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등급재판정서 ‘등급외’ 판정받은 장애인 비관 자살 … 등급제폐지 앞서 재판정 문제 먼저 해결해야 박근혜 정부가 임기 내 장애등급제를 폐지한다고 한 가운데 등급제를 대체할 새로운 서비스 판정체계, 전달체계 등을 수립하는 단계에 들어서 있다. 이러한 새 제도 구축과정에서 문제가 될 것이라면, 아마 새 제도로 바뀌기 전까지 현 제도에서 고착화된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당사자인 장애인들이 긴 과도기를 견뎌내야 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이 가운데 등급제에 따른 시책 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장애등급재판정’이라 볼 수 있겠다. 2010년부터 신규 장애등록자는 물론 장애연금, 활동지원서비스 등을 신청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장애등록한 사람도 영구장애로 판정받지 않는 이상, 특정 장애유형마다 해당 기한에 따라 등급재판정을 받도록 되어 있다. 이는 정부가 더 많은 장애인을 위해 양질의 복지서비스를 제공하고 공정한 등급판정을 하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기존의 의료적인 일률적 판정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던 등급판정기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 장애계의 원성을 사고 있다. 만약 장애정도가 심해진 상태에서 재판정을 받으면 더 높은 등급이 되어 혜택을 보겠지만,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재판정을 받은 뒤 등급변화가 없거나 오히려 등급이 하락 혹은 탈락하는 경우도 많아 판정을 다시 받아야 하는 수고를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기존에 누리던 혜택마저 내놓아야 하는 실정에 처하기도 한다. 최근에 한 간질장애인이 재판정을 통해 ‘등급외’ 판정을 받고 기초생활수급비가 끊길 것을 우려, 비관 자살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기초생활수급이나 장애연금 지급기준에도 개인욕구나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채 주기적으로 재판정을 하고 등급을 조정해 일률적으로 지급하는 방식은 장애등급제의 폐단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 길게는 5년뒤 등급제폐지와 함께 새 제도가 구축된다는 것을 감안할 때, 수많은 장애인들은 등급재심사의 공포를 그대로 떠안은 채 오랜 시간 제도가 바뀌기만을 손 놓고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한국은 ‘도미노식 복지’ … 등급 떨어지면 기초생활수급자격 박탈, 장애연금·활동지원서비스·장애인콜택시 등 신청 못해 보건복지부는 2010년 1월, 개정·시행된 장애등급판정기준안을 발표하면서 새 판정기준이 이전 등급판정기준에 비해 자의적이고 비객관적인 기준을 과학화하고 계량화하여 장애등급판정의 객관성, 신뢰성을 제고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즉 의사의 자의적인 판정을 줄이고 객관성을 담보한 검사기준으로 개정했다는 것인데, 그래도 여전히 100% 의료적 관점의 판정기준이라는 점은 동일하다. 등급에 따라서비스 제공이 달라지는데 의료적 관점만으로 서비스 이용대상자를 결정한다는 것은 매우 기계적인 논리다. 또한, 의료적인 관점만 보더라도 과연 객관적이고 신뢰할만한 기준이라고 볼 수 있을까. 장애등급재판정은 장애인활동지원, 장애인 연금을 받기 위한 서비스 재판정이 있고, 장애유형에 따라 주기적으로 재판정을 받기도 한다. 예를 들면, 간질장애 재판정 주기가 3년에 한 번씩 두 차례 받으라고 정해져 있고, 이 외에도 정신장애 등 질환의 성격을 가진 내과적 장애의 경우는 주기적으로 재판정을 받도록 하고 있다. (*표1 참조)
우리나라 장애인복지서비스는 등급이 기준이 되어 등급 하나가 장애인들을 울고 웃게 만들고 있다. 자칫 한 등급이라도 떨어지면 기초생활수급권이 탈락되기도 하고, 활동지원서비스, 장애연금, 장애수당 등을 받을 수 없게 된다. 마치 맨 앞에 서 있는 기준이 무너지면 와르르 무너지게 되는 ‘도미노’처럼 말이다. 장애연금제도는 일을 하기 어려운 1, 2급 혹은 3급 중복장애인 등 중증장애인의 생활안정을 위하여 매월 일정 금액을 연금으로 지급하는 사회보장제도다. 그런데 만약 연금을 꾸준히 받아오던 중증장애인이 재판정을 통해 3급을 받게 되었다고 치자. 그렇다고 중증이었던, 전혀 일을 하지 않았던 장애인이 생계를 위해 바로 일선에 뛰어 들 수 있을까? 설사 중증장애인이 경증장애로 장애정도가 아주 많이 호전되더라도 오랜 기간 중증의 장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근로능력이나 사회적응력은 비장애인보다 떨어질 수 있고 그로 인해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그러므로 개인의 환경이나 욕구는 파악하지 않은 채 의료적 관점으로만 등급을 매긴 뒤 복지서비스를 제한하는 것에는 큰 오류가 있다. 그런데 정부 관계자들은 재판정으로 등급이 낮아지거나 등급외 판정을 받는 것이 장애가 호전됐다는 의미이므로 박수칠만한 일이 아니냐고 말한다. 이런 반응에 장애당사자들은 입을 모아 ‘속편한 소리’라고 외치고 있다. 그 이유는 현재의 장애등급제도 아래 있는 한, 재판정을 통해 등급이 한 단계라도 하락하거나 탈락되어 복지서비스를 잃게 되면 장애인의 생계에 큰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위의 이야기는 장애등급재판정을 시행한 시점인 2010~2011년 당시 피해 사례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활동지원서비스는 혼자서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을 하기 어려운 장애인에게 활동지원급여를 제공하여 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지원하고 그 가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제도다. 그런데 사례3처럼 거동이 어려운 중증 장애인이 발가락을 움직였다는 이유로 1급에서 2급으로 등급이 하락되고 그로 인해 활동지원서비스를 받지 못하게 됐다는 것은 객관적 판정과 공정한 복지서비스 제공기준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와 같은 사례들처럼 최근까지도 많은 장애인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복지를 누리고자 받은 재판정으로 있는 것을 잃게 되거나 하나 주면서 다른 하나를 내놓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국민연금공단 장애심사기획부 관계자에 따르면, 장애등급제도 시행 초기 당시 지적장애의 경우 지능지수가 70인데도 의사가 1급이라고 적어서 1급 판정이 나오는 등, 의사들이 관용적으로 판정을 내린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장애발생 직후가 가장 장애정도가 심하기 때문에 2년 정도 지나면 상태가 좋아지는 경우가 있어 재판정이 필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복지부도 올해 4월 장애등급 판정기준을 완화·변경하여 더 많은 사람이 장애등록을 하고 등급이 상향조정될 것이라는 기대를 밝혔다. 하지만, 공단이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최근 재판정을 받은 장애인 중 등급을 유지한 장애인이 80%, 하향 조정된 장애인이 15%, 상향 조정된 장애인이 5%라고 한다. 즉 재판정을 통해 등급이 상향되는 것보다 하향되는 비율이 높은 편으로 나타났다. 복지부의 예측과 달리 하향률이 높아진 상황에 대해 공단 관계자는 “의사들이 치료가 주 업무이지 장애를 판정하는 것이 주 업무가 아니기 때문에 판정기준을 잘 알고 판정하진 못했다. 그래서 오래 전에 받았던 분들 중에 장애가 심하지 않음에도 높은 등급으로 장애판정을 받은 사례가 있다”면서 “심사 없이 받은 등급이 새로운 심사판단기준에 따라서 정확하게 하다 보니 같은 장애라도 등급이 하향하는 경우가 있다”며 이전의 잘못된 기준으로 받은 판정이 정상화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가라지 뽑다가 알곡까지 뽑는다’는 말처럼,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겠다고 했다가 진짜 서비스가 필요한 많은 장애인이 피해를 보게 됐다. 재판정을 받기 위해서는 개인이 검사, 진단비용을 부담해야 하는데 많은 장애인들이 생활고를 겪고 있는 만큼 이 비용지출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신규등록의 경우 평균 12만 원, 재판정은 25만 원 정도의 비용이 소요된다는 게 공단의 설명이다. 물론 정부는 기초생활수급자 및 차상위계층에게 일정부분을 지원하고 있다. 진단비용은 1만5천 원에 지적·정신장애는 추가로 4만 원을 지원, 검사비용도 저소득·자차상위는 10만 원 이내로 지원해주고 있으며, 심사대상이 자료가 부족해 더 필요한 자료를 요청하게되는 경우 즉, 행정청 직권으로 재진단을 받게 된 장애인에게는 공단에서 15만 원 한도 내에서 지원해준다고 한다. 그러나 저소득자나 기초생활수급자가 아닌 장애인은 재판정 비용을 개인이 부담해야 하고, 재판정 이의신청을 하고 나서 재판정을 다시 받을 경우 추가 비용이 발생하게 된다.
막다른 골목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건 ‘죽음’뿐 지난 7월 경기도 의정부시에 사는 간질(뇌전증)장애 4급인 박진영(남·39) 씨가 장애등급재판정을 통해 ‘등급외’ 판정을 받은 후 주민센터를 찾아가 사회복지 담당자에게 유서를 내밀며 청와대, 의정부경찰서, 의정부시청 등에 보내도록 3부를 복사해달라고 요청한 뒤, 스스로 흉기로 가슴을 찔러 목숨을 끊었다. 사망하기 두 달 전 장애등급재판정을 받은 故박 씨는 간질장애를 갖게 된 5살 때부터 사망 직전까지도 약을 먹어왔음에도 등급외 판정을 받게 됐고, 기초생활수급권을 박탈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비관 자살한 것이다. 故박 씨의 ‘장애등급 결정서’를 보면, 의무기록상 최근 1년 동안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발작 증상이 1번 밖에 없어 간질장애 최저등급인 5급에도 해당되지 않았는데, 이유는 간질장애는 발작 횟수가 장애판정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5살 이후부터 꾸준히 약을 복용해온 故박 씨에게 발작횟수로만 판정하여 등급을 탈락시킨 것에 문제가 있지 않냐는 질문에 공단 관계자는 “의학계 의견을 많이 수렴해 봐도 당뇨병, 고혈압, 알레르기 등의 만성질환은 거의 약으로 평생을 조절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간질도 이러한 질환들과 유사한 성격”이라며, “약을 먹어서 조절이 되면 거의 100% 비장애인과 똑같은 생활을 할 수 있는 질환으로, 장애가 없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그분(박 씨)에게 (등급을 못 받아도) 현실적인 불이익은 없었다”라면서 “경증수당은 여전히 받을 수 있었고, 기초수급에서 바로 탈락된다는 것은 아니었다. 주민센터 관계자가 근로능력평가를 우선 받아보면 된다고 안내했는데 본인 입장에서는 위협으로 받아들여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故박 씨는 유서에 “의사에게 진료 받을 때 어지러워 주저앉아 움직이지 못했고, 경기로 정신을 잃었다고 했지만 의사는 기록하지 않았다. 더 이상 살기 싫다. 장애등급 판정을 내리는 데 있어 편하게 일하려고 서류만 보는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아달라”며 호소하는 말을 남겼다. 이와 같이 장애등급심사 및 재판정은 개인의 욕구, 환경적인 요소는 고려하지 않은 채 의료적 판정기준에만 의존하여 장애인의 삶을 좌지우지 하고 있다. 그렇기에 관련 공무원들이 탁상행정을 한다는 질타도 끊이지 않고 있고, 이번 故박 씨의 사건도 일률적인 공무원들의 행정 처리와 현행 복지제도가 박 씨를 막다른 골목에 내몰았고, 결국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회적 타살’이라고 장애계는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보건복지부 장애인정책과 정충현 과장은 “복지부도 현 재판정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올해 초부터 중첩된 민원들을 분석했고 논의해왔다”며, “15가지 유형이 있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곧 수정안을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남병준 정책실장은 “등급제를 폐지한다고 하면서 등급재판정을 강행하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체계로 바뀐다고 하더라도 의료적인 통제·관리를 하겠다는 뜻이 아니겠나”라며, “정부가 등급제 폐지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을 이해했다면 장애재판정부터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
첫댓글
울 나라 정책이 철 책이라ㅠㅠ
모든 정책이 약자편에서 행해졌으면 하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