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독백, 약간 에코로) 두더지처럼 어둠속을 응시한다, 하원. 적막하고 푸르구나.
귀가 차게 고독을 느낀다. 뜨거운 설탕이 먹고싶다, 하원.
효과 레스토랑 분위기, 소음
나(해설) 그녀의 소식을 들었다. 떠난지 칠개월만의 일이다.
엊그제 종로에 있는 밀레니엄 플라자 33층의 레스토랑에서 그녀의 이복 언니라는 사람을 만났다.
그녀는 스튜어디스 복장을 하고 있었고 도르래가 달린 승무원용 검은 가방을 휴대하고 있었다.
정원 ( 가까이 다가오며) 처음 뵙겠습니다. 전 서정원이라고 합니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깐 시간을 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 (당황하여) 네? 그, 그럼 앉으시죠.
효과 의자 끌어당겨 앉는 소리
정원 전 하원이의 언니되는 사람이예요. 미리 말씀드리자면 서로 배다른 자매입니다.
나 그런데, 어떻게 내가 여기있는걸 알았죠?
정원 네, 미행을 했습니다. 원하시면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리죠. 하원이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예요.
그애가 일도씨를 한번 만나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나 지금 하원인 어디있습니까?
정원 지난 달까진 필리핀의 엘니도에 있었습니다. 그후론 연락이 되지 않고 있어요.
마지막 통화에서 싱가폴이나 스리랑카쪽으로 옮겨갈거란 얘길 했는데, 지금 어디있는진 잘 모르겠습니다.
나 도대체, 그곳에서 뭘 하고 있습니까?
정원 결혼식이 있던 날 신부복차림으로 공항으로 와서 괌으로 떠났어요. 저도 그게 그앨 본 마지막이구요.
나(해설) 괌은 그녀와 내가 신혼여행을 가기로 한 곳이었다. 그런데 혼자 쿠폰을 들고 떠나버렸다는 말이었다.
정원 일도씨한테 미안하단 말 전해달라고 제게 여러번 부탁했어요.
나 그뿐입니까? 달리 전할말은 없습니까?
정원 네, 더 이상은 없군요.
나 그럼 전 이만.....
정원 잠깐만요. 실은 조금 더 할 얘기가 있어요.
하지만 오늘은 바쁘신것 같으니까 다음에 한번 더 뵙고 싶습니다. 저도 이만 공항으로 가봐야해요.
내일 아침 말레이시아 운항이 예정돼있습니다. 31일밤 9시에 이곳에서 다시 만났으면하는데요.
나 글쎄요. 그날 저녁에 모임이 있습니다.
정원 아, 그래요? 하지만 그날 전해드릴 물건이 있어요. 꼭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음악 브릿지
효과 버스 터미널 분위기
하원 놀라셨죠?
나 응. 정말 놀랐어. 오늘 서울로 떠나는걸로 알고있었는데.
하원 세번쯤 전화했는데 안받으시더군요.
한번만 더 전화해보고 없으면 공항으로 가려고 했는데 마침 받으신거에요.
나 그랬나? 감자를 사러 밭에 나갔었거든. 후배는?
하원 걘 예정대로 아침에 서울로 올라갔어요. 실은 강의를 빼먹고 놀러온거거든요.
나 점심땐데, 배고프지않아?
하원 배고파요. 우동이 먹고 싶은데.....
효과 중국음식점. 우동 먹는 소리
하원 제가 무슨 일 하는지 궁금하시죠? 전 강남이벤트회사에 소속된 도우미에요.
그 후배도 우리 회사에 아르바이트로 도우미하러 와서 알게 된거구요.
나 .......
하원 여고 졸업하고 오년째 이 일을 하고있는데 실은 많이 지쳐 있어요.
하루 종일 미니 스커트를 입고 자동차 옆에 서서 웃고 있을라치면 정말 싸구려 달력에 나오는 여자가 된 기분이에요.
이해할지 모르지만 남자들이 하도 다리를 훔쳐봐서 이젠 의족처럼 느껴져요.
처음엔 일년만하고 동남아쪽으로 한달쯤 여행을 하는게 꿈이었는데, 돈을 못 모았어요.
일만 고되고 보수는 형편없거든요. (사 이) 저, 부탁이 있어요. 꼭 들어주셔야 해요.
나 응? 무슨일인지 먼저 들어봐야지.
하원 나쁜일은 아니에요.
나(해설) 중국집에서 나와 그녀는 건너편의 상가 매장으로 갔다.
그러고는 대뜸 카운터옆의 유리관속에 들어있는 팔각형의 코발트 빛 시계를 꺼냈다.
하원 이거 어때요?
나 (놀라) 응?
하원 선물이니까 받아주세요. 아까 시간이 남아 여길 기웃거리다 봤는데 예쁘더군요.
나 아니, 이걸 내가 왜 받나?
하원 받아주세요. 제게 우동 사 주셨잖아요.
나 우동과 시곈 성질이 다르지. 우동이야 한나절이면 소화가 돼 없어지지만 시계는 몇십년이라도 째깍거리잖아.
그래서 금반지와 함께 예물로 쓰는거라구.
하원 (울먹이며) 싫어요? 그냥 드리고 싶어서 그러는건데....
음악 브릿지
효과 파도소리, 해변의 찻집 분위기
하원 잘 어울리네요! 오래전부터 남자한테 이런거 해주고싶었는데 막상 사람이 없었어요.
나 헌데 왜 나한테....?
하원 내일 당장 코엑스에서 행사가 있는데 이러고있네요. 그렇지만 서울로 떠나기 싫어요.
돌고래처럼 바다에 몸이 반쯤 잠겨있는 기분이에요. 왜 신부들이 5월에 결혼을 하는지 이제 알겠네요....
나 .......
하원 (중얼거리듯) 뜨거운 설탕이 먹고 싶어요. 늘어붙지 않게 잘 볶을수 있는데.......
나(해설) 달걀 속껍질처럼 엷은 막의 외로운 빛이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었다.
뜨거운 설탕. 그것은 고독한 아름다움을 견디기위한 그녀만의 진정제처럼 생각됐다.
나(해설) 나는 서귀포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데 손목에 차고있는 시계가 자꾸 신경에 거슬렸다.
그녀는 내게서 무얼 보았던것일까. 내가 집도 없고 대문도 없는 사람이라는것을 어찌 알았을까.
왜 함부로 내게 발을 들여놓는것인가. 내게는 위험이 있다.
어차피 대문이 없으니 나가고 싶으면 언제든 돌아나가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것인가.
음악 브릿지
효과 빗소리
나(해설) 우산 하나를 둘이 쓰고 여미지 식물원을 돌아나올 때 나는 이미 그녀를 돌려보낼수없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녀와 함께 서귀포로 돌아오니 밤이었다. 우리는 정원의 풀꽃들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나란히 누워있었다.
하원 무섭도록 아름답군요. 이 덧없는 밤의 흐름이.
나 하원인 어떤 사람이지? 아무것도 아는게 없군.
하원 스물 다섯 살. 가족은 없어요. 그래서 순간순간 혼자 존재하는 일이 벅차요.
그래서 그동안 함부로 내 자신을 남에게 내줄수 없었어요.
나 그런데 왜 내게....
하원 그쪽도 저와 마찬가지잖아요.
나(해설) 그 건방진 말에 뜻밖에도 송곳에 찔린듯 동공에 눈물이 배었다. 눈물 따위는 결코 흘리고 싶지 않다.
그렇게 다정다감한 사내가 되어서는 혼자 살아갈수 없다. 그러나, 아주 잠깐 동안,
그녀가 돌아나가기전에 있지도 않은 대문을 닫아걸고 싶다는 열망이 목덜미로 뜨겁게 몰려왔다.
하원 ......우리.... 결혼할까요?
나 (목이 메어) 하지만.....
하원 제가....맘에 안 드세요?
나 (더듬거리듯) 그게 아니라.....내가 문제야. 전에 실패한적이 있거든.
아니, 그보다 다시 실패할것이 두려워. 내겐 나만이 아는 위험이 있어.
결국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야마는 타고난 위험이.....
하원 아니..아니에요. 서둘러 아이를 낳고 제 명의로 적금을 세개쯤 들면 실패할 확률은 그만큼 줄어들거에요.
나 하지만 우린 엊그제 처음 만났어.
추억과 문화재 없이 결혼을 한다는것은 돈 없이 결혼하는것보다 훨씬 위험하지.
하원 단하루의 추억도 문화재가 되는 거잖아요. 영원이 한편 순간을 부르는 이름이듯 말에요.
나(해설) 그녀와 사흘을 더 서귀포에서 지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제주도에서의 사박 오일.
훗날 돌아보면 그것이 그녀와의 신혼여행이었다. 몸과 마음이 5월처럼 풋풋하게 되살아나던 순간들이었다.
그리고 그 며칠새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효과 레스토랑 분위기
정원 나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실, 이곳이 이렇게 혼잡할줄은 몰랐어요.
밀레니엄 축제를 벌인다고 이렇게 떠들썩할줄은.....전혀 예상을 못했어요.
오늘 오후 여섯시에 서울 공항에 도착했어요. 콸라 룸푸르에서요.
나 아, 네. 헌데, 오늘 전해줄 물건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정원 아..네. 하지만 좀 기다려주세요.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이번 말레이시아 왕복이 제 마지막 탑승이었어요.
사실 두 세기에 걸쳐 하늘에 떠있고 싶진 않았거든요.
나(해설) 벽시계는 열시 삼십 분을 막 지나고 있었다.
한시간 반뒤면 남들이 그렇게도 떠들어대던 새천년이 되는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별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자칫하면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 오랜 세월 마룻바닥을 닦아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처지였다.
이제 곧 서른 여섯이다. 어쩌면 서른 여섯개로 늘어나는 나.
오히려 줄어들어야 할 텐데 감당하기 힘들 만큼 삶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정원 우리도 광화문에 나가 볼까요?
나 (독백, 약간 에코로) 하원. 그래, 너를 만나고 싶다. 뜨거운 설탕의 갈망이 다시금 목울대로 차오르고 있다.
너만이 내 고독을 가져갈수있어. 어디 있는지 말해다오. 가겠다. 그게 곧 도망을 뜻하는 것일지라도.
음악 브릿지
효과 커피 숍 분위기, 차 마시는.
하원 두려워요......우리, 결혼해서 잘 살수 있을까요?
나 무슨 소리야? 남들이 뭐라든 상관할거 없어.
나(해설) 돌아보면 하원과 나와의 사랑은 단 며칠간의 위험하고 아름다운 장난같은 일이었다.
그런일은 누구한테나 생에 한번쯤 일어날까말까한 일이다.
오랜 열망 끝에 우리가 결국 힘들여 얻어내는 것은 남들이 이미 가지고 있거나 받아들일수있는 범위안의 것들이다.
그것이 조금 특별한것일 때 세상은 절대 용납하려 들지 않는다. 하원과 나의 관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이와 직업과 연고와 처지 따위를 들먹이며 꽤 심각한 얼굴로 추인을 거부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녀 역시 때때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하원 혼자 있으면 내가 결혼한다는게 실감이 나지 않고, 자꾸 겁이 나요. (울먹이며) 정말 두려워요......
하원 난, 마치 어항속의 금붕어같은 기분이에요. 실은 저,
보고 배운게 없어 당신에게 뭘 어떻게 해줘야 할지 전혀 모르고 있어요. 금 방 저를 싫어하게 될거에요.
짐만 될테니까요. 오랫동안 따뜻한 사람들의 세상을 원했는데 그게 저에겐 갈수없는 나란가 봐요.
나 ........
하원 마치 세상에 떠도는 소문이나 거짓말처럼 살아왔어요. 우리가 제 주도에서 함께 보낸 며칠이 그렇듯이 말에요.
그렇게 덧없는 기쁨의 시간은 처음이었는데, 그래서 그게 또 마지막이란 생각이 들어요.
앞으로 그런 날들이 계속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수 없을것 같고, 또 계속되면 미쳐버릴것만 같아요.
제 말 이해하기 힘들다는거, 알아요. 지금껏 누구를 선택하거나 선택받은 일이 없어요.
실은 혼수품 사러 다니면서도 내내 두려웠어요. 남의 물건을 사러다니는 기분......
나 그래, 그런 기분.....이해할 것 같아....
하원 (절박하게) 일도씨. 저 버리지 말아요! (울먹이며) 저 좀 잘 붙들어주세요. 절 꼭 붙들어주세요!
음악 브릿지
효과 밀레니엄 축제 분위기, 사람들 환성, 박수 소리 등
정원 아버진 5.16 군사 쿠데타에 가담한 군인이었습니다. 요직을 두루거쳤고, 5공때는 장관까지 지냈죠.
우리 자매는 그 사람이 함부로 뿌린 씨앗이예요. 저의 어머닌 요정출신이고 하원의 어머닌 배우였죠.
결국엔 그네들조차 우릴 버렸어요. 세살아래인 하원을 다섯살때 처음 봤어요.
사람들 (환성, 박수 소리 등) 와! 와! 멋있다! 브라보!
정원 그리고 하원일 열아홉살때 다시 만났죠.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였는데 어느날 장관이 보낸 사람이 불쑥 찾아왔더군요.
그러곤 차에 태워 삼청동의 적산가옥으로 데려가더군요. 거기서 막 중학 교를 졸업한 하원일 다시 만났어요.
키가 무척 커져있었는데 굉장히 떨고 있더군요. 그 이듬해 장관이 패혈증으로 죽었어요. 별다른 느낌은 없었죠.
하원인 대학을 포기하고 모델이 되기 위해 여기저길 찾아다녔죠. 그 몇년동안 우린 약속이나 한것처럼 어머닐 찾아가지 않았어요.
가정을 가지고 있는 그네들에게 우린 부담스런 존재였으니까요.
효과 사람들 박수, 환호성 소리
나(해설) 그때 세종로일대의 빌딩에 켜져있던 불들이 일시에 꺼졌다. 자정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눈에 보이는것은 빽빽이 사방을 에워싸고있는 군중뿐이었다.
사람들 (카운트 다운) 열! 아홉! 여덟! 일곱! 여섯! 다섯!....
나(해설) 군중들은 저마다 옆에있는 이의 손을 굳게 잡고 카운트다운을 따라하고있었다.
나는 엉겁결에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뒤에서 누군가 내 손을 잡아온것은 새천년의 삼초전이었다.
사람들 두울! 하나! 와!
효과 폭죽 소리
나(해설) 하늘에서 하얀종이꽃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이 잘게 조각난것처럼 오래오래 세종로 일대가 분분했다. 불꽃놀이는 십여분간 계속됐다.
정원 그만가죠. 하원이가 보낸 메시지를 받으려면 집까지 함께 가야돼요.
효과 폭죽 소리 고조, 다운.
정원 제주도에서의 일이 동생한테 결과적으로 독을 삼킨일이 되고 말았어요.
당신의 영역에서나 가능한 일이 그애한테 발생했던거에요.
아무튼 당신은 그애한테 당신이 알고 있는 세상을 보여줘선 안됐던거에요.
그애가 서귀포로 찾아갔을때 왜 그냥 돌려보내지 않았나요?
나 .....
정원 그앤 뒤늦게 몹시 혼란스러워했어요. 그러면서도 당신을 받아들이기위해 무척 애를 쓰더군요.
네, 당신에 대해 알고 싶어했어요. 모든걸 말이죠. 떠나고나서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몇개월 전부터 흥신소를 통해 당신에 대한 정보를 건네받아 일주일 간격으로 우편으로 전해주었어요.
음악 브릿지
나(해설) 도둑처럼 그녀의 뒤를 따라 그녀의 집으로 갔다.
텔레비전에서는 그새 광화문 밀레니엄 축제 행사를 녹화로 내보내고 있었다.
우주시계추가 가로로 흔들리며 자정의 시간이 지나고 이어 폭죽이 솟아오르고, 서울시장이 보신각 종을 때리고,
다시 빌딩들에는 일제히 불이 들어오고, 영종도 공항에서는 21세기 젊은이 이천명이 흰옷을 입고 활주로를 내닫고,
병원에서는 즈믄둥이가 탄생해 카메라에 둘러싸여 사지를 버둥거리고,
대통령이 평화선언을 하는 가운데 '자정의 태양'이 세종로 한가운데서 부시게 타오르고있었다.
그때, 그녀가 일어나더니 서랍에서 비디오테이프를 꺼내 플레이어에 집어넣었다.
정원 이 비디오, 보고 계세요. 전 밥을 차릴게요.
효과 비디오 칙칙 소리
나(해설) 그것은 상태가 매우 불량한 흑백테이프였다.
언뜻언뜻 야자수와 바다가 나타났다가는 화면이 도로 구겨지거나 흔들렸고 다시 칙칙거렸다.
효과 파도 소리 고조, 다운
하원 (비디오 소리) 안녕? (사이)어..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굉장히 힘드네요.
(사이) 여긴 필리핀의 엘니도구요. 벌써 세달됐어요. (사이) 전 잘 지내고 있어요.
여기가 다른 나라여서그런지 제주도에서의 일도 흐릿하고 실감이 나지 않아요.
효과 off에서 도마 소리
나(해설) 새벽 두시가 넘은 시간에 정원은 밥을 짓고, 부엌칼을 들고 감자를 썰고있었다.
하원 (비디오 소리) 당신이 누군지, 떠나와서 조금씩 알게됐어요. 당신은 스물 여덟살에 결혼을 했죠.
육군 장성 출신인 전기공사 사장의 맏 딸과 말예요. 왜 이 여자와 결혼을 했나요? 가난이 싫어서 그랬나요?
아니면 장인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배경이 필요해서요? 정말 사랑해서 결혼했나요?
결국 당신은 처음보다 더 나빠졌어요. 안타까운 일이에요.
나(해설) 그래, 나는 결국 이렇게 되었다. 그리고 살아남기위해서 서둘러 또 어떤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화면이 또 몇초간 울고 나서 얼마 후 그녀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핫팬츠에 헐렁한 티셔츠 차림으로 원주민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가슴팍을 드러낸 건장한 남자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아무런 질투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원 와서 식사하세요. 미리 준비한게 없어 찬이 부족해요.
효과 식사하는 소리
나(해설) 그녀와 말 한마디 없이 식사를 끝낸 다음, 다시 비디오 테이프를 틀었다.
효과 (비디오) 파도소리, 물새소리 깔리며
하원 (비디오) 오늘이 며칠이죠? (사이) 그곳은 이제 겨울로 접어들었겠군요.
오늘 당신께 마지막 소식을 전합니다. 며칠후 전 서사모아로 떠날 예정이에요.
제가 거기 도착할 때쯤 당신은 이 테이프를 받게 되겠죠. 지상에서 해가 가장 늦게 지고 가장 늦게 뜨는 나라.
(사이) 거기 가서 혼자 죽을 생각이에요.
나(해설) 문득 주방에서 설거지하는 소리가 멎고 이쪽을 돌아보는듯한 침묵이 몇 초간 흘러갔다.
하원 (비디오) 당신은 제 첫 남자가 누군지 궁금해하셨죠. 아니라구요? 하지만 전 알고있었어요.
제주도에서 첫날 밤 보낼 때....이제 얘기할게요. 그 사람은 나이가 아주 많은 사람이에요.
몇년전에 패혈증으로 죽었죠. 놀라지 마세요. 처음엔 저도 그분이 아버지란걸 몰랐어요.
그때 전 겨우 중학교 3학년이었고 어머니밑에서 쭉 커왔으니까요.
어머니가 잠시 일본에 다니러간 사이 전 성북동 큰집에 가있었는데 그때 그분을 보았어요.
나중에 언니와 살면서 그 사람이 아버지란걸 알게 됐구요.....
효과 난폭하게 수돗물 트는 소리 고조, 다운.
하원 (비디오) 제가 이런 여자란걸 그땐 미처 말씀드릴수 없었어요.
제주도에서 당신을 만나고나서 전 새로운 인생이 가능하다고 믿었죠.
근데 서울로 돌아와서부터 까맣게 잊고있던 그때 일이 되살아났어요. 밤마다 악몽에 시달려야 했구요.
미안해요. 전 그분을 사랑하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알아요..알아요, 저주를 받은거죠.
효과 파도소리, 물새 소리
하원 (비디오) (울먹이며) 단 며칠 동안이지만 당신을 사랑했어요. 믿죠? 후회하지않아요.
설탕을 뜨겁게 볶을수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어요. 그 말에 속아주는 당신이 고마웠어요.
나(해설) 더 이상 아무말없이 전생을 잊고 나와 결혼을 해서 생을 계속 할수는 없었던것일까.
진정 그것이 그녀에겐 불가능했던것일까. 정원은 그동안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나와 거울앞에 앉아 화장을 하고 있었다.
하원 (비디오) 안녕, 푸른 밤의 고래잡이 아저씨. 햇빛 좋은날, 그 윤기나는 검은등에 물방울 하나 잘 쉬었다갑니다. 안녕.
음악 브릿지
나(해설) 서사모아라고했다. 때마침 정규 방송에서는 어쩌면 그녀가 지금 가있을지도 모를 서사모아를 보여주고 있었다.
지구상에서 일몰과 일출이 가장 늦은 나라. 그녀는 서사모아에 가서 죽을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믿고싶지는 않다. 살아있어야한다. 제발 살아만 있어다오.
정원 비디오테이프는 한달 전에 우편으로 받았어요.
나 .....
정원 이제 아셨겠지만 하원인 돌아오지 않습니다.
효과 술, 잔에 따르는 소리
정원 (술 마시고는) 그애가 유일한 제 삶의 증거였어요. 우리 자매는 어떤 사람의 호적에도 올라있지 않아요.
둘 다 사생아처럼 살았죠. 그런 존재에게 삶의 어떤 가능성이 주어져있다고 생각하세요?
나 .......
정원 당신이 내게서 하원이를 데려갔어요. 이제와서 탓하고자하는 말은 아니에요.
하지만 십년 가까이 둘이 한 이불속에서 잠을 잤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래요. 우린 부부처럼 살았습니다.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면서요.
나(해설) 아무말도 할수 없었다. 그러나 당장 오늘 아침에 나는 저쪽 비서관을 만나기위해 일곱시까지 약속장소로 나가야했다.
내가 정치적 희생양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어쩔수없는 일이었다.
정원 이대로 시간이 흘러가면 저 역시 하원이처럼 언젠가 아무도 모르는곳에서 혼자 죽게될거에요.
여기저기 떠돌다 묵은 신문지처럼 정육점에 버려지고 싶지 않아요.
나 .......
정원 알아요. 제가 지금 어려운 얘길하고 있다는거요.....
나(해설) 나는 약속장소로 떠나기위해 구두를 신었다. 순간 하원의 얼굴이 마지막 영상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새로 만난 사람 역시 전에 알았던이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것을.
그녀가 잠옷을 끌고 들어간 방에선 한줄기 푸르스름한 빛이 새어나오고있었다.
나는 구두를 벗고 여자가 기다리고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음악 엔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