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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이가 탑으로 나오지 않은 이유
이 홍사
술이 있으면 신선에게 배우고 술이 없으면 부처에게 배운다? 이젠 술이 떨어졌다. 고로 이젠 부처를 찾아가야 한다.
딱 부러지는 결단 없이는 결코 뱉을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머릿속으로 그 말을 되새기고 고개를 넘을 때까지도 그 길이 부처를 찾으러 가는 길인 줄 알았고 잔잔히 가슴이 설레기까지 했다. 그러나 웬걸, 고개를 넘어서자 군위로 빠지는 지방도로에는 차가 밀리고 있었다. 앞에 보이는 신호등까지 차량 행렬이 꼬리를 물고 있었고 또 산굽이를 돌면 그 짜증스러운 풍경이 얼마나 이어질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송아지 물 건너간 거 아니야? 이렇게 된다면 낭팬데,
중얼거리며 그는 C에게 눈길을 던졌다. 대책이 없기는 C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공룡 발자국을 보고 가자던 B는 도리원으로 빠지자고 고집했지만, C가 군위를 넘어가 주륵사지의 폐탑을 보는 게 어떠냐고 제의했고, 폐탑이라는 소리에 핸들을 잡은 그가 탑리 삼거리에서 바로 우회전을 해버린 것이다. 무엇보다 탑의 소멸과정을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팔보다 먼저 핸들을 꺾었다. 그러나 조금 전에 보았던 탑리의 오층석탑은 소명 같은 건 염두에 두지 않은 듯 천 년이 넘게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세월의 뒤로 물러앉아 저 혼자 흘러가는 세월을 지켜보던 그 관조적인 자세, 그게 싫었다. 구체적으로 웅장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윽하기까지 한 자태로 세월의 뒤편에 서 있는 탑리의 석탑은 아무래도 소멸이라는 언어를 화두로 쓸쓸하고 싶은 욕구를 완벽하게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욕구불만으로 생각이 기울자 그는 자신이 기어가는 현재, 그러니까 서른아홉의 행간이 갑자기 낯설어졌다.
그렇다. 그는 낯선 시간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행동과 시간을 구속하던 직장이 어느 순간, 스르르 힘을 풀어버린 뒤, 통제받던 시간에서 놓여난 홀가분함보다 자신의 내부로부터 무수히 들려오는 수런거림, 그 수런거림에 가위눌린 그는 탑의 소멸과정을 쓸쓸한 눈빛으로 지켜보며 낯선 시간과의 은밀한 밀착을 꿈꾸었던가, C가 폐탑이라고 말할 때 귀가 번쩍 뜨였고 대뜸 날아가는 탑을 연상했다.
그래, 탑은 날아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탑지에 탑이 없다면 그건 탑이 지닌 상승 욕구를 이기지 못하고 하늘로 혹은, 어느 별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어쩌면 그게 시간 밖일지도 모른다. 탑은 상승 욕구를 지니고 있다. 그 말은 언젠가 C에게 들었다. 그런 만큼 C가 폐사지와 폐탑을 애기했을 때 귀가 번쩍 뜨일 수밖에.
C는 탑에 대해서 남다른 시각과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작년 하계휴가 때였던가, 이박삼일로 서해안을 훑던 그는 무창포에서 일박하고 잠이 덜 깬 C를 태우고 장항으로 내려가다가 국도변의 이정표에 적힌 국보급 탑을 발견하고 화살표를 따라 어느 시골 동네로 들어섰다. 탑은 남의 집 뒤란에 있었다. 그 집 앞 공터에 차를 세우고, 의자를 젖히고 조수석에 자고 있던 C를 깨웠다. 저기 봐, 봐, 탑이잖아? C는 탑이라는 소리에 부스스 눈을 뜨고 두리번거리다가 남의 집 지붕 위로 비죽이 솟아 있는 탑을 두어 번 껌뻑거리는 눈으로 보더니, 어? 백제탑이네! 하고는 도어를 열고 남의 집 마당을 가로질러 뒤란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잠결에도 정확히 알아보는 C의 안목에 놀라 탑에 관한한 그의 의견을 존중해 주던 참이다.
오늘 탑지 답사는 예정된 행로가 아니었다.
어제 늦은 시간, B와의 통화에서 그는 한량없이 쓸쓸해지고 싶다고, 쓸쓸함의 절정. 너무 쓸쓸해서 더 절망할 수 없는 그런 분위기를 찾고 싶다고, 처량한 목소리를 수화기에 뱉어냈다. B의 반응은 밤새 뜸을 들인 끝에 아침에야 나타났다.
오늘은 어디; 가서 하루를 눙치다가 퇴근 시간에 맞추어 들어오나/ 궁리를 하며 조간을 펼쳐놓고 눙치던 아침 시간, 출근 안 하실 거예요? 아, 출근 안 하시냐구요? 아예 치우지도 않은 식탁에 앉아 생활잡지의 낱말 퍼즐을 풀고 있던 아내가 건너가는 소리로 출근을 재촉할 때 전화가 왔다. 발신인이 누구인지 보고 방으로 들어가며 전화를 받았다.
형님 아직 형수 모르지?
아직, 그런데 왜?
쥑이는 데가 있어요. 오늘 거기 가요. 빨리 나와요. 알았지? 형
당나라 군졸 출신인지 제 급한 대로 말을 낮추었다가 들었다가 하는 게 B의 고약한 버릇이지만, 그 망할 자식의 버르장머리 없음이 그때만큼은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B가 말한 중앙서적 앞에는 B와 월차를 냈다는 A가 나와 있었다. 회사가 어려울 때는 연차를 팍팍 써주는 게 회사를 도와주는 일이라며 너스레를 떠는 A가 말하는 대로 대교를 건너가 충혼탑 앞에 기다리던 C를 태우면서 그는 윗도리를 벗어 구겨지지 않게 접어 트렁크에 싣고, 그곳에 있던 잠바를 걸치고 운동화까지 바꿔 신었다. 어디 갈 건데? 입으로는 그렇게 묻고 있었지만, 어디 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떻게 시간을 죽이느냐 하는 문제 그 시간 그의 가슴에 도사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쓸쓸하고 싶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데 스스로 앙탈을 부리고 있었다. 폐탑을 보고 싶은 그의 마음만큼이나 지긋하지 못한 B는 앞좌석 너머로 모가지를 쭉 뽑고 밀린 차량의 꽁무니에 대고 연방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수빈이가 탑으로 나오지 않은 이유가 뭘까? B가 말해봐.
조수석에 앉은 C가 보닛 위에 거꾸로 쓰인 글귀를 보고 말했다. B가 주륵사지의 탑을 찾기에는 진즉에 글렀다고 차를 돌리자며 까탈스럽게 구는 데 대한 답이었다.
정민이가 씀
수빈아 나 기다리다 간다
왜 탑으로 나오지 않았니
전화는 꺼져 있고
지금 시간 2시 30분 (오후)
2022년 2월 1일
저녁 6시에 전화해라
집에서 기다릴게
과자는 먹으라고 두고 간다
그것에 눈을 주며 몇 번이고 키득거리다가 그는 쪽지를 집어 들고 돌아섰다. 그리고 울타리 밖에서 돌연한 행동의 그를 주시하는 세 명의 청중을 향해 큰소리로 낭독했다.
정민이가 씀, 수빈아, 기다리다 간다. 왜 탑으로 나오지 않았니.
울타리 밖의 청중들은 일제히 폭소를 쏟아냈고 그 또한 웃음이 터져 나와 더 읽을 수가 없었다. 죽인다, 죽여! 오늘의 캐릭터, 바로 그거야. 박장대소하며 엉덩이를 두어 번 흔들던 C가 철제 울타리를 뛰어넘어 잔디밭을 두 번 뒹굴었고 A는 빙계사지를 빠져나오며 도로공사 현장에서 먼지를 흠뻑 뒤집어쓴 승용차의 보닛에 큼직하게 수빈이가 탑으로 나오지 않은 이유라고 손가락으로 적었다.
그의 기분을 의식한 엑스트라들의 과장된 움직임이었다.
웃음이 가라앉자 그는 다시 처연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탑 주위의 마른 잔디밭을 거닐며, 가만히 탑, 이라고 되뇌었다.
탑이 거느린 잔디밭은, 지금은 이름마저 고증되지 않은 절터였겠지만 얼마 전까지 그 자리에는 면사무소가 있었고 탑은 면사무소 마당에 서 있었다. 탑리. 굳이 부연하지 않더라도 천 년을 넘게 그곳의 지명이 왜 탑리(塔里)인지 알 수가 있다. 탑리에는 연전에 들른 적이 있지만, 그때는 탑을 보지 못했다. 아니, 탑을 볼 겨를이 없었다. 그가 맡고 있던 여신의 채무자, 그 보증인의 지적도를 쥐고 강제 집행을 위해 다녀간 그 탑리에 느닷없이 찾아들 거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먼지가 잔뜩 묻은 차 꽁무니에 낙서하고 있던, 회귀본능이 간한 족속 B가, 가자구, 혀엉 가지구, 소리칠 때야, 그는 거닐던 잔디밭을 가로질러 탑으로 가 손에 쥐고 있던 쪽지를 탑 기단부에 올려놓고 있던 대로 조약돌로 눌러놓았다. 수빈이를 위해서 글씨가 잘 보이게끔 눌러둔 그는 돌아서다 말고 자신을 위해서 정민이가 펼쳐놓았음 직한 새우깡 두어 게를 집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탑 위에 펼쳐둔 새우깡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아직도 탑을 찾는 불자가 있구나, 생각했고 그런 물건들은 자신과 같은 중생들이 입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쪽지를 원위치 시킨 다음, 그는 수빈과 정민이 사이에서 주인없는 새우깡 개평을 든 것이다.
아, 새우깡은 역시 탑 위의 새우깡이 최고야.
익살스레 엄지손가락을 세운 그가 팔을 한껏 벌려 소리쳤다. 그는 자신이 뱉어 햇살 속으로 퍼지는 소리의 파장을 보며 자심이 유쾌해진다는 생각에 슬그머니 부아가 돋았고 동시에 부장의 얼굴이 커다랗게 눈을 밟고 지나갔다. 시도 때도 없이 주걱턱의 그 얼굴이 떠올라 그를 당혹하게 하고 있었다. 젠장, 그때의 상황이 또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어제[도 종일 눙치던 기원에서 몇 번이고 바둑돌을 들고서 그날의 상황을 떠올리며 치를 떨다가 영문도 모르는 상대의 눈총을 받으며 가까스로 자제하곤 했다.
지점에는 일주일 전 세 개의 책상이 빠졌다.
그중에 그의 책상도 포함되어 있었다. 진작부터 구조조정이 있을 거라는 소문에 간담이 서늘하여 심리적으로 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막상 자신에게 닥치고 보니 정신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가 관리했던 여신 업무에는 유독 악성 채권이 많았다. 부장은 늘 그 직책의 전결인 대출 업무에 몸을 사리가 바빴고, 결재가 불투명한 대출 여부는 눈치에 익숙해진, 과장인 그가 처리한 만큼, 악성 채권의 수습을 위해 법원으로, 지적공사로, 보증보험으로 내치는 그의 발길은 언제나 허덕였고 숨이 가빴다. 그 허덕임 끝에 당연한 순서처럼 지난여름, 촉탁 발령이 떨어졌고 일주일 전에 그 촉탁마저 해지가 되었다. 촉탁 해지. 미처 그 뜻을 헤아리기도 전에 싸늘한 얼음덩이 하나가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주걱턱 부장은 무슨 이유에선가 본점으로 들어가 자리를 비우고 있었고 촉탁 해지 통보를 훑다가 손에 집히는 도장밥을 부장의; 책상 위로 날리고 책상을 박차고 나와버렸다. 지점에는 고객도 있었지만, 누구도 광분하는 그를 말리지 못했다. 그게 짜릿했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그날이 부장도 촉탁 이사로 발령받던 날이기도 했다. 원망한다고 생뚱한 수가 나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그 원망조차도 하고 싶지 않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동안 운전에 느긋해진 그는 룸미러에 눈길을 던졌다. 룸미러에는 까칠한 자신 얼굴이 박제되어 있었다. 일주일 사이네 제 눈에도 표시가 나게 축난 얼굴이었다.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넘기며 거울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햇살을 받아 유난히 반짝이는 귀밑의 흰머리 몇 올이 눈에 거슬려 순간적으로 잡히는 대로 쥐어뜯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고, 모든 것이 나에게만 이렇게 빨리 찾아오는 거야. 하마터면 그는 그렇게 중얼거릴 뻔했다. 여태까지 눈에 뜨이는 대로 아내와 딸들이 뽑아 주었지만, 그것도 곧 한계가 있으리라. 그땐 구차스럽지만, 염색약으로 자신이 시들어 가고 있음을 스스로 속여 보든가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세월의 흔적을 관망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그를 더욱 쓸쓸하게 했다.
차 안에 감도는 적요를 허물며 A가 불쑥 입을 열었다
수빈이가 탑으로 나오지 않은 이유
이유 1, 12시에 탑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10시부터 거울 앞에 서서 옷을 갈아입고 외출 준비를 완료하고 더디게 가는 시계를 원망스레 보다가 깜빡 잠이 들어서.
여태 모두, 그 이유를 헤아리고 있었던가 보다.
그는 룸미러를 통해 A의 얼굴을 훑고는 조소를 지었다. 드디어 A의 입이 터진 것이다. 여기에서 누가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다면 억지와 희한함을 겸비한 논리로 전개되는, 끝이 없을 그의 주장을 고스란히 들어줘야 한다. 탑리로 올 때는 어땠는가? 신녕 거조암에 들렀다가 한 시간 가까이 달리는 동안, 잠시도 입을 다물 줄 모르던 A가 유튜브를 진행하는 만화가, 하삼수가 그린 못생긴 닭에 관해서 얘기했다. 서구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현실을 은근히 비꼬면서 투박한 닭은 그린 만화가는 국내 실험성을 지닌 완벽한 모더니즘 중심 계열에 있는 선구자다. A는 자신이 가진 잡학을 풀어가며 뭐 그런 개뿔도 재미없는 이야기를 한 시간 내내 떠들었고 다른 작자들도 그의 잡학에 딴지를 걸어 자신이 본 유튜브와 충돌시키기도 했다. 만화가의 못생긴 닭? 그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그 못생긴 닭을 본 적이 있긴 한데, 그 닭이 우수하기보다는 못생겨서 더럽게 맛이 없겠구나, 생각했던 것 같다. 그들이 포스트모던한 닭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동안, 앞으로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않아, 통닭을 총각이라고 어눌하게 발음하는 어린 딸에게 그 좋아하는 치킨을 마음대로 사 줄 수가 없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지극히 포스트모던한 생각을 했었다.
왜 수빈이가 탑으로 나오지 않았을까? 그의 관심도 수빈에게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혹 그들이 쪽지를 읽으며 깔깔거릴 때 학교 쪽의 울타리 너머에서 보고 있던 그 소녀가 수빈이가 아니었을까, 정민의 글씨로 봐서는 초등학교 오륙 학년 정도의 소년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며 쪽지를 남긴 것으로 미루어 수빈이가 늦게라도 탑에 나타나리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는 듯했다.
더디게 가는 시계를 쳐다보고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럴 수도 있다. 야외에서 이성을 만나기로 한 사춘기 소녀의 가슴은 얼마나 설렜을까, 더디게 가는 시간이 원망스러울 수도 있겠지, 한데 그 설렘 속에서 잠이 왔을까.
가슴 설렘, 그것은 어린 날일수록 그 농도가 진한 물건이다. 그에게도 그 농도 짙은 사랑이 있었다. 영원히 가슴 속에 묻어두는 것이 첫사랑이라고 했지만, 그 명제를 지키는 데는 실패했고 시시때때로 가슴 속에 있어야 할 그것을 꺼내 존재를 확인했다. 그는 그녀를 형이라고 부른다. 유정형.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지만, 중학 시절 연애편지랍시고 쓸 때도 그랬고 마흔이 가까운 지금도 만나면 그렇게 부른다. 어, 형이구나. 그래 형. 일단 형이라고 하면 통화를 할 때나 문자 메시지를 보낼 때 타인으로부터 그녀와의 관계를 은폐할 수 있고 또 형이라는 어감에서 푸근함과 이름 모를 애틋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기다. 중학교 이 학년 때 그녀가 다른 도회로 전학을 가는 바람에 이성에 눈을 뜨던 몇 달간의 편지질은 중단이 되었지만, 그는 어디선가 그녀가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에 가슴 설레면 수신자가 없는 편지를 써왔고 지금도 그녀를 만나기 위해 둥지로 가는 길에는 언제나 가슴이 설렌다.
선생, 혹시 수빈이를 아시나요?
뒷좌석의 B가 A를 향해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는 A의 대답이 나오기 전에 혼자 쫑알쫑알 말을 이었다.
그런 자알 알지요. 그래요? 수빈이가 몇 살입니까? 열다섯입니다. 아주 예쁘지요.
그렇게 혼자서 문답을 주고받던 B가 느닷없이 스톱을 걸었다.
스톱. 이유 2 수빈이가 오늘 느닷없이 초경을 시작한 것입니다. 갑작스레 당한 일이라 안절부절.
그의 상상의 과히 역동적이다. 대화를 허리 밑으로 끌어내리는 데는 누구보다 탁월한, 참으로 B다운 발상이다. 그러나 CRK 금세 스톱을 걸었다.
스톱, 와 죽인다. 육군 일병, 군기가 왕창 빠져가지고.
손뼉을 치며 C가 가리킨 곳에는 군용 트럭이 서 있었다. 아마도 연료가 떨어진 모양이다. 좁은 지방도는 노견이 없었던 까닭에 군용차는 육중한 엉덩이로 차선을 반쯤 막고 서 있었다. 운전병은 트럭의 운전석 뒤에 매달린 스페어 통을 떼어다가 급유 중이었고 밀린 차들은 맞은편 급커브를 돌아 쏜살같이 달려오는 차량을 피해 중앙선을 넘어 간신히 한 대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되게 좋아하네? 남이 곤경에 빠진 걸 보고.
그렇게 중얼거리며 C를 곁눈질했다. 그에게서 기습적인 단절감이 느껴졌다. 내가 엉덩이 차인 망아지 꼴로 직장에서 내몰릴 때도 저 인간은 쾌감을 느꼈을까?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스치자 감정의 조도(照度)가 급격히 떨어졌다. 그가 쏘아대는 냉혹한 눈빛에도 C는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모르고 트럭에 눈길을 박고 있었다.
군용 트럭 범퍼에는 작전 중이라는 푯말이 걸려 있었다. 운전병은 지나치는 차량에 위협을 느낀 듯 차체에 바짝 붙어 급유하고 있었고 선임탑승자인 젊은 장교는 트럭 꽁무니에 서서 수신호를 하는, 희극적인 작전이 지방도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저거 작전 중에 난리가 났구만, 일병이여, 너는 완전히 영창감이다.
뒷좌석에서 앞좌석 너머로 모가지를 쭉 빼고 말한 건, 군 생활을 동사무소에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며 마친 B였다. 장교는 맞은편 도로를 연장 살피며 그의 차를 보고 지나가라고 수신호를 하고 있었지만, 그는 비상등을 켜고 군용트럭 뒤에 차를 세웠다.
운전병이 급유하는 게 너무나 어설퍼서 도무지 에어 빼기를 제대로 해낼 것 같이 보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B가 군대 어쩌고 하며 한양 못 가본 놈의 깝쭉거림이 눈꼴 시었던 것이다.
A, 저 차 손 좀 봐줘, 저 친구 저러다 정말 영창가겠는 걸?
A는 시계를 보고는 난처한 낯빛이 되었다. 주륵사지 폐탑을 돌아볼 시간이 될까, 뭐 그런 뜻이었다.
거긴 안 되면 내일 가는 거고, 거기까지 얘기하다가 그는 말꼬리를 사렸다. 내일은 모두가 출근해야 한다. 자신만 빼고, 모두 출근할 곳이 있다는 사실, 쓸쓸해지고 싶다는 자신을 위해서 모두 하루를 할애하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는 사이, 아득한 소외와 단절감이 가슴으로 밀려들었다.
서로의 눈빛이 교감하는, 팽팽한 긴장감을 거두며 눈치 빠른 A가 도어를 열고 밖으로 나갔다.
스페어 통의 연료를 가뿐하게 급유한 A는 익숙한 솜씨로 트럭의 보닛을 열고 에어 빼기를 하고 있었다. 젊은 장교는 그의 솜씨가 미더운 듯 뒷짐을 지고 지켜보고 있었고, 어설펐던 운전병은 A가 요구하는 공구를 집어주는 조수로 전락해 있었다. 나이가 많은 군용차는 언제나 후임들 몫이다. 그 명제는 지금도 변함없이 통용되고 있는 모양이다. 군용 트럭은 그가 수송병으로 근무하던 후임 시절에 몇 개월간 운전했던 차종인 반세기는 거뜬히 굴러다녔을 차량이다. 그래도 연료와 공구의 힘이 가해지면 그 기계적인 힘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한때 카센터를 운영하기도 했던 A는 에어 빼기는 아래에서 위로, 할 것이며 마지막에 분사구는 에어나 연료가 새지 않도록 확실히 조여야 한다는 설명까지 곁들이며, 엔진은 이런 거다, 하고 주제넘게 설명까지 하고 있었다. 운전병은 일병이 아니라 이등병 신참이었고 군기가 들어 A의 설명에 예! 알겠습니다,를 옆에서 듣기 민망할 정도 크게 외치고 있었다. 선임이 군용차 고치기 지원작전을 전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 범퍼에 한쪽 발을 올려놓고 담배를 피우며 방자함의 극치를 보여주던 B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웬만하면, 형수님한테 털어놓고 서둘러 다른 직장을 알아보는 게 방법이 아닌가? 머지않아 금융계가 구조조정에 들어가면 실업자가 부지기수로 쏟아질 터인데, 그때 가면 아무래도 경쟁률이 높아질 거고,
그는 B의 입술에 꽂혀있던 담배를 슬그머니 빼다가 그의 입술에 꽂았다.
마누라가 꼴까닥, 기절할 걸, 뭔 심리적으로 뭔 대책을 세워놓고 말해야 병원비라도 아끼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말을 해버린 것이었다. 뱉어놓고 생각하니 그런 말은 후배에게 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아내도 알게 되겠지, 아니, 일주일 후면 아내는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월급이 입금된 다음 날, 얼마간의 생활비를 인출하고 통장을 찍어보면 한 달 치에서 조금 모자라는 월급과 얼마간의 위로금, 그리고 퇴직금으로 들어온 뭉칫돈을 보며 의아해하다가 파악하겠지. 아니, 어쩌면 지금쯤 아내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집에 무슨 급한 일이 생겼다거나, 핸드폰이 꺼져 있어 지점으로 전화를 했다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는 핸드폰을 꺼 두었다. 지점으로 전화를 하면 누가 받을지 몰라도 집이라고 하면 눈치 빠르게 돌아가는 사태를 파악하고 출장을 나갔다고 얼버무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는 저희끼리 누구는 집에서 아직 모르고 있더라 어쩌면 좋으니? 뭐 그런 동정심 어린 수다의 소재로 이미 자신이 휘말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구설수? 그 진부한 단어가 왜 그를 사로잡았는지는 명쾌하게 설명할 수가 없지만, 구설수와 함께 대뜸 어머니를 떠올린 것이다.
시골에 혼자 계시는 어머니가 전화를 한 건 정초였다. 설 쇠고 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았었고, 밤 열한 시가 넘어 걸려온 어머니의 전환데 단순한 안부 전화는 아닐 거라는 예감이 적중했다. 어머니는 아이들의 안부와 처가의 안부까지 살핀 뒤에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토정비결을 봤는데, 다 괜찮더라만, 동짓달에 구설수가 있고 물조심 하라카더라, 네가 올해 아홉수에 걸렸잖니, 좋은 게 좋다고.
전화의 요지는 그거였다. 껄껄 웃으며 쓸데없이 그런 걸 아직도 믿느냐고 짜증을 부렸던가, 구설수라는 말에 퍼뜩 형을 떠올렸다. 너무 잦은 건 아닌가, 형과 둥지에서 만나는 것을 누가 알아버리는 날에는 정말 구설수의 도마 위에 충분히 오를 수도 있지만 물조심은 또 뭐야, 낚시를 좋아하나, 해수욕을 갈 일이 있나, 그러다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총이라도 조심해야지.
전화를 끊는 것과 동시에 구설수라는 진부한 언어는 잊어버렸는데 가만히 생각하니, 자신은 구설수에 몰렸고 감원의 물벼락을 이미 맞아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가는 차들은 길을 막고 서 있는 군용 트럭을 향해 고개를 쭉 뽑고 뭔지 모를 불평을 터트리며 지나갔다. 까탈스럽게 구는 모습들이 허물을 벗고 있는 파충류처럼 혐오스럽게 여겨져 일행들은 모두 외면하고 있었다. 이윽고 기름이 묻은 국방색 장갑을 벗은 A의 지시에 따라 운전병이 차로 오른 후, 씰룩거리던 늙은 차는 검은 매연을 한 뭉텅이 배출하고며 원기를 회복했다. 젊은 장교는 그들 일행에게 절도있게 고마움을 표시했고, A는 시동이 걸린 후에도 엔진을 더 살펴본 후 보닛을 텅, 소리가 나도록 닫았다.
이젠 주륵사지로 가는 일만 남았다. 폐탑을 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이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리라. 그리고 혹시 탑이 날고 싶다고, 말하는 소리까지 들을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설레기까지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주륵사지로 갈 수 없게 되어버렸다. 뜻밖의 사고가 그들의 발을 묶어버린 것이다.
운전병과 장교가 출발을 위해 차에 오르고 그들은 트럭 옆으로 돌아 나올 때, 뒤에서 추월하려고 중앙선을 넘던 트레일러가 맞은편 산모퉁이에 쏜살같이 달려나오는 차를 발견하고 핸들을 급히 꺾는 바람에 그의 승용차를 밀어버린 것이었다. 밀린 소형차는 또 앞에 출발하려던 군용 트럭 전투 범퍼 밑으로 기어 들어가는 그 일은 아주 순식간에 일어났다. 다행히 차는 비어 있었고 외형상 다친 사람은 없었다. 차만큼이나 가슴이 짜부라진 그를 제외하고는.
두 대의 대형차 사이에 끼인 소형 승용차는 트렁크와 엔진 쪽에 중상을 입은 아주 처참한 몰골로 신음하고 있는데, 반해, 대형차들은 너무 멀쩡한 게 그의 부아를 돋우었다. 그는 짜부라진 차 옆구리를 발로 냅다 걷어찼다. 희끗희끗한 머리, 반백의 트레일러 기사가 내려와 아주 송구스러운 낯빛으로 뭐라고 했지만, 그의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도대체, 자신에게만 왜 이렇게 크고 작은 일들이 짜증스럽게 생기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기조차 짜증스러웠다.
차가 박살 났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주륵사지에 어떻게 갈 것인가와 사고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 하는 문제보다 이제 형을 만나러 둥지로 갈 때 무엇을 타고 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먼저 생각하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둥지로 가는 일은 일상 중에서 무게를 지닌 하나였다. 둥지는 일반 모텔이 아니다. 요즘 무인 모텔도 많지만, 그런 비인간적인 모텔을 이용하지 않는다. 둥지는 그가 사는 도시에서 차로 한 시간이 걸리는 국립공원 초입에 있다. 형을 만나는 둥지는 그들 사이의 은어일 뿐, 사실 산장의 게스트하우스다. 지난번에 만났던 거기서 만나요, 라고 그녀가 전화했을 때, 그는, 어디? 둥지 말이야? 그랬던 것이 오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들 사이엔 둥지로 통용되고 있었다. 독신인 그녀는 한 달에 한 차례, 많이 해야, 두 차례 정도 그에게 짤막한 전화를 한다. 둥지에서 기다릴게요. 라던가 혹은 둥지에서 커피 마셔요, 정도의 너무나 짤막한 전화를 받으면 그도 간명한 대답을 한다. 그래 형! 이라던가 아니면, 형이구나 알았어. 정도의 대답이 전부다. 형의 전화는 언제나 퇴근이 임박해서 걸려 온다. 어떤 날은 은근히 형의 전화를 기다리느라 퇴근을 미루고 눙쳐보지만, 퇴근 시간을 넘긴 뒤에는 한 번도 그녀의 전화를 받은 적이 없다. 둥지에 도착하면 형이 먼저 기다리고 있거나, 아니면 길어야 십 분 이내로 그녀의 차가 도착한다.
밥 달라고 울어대는 돼지 같구만, 참 되게 지랄이네.
C가 경음기를 울려대는 차들을 둘러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급하게 핸들을 꺾은 트레일러 꽁무니가 중앙선 너머까지 점령하고 있어 양쪽 차선이 막히자 밀린 차들은 금세 북새통을 이루었고 경음기를 울려대고 있었다. 어쩌라고? 달리고 싶은 차들은 그렇게 질주의 욕구를 분출하고 있었다.
젊은 장교가 다시 내려 호각을 불며 군용 트럭을 앞으로 보내고 트레일러를 후진을 약간 해서 간신히 한 쪽 차선은 틔워 주는 수고로 경음기의 소음은 잦아졌지만 망가진 차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로서는 난감했다. 망가진 차는 아무리 보아도 수리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 시대의 정비 기술로 감쪽같이 수리야 가능하겠지만, 수리비가 아무래도 고물차 값을 웃돌 거리는 생각이다. 이럴 때 A가 옆에 있다는 건 참으로 다행이다.
A! 견적 뽑아야지.
당연히 A가 해야 마땅한 일인 양, 그렇게 뱉어놓고 서 있는 군용 트럭 적재함으로 올라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이 타고 갈 차는 군용 트럭뿐인 듯 그는 먼저 적재함으로 올라가 웅크리고 앉았다. 군위로 가서 다른 차편을 이용해야 할 것이다. 군용이라서 추운 건가. 그는 몸을 움츠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프고, 아무리 껴입어도 추운 게 군용차라는 사실을 수송대에 근무하는 동안 몸소 체득한 그였다.
형의 하얀 차가 숲속 길을 돌아 잔자갈이 깔린 둥지의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게 보기 좋아 항상 먼저 도착하려고 서두르는 편인데 이젠 무엇을 타고 갈 것인가, 그는 박물관에나 있을 반가사유상처럼 다리를 꼬고 턱을 괸 채 둥지를 더듬고 있었다. 둥지의 여주인은 단골을 안다. 그가 먼저 도착해서 형을 기다리는 시간이면 언제나 커피를 두 잔 내온다. 잠시 후에 도착할 형의 몫까지 한꺼번에 내오는 것이다. 어쩌다 형이 먼지 도착하는 날이면 그의 커피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시킨 적은 없지만 오 년간의 단골을 알아 주는 주인의 배려로 남아 있는 방 중에서 가장 깨끗한 방이 그날 그들의 둥지가 되는 것이다. 둥지에는 언제나 풀들이 자란다. 형의 품에 안겨있는 시간이면, 침대에도 탁자에도 파란 풀들이 쑥쑥 웃자라고 있었다. 둥지를 튼 다음 형은 풀내음을 흩날리며 말한다. 먼저 들어가세요. 전 조금 자다가 갈게요, 형은 그의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동기다. 그러나 형은 존대를 한다. 편안한 거리감이었다. 존대로 차근차근 뱉어내는 말은 어떤 위엄까지 담고 있어서 그는 도무지 거역할 수가 없었다, 해서, 그녀와의 관계를 지속하는 오 년간 단 표면적으로는 단 한 차례의 외박도 없었다.
A가 핸드폰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하면서 망가진 차를 둘러보고 있었고 늙수그레한 트레일러 기사는 명함을 꺼내 B에게 건네며 민망할 정도로 허리를 굽신거리는 것이 마치 잠결에 보던 유튜브처럼 비현실적으로 눈을 밟고 지나갔다. 저자가 필요 이상으로 굽신거리는 것은 아닌가, 버릇 같은 관성도 드물다. 굽신거리는 것이 몸에 배면 관성이라고 불러도 좋을, 필요 이상의 각도가 허리에서 나오는 법이다. 그는 생각했다. 자신의 앞에 나타난 고객에 대해서 채권자나 채무자를 가리지 않고 필요 이상의 허리 각도가 지나치게 들어갔다고. 양면성을 보이지 못한 허리의 각도가 오늘의 자신을 만든 게 아니냐고.
생각하는 만큼 속이 쓰린 그 생각을 애써 지우고 그는 수빈을 생각했다. 수빈은 지금 잠에서 깨어났을까, 그렇다면 잠 속에서 지나간 시간을 얼마나 허무하게 여길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아니, 어쩌면 수빈은 탑이 지닌 상승 욕구를 이미 읽었는지도 모른다. 풍선처럼 어디론가 날아가고 없을 탑을 찾아 하늘로 고개를 꺾고 있는 어리석은 인간이 아닌지 모른다. 이미 날아가고 없는 탑은 탑이 아니라고 단정하면 입술을 깨물고 있을지도 모른다.
날아가고 없는 탑.
날아가는 것은 탑뿐이 아니었다. 자신의 차 또한 날아가고 있었다. 경광등을 번쩍이면 견인차가 도착해서 망가진 차를 낚아채고 오던 길을 되짚어 달리기 시작했다. 일행들은 정지된 동작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유튜브처럼 그의 시각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쪽에서 일방과실이라고 깨끗이 보험 처리해준대요. 나이 든 사람이 미안하다는데 할 말도 없고, 좀 측은해 보이더라.
B가 적재함으로 올라오며 들으라는 소리로 말했지만, 그 얄팍한 동정의 말들은 귓등을 밟고 지나갔다.
아마 보험에서 찻값으로 나오기 쉬울 거야. 견적이 많이 나오면 연식을 따져서 찻값으로 쳐 주거든, 차라는 물건은 아무리 잘 받혀도 무조건 손해야. 별수없이 폐차해야지 뭐.
A가 상황을 제대로 지적했지만, 그는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수빈이가 탑으로 나오지 않은 이유가 뭘까? 지금 그게 중요하거든.
형 혹시 수빈이를 사모하는 거 아냐?
모두들 웃음을 터트렸다.
폐차? 각오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가슴이 쓰렸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이 있다. 차도 존재했기에 소멸한다. 당연하다. 보닛에 쓰인, 수빈이가 탑으로 나오지 않은 이유라는 글귀까지도 소멸할 것이다. 잠시나마 그곳에 존재했기에, 그러나 정작 수빈이가 탑으로 나오지 않은 이유만은 그의 뇌리에서 소멸할 것 같지 않았다.
이제야, 그는 자신이 소멸의 쓸쓸함을 맛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순간, 그는 트렁크에 실어둔 옷과 구두를 떠올렸다. 그것들은 아직 소멸되어서는 안 될 물건들인데 산을 넘어가고 말았다.
트렁크에 실어둔 내 옷과 구두도 폐차처분 되는 건가?
뭐라구, 그런 게 차에 실려 있었어? 자알 한다. 아랫도리 손 넣어봐 그게 제 자리에 있나.
없으면 어때? 내 몸뚱이까지도 폐차하고 싶은 판에, 그런데 마누라에게 뭐라고 하지? 잔설이 희끗희끗한 산에 아내의 얼굴이 커다랗게 떠올랐다.
나름대로 수정하고, 간혹 더 완강한 손으로 그려가는 아내의 설계도에 먹물을 흩뿌리고 있는 그의 모습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떠올렸다. 슬며시 자기 연민이 들었고 아내가 측은하게 여겨졌다. 갑자기 아내를 더 속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에게 이렇게 가까이 다가서는 감정은 처음이었다. 둥지에서 돌아오던 날에도 그는 아내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형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아내가 차지한 것이라는 생각에 둥지에 두고 온 형이 측은하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군용 트럭이 속력을 내자 매서운 칼바람이 목덜미에 파고들었다. 그는 옷깃을 머리 꼭대기까지 끌어올리며 C를 향해 묻고 있었다.
아, 마누라도 마누라지만 주륵사지는 어떡할 거야?
거긴 가볼 필요도 없어. 그냥 여기가 주륵사지였다는 문화재 안내판뿐이라구. 탑도 없어. 하김 탑이 있었으면 폐탑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 고을 부사가 석질 좋은 것을 골라다가 부사관 짓는데 주춧돌로 써버렸기 때문에 탑 기단부로 이용되었던 돌 몇덩이뿐이라고. 그 돌마저도 지금은 어떻게 되었냐 하면 부근의 남의 산소 석축으로 이용되고 있을 뿐이야. 정말 아무것도 없어. 남은 게 있다면 가끔 주륵사지가 어디인가 하고 찾아왔다가 헛걸음으로 돌아가는 발길뿐이야.
아무것도 없는 것은 주륵사지가 아니라 그의 창자였다. 갑자기 허기를 느꼈다. 속이 어떻게 되었는지 공복을 넘기기가 고통스럽다. 점심을 걸렀든가? 탑리로 가면서 간이 휴게소에 들러 햄버거 하나로 점심을 때우긴 했는데 허기는 속쓰림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그는 쓰린 속을 쓸어 내리며 주륵사지에 남은 발길에 대해 생각했다. 무엇을 가슴에 담고 돌아갔을따?
언젠가 C가 말했다. 아마도 술좌석이었을 거다.
탑의 깊이를 알면 가끔 탑이 말하는 소리가 들릴 때가 있어. 높이 솟고 싶다고. 탑은 분명 상승 욕구를 지닌 거야. 나는 생각했어. 탑에 날개를 달 수 없을까? 그러나 곧 그만두었지. 생각해봐 탑에 날개를 단다면 얼마나 우습겠어?
그 말을 들으며 그는 C가 탑과의 대화를 위해 탑을 찾는 거라고 생각하며, 주륵사지에는 탑이 없더라도 대화는 가능할까, 궁금해서 C에게 물었다.
우리가 거기에 가면 주륵사지 폐탑은 무슨 말이든 하지 않을까? 날고 싶다거나, 더 높이 솟구치고 싶다거나, 뭐 그런 말,
탑도 없는데 무슨 말을 해? 웃기는 소리 그만하고 집에 가서 마누라나 구워삶을 궁리나 해.
망할 자식, C가 주륵사지에 대한 미련을 싹 거두어 가고 그 자리에 아내를 팽개쳐 심어줬다.
운동화에 잠바를 걸치고 들어가면 아내가 수상히 여기겠지? 그 수상해 하는 눈동자를 붙들고 실직 사실을 털어놓으면 자칭 아이디어 수납장이라던 그녀에게서 기발한 아이디어가 나올까? 내친김에 형의 관계까지 말해 버려? 그러면 병원비가 꽤 나오겠지?
아내를 더듬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다른 둥지를 찾아갈 일이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형의 가게. 형이 혼자 꾸려가는 이웃 도시의 화장품 가게에 불쑥 찾아가 안에서 철문을 천천히 내리고 둥지를 틀 것이다.
돌연한 행동에 당황해하는 형에게 조용히 말하리라.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이 있다고.
둥지와 형을 떠올리고 군용차에서 내린 뒤의 행보가 구체적으로 정해지자 그의 가슴은 다시 설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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