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조선시대(1392~1910) 왕실과 관련되는 무덤은 ‘능(陵)’과 ‘원(園)’으로 구분된다. 왕릉으로 불리는 능(陵)은 ‘왕과 왕비,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며,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왕릉과 원은 강원도 영월의 장릉, 경기도 여주의 영릉과 녕릉 3기를 제외하고는 당시의 도읍지인 한양에서 40km 이내에 입지하고 있으며, 왕릉이 40기, 원이 13기, 총 53기가 있다.조선시대의 왕릉은 조선시대의 국가통치 이념인 유교와 그 예법에 근거하여 시대에 따라 다양한 공간의 크기, 문인과 무인 공간의 구분, 석물의 배치, 기타 시설물의 배치 등이 특색을 띠고 있다. 특히 왕릉의 석물 중 문인석, 무인석의 규모와 조각양식 등은 예술성을 각각 달리하며 시대별로 변하는 사상과 정치사를 반영하고 있어서 역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뛰어난 문화유산에 속한다.조선시대의 왕릉은 하나의 우주세계를 반영하도록 조영되었다. 능역의 공간은 속세의 공간인 진입공간(재실, 연못, 금천교), 제향공간(홍살문, 정자각, 수복방), 그리고 성역공간(비각, 능침공간)의 3단계로 구분되어 조성되었는데, 이는 사후의 세계관을 강조하는 것이다.
현재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시행하고 있는 산릉제례는 조선왕조 60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왔는데, 이는 조선시대의 대표적 사상인 유교의 충과 효를 상징하는 예제의 집결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조선왕조가 멸망한 후 오늘날까지 왕실 후손들에 의해 계속되고 있는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유산이다.
※조선왕릉 이란
조선 왕릉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왕릉 가운데 가장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고유의 유적이다. 왕릉 개개의 완전성은 물론이고 한 시대의 왕조를 이끌었던 역대 왕과 왕비에 대한 왕릉이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큰 가치가 있다.
긴 역사를 가진 왕조
1392년 고려 왕조가 막을 내리고 탄생한 조선 왕조는 이후 1910년까지 무려 519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이어갔다. 이처럼 하나의 왕조가 5백 년 이상 지속된 것은 매우 보기 드문 유례이다. 이러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 왕조에는 27대 왕과 왕비 및 추존왕과 왕비가 있는데, 이 왕족의 무덤을 조선 왕릉이라 한다.
능, 원, 묘의 구분
왕족의 무덤은 왕실의 위계에 따라 능, 원, 묘로 분류된다. 능(陵)은 추존왕, 추존왕비를 포함한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 종실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임금의 생가 어버이)의 무덤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묘(墓)는 나머지 왕족, 즉 왕의 정궁의 아들, 딸인 대군과 공주, 왕의 서자, 서녀인 군과 옹주, 왕의 첩인 후궁, 귀인 등의 분을 일컫는다. 광해군과 연산군 같이 폐위된 왕들의 무덤은 묘라고 부른다. 현재 온전하게 남아있는 서울 근교의 왕릉은 40기, 원은 13기이다.
터 잡기의 예술
조선 왕릉의 터를 잡을 때에는 풍수상의 길지를 택하기 위해 신중을 다했다. 풍수에 밝은 지관이 몇 군데 후보지를 골라서 최종적으로는 임금이 가장 좋은 조건의 터를 선택하도록 하는 것이 관례였다. 현재 많은 왕릉이 자리 잡은 도성 안팎의 장소들은 각 시대 여건에서 판단한 가장 이상적인 장소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왕릉을 조영할 때에는 가급적 본래의 지형 조건을 훼손하지 않고 지형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최소한의 인공적인 시설을 설치하려는 자세를 갖추었다.
조선 왕릉의 조영법칙
조선시대 왕릉은 시간이 흐르면서 일정한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그 형태는 능에서 정기적으로 치르는 각종 제례 절차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한 적절한 모습으로 이루어졌다. 왕릉은 다른 주변의 시설로부터 격리시켜 신성함을 유지하기 위해 두 겹 정도의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자리 잡았으며, 능 근처에는 제례를 준비하는 재실을 마련하였다. 재실을 지나 숲길을 따라가면 물길을 가로지르는 돌다리를 만나고, 능역을 상징하는 홍살문을 통과하여 능역의 중심부로 접어들게 된다. 봉분 앞에는 다양한 석물과 문, 무석인 등의 기본적인 구성이 갖춰진다. 조선 왕릉은 이러한 기본적인 구성을 유지하면서 지형조건, 시대적 배경 등에 따라 조금씩 변형되어 왔다. 조영 당시부터 계획적으로 조성되고 엄격하게 관리된 왕릉 내부와 주변의 녹지와 산림은 당시에도 주요한 생태계로 작용하여 왔으며, 특히 도시화가 고도로 진행되고 있는 현대 한국의 대도시 서울 주변 지역의 생태적 안정성과 종 다양성을 보장하는 주요한 생태계로서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조선시대의 능원은 600여년이나 되는 오랜 기간 동안 통치한 왕조의 능원제도의 특징을 갖고 있으며, 시대적 흐름에 따른 통치철학과 정치상황을 바탕으로 능원공간 조영 형식의 변화, 관리공간 영역의 변화, 조형물 특성의 변화 등을 잘 반영하고 있는 독특한 문화유산이다.
조선 왕릉의 가치
조선 왕릉은 유적지로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 가치를 수반한다. 왕실의 장례와 제례는 엄숙하고도 완벽한 예법에 따라 행해졌으며, 이 예법의 절차와 의미, 이에 포함되는 다양한 의물들은 각기 당시의 사상과 문화를 고찰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이야기를 걸어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왕릉 조영 절차를 포함한 모든 의례 절차는 상세하게 기록되어 후대에 전해지고 있는데 이 기록물들은 자체만으로도 큰 문화적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왕의 삶과 죽음, 장례 절차, 왕릉의 조영을 살펴보면서 조선시대 왕실 문화와 그들의 정신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조선시대(1392~1910) 왕실과 관련되는 무덤은 ‘능(陵)’과 ‘원(園)’으로 구분된다. 왕릉으로 불리는 능(陵)은 ‘왕과 왕비,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며,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왕릉과 원은 강원도 영월의 장릉, 경기도 여주의 영릉과 녕릉 3기를 제외하고는 당시의 도읍지인 한양에서 40km 이내에 입지하고 있으며, 왕릉이 40기, 원이 13기, 총 53기가 있다.
조선시대의 왕릉은 조선시대의 국가통치 이념인 유교와 그 예법에 근거하여 시대에 따라 다양한 공간의 크기, 문인과 무인 공간의 구분, 석물의 배치, 기타 시설물의 배치 등이 특색을 띠고 있다. 특히 왕릉의 석물 중 문인석, 무인석의 규모와 조각양식 등은 예술성을 각각 달리하며 시대별로 변하는 사상과 정치사를 반영하고 있어서 역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뛰어난 문화유산에 속한다.
조선시대의 왕릉은 하나의 우주세계를 반영하도록 조영되었다. 능역의 공간은 속세의 공간인 진입공간(재실, 연못, 금천교), 제향공간(홍살문, 정자각, 수복방), 그리고 성역공간(비각, 능침공간)의 3단계로 구분되어 조성되었는데, 이는 사후의 세계관을 강조하는 것이다.
조영 당시부터 계획적으로 조성되고 엄격하게 관리된 왕릉 내부와 주변의 녹지와 산림은 당시에도 주요한 생태계로 작용하여 왔으며, 특히 도시화가 고도로 진행되고 있는 현대 한국의 대도시 서울 주변 지역의 생태적 안정성과 종 다양성을 보장하는 주요한 생태계로서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능원은 600여년이나 되는 오랜 기간 동안 통치한 왕조의 능원제도의 특징을 갖고 있으며, 시대적 흐름에 따른 통치철학과 정치상황을 바탕으로 능원공간 조영 형식의 변화, 관리공간 영역의 변화, 조형물 특성의 변화 등을 잘 반영하고 있는 독특한 문화유산이다.
현재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시행하고 있는 산릉제례는 조선왕조 60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왔는데, 이는 조선시대의 대표적 사상인 유교의 충과 효를 상징하는 예제의 집결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조선왕조가 멸망한 후 오늘날까지 왕실 후손들에 의해 계속되고 있는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유산이다.
조선왕조 능역은 신성함을 유지하기 위하여 주변시설로부터 격리하고, 그 범위도 차츰 확대되었고, 처음에는
봉분을 중심으로 사방 100보(步)를 능역으로 하였다가 태종 때 161보로, 현종 때 200보로 늘어났고.
능역의 구조는 각종 제례 절차를 수행하는 데 적합하도록 일정한 형식을 갖추어 '진입공간-제례공간-전이공간-능침공간'을 기본 구조로 하며,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배산임수와 좌청룡 우백호의 풍수를 따르고, 뒤의 주
산)과 앞의 조산 등 두 겹으로 둘러싼 산을 경계로 삼아 그 안의 모든 마을과 건축물 그리고 개인 묘역을 다른 곳
으로 이전하여 넓은 녹지를 조성하였습니다. 이 가운데 북한 지역에 있는 태조의 왕비 신의왕후의 제릉, 정종과 정안왕후의 후릉, 폐위된 연산군묘와 광해군묘 등 4기를 제외한 40기가 2009년 6월 스페인의 세비야에서 열린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조성왕릉의 가치(위대한점 뛰어난첨 가치에 다 포함되니 한번에 설명)
519년이라는 오랜 기간을 한 왕조가 지속된 사례도 드문데다가 역대 왕과 왕비의 무덤이 모두 남아 있는 경우도 유례가 드물며,유교와 풍수 등 한국인의 세계관이 압축된 장묘문화의 공간으로서 왕실의 장례 및 제례 등을 조명할 수 있어 문화재로서 가치가 풍부하여 역사적 가치로 인정 받고 있습니다.
이런 보편적 가치와 함께 조선왕릉 만이 갖는 고유한 가치 또한 지나칠 수 없는데. 무엇보다 조선왕릉은 그 전체 형태나 석물의 예술적 표현에서 고유한 가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중국이나 일본의 능묘와 견주어 알 수 있듯이 조선왕릉의 봉분 축조방식이나 원장설치, 각종 석물배치는 주변
나라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특히 문무인석의 조형이나 호석과 난간석은 조선왕조
조형예술에서 달성한 독특한 경지를 잘 보여줍니다.
또한 홍살문에서 향로를 따라 이어지는 참도와 참도 끝에 놓인 정자각의 단순하면서 절제된 건축형태는 조선 왕릉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엄숙하고 독특한 조형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술적 가치외에 조선 왕릉과 관련한 풍부한 기록물 역시 주목할 가치입니다.
능원을 조성하면서 작성한 산릉도감의궤는 석물의 배열이나 정자각의 조성과정은 물론 산릉조성을 위해서 흙을
지어 나르는데 참여한 단순노역자의 이름까지 작성한 모든 문서가 남아있으며, 산릉도감의궤는 왕릉이 만들어졌
을 때의 모든 내용을 기록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설령 왕릉 중 일부가 불의의 사고로 훼손되거나 본래 모습을 상실했다고 해도 이들 의궤를 통해서 원래 모습으로 복구하는데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산릉도감의궤라는 뛰어난 기록물이 있음으로써 조선 왕릉은 그 물리적 진정성을 견지할 수 있으며 이것이 조선 왕릉이 갖는 고유한 가치의 또 다른 면이라고 생각되는 것 입니다.
끝으로 언급해야 할 것은 6백년을 이어온 조선 왕릉의 제례입니다. 1910년 조선왕조가 막을 내렸을 때 왕릉의 제례 역시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운 여건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전주 이씨 종약원이 어려운 소임을 맡아서 제례를 계속해 나갔으며 그것은 21세기에 접어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죠,전주 이씨 종약원은 왕릉 제례 외에도 종묘제례도 주관하면서 조선왕조의 무형적인 문화전통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조선왕릉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이유
조선왕릉은 유네스코 세계유산협약에서 정하고 있는 10가지의 보편적인 가치 기준 가운데 아래의 세가지 기준을 충족하였습니다.
첫째, 문화적 전통 또는 살아 있거나 소멸된 문명에 관한 독보적이고 특출한 증거가 되어야 한다. 와 관련하여 조선왕조 특유의 세계관, 종교관 및 자연관에 의해 타 유교 문화권 왕릉들과 다른 자연친화적인 독특한 장묘 문화를 보여준다.
둘째, 인류 역사의 중요한 단계를 보여주는 건조물의 유형, 건축적 또는 기술적 총체 또는 경관의 탁월한 사례이어야 한다. 와 관련하여 5백년 이상 지속하여 만들어진 조선왕릉은 당대의 시대적 사상과 정치사, 예술관이 압축적으로 나타나 있으며 공간구성과 건축물과 석물 등이 가지고 있는 예술적 독창성이 뛰어나다.
셋째, 탁월한 보편적 중요성을 보유한 사건 또는 살아 있는 전통, 사상, 신념, 예술적/문화적 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계되어야 한다. 와 관련하여 국가 제례가 정기적으로 이어지고 있고, 왕의 신위를 모시고 제례를 지내기 위한 공간인 종묘가 설립되어 조상숭배의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다.
왕실의 장례 절차는 일반 장례 절차와는 다르게 매우 복잡하고 까다롭게 진행된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르면 왕이 승하한 후 3년에 걸쳐 총 59 단계의 절차를 밟아야 긴 국상의 예가 끝을 맺는다. 이 중 왕이 승하한 순간에서 시작하여 능에 왕의 관인 재궁을 내리는 과정까지 36가지 절차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국휼고명이란 왕이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하여 왕위계승자를 정하는 절차이다. 왕의 병환이 위급하게 되면, 내시가 왕을 부축하여 사정전으로 모신다. 왕이 신료들을 부른 자리에서 유언을 하면, 전위유교를 작성한다.
숨을 확인하는 절차로, 내시가 햇솜을 왕의 입과 코 위에 얹어 솜이 움직이는지를 살핀 후, 숨이 끊어지면 모두 곡(哭)을 한다.
왕의 영혼을 부르는 의식이다. 내시가 임금이 입던 옷을 메고, 왕이 숨을 거둔 곳의 지붕 위로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고 돌아오란 의미로 세 번 ‘상위복’이라 외친다. 이를 마치고 옷을 앞으로 던지면 아래서 이를 받아 대행왕의 위에 덮는다.
의복을 갈아입고 금식을 하는 절차이다. 상제들에 대한 근신의 내용을 나타내는 것으로 왕의 종친 및 신하가 관과 상의를 벗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소복을 입는다. 왕세자, 대군 이하의 왕자는 3일 동안 금식을 한다.
일을 분담하는 절차로, 병조에서는 여러 곳을 호위하고, 예조는 상례에 관련된 일을 의정부에 보고하고, 이조에서는 빈전도감, 국장도감, 산릉도감을 설치하여 맡은 일을 하게 한다.
시신의 머리와 몸을 깨끗이 씻기고 새 의복으로 갈아입히는 절차이다. 병풍을 치고, 뜨물로써 머리를 씻기고 빗질해서 수건으로 모발을 싸 묶는다. 수염을 가지런히 빗기고, 손발톱을 깎아 작은 주머니에 담은 후, 방건으로 얼굴을 덮고, 다시 이불을 덮는다.
시신에 수의를 입히는 절차이다. 곤룡포, 첩리, 한삼, 바지, 버선 등을 여러 벌 준비하여 차례로 입힌다.
자리를 만들어 곡을 하는 것으로, 왕세자, 대군 이하의 왕자, 왕비, 왕세자빈, 내외명부 등이 자리를 정하고 차례로 자리에 나아가 곡을 한다.
문무백관이 곡을 하는 절차로, 조정에서 종친과 문무백관이 함께 절을 하고 곡을 한다.
함은 시신의 입에 쌀과 구슬을 채우는 절차로 망자가 저승까지 갈 동안에 먹을 식량을 준다는 의미이다. 버드나무 수저로 쌀을 떠 입에 채우고 진주를 물린다.
시신 아래 얼음을 넣는 절차이다. 국장(國葬)은 초상(初喪) 이후 몇 달이 소요되기 때문에 이 동안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이다.
신위를 만드는 절차이다. 대행왕의 평상 남쪽에 혼백을 만들어 영좌를 꾸며 모시고 명정을 세운다. 시신을 대신하여 생전에 입었던 옷들인 유의를 함에 담고, 영혼을 대신하여 혼백을 놓는다.
죽은 사람의 품계, 관직, 성씨를 기록한 기이다. 9척 길이의 붉은 비단에 ‘대행왕재궁(大行王梓宮)’이라고 금박으로 쓴다. 깃대는 대나무를 사용하고 머리에는 이무기의 머리를 새긴다.
고사묘는 종묘에 왕의 죽음을 고하는 절차로 제 3일에 사직, 영녕전, 종묘에 대신을 보내어 상례와 같이 고한다.
시신을 여러 겹의 옷과 천으로 감싸는 절차이다. 이불로 감싸되, 묶어 매지는 않는다. 4장의 교포(絞布), 19벌의 염의(殮衣)로 감싸는데, 옷섶의 오른쪽을 위로 가게 여미고 고름은 매지 않는다.
치벽은 관을 만드는 절차로, 공조에서 만든다. 왕이 즉위한 해에 소나무로 만들어 옻칠을 1년에 한 번씩 해준다. 벽 안에는 붉은 비단으로 사방을 붙이고 녹색 비단으로 사각을 붙인다.
5일 째에 수의로 시신을 감싸 묶고 관에 입관하는 절차이다. 이 때 입히는 수의는 90벌에 달한다. 왕세자, 대군, 종친, 문무관이 엎드려 곡을 한 후, 소렴과 같이 염하고 천으로 시신을 묶는다.
성빈은 빈소를 차리는 절차이다. 입관이 끝난 후 빈소를 새로 짓고, 벽 안에 주작, 백호, 현무를 그려 각각의 방향에 붙인다.
대군 이하 왕비와 왕자, 왕세자빈, 내명부의 임시 거처할 장소를 마련하는 절차이다.
대렴한 다음날 상복을 갖춰 입는 절차로, 왕세자, 대군 이하의 왕자, 왕비, 왕세자빈, 내외명부, 종친과 백관 등 모두가 최복이라 불리는 상복을 입는다.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의식이다. 성복을 마치면 왕위 계승의 의식이 행해지는데, 이 때 왕세자는 상복을 벗고 면복을 입고 빈전 앞에서 옥새를 전해 받고 정전으로 나아간다.
왕세자가 왕위에 즉위한 사실을 공포하는 의식이다. 대소 신료들이 늘어선 정전에서 선교관이 전하의 교서를 선포한다. 의식이 끝나면 승정원에서는 교서를 받들어 각도에 나눠 보낸다.
왕위가 계승되었음을 국제적으로 인준받기 위한 절차로 승문원에서 부고를 알리고, 시호를 청하는 표문과 전문을 올리고, 의정부에서 왕위 승습을 청하여 사위를 신정하는 의식을 갖는다.
아침 저녁으로 울면서 간단한 제사를 지내는 절차와 상식을 올리는 절차이다. 날마다 날이 밝기 전에 왕의 자리를 빈전 지게문 밖의 동쪽에 서향하여 설치하고, 왕이 곡을 하면 대군 이하의 왕자도 부복하고 곡을 한다.
초하루날과 보름날에 간단한 제사를 지내는 절차로 종친과 백관, 왕자, 왕세자, 전하 순으로 부복하고 곡을 한다.
의정부에서 모든 관리들을 거느리고 제사를 지내는 절차로 문무백관, 감찰, 전의, 통찬, 봉례랑 등이 제사를 지낸다.
장사를 지내는 절차로, 5개월 후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능을 둘 곳을 선정하고, 능의 규모, 관리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한다.
종묘에 시호를 청하는 의식 절차로 의정부 육조, 집현전, 춘추관에서 2품 이상의 관원들이 모여 함께 시호를 의논하고, 시책과 시보를 만든다.
시보책봉문과 인장을 빈전에 올리는 의식절차로 영의정 이하의 관원은 평상복 차림으로, 종친과 문무백관들은 상복 차림으로 진행한다.
발인 전 출관을 위해 빈전을 여는 의식 절차로 왕과 대군 이하 왕자가 곡을 하며 슬퍼하는 의식이다. 이 후 발인 때까지는 곡소리가 끊이지 않게 한다.
발인하기 전날 저녁에 예찬을 올리는 의식이다. 왕이 상주가 되어 술잔을 올린다.
발인 직전 문 앞에서 간단한 제사를 지내는 절차로, 혼백, 시책, 시보 등을 싫을 가마를 그 앞에 대령한다.
궁을 떠나 정해진 능지로 가는 행렬이다. 여러 호위군관과 의장이 등장하며 다양한 부장품들과 시책, 시보, 옥인 등이 각각의 가마에 담겨 행렬을 구성한다.
발인의는 빈전에서 왕의 관인 재궁이 능지를 향하여 움직이는 의식이다.
능지로 가는 중간에 잠시 혼백이 든 가마와 재궁이 든 가마인 대여를 멈추도록 한 후 길에서 제사를 지내는 절차이다.
재궁을 능으로 옮길 때 간단히 제사를 지내는 절차이다. 왕의 관인 재궁과 함께 껴묻는 물건인 부장품으로는 명기, 의복, 그릇, 음식물, 무기 등이 있다.
왕이 승하하면 온 궁궐은 나라님을 잃은 슬픔에 잠기지만, 그와 동시에 왕의 장례인 국장(國葬)을 치르기 위해 일사분란하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왕실을 중심으로 한 대소 신료들은 우선 빈전도감, 국장도감, 산릉도감이라고 하는 임시 기관을 설치하고, 각 기관에 관리들을 임명하여 업무를 분담하도록 하였다. 국장도감은 국장 전반을 관리, 감독하는 일을 맡아 장례에 필요한 의물 설비와 제도 운영을 진행하였다. 빈전도감은 왕의 옥체를 모신 빈전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을 총괄하였고, 산릉도감은 산릉을 조성하는 일을 맡은 관서이다.
각 기관에서는 국장을 치를 때마다 담당 업무 내용과 국장 준비 과정을 자세히 기술하여 의궤를 편찬하였다. 그 기록은 매우 세밀하고 정교하여, 조선시대 국장의 진행상황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좋은 자료임과 동시에 의궤 자체로도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가치를 지닌다.
‘빈전’이란 빈소의 높임말로서 국상 때 상여가 나갈 때까지 왕의 옥체를 모시는 곳이다. 따라서 빈전도감은 승하한 임금의 옥체에 관한 업무를 담당한다. 옥체를 여러 종류의 옷가지로 감싸는 과정인 소렴과 대렴 절차에서 필요한 수의, 홑이불 등 각종 물품을 준비하고, 빈전을 차리는 절차를 총괄한다. 왕세자, 대군 이하의 왕자, 왕비, 왕세자빈, 내외명부, 종친과 백관에 대한 상복 준비 역시 빈전도감의 역할이다. 제조(提調) 3명, 도청(都廳) 1명, 낭청(郎廳) 6명 등을 두었는데, 제조 3명 중 1명은 예조판서가 맡고, 낭청 6명 중에 1명은 예조 낭청으로 임명하여 충당하였다.
국장도감은 국장 전반을 관리 감독하는 일을 맡았다. 일반적으로 왕이 승하한 당일에 조직하고, 장례 뒤 우제가 끝날 때까지 약 5개월 동안 존속하며 국장 진행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과 문서들을 총괄 제작하였다. 국장도감 아래에는 일방, 이방, 삼방을 설치하였는데, 일방은 왕의 옥체와 부장품 등 다양한 물품을 운반하는 가마와 그에 따른 부속품, 제구류를 주로 제작하였다. 이방은 길흉의장, 왕의 의복과 장신구, 명기 등을 제작하였다. 삼방은 시책, 시보, 애책 등과 만장, 제기를 제작하였다. 총호사(摠護使) 1명, 제조 3명, 도청 2명, 낭청 6명, 감조관 6명 내외 등을 임명하여 업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제조 3명은 호조판서, 예조판서, 선공감제조로 구성하였으며, 낭청은 예조낭청, 공조낭청, 선공감, 제용감의 관원으로 임명하여 충당하였다.
산릉도감은 왕의 능을 조성하는 일을 맡은 기관이다. 왕이 승하한 날로부터 보통 5개월 후에 있을 장례 의식 전까지 능의 조영을 마무리해야 했다. 산릉도감이 설치되면 지관(地官)은 능을 조영할 지역을 가린다. 능을 어느 곳에 둘 것인가는 당시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고, 이를 두고 정치적인 대립이 생기기도 하였으며, 풍수지리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훗날 천장을 하는 경우도 있다. 산릉도감의 당상관, 관상감의 영사, 제조, 예조의 당상관 등은 신중하게 능지를 결정하고, 회의를 거쳐 공사일정을 확정하고, 필요한 인력을 산정한 후 공사를 시작한다. 능을 조영하는 과정에는 석물을 제작하는 일에서 시작하여, 흙을 다지고 풀을 뽑는 일, 정자각 등의 건물을 만드는 일 등이 포함되어 많은 인력이 요구되었다. 이 인력은 17세기 초까지 백성들에게 의무를 지워 부역의 형태로 조달하였으나, 이후에는 인력을 모집하여 고용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조선시대의 왕릉은 중국 『주례(周禮)』의 기본질서를 바탕으로 하면서, 한양으로부터의 거리, 그리고 주변 능과의 거리, 방위, 도로와의 관계, 주변 산세 등과의 관계를 신중히 고려하여 결정하였다. 조선 왕릉의 입지는 왕릉으로서의 권위를 드러내면서 자연의 지세를 존중하는 자연조화적인 조영술을 따랐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능역은 한양성 서대문 밖 100리 안에 두어야 한다”는 입지조건이 명시되어 있다. 실제로 조선의 왕릉은 북한에 위치한 후릉과 여주의 영녕릉, 영월의 장릉을 제외하면 모두 서울 사대문으로부터 100리, 즉 약 40km 이내에 위치하고 있다. 궁에서 떠난 참배의 행렬이 어렵지 않게 닿을 수 있는 곳이면서 도성과 너무 가깝지도 않은, 도성을 중심으로 반경 10리(약 4km) 밖, 100리(약 40km) 이내가 조선 왕릉 입지의 첫 번째 기준이었다.
조선의 왕릉은 풍수지리적 요소를 고려하여 능의 위치를 결정하였다. 바람, 물, 불, 나무 및 흙에 의해 야기될 수 있는 다섯 가지의 화가 생길 염려가 없어야 함은 물론이고, 산을 등지고, 앞에 물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지형을 갖추어야 한다. 또한 뒤로 주산이 펼쳐지는 가운데 산허리에 봉분이 위치해야 했다. 그리고 청룡과 백호라고 일컬어지는 산맥이 좌우를 감싸며, 봉분 맞은편에 마주하는 산맥이 있어야 훌륭한 자리라고 여겼다. 정해진 입지의 어느 방향에 봉분이 위치할 것인가, 또 어느 방향을 바라보도록 조성할 것인지를 결정할 때에도 풍수적인 형국이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하여 능의 입지를 선택하는데 있어서는 수개월 내지 수년의 세월이 걸리기도 하였다. 또한 이미 조영한 왕릉을 풍수상의 길지가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옮기는 절차를 행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정치적 변수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1515년(중종 10)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가 승하하여 희릉을 조성하였는데, 22년이 지난 1537년(중종 32) 이조판서 김안로가 희릉의 자리가 풍수적 흉지임을 들어 천장을 주장하고 나섰다. 당시 김안로는 왕실의 사돈으로 권력을 남용하고 다니다가 유배를 다녀오게 되었는데, 자신을 유배시킨 자들이 마침 과거 희릉 조영 때의 책임자인 것을 알고, 이를 이용한 것이다. 결국 끈질긴 풍수 논쟁이 계속되다가 희릉을 천장하기로 결정이 났고, 김안로의 계략대로 그를 유배보낸 무리이자 희릉 조영 당시의 책임자들은 대역 죄인이 되어 자손들까지 옥에 갇히는 변고를 당했다. 이러한 풍수와 정치의 결합은 당시 풍수 논리가 얼마나 중요시되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조선시대의 능은 자연의 지세와 규모에 따라 봉분의 형태를 달리하고 있다. 이는 왕릉 또한 자연 환경의 일부로 여기는 풍수사상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조선 왕릉은 단릉, 쌍릉, 합장릉, 동원이강릉, 동원상하릉, 삼연릉 등 다양한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왕과 왕비의 무덤을 단독으로 조성한 것을 단릉이라 하고, 평평하게 조성한 언덕에 하나의 곡장을 둘러 왕과 왕비의 봉분을 좌상우하의 원칙에 의해 쌍분으로 만든 것을 쌍릉이라 한다. 왕과 왕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것은 합장릉이라 하며, 하나의 정자각 뒤로 다른 줄기의 언덕에 별도의 봉분과 상설을 배치한 형태는 동원이강릉이라 한다. 왕과 왕비의 능이 같은 언덕에 위아래로, 즉 왕상하비(王上下妃)의 형태로 조영된 것을 동원상하릉이라 한다. 한 언덕에 왕과 왕비 그리고 계비의 봉분을 나란히 배치하고 곡장을 두른 형태를 삼연릉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왕과 왕비 그리고 계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것은 동봉삼실이라 한다.
조선시대 능역의 공간 구성은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공간인 정자각을 중심으로 3단계의 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재실 등이 있는 진입 공간은 산 자의 공간이고,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과 수복방, 수라간이 배치된 곳은 왕의 혼백과 참배자가 만나는 성과 속의 공간이다. 그리고 언덕 위 봉분을 중심으로 곡장과 석물이 조성된 공간은 곧 성역의 공간이다.
진입 공간은 재실, 지당, 금천교, 홍살문으로 이어지는 공간이다.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재실을 지나 명당수가 흐르는 개천을 따라 둥글게 진입하면 작은 연못이 나오는데, 이는 당시 능참봉 및 능관리인들이 그들의 농토에 물을 대고 휴식할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이었다. 조금 더 진입하면 금천교라는 돌로 만든 다리가 나타나는데, 이는 금천교 건너 왕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을 속세의 영역과 구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금천교를 지나면 능원이 신성한 구역임을 표시하는 커다란 문이 있는데, 이 문을 홍살문이라고 한다.
홍살문 앞에 서면, 얇은 돌을 깔아 만든 긴 돌길이 정면의 정자각까지 이어진다. 이 길을 참도라고 한다. 참도는 왕의 혼령이 이용하는 중앙의 큰 길과 살아있는 왕과 참배자가 사용하는 그보다 낮고 좁은 길, 즉 신도와 어도 2단으로 만들어진다. 참도가 끝나는 길에는 제사를 모시는 공간인 정(丁)자각이 있다.
정자각의 양 옆으로는 재실에서 준비한 제례음식을 데우는 등의 제례 준비 공간인 수라방과 능침을 지키는 사람의 공간인 수복방이 설치되어 있다. 제례 의식을 마치는 정자각의 서북쪽으로는 지방을 불태우는 소전대와 제물을 태워 묻는 예감이 배치되어 있다. 한편 정자각의 열린 후문으로 나오면, 왕의 혼령이 제향 후 봉분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앞쪽에서 이어진 신도가 짧게나마 계속 된다. 이밖에 원래의 산신에게 제사지내는 산신석, 수장된 왕의 업적을 나타내는 비각이 자리 잡고 있다.
능침 공간은 왕릉의 핵심으로 봉분의 좌우, 뒷면 3면에 곡담이 둘러져 있으며, 그 주변에는 소나무가 둘러싸여 있어 위엄성을 강조하고 있다. 둥근 봉분은 보통 방위를 나타내는 12면의 병풍석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병풍석에는 십이지의 그림과 글자 등이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는 석양, 석호, 장명등, 망주석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왕릉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일반적으로 중계(中階)라 불리는 한 단 낮은 공간에는 문석인과 석마가 한 쌍 배치되어 있으며, 그 다음 공간인 하계(下階)에는 무석인이 석마와 함께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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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릉제례란 조선 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에 대한 제사 의식의 하나로, 종묘가 아니라 직접 능에 행차하여 치르는 제례를 뜻한다. 『국조오례의』에서는 왕릉에서 지내는 제례로, 사시, 납일, 속절, 삭망에 치르는 정기적인 제례와 임금이 친히 능에 와서 치르는 친제에 대해서 소상히 규정해 놓고 있다. 사시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가리키며 1월, 4월, 7월 10월의 초순을 말한다. 납일은 동지 지난 세 번째 술일로 보통은 연말을 가리키며 속절은 한식, 단오, 중추와 같이 풍속에 따라 지키는 절기를 말한다.
제례일을 맞으면 하루 전날 제례의 모든 준비를 마련하고 제례 당일에는 축문을 적은 글과 향을 피우는 향로, 음식과 술잔 등을 마련하여 향을 피우고 술잔을 올리며 절을 하는 의례가 거행된다.
그 의식은 엄숙하며 절차는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다. 축문을 읽음으로써 돌아가신 분의 위업을 다시 한 번 기리고, 향을 피우고 술잔을 바침으로써 돌아가신 분의 존경을 한껏 표현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정성을 다해서 이루어진다.
조선 왕조의 제례는 위로는 왕가에서부터 일반 사대부 및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몸으로 실천한 의례였다. 무덤에서 치르는 제례는 사람이 그 자신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조상들로부터 물려 받은 삶을 사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의식이다. 그 가운데도 왕릉의 제례는 왕의 존재가 단지 그 자신만의 것이 아니고 먼 조상 임금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산임을 재인식시키는 행위였다.
조선시대에는 새로운 왕이 등극하면 반드시 태조 건원릉 이하 부왕 및 모후의 산릉에 참배하게 되어 있었는데 이를 배릉(拜陵)이라고 하였다. 배릉 의식은 국가적 의례로서 뿐만 아니라 왕이 친히 거행한다는 점에서 의례적 비중이 상당히 높았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 언급하고 있는 행례 전까지의 배릉 절차는 다음과 같다.
향사 4일 전에 예조(禮曹)에서 아뢰어 재계하기를 청하면 전하가 별전에서 이틀 동안 산재(散齋)하고 하루 동안 정전에서 치재(致齋)한다.
모든 향관(享官) 및 근시(近侍)의 관원, 그리고 따라서 올라갈 사람들은 모두 이틀 동안 산재하여 정침에서 자고 하루 동안 능소에서 치재한다.배향관(配享官) 및 여러 위(衛)의 소속만이 각각 본사에서 깨끗이 재계하고 하루를 잔다.
제향 이틀 전에는 모두 목용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하루 전 날이 맑을 무렵 제소(祭所)로 나가는데 한성부로 하여금 다니는 길을 깨끗이 하게 하여 모든 흉한 것이나, 더러운 것을 보이지 않게 하고, 울고 곡하는 소리가 제소에까지 들리는 것을 금지시킨다.
초헌관(初獻官)은 임금이 되고, 아헌관(亞獻官)은 영의정이 된다. 영의정이 연고가 있을 때는 그 다음 관원이 한다.
종헌관(終獻官)은 의정(議定)이 하며 의정이 연고가 있을 때는 그 다음의 관원이 한다. 전사관(典祀官)은 봉상시정(奉常侍正)이 하고 봉상시정이 연고가 있을 때는 봉상시부정(奉常侍副正)이 한다.
능사(陵司)는 능참봉(陵參奉)이 하고, 집례(執禮)는 3품이 하며 대축(大祝)은 4품 이상의 지제교(知製敎)가 한다. 축사(祝史)는 4품이 하고, 재랑(齋郞)은 5품이, 집존(執尊)은 6품이 한다. 찬자(贊者)는 2명으로 통례원(通禮院) 관원이 하고, 알자(謁者)는 6품이 하며, 찬인(贊引)은 참외(參外)가 한다. 찬례(贊禮)는 예조판서가 하고 예조판서가 연고가 있을 때는 예조참판이 한다. 근시(近侍)는 4명으로 승지承旨가 하고, 좌우통례(左右通例)는 찬례이하 응봉관(應奉官)이 한다. 감찰(監察)이 있다.
출발하기 하루 전에 능사는 그 소속 관원을 거느리고 능침의 안팎을 청소하여야 하며, 전설사(典設司)에서는 대차(大次)를 능소 가까운 곳에 남향으로 설치하고, 소차(小次)는 능침 옆 남동쪽에 서향으로 설치한다.
근시의 자리는 대차의 앞에 설치하고, 뒤를 따르는 종친과 문무관의 자리는 그 뒤의 적당한 곳에 설치한다. 그 날에 집례는 전하의 자리를 정자각 동쪽 계단 가까이 서향하여 설치하고, 아헌관과 종헌관의 자리는 동계 아래 남쪽 가까이 서향으로 하며, 북쪽을 상위로 하여 설치한다.
집례자의 자리는 헌관의 뒤 조금 남쪽에 서향하여 설치하되 북쪽을 상위로 하고, 집례의 자리는 계단 및 신도(神道)의 왼쪽에 서향으로 하여 설치하며 찬자·알자·찬인 자리는 남쪽에서 조금 뒤로 물러나 설치한다.
감찰의 자리는 집사의 남동쪽에 서향하여 설치하고, 배향관의 자리는 신도의 동·서쪽에 남쪽으로 가까이 설치하는데, 문관은 동쪽에, 무관은 서쪽에 있게 하여 모두 품등마다 자리를 달리하여 겹줄로써 북향하게 하고 마주 대하는 쪽을 수위로 한다. 종친은 따로 자리를 설치하는데 평상시와 같다.
행사 날 행사하기 전에 능사는 그 소속 관원을 거느리고 능침의 안팎을 청소하고, 전사관과 능사는 그 소속 인원을 거느리고 신좌를 능침 북쪽문 안에 남향하여 설치하고 제문은 신위의 오른쪽에 올려놓으며, 향로와 향합, 촛대는 신위 앞에 설치한다.
다음은 제기를 진설하는데, 붉은 칠을 한 찬탁 위에 제물을 4줄로 놓고 남쪽을 상위로 한다. 첫째 줄에는 중박계(中朴桂)를 4그릇 담아 놓고 둘째 줄에는 홍백산자(紅白散子)를 4그릇 담아놓으며, 셋째 줄에는 다식을 5그릇 담아 놓는다. 넷째 줄에는 색깔이 다른 실과 6그릇을 담아 놓는다.
협탁 위에 제물을 3줄로 놓는데, 첫째 줄에는 각색의 떡이 6그릇이고, 둘째 줄에는 색깔이 다른 떡과 색깔이 없는 소탕 6그릇을 놓으며, 셋째 줄 에는 작 3개를 놓는다.
산뢰 3개에 청주를 담는데 모두 작을 얹어 놓아둔다. 갈포로 만든 보자기는 문 밖 왼쪽에 있는데 북쪽을 향하여 서쪽을 상위로 한다. 작 3개를 광주리에 담아서 존소(尊所)에 놓아둔다.
좌우통례(左右通禮 : 조선시대 의례를 담당하는 통례원에 두었던 정삼품직)의 전도로 판위로 나가 북쪽을 향하여 선다.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홍살문 밖에 머무른다.
좌통례가 ’국궁사배(鞠躬四拜) 여(興) 평신(平身)‘이라고 읊으면 왕은 몸을 굽혀 4번 절한다.
배종백관은 모두 몸을 굽혀 4번 절하고 일어나 몸을 바로 한다.
좌우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능상(陵上)에 올라 봉분과 그 주변을 보살핀다.
마치면 좌우통례는 전도하여 소차로 들어간다. 소차는 정자각의 동남쪽에 서향으로 설치된다.
제례시각이 가까워지면 배종백관은 들어와 위에 나간다.
좌통례가 ’행례하기‘를 소청하면 왕은 소차에서 나와 위로 나간다.
예하기를 의례와 같이 한다.
마치면 다시 소차로 나간다.
배종백관은 홍문 밖으로 나와 위를 달리하여 겹줄로 북쪽을 향하여 선다.
좌통례가 ’국궁사배(鞠躬四拜) 여(興) 평신(平身)‘이라고 읊으면 왕은 몸을 굽혀 4번 절하고 일어나 몸을 바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