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유럽의 김일성’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의 몰락 |
舊 소련의 작가 솔제니친은 1975년 AFL-CIO 제2차 초청 강연에서 “비(非) 인도적인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인간답게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을 남겼다. 공산주의가 단명한 이유는 공산주의의 출발이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해 인간성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1989년 동구권을 휩쓴 공산주의 몰락의 도미노 물결은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독재를 무너뜨렸다. 이에 북한의 김일성·김정일 부자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것으로 알려진 루마니아 공산독재의 몰락을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1989년 12월 25일 루마니아 북부 군(軍)기지 내 임시법정. 대통령이자 국가평의회 의장, 공산당 서기장인 니콜라이 차우셰스쿠(Nicolae Ceausescu·사진)는 사형언도를 받자 “어떻게 국가 최고지도자에게 이럴 수 있느냐. 난 이 재판을 인정 못한다”며 고함을 쳤다. 제1부총리를 거쳐 당서열 2위에 오른 부인 엘레나도 “우리는 인권이 있다. 사람을 이렇게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며 언성을 높였다. 이윽고 이들은 무장군인들에 의해 팔이 등 뒤로 묶인 채 밖으로 끌려 나갔다. 이 때 화면에 엘레나가 찬 화려한 순금 팔찌가 비쳤다. 곧 이어 수십 발의 총성이 울렸다. 24년 간 루마니아를 철권통치하며 7만 명이 넘는 반대파를 학살한 ‘동유럽의 김일성’ 차우셰스쿠의 몰락은 민주화시위가 발생한 지 열흘 만에 이처럼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친인척 40여명 국가 요직에 앉혀 차우셰스쿠는 1918년 루마니아 부농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제화공으로 일하다 15살 때 당시는 불법적인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공산주의 지하운동 시절 루마니아 공산당의 대부 게오르기우 데지(Gheorghe Gheorghiu-Dej)와 형무소에서 만난 이후 그의 충실한 심복이 됐다. 1945년 데지가 처절하리만큼 치열했던 권력투쟁 끝에 실권을 잡자 차우셰스쿠도 권력의 핵심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1965년 데지가 갑자기 사망하자 차우셰스쿠는 서열이 높은 당 간부들을 제거하고 권좌에 올랐다. 차우셰스쿠는 이때부터 북한의 김일성을 모방해 루마니아를 자신의 왕국같이 통치하면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둘렀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친인척 40여 명을 국가 요직에 앉힌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一字無識 엘레나, 화학 전문가 행세 엘레나는 자신의 무식을 감추기 위해 화학분야의 전문가처럼 행세하면서 국내학자들을 시켜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버젓이 출판하기도 했다. 그녀는 매우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었다. 한편 전제통치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경찰과 정보기관은 동생인 니콜라이 안드루타 중장이 손아귀에 움켜쥐고 좌지우지했다. 나머지 남동생 3명 중 일리에는 국방 차관, 이온은 농수산부 차관, 막내 플로레아는 당 기관지 신테이야지(紙) 편집국장으로 차우셰스쿠 족벌정치의 핵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다 매부인 마네아 마네스쿠는 국가평의회 부의장이었으며 며느리인 폴리아니는 청소년 단체인 ‘학생 친위대’ 책임자였다. 차우셰스쿠의 처가 쪽도 이에 뒤지지 않았다. 큰 처남인 게오르그는 전자기계공업부문 책임자였으며, 둘째 처남인 일리에 베르데트는 광업부 차관, 셋째 바실리에 바르불레스쿠는 농업담당 정치국 서기였다. 차우셰스쿠는 그래도 안심이 안 됐는지 무려 2,000여 명의 양자(養子)를 당과 정부 요직에 배치해 놓았다. 차우셰스쿠와 엘레나는 전국의 고아원을 뒤져 똑똑한 아이들을 선발, 양자로 삼고 특수학교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게 한 뒤 요직에다 이들을 앉혔다. 차우셰스쿠의 통치법의 또 하나의 특징은 철저한 개인숭배정책이었다. 그의 생일이 국경일이었으며 이것도 모자라 부인 엘레나의 생일도 국경일로 정했다. TV프로그램의 3분의 1은 거의 그의 활동에 관한 것이었으며, 그를 칭할 때마다 “열정적이고 영명하며 매혹적인 인격의 영원한 우리의 지도자” 운운하는 거리낌 없는 찬사가 거침없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1만2천명 시위대 학살한 비밀경찰 한편 차우셰스쿠는 국민들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반대파를 철저히 탄압하면서 정치적인 대화를 금지하고 거리마다 경찰을 배치, 일상생활까지 감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루마니아에 공산정권이 출범하면서 조직된 비밀경찰(시큐리테이트)은 소련 내무부산하 MVD를 모델로 조직돼 공산당의 일당독재를 위한 국내정치시찰과 반(反)정부 세력의 탄압에 주력했다. 비밀경찰의 규모는 5만 명에 달했으며 이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민간조직까지 총괄하면 70만 명에 달했다. 이는 차우셰스쿠 축출에 기여한 정규 육군의 5배가 넘는 숫자였다. 특히 비밀경찰은 헬기, 탱크, 장갑차 등을 보유해 돌발사태 발생 시 즉각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으로 훈련되어 있었다. 이들은 차우셰스쿠 처형 직전 발생한 민주화 시위에서도 1만2,000여 명의 시위대를 학살해 ‘살육부대’로서의 진가를 발휘했다. 24년 동안의 철권통치를 통해 정치권력을 장악한 차우셰스쿠도 집권 당시에는 ‘자주독립노선’을 내걸고 여타 동구국가와는 다른 정책을 편 역사가 있다. 68년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체코침공 때도 혼자서만 반대, 군대를 파견하지 않는 등 ‘동구의 異端’으로 불리며 서구 각국으로부터 호의를 얻기도 했다. 이 때문에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차우셰스쿠에게 명예기사 작위를 수여한 적도 있었다. 인민대궁전 건설에 80억 달러 들여 그러나 원래 농업국인 루마니아에 70년대 들어 무리한 중공업화를 시행하면서 사정은 빗나가기 시작했다. 외국차관을 얻어 석유 화학 등 중공업화를 도모했으나 오일 쇼크로 실패했고, 외국의 간섭을 싫어한 차우셰스쿠는 110억 달러에 달하는 외채를 청산하기 위해 석유수출에 박차를 가했는데 이를 위해 소비재 생산에 대한 투자를 대폭 삭감하고 국내석유소비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루마니아에서 유일하게 대외경쟁력을 갖춘 제품은 석유관련제품으로, 외채를 갚기 위해 무리한 석유수출장려정책을 시행한 것이었다. 그 결과 루마니아국민들은 극심한 생필품 품귀와 에너지부족으로 추위와 배고픔을 참고 지내지 않으면 안됐다. 극도의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차우셰스쿠가 수도 부쿠레슈티에 ‘인민대궁전’을 짓기 위해 80억 달러를 쏟아 붓자 국민들은 공산정권이 마지막 남은 도덕성마저 잃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동유럽 공산국가들의 몰락과 민주화 바람이 족벌 왕조국가인 루마니아에 스며들면서 차우셰스쿠의 시대착오적인 독재체제에 대한 시민들의 반발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불만은 1989년 12월 16일 티미시와라시(市)에서 발생한 반(反) 차우셰스쿠 시위로 폭발, 24년 간 지속되어온 차우셰스쿠 왕조의 붕괴로 이어졌다. 차우셰스쿠는 1971년 북한 방문 이후 김일성의 통치 스타일을 루마니아에 이식시켜 철혈통치의 기반을 닦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친인척들을 요직에 중용한 것이나 자신과 부인을 ‘국부’, ‘국모’로 치켜세운 기념물을 전국 곳곳에 건립토록 한 건 ‘김일성 따라하기’의 전형적 사례였다. 무리하게 자주외교·자립경제 노선을 펴다 국제사회의 고립과 경제파탄을 자초한 것도 닮은 꼴이다. 권좌에서 밀려나 비참한 최후 유혈사태를 불러왔던 1989년 12월 혁명의 와중에서 총살당한 차우셰스쿠 부부의 시신은 함께 묻히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차우셰스쿠의 묘는 현재 수도인 부쿠레슈티 근교 겐체아(Ghencea) 공동묘지에 있다. 권력의 2인자였던 그의 아내 엘레나와 후계자로 간주됐던 아들 니쿠가 묻힌 곳도 이곳이다. 인근의 장군 묘역과 한눈에 구별되는 겐체아 공동묘지는 그야말로 서민의 묘지이다. 차우셰스쿠 묘에는 현재 옛 공산당 간부들이 세워준 묘비가 하나 있을 뿐이다. 엘레나의 묘에는 이름을 적은 나무십자가 하나만 덜렁 놓여 있다. 그나마도 무덤 위에 쓰러져 있다. 황태자로 군림했던 차우셰스쿠의 아들 니쿠는 체제 붕괴 후 비리혐의로 16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건강이 악화돼 지난 92년 석방됐다. 그러나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다가 죽기 직전에야 옛 동료들의 도움으로 겨우 병원을 찾을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차우셰스쿠 정권의 갑작스런 붕괴는 북한의 김일성·김정일 부자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다. 특히 김정일은 측근들에게 차우셰스쿠의 비참한 최후를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보여주면서 “우리도 잘못되면 인민 손에 죽을 수 있다”는 말을 되풀이했다고 한다.(뉴스위크지 2004년 12월 6일자) 공산주의 독재자가 권좌에서 쫓겨나면 곧 죽음이라는 교훈을 뼛속 깊이 새긴 것이라 할 수 있다. | ||||||
김필재기자 2005-1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