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_ 도마 안중근
장르_ 휴먼 서사극
감독_ 서세원
제작_ ㈜소스원 프로덕션
배급_ ㈜엔터모드
러닝타임_ 미정
등급_ 미정
개봉일_ 2004년 8월 27일
홈페이지_ www.domaahnjoongkeun.co.kr
나오는 사람
안중근 유오성
이토 히로부미 윤주상
검찰관 정성모
어머니(특별출연) 고두심
총 제작비 60억, 중국 올로케이션
1월 16일 인천 공항 출발→ 1월 26일 중국 촬영 시작→ 3월 13일 중국 촬영 완료
프롤로그
안중근…
1910년 32세,
조국을 아는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2004년 현재…
우리는 그의 유해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오직 그의 유해만 못 찾고 있는 것일까?
안중근에 대해 우리가 몰랐던 몇 가지…
하나. 안중근을 알고 있는가?
안중근은 한국이 낳은 위대한 애국자이고 선구자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 중에는 그를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의혈투사로만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또한 이토 처단도 ‘암살’이라고 알고 있거나, 심지어는 권총이 아닌 ‘도시락 폭탄’으로 그를 죽였다고 알고 있는 이들도 있다. 이것은 정확하지 않으며,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바로 알려고 노력하는 이도 많지 않다. 역사를 바로 알지 못하고, 어떻게 미래를 꿈꿀 수 있단 말인가?
둘. 안중근, 그는 왜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나?
이토 히로부미는 현대 일본의 기초를 쌓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는 러•일 전쟁 후인 1905년 조선에 통감부(統監部)가 설치되자 초대 통감으로 부임, 한국의 주권ᆞ영토ᆞ재물을 강제로 빼앗는 기초공작을 수행하였다. 또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할 목적으로 한국 정부를 강압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하게 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안중근을 비롯한 독립군들이 민족의 원흉인 그의 목숨을 노렸다.
“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은 아니다. 나의 목적을 달성할 기회를 얻기 위해 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라도 이토가 그 시정방침을 그르치고 있었다는 것을 일본 천황이 들었다면 반드시 나를 가상히 여길 것이라 생각한다.”
-안중근 유고집中-
셋. 안중근,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몰랐다?
그는 사실 이토의 얼굴은 모르고 있었다. 우연히 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토의 소식을 듣고, 신문을 통해 그의 도착과 시간을 알아냈지만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본적은 없었다. 때문에 이토가 기차에서 내렸을 때, 그가 선두에 선 것과 악수를 하는 상황 등으로 그가 이토임을 확인하고 그 자리에 서서 그의 오른쪽 가슴을 향해 총을 쏜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이토가 아닐 경우 모든 거사는 수포로 돌아갈 수 있으므로 안중근은 이토의 곁에 있는 일본인들 중에서 가장 위엄이 있어 보이는 세 명을 향해 세 발을 더 쏘았다.
넷. 안중근, 그는 최고의 저격수였다?
김구의 백범일지에 따르면 ‘안중근은 500미터 떨어진 솔방울도 한방에 명중할 정도로 사격에 우수하여 독립군을 이끌고 일본군에 싸웠을 때 큰 공로를 세웠다. ’라고 밝힐 만큼 안중근은 뛰어난 사격술을 지녔다.
안중근은 총 7발 중6발을 쏘았다. 그 6발 중 3발은 이토 히로부미의 폐와 가슴, 복부에 명중시켰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의 어깨,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의 장딴지, 만철이사 다나카 세이타로의 허리를 명중시켰다.
비서인 모리는 당시를 회상하며 말하길 “갑작스런 총소리와 함께 이토 각하가 쓰러졌다. 더불어 총소리가 나자 나도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쓰러졌고, 그때 총을 쏜 인물을 바라봤다. 먹이를 노리는 야수의 눈과 같은 불길이 느껴지는 남자가 총을 들고 서있었다.”라고 전한 바 있다.
다섯. 안중근, 그는 왜 마지막 한 발을 남겼나?
그가 마지막 한 발을 남긴 이유로 ‘자살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설도 있지만 만약 그렇다면 이토를 쏜 후 바로 자기 머리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어야 맞다. 또한 이는 '의연하게 체포를 당했다' 라는 말과도 서로 맞지 않는다.
그는 일본의 조선 침략이 부당한 것임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이다. 따라서 안중근에게 도주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토를 죽이는 것도 한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의 기회를 얻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그는 더더욱 도주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왜 실탄 한 발은 남겼는가..
그것은 그 자신이 자살할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그는 이토 저격 후에 그 자리에서 도망치기는 커녕 이후 재판에서 당당하고 꿋꿋한 모습을 유지해 일본인 재판관들을 당황시켰다고 전해지고 있다.
여섯. 안중근, 그의 손가락은 왜 잘렸나?
안중근의 손가락이 잘린 것에 대해 고문에 의해서 잘렸다는 설이 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1909년 안중근은 “우리가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으니 남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특별한 단체를 만들지 않고는 아무런 일도 꾸미지 못해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손가락을 끊어 동맹의 표시를 보인 다음,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단체를 만들어 기어이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며 김기룡•엄인섭•황병길 등 열두 동지와 상의를 했다. 그들은 각자 왼손 약지를 자르고 그 피로 태극기 위에 대한독립이라는 네 글자를 크게 쓰며, 단지의 피로서 맹세를 한 단지동맹을 맺었다.
일곱. 안중근, 그의 마지막 유언은?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 순국 직전에 정근, 공근 두 아우와 홍 신부에게 남긴 말씀-
여덟. 안중근, 그의 유해는?
정부가 안중근 유해발굴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1986년 12월. 정부와 학계, 민간단체의 끊임없는 발굴 노력으로 2000년 7월, 여순 순국선열 기념재단에 의해 안중근이 순국한 현장으로 보이는 중국 뤼순 감옥 교형실의 위치가 확인되었다. 뤼순 감옥 진열관에 의해 건네 받은 2종의 감옥 배치도(1911,1914년)에는 감옥 청사 오른쪽으로 50m쯤 떨어진 구석에 사형장이 표기되어 있는데, 이곳이 안중근의 순국 현장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일반건물이 들어선 데다, 안중근 순국 후 94년이나 경과돼 묘소의 이장 여부에 대한 확인이 불가능한 실정이다.
안중근이 생을 마감한지 100년 가까이 되었고, 독립한지 이미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해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크나큰 비극이다. 일본정부 보관문서를 뒤지면서 관련 자료를 추적중인 최서면 명지대 석좌교수, 함세웅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 이사장 등은 “남은 자료도 많지 않고 문서도 정확하지 않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성과가 나올 것을 믿는다”라며 지금도 포기하지 않고 유해 찾기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Synopsis
코리아, 우라! 코리아, 우라! 코리아, 우라!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하얼빈 역에 여섯발의 총성과 ‘코리아 우라’라는 러시아어 만세소리의 외침이 들린다. 독립투사 안중근이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쏜 것. 만세 후 체포되어 일본 검찰관에게 취조를 받는 중에 이토의 죽음을 알고 감사의 기도를 올린 그는 이토의 얼굴을 모르는채 총을 쐈다고 실토, 검찰관들을 당황시킨다. 게다가 장전된 총알 일곱발 중 일부러 한발을 남긴 것에 대해 검찰관들은 의구심을 갖게 되는데….
32세, 조국을 아는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토의 죽음을 통해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려 했던 그는 의연한 모습으로 재판에 임한다. 안중근은 반년 후인 3월 26일 32세, 형장의 이술로 사라진다. 그가 사형을 당하고 며칠 후, 국가적 원수인 안중근의 집안을 멸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사복 형사들이 안중근의 고향을 찾는다. 그들은 고향 강둑에 앉아 있는 안중근의 9살 아들에게 다정하게 캐러멜을 건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들을 독살시키는데….
Character & Cast
안중근
1879년 항해도 해주 출생
1895년 천주교 입교 (세례명:도마)
1904년 평양에서 석탄상 경영
1906년 삼흥학교 설립
1907년 연해주로 망명 의병운동에 참가
1909년 11명의 동지와 죽음으로써 구국투쟁 결의(12동의단지회)
1909년 10월26일 이토 히로부미 사살
1910년 2월 사형선고
1910년 3월 26일 사형집행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어려서부터 사냥을 즐겨 사냥꾼들을 따라다니며 산과 들에서 뛰어 노는 것을 좋아했다.
차츰 성장하면서 총을 메고 산에 올라 새와 짐승들을 쫓아 다니느라 학업은 뒷전이었고, 부모님과 선생들에게 크게 꾸지람을 들어도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평생 동안 즐기는 일이 네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친구와 의를 맺는 것, 둘째는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
셋째는 총으로 사냥하는 것, 넷째는 날랜 말을 타고 달리는 것.
그래서 의협심이 있고 사나이다운 사람이 어디에 산다는 말을 들으면 멀고 가까운 것을 가리지 않고 총을 지니고 말을 달려 찾아가곤 했다.
안중근 역 / 유오성
<도마 안중근>의 영화화가 기획되면서 타이틀롤을 맡을 배우로 가장 먼저 떠오른 인물이
유오성이었을 만큼 지금껏 그가 보여준 이미지는 정직하고, 믿음직스럽다. 이를 증명하듯 중국과 한국을 오가는 촬영 내내 자연스런 연기와 카리스마로 극중 안중근을 재현, 최고
배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2004년 <도마 안중근>
2003년 <별>
2002년 <챔피온>
2001년 <친구>
2001년 <주유소 습격사건>
1999년 <간첩 리철진>
1997년 <비트>
외 다수
2001년 제9회 춘사영화제 남우주연상 <친구>
2001년 제46회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남우주연상 <친구>
1999년 한국최고 인기연예대상 남자부문 인기상
1998년 MBC 연기대상 신인상
이토 히로부미
1841년 소쿠니 출생
1863년 이노우에 몬타를 비롯한 4명과 영국으로 비밀유학을 떠남
1864년 외국 열강들이 장주번을 습격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런던에서 귀향
1864년 연합군과의 강화회의에 통역으로 참석
1869년 재무부 장관
1885년 일본 최초의 내각 총리대신
1888년 일본 추밀원, 귀족원 의장 취임
1899년 1차 한일협약 조인
1905년 한국에 대한 강압 주도, 제2차 한일협약 조인, 초대 통감 부임
1907년 이토의 압력으로 구성된 이완용 내각과 정미7조약 체결
1909년 안중근에 의해 사살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젊었을 때 영국공사관을 습격했고, 국학자인 하나와 다다토미를 암살하는 등 과격파였다. 또한 영국유학을 다녀와 출세를 거듭하여 초대 내각총리, 초대 추밀원의장을 지내는 등 근대 일본의 가장 훌륭한 정치가 중 하나로 인정받아1984년까지 1천엔 지폐의 모델로도 나왔었다.
이토 히로부미 역 / 윤주상
연극으로 이미 탄탄한 연기력을 인정 받은 윤주상은 수많은 수상 경력이 말해주듯 광기 어린 함장의 모습부터 친근한 옆집 아저씨에 이르기까지 어울리지 않는 연기가 없다. 현재 방영중인 드라마 ‘장길산’에서도 유오성과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있는 그는 <도마 안중근>에서 아시아를 정복했던 일본 최고의 영웅인 이토 히로부미 역을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완벽히 소화해내고 있다.
2004년 <효자동 이발사>
2004년 <아라한 장풍대작전>
1999년 <유령>
외 다수
1997년 서울 국제연극제 연기상
1995년 연극의 해 최우수 남우주연상
1991년 제33회 백상예술대상 남자연기상
1987년 제5회 이해랑 연극상, 동아 연극상
안중근 어머니 역 / 고두심(특별출연)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당대 최고 연기파 배우. 그녀는 <도마 안중근>에서 아들을 위해 헌신하는 전형적인 한국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심어 준다. 뿐만 아니라 보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는 가슴 찡한 연기로 긴 여운을 남긴다.
2004년 <인어공주>
2001년 <굳세어라 금순아>
2000년 <청춘>
외 다수
2003년 SBS 연기대상 단막특집 연기상
2001년 MBC TV 부문 특별상
2000년 SBS 연기대상 대상, 제주도 문화상
1991년 백상예술대상 연기상, MBC 방송연기대상 대상
1990년 KBS 연기대상 대상
1983년 대종상 여우조연상
1982년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최우수 여자조연상
검찰관 역 / 정성모
수많은 드라마를 통해 다양한 캐릭터를 보여준 정성모는 <도마 안중근>에서 비록 자신의 조국 최고 영웅을 쏜 국가적 원수지만 취조 중 안중근의 인간적인 면에 끌리게 되어 그에게 예우를 다하는 검찰관 역을 연기했다. 그의 차갑고 지적인 이미지는 다소 어색할 수 있는 일본인 캐릭터를 표현하는데 조금도 손색이 없다.
1995년 <모래시계>
1994년 <손톱>
1985년 MBC연기대상 남자신인상
Director
감독/각본 서세원
2001년 제작한 영화 <조폭마누라>의 흥행성공으로 영화 제작자로서의 가능성을 보였다. 이후 <긴급조치 19호>의 제작과 <네발가락>에 투자를 했다. 현재 제작자로서의 염원이었던 <도마 안중근>을 기획, 제작을 마치고 후반 작업에 모든 열정을 쏟고 있다.
2004년 영화 <도마 안중근> 제작, 감독
2002년 영화 <긴급조치 19호> 제작
영화 <네발가락> 투자
2001년 영화 <조폭마누라> 공동제작, 투자
1986년 영화 <납자루떼> 제작, 감독
제작 ㈜소스원프로덕션
제공 ㈜베어엔터테인먼트
㈜선양
㈜KBS미디어
㈜MBC미술센타
㈜시네마라인
㈜신영인더스트리
배급 ㈜엔터모드
시나리오 서세원
각색 서세원, 김길남, 고나미
감독 서세원
한국 프로듀서 유재영
중국 프로듀서 강민선
연출부 서광석, 조유진, 엄청란
한국 현장 진행 윤원일, 서충원
중국 현장 진행 이준현, 원주한
집행감독 김풍기
제작실장 이용석
제작회계 고나미
제작부 장지환
촬영 안창복, 안성균
미술감독 진병식(MBC미술센타), 조유진
분장 박소연, 지예니
의상 최차남
의상팀 한명숙, 김지애
미술진행(MBC미술센타) 김대규
편집 김세정(고임표 편집실)
음악 석성원
주제가 김동규 – ‘도마 안중근’
삽입곡 강인원 - '내 영혼의 그윽이 깊은데서'
<중국 스탭 제외>
하얼빈 의거, 그 11일간의 시나리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해 하얼빈에 머무른 것은 10박 11일,
그의 짧지만 영원한 역사적 발자취를 되짚어 보자.
1909년 10월 21일
오전 8시 50분 블라디보스토크 역, 그동안 함께 활동했던 우덕순과 그의 생애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짧지만 긴 여행을 시작한다.
오후 3시 6분 우슬리스크에 도착한 이들은 포그라니치누이 행 열차의 이등차표를 구입, 오후 9시 25분 포그라니치누이 역에 도착하여 독립활동을 지원해 주던 한의사 유경건의 집을 찾아가 러시아어에 능통한 그의 아들 유동하를 만나 함께 하얼빈으로 향한다.
1909년 10월 22일
오후 9시 15분 하얼빈 도착, 마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김성백의 집을 찾았다.
그는 재 하얼빈 한인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유동하와는 사돈지간. 그의 집에서 의거 때까지 머물며 거사 계획을 짜기로 한다.
1909년 10월 23일
안중근과 일행은 오전에 이발소에 들러 머리를 깎고 사진관에 들러 기념사진을 찍는다.
거사를 앞두고 마음의 준비를 한 것이다. 오후엔 동흥소학을 찾아 교사이며 블라디보스토크의 신문 대동공보의 하얼빈 지국장을 맡고 있는 김형재를 만난다. 근처 김성옥의 집에 머물고 있는 동지 조도선과도 만남을 갖는다. 안중근은 김성백의 집으로 돌아와 ‘장부가’를 읊으며 거사의 의지를 다진다.
1909년 10월 24일
아침 일찍 안중근과 우덕순은 걸어서 2~3분 거리인 하얼빈공원에서 산책을 한다. 공원 안을 산보하면서 거사 계획을 세밀히 검토한 후 차이자거우로 가기로 하고 유동하를 제외한 우덕순, 조도선과 함께 오전 9시에 하얼빈을 출발, 낮 12시쯤 차이거자우에 도착한다. 그 곳에서 역 승무원을 통해 모레 오전 6시에 이토의 특별열차가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1909년 10월 25일
안중근 일행은 오전에 다시 한번 거사계획을 점검한다. 이토가 도착하는 오전 6시라는 시간여건상 날이 어두워 거사의 성공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 만일의 경우를 대비, 우덕순과 조도선이 차이자거우에 남아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안중근 홀로 낮 12시 열차로 하얼빈에 되돌아 간 후 김성백의 집에서 거사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1909년 10월 26일(사건 당일)
아침 일찍 일어난 안중근은 새옷을 벗어놓고 수수한 양복으로 갈아입는다. 오전 7시, 그는 권총을 지니고 곧장 역으로 나간다. 이토가 도착할 때까지 안중근은 역 근처 찻집에서 초조하고 긴장된 마음을 달래기 위해 2~3잔의 차를 마셨다. 오전 9시, 이토 일행의 특별열차는 하얼빈 역에 도착했다. 이토의 도착과 동시에 러시아 군악대 소리와 러시아 군대의 경례소리를 듣고 그는 곧바로 역으로 향한다.
안중근은 이토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뒤쫓았다. 이토는 기차에서 내려 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영사단이 있는 쪽으로 가고 있었으나 이때까지만 해도 안중근은 스스로 생각하는 그가 확실히 이토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토로 생각되는 자를 뒤쫓으면서 영사단 2~3명과 악수하는 것까지 확인하고 러시아 군인들 사이에서 방아쇠를 당겼다.
이토는 오른쪽 가슴부분과 복부 등 세곳에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으며 참착한 어투로“당했다.”고 말했다. 또한 저격을 한 후에도 혹시 잘못 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른 일본인을 더 총으로 쏘아 가와카미 총영사와 다나카 이사, 모리 타이지로가 부상을 입었다. 안중근은 그 자리에서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되고, 몸에 지닌 십자가를 붙잡고 목적을 달성한 것에 대한 감사기도를 드렸다.
정오무렵, 김성백의 자택에 뛰어든 러시아 관헌에 의해 유동하가 체포된다. 안중근의 소지품도 이때 압수당해 24일 한국민회에 모인 사람들 중 김성백의 동생 김성화와 대동공보 지국장 김형재도 연행되었다.
1909년 10월 27일
오후 4시가 지나 김성백이 집에 정대호와 사촌 그리고 안중근 가족일행이 도착하는 순간 러시아 헌병이 들이닥치고 그들의 신원을 확인한다. 정대호는 순간적으로 안중근의 아내 김아려를 ‘누나’라고 했다. 러시아 관헌들은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하고 김성백, 정대호, 그의 사촌동생 정서우를 연행한다. 안중근을 비롯한 공범으로 총 15명의 한국인이 일본총영사관으로 인도됐다.
1909년 10월 28일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의 검찰관으로 에조부치 다카오가 이 사건의 담당검사로 여순에서 하얼빈에 도착했다. 1905년 11월 17일 체결한 ‘한일보호조약’에 의거하여 한국인의 보호는 일본 관헌이 행하는 것으로 되어있어 러시아 관헌으로부터 안중근 등을 인계받는다.
1909년 10월 30일
검찰관 에조부치 다카오는 하얼빈 총영사관에서 처음으로 안중근을 취조했다. 통역은 서울의 한국통감부에서 파견된 소노키 스에키가 10월 30일부로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으로 촉탁되었다. 취조실에서의 안중근은 전혀 주눅들지 않았으며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편한 표정으로 잡담에 응했다. 에조부치 다카오는 시간을 들여 꼼꼼히 자백을 받아낼 작정이었다. 그리고 안중근이 일본 황제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해 주목했다.
1909년 10월 31일
검찰관 에조부치 다카오는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세명을 취조했다. 그들은 안중근과 암살사건에 대해 전면 부인했고 체포당한 이후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했다.
1909년 11월 1일
에조부치 다카오는 안중근 등 9명에게 구류장을 붙이고 오전 9시에 관독도독부의 헌병대에게 신병을 인도하여 여순감옥으로 호송시키기로 하였다. 하얼빈에 남은 김성화, 정서우 등 6명에 대해서는 모두 석방절차를 밟았다.
오전 11시 안중근 등 9명은 헌병대위 니티에이 겐지 등 12명에게 호송되어 하얼빈 역을 출발했다. 열차가 하얼빈 교외로 접어들었을 때 약간의 한국어를 구사하는 헌병이 안중근에게 말을 걸었다. “너의 아내도 틀림없이 탄식하고 있겠지?”그러자 안중근은 “내겐 아내도 아이도 없다.”고 말했다.
한편 하얼빈에 남은 검찰관 에도부치 다카오는 총영사관 취조실에서 참고인 진술을 받고 있었다. ‘정대호의 누나’라고 칭하는 31세의 여인, 안중근의 아내였다. 그녀는 가느다란 몸매에 엄한 추궁에도 시종일관 강인한 모습으로 조금도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
1910년 3월 26일(사형 집행)
새벽녘부터 하늘이 흐렸고 비도 내리기 시작했다. 사형 집행일이다. 동경에서 전해지는 소문으로는 이토 히로부미의 기일이 26일 이므로 반년후인 3월 26일에 집행한다는 것이다.
오전 9시가 지나 두 동생과의 마지막 면회가 있어 동생에게 마지막 유언을 전했다. 이때 안중근은 어머니가 넣어주신 흰 비단바탕의 저고리 상의와 검은 바지와 조선화를 신고 있었다. 안중근은 이윽고 형장으로 끌려갔다. 교수대가 바라보이는 검시실에 에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서장, 소노키 통역생, 기시다 서기, 오리타 의사, 미즈노∙가마타 두 변호사 등이 들어갔다. 마지막 남길 말을 묻고는 두 장의 붓글씨용 종이를 접어 눈을 가리고 그 위에 흰 천을 감아 눈을 가렸다. 세 명의 간수에게 안내되어 교수대 위로 오른 안중근은 조용히 3분 정도 기도를 했다.
오전 10시 4분, 목이 밧줄에 걸렸다. 간수가 판때기의 한쪽 끝을 밟자 안중근의 몸은 떨어져 매달리게 되었고 오리타 의사는 10시 15분에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했다.
오후가 되어 찬 봄비가 내리는 가운데 운구는 마차로 운반되어 감옥서 부지내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에필로그
이토 히로부미 살해 이유
1. 한국의 민황후를 시해한 죄요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3.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요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요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요
8. 군대를 해산시킨 죄요
9. 교육을 방해한 죄요
10.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요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요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요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요
14.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요
15. 일본 천황 폐하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