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세계를 말한다/ 공순해의 수필, 그 작품 세계>
삶의 쇄신을 위해 정기적금 붓듯 쓰고 있는 요즘
공순해
1 수필 양식을 거부했던 시간에서 수용하기까지
1985년 뉴욕에 도착해 그다음 해 뉴욕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수필 부문을 수상했다. 그리고 그다음 해 소설 부문에서 당선 없는 가작을 수상했다. 이 별 볼 일 없는 이력을 밝히는 이유는 그때 수필 심사위원이셨던 이계향 선생님이 서울 가서 등단하자고 유혹(?)하셨던 탓이다. 아무리 등단이 좋아도 수필은 아니지,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교만으로 그 제의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문학예술은 창작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붓 가는 대로 쓰는 수필이 무슨 창작이야, 수필 씁네 하고 문학 동네 언저리에 얼쩡거리는 사람들 속으로 내가 왜 들어가, 하는 같잖은 오만으로 그 제의를 차일피일 미뤘다. 그러다 <<신대륙>>이 후원자 문제로 와해 되고 내 글쓰기도 휴면으로 들어갔다.
2008년 11월 은퇴해 시애틀로 이주했다. 그리고 2009년 2월 제2회 <시애틀문학상> 수필 부문 수상자가 됐다. 이 공모전엔 소설 부문이 없었던 탓이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말씀에 딱 맞게 비로소 내게 맞는 양식이 수필임을 깨닫게 됐다. 그간 소설을 벗어버린 이유가 체력 때문이었기에 경량의 창작인 수필은 내게 꼭 맞는 옷이었다. 그들이 붓 가는 대로 써도 나는 창작을 하겠어, 하는 속마음으로 마침내 수필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이처럼 내 지향점은 창작이었다.
2 창작 수필과 비창작 수필
수필은 형식의 제약을 받지 않고 개인적인 서정이나 사색과 성찰을 산문으로 표현한 문학 양식이다. 수필은 뜻 그대로 ‘붓을 따라서, 붓 가는 대로 써놓은 글’로서 무형식의 자유로운 산문이다. 수필은 개성적이며 고백적인 문학이어서 작가의 개성이 짙게 드러난다. 또한 제재 선택에 제한이 없어 느낀 것과 생각한 것은 무엇이나 다 자유자재로 서술할 수 있다. (하략) 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에서 발췌
위와 같은 정의가 그간 나로 하여 수필을 멀리하게 했다. 지난 세대 선배들의 왜곡으로 먼 길을 돌아온 셈이다. 마침 LA 이민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가신 이관희 선생이 <<e-수필>>을 창간해 창작 수필의 기치를 높이 들고 계신 때였기에 인터넷 검색으로 창작 수필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행운이었다. 수필 언어의 은유에 대해선 유병근 선생님께 많이 신세 졌다. 이 두 분이 내 수필의 안내자였다.
수필은 태생적으로 광대한 영토를 가진 문학 양식이다. 대별하면 창작 수필(예술로서의 수필), 비 창작 수필(문사철 적인 수필), 수필 양식의 글(일상생활 속의 온갖 생활문) 등이다. (과거엔 중수필, 경수필, 미셀러니, 등이라고 했다.) 시, 소설, 희곡 등의 창작 문학을 제외한 문학의 우수마발(?)을 수필이 모두 끌어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은 창작이다, 란 전제를 놓고 보면 수필도 예술이 되기 위해선 창작돼야 한다. 창작되지 않은 예술은 없으므로 수필이 문학예술이 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창작의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하면 무형식이 형식인 수필에서 도대체 뭘 창작할 수 있나 궁금할 수도 있겠다.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그 형식을 선택하고 구성을 창작하면 된다. 김기림은 <길>이란 수필을 시의 형식으로 썼다. 강경애는 시적 분위기의 수필 <꽃송이 같은 첫눈>을 소설 형식을 빌려서 썼다. 두 분 모두 1940년대에 이런 작품을 남긴 것이니 우리는 눈먼 후학들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더 나아가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나는 오늘도 진흙을 이겨 육체의 형식을 주신 것처럼 물상 속에서 수필의 형식을 찾아 헤맨다. 돌에서 형상을 꺼내는 조각 작업 같다고나 할까.
가장 손쉬운 창작은 형상화다. 현대 예술은 개인의 정서도 사물화해서 드러낸다 하니 수필이라고 이를 피해 갈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졸작 <그림>은 별꽃이란 사물을 통해 ‘그리움’이란 객관적 정서를 형상화했다. <양배추 한 통>은 양배추의 미완(未完)을 통해 삶의 미완에 대한 두려움을 그렸다. (주제를 살리기 위한 형상화, 즉 원관념과 보조관념도 없는 글을 두고 형상화가 잘 됐다 주례사 비평하는 평문을 읽을 때면 그들의 비평가 자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영토가 매우 넓은 수필을 형상화에만 묶어 두게 되면 수필의 자유로움이 줄어들게 된다. 수필은 일정함에 매이지 않고 무한히 형식을 변주할 수 있는 야성의 문학이다. 좀 더 다양하고 자유로운 기법이 필요하다. 그래서 때로 대비의 기법을 차용하기도 한다. 음악은 음의 대비로, 그림은 색의 대비로 감동을 전하듯, 수필에서의 대비는 정서의 대비, 캐릭터의 대비, 강약의 대비, 명과 암의 대비, 등으로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
졸작 <사소한 몰락>은 ‘자연이 파괴됨으로 해서 삶의 거대한 몰락이 일어나고 있다.’란 주제를 살리기 위해 ‘사소한 것’과 ‘다 함께 붕괴하는 장엄한 서사 즉 거대한 몰락’을 대비시켰다. 강약의 대비이다. 해서 어휘의 강약, 문맥의 강약에 매우 신경 써야만 했다. 이런 대비 기법의 장점 중 하나는 작품의 긴장성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단 점이다.
또 다른 기법으론 의식의 흐름도 차용한다. 졸작 <무의미하다>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 제임스 조이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이후로 모더니즘 예술에선 이 기법이 어디에나 쓰인다. 쓰인 지 백 년도 넘어 이젠 낡은 수법이라 할지 모르겠으나 한국 수필에선 아직 이 기법이 신세계다. 이 글에서 나는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깨지고 부딪치는 내면, 바이러스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 상황과 극복되지 않는 불안한 삶의 정서를 드러내고자 했다.
새롭게 시도하는 기법도 있다. 미술에서 가져온 콜라주 기법, 데칼코마니 기법 등이다. 신문지를 찢어 붙이듯 신문 기사를 여럿 선택하고 그 위에 공통되는 내 의견을 첨부하여 (색칠하듯) 마무리하는 콜라주 기법. 주제를 가운데 두어 중심대를 만들고 발단과 마무리를 대칭시키는 기법. 얼마나 호응을 얻게 될진 몰라도 아무튼 꾸준히 시도해 볼 생각이다.
이외에도 수다체 (등장인물들의 대화 형식)를 만들거나, 발단 전개 전환 절정 결말의 구성 단계 중 전환 부분이나 절정 부분만 따로 떼어내 형식을 만들기도 한다. 아무튼 창작이란 없던 것을 있게 만드는 작업이기에 많은 형식을 찾아 헤매며, 부담은 크나 결과물이 좋을 때 희열도 크다.
이상 수필의 프레임(형식)에 대해 말해 보았다. 수필 작법이란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인생의 이야기, 서사를 어느 프레임에 넣어 주제를 인상 깊게 만들 것인가, 형식을 고민, 창작하는 것이다. 프레임을 만드는 쉬운 방법엔 액자 형식들도 있다. 첫 단락의 시간이 마지막 단락의 시간과 일치되는, 시간의 액자가 그중 많이 쓰인다. 또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대구로 만들거나, 일치시켜 액자를 만들 수도 있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일치시키는 방법은 박목월 선생님께 배웠다. 시학 시간에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시상의 통일이 잘 안될 때, 첫 행과 마지막 행을 일치시켜 봐라. 이 기법을 나는 수필에 적용한다. 문학 수업 받으며 배운 온갖 것을 수필에 적용해 본다 할까.
지난해 출간한 <<울어다오>>에 이런 여러 형태를 백화점식으로 다 나열해 보았다. 창작 수필, 비창작수필, 칼럼,단수필, 연작수필, 콜라주 수필, 데칼코마니 수필, 기록 수필, 등 여러 모양으로 삶의 소회, 세상을 향한 발언, 의견을 토로해 보았다.
또 하나 염두에 두는 것은 한국어의 특질이다. 한국어로 대화할 때 보통 일인칭은 생략된다. 해서 일인칭을 사용하지 않는 글을 쓰기도 한다. 일인칭을 생략하면 문맥이 부드럽고 읽기의 속도가 빨라진다. 하여 저절로 긴장감을 유지하게 된다.
3 앞으로 가져야 할 관심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오늘도 나는 내재봉소 할머니 돋보기 걸치고 헌옷 수선하듯, 영세업자 정기적금 붓듯 글을 쓰고 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일어나 앉아 쓴다. 비록 글을 쓰고 있는 장소는 책상 앞이지만 상상력은 우주까지 뻗친다. 46년째 날아가고 있는 보이저 1, 2호의 궤적을 그려보고 그 소리도 들어보려 노력한다. 새로워지기 위해, 진부해지지 않으려. SF 수필도 써 보고 싶은데 이젠 아무래도 두뇌의 용량이 달린다. 이런 나를 네 번째 책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서평에서 정치, 경제, 역사, 문화, 과학, 종교, 등의 다층적 층위를 가지고 있는 작가라고 김정화 교수는 소개했다. 자신이 이렇게 다방면으로 박학 (얇을 薄)한 줄은 미처 몰랐다.
이렇게 필사의 노력을 하는 이유는 세상에 말 걸기 위해서이다. 사회와 삶에 대해 독자와 경험을 나누고, 의견을 말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해, 좀 더 나은 삶을 경영해 보고 싶다는 뜻이다. 인생에 대한 의문과 문제를 독자에게 던지는 문학 양식이 꼭 소설만은 아니기에. 수필이 통섭의 문학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수필도 인생의 문제를 제시하고 의문을 던져, 담론을 형성하는 기능까지 감당해야 하지 않을지. 수필이 인생의 결을 다스리는 서정 수필에만 국한된다면 앞으로 문학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까.
수필 쓰는 많은 분이 독자에게 위로와 따뜻함을 전하고자 글을 쓴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하지 못한다. 자신조차 위로 못 하는 주제에 외람되이 누굴 위로하랴 싶어서. 대신 독자와 함께 새로워지고 싶다. 나도 독자도 해이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지나 현재 AI와 협업하는 생성 예술이 도래한 세상에 살며, 수필이 붓 가는 대로 쓰는 신변잡기란 19세기 적 곰팡내 나는 지론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참을 수가 없다. 수필의 지평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더 나은 삶을 위해 독자와 함께 정신을, 삶을 쇄신해 나가려 한다.
공순해의 약력
등단/2009년 수필문학 등단, 2017년 에세이문학 재등단
수상/ 시애틀문학상, 재외동포문학상, 재미수필문학상, 현대수필문학상, 외다수
저서/ 빛으로짠그물, 꽃이피다, 한없이투명에가까운, 울어다오, 외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