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다 / 조미숙
온몸이 시리다. 오래된 아파트는 춥다. 미세하게 틀어진 틈 사이로 황소바람이 불어닥친다. 그냥 두어선 안 되겠다. 방치한 여름 커튼을 겨울용으로 바꿨다. 낚싯바늘처럼 생긴 바늘을 빼내 옮겨 꽂은 뒤에 다시 둥그런 고리 밑에 달린 조그만 구멍에 걸어야 한다. 의자 위에 올라섰는데도 손이 안 닿아 침대 끝에 위태롭게 서서 아등바등하며 거는데 고정되어 있지 않은 고리가 자꾸만 흔들린다. “제발 좀 가만히 있어!” 냅다 짜증을 부려본다.
베란다 중간 문도 꽁꽁 닫고 거실에 카펫도 깔았다. 눈으로는 좀 더 아늑한 느낌이 드는데 여전히 집안은 썰렁하다. 등짝이 시려 쓰지 않던 전기요까지 펼쳐 놓았다. 남편보다 늦게 잠자리에 들기에 따뜻하게 데워진 침대 속으로 미끄러질 때가 그나마 안온함을 느끼는 시간이다.
10월 한 달이 정신없이 갔다. 생각지도 못하고, 일어나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을 겪고 나니 매사에 우울과 짜증이 끝없이 달라붙는다. 내 발밑에 박힌 가시가 더 아프듯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다들 신경이 날카로워 스치기만 해도 금방이라도 베일 것 같았다. 아직 닥치지도 않은 내년 일까지 생각하면 걱정이 태산이다. 일자리를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면서도 일이 죽기보다 하기 싫었다. 가을은 이리 예쁜데 나와 상관없이 지나간다.
여름 같은 가을이 계속되던 계절처럼 내 마음도 종잡을 수 없다. 시름에 빠져 멍하니 티비만 쳐다본다. “엄마, 인상 좀 펴. 누가 보면 하늘이라도 무너진 줄 알겠네.” 딸아이의 핀잔에 퍼뜩 정신이 든다. 먹고 자는 데 문제없이 잘 지내건만 그냥 뭔지 모르겠다. 내가 왜 이러지? 가을 탓인가?
이상하게도 죽음이 맴돈다. 『H마트에서 울다』( 미셀 자우너, 정해윤 옮김, 2022, 문학동네)에서 미셀의 엄마, 백원달의 웹툰 <노년의 꿈>에서 꽃님이 외할머니 그리고 얼마 전 1주기를 맞은 이태원 그날 밤의 청년들이 눈앞에서 떠돈다. 깊이를 모를 한숨을 따라 그 죽음 뒤에 남겨진 이들의 그리움과 쓸쓸함이 남의 일이 아닌 듯싶었다. 내 삶을 스스로 마무리는 할 수 있을지, 누군가의 기억 속에는 존재할지 의문이다. 모든 이는 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가지만 그 길의 끝이 왠지 멀지 않은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맞닥뜨리면 어떡하지? 마음만 바쁘다. 눈앞에 어지럽게 펼쳐진 잡다한 물건이라도 정리 정돈해 놓으면 좋을 텐데 손이 너무 무겁다.
공원에서 하는 운동이 끝나자 작년처럼 실내에서 하겠다는 공지가 없었다. 다만 쉬쉬하며 같이 운동할 사람을 모집하고 있었다. 이도 저도 싫기에 딸이 다니는 헬스장에 등록했다. 마침 할인행사를 한다기에 분위기도 바꿔 볼 겸 큰맘을 먹었다.
낯을 가리는 성격에 젊은이들이 가득한 헬스장은 어색하기만 하다. 위압적으로 건재하고 있는 기구들은 멀리하고 요일별로 다르게 하는 단체 운동 프로그램(줌바, 요가, 필라테스)만 열심히 참여한다. 첫날은 요가 수업인데 십여 년 전에 일 년 쯤 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여러 자세를 취할 때마다 쥐가 나서 죽을 뻔했다. 다음 시간대에 하는 줌바도 하고 싶어서 수업에 들어갔다. 남자 선생이었는데 웃는 얼굴이 개구쟁이 소년 같다. 누군가 아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런지 친근함이 느껴졌다. 매번 웃으라는 손동작을 하지만 따라 하기도 벅차 호응할 여유가 없다. 뻣뻣한 몸에 물결처럼 유연한 웨이브는 그림의 떡이다. 가끔 훔쳐보는 내 모습은 나무토막 한 개가 나름 움찔대고 있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픽 웃는다.
새로운 분위기에 조금씩 활기를 찾아갔다. 글쓰기 모임도 한몫했다. 맛있는 거 먹고 웃고 떠드니 낙원이 따로 없다. 어느새 논에서 벼들이 사라지고 볏짚을 묶은 하얀 덩어리들만이 꽃처럼 피어 있었다. 추운 바람에 옷깃을 여미면서도 따뜻한 위로로 맞잡아 준 손길에 마음이 녹는다. 끝없이 재잘대는 소녀들처럼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길을 걸으며 함께하는 이들이 있어 세상은 살만하다는 것을 또 깨닫는다.
날씨도 널뛰기한다. 더웠다, 추웠다를 반복한다. 윗지방은 첫눈이 내렸단다. 이 비 그치면 겨울이 성큼 다가오리라.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겠지만 밤새 하얀 눈이 소리 없이 내리는 고즈넉한 겨울밤이 있어 견딜 만할 것이다.
첫댓글 마지막 두 단락이 입가에 미소짓게 하네요.
고맙습니다.
@조미숙 재미있는 레크레이션도 진행하셨군요.
오랜만에 올라온 글, 반갑고 기뻐서 얼른 읽었습니다.
글쓰기 모임도 한몫했다니 더 기쁘고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
힘내요!
커튼과 삶을 흔들리게 엮은 것도 절묘합니다.
고맙습니다.
흔들리다 제자리를 찾아 오고 있는 중이라니 다행이네요. 모든 건 시간이 약이에요.
네, 그러네요.
고맙습니다.
또 다른 것에 도전했네요. 선생님은 누구보다 씩씩해 보여요. 누구나 흔들리는 시간이 있고
많이들 그럴 겁니다.
네, 제가 생각해도 전 씩힉한 게 어울려요.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전혀 그런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 때문에 즐거웠습니다. 좀 쑥스럽기는 했지만요.~^^
하하! 어린시절에 했던 놀이는 지금도 재밌죠. 고맙습니다.
글도 잘 쓰시고요,
웃는 선생님 얼굴 떠올리며 읽으니 더 재밌습니다.
스스로를 돌보면서
열심히, 즐거이 사시는 게 참 부럽습니다.
아이고, 글은 선생님이 더 잘 쓰시죠. 즐겁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선생님. 진짜 너무 잘 쓰셔서 질투가 납니다. 흥!
<H마트에서 울다> 저도 재밌게 읽었어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