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40년전에 ......
유난히도 춥고 길게 느껴지던 지난 겨울도 계절의 흐름에는 어쩔수없이 슬그머니 물러가며
세월의 법칙에 따라 창밖엔 봄은 시작되고 오늘은 봄비가 질척입니다.
각 학교들도 개학식들을 모두 마치고 새내기들의 하교길 재잘거림도 들립니다.
내 나이도 언세 환갑을 지척에 두었읍니다.
지난달 동기 모임에선 울 졸업 40주년과 갑년 맞이에 대한 색다른 모임 주선건에 대해 의견이
난무했고 모교 개교후 반백년 졸업기념 행사 동참건에도 수많은 의견들을 나누다 헤여졌읍니다.
모두다 그동안 보다는 각별해야 겠다는것엔 이의들이 없는듯 했읍니다.
허나 총동문회 장학기금 조성 총책 중인 곽노준 변호사의 장시간 열띤 중압감 호소와 상호협조
호소에 공감들은 하면서도 제각기의 형편과 입장은 달라 보였고 재반 행사의 구체적 계획엔
입장차들이 큼도 느꼈읍니다.
이 모든것들도 언젠가는 되돌려 뵈는 또 한것들의 하나가 될것임 만을 알고
미루던 숙제 하나를 이제는 해야겠다하고 나 혼자의 공간을 찾아 앉았읍니다.
숙제는 4회 김선배님이 명하신 울기수의 "청운령 고갯길 등하교 사연"을 정리해 올려 달라는
숙제로 많은 고사 끝에 서로가 보태지 않으면 않된다는 뜻에 항복하고 머뭇대다가
힘들여 용기를 내서 끙끙대 갑니다.
그러니까, 딱 40년전 요때쯤 부터 울 10회들은 대전 목동 "청운령"의 넘나들이가 시작 됐나봅니다.
8회가 3학년,9회가 2학년 각 남자4반 여자 4반씩 1000여명과 새내기 울 10회도 남,여 각 4반씩
500여명이 각기 택한 목동 골목길을 지나 중앙초교 앞쯤에 대부분 모여져 청운령을 함께 넘어서
각기의 교실로 흩어졌다가 각자의 하루가 끝나는데로 아침보다는 좀더 긴 오르막을 올라
다시 청운령을 넘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나 봅니다.
1500여명이 거의 매일 아침과 저녁의 고갯길 넘나들이는 그저그런 일상일 뿐였읍니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헤집어 보면 대전 유일의 남녀 공학(한 교실은 아님) 고교란 설램과
기대를 안고 청운령을 넘는것과
대부분 모두가 1차 지원고의 실패로 2차교 합격에 의해 청운령을 지난다는것,
대전의 D(남여)중 두곳 빼곤 모두 공부께나 했고 특히, 군단위 충청권내 중학에선 최우수권에 속했으나 1차 실패의 아품을 숨긴채 그래도 또 다른 다음을 위해 묵묵히 고갯길을 넘나 든다는것은
조금은 특별한 깔닥 고갯길 넘나들이 모습였을것 같읍니다.
여기에 봄이 무르익으며 청운령 고갯길엔 봄 이른 순서대로 꽃들은 피고 벌,나비 날며
낯섬도 다소 가시어 그래도 대전에선 유난히 유명을 떨치던 아카시아꽃 만개의 향이 감미로움을
떨쳐 느껴들때 까지도 언제나 아침 등교길 청운령 고갯마루 정문엔 교련선생님(장교2 하사관1) 휘하에 입학초는 2,3학년 규율가,3학년 야자(현)개시후 부터는 2학년 규율부가 버티고
울 10회 새내기들의 봄을 난도질하곤 했었읍니다.
용케도 골라 내는 복장불량(평창모자,호크 개방,나팔바지,유색상의내복착용,흰카라불량,신발불량등...넘 많아 여자는 기억않남),용의 불량(긴머리,백고등 두발 불량), 태도불량(건방보행,시선불량,못마땅표출등), 글자 그대로 귀에 걸면 귀거리,코에 걸면 코거리식 단속거리 만발은 꼭 기분 풀이식 처럼 무사히 교문 통과와 함께 휴--- 소리만 나곤 했읍니다.
걸리면 어김없이 군대식 갖가지 기합(토끼뜀,오리걸음,손들고꿀어앉기등)이나 엎드려 뻗혀서 뒤통수에서 무수히 스치며 지나가는 동문들과 특히 맘에둔 여동창의 웃음살을 느낄땐
정말 고통스럽곤 했읍니다.
지금들 만나 물어보면 아무도 그랬던 사실외엔 기억 조차 없는 일였지만 그 순간 만큼들은
유독 이성에 관심과 뽐냅이 큰 시기여서 였는지 견디기 힘들었었읍니다.
아마도 중고생 이성교제는 어림없어야 하는 시대 분위기에 유일 남여공학교의 특별한 엄격함이
더해진 탓과 철없이 명받은 규율부 들의 "완장들에 설침"였을것 같읍니다.
그래선지 몰라도 동기생간 연애소식은 잠깐씩 들렸어도 커풀 탄생은 없었고
몇년전 특별한 인연으로 동기간 재혼커플 소식은 딱 한건 들었도 그 외엔 아직도 전 아는바 없는
울 동기들이 된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읍니다.
그렇게 일년을 보내니 불현듯 울 남자들 250여명(4개반)은 도마동 다리건너 유등천변 뚝길 아래
완공도 덜된 신축교사로 여자동기들만을 남기고 쫓긴건지 분가인지도 모른채 3학년이 되는
9회 남자선배님들과 함께 지옥 시내버스행 등교를 시작하며 울들은 2학년이 되었고
11회 또다른 새내기들(6개반 360여명)은 에서 맞이 했던것 같읍니다.
서여고에서, 사범학교에서, 남녀 동기간 생이별 도마동에서,둔산교까지의 격동은 이어져
오늘의 울 동문은 이룩됐고 그 중 15기부터는 무시험 추천배정 입학의 특별한 학제도
담아내며 전국 우수교의 명성을 이룩해 낸 50년이 됐다고 합니다.
이렇게 울들에 청운령 깔딱 고갯길 1년의 추억은 40년의 세월속에 묻히고 요즘은 그래도
1년 청운령을 함께 오르내린 아스라한 추억들이 끈이되어 울 남녀 동기생들은 그때의
설랫음과 아쉬웠음을 안주 삼아 서로의 모임과 행사도 챙겨가며 술한잔도 나눔을
이어가고 있읍니다
다만 어느덧 서로의 노화가 익어버린 탓인지 수줍고 어색하며 뭔지 불편도 했던 남녀간 허물은
사라지고 친해는 졌어도 설렘과 두근댐은 모두 무덤덤해진 우리들 모두를 바라보며
세월의 무상들도 느끼곤 합니다.
다시 생각해도 지난 반백년 50년의 세월은 특히, 울 나라와 함께 울동문님들로는
검정고무신 시대에서 마이카 새대까지를 겪고 무서운 변화와 격동을 감래한 세계역사상 유일족의 한가운데 우뚝서가며 50년을 지나는 싯점에 잠시 울 모두의 머리속 한편에 숨은 "청운령"을
추억해 보고 갑니다.
불편한글 읽어주신 선후배님들께 감사와 송구함도 올립니다.
첫댓글 2부 기대됩니다 선배님!
나도 그렇습니다. 어디 기대가 되는데, 수고 좀 부탁합시다. 자아아
글재주가 빈약해 머리속이 글로 안 이어지니 쓰고 지우고의 반복이 금방 머리에 쥐가 나버리곤 합니다.
그냥 참고용으로만 봐주세요.
너무 잘 쓰려고 애쓰지 말고 편안하게 알고 있는 사연들만 나열해도 좋습니다.로 재주가 있지는 않으나,
나라고
이 글을 좀더 읽기 편하도록 맞춤법과 띄어쓰기만 정리해
다음과 같이 올려봅니다.
활자를 다뤄본 경험으로 가필을 한 것이니, 이렇게 고쳐주면 된다고 할 때
계속되는 최 동문의 글은 요점만 늘어놓아 주어도 좋습니다.
2편, 3편, 4편, 5편을 기다리겠습니다. 꼭 부탁합니다.
[이곳에 모두 실을 분량은 아니므로 페이지를 새로 시작해서 올립니다]
처음 쓴 글에다 밑의 일부분을 추가시킨 듯하여 확인하고,
내가 새로 고쳐 쓴 것도 일단 고쳐두겠습니다.
그러나 기왕 칼을 뽑았으면 제대로 휘둘러야지, 뭐 하다 스톱한 것 같지 않습니까?
천하의 최 동문이 우물쭈물하다 말면 그 누가 이런 걸 알려주겠쏘이까?
좀 실망입니다. 다소 시간을 더 내서 다만 몇 장이라도 채워야겠지요? 연락 기다립니다?
수정한 최 동문 뒷부분까지 다시 보충해 올렸습니다.
그런데 이대로 마치면 이야기가 중간에서 끝난 꼴이군요.
저는 8, 9, 10회는 목동 마지막 세대로 분가의 고통을 모두 겪었기에 이번 기회에 모두 여과시키고
새로운 50년 출발선에 서길 기대했는데 좀 아쉽군요.
다소 시간이 있으니 누군가 다른 분이라도 후속 이야기를 연락하셔도 좋습니다.
누군가 다른 분들이 거들어 후속을 보태 주시면하는 소망 간절 합니다.
또 다른 더 많은 시각적 의견과 느낌들이 더욱 소중하고 값질것 같읍니다.
그래요. 저엉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으나 참 아쉽습니다.
8, 9, 10회, 또 11, 12, 13, 14, 15회, 모두 충남고의 격변기에 고초가 심했지요? 이젠 사랑받아야 됩니다.
지난날 아픔은 되새길 수 있으나 미운 정은 모두 용서해야지요.
다만, 언젠가부터 뺀드부 악기가 증발하고, 그 많던 도서관 책은 어찌된 것이고,
이동훈 미술선생님 작품들은 다 어디로 갔고? 알 만한 정도는 알고 있으나 당시 학생들 말을 듣고 싶은거죠.
아직도 시간은 얼마 남았습니다. --- --- ?