허가 설하는 <<금강경>>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의 四句偈(쉴게) 한 구절을 듣는 순간 '안광이 홀연히 열리면서 한눈에 우주 전체가 환히 들여다보였으며, 보고 듣는 것이 모두 자기 자신이 아님이 없었다'고 하였다. 한암은 오도송을 짓는다.
"다리 밑의 하늘이요, 머리 위의 땅이니
본래 안과 밖이 없고 또한 중간도 없는 것
절름발이가 걷고 소경이 눈을 뜸이여
북산은 말 없이 남산을 마주하네"
경허는 이 시기의 한암에게 "이미 開心을 넘어섰다"고 격려하고 있다. 경허는 그해 겨울 안거를 한암과 함께 보낸다. <<경허집>>은 경허가 해인사에서 다시 만난 한암과 작별하면서 준 <법자 한암에게 준다>는 글을 싣고 있다. 1900년의 일이다.
"나는 천성이 세간의 티끌 속에 섞이기를 좋아하고 여기에 더 꼬리를 진흙 속에 끌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다만 스스로 절룩거리면서 44년의 광음을 보냈는데 우연히 해인정사에서 遠開士를 만나게 되었다. 그의 성행은 진실하고 곧았으며 학문은 고명하였다. 서로 세상을 얻은 듯 추운 겨울을 함께 지냈는데 오늘 서로 이별하게 되니 아침저녁의 안개와 구름, 멀고 가까운 산과 바다 모두 실로 보내는 회포를 뒤흔들리지 않는 것이 없다. 하물며 덧없는 인생은 늙기 쉽고 좋은 인연은 다시 만나기 어려우니 이별의 쓸쓸한 마음이야 더 어떻다고 말할 수 있으랴.
옛 사람이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진실로 내 마음을 아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랴' 하고 말하지 않았던가. 슬프다. 그윽한 원개사가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知音이 되랴. 그래서 이제 시 한 수 지어서 뒷날까지 서로 잊지 말자는 부탁을 하노라.
북해에 높이 뜬 붕새의 날개 같은 포부
변변찮은 곳에서 몇 해나 속았던가
이별은 오히려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뜬 세상 아득하여 다시 기약하기 어려움을 근심하네"
경허는 한암을 지음이라고 적었다. 그것은 성행이 質直하고 학문이 고명한 젊은 후학을 만난 경허의 기쁨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경허는 자신의 사후에 일어날 일들을 미리 예견이라도 한 듯이 한암에게 깊은 경애감을 갖고 있는 것이다.
경허의 전별송을 받은 한암은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답했다.
"서리국화 설중매는 겨우 졌는데
어찌하여 오랫동안 모실 수 없을까요
만고에 빛나는 마음의 달이 있는데
뜬 세상 뒷일의 기약은 부질없습니다
霜菊雪梅纔(겨우재)過了 如何承待不多時
萬古光明心月在 更(고칠경)何浮世謾(속일만)留期
[대한경제에서 모셔 옴, 생전의 한암 대종사 모습. 조계종 초대 종정으로 한국불교 중흥의 기틀을 마련했다.]
경허는 바람과 같은 일생을 격렬하게 살아간 반면, 한암은 언제나 선문의 지도자다운 곧고 신중한 면모를 잃지 않았다. 그런 한암이 역설적으로 스승 경허의 풍광을 가장 근본적으로 변호하는 깊은 인간애를 가진 인물이라는 점은 우리를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바로 그 점이 한암을 더욱 드높은 덕으로 장엄(하게)고 (돋보이고)있다.
이후 한암은 1905년에는 통도사 내원선원의 조실로 주석하다가 1908년 범어사에서간행한 <<선문촬요>>의 山中同願秩에 잠깐 이름을 내비친 뒤, 1910년에는 평안남도 맹산 우두암에 주석한다. 1925년 서울 봉은사의 조실로 주석하다가 1926년 오대산 상원사로 옮겼으며, 1951년 한국전쟁 당시 오대산 상원사를 홀로 지키다가 76세로 입적하기까지 26년 간 산문 밖을 나오지 않고 엄격한 수행과 탁월한 담론으로 많은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불교조계종의 초대 종정을 역임했다. 문하에 탄허, 비룡 등이 있으며 법어집으로는 <<한암일발록>>등이 있다.
경허선사의 세 달 중의 또 한 사람인 혜월 혜명선사는 근세의 도인이라고 불리는 고승이다. 속성은 신씨이며 11세에 예산 정혜사 안수좌의 문하에 출가하였다. 1884년 서산 천장사에게 경허선사로부터 <<수심결>>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아 경허의 법을 이었다. 1902년 늦은 봄 혜월은 경허에게 전법게를 받는다.
"일체 법을 요할해 깨달으면
자성에는 소유가 없도다
이와 같이 법의 성품을 알면
곧 노사나 부처님을 보리라"
<<경허집>>에는 <법자 혜월에 준다>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혜월은 1908년부터 선산 도리사, 통도사, 내원사 등지로 다니며 선풍을 크게 떨쳤으며 평생 김매고 나무하는 등의 노동을 통해 선을 참구했다. 그가 선을 참구하고 설법한 곳은 모두 스승 경허의 주석지이다.
[부산 원효정사에 모셔진 혜월스님 사진. 진영은 부산 해운정사에도 모셔져 있다.]
혜월은 1921년부터는 부산 선암사에 주석하면서 산야를 개간하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산새들이 날아와서 모에 앉을 정도로 자비심이 깊었다. 일생 청빈한 수도생활을 한 근세의 도인으로서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혜월선사가 운봉스님에게 내린 전법게]
付雲峰性粹(부운봉성수)
一切有爲法(일체유의법)
本無眞實相(본무진실상)
於相若無相(어상약무상)
卽名爲見性(즉명위견성)
世尊應化(세존응화) 二九五一年(2951년) 四月(사월)
鏡虛門人(경허문인) 慧月(혜월) 설(說)
운봉 성수에게 부치노니,
일체의 유위법은 본래 진실 된 모양이 없으니
저 모양 가운데 모양이 없으면
곧 이름하여 견성이라 함이라.
세존응화 2951년 4월
경허문인 혜월 설함
혜월은 부산 안양암에서 세수 77세, 법랍 60세로 입적하였다. 문하에 운봉 성수 등이 있다.
주정뱅이 선승
경허는 모순덩어리이다. 기록으로 남겨진 전기는 연대와 그 인물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장치가 갖추어지고 있는 것에 비해서 구전된 이야기들은 선사로서의 엄숙함은 찾아볼 수 없고 때로는 엉뚱하기조차 하다. 한암 중원은 경허의 기행을 함축적으로 정리하였다.
"아아. 만약 그분의 行履(신리)를 논한다면 큰 기에 옛 사람의 풍모를 갖추시어 뜻과 기운이 실로 강하셨으며 하시는 말씀은 종소리가 울리는 듯하고 걸림없는 변재를 갖추시었다. 세간의 이익과 손해, 애증, 헐뜯음과 찬양, 고통과 즐거움을 모두 초월하시어 큰 산과 같이 부동하시었다. 가고 싶으면 가고 머물고 싶으시면 머부시어 타인의 눈치를 보아 우회하는 일이 없으신 분이었다.
이러한 탓으로 먹고 마심을 자유롭게 하고 노래와 춤을 맘대로 하는 등 거침없이 행동함으로써 남의 의심과 비방을 사게 되었다. 이와같은 행동은 저 이통현이라는 宗道者와 같이 툭 트인 마음으로 만사에 차별 없음을 확신한 나머지 초탈하여 거리낌이 없으셨던 것인가? 아니면 품고 있던뜻을 펼 길이 없어 강개한 나머지 보잘것 없는 곳에 신분을 감춘 채 스스로를 낮추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셨던 것일까?
鴻(큰기러기홍)鵠(고니곡)이 아니면 홍곡이 품을 뜻을 알기 어려운 법이니 크게 깨치지 못하고서야 어찌 그와 같이 사소한 예절에 얽매이지 않고 대범하실 수 있었겠는가?
화상께서 지으신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으니 이것이 당신 일생의 행리를 그려낸 것이다.
"술도 때론 빛을 내고 色또한 마찬가지
탐내고 성내고 번뇌는 영원한 것
부처든 중생이든 그런 것 나는 몰라
일생에 할 일이란 주정뱅이 중노릇뿐"
그는 자신의 방에 병들고 미친 광녀를 재웠고 한 때 살인혐의까지 받았으며 주육을 마다하지 않았다. 선문을 지도하는 제1급의 선사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는 혐의가항상 경허를 따라 다닌다. 이처럼 경허의 기행을 전하는 숱한 이야기들의 본질은 한마디로 도(道非)와 도(非道)가 종횡으로 교직된 몽환이다.
비도란 원래 <<유마경>>의 언어이다. 비도는 단순히 도의 대칭이 아니며 단순한 非倫理가 아니다. 청정과 오염, 선과 악, 유와 무의 경계를 넘어서 불성이 현재한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는 보살의 행위이다. 즉 a와 비(非)A라는 이원론에 집착하는 자아의 벽을 돌파한 반야의 현전인 것이다.
비도의 현전을 설하고 있는 <<유마경>>을 보기로 한다.
문수사리가 유마힐에게 물었다.
"보살은 어떻게 불도에 통달해야 합니까?"
유마힐이 말했다.
"만약 보살이 비도를 행한다면 바로 불도에 통달할 것입니다."
문수사리가 다시 물었다.
"보살은 어떻게 비도를 행해야 합니까?"
유마힐이 말했다.
"五無間의 업을 행하지만 賑(규휼할진)恚(성낼에)가 없이 지옥에 가며,
모든 죄업의 때가 없이 축생이 되며,
무명과 교만 등의 허물이 없이 아귀가 되며,
공덕이 구족하여 색계와 무색계의 도를 행하지만 훌륭하다고 여기지않고,
탐욕을 행하여 보이지만 모든 중생에게 분노를 일으켜 장애되는 바가 없으며,
愚痴우치를 행하여 보이지만 지혜로써 그 마음을 조목하며,
慳(아낄간)貪을 행하여 보이지만 안과 밖에 가진 바를 버려서 신명을 아끼지 않으며,
毁(헐훼)禁을 행하되 청정한 계에 안주하여 작은 죄라도 오히려 큰 두려움을 품으며,
진에를 행하여 보이되 항상 자비로써 인욕하며,
게으름을 행하여 보이지만 부지런히 공덕을 닦으며,
산란한 생각을 행하여 보이지만 항상 선정에 전념하며,
우치를 행하여 보이지만 세간과 출세간의 지혜에 통달하며,
속이는 행위를 보이지만 훌륭한 방편으로 뭇 경전의 진리를 따르며,
교만을 행하여 보이지만 중생들을 건네주는 다리가 되고,
모든 번뇌를 행하여 보이지만 마음이 항상 청정하며,
마계에 들어가는 것을 보이지만 부처님의 지혜를 따라서 다른 가르침을 좇지 않으며,
聲聞界에 들어가는 것을 보이지만 중생을 위한 듣지 못한 법을 설하며
辟(피할피)支佛의 세계에 들지만 대자비를 성취하여 중생을 교화하며,
빈궁한 세상에 들어가는 것을 보이지만 보배손이 있어서 공적이 무진하며,
남루한 형상을 보이되 모든 상호가 구족하여 스스로 장엄하며, ......열반을 나타내어 보이지만 생사를 끊지 않습니다.
문수사리여 보살이 능히 이와 같이 비도를 행해야만 불도를 통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경허가 해인사 선원의 조실에 머물고 있던 때의 일이다. 석양에 물든 해인사 뜰에 한 광녀가 나타났다. 경허는 자신의 거처인 조실방에 광녀를 머물게 하고 숙식을 같이 하였다. 온 몸이 고름과 오줌에 찌들어 악취를 풍기는 광녀는 자신을 거두어주는 경허에게 매달려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만공은 이 놀라운 사태를 대중에게 알리지 않고 문밖에서 꼭 지키고 있다가 누가 경허를 친견하러 오면 "조실스님께서는 지금 주무십니다"하고 변명하여 돌려보냈다.
며칠 후 광녀는 본래 정신을 차리고 경허에게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절을 하고 떠났다. 만공은 스승 경허의 경지에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훗날 만공은 "다른 모든 것은 스승 경허를 흉내낼 수 있으나 그 같은 일은 도저히 흉내낼 수없었다"고 회상하였다.
경허가 어느 해 겨울, 천장암에서 조금 떨어진 지장암에 머물고 있을 때이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지장암은 문이 떨어지고 벽에 금이 가서 추위와 바람을 막기 어려웠다. 경허는 겨울을 나기 위해서 <<화엄경>>을 뜯어 문을 바르고 벽에 도배를 했다. 이듬해 봄 낙숫물에 떨어지는 지장암으로 경허를 뵈러 간 제자들은 귀중한 경전으로 도배한 방을 바라보며 그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스님, 경전을 가지고 이렇게 도배를 하셔도 되는 겁니까?"
경허는 태연히 말했다.
"자네들도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이렇게 한 번 해 보겠나?"
제자들은 경허의 평온함과 당당함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우리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 자신의 독자적인 의견이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세상에 돌아다니는 소문이나 책에서 읽은 언어의 복사품일 뿐이다. 결국은 몽환 속에 젖어 사는 것이다.
어느 날 천장암에 머물고 있던 경허는 모친 박씨를 위해 법문을 하겠다고 대중들을 법당에 모이게 했다. 기대에 찬 대중들은 경허의 모친을 모시고 법문을 기다렸다. 모친은 희색이 만면하여 말했다.
"오늘 경허스님이 이 어미를 위해서 특별히 법문을 설한다고 하니 참으로 기쁘구려."
그러나 법상에 앉은 경허는 침묵을 지키다가 일어나 옷을 벗기 시작했다. 완전히 알몸이 된 경허는 모친을 향해 말했다.
"어머니 저를 보십시오."
모친은 기겁하며 말했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일이냐?"
자신의 아들이 설하는 심오한 법문을 듣고 부처의 길에 좀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모친의 기대는 그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아들의 해괴한 법문에 기가 질린 모친은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서 좀처럼 나오려 하지 않았다.
경허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래가지고 어떻게 남의 어머니 노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어렸을 때에는 이 몸을 발가벗겨 씻기며 안고 빨고 하시더니 지금은 왜 그렇게 못 하실까? 세상풍속 참으로 한심한 일이군."
경허의 비도는 이렇게 한이 없었다.
언제인가 천장암 아랫마을 선비들이 경허를 초대했다. 선비들과 어울려 파전과 막걸리로 하루를 보내고 비틀거리며 천장암을 향해 걸었다. 동행한 만공은 스승의 음주가 걱정이었다. 만공은 스승의 음주행각을 접게 할 생각으로 이렇게 말했다.
"스님, 저는 술이 있으면 먹기도 하고 안 먹기도 합니다만, 스님은 왜 그렇게 술을 드시는 겁니까?"
경허는 만공의 말꼬리를 끊으며 말했다.
"허 참, 자네는 아주 도가 높네 그려. 나 같으면 술을 먹고 싶으면 가장 좋은 밀씨를 구해서 밭을 갈아서 김을 매고 가꾸어 잘 익은 밀을 벤 다음 술을 빚어서 마시고 또 마시겠네. 또 파전이 먹고 싶으면 파씨를 구해다가 거름을 주고 잘 가꾸어서 파전을 먹고 또 먹겠네."
해인사 시절, 일주문을 걸어 나온 경허는 사하촌의 주막에 들러 술을 잔뜩 들이키고 비틀대며 절로 돌아오곤 했다. 그런데 기이한 일은 늦은 밤 취한 경허는 꼭 대적광전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어느 날 젊은 스님들은 경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대적광전에 숨어 있었다.
깊은 밤 경허의 기침소리와 함께 육중한 법당문이 열렸다. 젊은 스님들은 숨을 죽이고 경허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았다. 대정광전의 주불, 비로자나부처 앞에 선 경허는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뽑아들고 자신의 턱 밑에 세웠다. 취한 경허가 약간이라도 비틀거린다면 칼날이 경허의 턱을 뚫고 들어갈 판이었다. 그러나 경허는 칼날을 턱밑에 세운 채 꼿꼿이 서서 밤을 새우는 것이었다. 법당 안에 잠복해 있던 젊은 스님들의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이처럼 경허의 비도가 상연되는 연극의 무대에서는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 생로병사의 음산하고 불길한 선율이 전주곡으로 흐른 다음 장중한 불도의 교항곡이 울려 퍼진다.
경허를 둘러싸고 전해지는 비도의 기이한 일화들은 이능화가 <<조선불교통사>>에서 '세간에서 이르는 바......' 또는 '세인들이 이르기를......' 이라고 막연히 적은 바와 같이 후인들이 빚어낸 상상 속의 모습일 수도 있다. 즉 대중들은 경허의 기행속에 자신들의 상상력으로 윤색시킨 경허의 모습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한암 중원이 안타까워했듯이 사람들은 경허의 禪보다는 경허의 기행에 더 관심이 많다. 그것이 바로 구경거리, 이야깃거리에 굶주린 대중들의 속악한 일면이다.
그까짓 금덩이는 아무 데나 걸어 두어라
1898년 봄, 서산 도비산 부석사에 주석하면서 제자 만공과 枕(베개침)雲을 지도하고 있던 경허는 선원을 설치하려는 범어사의 초청장을 받고 범어사에 도착한다. 나이 53세에 이른 경허는 1904년 북방으로 길을 떠나기 전까지 범어사와 해인사, 송광사, 지리산 화엄사, 실상사 등지를 오고 갔다.
1899년에 쓴 <범어사 선원을 시설하는 계의서>, 4월에 쓴<해인사수선사방함인>, 11월 1일에 쓴<결동수정혜동생도솔동성불과계사문>, <상포계서>, 1900년에 쓴 <범어사총섭방함록서>, 11월 하순에 쓴 <남원천은사불량계서>, 섣달 상순 쓴 <화엄사상원암복설선실정관규문>, 1902년 10월 결제날 쓴 <범어사계명암수선사방함청규>, 1903년에 쓴 <범어사계명암창설선사기>와 수많은 시와 영찬들이 그의 활발했던 선문에서의 활동을 말해 준다.
1898년 경허를 범어사로 초청한 스님들은 바로 근대 범어사가 배출한 고승들은 등암 찬훈, 회현 석전, 혼해.성월 일전, 담해. 화월이다. 구한말 영남불교의 거봉들이 대거 나서서 경허를 초대했다는 사실은 당시 경허의 존재가 얼마나 비중이 있었는지 알려 준다.
경허는 <범어사 선원을 시설하는 계의서>에서 처음 선원을 열고 납자들을 제접하는 선사의 기개를 다음과 같이 쓴다.
"......옛날 고야선인이 "그 마음을 한곳으로 집중함에 만물이 병들지 않았다"고 하였고 회남왕 안이 신선이 되자 닭과 개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하니 닭과 개도 그 도의 교화를 입었거늘 하물며 만물 가운데 가장 신령한 인간일까보냐.
하물며 부처님의 無上正道에 있어서랴. 그러므로 이르기를 "듣고 믿지 않더라도 오히려 부처를 이룰 수 있는 인연을 맺고 이루지 못하더라도 사람과 하늘의 복보다 수승하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동참계를 시설해서 함께 최상의 인연을 맺어서 모두 영원히 사는 나라에 이르게 하노라.
대저 영원히 사는 나라란 어떠한 곳인가?
청산은 높이 솟고 벽해는 창창하며 조각구름은 떠 있고 솔바람은 소슬하니 어느것이나 자기의 광명이 아님이 없어서 하늘에 두루하고 땅에 두루하여 항상 영원한 옛이요, 항상 영원한 헌재로다. 비록 妙用이 항하강 모래 수와 같으니 그견고함도 능히 금강과 같으리라.
그래서 古德께서는 "반야를 닦는 공부는 헛되이 버리는 공부가 없다"라고 이르셨으니 만일 성불의 원력이 있는 사람은 마땅히 깊은 마음으로 큰 원력을 발할지어다.
경허는 당시 범어사 문중의 장로였던 등암스님에게 선의 요체를 강의한 <등암화상에게 준다>라는 서간을 쓰고 있다.
與藤菴和尙
達磨大師入唐土 敷演最上乘法 不論誦經念佛持呪禮拜 不論長坐不臥一食卯齋 不論禪定解脫 不論持戒破戒僧俗男女 見性卽成佛 若以誦經等餘外法 妄爲佛法 殺却無罪過
달마대사가 당나라에 들어와 최상승법을 폈는데, 경을 읽고 염불하고 주문을 외고 예배하는 것을 논하지 않았으며, 장좌불와 일종식도 논하지 않았으며, 선정과 해탈도 논하지 않았으며, 계(戒)를 지키고 파하는 것이나 승속 남녀도 논하지 않았으며, 자기 성품을 보면 곧 성불한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경을 읽는 등이나 그밖의 법을 망령되이 불법이라 한다면 그런 사람은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등암화상은 경허가 편찬한 뒤 1908년 범어사에서 복판본으로 간행한 한국선문의 교과서인 <<선문촬요>>의 산중동원질에도 기명되고 있는 인물이다. 구산선문의 한 곳이며, 1897년 가을 필자가 창원시 봉림산문 답사길에 잠시 들른 창원 불모산 성주사는 등암화상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바로 등암화상은 한때 퇴락해 있던 성주사를 중수하고 경남서부지역에 근대불교의 씨앗을 심은 분이다. 그래서 지금도 성주사 대웅전에는 개산조 무염화상과 함께 그 진영이 봉안되어 있으며 1882년에 세워진 <성주사중흥조등암대종사공덕비>가 남아 있다.
경허의 시<통도사 백련암에서 환성노스님의 운에 삼가 차운하다> 이다.
그까짓 금과 유물 아무 데나 걸어 두어라
道의 가치 천추에 빛나서 산과 바다가 오히려 가볍도다
유구하고 너른 회포 그 누가 알겠나
허공에 남은 차가운 경쇠소리 겁외까지 사무치네
경허는 왜 '그까짓 금과 유물 아무 데나 걸어 두어라'고 탄식하고 있는 것일까? 그 당시 이미 사찰의 문화재를 훔쳐 파는 모리배들이 법당을 뒤지고 다녔던 것이다. 아마도 경허는 무언가 전해 오던 절의 성보를 잃어버리고 비감해 하는 스님들에게 이 시를 적어 주었던 것은 아닐까? 본분종사였던 경허의 눈에는 금과 유물조차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잡아함경>> 권32에는 이 나무치 악마와 붓다의 대화가 실려 있다.
악마는 붓다를 유혹했다.
현명하신 분이시여, 왕이 되소서."
붓다는 말했다.
"어리석은 이여, 나는 이미 왕위는 버리고 왔노라."
악마는 다시 유혹했다.
"현명하신 분이시여, 히말라야를 황금으로 변하게 하소서."
붓다는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게송으로 노래한다.
"비록 여기에 저 설산 만한
순금덩어리가 있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그금을 얻는다고 해도
오히려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저 지혜로운 사람은
그 금을 돌과 같다고 보느니라"
무착은 永嘉(아름다울가)사람이다. 생각을 대도에 두고 뜻을 세워서 널리 여행하였다. 장안의 운화사에게 징관법사에게 화엄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가 오대산에서 수행할 때 소를 끌고 다니는 한 노인을 만났다. 무착은 노인에게 가르침을 받고 하룻밤 머물 것을 청했으나 노인은 말했다.
"탐욕을 다 없애지 못한 범부는 머물 수 없노라. 다만 나의 게송을 들어라."
무착은 노인으로부터 한 게송을 듣는다.
"한 생각 청정한 마음이 바로 보리이니
항하사의 칠보로 디은 탑보다도 거룩하다
보배의 탑은 마침내 부서져 다하지만
한 생각 청정한 마음은 바로 정각을 이루리"
一念淨心成正覺
성 안 내는 그 얼굴이 최상의 공양이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위없는 향기되네
아름다운 그 마음이 부처님 마음이고
깨끗한 그성품이 영원한 법신일세
동자의 노래가 끝났을 때 무착이 고개를 돌려 돌아보니 동자의 금색가람의 모습은 이내 사라지고 오직 숲과 바위만이 보일 뿐이었다. 무착이 고개를 들어 노인이 있던 곳을 바라보니 오색구름에 쌓인 무지개가 산마루에 걸려 있고 문수보살이 여러 보살들과 함께 사자를 타고 날아가고 있었다. 그 뒤 무착은 이 산에 숨어서 일생을 마쳤다.
다시 경허의 시, <통도사 백련암>을 보자.
호방한 마음 가눌 길 없어
긴 소맷자락 떨치며 천 언덕을 넘었네
숲 깊은 절에 들리는 두견새 울음소리
강산의 만고심인저
宕(호탕할탕)淸牧(칠목)未了 長袖(소매수)拂(떨칠불)千岑(봉우리잠)
深院(집원)聽鵑(두견이견)語 江山萬古心
선어는 항상 술어적 세계의 진실만을 겨냥한다. 이념을 담은 主語는 오히려 허망하고 조만간 또 바뀌고 덧없는 단어카드의 놀이일 뿐이기에 오직 술어가 지시하는 현실을 본다(도올이 주역강해에서 서구는 주어를 꼭 집어넣고, 우리나라는 주어 없이도 서술어만으로 가능하다는, 그래서 서구의 학문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근대문학이 현재의 문제점을 야기했다고 했었는데...). 경허는 이 시에서 두견새 울음소리를 듣는 자신의 마음에서 강산만고심을 보았던 것이다.
1998년 12월 하순, 겨울의 통도사 백련암을 찾아갔을 때 두견새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고 백련암 입구에 서서 천년의 풍상을 지켜보았을 웅장한 은행나무가 한 겨울의 세찬 바람 속에서 가지를 떨고 있었다. 백련암 역시 최근에 지은 몇 채의 요사들과 법당이 그새로움을 과시하고 있다. 다만 그 옛날 경허와 만공이 묵었을 허름한 선방과 요사가 남아서 경허의 그 시절을 자직하게 말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도 살지 않을 것 같은 허름한 요사의 누추한 문살위에 大覺夢이라는 당호가 완당 김정희(1786~1856)라는 낙관과 함께 단정하게 남아 있었다.
장자는 '큰 꿈(大夢)'이 있은 후에야 큰 깨임(大覺)이 있다'고 했다. 그 큰 깨임이란 무엇일까? 필자는 오래도록 서서 완당의 대각몽을 바라보며 경허를 생각했다. (아래의 글 <다시 경허를 생각한다 > 집자하여 맨 아래에 둔다22.12.26, 20:09 & 집자는 계속ㅡ)
경허는 통도사 백운아에서도 한 수의 시 <통도사 백운암>을 남기고 있다. 백운암은 현대 선문의 산증인인 경봉선사가 주석하던 극락암에서도 한 시간쯤 노송이 가득 찬 숲길과 가파른 돌길을 걸어 올라간 영축산 봉우리 밑에 자리잡은 작은 암자이다. 백운암의 뜰에서 보는 영남 일대의 경관은 매우 장관이어서 정면으로 낙동정맥의 우람한 산줄기들이 한눈에 보이고 동쪽으로는 짙푸른 동해가 출렁거리고 있다.
흰 구름 속의 백운암
반은 층층 바위 위에 반은 허공에 걸려 있네
숲 속 안개구름 속에 잠겨 있는 칡넝쿨
바람이 불 때마다 흰 구름 속에서 그네처럼 흔들리네
白雲庵裏(속리)白雲在 半(걸궤)層巖半괘空
千樹煙㦬(앞의 변 無 '키라')多韻致 隨風遙(멀요)曵(끌예)白雲中
가파는 산비탈 한 자락 능선을 뒤덮고 있는 대나무 숲 속에 고요히 떠 있는 백운암은 선과 화엄의 법계를 완성한 현자의 심경을 풍광으로 그려낸다. 백운암 뜰에 서면 푸른 솔숲과 산상의 맑은 대기 속으로 짙푸른 동해가 보인다. 청산은 禪을, 바다는 화엄을 상징한다. 바로 이곳에서 1898년 만공 월면은 장맛비 속에 들려오는 새벽 종소리를 닫고 확철대오한다.
통도사의 講主를 역임했으며 1929년 선교 양종 7敎正의 한 사람으로 선출된 해담 치익(1862~1942)의 자호는 曾(거듭중)谷이다. 해담은 자신의 호에 대해서 이렇게 쓴다.
내가 감히 증곡으로호를 삼은 것은무엇을뜻하고자 함인가. 나는 일생동안 지은 바가 僧에 가깝지도 않고 俗이라고 하기에도 마땅하지않아서 승속에서도 벗어난 사람이니 비승비속이라는 뜻이다. 내가 이 호를 쓴지 오래지않아 한 벗이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
"그대는 영축산의 고명하신 해담스님이 아니신가?" 나는 미소를 지었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이처럼 비승비속의 그 였지만 그는 계율을 준엄하게 지킨 율사였으며 보살계 법회의 수계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런 증곡이 <경허화상께 올리는 글謝(사례할사)鏡虛和尙(오히려상)書>이라는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먼젓번에 인사도 다 올리지 못하고 뒷날 인사도 또한 늦으니 진실로 감회를 감출 뿐입니다. 그러나모습을 本地위에두고 토로하자면 눈을 뜨거나 감거나유념이거나 무념이거나 모두 만나는 자리가 곧 헤어지는 자리입니다.그러나 事路門으로 뒤집어보면 산이 첩첩하고 물이 가로막혀서 형체가 통하지 못함을 매양 한스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풀리지 않는 여한을 달래며 시 한 구를 바쳐 올립니다.
아무리 어여쁜 꽃도 지고 말아서
꽃과 가지와 서로 나뉘나니
두견새 울음소리 속에
산봉우리 달이 지지 않고 남았습니다"
증곡뿐만이 아니다. 현대 한국선문의 산증인 경봉 원광(1892~ 1982) 또한 평생 경허를 사숙한 선승이다. 선시에 능한 경봉은 경허의 시에 차운하는 시를 썼으며 심지어는 꿈속에서조차 경허와 조우한다.
경봉은 1892년 4월 9일 경남 밀양군 부내면 서부리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김鏞(종용)國이며, 15살에 양산 통도사 성해화상의 문하에서 출가하였다. 출가 초기에는 경학 연구에 몰두하였으나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반푼 어치의 이익도 없다'(終日數他寶 自無半錢分)'는 구절을 읽고 참선을 시작하였다.
내원사, 해인사, 금강산 마하연, 석왕사 등지에서 참선정진하였으며 1941년 조선불교 중앙선리참구원 원장, 1949년에는 통도사 주지를 역임한 뒤 1953년 11월에는 통도사 극락선원 조실로 추대되어 1982년 7월 입적하기 전까지 독자적인 선풍으로 많은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특히 선사는 한시와 시조,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서예로써 설법을 대신하였으며, 조사어록을 인용하지 않고 자신의 선지에 의한 일상어로 설법하였다.
경봉은 자신의 평생 일기를 정리한 <<삼소굴일지>>에서 1937년 12월 9일 경허선사의 열반에 얽힌 꿈을 꾸고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오전 1시 30분 꿈을 꾸는데 어느 절에서 경허선사가 열반하였다고 해서 내가 통도사 대표로 치전致奠하러 갔다. 그때 마침 靈壇에 전물이 많이 차려졌는데 혜월선사가 앞에서 젯상을 주장자로 세 번 치더니 전물을 전부 거두어 갔다. 내가 가지고 간 전물을 영단 앞에 차려 놓고는 손에 죽편을 잡고 일어서서 말하기를 "이러한 때를 당해서 어떠한 것이 화상의 법신인가?" 하니 전물 중에 대추 한 개가 날아와 나의 입을 때리고 땅에 떨어지기를 내가 다시 말하기를 "화상이 그럴 줄 알았으나 오히려 다하지 못하였으니 다시 한 번 이르시오" 하고 꿈을깨니 인적이 드문 깊은 밤인데 대웅전에서 종소리가 몇 번 울리고 푸른 하늘에 밝은 달만 교교하다. 게송으로 이르되
법신의 一路를 영가에게 물었더니
붉은 대추가 날아와 눈앞에 떨어지네
최후의 활구를 오히려 끝내지 못했는데
종소리에 단꿈 깨니 달은 하늘에 둥실 떴네"
경봉은 1982년 7월 17일 문도들에게 "야반삼경에 대문 빗자루를 만져 보거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법어집으로는 <<법해法海>>, <<속법해>>, 한시집 <<운광閑話>>, <<삼소굴일지>>와 만공.한용운.박한영.용성.성철.춘성.만암.한암.향곡.설봉.경산.고봉.구하.구산.남전.경선스님 등과 주고받은 서신을 모아 수록한 <<삼소굴소식>> 등이 있다.
특히 <<삼소굴일지>>와 <<삼소굴소식>>은 현대 한국 선문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경봉선사 바로 자신이 1세기에 걸쳐서 지켜 온 현대 한국 선문의 증인임을 마랳준다.
대중은 아는가?
1898년 겨울, 경허는 해인사를 향해 가는 도중 청암사 수도암에 잠시 들른다. 경허의 시, <청암사 수도암에 오르며>이다.
(내가 두번이나 갔었던 법전스님이 중창한 그 수도암)
"평지도 이미 걷기 힘든데 오르는 건 정말 힘드네
두렵구나 젊은 날은 잠깐 사이에 지나가고
신선의 바다에 들어 구슬 캐는 기술도 버리고
명산에 들어 약 캐는 때도 놓쳐 버렸네
깊은 골짜기 눈보라는 구름 싸인 바위에 흩날리고
바람이 우는 해묵은 등나무 가지에 밝은 달이 걸렸네
법당은 그림 같고 스님은 말이 없으니
경쇠 소리에 향연만 피어 오르네"
53세의 경허는 나그네의 시름을 안고 그 험한 청암사 수도암 길을 걷고 있다. 해인사에서 산길로 꼬박 하루가 걸리는 수도암은 경북 내륙의 오지로서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걸음이 쉽게 닿을 수없는 고찰이다. 그래서 지금도 선에 뜻을 둔 납자가 아니면 잘 찾지 않는다.
필자는 경북 김천 증산면 평촌리의 청암사로 걸음을 옮긴 일이 있다. 청암사는 짙푸른 숲과 계곡을 안고 있는 비구니 강원이다. 기품 있는 비구니들이 초여름 뙤약볕 아래서 밭일을 하고 있었다. 청암사 주지 상덕스님이 이야기했다.
"대웅전의 주련은 한 30년 전 수덕사의 원담스님이 청암사가 경허스님께서 계시던 곳이라고 해서 한 번 찾아왔는데 주련도없고 해서 자신이 직접 글을 쓰고 경비를 들여 주련을 해 달았다고 합니다."
온갖 꽃들이 가득 피어난 청암사 법당 앞에 서서 원담스님이 그의 정신적 선조였던 경허를 기념하며 쓴 주련을 수첩에 옮겨 적었다.
부처님의 법신은 시방에 충만하시니
삼세여래도 모두 한결같으시네
광대한 서원의 구름은 길이 다함이 없으시고
드넓은 깨달음의 바다는 미묘하여 헤아리기 어려워라
佛身普(넓을보)徧(치우칠편)十方中 三世如來一體同
廣大願雲恒(항상항)不盡 汪洋覺海渺(아득할묘)難窮(다할궁)
대웅전 주련에는 혜공 진성이라는 낙관이 들어 있었다. 혜공이, 만공스님의 법을 이은 벽초 경선의 제자 원담스님의 옛 이름이란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1899년 경허는 가야한 해인사로 주석처를 옮긴다. 당시해인사에는 고종의 칙명으로 대장경을 인출하는 불사와 수선사를 설치하는 불사를 하고 있었다. 경허는 이 불사의 법주로 추대되었다.
경허는 1899년 9월 하순에 작성한 <합천군가야산해인사수선사창건기>에서 '결연히 기해년 가을 찾아와서 경을 열람하고 집을 둘러보고 홍류동 속에 신선의 신선스런 발자취를 더듬어서성거리니 몸까지 잊을 정도였다'고 해인사를 예찬한다. 경허에게도 해인사는 유서 깊은 한국불교의 성지였던 것이다.
경허는 해인사에 머물며 법주로서 많은 일을 했다. 상당설법은 물론 선원의 방함록과 선원 창건의 전말을 기록하기도 했으며 해인사가 배출한 여러 스님들의 진영에 영찬을 쓰기도 하는 등 분주한 일상을 보냈다. 이기해년 경허가 얼마나 교화에 큰 의욕을 품고 있었는지 다음의 시가 잘 보여 준다.
"이미 지나간 영화와 쇠퇴 모두 씁쓸한 것
가야산 속에서 깊은 진리 참구하자
새 노래꽃 웃음 무한한 마음
밝은 달 맑은 바람에 도는 가난하지 않네
하물며 성현들 보계에 둘러싸여
법황이 미혹한 중생들 제도하나니
이제 이 누더기 한 벌 누덕누덕 기워 입고
구름 낀 산봉우리에서 여생을 보내리라"
(상기 시의 마지막 귀절을 읽으면 경허선사는 해인사에서 여생을 보낼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하다)
지금 해인사 선방에 堆(언덕퇴)雪堂이라는 당호를 직접 짓고 편액과 주련의 시도 직접 짓고 써서 걸었다. 해인사 퇴설당의 주련은 당시 득의만만한 경허의 심경이 투영되어 있다.
"봄 가을에는 좋은 날 많나니
義理에 풍년이 들었네
물기가 달 읊는 소리 고요히 듣고
天文을 이야기하는 새소리 웃으면서 대하네
구름으로 옷을 삼으니 누에 치지 않고
선실에서 어찌 농사지을 필요가 있으리
石鉢에 구름의 이슬 담는 것을"
春秋多佳日 義理爲豊年
靜聽漁讀月 笑對鳥談天
雲衣不對蠶 禪室寧須(모름지기수)稼(심을가)
해인사에서의 경허는 젊은 날 손에서 놓아 버렸던 경전과 어록들을 다시 손에 잡고 핵심적인 내용을 간추려 서사하기도 한다.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한 준비였거나 자신의 불교 이해를 점검하려는 오랜만의 재시도였으리라.
실제로 경허는 1899년 섣달 스무날 <귀취자기>라는 제목을 붙여서 여러경전과 어록을 발췌하여 서사하였다. 경허의 의욕을 보여주는 일이다. 경허에게는 대선사의 역량을 남김없이 발휘할 수 있었던 해인사 시절이 가장 득의만만한 시절이었으리라.
(오늘집자 終. 오늘 하루는 헛 살지 않은 듯 혀. 10:00쯤 푹 자고 일어났고(이서방이 재택근무해서 로아로부터 풀려났고), 천마산 계양산을 헤알려봤으나 여의치 않차 도서관에서 책 빌려 집자에 몰두할 수 있었네. 도올주역강해를 운 좋게 빌렸고, 이것을 과연 내가 읽을 여력이 될까? 주역이 만일 내게로 발걸음해 들어온다면 내 인생은 좀 더 풍부하고 문화가 빛날 듯도 해. 마치 골퍼로 신분상승 하기라도 한 듯이. 하지만 김지하가 이 공부를 하다가 아뭇소리도 못하고 죽은 걸 보면 결코 쉽지는 않으리라. 공자도 몇해만 더 살수 있으면 역경을 뗄 수 있었을텐데... 하면서 죽었잖아.
이즈음에는 하루가 옛날의 그 하루가 아닌, 즉 '그날이 그날이' 아니고 애틋하게 다가오는 탐탁하기 그지 없는 하루다. 하루치의 진정한 살아 있는 삶이란 바로 어제 죽은이의 그토록 원하던 바 아니던가!
로아네와 저녁 밥을 함께 먹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로아는 이곳 저곳 뛰어다니면서 밥숫갈 넣어주면 입벌리고ㅎ 내가 손주 이뻐하는 마음을 표현하자면 함박꽃이나 불두화의 만개心아닐까?ㅎ )
(2022.12.27, 11:01 집자 始作, 파주 몰자비 '典'字 찾아냈다는 낭보를 경향신문에서 읽다)
한암은 경허행장에서 해인사 시절의 경허의 상당설법을 핵심적으로 잘 정리하고 있다.
법좌에 올라 종지를 선양하시되 바로 본분사를 보이셨으니 마치 백주대낮의 대담한 강도(白拈(집을념)賊)의 방편을 써서 살활의 기틀을 펼치셨다. 가히 금강의 보검이요, 사자의 남김없는 위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선사의 설법을 듣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릇된 견해를 버리고 집착이 사라져서 그 시원하기가 마치 뼈를 바꾸고 창자를 씻어낸 듯 하였다.
결제結制(억제할제) 때 上堂하시어 주장자를 한 번 내리치고 이르셨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 천하의 선지식인 노화상들이 오두 여기에 모였구나."
다시 한 번 주장자를 세웠다가 그어 당기면서 이르셨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 천하의 선지식이신 노화상들이 빠짐없이 이를 따라 오는구나."
다시 한 번 주장자를 세워 그어 밀어내면서 이르셨다.
"삼세의 여러 부처님이나역대의 조사, 천하의 선지식이신 노화상들이 빠짐없이 이를따라가나니 대중은 아는가?"
대중이 대답하지 못하자 주장자를 던져버리시고 법좌에서 내려오셨다.
어떤 승이 물었다.
" '옛사람의 말에 옛길(古路)을 활발하게 살아서 갈 것이요, 변변찮게 시들은 기틀에 떨어지지 말라'고 하였으니 어떤 것이 옛길입니까?"
선사게서 답하여 이르셨다.
"옛길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평탄한 길이요, 하나는 험난한 길이다. 어떤 것이 험난한 길인가? 가야산 아래의 천 갈래 길에 수레와 말이 맘대로 오고 가네. 어떤 것이 평탄한 길인가? 천 길 낭떠러지이니 사람은 오르지 못하고 오직 원숭이만 거꾸로 나무에 오르네."
여름 결제를 해제하는 날 상당하여 일찍이 동산선사께서 말씀하신 示衆을 들어 이르셨다.
"동산선사는 '가을이 시작되고 여름이 끝나는 이때, 동쪽으로서쪽으로여행을 떠나는 형제들이여, 곧바로 모름지기 만리에 풀 한 포기 없는 곳으로 갈지니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으련다. 가을이 시작되고 여름이 끝나는 이때, 동쪽으로 서쪽으로 여행을 떠나는 형제들이여, 길 위의 잡초를 낱낱이 밟고 가야만 비로소 옳다고 말하리니 나의 이 말이 동산의 말고 같은가 틀린가?"
대중이 대답하지 못했다. 선사께서 한찬 말 없이 계시다가 이르셨다.
"대중이 대답하지 않는 이상 내가 스스로 말해버리겠다."
바로법좌에서 내려가 방장실로 되돌아가시니 그곧고 간명하게 들어 보이신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이 상당설법들은 선문의 전통적인 설법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이 주목되지만 경허의 禪機가 가장 원숙하게 무르익은 시기의 법어라는 점에서 중요한 설법이다. 선어록에서 '백염적'이란 제자를 지도하는 데 탁월한 기량을 가진 선사의 별칭이다. 주로 임제가 날강도, 백염적에 많이 비유된다. 도둑은 상대의 물건을 훔쳐서 빈털털이로 만들어 버린다. 미혹에 빠져 있는 자에게서 그 미혹을 훔치고, 깨달음에 집착하는 자에게는 그 法執(잡을집)을 훔치는 것이다. 경허는 설법을 듣는 상대방의 영혼을 송두리째 훔치는 도둑 중의 도둑이다. 진정한 도둑인 것이다.
티베트불교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마르빠는 그 유명한 불교성자 밀라레빠의 스승이다. 마르빠의 스승 나로빠는 불교의 달인이었으며 인도 최고의 불교대학이었던 나란다 사원대학의 총장이었다.
마르빠는 도를 구하기 위해 스승 나로빠를 찾아갔다. 나로빠는 벵갈의 어느 강변의 허름한 오두막에서 숟가락도 없이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마르빠는 실망했다. 위대한 스승이라면 훌륭한 저택과 책으로 가득찬 서재에서 제자들에게 둘러싸여서 살고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더욱이 나로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공부를 하러 왔다고? 이봐! 나는 공짜로 가르치지 않아. 돈을 좀 가져오게."
진리에 대한 갈망으로 타오르던 마르빠는 수년간 강가에서 뜰채를 들고 모래를 건져 올렸다가사금을 가려내어 상당한 분량의 사금을 모았다. 마르빠는 가르침을 받겠다는 열의에 가득차서 나로빠를 찾아갔다. 그러나 마르빠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욱 냉소적이었으며 적대적이기조차 했다. 마르빠가 인사하자나로빠는 비웃듯 말했다.
"다시 만나서 반갑군. 그래 돈을 좀 가져왔나?"
마르빠는 자신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쓸 여비를 조금 남기고 당상히 많은 양의 사금을 나로빠에게 올렸다. 나로빠는 비웃으며 말했다.
"너무 적어. 자네는 그렇게 얕은 꾀로 내 가르침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나. 자루에 숨겨 둔 사금을 전비 이리 내놓게!"
사금을 더 달라는 그의 목소리는 비열하기조차 했다. 결국 마르빠는 여비로 남겨둔 사금을 자루째 내밀어야 했다. 사금자루를 받은 나로빠는 만족한 듯이 웃었다. 그러나 순간 놀랍게도 나로빠는 사금이 든 자루를 뒤집어서 사금자루를 공중에 훨훨 털어 날려 버렸다. 눈부신 사금가루가 나로빠의 큰 웃음소리와 함께 햇볕을 받아 반짝거리며 바람 속으로 날아가 버렸다.
마르빠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그토록 소중한 사금을, 허리가 휘도록 일해서 모은 사금을 허공에 뿌려 버리다니' 마르빠의 두 눈에서는 슬픔과 분노가 이글거렸다.
통쾌한 웃음소리가 지나간 정적 속에서 나로빠의 음성이 조용히 울렸다.
"젊은이여, 눈을 들어 이 세상을 보라!"
마르빠는 눈을 들어 벵갈의 들녘과 강,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이 세상은 전체가 눈부신 빛을 발하며 번쩍이는 황금이었다. 나로빠는 말했다.
"이세상 전체가 눈부신 황금이라네. 나는 자네의 소원은 무엇이든 들어 주겠네. 자네는 황금과 진리 가운데 무엇을 원하는가?'
이 순간이 바로 마르빠에게는 開眼의 순간이었다.
경허는 1899년 4월 여름안거를 시작하던 날 <해인사수선사방함인>을 작성하여 해인사 수선사에 안거하는 후인들에게 발심할 것을 촉구하면서 '몸은 물거품과 같고 목숨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다. 덧없음을 깨달아 부지런히 정진할 줄 아는 이 누구인가?' 라고 묻고 있다.
다시 9월 하순에는 <합천군가야산해인사수선사창건기>를 작성하여 해인사 수선사 창립의 전말과 한국선가가 나아갈 길을 기록한다. 특이 이 문건에서는 구한말 한국선가의 일면을 보여주는 경허의 교단 비판과 선가의 존재 이유를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요즘은 正法보기를 흙덩어리 같이 하며 慧命을 계승하기를 아이들 장난처럼 여기고, 심하면 반목하고 질투하여 더 나가서는 못하는 짓이 없으니 슬프도다. 뒷사람들이 비록 정법안장의 말씀을 듣고자 하나 누구에게 듣겠는가? 이러한 때 수선사를 창건하는 것은 실로 불 가운데 연꽃이 피어나는 것이다.
경허는 1899년 11월 1알 <결동수정혜동생도솔동성불과계사문>을 작성한다. 자신의 경력과 불교관을 아주 상세하게 피력하면서 선정과 지혜를 닦아 도솔천에 나며 세세생생 도반이 되어 함께 성불하자는 서원을 세우고 있다.
"......내가 지난 기묘년 겨울에 계룡산 조사당에 있으면서 조사활구를 참구하다가 홀연히 뜻을 얻는 곳이 있었다. 뜻 맞는 이들과 함께 공부할 생각이었으나 그때 유행병이 그치지 않았고 마음의 의지도 또한 굳세지 못하여 드디어 여유 있게 노닐며 속에만 쌓아두고 어촌과 주막으로 방랑하며 또는 그윽한 시냇물과 깊은 숲을 찾아 쉬며 마음놓고 잊어 버렸다.
그뒤, 그럭저럭 20여 년이 흘렀다. 스스로 부처님의 은혜가 막대함을 생각하고 만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하여 질률주장자를 울러 메고 합천 해인사로 갔다. 마침 선방을 새로 건축하여 여러 선덕들과 별로 진보도 없는 참선을 하며 겨울 한 철을 나게 되었다. 어느 날 스님들과 화롯가에 둘러앉아 이야기하다가 옛날 사람들이 결사하여 수도하던 일을 언급하게 되었다.
여러 선덕들은 모두가 마치 잊었떤 것을 문득 생각해 낸 듯, 그 지원과 신심이 물이 솟아오르듯, 산이 빼어나는 듯, 서로 만남이 늦음을 탄식하며 곧 함께 결사를 맺기를 의논하고 나를 맹주로 추대하였다. 내가 옛날에 품었던 생각을 떠올려보니 부처님의 은혜가 막중한지라 그 재주의 용려(렬)함과 단정하지 못한 성품과 도에 충실하지 못함을 둘러보지도 않고 한마디 사양하지도 않고 허락하였다.
그 동맹의 약속이란 무엇인가? 함께 정혜를 닦고 함께 도솔천에 나며 세세생생 도반이 되어 필경에는 함께 정각을 이루며 도력을 먼저성취하는 이가 있으면 따라오지 못한 이를 이끌어 주기로 서약하며 이와 같은 맹세를 어기지 말자는 것이다."
경허의 시대는 조선왕조의 붕괴와 함께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 지배 야욕에 대항하는 수많은 의병들의 저항과 농민전쟁이 해마다 계속되고 수많은 민중들이 산과 들로 떠돌아야 하는 암울한 시대가 계속 이어지는 시대였다. 경허는 그 자신이 전염병의 창궐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었으며 해마다 계속되는 흉년의 고통을 겪은 인물이다.
경허의 <결동수정혜동생도솔동성불과계사문>은 경허 자신이 '牧牛子의 팔공산 결사'를 지칭하고 있는 점에서도 익히 확인되고 있지만, 그 사상과 시대적 배경에서 보조 지눌(普照知訥(말더듬을눌), 1158~1210)의 정혜결사를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경허의 미륵신앙결사와 보조의 정혜결사는 선불교를 기본 이념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동일하지만 약간 다른 점이 있다. 보조는 교단 내부의 부패와 갈등을 지양하기에 노력했지만 경허는 꺼져 가는 선의 등불을 되살리기에 더 고심했다. 경허는 훨씬 어려운 길을 걸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불교수도자들의 요람이라고 불리는 해인사 총림의 근대적 복원은 바로 경허 성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로 우열을 다투는 교종과 선종의 극심한 대립은 고려불교를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보조 지눌의 제자 무의자 혜심은 스승의 저서 <<원돈성불론>>에 쓴 발문에서 선과 교의 갈등을 다음과 같이 적는다.
"슬프다. 近古이래 불법이 매우 쇠퇴하였다. 혹은 禪을 으뜸가는 진리로 받들고, 혹은 교를 숭상하여 선을 훼방하니 자못 선은 佛心이요, 교는 佛語임을 모르고 선교 兩家가 원수처럼 되고 있으니 法義의 두 學이 도리어 모두 모순된 宗이 되고 말았도다."
주장자로 때리면 과자 살 돈을 주마
경허가 해인사 법주로 주석하고 있을 때 제산 정원(1862~1930)스님이 경허의 侍者로 있었다. 제산스님은 지금 김천 직지사 스님들의 증옹사에 해당하는 근대의 고승이다.
제산은 술을 즐겨 마시는 경허를 위해서 마을에 나가 술과 안주를 준비해 올리곤 했다. 이런 일이 몇 번 거듭되자 절 안에 소문이 나고 대중들이 수군거리다가 마침내 공개적으로 성토하고 나서기에 이른다. 당시 해인사의 주지를 맡고 있던 남전 한규(1868~1936)는 제산을 불러 말했다.
"이 사람 제산, 자네가 조실스님에게 밤마다 술과 안주를 구해 올린다는데 정말인가?"
제산은 의연히 말했다.
"예. 제가 그렇게 조실스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남전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토록 깊은 선지를 갖추시고 막힘없는 설법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조실스님이 술을 드신다는 것도 그렇지만 학덕과 계율이 뛰어난 제산스님의 행동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남전은 며칠을 두고 고민한 끝에 독백하듯이 말했다.
"비록 술을 드시지만 그토록 깊은 선지를 갖추신 분이 그럴 때에는 다른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경허 그 분의 경지는 어떻길레 술을 드시면서 그런 법력을 갖추신 것일까?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그날 이후 절 안에서 경허의 음주에 관한 소문은 자취를 감추었고 남전은 경허의 법회가 있을 때마다 참석하여 법문을 들었다. 법문을 들을수록 남전의 발걸음은 선방으로 옮겨졌다. 그는 경허의 가르침을 들으며 온전히 선을 길을 시작한 것이다. 남전은 그렇게 심지가 깊은 사람이었다.
[1920년대 '조선고적도보' 에 실린 해인사 풍경]
'신동아'에서 모셔 옴
남전 한규는 경남 합천 가야면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씨며 7세에 경북 인동군(??) 석적면 거문천동의 서당에 입학하여 12년간 수학. 16세에 해인사의 조신해 화상의 문하에 출가. 20세에는 김천 청암사의 혼원화상에게 사집, 사교를 배우고 회응화상에게는 <<화엄경>>, <<전등록>>, <<선문염송>>을 배웠다.
1904년 1월 37세의 나이로 해인사 총섭에 취임하여 승풍 규정하고 가람을 정비하며 선의 포교에 전념하다가 1905년 8월 월해선사가 입적하는 것을 보고 느낀 바가 있어서 부산 범어사, 오대산 상원사 등지에서 참선수행하였다.
1908년 2월 제산 화상으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수지하고 해인사 퇴설당에서 하안거 정진 중 깨닫고 '원각도량 어디인가, 지금의 생사가 바로 이곳이로다'는 게송을 노래했다.
이후 김천 직지사 조실을 거쳐 통도사 보광전에 주석하며 참선수행. 1936년 서울 안국동 선학원에서 세수 69세, 법랍 54세로 입적.하였다. 선사는 시문과 서예, 설법에 뛰어난 대중불교운동가였으며 현대 한국 선승들의 요람인 선학원 창립의 중심인물이다. 법어집으로 <<남전선사문집>>이 있다.
언제인가 경허는 남전의 안부를 묻는 시를 지어 보냈다.
고요히 선창에 앉아서 세월이 흐르니
고향 그리는 생각 어찌 남아 있으리
문득 그대의 편지도 음성도 잊은 것 생각하고
게송 하나 적어 안부를 묻노라
남전 한규 역시 훗날 범어사에 들러 <범어사에서 경허대선사의 시를 새긴 판상의 운을 붙여서> 라는 시 세 편을 지었다. 남전 한규는 1943년 당시 한국 선문을 대표하는 선승 41명의 뜻을 모아 중앙선학원에서 발간한 활판본 <<경허집>>의 題字를 썼다. 경허가 입적한 지 30년이 지났지만 남전의 귓가에는 스승의 육성이 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날 해인사에서 만공 월면과 제산 정원, 남전 한규가 모여 스승 경허를 모시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제산 정원이 말했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나는 조실스님께 계속 곡차를 올리겠습니다."
남전 한규가 말했다.
"조실스님과 같은 어른을 위해서는 닭이 아니라 소를 잡아 올려도 거리낄 게 없소."
만공이 눈빛을 발하며 말했다.
"나는 스승을 위해서라면 무든 일이든지 하겠소. 만약 전쟁이 나서 깊은 산중에 모시고 살다가 양식이 떨어져 공양을 올릴 것이 없다면 나의 살점을 점점이 오려서라도 스승의 생명을 유지케 하여 세상에 나가 중생을 제도하시게끔 해 드릴 자신이 있소."
송대 임제종의 대혜 종고는 금나라와의 화전을 반대한 주전파였다. 때문에 모함을 받아 형양으로 귀양을 갔다.
선사가 귀양을 떠나자 스님을 따르던 많은 선승들은 부모을 잃은 듯 슬퍼하였으나...... 선사께서 평생을 아녀자처럼 아랫목에 앉아서 입을 다물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더라면 오늘과 같은 일도 없었을 것이다.......그런데 지금은 기곳 에서 형양까지 길도 멀지 않고 산천도 험하지 않다. 뵙고자 한다면 무엇이 어렵겠는가?
형양에서 귀양생활하던 대혜선사가 매양으로 귀양지를 옮기자 수앙 서기는 다른 스님들과 함께 매양으로따라가 선사를 모셨다. 그곳 군수 사조의는 선승들이 익숙한 솜씨로 일하는 모습을 보고 매우 감동하여 수앙 서기를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군수는 물었다.
"스님의 일행 가운데 또 남다른 재능을 가진 스님이 있습니까?"
수앙 서기는 말했다.
"큰 경론에 정통한 자, 서사에 정통한 자, 시사에 절묘한 재능이 있는자, 서예에 뛰어난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깨치지못한 일은 오직 불조의 생사인연입니다.그러므로 지금까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스승님을 모시고 수행하는 것입니다."
수앙 서기의 말에 군수는 놀랐다. 대혜선사의 제자들이 모두 한 시대의 인재들로 진리를 위해 몸을 잊은 사람들임을 알게 되고 대혜선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진정한 포교는 불교가 불교답고, 승가가 승가다우면 포교는 자연히 이루어진다.
당시 해인사에 머물고 있던 학명 도일은 경허가 동학사에서 강의를 중단하고 참선에 몰두하고 있을 때 이미 동학사에 머물고 있던 스님이었다. 그런만큼 경허의 속내를 잘 알고 있었다. 학명은 경허를 시봉하던 설호사미에게 말했다.
"너는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저 노스님은 아주 훌륭한 스님이시다.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스님이시니 법문을 받아 두거라."
설호사미는 종이를 구해서 경허에게 법문을 청하며 말했다.
"스님 여기에 법문 하나 써 주십시오."
경허는 어린 설호가 내미는 종이를 받아들고 주저 없이 써 내려갔다.
〇 홀연(忽然)히 생각하니 도시몽중(都是夢中) 이로다
천만고(千萬古) 영웅호걸(英雄豪傑) 북망산(北邙山) 무덤이요
부귀문장(富貴文章) 쓸데없다 황천객(黃泉客)을 면(免)할소냐
오호(嗚呼)라 나의 몸이 풀끝에 이슬이요 바람속의 등(燈)불이라
〇 삼계대사(三界大師) 부처님이 정녕(叮嚀)히 이르사대
마음깨쳐 성불(成佛)하여 생사윤회(生死輪廻) 영단(永斷)하고
불생불멸(不生不滅) 저국토(國土)에 상락아정(常樂我淨) 무위도(無爲道)를
사람마다 다할줄로 팔만장경(八萬藏經) 유전(遺傳)이라
사람되어 못닦으면 다시공부(工夫) 어려우니 나도어서 닦아보세
〇 닦는길을 말하려면 허다히 많건마는 대강추려 적어보세
앉고서고 보고듣고 착의끽반(着衣喫飯) 대인접화(對人接話)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소소영령(昭昭靈靈) 지각(知覺)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몸뚱이는 송장이요 망상번뇌(妄想煩惱) 본공(本空)하고
천진면목(天眞面目) 나의부처 보고듣고 앉고눕고
잠도자고 일도하고 눈한번 깜짝할제 천리만리(千里萬里) 다녀오고
허다(許多)한 신통묘용(神通妙用) 분명(分明)한 나의마음 어떻게 생겼는고
의심(疑心)하고 의심(疑心)하되
고양이가 쥐잡듯이 주린사람 밥찾듯이 목마를때 물찾듯이
육칠십(六,七十) 늙은과부(寡婦) 외자식을 잃은후에 자식(子息)생각 간절하듯
생각생각 잊지말고 깊이궁구(窮究) 하여가되
일념만년(一念萬年) 되게하여 폐침망찬(廢寢忘餐) 할지경에
대오(大悟)하기 가깝도다
〇 홀연(忽然)히 깨달으면 본래(本來)생긴 나의부처
천진면목(天眞面目) 절묘(絶妙)하다
아미타불(阿彌陀佛) 이아니며 석가여래(釋迦如來) 이아닌가
젊도않고 늙도않고 크도않고 작도않고
본래(本來)생긴 자기영광(自己靈光) 개천개지(蓋天蓋地) 이러하고
열반진락(涅槃眞樂) 가이없다 지옥천당(地獄天堂) 본공(本空)하고
생사윤회(生死輪廻) 본래(本來)없다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서 요연(了然)히 인가(印可)맞어
다시의심(疑心) 없앤후에 세상만사(世上萬事) 망각(忘却)하고
수연방광(隨緣放曠) 지내가되 빈배같이 떠돌면서
유연중생(有綠衆生) 제도(濟度)하면 보불은덕(報佛恩德) 이아닌가
〇 일체계행(一切戒行) 지켜가면 천상인간(天上人間) 복수(福壽)하고
대원력(大願力)을 발(發)하여서 항수불학(恒隨佛學) 생각하고
동체대비(同體大悲) 마음먹어 빈병걸인(貧病乞人) 괄세말고
오온색신(五蘊色身) 생각하되 거품같이 관(觀)을하고
바깥으로 역순경계(逆順境界) 몽중(夢中)으로 관찰하여
해태심(懈怠心)을 내지말고 허령(虛靈)한 나의마음
허공(虛空)과 같은줄로 진실(眞實)히 생각하여
팔풍오욕(八風五欲) 일체경계(一切境界) 부동(不動)한 이마음을
태산(泰山)같이 써나가세
〇 허튼소리 우스개로 이날저날 헛보내고
늙는줄을 망각(忘却)하니 무슨공부(工夫) 하여볼까
죽을제 고통중(苦痛中)에 후회(後悔)한들 무엇하리
사지백절(四肢百節) 오려내고 머리골을 쪼개는듯
오장육부(五臟六腑) 타는중에 앞길이 캄캄하니
한심참혹(寒心慘酷) 내노릇이 이럴줄을 누가알꼬
저지옥(地獄)과 저축생(畜生)에 나의신세(身世) 참혹(慘酷)하다
백천만겁(百千萬劫) 차타(蹉跎)하여 다시인신(人身) 망연(茫然)하다
참선(參禪)잘한 저도인(道人)은 앉아죽고 서서죽고 앓도않고 선세(蟬蛻)하며
오래살고 곧죽기를 마음대로 자재(自在)하며
항하사수(恒河沙數) 신통묘용(神通妙用) 임의쾌락(任意快樂) 소요(逍遙)하니
아무쪼록 이세상(世上)에 눈코를 쥐어뜯고 부지런히 하여보세
오늘내일 가는것이 죽을날에 당도하니
푸줏간에 가는소가 자욱자욱 사지(死地)로세
〇 예전사람 참선(參禪)할제 마디그늘 아꼈거늘 나는어이 방일(放逸)하며
예전사람 참선할제 잠오는것 성화하여 송곳으로 찔렀거늘 나는어이 방일하며
예전사람 참선할제 하루해가 가게되면 다리뻗고 울었거늘 나는어이 방일한고
무명업식(無明業識) 독(毒)한술에 혼혼불각(昏昏不覺) 지내가니
오호(嗚呼)라 슬프도다 타일러도 아니듣고 꾸짖어도 조심않고
심상(尋常)히 지내가니 혼미(昏迷)한 이마음을 어이하여 인도할꼬
쓸데없는 탐심진심(貪心嗔心) 공연히 일으키고
쓸데없는 허다분별(許多分別) 날마다 분요(紛擾)하니
우습도다 나의지혜 누구를 한탄할꼬
지각(知覺)없는 저나비가 불빛을 탐(貪)하여서 저죽을줄 모르도다
내마음을 못닦으면 여간계행(如干戒行) 소분복덕(少分福德) 도무지 허사(虛事)로세
〇 오호(嗚呼)라 한심(寒心)하다 이글을 자세보아 하루도 열두때며
밤으로도 조금자고 부지런히 공부(工夫)하소
이노래를 깊이믿어 책상위에 펴어놓고 시시때때 경책(警策)하소
할말을 다하려면 해묵사이(海墨寫而) 부진(不盡)이라
이만적고 그치오니 부디부디 깊이아소
다시할말 있사오니 돌장승이 아기나면 그때에 말할테요.
[용화선원 법문듣기 에서 모셔 옴]
경허의 육성이 느껴지는 가사체歌辭體 법문이다. 1구 4음보를 기본 구성으로 하여 전체 181행으로 이루어진 경허의 <참선곡>은 당시 어린나이였던 변설호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국한문혼용체로 쓰여져 있다.
경허는 <가가가음>. <중노릇하는 법>. <금강산유산가>와 같은 여러 편의 가사체 법문을 남기고 있다. 12세의 나이로 경허로부터 <참선곡>을 얻은 변설호는 훗날 경허의 참선곡을 보급하는 데 힘을 기울인다.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비를 들여 경허의 참선곡을 인쇄하여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경허는 한국 현대 선불교운동에서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인물이다. 경허의 직제자들 만공. 수월. 혜월. 한암은 물론 현대의 선승들 경봉과 증곡, 남전 한규. 한용운 등 역시 그에게 뜨거운 존경의 념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
해인사에 나타나 발자취를 남긴 경허는 1900년, 보조 지눌의 선풍이 깃든 조계산 송광사로 발길을 옮겻 2월 하순 무렵에는 <남원실상사백장암중수문>과 <교성태안사방함기>를 작성하는 등 영, 호남을 오가며 선풍을 떨친다.
<<경허집>>에는 이때의 발자취가 1900년 4월 상순에 쓴 <범어사총섭방함록서>와 11월 하순에 쓴 <남원천은사불량계서> 그리고 납월 상순에 쓴 <화엄사상원암복설선실정완규문>, 유서 깊은 구산선문의 一門인 <동리산태안사만일회범종단나방하기>로 남아 있다. 이 모든 기록은 선승으로서 원숙한 달관에 이른 경허의 활발한 교화력을 말해 준다.
경허는 1900년 섣달 하순 무렵 조계산 송광사에서 스님들의 요청에 의해 취은 민욱의 행장을 작성하고 귀암화상의 영찬을 쓴다. 해인샤, 범어사, 송광사에 여러 편의 영찬을 남긴 경허는 영찬의 명수이다.
경허는 월화 강백고 함게 지리산 화엄사 가는 길의 흥취를 이렇게 노래했다.
보고 들을수록 새로운 풍경
맑은 흥취에 세상 시름 다 잊었네
드높은 절벽은 기괴한 산빛을 띄고
숲 속에 깃든 아득한 마을은 한 폭의 그림
삽살 강아지 나물 캐는 아가씨 따라다니고
시냇가 비둘기는 밭가는 농부에게 구구 울어 때를 알리네
나무꾼 노랫가락 속에 석양은 지고
높이 솟은 산봉우리 구름에 덮이는구나
화엄사에 도착한 경허는 <화엄사 상원암을 복원하고 선실을 시설하며 정하는 완규문>을 지었다. 경허는 이 글에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쓰고 있다.
대저 불자가 되어 부처님의 교화를 힘써 행하지 않고 자기의 사심 때문에 훌륭한 법회를 폐지한다면(경허 자신도 동학사에서 강의를 폐하지 않았던가!) 하늘과 땅의 숨은 罰(冥誅벨주)과 드러난 벌이 있을지니 가히 두렵지 않은가? 대저 이와 같은 두려움이 있음에도 정신차려 봉행하지 않는다면 난들 어찌하리요.
경허는 화엄사에서 당시 저명한 학승이었던 진진응을 만나 또 한 편의 일화를 남기고 있다.
"대선지식인 스님께서는 왜 그렇게 술을 드십니까?"
경허는 말했다.
"이 사람 진응, 자네는 명색이 강사이면서 그렇게도 보는 것이 없다는 말인가."
경허는 진응에게 시 한 수를 들려준다.
"몰록 깨달음은 비록 부처와 같지만
수없는 생에 익힌 습기는 살아 있어
바람은 잠잠하나 오히려 파도는 솟구치고
이치는 분명하나 생각이 엄습하네
<진응강백답송>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짧은 한 편의 시에는 돈오와 윤리, 理와 事와 같은 선불교의 깨달음과 수행론에 관한 명제들이 담겨 있다.
인간은 아무리 드높은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깨달음은 인간에게 더 깊은 번뇌와 슬픔을 가져다 주지는 않을까? 물론 깨달음은 인간에 관한 깊은 이해를 가져다 준다. 인간의 숙업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깨달음은 깨달음이 아니다. 그런만큼 깨달은 사람은 윤리적 인간보다 더 깊이 인간존재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심연에서부터 응시하고 항산 존재의 긴장감을 느낀다. 그래서 자신의 윤리적 한계를 위선으로감추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윤리적 한계 앞에서 절망할수록 마치 어둠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촛불처럼 깨달음은 더욱 빛을 발한다. 그 깨달음의 빛은 선과 악을 모두 포함하고 인간의 삶과 죽음, 명암을 모두 감싸안은 빛이다. 여기에 깨달은 자의 고독과 슬픔이 있다.
경허는 인간의 명암이 쉴새없이 교차하는 궁극의 지점을 이미 보고 스스로 還(돌아올환)債(빚債)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다
1901년 3월, 56세의 경허는 다시 해인사에 들러 몇 편의 영찬을 남긴다. 당시 경허가 작성한 영찬은 모두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다. <금우화상영찬>에는 신축년 3월 호서歸 門弟성우근찬이라는 기록이 첨부되어 있다.
그해 봄 경허는 다시 범어사를 향해 길을 떠난다. 이 여행에서 경허는 <마정령에서 초동과의 문답>이라는 일화를 남기고 있다. 해인사에서 서쪽으로 10리쯤 떨어진 곳에 마정이라는 마을이 있고, 그곳에서 1킬로 정도 나가면 거창읍으로 나가는 고개가 하나 있다. 그 고개 이름이 마정령이다. 인근 사람들은 말정재라고 부른다.
경허는 마정령에서 땔감을 준비하는 아이들이 떼를 지어 노는 것을 보고 물었다.
"얘들아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아이들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모릅니다."
"그러면 나를 보느냐?"
"예. 봅니다."
"나를 모르면서 어떻게 본다고 하느냐?"
경허는 아이들에게 주장자를 내밀며 말했다.
"너희들이 만일 이 주장자로 나를 치면 과자 살 돈을 주겠다."
아이들은 의아스런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정말로요?"
"그렇고 말고. 어서 나를 쳐라."
그러나 아이들은 감히 육척 장신의 큰스님에게 주장자를 휘두를 수 없었다. 경허의 채근을 받은 아이들 가운데 담이 있는 초동이 나서서 경허를 쳤다. 주장자를 맞은 경허는 말했다.
"어서 나를 쳐라, 왜 치지 않느냐? 만일 나를 친다면 부처를 치고 조사도 치고 삼세제불과 역대 조사와 천하의 노화상을 한 방망이로 치게 되리라."
초동이 말했다.
"내가 쳤는데 치지 않았다고 하시니 스님이 우리를 속이고 과자값을 주지 않으려고 그러시는 거지요?"
경허는 아이들에게 돈을 주면서 독백했다.
'온 세상이 혼탁함이여. 나만 홀로 깨어있구나. 숲 속에 숨어서 남은 세월을 보내리라."
(이때 경허는 왜 범어사로 떠난 것일까? 그것에 대한 한마디도 언급이 없어서 내 생각은 여럿의 갈래를 달린다. 선사들의 세계에도 불화는 있으리라는 예감)
경허는 범어사에 도착하여 읊은 <범어사 보제루에 붙임>이라는 시에서도 '이 세상 꿈속 아닌 자, 그 누구인가. 나만이 홀로 깨어 유유자적하다네'라고 적고 있다.
이 무렵부터 경허는 자신의 결정적인 고독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한다. 폭풍 속의 등불과 같은 나라의 존망을 憂國의 눈으로 바라보고, 꺼져가는 선의 등불을 다시 밝히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작 경허 자신은 스스로를 유배시킬 결심을 하는 것이다. 이미 경허는 자신이 다시 돌아오지 못할 불귀의 고독 속으로 서서히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경허는 1902년부터 이듬해까지 범어사에 주석하면서 1902년 10월 결제날 <범어사계명암수선사방함청규>를 작성하여 그의 준엄한 선풍을 다시 한 번 보였으며, 이듬해인 1903년 봄, <범어사계명암창설선사기>, <범어사설선사계의서>, <범어사금강암칠성각창건기>, <서룡화상행장> 을 작성하는 폭넓은 활동을 하였다.
경허는 1902년 가을, 지금의 부산 연제구 마하사 나한개분 불사의 증명법사로 나서서 그 법력을 기념하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한암 중원은 마하사의 나한개분 불사 때 생긴 에피소드를 이렇게 적고 있다.
임인년 가을 화상께서 범어사 금강암에 머물고 계셨는데, 읍의 동쪽 마하사에 나한상의 개분불사가 있어 화상에게 증명해 주기를 청해 왔다. 화상께서 밤이 이슥하여 동구에 이르니 길이 컴컴하여 더 갈 수가 없었다. 그 절의 주승이 잠깐 앉아서 졸았는데 어떤 노승이 나타나 알렸다.
"큰스님께서 오시니 빨리 나가서 맞아 들여라."
주승이 꿈을 깨어 횃불을 들고 동구로 내려가니 과연 화상이 오시는 것이 아닌가. 이에 비로소 나한이 현몽한 것임을 알고 대중에게 알렸더니 대중이 모두 놀래고 평소 화상을 비난하여 마지않던 사람들마저 다 와서 참회하였다.
이 무렵 경허는 범어사와 한국선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한다. 현대 조계종 선문의 교과서인 <<선문촬요>>를 편찬한 것이다. 선문촬요는 조계종 선가가 예부터 읽어온 전통 선어록을 모두 망라하고 있다. 선문촬요에 합집되어 있는 선어록은 다음과 같다.
<<전심법요>>. <<완릉록>>: 황벽 의운선사 법어집 <<관심론>>. <<혈맥론>>. <<四行論>>: 달마대사의 어록 <<최상승론>>:5조 홍인의 법어집 <<몽산법어>>"몽산 덕이 선사의 법어집 <<수심결>>.<<진심직설>>:보조선사의 설법집 <<선문보장록>>:진정국사 天책의 법어집 <<선교석>>:서산대사 청허 휴정 찬 등
경허가 편찬한 <<선문촬요>>는 현대 한국선의 형성에 큰 영향을 준 문헌이다. 현대 조게종의 고승들은 <<선문촬요>>의 사상에서 자신들의 화두와 설법을 검증했으며 현재까지도 조계종 선승들의 행낭 속에 담겨져 널리 읽히고 있다.
<<선문촬요>>의 사상적 중요성은 백파 긍선과 초의 의순 이래 진행된 조선후기 선학 논쟁의 원전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과 재래 한국선종의 사상적 맥락을 계승, 종합하고 있는 점에서 충분히 확인되고 있다.
필자는 경허가 본서를 편찬할 당시 자신이 의도한 서명은 선물촬요가 아니라 <<정법안장>>이었다고 생각한다. 경허집에 실린 <정법안장서正法眼藏序>에서 경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대중들에게는 있는 그대로 펴놓으면 망망대해와 같아서 의지하기 어렵고 근기에 맞추면 지도하기가 쉽다. 지도하기가 쉽다는 것에 생각과 뜻을 같이한 행염스님과 함께 여러 선서에서 모은 어록 10편과 염송 가운데 모든 도사들의 직절법문을 추려 모아서 다섯권의 한 질 책을 엮어서 도에 들어가는 正眼으로 삼을까 한다.
오늘날 전해오는 선문촬요의 체제와 본서에 실린 문헌의 종수가 일치한다. 따라서 필자는 <<경허집>>에 실린 <정법안장서>가 <<선문촬요>>라는 서명이 정해지기 전에 작성된 초기 서문이라고 생각한다.
1908년 범어사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된 본서의 하권에는 '융희 2년 7월일 경상남도 동래부 금정산 범어사 개간'이라는 간기와 함께 경허와 관계가 깊은 등암 찬훈. 회현 석전. 한암 중원. 성월 익전 등의 법호가 산중동원질 속에 명기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경허가 편찬한 <<정법안장>>이 1908년 범어사에서 간행되면서 <<선문촬요>>라는 구체적인 책의 체제를 밝힌 제목으로 변했으며, 1908년 당시 경허의 제자 한암 중원이 범어사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허는 1904년(광무 8년, 甲辰) 이후 남유를 끝내고 북방으로 먼 여정을 떠난다. 경허가 떠난 지 4년 후 이 책이 간행되었다. 그 기간동안 범어사 스님들은 이 책의 교정과 각판을 하면서 간행을 준비했던 것이다.
지금도 범어사 조계문 앞에는 1913년 10월에 세운 어산계보사유공비魚山禊補寺有功碑가 서 있다. 이 유공비에 의하면 당시 범어사 어산계 스님들은 <<정법안장>>의 간행을 위해서 금 40량을 희사하였다. 이렇게 경허선에서 발원하는 근대 한국선의 역사적 발자취가 경허의 발길이 닿았던 곳마다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당시 범어사와 통도사를 비롯한 영남의 큰절들은 호남지역의 절들보다 경제상태가 좋은 편이었다. 호남지역 스님들은 영남 쪽 스님들을 만나면 "자네들이 무슨 중이랑가. 쌀자루 아녀?" 라고 부러움 섞인 야유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경허는 1902년 10월 15일, <범어사계명암수선사방함청규>를 작성하여선원의 운영과 수행 정신을 구체적으로 규정한 청규 10조목을 제시한다. 원래 청규란 일정한 전주수도원 없이 떠돌아다니던 선종교단이 점차 집단화된 총림 체제로 발전하면서 선승들 스스로 조직과 수행에 필요한 규칙들을 체계화하고 성문화한 것이다.
그래서 경허는 '대중이 준수해야 할 청규가 교화를 세우는 문 가운데 없어서는 안 되겠기에 조금 말하노니 이것은 대중과 의논해서 정한 바이므로 바꾸어서는 안 될 일상의 향상된 법이다. 바라노니 한결같이 따라 봉행하여 정법의 교화가 유통되게 할지어다'라고 쓰고 있다.
결제한 뒤에는 방부를 받지 않는다는 것, 선원의 공동작업에 해당하는 울력에 상하 없이 참여할 것, 대중의 화합을 강조한 점 등은 선방의 분문율로 계승되어 오고 있다. 한국 근대 선불교의 여명기에 해당하는 1902년 당시 청규 준수를 강조한 경허의 정신은 현재까지 한국불교의 선문에 이어지고 있다.
해인사 말고도 영축산의 통도사, 금어산의 범어사 그리고 호남지방의 화엄사와 송광사도 마찬가지로 모두 화상께서거쳐가신 곳으로서 스님이 한 번 다녀가신 곳은 선원을 다투어 설치하게 되었으며, 발심한 승려들이 또한 호응하여 구름같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한편생 부처님의 광명을 드러내 사람들의 안목을 열어 준 일 치고 이와 같이 성한 적이 아직 없었다.
이것이 바로 근대한국선문의 기틀을 세운 경허의 활동에 대한 한암 중원의 평이다.
일제의 식민불교정책 강행에 항거하며 한국 전통불교의 고수투쟁을 선언한 1941년, 禪學院에서 조선고승대회를 주도한 만공 월면은 바로 경허의 수제자이다. 그리고 경허 이후 제3세대 선승들에 해당하는 효봉, 동산, 청담 등은 1954년 8월 전국비구승대표자회의를, 9월에는 전국비구승대회를 개최하였다.
지금의 대한불교조계종의 1954년 4월의 불교정화운동을 주도한 주체들이 바로 경허의 직계제자이거나 경허를 사숙한 2세대, 3세대의 선승들이다.
그들의 노력에 의해 현재의 조계종은 경허가 복원하고자 했던 조계종 본연의 종지인 선을 피폐해진 승단의 정신적, 전통적 가치를 확립하는 지도이념으로 삼고 선종으로거듭 태어나게 된다. 이 모든 역사의 도화선에 불을 당긴 사람이 바로 경허 성우 선사이다.
만해 한용운은 1942년 6월 <경허집발간취지서>에서 다음과 같이 경허의 존재를 기리고 있다.
경허 성우선사는 우리 조선불교계에 대하여 선종 부흥과 현풍선양에 막대한 공로가 있을 뿐 아니라 종취의 깊고 현묘한 것과 문채의 명려한 것은 세상에서 다 아는 바라 쓸데없는 말을 붙일 필요도 없거니와 그 심현한 종취를 명려한 문채를 빌어서 종횡으로 농현한 것이 혹은 법문도 되고 혹은 시가도 되고 혹은 논문도 되어 평생동안 지은 바가 수량이 적지 않을 것이나 당시에 이것을 일일이 기록하는 이가 없었으므로 세상에 전하여 온 것은 극히 소수에 불과한 가운데 이 또한 해가 깊어지고 대가 멀어짐에 따라 점점 없어질 우려가 없지 않음은 애석한 일이라 하겠도다.
물론 천하 선지식의 도담과 법어가 소를 끌어도 땀을 흘릴 만큼 많으며 선가에서 또다시 경허선사의 설화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나 여러모로 생각해 보건대 현재 우리 조선 수좌로서 선사의 가르침에 은혜 입지 않은 자가 있겠는가.
1942년 9월 한용운은 만공의 요청으로 경허의 시문과 법어들을 편집하여 엮은 <<경허집>> 서문에서 경허의 시문과 법어를 읽은 소감을 다음과 같이 적는다.
내가 사양하지 못하고 재삼 읽어보니 그저술이 시문에만 힘을 기울인 것이 아니라 대체로 선문법어의 깊은 말씀과 묘한 구절들이었다. 혹은 술 파는 집과 서정에서 읊조렸으되 세간에 들지 않았으며 혹은 비바람 눈보라 치는 텅 빈 산에서 붓을 잡아도 세산을 벗어난 것이 아니어서 종횡으로 힘차고 생소하거나 숙달되었거나 걸림 없어서 문장마다 선이요, 구절마다 법이어서 그 법칙이 어떠한 것을 논할 것도 없이 일대의 기이한 글이요, 시구이다.
경허의 시문과 법어들을 모은 <<경허집>>은 1942년 6월 오성월. 송만공. 장석상. 강도봉. 김경산. 설석우. 김구하. 방한암. 김경봉. 이효봉 등 당시 한국 선문을 대표하는 41인이 선사들이 발기하여 각 선원은 5원, 개인은 50전 이상의 연조금을 모아 출간하게 된다.
1903년(광무 7년, 계묘) 가을, 경허는 범어사를 떠나 해인사를 들러 젊은 날의 수행처였던 천장암으로 돌아온다. 경허집에는 이때의 심경을 읊은 시 <범어사에서 해인사로 가는 길에서 부른 노래>가 실려 있다.
한암 중원은 경허의 심경을 노래한 이 시에 대해 이렇게 썼다.
계묘년 가을 범어사에서 해인사로 가시던 도중
시 한수 읊으신 것에
"아는 것 없이 이름만 높아서 세상의 액난을 만나니
어느 곳에 몸을 숨길지 알 수 없구나
어촌과 술집엔들 숨을 곳이 없으랴마는
다만 헛된 이름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 두렵도다"
라고 한 대목이 있으니 대저 시라는 것은 품고 있는 뜻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로써 화상의 뜻하는 바가 오직 자취를 감추고 소멸함에 있음을 알 수 있었던 것인데 남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였을 따름이다.
경허는 자신의 南遊를 끝내는 시점에서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소멸을 생각한 것이다. 경허는 은둔을 생각하지 않았다. 소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취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대반열반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하늘을 나는 새들의 발자국처럼
물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처럼
진리를 실현한 사람들은
이와 같이 사라져가네"
진리의 목격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경허는 말로만 은둔이라고 내걸고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떠들고, 한편으로는 이리저리 베낀 책을 써 내는 그런 유치한 사기가 아니라, 아예 완벽한 소멸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경허는 완벽하게 非道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 버린 인물이다.
경허의 소멸은 그 완벽함만큼이나 비극적이다. 경허가 연출한 비도의 격렬한 무대에는 경허 외의 다른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경허는 파국과 탈주로 치닫는 이 모노드라마 내내 혼자 등장하고 홀로 서 있다. 그는 어느 누구와도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으며, 또한 그에게 다가서는 사람도 없다. 오히려 경허는 경허만의 고독과 비극을 표절하여 자신들의 불의를 감추려는 속물들의 통념과 억측 속에 희생자로 호롤 남아 있다(눈물이 저기 밑의~ 어딘가서부터 조금씩조금씩 밀물처럼 차올라온다).
1905년 이후 경허의 존재는 근현대불교사의 시야에서 아예 자취를 감추고 마침내 몽환적인 死각지대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다만 경허가 남긴 법어와 일화만이 전설이 되어 여운을 남기며 이곳저곳으로 아슬아슬한 비행을 시작하게 된다.
(22.12.27, 21:12 집자 終. 바깥의 영하 10도는 어느새 2~3도로 결기를 죽였따. 아스팔트의 버석하는 듯한 로면을 보면 마음속엔 봄이 착각된다. 1월도 아니왔건만 벌써 봄을 상상하다니... 오늘 하루 어떻게 보냈는가! 종일 집자하고 잠자고 반복 했다. 생각만큼 빨리 진행되지 않는 것은 경허의 행장을 일일이 담아놓고 싶은 바의 영향이다. 세심하게 읽고 집자하니 진도가 느릴수밖에 없다. 음력으로 섣달 초닷새의 초승달을 로아가 가리킨다. 코다리집 석식 후 한바퀴 돌아 오는 길에서다. 그리고 도올의 이야기를 듣고 어제와 오늘 심장약을 먹지 않았다. 그러서 그런지 오줌이 조금 편안해 졌다. 아내에겐 비밀이다. 내일은 어떻게 할까? 안 먹어도가슴이 안 아프면 되는 것인가? 아닌가! 손가락도 피팍하고 눈도 쉬어야 하니 그만 하련다...)
(2022.12.28, 08:18 06:00, 조금 지나 잠에서 깼다. 도올주역강해를 읽고, 기타 기본운지를 짚었다. 어제 아내에게 오늘 산행을 하겠다고 공언했는데 글쎄, 그것은 또 닥쳐봐야 알겠넹. 나는 지금 경허를 앞에 두고 있으니깐
경허의 선과 시문학에 담긴 선의 섬광과 우수들은 삶의 속악과 범속, 그리고 덧없는 존재들의 미망을 단숨에 뛰어넘고 불교의 세계마저 뛰어 넘는다. 때문에 이 이탈의 의지를 폭발시킨 그의 선과 육성은 오히려 그의 삶을 압도해버리고 사람들로부터 그의 선을 차단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만큼 슬프고 참혹한 것이 있을까?
(스님이 고기종류를 먹지 않고,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으며 술을 먹지 않는 것에는 확연한 뜻이 있다. 그것은 道를 이루기 위함이다. 왜 속세를 떠나 僧이 되었는가. 상기한 세 가지 행위를 지속적으로 할 경우에 道는 결코 이룰 수 없으리라. 스님이 속세의 인간들과 달리 윤회적인 축생들의 생명 중시. 음란한 환경에선 도를 이룰 수 없음. 정신을 황폐하게 하는 음주를 멀리함은 필연이자 도의 길로 들어선 이의 契 아니던가!
그런데 경허는 그런것을 행했다..., 산속의 고승들의 스승, 절대고승께서 속세의 인간들이 하는 짓과 똑같은 것을 행했다. 속세의 어떤 인간종류는 그런 나쁜 행위를 스스로 안하는 이도 있다. 그런데 禪의 지존으로 존경받는 경허는 '이탈'의 의지를 폭발시켰다. 경허의 애제자인 만공선사나 한암 중원의 입장에서는 스승의 행위를 이해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대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나... 조차도 새벽에는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된다. 때문에 어떤 학자가 경허를 비난하면 경허는 그 비난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非道를 일부러 행하여 후세의 경계를 꾀한다는 명제는 아무리해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1903년 가을, 젊은 날 자신의 수행처였던 천장암과 서산 부석사 등의 충청지방 절에 돌아 온 경허는 그 이듬해인 1904년 봄까지 주석한다. 그리고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조선의 운명은 존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당시 경허의 자취는 <<만공어록>>에 남아 있다.
갑진년(1904) 7월 15일 경허화상이 함경도 갑산으로 가는 길에 천장사에 들르게 되었다. 스님(만공이 되겠다)은 경허화상을 뵙고 몇 해 동안 공부를 짓고 보림한 것을 낱낱이 아뢰니 경허화상은 기꺼이 허락하며 전법게傳法偈(쉴게)를 내렸다.
구름 달 시냇물 산 곳곳마다 같은데
수산선자叟(늙은이수)山禪子의 大家風이여
여기 無文印을 분부하노니
한 조각 방편 기틀이 안중眼中에 살았구나
(왜 눈물이 나냐 씨~~:;)
이어 만공이라고 사호하고 다시 이르되 "불조의 혜명을 자네에게 이어가도록 부촉하노니 불망신지하라"고 주장자를 떨치며 길을 떠났다.
[경허선사' 고싱가 숲에서 모셔 옴]
이때 경허의 나이 59세, 만공의 나이 43세였다. 7월 15일 헤어진 경허와 만공은 그들의 생애에서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누더기 한 벌, 지팡이 하나
경허는 구한말의 불교교단을 이끌고 있던 홍월초 선사가 주지로 재직하던 광릉 봉선사에 나타난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불교교육기관인 명진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한 월초선사는 경허를 반갑게 맞으며 말했다.
"잘 오셨습니다. 오늘 스님들에게 좋은 법문을 해 주신다면 곡차를 실컷 대접하겠습니다."
경허는 이미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는 표정으로 나직이 대답했다.
"나는 곡차를 못 마실지언정 법문은 못하겠습니다. 법문이라는 법문은 모두 흐르는 물에 다 씻어버렸소."
경허의 지기였던 월초는 이내 가을 햇살처럼 투명해져버린 경허의 심정을 헤아렸다. 그리고 다음 날 산문을 떠나는 경허엑 노자가 담긴 봉투를 조용히 내밀었다. 경허는 월초의 정성이 담긴 노란 봉투를 바라보며 쓸쓸히 웃었다.
"스님의 정성은 고맙지만 나는 돈하고도 이별한 지 오래되었소."
경허는 숲이 우거진 광릉 봉선사의 산문을 표표히 떠난다(광릉수목원에 두번쯤 들렀었다. 언제고 거기 가서 경허의 뒷모습을 한번쯤 뵐 수 있으리라). 경허는 언제인가 이렇게 노래했다.
시비와 명리의 길에서
심식이 미쳐서 날뛰는 놈들
세간에서는 영웅이라고 부르며
이리저리 방황하며 갈 길 모르네.
그러므로 禪은 '새처럼 자유롭게 날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발 밑에 실오라기 하나도 없어야 하고, 현묘한 배움을 이루려면 손을 펴고 배워야 한다(俗行鳥道 須得足 下無絲 俗得玄學 展手而學).
평생 재물을 위해 한곳에 안주해 본 일이 없는 경허는 가난했다. 경허는 항상 "옷이 헤지면 누덕누덕 기워 입고 양식이 떨어지면 그때마다 얻어먹세" 라며 뼛골 사무치는 가난을 지복으로 삼았다. 그의 가난은 자신의 사상과 의지로 만들어 낸 간소한 삶의 한 형태, 청빈일 뿐이다.
옛날 한 선승은 자신의 청빈을 이렇게 노래했다.
평생 출세에 마음쓰기 번거로워
드높은 뜻 하늘에 맡긴다
자루엔 쌀 석 되, 화롯가엔 땔감 한 단
방황이나 깨달음은 알 바 아니다
먼지 같은 명성이나 이익은 아무래도 좋다
밤비 부슬부슬 내리는 초막에서
두 다리 한가로이 뻗고 있노라
행복한 듯 보이는 소시민들, 또는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위로하는 사람들은 과연 행복하고 자유로운 것일까? 그 인공적인 행복을 위한(돈.가면.게임 등) 소비의 거품을 걷어내면 무엇이 남을까? 악취를 풍기며 침전되어있는 일상의 오염밖에 남자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등이 구부러지면서까지 오염된 폐수 속에서 처절하게 적응하는 물고기처럼 산다.
봉선사 산문을 빈손으로 떠난 경허는 오대산 월정사에 나타나 3개월간 <<화염경>>을 설법하고 <금강산유산가>를 쓴 금강산 여행을 거쳐 안변 석왕사에 이르렀다. 석왕사 오백나한 개분불사의 증명법사로서 모습을 나타낸 것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버리고 이름을 숨긴다. 그리고
바로 그해 10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된다.
경허가 월정사에 나타나자 당시 월정사의 방장이었던 유인명은 경허에게 <<화엄경>> 설법을 청한다. 화엄법회의 첫날 법상에 오른 경허는 법당을 가득 메운 천여 명의 승속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大方廣佛華嚴經이라. 먼저 경의 제목을 설하겠다. 大라, 대들보도 대요, 댓돌도 대요, 대가사도 대요, 세숫대도 대요, 담배도 대이니라.
方이라. 큰방도 방이요, 지대방도 방이요, 질방도 방이요. 동서남북 사방도 방이니라.
廣이라. 쌀광도 광이요, 찬광도 광이요, 연장광도 광이요, 광장도 광이니라.
佛이라. 등잔불도 불이요, 모닥불도 불이요, 촛불도 불이요, 화롯불도 불이요, 번갯불도 불이요, 이불도 불이요, 횃불도 불이니라.
華라. 매화도 화요, 국화도 화요, 탱화도 화요, 화병도 화요, 화살도 화요, 화엄경도 화이니라.
嚴이라. 엄마도 엄이요, 엄살도 엄이요, 엄정함도 엄이요, 화엄도 엄이니라.
經이라. 명경도경이요, 구경도 경이요, 풍경도 경이요, 인경도 경이요, 안경도 경이니라.
이처럼 경허는 <<화엄경>> 經題를 일상 언어로 해체하면서 난해하기로 이름 높은 화엄경 강좌를 시작하고 있다. 화엄사상을 일상화하고 있다.
왜 禪은 경학적 세계관을 초극하고 있는 것일까? 敎學으로 표현되는 불교의 경학적 탐구의 문제점은 경전과 경전을 읽는 탐구자 간에 二元的 세계관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즉 경전에서 설하는 붓다와 보살의 법계와 그 경전을 읽는 탐구자 자신과의 이원적 갈등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경허의 화엄을 ㅡ대승불교 본래의 기능ㅡ 인간성의 자유와 존엄에 대한 자각과 그 해석이 불교적으로 가장 잘 이루어진 해석의 종교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화엄경>>에서 설하는 불교이해 또는 체험이란 먼저세계와 인간에 대한 붓다의 이해를 이해하는 것이며, 그 이해를 생의 중심에 투영시킨 체험을 실존적은 전제로 투입하여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다.
경허의 첫 설법 또한 지극히 일상적이지만, 준엄한 화엄사상가의 입장에서는 아마도 자신의 교학체계에 대한 조롱으로 여기고 항의를 하거나 자리에서 뛰쳐나갈 만큼 파격적인 것이다.
그러나 일반대중은 경허가 일상 언어로 설하는 화엄의 법계에 젖어들어 경허와 함께 화엄삼매를 누렸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경허의 화엄경 설법에 관해 전해 오는 이야기는 "흥취로운 自由가를 읊으신 후 다시 화엄경에 대한 심오무변한 大義眞髓(골수수)를 삼 개월간 설하셨다"는 것이다.
오대산에서 3개월의 <<화엄경>> 강좌를 바친 경허는 금강산을 여유한 체험을 <금강산유산가>라는 기행체 가사문학으로풀어 썼다.
7 , 죽장망혜 단표자로 이삼동지 작반하여 竹杖芒鞋 單瓢子로 二三同志 作伴하여
낙양십리 뻗은길로 관동산천 들어갈제 洛陽十里 뻗은길로 關東山川 들어갈제
8 , 금화금성 얼른지나 단발령에 올라가서 金化金城 얼른지나 斷髮令에 올라가서
(단발령: 마하연으로 넘는 고개, 마의 태자가 입산할 때 머리 깎았다함)
금강산을 바라보니 하상견지 만야런고 金剛山을 바라보니 何相見之 晩也런고
9 , 천하제일 명산이요 시방세계 불국일세 天下第一 名山이요 十方世界 佛國일세
일진춘풍 건듯부니 장부흉금 쇄락하다 一陣春風 건듯부니 丈夫胸襟 灑落하다
172 , 청천유월 래기시는 이적선의 글귀로다 靑天有月 來幾時는 李謫仙의 글句로다
명춘다시 기약하고 한양성중 돌아오니 明春다시 기약하고 漢陽城中 돌아오니
173 , 동치불식 의관하고 소문객종 하처래라 童稚不識 衣冠하고 笑問客從 何處來라
팔월서풍 고결한데 와유금강 누웠더니 八月西風 高潔한데 臥遊金剛 누웠더니
[출처] 경허선사 鏡虛禪師 금강산 유산가 金剛山 遊山歌|작성자 여산궤호
(175개의 행으로, 놀랄정도로 길다. 172행을 보면 '한양성중 돌아오니' 가 있는데
경허는 살아생전 한양에 발들이지 않겠노라 하지 않았는가! 과연 경허의 글일까...? 의문부호다.)
현재 교계 일각에서는 <금강산유산가>가 경허의 진작이 아닐수도 있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어서 유의할 필요가 있다. 더 심도 깊은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일단은 경허의 진작이라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경허가 금강산 표훈사에서 쓴 <제헐성루> 2수가 있으며, 한암 중원 또한 '갑진년 봄 오대산에 들어가 금강산을 거쳐 안변군 석왕사에도착하셨다'고 경허행장에 쓰고 있기 때문이다. 오대산에서 계속 동해안으로 북상하여 금강산을 돌아본 뒤, 안변 석왕사로 가는 경허의 여정은 당시의 북행 교통로를 감안해 보아도 설득력이 있다.
머리를 기르고 훈장이 되다
경허는 석왕사의 불사를 증명하는 여가에 <석왕사 영월루에 부쳐> 라느 시를 남겼다.
봄날 해가 솟으니 꽃은 안개처럼 아른거려
기이한 새소리에 낮잠이 달구나
만 가지 덕과 광명을 통달함을 증명할 수 없는 곳에
새벽 봉우리 하늘에 꽃혀 푸른 쪽빛이네
春日이라는 시어로 볼 때 경허가 머물 때는 1906년의 봄이었으리라. 한암 중원은 경허가 북방의 삼수갑산으로 잠적하기 전 마지막 자취를 이렇게 회상한다.
갑진년 몸 오대산에 들어가 금강산을 거쳐 안변군의 석왕사에 도착하셨다. 마침 오백나한상에 개분하는 불사가 있어 여러 곳으로부터 훌륭한 스님이 모여 법회에 참석하므로써 함께 이 일을 증명하게 되었다. 화상께서는 단에 올라 남들이 할 수 없는 뛰어난 말씀을 주창하심에 그 곳에 모인 대중들이 합장하고 그와 같은 말씀은 처음 듣게 되었다고 감탄하였더니 불사가 끝난 후 자취를 감추시어 더디로 가셨는지 알 길이 없었다.
도대체 왜 경허는 승려로서 존재가 가장 돋보일 1906년 61세의 나이를 뒤로 하고 함경남도와 평안북도 오지의 북방고원에 부는 풍진 속에 자신을 묻어버린 것일까? 석왕사 이후 경허는 평안북도 강계. 위원. 함경남도 삼쉬갑산. 희천 등지로 자취를 감춘 뒤, 스스로 이름을 朴蘭州라고 지었으며 머리를 기르고 선비의 갓을 쓰고 변신하였다. 그리고 서당의 훈장을 하고 친지들과 술을 마시기도 하고 시를 짓고 소일하며 세간의 풍진 속에 자신을 묻어 버렸다. 경허는 머리를 길렀다. 그렇다면 경허의 유발은 환속의 징표였을까? 그렇지 앟다. 한암 중원이 적은 바와 같이 '韜(감출도)晦(그믐회)歸寂'을 위한 변장이다. 즉 자취를 감추고 사라지기 위한 유발인 것이다.
위앙종의 조사, 정우선사의 전기를 싣고 있다.
당나라의 무종 임금이 절을 부수고 스님들을 쫓아낼 때 선사는 잠시 머리를 기르고 속가의 무리들 틈에 살았다. 깊은 불심을 지닌 호남관찰사 상국 배휴가 무종임금에게 무종의 정책을 폐하기를 주청하여 폐불령을 풀자 배휴는 친히 나서서 선사를 가마에 태워 동경사에 모시고 제자들과 상의하여 선사의 머리를 삭발해 드리고자 하였다.
이에 선사는 웃으며 "그대들은 머리카락이 없으면 부처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말하며 삭발을 받아들이셨다. 제자들은 선사를 더욱 받들어 모시면서 가르침을 청했으나 모든 일을 몽환으로 여긴 선사는 제자들의 간청을 사양하셨다. 제자들이 거듭 간청하자 선사는 며칠동안 웃다가 이를 허락하셨다. 선사는 835년 정월 9일 동경사에서 입적하셨으니 세속의 나이 83이요, 스님 된 나이 55세였다. 선사를 대위산의 남쪽 언덕에서 장사지내던 날 종일토록 산의 물이 마르고 짐승과 새들이 울부짖었다.
경허는 가을날 서리 묻은 나뭇잎들이 찬바람에 휘날리는 숲길에서 자신의 고독을 본다. 그의 시 <우연한 노래>이다.
서리 묻은 나뭇잎들 찬바람에 떨어져
이리저리 어지럽게 날리는구나
이 마음 둘 곳 없어
긴 세월 나그네 되어 돌아가지 못하네
경허는 방랑자의 시름에 젖어 이렇게 노래한다.
험한 준령 몇 번이나 넘었으며 깊은 강물 몇 번이나 건넜던가
게으른 걸음으로 먼 길을 어찌가리
찬 연기 앙상한 가지에 아직 봄은 멀건만
담담한 구름 외로운 새 석양은 이미 기울고
나그네로 떠돌다가 이내 몸은 벌써 늙었구나
취했다 하더라도 출세간의 도 어찌 방해로우랴
술동이 마르기 전에 친구 다시 찾아와
맑고 높은 이 풍류를 하늘에가 맡길거나
만년의 경허가 차라리 어느 절의 조실로 주석하면서 남은 날을 보냈다면 그는 안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허는 명분과 사상의 틀에 안주하기를 거부했다. 안주를 거부한 사람은 그 막막한 자유로움의 가혹한 보복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그 자유에 대한 대가가 가혹한 보복으로 다가오기에, 나도 끝끝내 아내의 품에서 조고마한 자유에 안도하며 품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경허에게는 돌아갈 절이 없었다. 형태를 가진 절은 사라지고 단지 경허의 깨달음만이 남은 것이다. 바로 目前無寺이다. 선승들에게 일주문.법당을 가진 절이란 그림자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속보다 더 세속적인 가치가 받들어지는 절은 이름만 절일 뿐이다.
<<선문염송>>에 실린 한 게송이다.
산하에서는 소가 되고 산상에서는 僧이 됨이여
항하사의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능히 다 부르지 못하네
항상 구름 덮이지 않는 석양 노을을 즐겼나니
먼 산의 한없는 푸르름만이 아득하네
임제선사는 說했다.
함께 도를 닦는 여러 벗들이여, 眞佛은 형상이 없으며 眞法도 형상이 없는 것이다. 다만 그대가 꿈과 같이 헛된 형상에 망령된 지견을 더하여 여러 가지로 조작하여 보는 것이다. 그것은 설사 구하여 얻었다고 하더라도 모두 들여우, 도깨비 같은 착각이며 참 부처가 아니며 외도의 견해일 뿐이다. 그대가 참된 구도자라면 결코 부처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나한에도 집착하지 않아 삼계의 특별한 지위에도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참된 나는 오직 미혹한 無明의 굴레를 초월하여 걸림이 없나니 하늘과 땅이 뒤집어진다 해도 참된 깨달음은 다시 의혹에 휩싸여 혼란스러운 일이 없다.
시방의 모든 부처님이 나타날지라도 조금도 기쁜 생각이 없으며, 칼과 피와 불의 삼도지옥이 갑자기 나타날지라도 한 생각도 두려울 게 없는 것이다.
禪의 길에 투철할수록 역설적이게도 불공과 제사, 법회와 불사로 날을 보내는 절은 사라지고 오직 인간과 불교만이 남는다. 그래서 목전무사라는 선어가 있다.
화정은 약산 유엄(751~834) 선사의 법을 이었으며 한때, 강소성 소주에 살았으나 <<조당집>>제 5권에는 화정은 원래 俗性도 알 숭 벗고 처음과 끝의 자취도 알 수 없는 막측시종의 인물이라고 적고 있따. 마치 한 마리의 이리와 같이 선의 대지를 방랑하던 챈애객이었으리라.
스승 약산이 세상을 떠난 어느날, 약산의 비지를 이어받은 화정, 운암과 도오 세 사람은 앞으로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의논하였다.
"곡식 종자 조금과 갖고 있는 도구를 가지고 풍원의 깊은 골짜기, 사람의 자취가 끊어진 곳을 찾아가 피세양도하며 과생하기로 하자."
세 사람은 이렇게 의논하고 "머뭇거리지 말고 날이 새거든 새벽에 그냥 떠나자"고 결의했다. 이 세 사람의 선승 가운데 화정이 제일 어른이요, 도오가 막내였다. 도오는 밤중이 되자 삼의를 갖추어 입고 두 사형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어제 저녁에 우리가 의논한 일은 우리 세 사람의 본지에 적합한 일입니다.그러나 석두화상의 범맥을 매몰시켜 버리는 일은 아니겠습니까?"
화정이 말했다.
"어째서 매몰된다고 하는가?"
"두 사형과 내가 깊은 산, 인적이 끊어진 곳에서 숨어 피세양도하며 과생한다면 어찌 매몰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화정이 말했다.
"아우님은 원래 그렇게 장한 생각이 있었구료. 그렇다면 산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라 각자 분수대로 떠나기로 합니다. 그러나 아우님께 부탁해 둘 일이 있소. 나는 그대들과 헤어진 후 소주의 화정현에 가서 작은 배를 물 위에 띄우고 오락가락하며 유희하면서 지내겠소. 혹시 영리한 자가 있거든 그를 내게 보내시오."
도오가 말했다.
"사형님의 존지를 따르겠습니다."
세 사람은 각자 길을 떠났다.
세월이 흐른 뒤, 화정이 강가의 뱃사공이 되어 오가는 사람들을 건네주고 있을 때 도오는 천문산의 좌주 한 사람을 발견하여 사형 화정에게 보냈다.
어느 날 세 명의 스님들이 화정현 강가에 이르러 화정이 노를 젓는 배를 탔다. 화정은 세 좌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스님들은 어느 절에 머무시는가?"
강을 건너는 스님이 대답했다
"절이라면 머물지 않고 머물면 절이 아닙니다(寺卽不住(살주) 住卽不寺)."
"어찌하여 머물지 않는다고 하는가?"
"목전에 절이라는 것은 없습니다(目前無寺)."
화정이 물었다.
"어디서 공부를 했는가?"
"귀와 눈이 이르지 못한 곳입니다."
이에 화정이 말했다.
"한 구절에 머리와 뜻이 합하더라도 만 겁 동안 나귀를 매는 말뚝일뿐이니라."
배가 건너편 언덕에 가 닿자 화정은 좌주에게 말했다.
"지금까지나눈 대화들을 괴이하게 여기지 말고 어서 배에서 내리시오."
화주는 배에서 내리며 물었다.
"날마다 곧은 낚싯바늘로 고기를 낚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화정이 말했다.
"천 길의 실을 드리운 뜻은 깊은 연못에 있나니 그대는 왜 들떠있는 유와 무를 평정하지 못하고 세치의 혀를 초월한 구절을 왜 묻지 못하는가?"
좌주가 머뭇거리자 화정은 노를 들고 좌주를 밀어서 물에 빠뜨려버렸다. 좌주가 물에서 나와 말했다.
"현묘한 경지에 이르면 말로 표현할 길이 없고 혀끝으로 이야기하려 해도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화정이 말했다.
"날마다 곧은 낚시로 고기를 낚다가 오늘에야 한 마리 낚았구나. 이제 마음대로 가기는 가라마는 그대는 그 일을 보았는가?"
좌주가 말했다.
"보았습니다."
화정은 당부하며 말했다.
"그대가 오늘 이후부터는 몸을 숨기는 곳에 자취가 없게 하고 자취가 없는 곳에 몸을 숨겨라. 이 두 곳에 머무르지 않으면 그것이 진실로 나의 가르침이니라."
바로 이 좌주가 훗날 <<조당집>> 권7에 협산 선회(805~881)선사로 기록되는 인물이다.
경허는 주모와 장사꾼들 틈에 섞여 사는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노래한다. <서회書懷(품을회)>
주모와 장사꾼들 틈에 섞여 지내니
자취를 감추기엔 이것이 제격
저물기도 전에 산에서 날쌘 표범 내려오고
깊어 가는 가을 찬바람에 기러기 떼 북쪽에서 날아오네
금과 옥을 탐내지 않음은 인간의 보배이니
구름과 안개 속에서 물질 밖의 淸閑함도 잊었네
초탈하여 의심 없는 마음을 스스로 얻은 것은
다만 지난날 祖師의 玄關을 타파했기 때문이네
이처럼 경허는 끝까지 선의 길을 잃지 않는다.
경허는 <갑산 들어가는 길에 강계 아득포재를 넘으며>라는 시에서 드높은 산봉우리로 이어진 아득재의 풍경을 노래한다.
인간은 어찌 금을 귀하다고 쌓아 두는가
참으로 귀한 것은 청한한 물질 밖의 삶인 것을
소나무 잣나무 우거진 천 길 골짜기를 바라보니
안개구름이 점점 피어올라 만 길이나 뻗치는구나
기묘한 꽃은 변하지 않는 청춘의 색깔이며
이상한 새들이 서로 태고의 소리를 전하네
희머리 날리는 속진에 물든 이들
어찌 이런 곳에 깃들여 몸과 마음을 고요히 할 수 있으랴
아득포재는 해발 1,479미터의 높은 고개이다. 경허는 강계에서 갑산으로 떠나기 위해 평안북도 고원지대와 함경남도 고원지대를 잇는 유일한 통로인 아득포재를 넘는다. 경허는 고원지대에 펼쳐진 광활한 원시림을 바라보며 대자연의 장엄함에 감탄하고 있다.
경허는 강계 화경면 황린리를 지나며 주민들의 피폐한 삶에 시선을 돌린다. <황린리가는 길에서 읊음>이라는 시이다.
황린리 가는 길 왜 이리 슬픈가
도탄에 빠진 생령들 지금도 같은 모습
풀어진 머리 베 짜는 처마 밑에 서린 서리 같고
밥 짓는 손 갈라지고 나무와 낫은 이리저리
어느 부모가 병역 걱정하지 않으며
밭과 논이 있다 해도 벼슬아치들 토색질에 못 견디네
천일주를 구하기 힘든 것 잊으려 해도
가만히 일어나는 생각을 금할 길 없네
선문의 고고한 서정 속에 깃든 경허의 슬픔과 서정은 사라지고 당장 숙식을 구하는 인간적인 슬픔이 서린 시가 쓰여지는 것이다. 즉 교훈을 담은 시는 사라지고 북방고원의 아름다운 풍광과 술, 자신의 취식을 허락해 주는 벗들에 대한 고마움, 도탄에 빠져 허덕이는 민중에 대한 깊은 연민이 그의 시를 채우고 있다.
발자국의 메아리
경허는 함경남도 갑산거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헌병분견대로 연행되었다. 헌병보조원은 경허를 무수히 구타하며 신분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 꿈에도 경허의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들은 경허를 잠행하는 독립지사이거나 위험인물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경허는 매의 소나기 속에서도 침묵을 지키고 신음 하나 내지 않았다. 일본인 헌병대장은 경허를 다그쳤다. 경허는 지필묵을 요구했다. 그리고 단숨에 정갈한 필체로 법어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모든 행위는 마침내 무상으로 돌아가는 것
지금 세력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다할날이 있으리니
마치 힘을 다한 화살이 땅에 떨어지는 것처럼
마침내 모두 생사윤회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 법어는 황벽 희운이 거사 배휴에게 설한 <<완릉록>>의 한 구절이다.
갑산의 일본인 헌병대장은 고개를 숙였다. 이 사람이 바로 '모습을 감추기위해 머리를 기른 고승'이라는 것을 짐작한 헌병대장은 경허를 자신의 집으로 정중히 모셨다. 그리고 부인에게 말했다
"이 분을 모시고 잘 대접하시오. 무엇을 원하시건 그대로 받들어주시오."
그러나 헌병대장이 서울 출장을 다녀와 보니 경허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회명 일승(1866~1951)이라는 건봉사 큰스님이 계셨다. 이 분은 제주도에서 만주까지 이 땅의 곳곳에 사재를 들여 포교당을 세우고, 불가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각고분투하신 근세의 호법보살이다. 스님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불교교육기관인 명진학교에 사재를 기탁한 독지가이며, 학덕 또한 후학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경지에 도달하신 석학이다. <<회명문집>>이라는 스님의 법문집이 남아 있는데 이 문집에 경허의 자취가 실려 있다. 삼소 중촌건태랑이라는 일본인이 회명에게 보낸 편지이다. 원제는 <삼소중총건태랑래서>이다.
......신라 최치원선생께서 지으신 지증국사의 비문 가운데 '서당지장의 현묘한 이치에 계합한 이'라고 말하였다 하고, 주석에 이르기를 '이 스님이 동국에 돌아오기 전에는 동국의 사람들이 선의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기에 지증을 일러 처음 말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 뒤로 조선의 스님들은 비록 임제의 종맥을 전한다고 하였으나 명자뿐이고 실지로는 선의 뜻을 알지 못하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60여 년 전에 나타나신 경허 동욱 선사는 流遠을 뛰어난 분이어서 그 분의 법하에서 걸괴한 스님들이 많이 나왔으니 전수월. 신혜월. 방한암. 송만공 등의 스임들이 나와서 전전하며 크게 발휘하여 남북지방에 선원들이 숲처럼 우거졌으니 경허선사야말로 스님들 가운데 거장이시며 조선선의 원조라고 하여도 무방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어찌 선사께서 직접 짓고 쓰신 십 폭의 심우송과 오도송에 남긴 필적을 귀중히 여기고 존경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그것을 얻어 간직한 지 오래되었는데 이제 나이 75세가 되고 보니 태하께 기증하여 올립니다. 태하께서는 그 전의 백학명 선사의 필적과 동일하게 잘 보관하여 주시기를 간절히바라고 간절히 바랍니다.
이 서간은 1940년대에 쓴 편지로 보인다. 이 유묵 가운데 <심우송육곡병풍>은 수덕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안진호 스님이 회명 일승의 구술을 받아 작성한 연보에 의하면 회명은 1931년과 1932년 경허가 머문 강계에 포교당을 세우고 주석하면서 설법하고 있다. 회명 일승이 강계에서 쓴 시이다. 제목은 <강계 포교당에 유숙하면서>이다.
다행히 오늘 강계 포교당 이루어졌으니
어찌 하늘 끝이 서울과 가깝지 않다고 하랴
여기에서 중생을 제도하는 참다운 면목은
산 가득한 솔잎 사철 푸르네
함경남도 강계뿐만 아니라 함경북도 청진. 주을과 평안북도 자성 일대에 포교당을 세운 회명 일승은 경허가 떠돌며 보낸 북방에서의 행적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경허를 사숙한 여러 선사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개마고원과 낭림산맥으로 둘러싸인 강계는 평안북도 제2의 도시이다. 현재 강계는 자강도의 도청 소재지이다. 서울에서 1,350리나 떨어진 변방의 오지로 조선시대의 이언적은 1547년 강계로 유배와서 삶을 마쳤으며, 송강 정철 등 수많은 벼슬아치들이 중앙 조정에서 밀려나 이곳에서 돌아갈 때를 기다리며 유형의 한을 삭였다.
유배자들은 조정의 특별한 지시가 없는 한 스스로 생계를 해결해야 했다. 그 생계수단이 서당을 여는 것이었으며 주요 교육방법으로 정착되었다.
강계 출신의 실향민들은 지금도 '어사 볼기 친 마을' 이라는 긍지를 갖고 있다.
1905년 강계종남면 장평리에 타나난 경허는 작은 소동을 일으킨다. 주막거리에서 경허는 눈에 들어간 티를 빼달라고 가까이 다가 온 주모의 얼굴에 입을 맞춘 것이다.
김탁은 마을 청년들에게 말했다.
"그만들 두어라. 아무리 그래도 여러 놈이 노인에게 발길질을 해대다니. 한심한 놈들."
북방의 지식인 김탁은 경허를 바라보았다. 범상치 않은 풍모에 괴이한 걸물이었다. 김탁은 한눈에 이 비범한 인물에게 끌렸다. 그러나 정작 경허는 자신을 위기에서 구한 김탁에게 목청을 돋우었다.
"괘씸하구나. 할 일 없으면 그대로 길이나 갈 것이지, 남의 일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왜 남의 삸싸움에 참견하고 있나. 고얀 놈 같으니라고."
훗날 만주지역 한인독립운동사의 한 장을 장식하게 되는 김탁은 경허의 눈매에서 이미 세계와 인생의 허망을 봐버린 자의 강렬한 안광을 보았다. 때로는 말보다 눈이 더 많은 말을 할 때도 있다. 장뚜벌 주막거리에서 일으킨 소란이인연이 되어 만난 두 사람은 그날 이후 지기를 맺고, 김탁은 경허의 생활을 돕는다.
<<경허집>>에는 경허가 담여 김탁에게 준 시 세 편이 실려 있다. <김담여에게 화답함>이라는 시이다.
세 사람이 정겹게 사귐이 백 명의 벗보다 나으니
마주 앉아 취해서 노래 불러도 거리낄 일 없네
안회는 가난해도 항상 유쾌했으며
기우는 비록 간절했으나 이미 늙어서 어쩔 수 없었네
가련하구나 부모 계신 하늘 끝은 아득한데
청명절도 변방에서 보내며 감회에 젖네
동풍이 불어 나무에 꽃이 만발하니
원컨대 저 강물이 이잔에 고인 술이라면
김탁은 재속의 전법제자가 되어 경허의 깨달음과 우국선을 이어받는다. 김탁은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단체 광정단의 재무부장을 맡은 후,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발족하기 위해 상해에서열린 국민회의 국민대표 25명 중의 한 사람이 된다.
1923년에는 평안도 출신 청년들을 중심으로 창립된 '민족의의 소정에 기하여 인류애의 본진으로 돌아갈 것'을 강령으로 하는 다물청년당의 당원, 1927년 이후에는 정의부에서 발행하는 排일 선전지 <<전우>>의 책임사원, 1928년에는 정의부 중앙행정위원, 1936년부터는 동북항일연군 제7군의 참모장을 역임하는 등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친다.
<<경허집>>에는 그가 입적하기 전까지 북방에서 남긴 시가 90여 편 수록되어 있다. 이 시편들 가운데 경허가 북방의 고원도시를 떠돌며 시를 주고받은 사람들의 이름들이 실려 있다.
양유상. 이여성. 박이순. 김담여. 김소산. 오하천. 김영항. 김박언. 최문화. 김일연. 박형관. 임인규. 김낙주. 김치주. 김유근. 강봉헌. 송의징. 한학순. 장사윤. 김수호. 박영상. 김응삼. 이택룡. 김용선. 김수장. 송남하
모두 26명이다. 그들은 대부분 지방의 선비, 상인, 지주, 학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이다. 그들은 하늘 끝의 낭떠러지를 홀로 떠도는 경허에게 인간의 온정을 베푼 사람들이다(눈시울이뜨거워지넹).
경허는 <元旦>이라는 시에서 설날 누군가 보내온 음식을 받고 '설날 타향살이 내 신세 가련한데 다행히 변방이지만 예절 있는 곳이네'라고 기뻐한다. 선문의 대장부, 경허답지 않은 공치사이다(이곳에 이르러 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아, 가련한 경허, 그의 사후 한 세기가 못 되어 그의 문하에서 수학한 제자들이 고승으로 자라나고 그를 사숙한 선승들은 이 나라 불교계의 지도자로 존경과 예우를 받으며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게 되지만, 정작 경허 자신은 그 외진 북방의 한 산촌에서 홀로 설날을 지내다가 누군가가 보내 온 음식을 얻고 이렇게 기뻐했던 것이다. 경허가 북방에서 남긴 시편에는 취식 후의 고마움을 표하는 내용이 많다.
경허는 강계 도하리에 서당을 열고 학동들에게 '제목 없는 글을 가르치며 수염만 기른다' 고 넉살을 떨기도 한다.
경허는 자주 독로강과 북천이 합류하는 강 언덕에 세워진 강계 인풍루에 올라 산하를 바라보는 감흥을 누린다. <등인풍루>라는 시이다.
문장을 익힌 습기 늙어도 남는데
큰 무지게 만들어 태허공 꿰고 싶네
창해가 변하여 뽕밭된 것을 몇 번이나본 학이 돌아왔고
일찍이 호서바다에서 펄펄 뛰는 고기찾았네
들에 덮인 벼 알알이 익어 가는데
장마비가 온화한 바람 몰아와 날이 개이지 않네
백 척 난간에 기대니 감개가 무량한데
어느 곳이 창생들의 안식처인가
북방 유랑 이후 경허는 그의 시에 술과 벗들만 담고 있지않다. 시국과 민족을 걱정하는 시가 부쩍 늘어난다. 그만큼 나라의 운명은 가파른 비탈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 누워도 편치 않구나
지금 나라는 염천의 여름이니
원컨대 자비의 구름 곳곳에 펼쳐지이다
병들고 술 취해서 나라 걱정 잊고자 했더니
시국을 걱정한들 운수인걸 어찌하랴
1910년 10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그때부터 이 땅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로서 온갖 수난을 겪게 된다. 바로 그해 불교계의 이회광은 조선불교를 일본 조동종에 합병시켜서 조선불교에 원종이라는 어정쩡한 이름을 덮어씌우는 비밀조약을 맺는다. 이로써 나라가망하고 불교가 망하는 치욕의 연개기를 연출하게 된다.
경허 역시 이 치욕을 저 멀리 북방의 산간마을에서 알고 있었으리라.경허는 밤 눈 내리는 산야를 바라보면서 긴 한숨을 쉰다.<섣달 그믐날 저녁除(덜제)夜>이라는 시이다.
천 갈래 쌓이는 회포 어찌 다 말로 하랴
산 깊고 눈은 찬 쓸쓸한 서재일세
지난해 청명 때에는 강계읍에서 보냈는데
올해 섣달 그믐은 갑산마을에서 맞는구나
홀연히 고향에는 꿈속에서나 가 보았는데
기약도 없는 나그네의 무료함 잠시 잊어 볼거나
청 앞에 등불이 호젓하고 사방이 고요한데
먼 곳 닭 우는 소리에 쓸쓸히 문에 기대네
<여러 벗들과 자북사에 올라>라는 시이다.
노쇠했어도 괴롭게 산에 오르는 것은
다만 신선과 옥난간에서 노닐었던 인연 때문에
머나먼 변방에 시 짓는 그대 보고 鶴인가 했고
香山의 결사 찾음은 나 또한 중이기 때문
사바세계 중생 그 누가 잠을 깨었나
천 강에 달이 비치니 가히 부처님의 등불 전할 만하네
지금 이 나라 염천의 여름이니
원컨대 자비의 구름 곳곳에 펼쳐지이다
자북사는 평안도 희천군 강계면 고당동에 있던 절이다. 신심 깊은 노스님이 도탄에 빠진 중생을 위해 올리는 기도이다. 경허의 또 다른 시 한 편을 보자. <공귀리의 여러 벗들에게 화답함>이라는 시이다.
새 문화나 구식 둘 다 싫으니
통음하여 단번에 시비를 모두 잊네
목마르던 속에 훈훈히 술기운 도니
야윈 겨드랑에 날개 돋혀 날을 것 같구나
상한 마음 병이 들어 어느덧 늙었건만
기쁘다 영묘한 싹 비를 맞아 싱싱하구나
누가 내 주머니 속에 보장의 비결 감추어진 걸 알리오
어떤 때에는 가사 장삼 가볍게 입어 보네
가사 장삼을 입어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 경허라는 법호로 불리던 한 위대한 선사는 깨달음의 장엄한 폐어 위에 떠도는 기억의 혼령일 뿐이다.
삶도, 죽음도, 사랑도, 미움도 없다
오래 전에 경허는 자신의 숙업을 예견이라도 하는 듯이 이렇게 썼다. 경허의 <심우송> 가운데
(2022.12.28, 15:30 오늘 집자 終. 눈에 썹이 붙어서 뗄려고 베란다에 갔는데, 우측 눈까풀이 계속 떨고 있는 게 보였다. 책을 읽고 집자하는 순간에는 몰랐던 이 떨림현상. 눈이 많이 피로하구나! 끝을 내고 싶어 이렇게 밀어붙이지만 소중한 내 눈을 보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임에랴. 뭣이든 지나치면 탈이 생기는 법. 오늘은 더 열심히 집자에 충실하였다. 토요일 다가온 경기최씨송년회를 준비하여 산성막걸리를 시켰다. 형수께서 36만원 주신것두 입금해야 하고. 펜션 아내가 지불한 돈은 빼서 주어야 한다. 자, 이만 마무리하고 좀 눈을 쉬도록 하자. 시간은 조금 이르긴 하지만......)
(22.12.29, 17:37 폐 검진. 박정웅 교수.
5년을 매년 1회 시티 찍어서 확인했는데, 간유리 부분 두 군데가 더 이상 커지질 않았다. 오늘 박교수는 "2년에 1회, 그런데 그게 안되니깐 내년 12월 검진 때에 1년 연기하는 절차를 간호사와 얘기 하시면 됩니다." 하였다. 그렇게 진행하였다. 내 폐는 아마도 미래에도 건강하리라고 생각한다. 담배도 안 피우고, 공기좋은 산을 자주 가고. 또 어떻튼지간에 집에서 가스 틀 때 Fan트는 거 꼭 실행하고 또 2023년 취직할 때 필히 매일 출퇴근하고 공기좋은 곳을 선택할 것. 요즘 도올주역강의와 그걸 듣다보면 '안병무와 조선사상사' 강의도 본다. 몸의 자유! 몸의 단련! 이것은 도올이 한국통합기도총회에서 말한 내용이다. 요즘 『경허 』를 집자하면서 한편 소태산평전을 읽고 있다. 강증산은 수운 최제우의 뒤를 잇고, 박중빈 소태산은 강증산의 십여년 후에 깨침을 얻어 토착종교를 생성한다.
언젯적 봄에는 월명사를 거쳐 산을 내려가 직소폭포 갈림길에서 수많은 이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 길 왼쪽으로 가면(직소폭포는 우측으로 간다) 소태산의 유적지가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수운 최제우의 천도교, 그를 이어 강일순의 증산교가 발흥했다. 그리고 박중빈 소태산은 강증산의 눈에 들려 애썼으나 선택받지 못하고 스스로 깨침을 얻어 원불교 교주가 되었다. 나는 지금 <<소태산 평전>>을 읽고 있다. 조금 있으면 모래 쓰일 산성막걸리가 온다. 한잔 먹을까? 참을까?ㅋㅋㅋ 집자를 시작하련다...
異類中行이라는 게송이다.
털을 쓰고 뿔이 난 소가 되어
등불 앞에서 쓸쓸히 읊조리네
지금 조사는 몸을 잃어버리고
긴 세월 거리로 떠돌아다닌다네
이 게송은 바로 경허 자신이 그린 자화상이다. 북방고원의 옅은 가을 햇살속에서 그리워하는 것은 잃어버린, 이제는 지나가 버린 시간의 산산조각난 편들들이다. 아름다운 기억의 애잔함이다. 마침내 경허는 뜰에 홀로 핀 봉선화에서도 아름다운 기억의 애잔함을 발견한다. <봉선화>이다.
곱디고운 꽃떨기 이끼를 벗한 듯
봉새도 비범하거니와 신선 또한 흔치 않네
규방 깊은 곳에 이슬비 내리고
꽃밭에 가린 적막 더욱 고운 풍경이구나
고운 마음결, 고운 자태는 한 폭의 시
섬섬옥수 불게 물들어 베틀에 몇 번이나 놀랐나
연꽃도 국화도 난초 또한 예쁘지만
그 누가 이 봉선화 뛰어나게 고운 줄 알았으리오
이제 경허는 봉선화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자신의 모습에 흡족해 한다. 무슨 대발견이라도 한 듯 기뻐한다. 경허의 전반생을 말해 주는 경학과 회심, 깨달음 그리고 사람들을 의혹 속으로 몰아넣었던 무애행도, 깊은 고독과 고행의 무게조차도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게 된 것이다.
경허는 1912(壬子)년 4월 25일 함경남도 갑산군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오직 홀로 禪의 푸른 하늘을 비행해 간 위대한 선사, 경허 성우는 지상에서 마지막 남은 그림자를 거둔 것이다.
입적하기 전날, 경허는 아이들이 서당 뜨락의 풀을 뽑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아, 참 피곤하구나."
다음날 새벽의 푸른 여명이 창호지에 스며들 때, 경허는 홀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붓을 잡고 게송을 썼다.
외로이 홀로 밝은 마음의 달
온 누리의 빛을 머금었구나
그 달빛 온 누리와 함께 사라졌으니
이는 다시 무엇인가
◎
心月孤圓 光呑(삼킬탄)萬像
光境俱(함께구)忘 復是何物
경허는 붓을 던지고 오른쪽으로 돌아누워 숨을 거두었다. 경허의 외로이 홀로 밝은 마음의 달은 온 누리의 빛을 머금고 저 광활한 낭림산맥과 개마고원의 푸른 대기속으로 사라져 갔다. 경허가 시인이 되어 북녘 고원을 떠돌 때, 밥과 잘 곳을 마련해 주었던 지기들은 그의 잔해를 거두어 산에 묻는다. 경허의 세수 67세, 법랍 59세였다.
경허의 죽음, 모든 것이 無로 변해 버린 그 不在의 자리에는 비극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
일체개공(一切皆空)의 非道를 , 이류중행을 완성한 그 점이 경허다운 것이다.
임제선사는 '삼도지옥에 들어가도 봄날의 꽃밭에서 소요하는 것이며, 아귀도와 축생도에 들어갈지라도 과보를 받지 않느니라'고 설했다. 바로 일체개공의 비도, 이류중행의 끝을 본 사람의 법어인 것이다. 이 법어의 핵심은 空이다. 아무런 감정도, 理智도 붙을 수가 없는 준엄한 칼끝의 일이다. 삶도, 죽음도, 사랑도, 미움도 없다.
경허의 입적은 그 이듬해 수덕사 정혜선원에 주석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알려진다. 한암은 스승 경허의 입적 소식이 전해진 때의 일을 이렇게 썼다.
십 년 후 水月화상으로부터 예산군 정혜선원으로 서신이 왔다.
"화상께서 머리를 기르시고 속복을 입으신 뒤, 갑산.강계 등지로 내왕하시며 시골 서당의 훈장도 하시고 저잣거리에서 술도 자시고 하다가 임자년 봄에 감산 웅이방 도하동 서당에서 입적하였다."
혜월과 만공 두 분 사형이 곧장 그곳으로 들어가 관을 모셔다가 난덕산에서 다비에 붙인 다음 임종할실 때의 서게를 덛어 가지고 돌아왔으니 바로 화상께서 입적하신 다음 해인 계축년(1913) 7월 15일의 일이었다.
....아아, 슬프도다. 대선지식이 세상에 나타남은 실로 만겁에 만나기 어려운 이이거늘 비록 우리가 잠시 친견한 바 있다고 하지만 오래 모시고 공부했던 것도 아닌데 선사께서 돌아가시는 날조차 참석하지 못하였구나. 다만 그 마지막 떠나신 일이 옛 도인들이 입멸할 때와 다름없어 흐믓하니 이것으로 여한을 그칠 따름이다.
1999년 9월 18일 아침, 필자는 수덕사 밑 수덕여관의 한 방에서 거세게 쏟아져 내리는 장대비 소리를 들으며 깨어났다. 초가을의 태풍 앤이 몰고 온 폭우와 바람이었다. 비가 잠시 멎은 오전 필자는 간밤의 폭풍우처럼 질풍노도와도 같던 경허와 만공의 젊은 날을 떠올리며 덕숭산 수덕사의 뜰을 걷다가 정혜사로 올라가는 산모퉁이 한 켠에 고요히 서 있는 경허의 부도를 보았다.
사람들은 저 북방고원을 바람처럼 방랑하다가 숨을 거둔 경허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경허의 부도가 서 있는 뜰에는 어느 바람에 실려와 피어난 꽃인지 한 떨기 보라색 도라지꽃이 고요하게 피어 있었다.
만공은 스승의 입적 소식을 듣고 <경허법사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라는 시를 읊고 있다.
선함과 악함이 부처와 호랑이보다 더하신 분
바로 경허선사이시다
돌아가셨으니 어느 곳을 향해 떠나셨는가
술에 취하여 꽃밭 속에 누우셨도다
善惡過虎佛 示鏡虛禪師
遷化向甚(심할심)麽(잘마)處去 酒醉花面臥
'술에 취하여 꽃밭 속에 누우셨도다'는 구절에는 제자 만공이 파악한 스승 경허의 괴롭고 고독했던 일생을 함축하고 있다. 술은 그대로 술이 아니다. 꽃밭은 그대로의 꽃밭이 아니다. 경허의 술은 스스로를 이류중행에 몰아넣기 위해서 취하는 미망의 술이며, 꽃밭은 바로 보살이 스스로 선택한 가시밭인 것이다.
이 시를 적어 내려가는 만공의 뇌리에는 스승 경허의 이류중행은 아직도, 그리고 영원히 끝나지 않으리라는 비감으로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제자 혜월과 만공은 1913년 7월 25일 갑산 난덕산으로 가서 스승의 시신을 운구하여 다비에 모셨다. 당시 경허의 저고리 속에는 게송이 들어 있었다고 전한다.
삼수갑산 깊은 골에
속인도 아니요 중도 아닌 송경허라
천리 고향 인편이 없어
세상 떠난 슬픈 소식은 흰 구름에 부치노라
三水甲山長谷裏(속리) 非僧非俗宋鏡虛
故鄕千里無人便(편할편) 別世悲報忖(헤아릴촌)白雲
제자 만공은 스승 경허의 법은을 생각하며, 그와 함께 산하를 떠돌던 날들을 생각하며 스승의 잔해를 불태우는 다비의 불을 붙이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가슴에 남은 노래 한 소절을 불렀다. <함북 갑산군 웅이면 난덕산 아래에서 돌아가신 법사님의 다비 때 부르다>라는 긴 제목을 가진 게송이다.
시비에 물들지 않는 바람 같은 나그네가 있어
난덕산 아래서 겁외가를 그쳤도다
나귀의 일도, 말의 일도 다 재가 되어 스러지니
날은 이미 저물고 먹지도 못하는 소쩍새가 '솟적다' 우네
舊來是非如如客 難德山止劫外歌
(馬盧)合字'로'馬燒是暮日 不食杜鵑恨小鼎
만공의 노래처럼 나귀의 일도, 말의 일도 다 재가 되어 스러지고 날은 이미 저물었다. 시비에 물들지 않는 바람 같은 나그네가 영원한 겁(劫)바깥에서 부르던 노래도 이미 끝났다.
다만 먹지도 못하는 소쩍새의 울음소리 속에서 경허의 非道, 경허의 환채, 경허의 시련, 경허의 고독은 이제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술에 취하여 꽃밭 속에 누운 것이다.
경허는 이렇게 저문 날, 그가 떠돌던 고원의 소쩍새 울음소리를 들으며 깨달음의 回廊에 영원히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를 남기고 本源淸淨佛의 세계로 떠났다. 그리고 지금 현대 한국 禪의 회랑에는 여전히 그의 크나큰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ㅡ끝.
2022.12.29, 목 20:20
집자를 끝내며
'불교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 책 집자 말미에 불교에 대하여 불호의 느낌이 잠깐 스쳤는데, 그것은 거의 롤러 코스터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 주된 원인은 아마도 불교도 결국엔 외래종교라는 인식 때문에서일 것이다.
석가의 경전은, 기독교의 성경과 비교하면 그 교학수준이 대학원생과 초등학생의 수준 차이 쯤 될 것이다. 기독교 성경은 전부 다 알아듣기 쉬운 일반언어로 쓰여 있다. 불교 경전은 모두 한자로 쓰여 있다. 내가 경험한 바로 불교는 인생 '철학서'에 가깝다. 종교라기 보다 인생의 모든 이론이 오롯이 함축되어 있다.
물론 신학자에게 묻는다면 불교는 우상숭배라고 진절머리를 칠 것이다. 기독교만큼 종교 다원주의에 찬물을 끼얹는 종교는 없을 것이다.
이제 내 나이 62세, 곧 63세에 접어든다.
어려서는 굿당. 절을 기웃거리고 다녔다. 높고 깊은 산동네는 교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생 즈음에 옆동네와의 중간쯤에 조그만 교회가 들어섰다. 사탕을 주기도 했다. 만만한 그곳이 궁금해서 크리스마스가 되면 친구들과 더러 들르곤 했다. 그러나 교회 안으로 들어가진 않았다.
중학교 졸업하고 대처로 나온 이후에 내게서 종교는 사라졌다. 공돌이 생활을 하고, 야간고교도 다녀야 했고 그리고는 군대에 갔다. 군대에서는 너무나 하루하루가 힘들어서 토요일에는 어떡허든지 교회에 갔다. 불교도 있었다. 그러나 교회가 더 친숙했다. 교회 나무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에는 고참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시간이었다. 고참이 되어서는 교회 갈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그리고 제대하여서는 앞으로 살 길을 찾아야 했으므로 종교는 생각할 수도 않았다. 어쩌다 꿈에서나 한번 쯤 생각 날까......
마흔살에 천주교 교리를 공부했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10년은 정말 착실하게 성당에 다녔다.
코로나 이후에 성당에 다니지 않는다. 며칠 전 판공성사표가 왔지만 조용히 지나쳤다. 나는 이제 종교를 떠나려고 한다.
젊어서는 종교를 가져야만 하는 것으로 알았다.
마흔 얹어리의 어느 날, 삶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미래가 암담하기에 형에게 물었다.
봄에 고추를 파종하면서다. 바람이 부는 날,
"형님은 행복하십니까?"
형은 감리교 맹렬신자다.
"그러엄.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정말 형은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식사 전에 감사기도 하고, 80년대에 돈 삼백만원을 싸들고 교회에 가셨다. 나는 당시 월세를 살고 있었다. 삼백만원을 내면 하나님이 따따블로 벌게 해주신다는 게 그 이유였다. 나는 그 말에 코웃음을 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목사의 사기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 없다.
ㅡ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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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
불법연구회 주산컬럼
'쭈쭈 수행위원' 탑재글에서 모셔 왔습니다)
다시 경허를 생각한다/ 허정
경허 스님,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를 찾다보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그는 짙은 안개 속에 있어서 찾으려해도 찾을 수 없고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다.
그만큼 부처 대접을 받아본 사람도 없고, 그처럼 魔說이라는 비방을 들은 이도 없다.
그를 찾아나서는 사람은 끝내 절벽 앞에 서게 된다. 그가 경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경허를 찾는 행렬은 끊이지 않는다.
금년은 '경허스님 열반 100주년', 그것을 기념이라도 하려는 듯, 윤창화는 경허의 酒色을 꺼냈다.
불교평론에 발표한 '경허의 주색과 삼수갑산'이라는 논문의 요지는 "경허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그러므로 경허의 주색은 욕망의 충동으로 인한 파계이며, 그가 말년에 자취를 감춘 것도 젊은 날의 삶을 부끄러워하였기 때문"
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경허에 대한 평가는 옳고 그름을 떠나서 언론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마치 경허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라도
발견된 것처럼 언론들은 '최고의 선지식 경허, 주색잡기 참회했다(한겨레)', '고기 먹고 여색 즐기며 늘 당당했던 경허스님도
말년엔 반성하느라 은둔했다(서울신문)'라는 식으로 보도했다.
내가아직 경허를 제대로 그려낼 역량은 없으나 이러한 기사와 논문을 보았을 때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스쳤기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논자가 경허를 그려내는 재료는 1917년 3월에 발행된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이다. 이능화는 "世人들이 말하기를,
'경허화상은 변재가 뛰어나고, 그가 설한 바 법은 비록 옛 조사라고 할지라도 이를 뛰어넘는 이가 없다'고 한다. 비록 그렇다고 해도 그러나 그것은 제멋대로일 뿐 아무런 구속을 받음이 없어 淫行과 偸盜를 범하는 일조차 꺼리지않았다...... 叢林에서는 이를 지목하여 마설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능화는 경허스님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가 쓴 책은 경허가 열반한 후에 들었던 소문을 적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이능화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면 더욱 그의 말을 신뢰하기 어렵다. 이능화는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최병헌 교수는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을 찬양하고 협력하며 평생을 살았던 이능화는 無師自悟의 경허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비판적인 입장에 서 있다"라고 평가한다.
민족사를 왜곡하고 경허를 몰랐던 친일학자가 들리는 소문을 기록한 글을, 경허를 비판하는 가장 확실한 근거로 삼는다는 것은 처음부터(근본부터 오류) 문제가 있다.
또한 이능화는 "雖(비록수)然 蕩(방탕할탕)無拘檢 至犯淫殺 不以介意" 라고 적고 있는데 반하여 논자는 "그러나 그것은 제멋대로일 뿐 아무런 구속을 받음이 없어 음행과 투도를 범하는 일조차 꺼리지 않았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살인'을 '도둑질'로 바꾸어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알려진 바대로 한때 경허가 계룡사에서 영주사미를 죽였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그것은 헛소문이었을 뿐, 뒤에 경허의 결백은 밝혀졌다. 이 사실까지는 알지 못한 이능화는 경허가 살인을 했다는 소문만을 듣고
"음행과 살인을 범하는 일조차 꺼리지 않았다."라고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허가 이미 살인 누명을 벗었다는 것을 알고 난
사람이라면 "음행과 살인을 범하는 일조차 꺼리지 않았다." 라고 적지는 못하리라. 경허가 살인을 했다고 적은 것은 이능화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그대로 적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경허를 비판하기 위한 또 하나의 자료는 1938년에 발표된 김태흡(김대은스님)의 '人間 鏡虛'이다. 김태흡은 "경허대사처럼 부처님
대접을 받아본 사람도 없고, 경허대사처럼 악마라는 혹평과 마종이라는 비방을 들은 이도 없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와 같은 기록은 1918년 이능화가 마설이라고 표현한 것을 20년 뒤에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김태흡의 '이능화 따라하기'가 2012년 윤창화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암은 스승 경허에 대하여 "후대의 학인들이 화상의 법과 교화를 배우는 것은 옳으라, 화상의 행리를 배우는 것은 옳지 못하다. 사람들이 믿을
수는 있으나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人信而不解也") 라고 적고 있는데 윤창화는 "사람들이 믿을 수는 있으나(人信而)" 를 빼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不解也")라고만 해석하여 마치 한암이 경허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한암이 이렇게 말한 것은 경허의 행동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라, 경허의 행동이 어던 마음자리에서나온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후학들이 드러난
행위만을 따라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경허의 삼수갑산행을 논자는 "경허가 악마 마종이라는 원색적인 비난을 듣고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기 위하여 삼수갑산으로 도피했다"고 보고 있다.
그 이유로 그는 "경허가 평소 그가 깊은 허무, 고독, 늙음, 무상 등에 젖어 있었고, 남한이 아닌 서북단의 오지인 갑산을 택했고, 이름을 박난주로 바꾸었고
유생 차림으로 입적했다."는 것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그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다"라는 것일뿐,
타당한 이유와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 그가 제시한 경허의 삼수갑산행에 대한 모든 이유는 기존의 경허의 행위를 심우도의 마지막인 입전수수(入廛垂手),
異類中行으로 보았던 이유이기 때문이다.
논자는 경허의 주색과 관련된 일화는 매우 많지만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위이며 과장인지 알 수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경허는
깨닫지 못했고, 경허는 파계자이며, 경허는 도피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경허가 선은 다시 일으켰지만 불교는 깊은 병에 들게 했다고
말하고 있다. 정말 그의 말처럼 경허에 의해서 불교가 병들었을까?
또 이능화의 말처럼 세상 납자들이 음주식육과 행음행도하는 것이 모두 경허로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학자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자유를 마땅히인정한다고 해도 경허를 모든 불교의 폐단의 원흉으로 지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아울러 나는
'경허가 만공과 함께 길을 가다가 물동이를 이고 가는 아낙네의 입을 맞춘 것', 그리고 '해인사에서 문둥병에 걸린 여인과 여러 날 동숙한 것' 등을
파계라고말하고 경허를 파계자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경허의 존재가 만공이나 한암과 같은 고승이 없었다면 경허는 진작 폄하되었을 것이라고 보지도
않는다. 내가 아는 경허는 천하에 감출 것 없는 빈 거울이다. 경허는 누구에 의해서 훌륭해지고 누구에 의해서 낮아지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어머니 앞에서 발가벗은 모습으로 법을 보이고, 점안식 법상에서 술과 돼지고기를 바랑에서 꺼내 삶아 오게 한 것'을 보고 망측하다거나 해괴한 짓거리로만
보는 사람이라면 그는 영원히 경허를 볼 수 없으리라.
올해(이 글이 2019년 6월 14일에 올린 것으로 보아) 재간된 『경허, 술에 취해 꽃밭에 누운 선승』(민족사)에서 저자 '일지'는 경허를 역사적인 시각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경허는 한국선의 도화선에 불을 당기고 영원한 형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였다. 그리고 경허는 실종자이기도 하다. 경허의 실종과 不歸는 망국의 조선, 식민지 대한제국의 공간과 시간을 벗어나지 못하는, 너무도 조선적인 비극이 응축되어 있다."
일지의 안목처럼 경허를 말할 때 우리는 식민지 대한제국을 살아야 했던 시대적 상황과 스승 없이 홀로 깨달은 자가 걸어가야만 했던 고단한 길, 즉
끊임없이 치열하게 최후까지 자신을 밀고 간 사나이, 죽는 그 순간까지 스스로를 점검했던 사나이를 보아야 한다.
만공은 스승 경허의 입적소식을 듣고 나서 아래와 같은 시 한 편을 지어 바쳤다.
善惡過虎佛 무서움과 자상하심이 호랑이와 부처보다 더한 분,
示鏡虛禪師 그 분이 바로 경허선사이시다
遷化向甚麽(잘마)處去 천화하시어 어디로 가셨나 싶었더니
酒醉花面臥 술에 취해 꽃 속에 누워계시네
위와 같은 만공의 고백을 해석함에 있어서 "선은 깨달음의 세계요, 악은 주색 등 막행막식의 뜻이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경허를 보지 못한 것인 동시에 만공의 마음을 저버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악이란 주색의 막행막식이 아닌 삿됨을 쳐내는 파사현정의 사나운 회초리이다.
그 회초리는 분별과 망념에 떨어진 중생심을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 주는 자비의 다른 얼굴이다.
지나온 100년 동안, 경허의 일은 세간에 회자되며 승속을 넘어서서 경계를 바라보는 한계와 소화시킬 수 있는 역량에 따라 천차만별의 호불호를 넘어왔다.
경허가 깨달음에 안주함을 버리고 非道의 보살행에 들어서 진흙탕에 빠지고 얼굴에 진흙을 바름으로서 경허는 다른 어떤 선사보다도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우뚝서게 되었다. 자기를 더럽혀서 더러운 때를 닦아주는 걸레처럼.
스스로 걸레가 되어 동사섭하는 스승, 세간에 물들까봐 겁내지도 않고 물들지 않는 것을 능사로 여기지도 않는 자!
그가 경허다.
[은평구 갈현동의 수국사]
일지(一指, 高在旭) 1957년 출생. 1974년 출가하여 백양사 서옹스님을 은사로 모심. 1980년 해인사강원(제21회) 졸업.1982년 해인율원을 수료. 봉암사,망월사,오대산 상원사 선원에서 수선안거. 1988년 논문 <<현대중공의 불교인식>>으로 제1회 해인학술상을 수상. 사단법인 법사원 불교대학 교수. 도서출판 민족사 주간. 1997년 불교경학연구소 설립. 2002년 8월 22일 수국사에서 별세. 46세. 직관적문체. 불교인문주의.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 <<멀어져도 큰산으로 남는 스님>> 등 저서 다수.
첫댓글
경허 첫 장에서 볼 수 있는 겨울 참나무
그 아래에 혹 이어폰베이스를 놔뒀을까? 하여 그저께 가봤으나...,
결국 잃어버린 것을 인정.
어제 사위가 삼성이어폰 베이직을 2만오천원에
당근에서 구입하여, (부평구청까지가서) 주었다.
고맙다, 이서방.
용돈이라도 주려고한다.
아들을 빼앗기고 살고 있을 사돈에게
미안함 같은 거 조금 느꼈다.
2022.12.29 목요일
집자하는데 10일 소요되었다.
지난 20일부터 시작하여 집자하다가 중간에
책을 반납하였고 다시 빌려서 오늘 집자 終.
끝났는데 왜 뭔가 허전한지 모르겠다. 그토록 끝내고 싶었었는데...
경허선사에 대하여 엄청 몰두하고 천착해온 열흘이었다.
저자 '일지'의 감성에 공감하며, 저자의 경허선사에 대한 존숭이
오롯이 느껴지는 『경허』 였다.
그러한 저자의 너무나 이른 별리에 마음이 짠하다.
경허는 왜 한사코 서울 사대문 안에 들어기지 않으려고 했을까??
그것도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다.
경허의 함경도. 삼수갑산의 소멸을 나는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평범한 절에서, 너무나 평범하게 죽어가는 모습이라니...
경허선사가 우리에게 오셨다가 가셨다는 그 사실
너무나 감사하고 고맙고 산하가 자랑스럽다.
안변 석왕사, 강계 인풍루도 버킷리스트에 넣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