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 불원평에서
감숙성 곤륜산에서 벌어진 일만에 가까운 사람이 몰살당한 사건과 연이어 청해성 청해호 해신산에서 척씨 세가의 몰살 사건은 일의 전모를 알고 있던 황실과 조정, 환관의 세력들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던 구파일방과 오대 세가 모두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천하가 경동할 일이 벌어졌는데 어디에서도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은 그들이 보기에 아직 남은 하나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남은 하나를 어찌 처리하느냐에 따라 천하의 향방이 달려있다 판단하고 있었기에, 숨을 죽인 채 모든 눈을 그곳의 상황을 살피는데 각 세력이 갖고 있는 능력을 모두 동원하고 있었다.
소문이 천하를 울려 민심이 동요하고 감숙과 청해의 일은, 신화처럼 크게 부풀려져 이야기꾼들의 입을 통해 객점마다 술안주가 되고 있는데도, 누가 무슨 목적으로 저지른 일인지 그 일로 인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어디서도 말이 나오지 않으니 오히려 관심과 재미가 사라져갔다.
빠르게 민초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지만 지켜봐야 하는 자들의 속은 타들어 갔고, 어디서 무슨 소리가 나오는지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게 되자, 악불개의 전언을 받고 흩어지려던 무림 세력들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한 채, 오히려 중소 무파들까지 몰려들어 무한은 무림인들로 넘쳐났다.
오대 세가의 장로들은 각 세가가 머무는 객점을 돌아가며 연일 회의를 거듭했는데, 오늘은 제갈 세가가 머무는 연홍 객잔에서 모임을 갖게 되었다.
"아니 불원평으로 들어간 지가 벌써 며칠이오. 그런데 아직 움직이지 않는 이유가 뭐라 생각하시오?"
어제와 같은 이야기지만 황보광은 오늘은 다르지 않으냐는 듯 제갈명을 보자마자 물어댔다.
황보광의 물음이 다른 일 같으면 어제와 같은 물음에 같은 결론이 보이니 어리석다 하겠지만, 누구도 황보광의 물음에 어리석다 말하거나 눈치를 주는 사람은 없었다.
"움직였소이다."
제갈명의 대답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모두의 귀에는 뇌성만큼이나 크게 들렸다.
"움직였소이까?"
"움직였다는 말이오?"
"언제 말이오?"
"조금 전 도착한 전서에 그리 적혀있었소이다. 모든 세가에도 전해졌지만 이리 오시느라 보시지들 못한 것 같소이다."
남궁홍력이 서둘러 물었다.
"자세히 말씀해보시오?"
"건곤장주가 군사 서문자숙만을 대동하고 정왕이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는 전언이었소이다. 자세한 것은 매시진 전서를 보내기로 했으니 기다려야 하지 않겠소이까?"
팽대곤은 다음 전서가 도착할 한 시진이 너무 길게만 여겨지자, 제갈명에게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묻고자 했다.
"두 사람이 들어갔다면 싸우려는 의도는 아닌 듯한데, 정왕에게 그들이 할 말이 무엇인지 짐작하시는 바가 없으시오?"
"팽 장로님의 말씀대로 무력을 쓰지 않겠다는 뜻은 맞는 것 같습니다. 정왕은 처음부터 봉기에 반대해 왔다 전해졌으니 달리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모든 일은 정왕으로 인해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책임은 물어야겠지요."
"정왕을 사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일이 매듭지어지겠소이까, 더구나 정왕이 수괴가 아니라 한들 누가 믿겠는지요?"
남궁홍력이 슬쩍 거든다.
"이번 일의 수괴가 정왕인 것은 맞지요."
팽대곤은 머리 아프다는 듯 큰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대며 물었다.
"그렇게 처리할 일이면 처음부터 항복을 권하지 않고 그동안 가둬둔 채 지켜본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시오?"
"팽 장로님께서 지적하신 부분이 문제이기는 합니다. 곤륜산에서 벌인 짓이나, 해신산에서 벌인 짓을 보면 아무도 모르게 불원평을 지웠어야 하는데, 처음부터 건드리지 않을 작정이었는지 모두가 보는 앞에서 포위만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정황은 정왕은 살리겠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지금에 와서 정왕을 살려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도무지 짐작도 가지 않으니 답답한 마음 소생이 여러분보다 더합니다."
팽대곤은 제갈명의 말을 듣고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빠르게 답을 냈다.
"살리려 한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지 않소이까?"
황보광은 무슨 소리냐는 듯 팽대곤을 깔아보며 말했다.
"반란의 수괴에게 무슨 방법이 있다는 것이오?"
"아~! 황제가 용서하면 되는 일 아니오, 달리 누가 있어 그의 목숨을 구하겠소이까?"
모두들 어이없다는 듯 팽대곤을 한 번씩 바라봤지만 제갈명은 팽대곤의 말에서 답을 찾은 듯 무릎을 치며 소리쳤다.
"그렇지, 옳습니다. 감숙과 청해에서 비록 많은 사람이 죽어갔지만 무슨 일인지 아는 사람은 불과 얼마 되지 않으니, 정왕을 데리고 경사로 올라가 황제의 용서를 받아내면 이번 반정은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이지요. 일을 키워 전모가 드러나게 되면 가뜩이나 수해와 천재로 인해 민심이 어지러운 이때 어디서 누가 민심을 선동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조용히 처리하게 되면 황실을 바라보는 눈도 두 형제 사이에 우애가 있구나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지금까지 갈라진 황실의 힘도 복원되고, 비록 건곤장주가 승상부와 가깝다 해도 정국의 안정을 바라 왔던 것이 사실이니 건곤장주는 정왕을 설득해 황제와 화해하도록 만들려는 게 아닌가 싶소이다."
남궁홍력은 제갈명의 설명을 듣고도 가능성은 없다 여기면서도 만약의 경우도 있으니 굳이 반대의견을 내지 않았다.
"그리되면 좋은 일이나 사안이 중대하니 오늘 나온 말은 밖으로 전하지 않도록 하십시다."
"그렇게 하십시오. 머지않아 알게 되겠지만 지금은 말 한마디가 조심스럽기만 하외다."
*
허인회는 불원평에 들어와 정탐하는 정보원들을 두고 보다가 불원평으로 들어서기 전에 일시에 제압해두고, 용병들의 포위을 풀지 않은 채 살막의 무인들과 함께 정왕의 무리가 생활하는 마을로 들어갔다.
"머~멈추거라."
마을 입구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무인이 허인회 일행이 보이자 긴장한 듯 찢어진 목소리로 크게 소리쳤다.
용형호가 소리친 무인을 상대하려 앞으로 나서자 허인회는 무인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가서 건곤장주 허인회가 정왕 전하를 뵈러 왔다 전하거라."
마을이 작은 탓인지 경계를 선 무인의 목소리가 커서인지 진영도 갖추지 않은 군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장군으로 보이는 무인도 달려와 허인회 앞에 섰다.
"누가 감히 전하를 뵙자 하느냐?"
"그리 말씀하시는 장군께서는 누구시오?"
"표기 장군 능걸이시다."
허인회는 비록 장군 갑주를 입고 있지 않지만 능걸이라 말한 장수 옆에 당당히 서 있는 장수를 보며 말했다.
"그러면 이쪽은 문도 장군이시겠군요? 소생은 황제폐하께서 문연각 태대학사의 시호와 공작의 작위를 내리신 허예윤 공의 손자로 허인회라 하외다. 비록 관직에 들지는 않았으니 작위를 승계했으니 공작의 반열이외다. 정왕전하께 독대를 청한다 해서 예법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니 전해주시오."
"네놈들이 불원평을 포위하고 있던 자들이라면 어찌 믿고 전하께 아뢰겠느냐?"
"전하께서 영명하시니 아직 참고 지낸 것 아니오? 가서 말씀드리는 것이 충성을 다하는 길이니 전하도록 하시오. 소생은 전하께 무례할 생각이 없소이다."
문도와 능걸은 몇 번이고 서로 눈을 마주친 다음 문도 장군이 칼을 빼 들고 앞으로 한걸음 나와 막아서자 능걸 장군이 몸을 돌려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문도 장군이 허인회 일행을 한 걸음도 안으로 들이지 않겠다는 듯 팔을 벌리자 뒤에선 병졸들도 창끝을 앞으로 향하며 반원진을 형성했다.
문도 장군은 병졸들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더니 허인회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감숙과 청해의 난 때문에 전하를 억압하려는 것이라면 한참 잘못 생각한 것이다. 그놈들과 전하와는 관련이 없고 오히려 놈들을 말리신 분이 전하이시니라."
허인회는 문도 장군의 말에 빙그레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잘 알고 있소이다, 그러니 놈들이 모두 죽어 나갔어도 이렇게 뵙고자 하는 것이 아니오?"
문도 장군은 허인회의 말에 크게 놀랐지만 의심의 눈을 거두지 않았다. 그동안 척씨 세가 놈들이 이곳에 드나들며 한 말이 있어 거병을 했다면 이제 한두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리 쉽게 당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라 여겨졌다.
다만 척씨 세가 놈들이 말과는 달리 그리 큰 세력을 만들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말은 누구나 그리하지 않겠느냐?"
허인회는 문도 장군이 뭐라 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지금쯤 능걸 장군은 정왕에게 달아날 것을 종용하고 있을 것이고 문도 장군은 그 시간을 벌기 위해 말을 시작한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지만, 허인회는 정왕이라면 더는 달아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허인회가 문도 장군 뒤를 받치고 있는 병졸들을 살피다가 제법 군장을 갖춘 무장이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그대가 조부님의 호위였던 석 참장인가?"
참장 석덕우는 허인회를 처음 보았기에 그렇지 않아도 관심을 두고 살피고 있었는데, 물어오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그날 이후 관직에서 물러났으니 참장이라는 말은 옳지 않소이다. 지금은 그저 정왕 전하를 호위하는 무인일 뿐이오."
"세가의 식솔들과 함께 건곤장으로 오라는 말은 어찌 거부하셨소?"
"황명을 거역하고 모든 것을 잃었는데 이 많은 사람이 허씨 세가의 식솔이라 해서 돌아가 죽어야 했느냐?"
"건곤장의 소문을 들었기에 식량을 구걸한 것 아니오?"
"구걸이라니 말이 지나치구나. 소문에 제법 많이 가졌다 하기에 부탁은 했지만 겨우 연명 할 만큼 보내준 것으로 이제 와 주인이라 한다는 것이냐?"
"원하는 대로 주었고 앞으로도 그리할 것이니 뜻대로 하시오. 다만 그대가 압박하여 머문 것이라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허인회도 본 듯한 노인이 다가와 문도 장군에게 말했다.
"들이시라는 어명이십니다."
문도 장군은 뜻밖의 말인 듯 잠시 놀랐지만 정왕의 성품을 아는지 크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들이라는 명이 계셨지만 모두 들게 할 수는 없으니 혼자 드시오."
허인회는 문도 장군의 말에 서문자숙에게 기다리라 말하고 걸음을 옮겼다.
문도 장군이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 그러니까 옛 허씨 세가의 본가 총관인 어인지가 허인회에 앞서 걸음을 재촉했다.
허인회는 뒤따라가며 물었다.
"스스로 원해 남았던 것이오?"
이제는 늙어 움직임조차 자유롭지 못한 총관 어인지가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비록 세가에서 종과 노비 문서를 태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자유롭게 살아보자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정왕 무리의 종이 된 것이오?"
"달아날 힘도 없었지만 달리 갈 곳도 없었으니 어쩌겠습니까?"
"어려움은 겪지 않았소이까?"
세상살이가 다 그렇지요. 후회는 없습니다."
제법 정갈하게 지어진 초옥으로 가자 시중들던 여인이 나와 맞아들였다. 총관 어인지가 여인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자 여인은 허인회의 앞을 열어주며 안으로 들라 했다.
갖춰진 것 없이 회의를 위한 탁자인 듯 긴 탁자가 놓여있고 한자도 채 되지 못할 단상에 정왕의 의자가 놓여져 있었는데, 생각보다 늙어버린 정왕의 몸이 허인회를 보며 앞으로 기울어졌다.
"진평현 허인회가 정왕 전하를 뵙습니다."
"과인으로 인해 변을 당한 태대학사 허예윤의 손자라고?"
"군신의 도리를 다한 것을 어찌 변이라 하겠습니까?"
"그대에 관한 소문은 예까지 들리더구나, 과인을 죽이러 온 것이더냐?"
"아시고 계셨습니까?"
"무엇을 말이더냐?"
"감숙에서 이십만이 봉기하고, 섬서 장량부 척씨 세가가 청해에서 정왕 전하께서 불의한 일을 당했다며 격문을 낸 것 말씀입니다."
정왕이 잠시 놀라며 사실이냐는 듯 허인회를 바라보고 말했다.
"원하지는 않았지만 그놈들의 말이 허황되지는 않았구나..... 그놈들의 뜻을 꺾는데 내 목이 필요한 것이더냐?"
"이미 감숙과 청해는 진압되었고 땅에 묻히지도 못한 고혼이 됐습니다."
"그렇소이까? 하면 과인을 경사로 끌고 가 모두가 보는 가운데 참형이라도 내리려는 것이오?"
"전하께서도 아시지만 황실의 힘은 어느 황조보다 약해졌습니다. 선덕제께서 선정을 베푸시어 많이 회복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조정과 환관의 손을 벗어나기에 못 미치는 것도 현실입니다. 전하께서 처음부터 척씨 일가의 뜻에 반대하신 것을 조정도 알고 있으니 황실의 어른으로서 이번 한 번 굽히시고 황실과 조정의 안정에 도움을 주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가능한 일이라 여기시오?"
"전하께서 하시기 따라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호~오, 가능하다는 말씀이시오?"
"가능하다 말씀드렸습니다."
"말씀해 보시오."
"황궁 앞에서 석고대죄를 청하시기 바랍니다."
정왕은 화도 내지 않았다.
역모의 수괴에게 내려지는 형벌이 어떠한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이제는 더 이상 삶에 미련도 없었다.
환란을 피해 이곳에 남아 구차한 삶을 이어가는 것도 자신을 믿고 따라준 충신들을 생각해서이지 반정으로 황위를 탐한 까닭은 아니었기에 더는 삶을 유지해 나갈 의지가 없었다.
"석고대죄라......... 차라리 과인의 수급을 베어 가는 것이 낫지 않겠소?"
"전하께서 모르시고 계시는 것이 있는 듯하여 말씀드립니다. 비록 황위를 빼앗은 것은 맞고 전하의 사가인 정왕부를 제왕 담소징에게 내준 것은 맞지만, 당시 태자궁에 머물던 전하의 처자와 상궁나인들 모두는 비록 모든 관작이 물려졌지만 아직 황실의 보호 가운데 몸 성히 지내고 있으니 기다리는 가솔과 천하가 어지러워지면 고난을 겪게 될 백성들을 생각하시어 살신성인의 길을 여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허~허~ 죄인의 몸에 무슨 말씀을......."
"믿어주시면 뒷일은 모두 소생이 맡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부덕한 몸이나 환란을 함께한 사람들이오."
"복직은 황실과 조정의 뜻에 따라야 하겠지만 일신의 안전은 보장하겠습니다."
"모두 말씀이시오?"
"허씨 세가의 식솔들은 소생이 거둘 것이고 함께 든 모두를 말씀드린 것입니다."
"상의할 시간을 주시겠소이까?"
"그리하시지요."
허인회가 정왕의 처소에서 물러 나오자 정왕 담진의는 능걸과 문도, 석덕우를 불러 오래도록 말을 나눴다.
그들로서는 허인회의 말을 그대로 믿기 어려웠고 앞날이 불안한 것도 여전했지만 정왕의 가족 모두가 선덕제의 보호 아래 아직 무사하다는 것으로 능걸과 문도에게 한 줄기 희망이 되었기에 허인회와 함께 길을 나서기로 정했다.
마차에 정왕과 능걸 문도를 태우고 불원평을 벗어나자 허인회는 정탐꾼들을 풀어 준 다음, 용병들에게 불원평에 드나드는 사람이 없게 하라 단단히 이르고, 살막 무인들의 호위 가운데 불원평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